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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휘의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의 서평입니다.
<시와 문화> 2018년 여름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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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나라
―최휘,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 시로여는세상, 2018
이영숙
Ⅰ
소설에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가 있다면, 시에는 최휘의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인 ‘경선’과 시집의 주인공인 ‘나’들은 한 장의 데칼코마니다. 캐릭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소설은 그렇다 쳐도, 시에 캐릭터가 웬 말이냐 하겠지만, 시집을 읽어보면 느낌이 팍 온다. ‘경선’이 “어영부영 은근슬쩍 뭐 하는 거”에 질색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피터지게 싸”워서라도 지키려고 고집을 부리는 열네 살이듯, 열두 살이고 열네 살이며 스물하나이고 결혼 이십 년차인 ‘나’들 역시 소녀다운 상상력과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과 냉소적인 태도에 다름이 없다. 우연일 수도 있고, 시집 중에 「장남이 돌아왔다」라는 시가 있는 것을 보면 2004년에 출간된 『오빠가 돌아왔다』의 오마주일 수도 있는 가운데, 그러나 소설이 “언니가 간다.”를 마지막 문장으로 하면서 ‘경선’의 성장 가능성을 향해 열린다면, 시는 “밥밥 씨바블! 이런 주문을 외”워 “뼈가 줄어들”(「밥밥 씨바블」)게 함으로써 ‘나’들의 성장판을 닫아버린다. 되바라지고 도발적이며 장난기와 불량기를 동시에 지닌 십대의 전염성 강한 언어들이 시집 한 권을 들었다 놓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나’들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자꾸 뭉쳐 다녔다 동전처럼 함께 굴러다녔다 홍도 갈까? 우리는 홍도 4인방이 되었다
퇴근을 하면 홍도 4인방은 벌써 내 방에 들어앉아 고스톱을 치고 패를 떼고 속옷만 입고 집 안을 돌아다녔고 내 방은 밥물
처럼 끓어 넘쳤다
우리는 스물 몇 살이었고 솔로였고 배달음식으로 방바닥을 어질렀고 홍도는 가지 않고 내 방은 자꾸 우리 방이 되고 방에서
실컷 살고 방을 정복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봉투를 묶으며 홍도는 아직 가지 않고
홍도에 갈까 주문처럼 말하면 우리는 귀퉁이마다 앉아 미간을 찌푸리며 갈매기 눈썹을 그렸고 방 안이 출렁출렁하고 홍도
4인방은 치마를 펄럭이며 뿔뿔이 흩어지곤 다시 돌아오고 홍도는 아직 가지 않고
방을 먼저 가지면 남자도 먼저 갖고 아이도 먼저 갖고 집도 먼저 갖게 될지도 몰라 아무 데나 창문을 뚫고 거기에 우리의
노을을 버렸고 청춘이 그렇게 나누어질 때
홍도는 아직 가지도 않고 어느 날 홍도 4인방만 정전처럼 툭 끊겨, 밥 한번 먹자! 통신만 하다 코끝이 보이는 각도를 알게 되고
―「홍도 4인방」 전문
