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11.
안동 당산 할매 '느티나무' -삭고 불탄 그루터기에 새 잎을 틔우고.
2021.1.12. 노거수 탐사 11차/ 김해시 노거수 8번
5백 살 안동 당산 할매를 만났다.
2007년에는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있었나보다. 지금은 외과수술을 해서 속이 보이지 않는다.
당산할매와 혼례를 치를 뻔한 나무는 한효아파트 언덕아래 그대로 잘 자라고 있다.
원래 당산할배가 2007년 70여 년 전 고사하고 후계목으로 양버즘나무를 심었다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양버즘나무가 있다. 그런데 불탄 당산할매처럼 속이 다 비었다.
거죽만 남은 양버즘나무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서 있는 양버즘나무가 현재 6거리 안의 마을 모습만큼이나 맘이 아팠다. 옆가지들은 다 잘렸어도 잘린 둥치에서 맹아처럼 하늘 향해 가지들을 쭉쭉 뻗치고 서 있다.
살기 좋아 안동安洞이란다. 지금은 철거대상인지 붉거나 푸른 큰 글씨들로 여기저기 옛날 집 담벼락에 그림처럼 써 두었다.
빈 집들이 많이 보여 마을은 뒤숭숭해 보였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건지... 그리고 반대편에도 공사 중이었다.
봄이 되면 당산할매 파릇파릇 잎 날 때 만나러 가 봐야겠다.
세로 사진이라 싸인이 프로그램 맘대로 크게 들어갔다.ㅜㅜ해서 세로로 찍은 사진은 검정색으로 사인을 넣는다.
세상은 좋아졌는데 싸인을 넣을 때, 글씨체, 글자색, 글의 크기도 맘대로 안 되는...참 나 원. 얼마나 퇴보했는지.
아니 통합을 했으면 더 나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닌지.
사진 올릴 때마다 정말 짜증 난다. 순서도 맘대로 바꿀 수도 없고...찍은 순서대로 나온다.
하나 괜찮은 건 대표 사진을 지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건 예전 플래시에서는 맘대로 바꿀 수 있어서 상관없었다.
작품성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내 사진이 돌아다니는 건 보고 싶지 않다.
당산할매의 후계목으로 심은 나무가 양버즘나무였다고...
다시 후계목으로 지목된 팽나무들이라는데 가까이 가지못해 나무 수종은 확인을 못했다.
여전히 잘 자라고 있다.
노거수이야기 · 11 안동 당산 할매 '느티나무'
삭고 불탄 그루터기에 새잎을 틔우고 |
‘풍수風水’는 자연환경과 사람의 길흉화복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지리이론이다. 중국 동진東晋의 학자인 곽 박 郭璞(276~324)이 『장경葬經』에 남긴 “죽은 사람은 생기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 기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라는 견해가 『주역』의 음양오행과 접목되어 체계화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명당은 산 사람이 머물 양택(집터)인지 죽은 사람이 머물 음택(묘터)인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진다. 음택은 주변 지기의 흐름이나 산형山形, 혈의 배치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명당을 결정짓는다. 양택은 대개 남향 또는 동남향에 배산임수형이면 명당으로 치지만, 이론과 관계없이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이 몸으로 길흉을 밝힌 땅도 많다. 선조들은 그 단서를 대개 마을 이름속에 넣어 두었다. ‘온정리溫井里, ’온산溫山‘ 같은 지역을 시추해 보면 온천이 발견되고, ’연화리蓮花里‘는 꽃잎이 연밥을 감싼 것 같이 아늑한 곳이라는 뜻이다. ’여량餘糧‘은 먹고 남을 만큼 양식이 넉넉한 곳이니 길지요, ’풍곡風谷‘이라는 이름은 골바람이 세차서 그리 권하고 싶지 않다는 충고를 담고 있다. 넉넉하고 편안해서 마을 이름도 안동安洞 그러나 오랜 세월 동김해지역의 중심지였던 안동은 그런 은유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편안한 동네(安洞)’면 됐지, 이름에 더 이상 무슨 겉치레가 필요하냐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실제로 안동은 조선시대부터 부자마을로 꼽혔다. 산자락 과수원에 백과가 영글고 마을 앞 논밭에서 오곡이 일렁이는 여유로운 마을이었다. 신어천은 마을을 살찌웠고 김해와 양산으로 파말마가 오가는 역원驛院도 있었다. 자연히 사람이 모여들었고, 다들 편안하게 살았다. 안동은 조선 중기부터 김해 허씨許氏와 창녕 조씨曺氏, 창녕 장씨張氏등이 세거했는데, 각 문중이 번갈아 천석군을 낼 정도로 부촌이었다. 특히 조선말기 인물이 허 발虛發(1874~1930)은 사회기여에 모범을 보인 대표적인 안동 갑부다. 