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기독교 예술사 고대 기독교 예술에 나타나는 그리스 로마 예술의 사실주의적 영향
hanjy9713
2023.09.07. 19:15조회 1
고대 기독교 예술에 나타나는 그리스 로마 예술의 사실주의적 영향
4세기의 기독교 석관 중에, 세상을 떠난 자의 정보를 다양한 형태로 비문에 남겨 놓은 것들이 자주 발견된다. 망자의 전기적 요소가 비문에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5세기 이후로 비문 자체가 없는 석관들이 많이 제작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석관에 비문이 나타났다가 점차로 사라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떤 영향으로 비문이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 대학 교수인 피에르 프리장(Pierre Prigent)이 연구해 놓은 바가 있다. 프리장 교수의 견해를 따르면 기독교인들의 석관에 사실적인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은 이교 장례문화의 영향이다.1)
제정시대의 이교 장례문화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주의적 경향이다. 사실주의적 성향은 비단 제정시대의 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흐름의 결과였다. 로마 엘리트층의 저택 현관방 혹은 중정(中庭, atrium)에는 선조들의 두상을 본뜬 모형 마스크가 벽감(壁龕)에 보관되는 것이 상례였고, 조상의 모형은 가족의 기념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 기원전 2세기에 폴리비우스(Polybius)는 공화정 후기에 이런 종류의 관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놓았다.
“(죽은 이의) 형상(초상조각)은 모양과 색채에서 (죽은 이와) 유사하게 만든 마스크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초상 조각을 공공 축제 기간 동안에 보여 주면서 죽은 이를 경쟁적으로 경배한다. 가족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 죽을 때마다, 체격과 옆모습이 (죽은 자와) 비슷한 자에게 마스크를 쓰게 하여 장례행렬에 참가하도록 한다.”3)
알카메네스의 장례용 부조는 1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4) 이 부조에는 아버지가 자리에 앉아서 소년 아들의 흉상을 왼손으로 들고, 숙연한 태도로 바라보는 모습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은, 충실한 아내이자 덕스러운 어머니의 상징인 망토(palla)를5) 입고 향을 피운다. 부모가 세상을 먼저 떠난 아들을 슬퍼하며 그 죽음을 기념하는 장면이다.6) 아버지의 이름과 신분이 머리 위쪽에 남아 있다.
Q(VINTUS) LOLLIVS ALCAMENES
DEC(URIO) ET DVVMVIR
아버지의 이름은 퀸투스 롤리우스 알카메네스이다. 시 참사회 의원(Decurio)으로 2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의 인물(Duumvir)이기도 하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그의 신분을 보여 주는 단서가 된다. 소년의 옆모습이 또렷하고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부모의 옆모습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이집트 문화에서도 장례용 초상화를 남겨 두는 전통이 있었다. 세상을 떠난 자의 얼굴을 목판에 템페라 기법을 사용하여 그리거나, 천에 수를 놓는 방식으로 남겨 놓곤 하였다.7) 기원후 2세기경, 안티노에(Antinoe)에서 제작된 장례용 패널도 있다[도판 2-3]. 여인은 자주색 옷을 입고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귀걸이로 치장했다. 짙은 눈썹은 약간 둥그스름하고 눈동자가 아름답다. 안티노에에서 발견되어 유럽의 예술 애호가들을 매혹시킨 바 있는 ‘유럽 여인’의 눈과 거의 흡사하다.8) 머리 스타일은 틀어 올려서 땋은 모양으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의 부인인 사비나(Sabina)의 스타일과 동일하다[도판 2-4].9) 안티노에에서 발굴된 미라 중에 약 1,000점 이상이, 그려진 초상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장례용 패널은 이집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10)
2-3. 여인의 초상화
나무 패널에 그림, 이집트의 안티노에, 2세기, 파리 루브르 박물관
2-4.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부인 사비나(88-136년경)