나이를 먹었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스물 몇 살이었”지만 ‘홍도 4인방’은 성인이었을망정 아직 어른은 아니다. “홍도 갈까?”라는 말과 의식과 행동이 함께 가는 동안은 오히려 소녀였다. “밥물처럼 끓어 넘쳤”던 그들. “홍도에 갈까 주문처럼 말하면” “귀퉁이마다 앉아 미간을 찌푸리며 갈매기 눈썹을 그”리는 ‘홍도 4인방’은 소녀와 어른의 경계에 있었지만 아직도 어른은 아니었다. “홍도는 아직 가지 않”았어도 “치마를 펄럭이며 뿔뿔이 흩어지곤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과 “남자”와 “아이”와 “집”을 “갖게” 되는 일에 눈을 뜨고, “어느 날”부터인가 “밥 한번 먹자! 통신만 하다 코끝이 보이는 각도를 알게 되”면서 ‘홍도 4인방’은 비로소 소녀를 벗고 어른이 된다. 끝내 홍도를 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데나 창문을 뚫고 거기에 우리의 노을을 버”리듯 홍도에 가는 꿈을 버렸기 때문이다. “꽁초를 던지는 유월, 바람도 꽁초마저 끝내주게 피우는 유월, 피시방이 그랬던 것처럼 이 짓도 곧 싱거워질 것 같은 유월,”(「담배가 꽃피는 계절」)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대다수가 이렇게 싱겁게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 아닌 것 같다. “뭐라도 끝났으면 좋겠고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사각」)는 게 어른의 불투명하고 뭔가 미진한 감정이다. 뭔가는 끝나지 않고 뭔가는 더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지속되는 “오늘이란” “아침마다 쌓이는 교재 같”고 “그 속에 샛노랗게 붙인 포스트잇 같”(「방문교사」)다. 이런 ‘오늘’이 무한반복인 어른에게 말과 의식과 행동은 함께 가지 않는다. 어른 속에 잔상처럼 남아 있는 소녀가 한심스러워 하며 말한다. “니가 심심한 인간이란 걸 이젠 좀 알아야 하지 않겠니?”(「해롱다리의 입장 표명」)
나는 불륜이야 침을 퉤퉤 뱉고 머리채를 휘어잡아봐 밤낮없이 나쁜 평판을 흩뿌리고 다닐 거야 벚꽃 화르르 핀 가지 흔들어봐 그 아래로 지나가 봐 그래 지루하고 심심한 것들을 다 죽여주고 나면 영락없이 내 살림살이가 패대기쳐졌어 가장 불안한 건
살림이라는 말, 내가 평생 쓸고 닦았던 건 보따리 하나 나를 악기에 대보자면 타악기쯤 될까 이빨을 꽉 깨물며 바드득 이년 저년
달라붙어 속옷까지 찢어놓는 부드득 수십 년 지나도 생각만 하면 치를 떠는 부르르 그래도 네 목덜미를 지나 어깨를 지나 손등
을 지나 발등으로 떨어지는 꽃잎 한 장 느껴봐 소매 끄트머리만 잡고 나풀거리는 분홍 따윈 필요 없어 다리몽댕이가 부러져야
한다고 경고하는 자들을 향해 바람처럼 궁둥이를 까 내릴 거야 나 지금 너희들의 불안을 막 흔들고 있어 어때? 뼛가루가 강물로
흘러가기 전에 우리 짧게, 벚꽃 아래서 한 잔
―「봄밤, 벚꽃 아래서 한 잔」 전문
이 강렬한 시의 주체는 “불륜”이라는 관념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불륜을 저지른 남녀에 따라붙는 세속적인 풍경이 아니다. “침을 퉤퉤 뱉고 머리채를 휘어잡”히고, “살림살이가 패대기쳐”지고, “타악기”처럼 두드려 맞고, “이년 저년 달라붙어 속옷까지 찧어놓는”, “다리몽댕이가 부러져야 한다고 경고”하는 ‘불륜’을 둘러싼 생체 에너지들을 빌려왔을 뿐이다. 그렇게 보자면 ‘불륜’은 “지루하고 심심한 것들을 다 죽여주”는 최휘식 버전의 테러다. “벚꽃 화르르 핀 가지 흔들어” 보고, “그 아래로 지나가” 보라고 권고하는 ‘불륜’에게 “목덜미를 지나 어깨를 지나 손등을 지나 발등으로 떨어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는 “수십 년 지나도 생각만 하면 치를 떠는 부르르”의 어른의 생의 무게와 같다. “바람처럼 궁둥이를 까 내”린 채 ‘불륜’은 “너희들의 불안을 막 흔들고 있”다. ‘너희들의 불안’이란 우리들의 불안이며, ‘지루하고 심심한’ 어른들의 불안이며, 종국에는 “뼛가루가 강물로 흘러가”고야 말 죽음을 사는 자들의 불안이다. ‘불륜’이 ‘불안을 막 흔들’ 때 상투적인 일상(“소매 끄트머리만 잡고 나풀거리는 분홍”)은 ‘패대기쳐’진다. ‘불륜’은 “우리 짧게, 벚꽃 아래서 한 잔”하자는 감각적 도발을 통해 ‘지루하고 심심한’ 어른들의 세계를 ‘다 죽여주고’ 그 세계로의 진입을 스스로 차단한다. ‘불륜’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반어적인 자기방어기제다.
