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고구려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재위하던 5세기 1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힘은 막강했다. 광개토(廣開土)란 이름처럼 서북방 만주벌판에 광대한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눈을 남쪽으로 돌려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에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을 당하면서, 백제는 황급히 금강 변의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0~20여 년이 더 흐른 어느 시기 고구려는 남한강 변에 자신들의 '영역표시'를 남겼다.
그리고 다시 1,500여 년의 긴 시간이 지난 뒤, 마을 입구에 비가 서 있어 이름조차 입석마을인 이곳에서 비는 때론 개울의 빨래판으로, 언젠가는 대장간의 기둥으로 쓰이기도 했었고, 비의 모습이지만 글씨가 없어 백비(白碑)로도 불리면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1979년 자신들이 사는 고장의 문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기어이 이 비에서 글씨를 찾아내었다.
1년 전(1978) 단양에서 발견된 신라 적성비에 필적하는 진흥왕비를 자신들의 동네에서도 찾았다며 기뻐했던 사람들은, 한반도 내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소식에 얼마나 놀라고 흥분했을까?
고구려의 말발굽이 달렸던 어느 곳엔 가에 또 다른 그들의 '영역표시'가 햇빛을 볼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이여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봅시다.
오! 신이여 저로 하여금 익숙한 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시 살피게 하소서.
압록강 건너 집안(輯安)의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2기 밖에는 없는 고구려비인 중원 고구려비는 모양조차도 광개토대왕비와 닮은 축소판이다.
봉황리 마애불상군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멸되고 바위 자체가 떨어져 나간 곳도 많아 불안해 보인다
마애불로는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삼국시대의 마애불로, 백제, 고구려, 신라가 거쳐 갔던 이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과 지정학적인 배경이 불상에 투영되었다는 평이다.
인근의 중원 고구려비의 영향 등으로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고 한다.
첫 번째 마애불은 반가사유상, 공양상 등 5구의 불보살상들이 있는데 마모가 심하고 파손도 있어서 정확한 모습을 살피기 힘들다.
10여 년 전 처음 이곳에 혼자 왔다가 근처 논 가에 노인 한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마에불이 1978년에 발견되었다는 내 말에 노인은 " 에이, 뭔소리. 우리 어렸을 때부터 여기 이런 게 있는 거 알아서, 앞에 개울에서 물놀이하다가 여기 바위에 올라와서 놀곤 했는데" 라며, 개구쟁이들이 바위에 새겨진 사람 얼굴을 돌로 두드려 깨기도 했었고, 마애불 앞에 있던 뭔가를 발로 밀어 절벅 아래로 떨어트리기도 했다고 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던 마애불의 존재가 1978년에 학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발견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일 것이다.
암튼 이듬해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와 중앙탑, 누암리 신라고분군, 그리고 마애불과 앞산의 장미산성까지, 모두 이 남한강 일대 좁은 지역의 풍부한 역사성을 말해 주고 있다.
두려움을 없애주리라(오른손 시무외인施無畏印), 소원을 다 들어주리라(왼손, 여원인與願印).
부처님 왼편엔 무릎을 꿇고 공양물을 받치는 공양상이 있다.
갈라지고 쪼개져 떨어져 나가는 바위들로 해서 보기에 참 불안한 모습이다.
시무외인, 여원인을 한 삼국시대 마애불 - 서산마애삼존불
마애불좌상. 첫 번째 불상군에에서 몇 걸음을 더 가면 커다란 마애불좌상이 있다.
결가부좌를 한 무릎이 지나치게 커서 비례가 좀 어설퍼 보이며, 머리 주변에는 화불 5구가 광배처럼 배치되어 있다.
연화대좌에 앉은 화불들은 비바람에 마모가 많이 되었지만, 5구의 화불들 모습이 서로 달라 보인다..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가면 가까운 절벽 곳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디.
