▣ "절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하고(寺寺星張)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늘어섰다(塔塔雁行)" 다는 현장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것들은 곱디고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온전치 못한 것들은 처연한 가슴으로 어루만진'
경주 남산 야외박물관에서의 餘適 ▣
☆ 일시 : 2024년 3월 23일(土).
☆ 산행코스 : 삼릉탐방센터~삼릉~삼릉곡 '미술사의 보고(寶庫)'~상선암~바둑바위~
금오봉~연화대좌~신선암~칠불암~봉수대~열암곡.
☆ 산행거리 : 13km.
寫意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과 정신, 그리고 내용을 담아 실제 그곳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을 뜻하며
희우 진희란 작가께서는
"산행을 통해 얻은 걸 자신만의 해석과 기법을 더해 '사의(寫意)적 산수화'를 개척"하고 계신다.
이 산수화를 하동 화개 쌍계사 성보박물관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하동 양보면 화장암(華藏庵)에서 수행ㆍ정진 중이신 순원(純圓)스님께서
유목민 대장에게 제공해주신 귀한 선물임을 밝혀둡니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남산에는
사지(寺址) 150개소, 불상 129체, 탑 99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부도 8점 등의 수많은 성보가 산재해 있다.
하여 누군가는 ‘불적의 보고’라 했고, 누군가는 ‘한국 최대 노천 박물관’이라 했다.
경주 남산이 학자들에게는 ‘보고’요, ‘박물관’으로 보이겠지만 불자들에게 경주 남산은 불산(佛山)이다.
입구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 곡(三陵溪, 谷)라고 하며, 여름에도 찬 기운이 있어 냉골(冷谷)이라고도 부른다.
역사문화자원과 연계한 탐방로 조성으로
관광객들에게 역사문화 탐방과 더불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탐방로!
월정교부터 삼릉까지 남산 서쪽의 주요 명소를 따라 걷는 길로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벤 일화로 유명한 천관사지, 신라 건국의 역사 왕족이 잠들어 있는 오릉,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 남산의 가장 큰 사찰 남간사지, 가장 큰 탑 창림사지 3층 석탑,
유흥이 가득했던 포석정, 연꽃이 가득한 생태공원 태진지, 천진한 웃음을 가진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삼릉과 경애왕릉 까지 신라의 시작과 끝이 다 담겨 있다
구불구불한 모양이 특징으로 경주 안강 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어
‘안강형 소나무’라고 불리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포토그래퍼들의 성지로 불린다.
아침의 빛내림, 설경, 안개 자욱한 솔숲 등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호젓하게 솔숲을 거닐다보면 이내 삼릉과 마주하게 된다.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3명의 박씨 왕 무덤이라고 전해지나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뒤틀리고 굽은 기이한 모습의 도래솔이 창칼로 무장한 병사처럼 살아 꿈틀댄다.
오랜 세월에 걸쳐 대를 이어 왕릉을 지켜온 '도래솔'을 흑백 수묵화로 채색해봤다
무덤을 둘러싼 소나무를 도래솔이라고 한다.
'도래'는 소나 염소의 고삐에 매단 둥그스름한 고리를 이르는 순 우리말로
그 모양에 빗대어 무덤가 소나무에 도래솔이라는 정겨운 이름이 붙었다.
태어날 때 금줄에 솔가지를 매달 만큼 소나무를 신성시하는 한민족은
죽어서도 우아한 자태와 고상한 기품의 도래솔에 둘러싸여 영원한 휴식을 취한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애불 조각들과 탑재 등을 모아놓았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머리·손발이 잘린 석조여래좌상도
골짜기에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해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삼릉에서 7분 남짓 올라가면 머리가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나온다.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계곡에서 발견되어 현 위치로 옮겨진 불상으로
대좌가 함께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왼쪽 어깨와 양손 및 목에 삼도가 뚜렷할 정도로 훼손이 심해 형태는 알 수 없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많은 불상의 목이 잘려지게 된다.