실상 시집의 도처에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나’들의 목소리는 합창처럼 울려 퍼진다. 시편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소녀들의 나라’라는 잠재적 폭발력을 각각 내장하고 있다. 어른들의 세계는 이곳으로 당분간 쳐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Ⅱ
시인에게 시는 생의 또 다른 현장이다. 물론 동떨어진 두 개의 세계가 아니라 시의 밖과 시의 안의 생은 유기적으로 맺어져있다. 시적 개성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인의 일상과 시가 같이 가는 것은 물론이요, 사상이나 의식도 대체로 시와 행보를 같이 한다. 시인의 일상이나 사고에 변화가 있을 때 시적 테마나 심지어 창작방법 등이 변하는 것이 그 한 예다. 다만 시 밖에서 영위되는 시인의 생이 우리에게 익명과 추상에 둘러싸인 타자의 것이라면, 시 안에서 펼쳐지는 시인의 생은 실질과 구체의 우리 자신으로 환원 가능한 주체가 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고도의 개인주의시대에도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 중 하나다. 이를 위하여 먼저 시가 발화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은 언제나 유용하다. 곧 ‘나’들의 발아점이다.
어린 고사리손 하나가 나를 둥글게 둥글게 굴리다가 눈, 사람! 이렇게 부르다가 냉동실 속에 가두었다
여름이 와도 넌 안전해
추위와 어둠은 견디기에 힘이 들었다 털목도리 하나 두르지 못한 채 이번 생이 끝나리라 정수리가 흘러내리고 어깨가 움푹
패였던 대낮의 눈사람들은 다시 눈발이 되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몸통에 새기는 동안 나는 전지적 작가시점이 가능해진다
여기는 제5의 계절
이곳은 늑대를 타고 하얀 밤을 달리는 북방의 들판 발등이 녹고 등짝이 흘러내리고 바둑알 두 개가 떨어지고 눈이 찔린 것
처럼 아프다가 바닥이 흥건해지고 왼쪽 어깨가 기우뚱해지는 곳
―「이상하고 아름다운」 부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한에 있어서 자신의 본성(“눈발”)을 보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외부적 조건(심지어는 “어린 고사리손 하나”)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환경(“눈, 사람!”이 되어 “냉동실 속”)에 놓일 수도 있다. 때로 그것은 “안전”을 보장하지만 반대급부(“추위와 어둠”)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수가 되기도 한다. 흔한 예로, 길들여짐으로써 타율적 존재가 되는 우리들의 생이 그것이다. “장손은 어떻게 장손다워지는가/ 장손은 어쨌든 장손다워야 한다/ 고로 나는 어른인가?”(「장손인가?」) 했을 때의 그 ‘장손’처럼.
시가 초대하는 대로 “냉동실 속에” 들어가 앉아 본다. 그렇구나. “추위와 어둠은 견디기에 힘이” 든다. “여름이 와도 넌 안전해”, 이 말이 “털목도리 하나 두르지 못한 채 이번 생이 끝나리라”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눈, 사람!’의 진정한 생애란 ‘털목도리“를 목에 두르는 정점을 지나 설혹 “정수리가 흘러내리고 어깨가 움푹 패”일지라도 눈사람답게 살아보는 것이 아니던가. 냉동실에서 여름을 안전하게 보냈다 한들 ‘눈, 사람!’이 다시 ‘눈’이 되거나 ‘사람’이 될 리 없다. 냉동실에서 이리저리 채이다가 어떤 다른 손길에 의해 끄집어내져 개수대에서 녹아버리기 십상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대낮의 눈사람”을 꿈꾸는 데서 더 나아가 “눈발”이라는 본성으로 살기를 희구하는 “나”는 “생각”을 “몸통에 새기는” 실천적 행위를 거쳐 “전지적 작가시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곧 앞서의 ‘지루하고 심심한 것’, 혹은 ‘안전’과 안주에 대한 저항과 거부를 통해 ‘눈발’을 위한 모험과 도전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늑대를 타고 하얀 밤을 달리는 북방의 들판”에서 ‘나’는 기꺼이 “아프”게 녹아내린다. 자연스레 ‘전지적 작가시점’은 3인칭 서술자의 관점이라는 시선을 넘어 시의 주체들이 갖는 모든 소녀적 권력의 장악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제5의 계절” 속에서 ‘소녀들의 나라’가 발아된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예쁜 열두 살이 튀어나와 견딜 수 없이 기뻐요