마애불에서 바라보면 들판 저 끝 뾰족한 산 앞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청룡사 보각국사탑
고려 말의 보각국사 혼수스님(混修 1320∼1392)의 승탑이다.
고려 말의 큰 스님이었던 그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던 1392년에 타계하자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정혜원륭(定慧圓融)’이라 하여 1394년에 완성하였다.
크지 않은 키에 전체적으로 통통한 모습인데 안정감 있는 지붕 장식이나 탑신을 가득 채워 새긴 신장상 조각들도 모두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보각국사탑 앞의 석등. 작은 사자가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더 큰 석등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아 안쓰러움이......
보각국사 승탑과 탑비 그리고 석등이 세트를 이루고 있다.
승탑 앞에 석등을 세우는 건 고려 초에도 있었지만, 고려말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1394년 세워진 보각국사 승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회암사 지공선사 승탑(1372년).
신륵사 보제존자(나옹화상) 승탑(1379년)
회암사 나옹화상 승탑(1377년).
회암사 무학대사 승탑(1407년) 등 려말선초에 세워진 승탑들 앞에 석등이 세워져 있다.
※ 양주 회암사에 주석했던 나옹은 1376년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렇기에 그의 승탑은 회암사와 신륵사 두 곳에 건립되었으며 그의 문도들에 의해 분사리 된 또 다른 사리탑 한 쌍이 원주에 세워졌다(1388년). 원주의 사리탑은 지금은 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영전사지 보제존자사리탑' 이라는 이름으로 한 쌍이 서 있다.
잎담배 건조실
대지국사비가 잇는 언덕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잎담배 건조실, 벽에 나무덩굴까지 감싸서 한층 더 고풍스러운데, 몇 년 전에 갔을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반갑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밭농사가 많았던 강원, 충북, 경북의 산골동네들(벼농사가 많았던 충남, 전라도, 경남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리라 생각됨) 어디에서 볼 수 있었던 담배건조실.
흙벽돌이나 진흙으로 지은 2층 높이의 건조실은 나지막한 시골의 살림집들보다 높아서 멀리서도 눈에 잘 뛰었는데, 앞쪽에 출입문과 그 아래 푹 파인 아궁이, 그리고 벽 곳곳에 건조 상태 확인을 위한 작은 유리창과 건조실 내 환기를 위한 까치지붕까지 모두 똑같은 디자인과 구조이다.
산골동네 집집이 있던 건조실은 이제는 시골에서도 보기가 쉽지 않다.
억정사 대지국사비(億政寺 大智國師碑)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마을 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에 조선 경종대왕 태실이 있다.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이래 전통 양식인 거북받침돌(龜趺)과 용머리장식(螭首)등이 생략되고 장방형 받침돌과 비신 윗부분의 양 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 놓았을 뿐이다.
12세기 후반부터 이수를 생략하고 비신 위 양쪽 귀퉁이를 귀접이 하듯 잘라낸 양식의 비석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형태의 비를 규수형(圭首形) 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양식은 대지국사비(1393년) 외에 인근의 청룡사 보각국사비(1394년) 용문사 정지국사비(1398년) 등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비석들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라 볼 수 있겠으며, 이 보다 앞서 보광사 대보광선사비(1358년)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봉사 현오국사비(1185년) 보경사 원진국사비(1224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단호사 철불좌상
통일신라가 그 수명을 다해가면서 혼란스럽던 9세기 중엽 이후 등장한 철불은,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성장하던 선종과 깊은 연관이 있다.
거칠고 가공하기 쉽지 않아 무기나 농기구의 재료로 쓰이던 철로 존귀한 부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세력들의 개성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스러움이 고려에 의해 평정되고 고려 초가 지나면 더는 철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철불을 만들던 호족들도, 승려들도 고려의 귀한 신분이 되면서 거친 철불과는 맞지 않아서일까?
충주는 예로부터 철의 산지로 유명했다(지금도 충주, 음성, 괴산 일대에는 수십 년 전까지 채굴하다 폐광된 철광들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일까 충주와 인근의 원주에는 꽤 많은 철불을 남겼다.