이는 조선의 폐불정책 및 이른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명당 찾기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두 손이 모두 파괴되어 정확한 수인을 알 수 없으나
대체적인 모습을 볼 때 두 손 모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_부처가 악마를 항복시키는 印相)
*왼손은 펴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펴서 땅을 가리키는 모습*
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적이고 정확한 조각 솜씨와 추상적인 미소는
통일신라와 당나라 때의 불상임을 알 수 있으니
곧 8세기 중엽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즉 사실적 이상주의(寫實的 理想主義)의 완성작으로 일컬어지는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이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도는 불상의 목에 새겨진 세 개의 주름을 말한다.
삼도는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를 나타내며, 번뇌도, 업도, 고도를 의미한다.
불상뿐만 아니라 보살상에도 표현된다.
정병(淨甁)을 들어 관음보살임을 증명하는 보살상은 거의 등신형(等身形, 사람과 비슷한 크기)이다.
입체적 양감과 화불 한분을 모신 보관(寶冠) 아래 도톰 갸름한 얼굴,
전혀 낯설지 않은 입술의 색감 그리고 목에는 희미하나마 영락의 흔적이 있다.
허리를 동여맨 매듭 또한 단정하여 가관이고 무엇보다 압권은 입술이다.
이마와 콧등에 낀 이끼가 흰 분단장을 한 듯하고 볼과 입술은 홍조를 띠고서 반겨준 '마애관음보살상'은
‘신라의 미소, 미스 신라’로 불리웠으나 오랜 풍화작용으로 지금은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불상의 비례와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지물(持物) 등 에서 8세기 후반경의 제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자연 암벽에 음각의 선으로만 새긴 것이어서 조각이라기 보다는 그림에 가깝다.
다듬지 않은 넓은 바위 면에 사바세계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가삼존불'과,
극락으로 왕생하는 중생을 마중 나오시는 신비스런 모습의 '내영아미타여래'를 한 폭의 그림으로 새겼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으며,
좌협시는 바위 면의 균열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이 불상들의 표현은 보살상의 착의법이나 목걸이 장식, 여래상의 소발(素髮 : 민머리)의 표현과 풍만한 신체 표현이
통일신라 초기의 경주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雁鴨池出土金銅三尊板佛)과 가깝게 보이며,
우견 편단의 착의법만 다르다. 따라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제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꽃 공양의 보살상은 드물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 석탑은 삼릉계곡에 무너진 상태로 있던 것을 1930년경 일제가
남산유적조사를 할 때 경주박물관에 옮겨놓았으나 이후 그 확실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석조여래좌상 복원 발굴 조사 때인 2008년 7월에, 석불좌상 남서쪽 아래의 추정되는 절터에서
이 탑의 기단부와 탑신부의 떨어져 나간 파편을 찾음으로써 위치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높이가 216cm이고 1층 옥개석(석탑이나 석등의 위를 덮는 돌)의 한 변 길이 98cm,
1층 탑신 높이가 53cm의 소형석탑으로 복원된 이 석탑은 3층 옥개석과 노반(불탑 꼭대기에 있는
상륜(相輪)의 가장 아랫부분)이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특히, 옥개석의 2층 받침이
1층과 2층은 5단이나 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으로,
추녀마루의 곡선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하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3월 부터 1년 9개월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과 정비를 맡아 말끔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솟은 육계(肉髻)며 둥글둥글하게 새긴 나발(螺髮)이며
아래 세계를 내려다보는 가느스름한 눈, 꼭다문 입술과 살결이 풍만한 턱에서
엄격함과 자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얼굴 표정이다.
윗부분이 조금 상한 채로 불상 뒤에 서 있던 광배는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에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채 대좌 뒤에 방치되었고,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불상의 대좌는 심하게 그을려 있었으며,
불상의 깨어진 부분에 아무런 고증없이 시멘트를 발라놓았었다.