120년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2세기경부터 로마 사회의 평민계층은 장례용 부조에 생전의 직업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드레스덴 국립미술관에는 푸주한의 모습을 담은 장례용 부조가 보관되어 있다.11) 남자는 서서 커다란 도마 위에 놓인 고기를 손질한다. 뒤쪽으로 저울과 칼이 걸려 있다. 부조의 가운데에 돼지머리와 족발, 갈비 등이 보인다. 왼쪽에는 한 여인이 발판이 있는 등받이 의자에 앉아서 경판(經板)에 무언가를 쓴다. 이 여인도 사비나[도판 2-4] 스타일로 머리를 치장했다. 푸줏간에서 일하는 남자와는 대조적으로 여인은 지적인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푸주한의 아내나 혹은 가게의 주인으로 재정을 관리하는 모습처럼 보이는데,12) 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가게의 여주인이라면 장례용 부조에 고용인의 모습을 넣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장례용 부조에는 푸주한 이외에도 빵장수, 등잔 제조업자, 장신구 제조업자, 나무 상인, 조각가, 석공, 건축가, 배 만드는 사람 등 다양한 직업이 표현되었다.13)
로마의 해양 관문의 역할을 했던 오스티아(Ostia)에서 출토된 장례용 패널 중에는 식료품 가게를 배경으로 한 것도 있다.14) 이 패널은 당시 식료품 가게의 정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한다. 여인은 바구니에서 과일을 꺼내 건넨다. 옆에는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바깥에 서 있는 남자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가금류를 판다. 오른쪽 아래에는 판매용 토끼가 토끼장에 갇힌 채 머리를 내밀고 있다. 오스티아(Ostia)의 이솔라 사크라(Isola Sacra) 묘역에서 발굴된 장례용 부조들과 유사한 형식이다. 이솔라 사크라에 있던 테라코타 장례용 부조 중에는 산파의 모습을 새겨 넣은 것도 있다.
2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이 장례용 부조의 비문에는 스크리보니아 아티카(Scribonia Attica)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와 남편을 위해 이것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15) 아기를 분만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작은 의자에 앉아서 산모를 돕고 있는 여인이 아티카인 것 같다. 비문을 세운 아티카가 산파임을 보여 준다. 트라야누스 시대(98~117년)에 제작된 석관 중에는 구두장이와 실 잣는 사람을 돋을새김한 것도 있다[도판 2-5]. 티투스 플라비우스 트로피마스(Titus Flavius Trophimas)의 석관이다. 이 석관은 그리스 출신의 두 친구가 트로피마스에게 증정한 것이다. 구두장이와 방직하는 자는 트로피마스의 직업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 장면의 반대쪽에는 악기 연주자와 춤추는 자가 있는데, 이 장면은 이시스(Isis) 예배와 관계된 장면일 것이다.
2-5. 티투스 플라비우스 트로피마스(Titus Flavius Trophimas)의 석관
98-117년, 오스티아, 디오클레티아누스 국립 박물관
프리장의 설명에 의하면, 이교의 장례용 부조는 대개 돋을새김과 비문이 서로 정확하게 상응한다고 한다.16) 이것은 장례용 부조의 절대 규칙이다. 새겨진 형상과 비문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 자가 세상에서 하던 일을 남아 있는 자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기독교 장례예술이 태어나면서, 특히 돋을새김의 경우 이미 존재하던 이교적인 사실주의적 경향에 영향을 받게 된다.
고인의 지상적인 삶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제시한다든지(elogium) 혹은 얼굴을 새겨 놓거나 살아생전의 직업을 암시하는 상징을 남겨 놓는 것은, 모두 이 땅에서의 공덕과 덕성을 강조하는 이교적인 장례 관습에 영향받은 것이다. 프리장은 기독교적 석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직업의 총 숫자가 약 20여 개에 달한다고 하였다.17) 다양한 직업이 기독교적인 석관에 표현되었지만, 이교적 석관에 비해서 그 비율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아래에서 기독교적인 석관에 망자의 지상적인 삶의 요소가 언급되는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유니우스 바수스(Iunius Bassus)의 석관이 대표적이다.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은 뚜껑이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다[도판 1-2]. 그러나 남아 있는 비문만으로도 유니우스 바수스에 대한 전기적 요소를 대략 알 수 있다. 석관 몸체의 가장 위쪽에 남아 있는 비문이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IVN. BASSUS. VC. QVI VIXIT ANNIS. XLII. MEN. Ⅱ IN IPSA PRAEFECTURA VRBI NEOFITUS IIT AD DEUM. Ⅷ. KAL. SEPT EVSEBIO ET YPATIO. COSS.
42년 2달을 살았던 귀인(貴人, Vir Clarissimus) 유니우스 바수스는(IVNius BASSUS) 그 자신이 시총감(市摠監) 직위에 있을 때에 세례를 받고, 에우세비우스와 이파티우스의 집정관직 하(359년)에서 8월 24일에 하나님께로 갔다.