허발은 고종 31년(1894)20세로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벼슬길 대신 신학문을 선택, 측량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물려받은 가산으로 농사와 도정공장, 유통업 등을 운영하며 재산을 불린 허씨는 1919년 3.1만세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에 거액의 군자금을 대주었고 김해은행 설립, 김해수리조합장, 경상남도 평의원 역임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1922년에는 쌀 5백석과 현금 5만원을 기부해 동상동 부호 박석권朴錫權(1886~?)과 함께 사립 합성학교(현 합성초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초대 교장을 맡아 직접 학생들을 가르친 허 발은 민족의 암흑기에 교육과 지강을 통해 겨레의 새날을 열고자 애쓴 선각자였다. 주민들 정성으로 고사枯死 위기 넘긴 당산나무 안동 6거리에서 북동 방향의 자그마한 골목 안에는 안동의 이런 풍요와 평안을 지켜준 영험한 당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주민들이 ‘할매 당산’이라고 부르는 늙은 느티나무다. 주민들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엄청나게 오래 된 나무”라고 강조한다. 사실 이 나무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나무의 심부深部가 완전히 썩어버린 탓이다. 가슴 높이의 직경이 2m 가까운 거목이, 수피樹皮와 극히 얇은 목질부만 남아 대나무처럼 속이 텅 비었다. 당산나무 바로 옆집에 거주하는 김병조(67)씨는 “이 곳에서 나서 평생 살았지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무 굵기가 그대로다”라면서, 최소 5백 살은 넘었다고 짐작했다. 속이 비어 성장을 멈춘 채 나이만 먹었으므로, 굵기에 비해 훨씬 오래 된 나무라고도 강조했다. 나무 주변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다시 시멘트 벽돌을 둘러놓아 뿌리를 누르고 있다. 시멘트는 걷어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김씨는 “죽어가는 당산나무를 살리기 위해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만든 시설”이라면서 안 그랬으면 벌써 죽었을 거라고 단호한 말투로 고개를 흔들었다. 30여 년 전 어느 겨울 마을을 떠돌며 살던 거지가 공동空洞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나무가 말라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봄 주민들은 산에서 마사 흙을 퍼다 날라 당 위로 드러난 뿌리 부분을 복토했는데, 위치가 경사져서 흙이 자꾸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벽돌을 쌓았다는 것이다. 벽돌 사이에 긴 자연석의 한 면에는 희미하게 ‘O齊’라 음각한 글씨가 보이는데. 시멘트가 발라진 채 흙속에 묻혀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다. 나무 밑둥치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위쪽이 막혀 있어 다행이다. 나무 윗부분에 구멍이 생기면 빗물이 스며들어 부패를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양 옆으로 뻗은 두 개의 큰 가지는 속이 빈 채로 끝이 부러져 나가 상태가 좋지 않다. 김씨는 "가지 끝에서 봉수대처럼 불길이 펄펄 나오는데도 나무속에 물을 뿌릴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고 30년 전을 회상했다. 그러나 현재 상태를 보면 당시의 화재는 나무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불은 나무의 아래쪽에 뚫린 구멍을 흡기구, 가지 끝의 구멍을 연통으로 삼아 서서히 타 들어가, 부식됐던 내부를 완전히 숯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치 탄소 코팅을 한 것 같은 효과 덕분에, 진행되던 부식이 멈추었고 충해蟲害도 막게 된 것이다. 나무는 불이 나기 전에 비해 오히려 건강해졌다. 나무의 안쪽 면은 지금도 새까맣게 탄 당시 모습 그대로다. 숯의 결정이 생생히 살아있어 화재가 30년 전의 사건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주민들은 “안 그래도 고사해가던 나무가 숯덩이가 됐으니 모두들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봄에 흙을 덮어준 것도 살아날 거라고 믿어서라기보다 위령慰靈하는 뜻이었는데, 5월 말쯤 새순이 돋더니 앞이 그 전보다 더 무성해졌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속에는 ‘당산할매’의 영험과 생명력이 보통나무와는 다르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느티나무는 지금도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주간主幹에서 길게 뻗은 두 개의 큰 가지가 땅과 거의 수평을 이뤄 제 무게를 지탱하기만도 힘들어 보인다. 