남산지구 대부분의 마애불은 동쪽이나 남쪽을 향해 있는데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드문 경우다
전체가 세련되지 못한 수법의 선각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신체 위에 돋을 새김으로
얼굴만 도드라지게 표현한 도특한 기법으로 조각되었으며,
신라인들의 불국정토를 이어가는 고려 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벽에 새긴 부처의 동그란 얼굴 표정이 하회탈처럼 보이는데,
어떤 사람은 희극인 남희석처럼 생겼다고 한다.
민중에게 친근한 모습이다.
석조여래좌상의 동쪽 등성이는 여러 개의 바위 무리들이 있는데 서 있는 바위,누워 있는 바위,포개져 있는
바위들로 웅장하게 어울려 신비경을 이루고 있다.
이 바위들을 남면에서 보면 두 개의 절벽바위가 수 십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데
그 밑으로 여울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흘러 내린다.
서쪽 것은 허리에서 단을 이루어 다시 둥글둥글 솟아 올랐으므로 그 모양이 기괴하다.
서쪽 절벽바위 높은 곳엔 선각여래불을 새겼고 동쪽 절벽 허리에는 입체로 조각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석조약사여래좌상의 대좌가 놓여있던 자리 뒤에 약 3m의 간격을 두고 지름 30cm 크기의 기둥자리 같은 것이 패어져 있다.
그리고 기와조각들도 흩어져 있었으니 이 불상은 지붕이 덮여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약사여래좌상은 지금 이 곳에 없다.
다음은 약사여래좌상이 이 곳을 떠난 연유를 설명한 글이다.
1915년 가을에 서울 경복궁에서는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가 열렸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년간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개최했던 대규모 박람회였다
이 바람에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일대의 전각들은 마구 헐어지고 그 자리에는
이국적인 서구식 전시 공간들이 속속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많은 구경거리가 있어야 했던 까닭에 조선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특산물과 전시물품의 수집이 이뤄졌고,
여기에 문화재나 미술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공진회장의 야외전시구역을 장식할 목적으로 전국에 흩어진 빈 절터에서 모두 18점에 달하는 전시유물들을
한꺼번에 수집해온 것도 바로 이때였다.
여기에는 지금 국립 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 있는 개성의 남계원 칠층석탑, 원주의 영천사 보제존자사리탑과 천수사 오층석탑,
그리고 이천의 안흥사오층석탑과 같은 석조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물의 수집은 해체운반의 편의성 탓인지 주로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개성과 이천, 그리고 강원도 원주와
충북 충주 등지에서 이뤄졌지만, 멀리는 경북 경주에서 옮겨진 것도 셋이나 되었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에서 발견된 약사여래좌상 한 구와 괘릉 인근의 감산사지에서 찾아낸 석조보살입상 및
석불입상 두 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감산사지에서 옮겨진 석불상 두 구는 광배의 뒤쪽에 제작시기와 연원을
소상하게 적어놓은 명문이 남아 있다 하여 현재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조선총독부는 과연 어떠한 기준으로 수집대상유물을 선정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멀리 떨어진 경주의 유물까지 수집대상에 포함했던 것일까?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해체이전작업에 편리한 것을 우선하여 수집대상을 골라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서 옮겨진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과 감산사지 석불상과 같은 경우에는 비록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해체분할이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쉽사리 서울로 옮겨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표면상으로 드러낸 유물수집의 목적이 박람회장을 치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 이상의 조형미를 지닌 것들이 선정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 출처 [계명대신문 제940호, 2005년 2월 28일자 발췌. 작성자: 이순우] -
이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위에 게시된 삼릉곡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_보물 제666호와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1,300여년 전 신라인들의 불교문화 및 석조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등로 곁의 안내판을 참고하여 유심히 찾은 결과 겨우 만난 부처님으로..
자세히 보면 머리와 어깨 부분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 보이지만
하반신은 새겨져 있지 않은 미완성 작품이라 소개되던 마애불이다.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로 삼릉곡의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웅전과 요사채만 있는 작은 암자이다.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높이는 6m이다.