1-2.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성 베드로 바실리카, 359년, 로마 피오 크리스티아노 박물관
이 비문이 제공해 주는 정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니우스 바수스는 359년 로마의 시총감으로 42년 2달을 살았다. 세례 받고 갓 입교했던 그는 359년 8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350년대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Ⅱ)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대로 이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던 때이다.18) 353년 콘스탄티우스는 왕위 찬탈자인 마그넨티우스(Magnentius)가 허용해 주었던 야간 희생제의를 금지한다.19) 356년 2월에는 희생제의를 드리고 우상 숭배를 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는 칙법을 공포하고, 12월에는 이교 신전을 봉쇄하도록 조처를 내려, 희생제의는 물론 신전 출입조차 금한다.20)
그러나 로마 원로원의 다수는 이교 신앙에 헌신적이었고 새로운 종교에 대해서 냉소적이었다.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표면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고위 관료가 생길 수도 있었지만, 죽음 이후 남기는 석관에는 본래의 신앙이 각인되기 마련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자신의 석관에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도록 한 바수스는 내면적으로 진정한 기독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을 제외하면 4세기를 통틀어 기독교인 고위 관료의 석관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유니우스 바수스는 죽기 얼마 전에 세례를 받은 입교인(neofitus)이었다. 그의 세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예를 따라 해석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337년 죽음을 앞두고 콘스탄티누스가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에우세비오스(Eusebios)에 의해 세례를 받았듯, 유니우스 바수스도 죽기 직전 세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21)
유니우스 바수스에 대한 전기적인 보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티칸의 지하묘지에서 발견된 석관의 뚜껑 한가운데에 그가 시총감(市摠監, Praefectus Urbis Romae)으로 행했던 공적이 찬양된다. 석관의 뚜껑은 거의 파손되어, 좌우측의 부조 중 일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문도 훼손되었지만 대충의 내용은 재구성할 수 있다.
“시총감으로 다스리는 동안, 그는 국가를 위해 사람들을 다스리고 원로원을 이끌며 풍요의 강을 일으켰다. 그의 죽음을 놓고 도시에는 눈물이 끊이지 않았고, 시종들은 그의 관을 운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 짐을 지려 했다. 어머니들과 젊은이들과 나이 든 자들, 전체 군중이 슬피 울었고, 거룩한 항렬(즉 원로원)에 속하는 자들은 토가(toga)를 내려놓고 슬피 울었다. 로마의 장엄한 기념물들도 슬피 우는 것처럼 보였고 거리의 집들도 통곡하는 것 같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고관들이여, 길을 만들라! 오! 존경하는 자들이여, 길을 만들라! 죽음이 이 사람에게 부여한 위상은 고귀하다!”
로마의 시총감은 국가행정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22) 황제는 시총감의 중개를 통해서 원로원과 의사소통을 했다. 프라이펙투스(praefectus, 어떤 기관의 수장이라는 의미)였지만 시총감은 원로원 의원의 상징인 토가를 걸쳤고, 원로원을 인도했으며, 곡물 조달관(praefectus annonae) 등과 함께 도시 행정을 맡기도 했고, 로마에서 100마일 되는 지점에까지 사법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유니우스 바수스가 ‘사람들을 다스리고 원로원을 이끌며 풍요의 강을 일으켰다’는 석관 뚜껑의 비문은 그가 시총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훌륭하게 완수했음을 보여 준다.
뒤이어 묘사되는 바수스의 장례식 풍경은 그의 지도력이 원로원은 물론 대중적으로도 지지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남아 있는 기독교적 석관 중에서 바수스의 석관은, 세상을 떠난 자의 지상적인 삶과 장례의 애가(哀歌)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경우에 해당한다. 석관 몸체의 돋을새김이 깊고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바수스의 활동과 조사(弔辭)가 길게 서술된 것은 그가 로마의 고위 관료였기 때문이다. 이 석관은 4세기 중반 신헬레니즘이 잠시 풍미할 때에 만들어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비문이 남겨진 다른 석관이 있다[도판 2-6]. 이것은 파우스티누스(Faustinus)의 것으로서 석관 몸체와 뚜껑이 모두 남아 있다. 석관 몸체의 가운데에 원반이 있고 원반 안에 부부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얼굴은 개성의 상징이다. 이교의 장례예술에서 얼굴을 자주 표현한 것은 얼굴이 사람의 지상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남편 파우스티누스는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시선은 부인 쪽으로 향한다.