속가지 텅 비었으니 더욱 위태위태하다. 그렇잖아도 지난 89년 태풍에 동쪽 가지 일부가 부러져 민가의 지붕을 덮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양쪽 가지에 지지대를 설치하는 등 안전 조치가 시급한 상태다. 마을은 변해도 토박이 느티나무는 늘 그 자리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안동이 변화의 전기를 맞은 것은 60년대 말이었다. 지난 68년 한일합성 김해공장이 들어서고 한영요엽(73년) 한국스핀돌(74년)등이 잇달아 입주하면서 일대는 공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한일합섬은 김해는 물론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나이어린 소녀들의 저임금 노동력을 바탕으로 삼긴 했으나 ‘수출 한국’의 입지를 다지고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병든 부모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 ‘형제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갖가지 사연을 안고 전국에서 모여든 어린 소녀들이 밤새워 만들어 낸 ‘카시미롱 담요’는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를 달고 세계로 팔려 나갔다. 한일합섬이 세운 한일여자상업고등학교는 주경야독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게 해 줄 ’꿈의 학교‘가 되었고, ’팔도 소녀‘는 그 상징이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논밭을 공장터로 내주고 목돈을 쥐게 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새 삶을 꿈꾸며 마을을 떠났다. 사업이니 투자니 하다가 몽땅 날려먹고 폐인이 된 사람도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창고나 축사까지 대충 손질해 자취방으로 세를 놓았고, 살림방을 터서 가게를 열었다. 살기 편하고 인심 넉넉하던 안동은 그렇게 서서히 사라졌다. 안동 6거리 일대는 그나마 안동의 예전 모습과 예전 사람들이 남은 토박이 마을이다. 그 가운데에도 ‘당산 할매’가 가장 오래된 토박이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당산 느티나무는, 원래는 한 그루가 아닌 부부 당산이었다고 한다. ‘당산 할배’는 70여 년 전 늙어 고사했는데, 원래 자리에 후계목後繼木이 자라고 있다기에 조팔도(52)안동 46통장의 안내를 받아 현장으로 향했다. 할매나무에서 몇 십m 떨어진 마을 경로당 앞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청년시절에 ‘당산나무가 섰던 자리는 그냥 비워두면 안 된다. 당산할매가 앙물殃物이 되어 마을에 해코지를 한다’고 하면서 이 나무를 심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무는 그 사이 아름드리로 자라 있었다. 그런데 수종이 특이하다. 당산나무는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소나무 등이 주종이다. 다른 수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시가 가리킨 나무는 좀 엉뚱했다. 외래수종인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였던 것이다. 장미목 버즘나무과에 속한 나무들은 껍질이 비늘처럼 벗겨지는 특성이 있다. 버즘나무라는 이름도, 그 자국이 피부병인 버즘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북아메리카 원산인 양버즘나무는 일제시대에 도입돼 김해지역에도 14호 국도 구포~진영 구간 등 곳곳에 가로수로 활용되다 도로확장 과정에서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정부가 산림녹화를 강조하던 60~70년대에는 식목일이 다가오면 학교에 꺾꽂이용 나뭇가지를 마련해 가야 했다. 그때 가장 인기 있는 수종이 바로 양버즘이었다. 그만큼 구하기 쉽고 맨땅에 꽂아놔도 살 정도로 활착력이 강했다. 당산할배가 섰던 자리에 양버즘을 심은 것도, 꺾꽂이로 손쉽게 살릴 수 있는 수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무는 결국 당산나무가 되지는 못했다. 수종이 ‘생뚱맞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데다, 인접한 주택에서 그늘과 낙엽이 귀찮다는 이유로 계속 가지를 잘라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도 못한 탓이다. 나무를 심을 당시 조씨의 선친이 ‘작대기라도 꽂아 짝을 맞추는’데 의미를 두었다더니, 말 그대로다. 당산 할매의 배필은 되지 못하고, 남자 친구 정도에 그친 셈이다. 5백 살 당산할매 새신랑 맞겠네 조씨와 장원표(55. 