경주 남산의 좌불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하던 양식의 마애불로 추정된다.
바위 자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어 조각된 불상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있으며, 반쯤 뜬 눈은 속세의 중생을 굽어살펴 보는 것 같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감 있게 깊게 새겨서 돋보이게 했으나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겼다.
이곳에 있는 다른 불상들의 세련되고 단정한 얼굴과는 달리, 이 불상은 약간 투박한 느낌을 준다.
지속적인 풍화로 전체적 균열 및 파손이 진행됨에 따라 대형 낙석사고의 위험이 있어
2022년 6월부터 2024년 연말까지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얼굴은 원만상으로 조각하고 몸은 억센 선으로,
연화대좌는 부드럽고 희미한 선으로 처리하여,
기도하는 중생을 위하여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높이 6m에 달하는 부처님을 보노라면
남산 전체가 불보살의 세계를 옮겨 놓은 듯하다.
부처의 오른쪽 귀 뒤편 바위 틈에는 작은 진달래 나무가 자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진달래꽃을 귀에 꽂은 부처는 언제 또 내려와 세상을 다독이려는가.
이곳에서 옛날 신선들이 모여서 바둑을 두고 놀았다고 한다.
바둑판돌은 지금 찾을 수 없고,
이 바위에서 기우제도 지내왔기에 '무지당'이라고 불려오기도 한다.
바둑바위 남쪽 봉우리는 삼릉곡(냉골) 암봉 정상으로
능선의 끝에 비틀린 소나무와 바위들이 어울려 만든 ‘동양화 풍경’에 다가섰더니
금송정(琴松亭)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世宗實錄地理志>에
"금송정은 금오산 정상에 있다. 玉寶高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세상이 전하기를 옥보고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란 기록이 있다.
높이 13m, 길이 25m쯤 되는 큰 바위로
옛날부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의 병을 낫게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바위이다.
지금도 바위 동쪽면 중앙에 가로 1.44m, 높이 56cm, 깊이 30.3cm 되는 감실이 있다.
감실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켠 촛불에 검게 그을려 있다.
감실 아래에는 높이 80cm에 너비 35cm의 작은 석불입상이 있는데 머리는 없어졌고 여원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토속신앙과 불교가 밀착되어왔음을 보여준다.
경주 남산은 여기 468m의 금오산과 산줄기가 이어지는 495.1m의 고위봉을 합친 걸 칭한다.
연화대좌가 있는 위치를 삼화령이라 칭하는 바,
남산의 봉우리인 금오산, 고위봉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는 지세을 합하여 삼화령(三花領)이라 불렀고,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상반신이 결실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무릎너비 103cm 인
여래좌상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1960년대 순환도로 공사 시에 사라지고
지금은 지름 2m의 연화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곳에 1960년대 말 까지 신선암(神仙庵)이란 작은 암자가 존재했었지만
신라시대에 존재했던 암자의 이름은 어느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아득한 절벽의 바위면을 주형의 감실(龕室)처럼 얕게 판 안에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반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마애보살상으로
주변에 가구의 흔적과 기와편이 산재하고 있어 원래는 목조 전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반가보살상은 신체의 양감이 강조된 조각기법이나 섬세한 세부표현,
그리고 약간 평면적이면서 장식적인 면이 보이는 점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양식이 형식화되어 가는 단계인 8세기 후반 또는 말경의 상으로 추정되며,
오른 발을 내려 놓은 모습에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磨崖菩薩遊戱坐) ’이라고도 불린다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돋을새김 된 기법과 더불어
지정학적 위치가 사방이 툭 트인 산꼭대기에 있어서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뭇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신선암 꼭대기에는 실제로 구름이 지나가는 일이 많은데
용트림 하는 구름을 새긴 위에 조각된 이 마애보살은 언제나 구름위에 앉아 있다.