가느다란 눈과 통통한 볼 등 얼굴의 특징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부인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부인은 오른손으로 남편의 어깨를 잡고 약간 기댄 채로 남편 쪽으로 몸을 돌린 다정한 자세이다. 부인의 얼굴은 돋을새김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파우스티누스가 먼저 죽은 뒤에 석관이 만들어졌고 여자의 얼굴은 미완으로 남겨졌지만 부인이 남편을 따라 영면(永眠)하고 합장된 후 미처 부인의 얼굴을 새겨 넣지 못했던 것 같다.
원반 아래에는 목가적 장면이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목동이 앉아서 염소의 젖을 짜며, 오른쪽의 목동은 당나귀와 함께 있다. 몸체의 좌우에는 물결무늬가 S자형으로 새겨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기둥이 자리 잡고 있다. 뚜껑의 좌우측에는 각각 네 마리의 돌고래가 가운데 쪽을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 파우스티누스에 대한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DIPOSITI FAVSTINVS Ⅲ IDVS AVG(VSTAS) CONST
ANTIO AVG(VSTO) G CI
C NTANTIO Ⅱ CON
S(VLIBV)S IN PACE
파우스티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두 번째 집정관직하(353년)에서 8월 11일 안식을 얻었다.
2-6. 파우스티누스의 석관
353년, 로마 피오 크리스티아노 박물관
353년에 공포된 야간 희생제의 금지법은 정제(正帝)인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의 여섯 번째 집정관직과 부제(副帝)인 카이사르(Caesar) 콘스탄티누스 갈루스의 두 번째 집정관직하(CONSTANTIO A. Ⅵ ET CASE. Ⅱ CONSS)에서 공포되었다.23) 따라서 위의 비문에 나오는 C NTANTIO Ⅱ는 콘스탄티우스 갈루스(Gallus)의 두 번째 집정관직으로 읽어야 하고, 비문의 연대는 353년이 된다. 비문 아랫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몸체의 원반 안에 부인의 얼굴이 미완인 채로 남아 있는 것과 관계있다.
다시 말해 부인의 사망 시에 기일을 적어 두려고 남겨 둔 공백이지만 잊은 탓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이유인지 부인이 남편의 길을 따른 후에 방치되고 말았다. 비문의 첫 단어가 dipositi로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본래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이름과 기일을 모두 기록할 요량이었음을 보여 준다.
파우스티누스의 석관은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있지만 이 석관이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처럼 기독교적 석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비문은 파우스티누스의 사망일에 대한 정보만 제공할 뿐, 다른 전기적 요소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뚜껑의 돌고래 문양이나 몸체의 부조에 나타난 목가적인 장면은 본래 이교적인 주제로서 기독교 석관에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만을 놓고서 이 석관이 기독교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몇몇 보충적인 요소를 통해 이 석관이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몸체 좌우에는 물결 형상의 S자 무늬가 있다. 물은 성경에서 세례나 생명 등을 상징하였으며, 따라서 S자 문양은 4세기의 기독교적 석관에서 애용되던 문양이다.
물결 문양을 가장 애용하던 지역은 북아프리카였는데, 로마나 아를르의 경우 보다 저렴한 석관의 제작을 위해 돋을새김 대신에 물결문양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이 석관이 프라에텍스타투스(Praetextatus)의 카타콤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카타콤은 원래 2세기에 시작된 이교의 묘지였지만, 막시무스(Maximus), 쿠이리누스(Quirinus) 등 순교자들이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24) 파우스티누스의 석관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망자의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인 파케(in pace)라는 표현도 파우스티누스의 기독교적 신앙을 뒷받침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표현은 기독교인들의 비문에서 흔히 발견되는 단어이다. 동방의 경우에는 같은 의미인 에이레네(eiren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2-7. 그리스도와 사도들
콘코르디우스의 석관, 레잘리스캉, 385-390년, 아를르 고대 박물관
아를르의 레잘리스캉의 성 호노라투스(Honoratus) 교회에 놓여 있던 콘코르디우스(Concordius)의 석관에도 비문이 남아 있다[도판 2-7]. 콘코르디우스는 아를르 교회의 감독(episcopus)으로 약 385년경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석관은 콘스탄티노플 앞바다에 있는 마르마라(Marmara) 해(海)의 프로이코네소스(Proiconesos)산(産)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양식적으로는 4세기 말경에 시작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전형적인 유형에 속한다. 그리스도는 한가운데 의자에 앉아서 두루마리를 들고 제자들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오른쪽에 마태와 마가가 먼저 앉아 있고 4명의 제자들이 뒤따른다.25) 왼쪽에는 누가와 요한이 먼저 제시되고 4명의 다른 제자들이 나타난다.