금당 안의 불상을 촬영하는 건 언제나 조심스럽다. 촬영을 금지하는 곳들도 있고. 철불을 보러 단호사 대웅전에 들어가자 보살님께서 사진 찍을 때 어두우면 불을 켜라면서 불상 머리 위 조명의 스위치 위치까지 알려주신다.
단호사 부처님은 눈꼬라는 올라가고 입꼬리는 쳐져서 별로 친절해 보이지 않아서, 절에 대한 인상까지도 그런 선입감이 있었는데 친절한 보살님 덕분에 다 날려 보냈다는~~ ㅎㅎ
길가의 단출한 절 단호사 마당에는 작은 삼층석탑을 휘감듯이 올라가는 소나무가 있어 신비롭다. 수령이 오백 년이 넘었다는 이 소나무는 마치 한 마리 용같은 느낌이 든다.
중앙탑
'탑평리 칠층석탑'이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중앙탑이라는 이름이 더 와 닿는 중원의 땅 충주를 대표하는 얼굴마담이다.
강변에 높게 쌓은 토단 위에 14.5m나 되는 탑을 세워 더 웅장하고 높다.
탑의 양식이나 구조는 전성기 통일신라 탑이 분명한데 왜 7층일까?
당시 대다수 탑이 3충이고 통일신라 시대 탑 중에 7층은 이 탑 말고는 생각 나는 게 없다.
강에 높은 토단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높게 세운 탑. 주변에 이렇다 할 절터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이탑의 용도와 상징성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통일신라 9주 5소경을 나타낸 교과서의 지도.
중앙탑 이름에 관한 전설.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 때 나라의 중앙지점을 알아보려고 남북의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들을 출발시켰더니 이곳에서 만났다고, 그래서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탑이라 불렀다는.....
위 지도의 신라 영역을 대각선으로 ×자를 그어보면 충주가 거의 중앙이 됨을 알 수 있다.
경덕왕 16년(757년)에 설치된 중원경의 위치도 중앙탑 인근임이 발굴조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중앙탑은 말 그대로 국토 중심점의 상징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누암리 고분군
남한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치 낙동강 일대 가야시대의 고분군을 연상케 하는 신라의 고분들이 펼쳐져 있어서, 진흥왕 이래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차지하여 경영하였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1.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중앙탑 인근이 신라 중원경의 옛 자리라는 것도 함께 알려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전체 고분 숫자는 230여 기에 이른다고 한다.
목계나루
옛 남한강 수운의 중심이었던 목계나루터. 번잡하던 나루터와 장터의 배도 사람도 모두 떠나고 없지만, 남한강은 오늘도 흐른다. 내일도.....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신경림 -
사진 출처 : 목계나루 http://www.mknaru.com/
첫댓글 학자들이 봐야 발견이구나.
서산 마애불 발견 스토리와 비슷하네요~
그렇지... 잘난 분이 찾아내야 해...
맞아요,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
짜임새 있게 올리셨네요. 좋아요.^^
그게 그때 발견된건가요? 나도 몰랐네...
82년 그냥 우리는 그 동네 출신 동기하고 탁본을 했드랬죠.
그걸 지금도 갖고 있는데, 함 비교해봐야할까봐요. 얼마나 변했나~
고생했지 말입니다.
보각국사탑을 보니 화순 쌍봉사 머시깽이랑 곡성 태안사 거시기깽이 생각나네여... 닮았지 말입니다.
봄나들이가 가고 싶지 말입니다. ^^
탑이 훤~~칠하지 말입니다.
중기씨 마냥... 흐흐~~^^♡
얼굴마담 맞지 말입니다. ^^
남자고 탑이고 키가 훤칠 늘씬해야 멋있는 건 맞지 말입니다
그래서 난 슬프지 말입니다 ㅠㅠ
송중기가 여자들 말투 다 바꿔났지 말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