신선암 보살상은 오랜 수행의 뒤에 발을 풀고 편안한 쉼의 자세로 있는 것인데,
발밑은 온통 구름이니, 구름속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찌 신선(神仙)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라마애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마애불상군이 자리하는 칠불암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칠불(七佛)이 있다.
세속에서 왕위를 잇듯 부처님도 대를 이어 출세를 한다.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 석가모니불이 그것이다.
지금은 석가모니불 시대이며 다음은 미륵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다.
경주 남산에 있는 수많은 불상 중 대표적인 마애불상군으로 가장 크고 높은 곳에 자리하며,
넓은 면의 암벽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본존과 입상의 두 협시보살상을 높은 부조로 표현하였고,
그 앞쪽 사면석주의 각 면에는 비슷한크기의 불좌상을 부조하여 모두 일곱 구(軀)로 구성되어 있다.
삼존상은 절제된 얼굴표정, 적합한 신체 비례와 탄력 넘치는 양감,
그리고 유려한 선의 표현 등에서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각 기술과 예술적 감각,
종교적인 숭고미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삼존상 앞에 놓여 있는 사면석주에는 각 방위를 주재하고 있는 부처님의 형상을 새겼는데,
이곳의 사방불은 이후 전개될 석탑 사방불의 조형(祖形)이 된다는 점에서도 매우 큰 조각사적 의의가 있다.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m 가량되는 돌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四方佛)을 모셨으며, 1.74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다.
좌·우 협시보살은 크기가 같으며,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삼존불 모두 당당한 체구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다른 바위 4면에 새긴 사방불도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원래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이곳 주변에서 당시의 구조물을 짐작케 하는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조각기법 및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칠불은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말~8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1930년대에 남산리 황(黃)씨 할머니가 나물캐러 봉화골로 올라 왔다가
잡목과 칡넝쿨 사이의 웃고 있는 칠불을 발견하였으며,
곧 이어서 주변을 정리하고서 초라한 암자를 지어 살면서 '법연화이라는 法名을 지님서 칠불을 모시다가 작고 한 뒤
대를 이어 아들(김만춘)이 관리를 해온 후 지금에 이르고 있는 바,
그 할머니의 공덕을 기린 공덕비가 마당 한 켠에 서있다
- 월암스님_ 간화선 수행 '3. 화두참구의 자세' 중 1) '간절한 마음' 설법 중의 일부를 발췌했다 -
선하는데 있어서는 ‘간절함(切)’이라는 한 마디가 가장 요긴하다.
간절함은 무엇보다도 힘이 있는 말이니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이 생기게 되면 편한 곳으로 내쳐 마음대로 놀게 되며 못할 짓이 없게 된다.
만일 공부에 마음이 간절하면 방일할 겨를이 있겠는가.
간절하다는 이 한 마디만 알면 옛 스님들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근심할 필요도 없고,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 간절하다는 말을 버리고 따로 불법을 구한다면 모두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로서 형편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엉터리와 참선하는 사람을 어떻게 동일시 할 수 있겠는가.
역대 간화선사들은 한결같이 이마에 간절 “절(切)”자 한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라고 말하고 있다.
간절함이 이론에 있지 않고 생각에 있지 않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절체절명(絶體絶命)으로 우러나는 것을 친절(親切)이라 한다.
친절에는 안의 친절과 밖의 친절이 있다.
안의 친절이란 마음을 밝혀 생사를 벗어나겠다고 하는 간절함이 직접적으로 자신 스스로를 일깨우는 것이다.
즉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친(親)히 간절하게 사무치는 것이 안의 친절이다.
이 안의 친절로 인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선이란 늘 깨어있고 열려있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깨어있는 마음은 안의 친절이요, 열려있는 마음은 밖의 친절로 나타난다.
밖의 친절이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친절이다.
수행자가 제대로 수행한다면 수행 그대로가 인격으로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안의 친절로 인한 사무치는 수행이 그대로 밖의 친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고, 본래부처라고 한다면 나와 너의 분별, 범부와 부처라는 차별은 사라지게 된다.