김해시 환경보호봉사대장)씨 등 안동 토박이 주민들은 최근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가칭 ‘당산 할매 보존회’를 만들어 느티나무를 보호하고, 적당한 나무를 찾아 새로 짝을 지어주자는 데 뜻을 모르고 있다. 당산 할매와 혼례를 치르는 나무는 당산 할배로 모시게 된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후보목은 당산 할매 서쪽 골목, 한효아파트 끝자락의 팽나무 군락 가운데 한 그루이다. 그 자리에는 100~200년 수령의 팽나무 여러 그루가 어울려 자라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여론이 모아지면 길일을 택해 당산 할매할배 혼례를 치르고 두 나무에 금줄을 쳐서 당산제를 올릴 계획이다. 안동의 당산제는 매년 정월 보름 행해지다 30여 년 전 공장이 줄줄이 입주하고 주민들이 떠나는 와중에 중단되었다. 이들이 당산제를 되살리려는 이면에는 변화하는 안동 모습에 대한 아쉬움이 작용하고 있다. 공장건물들이 노후화하고 주변이 아파트단지로 개발되면서, 안동공단은 어느새 지역의 흉물로 전락했다. ‘김해 경제의 동맥’ 이라는 찬사 대신 ‘공해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김해시가 안동공단 재개발을 구체화하자, 입주 업체들도 이미 상당수가 공장을 비운 상태다. 마을은 마을대로 공장 뒤편에 가려져 슬럼화하고 있다. 그 옛날 팔도소녀들로 북적이던 골목은 나라 밖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차지했고 병 · 의원은 고사하고 변변한 약국 하나 없는 낙후지역으로 변했다. 자연스럽게 재개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안동공단 이전과 발맞춰 안동 6거리 주변 자연마을을 밀어내고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자는 주장이다. 낙후된 마을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은 바라는 바지만, 옛 안동의 넉넉한 인심과 넘치던 정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없지 않다. “당산을 미신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전통 민속 차원에서, 그리고 주민들의 화합과 결속이라는 시각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조팔도 씨는 혹시나 개발과정에서 당산나무가 너무 늙어 보존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잘려나갈 것을 걱정한다. 당산제를 복원하고 당산나무를 보살펴야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속내도 털어놓았다. 수백 년 동안 마을의 평안을 지켜 주었던 안동 당산나무, 마을이 사라져 공단이 들어서도, 그 공단이 사라지고 아파트로 바뀌어도 당산 할매는 풍요롭고 살기 좋았던 안동의 이정표로 주민들의 가슴 깊이 뿌리내려 서 있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도감) |
**한글로 쳐서 한자를 도감의 본문처럼 작은 글자체로 고쳤는데, 다시 올리니 또 수정해야 해서 힘들어 그냥 올립니다.
앞으로는 그냥 한글 포인트 그대로 올립니다.
김해 노거수 이야기 [김해시 직할동 관내 노거수]
번호 | 수종 | 소재지 | 본수 (본) | 수령 (년) | 수고 (m) | 흉고 직경 (m) | 수관목(m) | 비고 | |
동서 | 남북 | ||||||||
1 | 푸조나무 | 명법동 309 | 1 | 270 | 18 | 117 | 16 | 17 | 시보호수 |
2 | 푸조나무 | 봉황동 270-10 | 1 | 200 | 20 | 149 | 15 | 14 | 시보호수 |
3 | 회화나무 | 동상동 1056-19 | 1 | 250 | 15 | 100 | 10 | 13 | 시보호수 |
4 | 팽나무 | 삼방동 678-3 | 1 | 250 | 13 | 110 | 13 | 15 | 시보호수 |
5 | 은행나무 | 외동 696-7 | 1 | 500 | 15 | 156 | 119 | 19.5 | 시보호수 |
6 | 팽나무 | 외동 1114 | 1 | 230 | 13.5 | 238 | 20 | 18.5 | 시보호수 17편 |
7 | 왕버들외 | 서상동 313 | 30 | 350 | 15 | 219 | 18 | 17 | 19편 |
8 | 느티나무 | 안동 218-1 옆도 | 1 | 500 | 13 | 170 | 18 | 15 | 11편 |
9 | 팽나무 | 어방동 450-4 옆 | 1 | 150 | 14 | 90 | 10 | 10 | |
10 | 은행나무 | 삼계동1374도 | 1 | 400 | 20 | 110 | 15 | 17 | |
11 | 팽나무 | 삼계동 1112-2임 | 1 | 250 | 17 | 104 | 15 | 14 | |
12 | 팽나무 | 삼정동 552-16 | 1 | 250 | 20 | 160 | 17 | 18 | |
13 | 회화나무 | 화목동 923 | 1 | 400 | 11 | 149 | 12 | 8 | |
14 | 은행나무 | 이동 580 | 1 | 120 | 111 | 13 |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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