소녀나라 장바구니에 무작정 쓸어 담는 이 맛
장바구니 가득 쓸어 담은 물건을 그냥 두고 나와도 괜찮은 밤
지금 내 기분은 만 원이나 만이천 원 정도
어제 입은 옷은 또 입고 싶지 않죠
반품하면 배송비를 빼고 나머지는 적립금으로 전환한대요
적립금에 발목 잡혀 적립하는 소녀
어떤 이렇게 사는 건 잘 못 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럴 땐 올여름 가장 핫한 빨간 틴트 사천 원을 클릭해요
사천 원짜리 기분이 택배로 도착하면
귓구멍에 빨간 바람이 들어가 또 어지러울까요
―「소녀들의 나라」 부분
어떤 장막도, 은유도, 고뇌도 없는 쇼핑은 ‘소녀들’의 특권이고, ‘나’와 직렬로 연결되어 있는 ‘소녀나라’ 쇼핑몰은 기쁨의 천국이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예쁜 열두 살”의 모델이 “튀어나와” 기쁘고, “장바구니에 무작정 쓸어 담”을 수 있어서 기쁘고, “가득 쓸어 담은 물건을 그냥 두고 나와도 괜찮”아서 기쁘다. “반품하면 배송비를 빼고 나머지는 적립금으로 전환”해줘서 기쁘고(배송비를 손해 본다는 셈법 따위는 염두에도 없고), “어쩜 이렇게 사는 건 잘 못 사는 것 같기도”한, 잠깐 스치는 그늘을 냉큼 지워주는 “올여름 가장 핫한 빨간 틴트”가 있어서 기쁘다. “기분”은 과장도 축소도 없이 구입 금액에 비례한다. 그러나 “만 원이나 만이천 원 정도”의 기분과 “사천 원짜리 기분”에 우열은 없다. 소녀다운 싫증(“어제 입은 옷은 또 입고 싶지 않죠”)과 변덕(“반품”)은 즉흥적이고, 일회적이다. “우리 학교 얼짱인 그 애와 붙어다니면 이쁜 것들이 되었어/ 침을 찍찍 뱉지도 짝다리를 짚지도 않았지만 발랑 까진 것들이 되었어”(「빨간 나이키」)라는 어조는 ‘소녀들’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팔짱을 끼고 깔깔대”고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가”고 “틴트를 돌려가며 바르는”(「스물한 살, 청」) ‘스물한 살’들의 나날도 ‘소녀들의 나라’의 일부다.
가식도 군더더기도 없는 ‘소녀들의 나라’는 수다와 놀이의 세계가 근친이다. “이 말을 저쪽에 저 말을 이쪽에 전하다가 그만 입이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지더라도 “떠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토할 것 같”(「말들은 먼 곳처럼」)기 때문이다. “나 아니면 아무도 모를 방 안의 일들이 두려워 수화기를 붙들고(「자취」)” 자신이 발견한 생의 비의를 덜어내기도 한다. 무거워지는 것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헝클어진 나뭇가지에 매달린 끈적한 물방울이 보였다/ 이응,/ 나는 발음했다/ 형태를 이룬 것들이 모여들고 재잘거리고 행진했다/ 각자 제 힘만큼 숲 속을 휘젓고 다녔다”(「꼬랑지 같은 그림자 한 토막이 굴러왔다」)와 같이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고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들과 함께 ‘행진’하고 ‘휘젓고 다’니는 동안에도 수다와 놀이는 동행한다. “자두 먹고 자두 되나/ 자두같이 시어빠져 침 흘리며 자두 되나/ 츱츱, 침 빨아들이며 자두자두 자두밭/ 나뭇가지가 침대 쪽으로 휘청,/ 자두 향이 빨갛게 번진다”(「자두자두」)에 이르면 ‘자두’라는 과일은 ‘잠자도 되나’와 ‘자두가 되어도 되나’의 의미를 오가며 변주된다. 과일로 읽어도 되고 잠으로 읽어도 되는 동음이의어적인 놀이는 “벤치는 왜 자꾸 벤치를 낳을까?”(「벤치 혹은 연애」) 같은 몽상과, “날고 또 날고 다시 날고 자꾸 날면 저렇게 많은 날개가 생겨나는 걸까”(「참새가 떼로 날자」) 같은 동경을 통해 한없이 가벼워지려고 한다. 삶의 중력과도 같은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지 않기 위해, 혹은 벗어나기 위해.