제자들의 뒤쪽에는 원주가 있고 원주 위에는 대륜(臺輪)이 놓여 있다. 양옆의 박공벽 아래, 오른쪽에 세 명의 여자와 왼쪽에 세 명의 남자가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철학수업을 방청한다. 제자들 머리 사이의 원경에는 8명 인물의 옆모습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석관의 뚜껑 가운데에는 비문이 적혀 있고, 양쪽에는 6명씩 12명의 제자들이 두루마리를 들거나 읽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참된 철학인26) 복음을 연구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콘코르디우스의 석관에서 두드러지는 요소이다. 뚜껑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도판 2-8].
INTEGER ADQVE PIVS VITA ET CORPORE PVRVS
AETERNO HIC POSITVS VIVIT CONCORDIVUS AEVO
QVI TENERIS PRIMVM MINISTRVM FVLSIT IN ANNIS
POST ETIAM LECTUS CAELESTI LEGE SACERDOS
TRIGENTA ET GEMINOS DECIM VIX REDDIDIT ANNOS
HANC CITO SIDEREAM RAPTVM OMNIPOTENTIS IN AVLAM
ET MATER BLANDA ET FRATER SINE FVNERE QVAERVNT
삶과 마찬가지로 육체로도 흠 없고 경건하며 순전한 콘코르디우스는 여기 놓여서 영원히 살아 있다. 그는 먼저, 젊은 시절에 (교회의) 사역을 했고, 이후 하늘의 법에 의해 감독으로 선출되었다(30년 동안 사역을 했고, 어머니 블란다와 그의 형제가 장례식 없이 준비한 전능자의 빛나는 정원으로 편안하게 갔다).
2-8. 콘코르디우스의 석관의 비문(도판 2-7의 세부)
콘코르디우스의 몸은 생기가 없지만 그는 호노라투스 교회에 안치되어 ‘영원히 살아 있다.’ 비문은 콘코르디우스가 이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보다는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지를 더 중시한다. 육체의 나이는 생략했지만 성역(聖役)의 연수를 남겨 놓은 까닭이다. 그의 공적은 육체적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영적인 삶에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 비문은 한 인간의 삶의 요약된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 블란다(Blanda)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콘코르디우스를 복음의 길로 인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모니카(Monica)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관계가 비슷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 모니카가 위대한 라틴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인 지주였던 것처럼, 콘코르디우스가 아를르의 호노라투스 교회에 안장된 첫 번째 감독이 된 것은,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와 조언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2-9. 히드리아 테르툴라와 그의 딸 악시아 아엘리아나의 석관
375-400년경, 아를르 고대 박물관
갈리아(Gallia)의 아렐라테(Arelate, 아를르의 로마 시대 지명)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 같다. 아를르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블란다의 이름이 언급되는 콘코르디우스의 석관 외에도, 4세기에 만들어진 히드리아 테르툴라(Hydria Tertulla)와 악시아 아엘리아나(Axia Aeliana)라는 모녀의 석관이 전시되어 있다[도판 2-9]. 석관 몸체는 일곱 개의 감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여섯 명의 사도들이 부조되어 있으나 머리 부분이 모두 훼손되었다. 가운데 감실에는 그리스도가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고, 좌우측에 세 명씩 있는 사도들도 그리스도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 유형은 4세기 말경의 전형적인 양식이므로, 이 석관은 대략적으로 375~4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뚜껑의 오른쪽 면에는 어머니 히드리아 테르툴라의 상반신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 상당 부분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27) 왼쪽 면에는 딸인 악시아 아엘리아나의 상반신과 유다의 입맞춤 장면이 있다. 가운데에는 남편인 테렌티우스 무세우스(Terentius Museus)의 이름으로 남겨 놓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도판 2-11].
[네이버 지식백과] 고대 기독교 예술에 나타나는 그리스 로마 예술의 사실주의적 영향 (고대 기독교 예술사, 남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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