일체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섬기는 마음이 밖의 친절이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계,
이것이 바로 안과 밖이 서로 사무치는 친절이요, 간절한 마음이다.
칠불 왼쪽에 석등과 탑의 부재로 보이는 돌들을 모아 세운 신라시대의 탑이 있다.
남아있는 유구(遺構)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석경(石經)을 벽면으로 세운
일종의 거대한 석굴사원(石窟寺院)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지금은 전부 파손되어 불상 이외의 유구들이 현존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칠불암 마애불상군 앞쪽에도 불상군이 반듯한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기왓조각들이 산재해 있어서 원래는 불상군이 안에 모셔진 아름다운 목조 전각을
신라인들이 만들어놓았던 것으로 확인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봉수대는 연기나 불을 이용해서 위급함을 전달하던 통신시설로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들로 보아 조선시대 봉수대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이곳의 절터에서 1979년 발견 당시 앞으로 넘어진 채 불두는 없었고
광배(신성함을 표현하는 불상 뒤쪽 장식)는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불두는 2005년 지역의 문화유산해설사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됐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돼 지금은 흩어졌던 불상과 불두·광배가
연꽃잎이 아래위로 장식된 화려한 대좌 위에 자리를 잡았다(2009년 1월).
하지만 각각 흩어진 채 풍파를 겪어 불상의 코는 마모되는 등 각각의 요소들이 조금은 부조화를 이룬다.
불상의 신체가 굴곡 없이 늘씬하고 양어깨에 걸친 얇은 옷 주름이 세련된 점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엎어진 채 땅을 보고 있는 상태로 발견된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 순조롭게 추진되기를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지난해 4월 28일 시작했다.
위 석불좌상 머리를 발견한 후 복원작업을 위해 2007년 이 주변을 조사하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전체 높이가 560㎝에 80t에 달하는 초대형 마애불을 발견한다.
바로 옆의 석불좌상과 비슷한 8~9세기 것인데 불상이 엎어진 채 1,300년가량 방치돼 있던 것이다.
화강암(약 250×190×620㎝)의 한 면을 이용, 고부조(高浮彫)한 것으로
경주 남산에 분포하는 상당수의 마애불이 풍화작용으로 마모된 것과 달리
넘어지면서 코와 땅이 5㎝의 극적인 간격을 이뤘고 그 덕분에 비바람을 피해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불룩 솟아오른 부분)가 높고 민머리(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조각한 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8세기 후반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땅속에 거의 묻혀있는 형태로 약 1,3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손상되지 않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마애불이라는 점 또한 이 불상의 발견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 길고도 긴 이 後記가 작성되게 해주신
광주 희망토요산악회 회장님 이하 및 집행부님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따뜻한 배려에 깊이 감사드리며,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느라
뒤늦게 게시됨을 양해 바랍니다...^^
첫댓글 새롭게 다시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글에 감사 드립니다
'새롭게 다시'라는 멘트엔 동의할 수 없는데요?
우리네 역사 중에서
화려한 시절 못지 않은
아린 시대의 흔적들을
작가님께서도
그 누구 못지 않게
섭렵하고 계시자나요~✍️
아흔아홉 개나 되는 사진이 도배되었슴에..
따분할 수도 있는
後記에 공감하고서!
응원을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뜨건 시선과
살가운 가슴으로 동행하는 산길을 고대해봅니다~👣
유목민님의 후기를 볼 때 마다 산 뿐만이 아닌 우리는 잘 알 수 없는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잘 표현해 주시는 해박한 지식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라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란 불국토 세계'의 일부분을 회장님께서 열정적으로 봉사활동을 해오시는
멋진 <희망토요>와 함께했기에!
더 뜻깊은 여정으로 여김에 더해서..
따분할 수도 있는 後記에
크게 응원해주셔서
몹시도 감사드립니다.
유니끄한 산길이 열릴 시엔
언제라도 동행하게끔
기회를 엿보겠슴돠,
물레방아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