Ⅲ
그날 우리는 막 나온 뜨끈한 만둣국 앞에 앉아 있었어요
대접 안에는 김이 펄펄 솟았고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
하얀 눈발이 들이쳤어요
식당 유리창에 성에가 서리고
―아버지 식기 전에 드세요
아니, 식기 전에 요양원에 가세요
이 뜨끈한 만둣국을 잡수시고
노랗고 반지르르한 고명을 숟가락으로 헤집으며
아버지, 혼자 가세요
사골국물이 몇 번이나 입술을 지져도
아버지
요양 3급을 받기 전에 우린 아버지를
새로 빚어야 해요
이 서류 속의 아버지가 이제 진짜 아버지예요
동사무소 요양병원 요양사……
줄줄이 매달린 감자 씨알 같은 시간들은 이제 없어요
아버지는 이제 뼛속까지 독거노인이에요
그 뜨거운 만둣국을 드시며
올라가지 않는 오른팔을 힘겹게 들어 올리시며
발음되지 않는 말을 간신히 끌어 올리시며
아버지
―하이, 띵
―「파이팅」 전문
‘식당에서 만둣국을 먹는 아버지와 자식들’로 요약되는 이 시에는 최소한 세 개의 장면이 포개져 있다. “하얀 눈발이” 날리는 식당 밖의 날씨, “막 나온 뜨끈한 만둣국”을 먹는 “아버지”와 “우리”, 그리고 ‘우리’의 내면독백이 그것이다. 정황상으로 이 시는 몸의 오른쪽에 마비가 오면서 말도 어눌해진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겨울날 점심시간쯤의 풍경으로 모아진다. 이 시가 복잡하게 읽히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 식기 전에 드세요”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한참 후에서야 “하이, 띵”이라고 답하는 시간 사이의 내면독백 때문이다. 마치 ‘아버지’에게 대놓고 말하는 듯한 냉정한 어조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그러나 「소녀들의 나라」의 언저리에서 보았던 화법의 특징들이 이 시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본다. 그 연장선에는 주체나 시적 대상을 엑스레이처럼 투시하는 감각적 시선도 자리하고 있다. 일테면 “아직도 어린 애인의 다락방엔 그 여자가 있죠/ 벌써 헤어졌지만 아직도 헤어지지 않은 여자/ 단둘이 있어도 단둘이 아닌 것 같은 맛이 거기 있죠”(「오! 진이」)와 같은 시가 그것이다. ‘애인’이 ‘어릴 때’ 만나던 ‘여자’의 사진을 ‘애인’의 다락방에서 발견했을 때, ‘단둘이 있어도 단둘이 아닌 것 같은 맛’의 연원이 밝혀지는데, 이는 시샘과 배신감과 분노라는 낯익은 기성의 ‘맛’과는 다른 차원의 시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직관이고 직시로, 그것은 관습이나 양식이라는 틀 밖에서 진행되는 매임 없는 유영, 곧 ‘이상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나라’의 사유 방식이다.
위 시에서 전경화된 냉혹한 어조에 자식이 부친에게 가지는 일말의 동정이나 자책 같은 것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는 소위 막 되먹은 자식들의 냉혹한 진실이 아니라 부친을 요양원에 보내야하는 자식들의 진실의 냉혹함이다. 언어는 절제되고, 미화와 변명은 거세되었으며, 오직 엑스레이의 뼈와 같은 진실만이 유일한 출구로 작동한다. “아버지 식기 전에 드세요”의 이면에 들어 있는, “아니, 식기 전에 요양원에 가세요, 혼자 가세요, 이 서류 속의 아버지가 이제 진짜 아버지예요, 아버지는 이제 뼛속까지 독거노인이에요.”와 같은 기술이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판다. “나는 혼자 코웃음을 쳐본다 쓸쓸하지 않은 척,”(「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하는 최휘식 어법을 대하며 쓸쓸해지는 것이 정작 우리 자신이듯,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라는 의외의 장소에서 맞닥뜨린 또 하나의 나를 데리고 귀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Ⅳ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는 최휘의 첫 시집이다. 소녀ㆍ소년으로부터 성인에 이르는 다양한 화자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사유와 어법 등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소녀들’이라는 주체다. 소녀들은 ‘심심한 인간’으로 표상되는 어른들의 상투성과 관습, 처세, 안주 의식 등을 끝없이 거부한다. 사물과 현상들이 맑은 유리창을 통과하되 학습된 주체에 의한 왜곡이나 과장되지 않게 하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이를 위해 “빠지다 고프다 부풀다”와 같은 “단어를 금지”(「목 졸라 죽이고 싶은 단어가 세 개 있다」)하고, ‘밥밥 씨바블!’, ‘뭔밥 씨바블!’ ‘씨바블 빠리빠리 시시낙낙’(「밥밥 씨바블」)과 같은 주문을 걸고, “붉고 물컹한 곳으로 손을 밀어 넣”어 “혈육간 형제간 부부간 사흘간 서울과부산간 어찌됐든간 무엇을 하든간/ 곤죽이 된 간의 사이에서 손을 잃어버”리는데, 동음이의어적으로 “이런 말을 받아먹으며 통통 살이 찌는 간/ 싱싱한 간을 위해 오늘밤은 무한하게 흘러간다”. 가벼움과 더불어 경쾌함도, 이미지도 의미도, 어느 것 하나 잃지 않고 몽땅 챙기는 방식으로.
이 시집에서는 ‘소녀들’의 말과 의식과 행위가, 수다와 놀이와 일상이 분리되지 않고 통짜다. 이는 ‘소녀들’의 기원대로 성인이 되고나서도 변하지 않는 시적 정체성이 된다. 성장소설의 전통은 있어도 성장시라는 개념은 아직 무른 우리의 문학사에서 한 편의 시 정도가 아니라 한 권의 성장시집의 등장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의 긴장에 답하듯, 다음 한 편의 시가 이 모든 것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저 ‘머리공방’으로 들어가면 머리를 어떻게 해준다는 거지
머리통에 줄자로 이리저리 금을 긋고 재단을 하려나
깨질듯한 편두통을 이리저리 들춰보다
역시, 머리통이 문제였군
하며 삐뚤어진 왼쪽 머리통을 대패로 매끈하게 밀어버리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가 다시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며 줄자로 턱 아래까지 대중을 하다
바로 여기군
하며 드릴로 정수리에 구멍을 뚫는다면
톱밥은 날리고 수평계는 자꾸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데
나사못 돌리는 소리 아득하게 들려오고
가위 소리 먼 휘파람 소리로 나부끼고
그때 장인匠人은 내 머리통을 세팅기에 바싹 걸어놓는 건가
머리통 매달린 채 옴짝달싹 못 하는데 불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은 허겁지겁 뛰쳐나가고 전문가용 드라이기는 강풍으로 몰아
치고 바리깡은 머리칼을 이리저리 움켜쥐고 중화제는 하얗게 쏟아져 내리고 머리통은 콕콕 쑤시고 여기저기 잘려진 머리칼들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리고 까치 몇 마리처럼 가위들이 연둣빛으로 날아가고 어서 빨리 나도 이 기계를 번쩍 들고 뛰쳐나가야
하는 건가
이리저리 밀리고 깎이고 구멍이 뚫려 한결 산뜻해진 머리통이
한때 살이었고 뼈였던 단풍나무 원목 머리통이
시계나 탁자나 의자가 되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온다면
음, 나무 향기가 아주 좋군
막 미용실 계단을 올라오는 한 여자가
이럴까
―「머리공방」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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