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광주이씨 역사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自成李族(이사금 자성 삼한신라초기) 스크랩 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 9화 신라新羅 1000년의 영화榮華와 가야
행복한사랑 추천 0 조회 319 17.10.19 15: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부 열국시대列國時代

9화 신라新羅 1000년의 영화榮華와 가야

 

◎ 신라 역사연대표

* 3국사기(고려 김부식) : 상대上代(1대 박혁거세 - 28대 진덕여왕), 중대中代(29대 무열왕 - 36대 혜공왕), 하대下代(37대 선덕여왕 - 56대 경순왕)

* 3국유사(고려 스님 일연) : 상고기上古期(1대 박혁거세 - 22대 지증왕), 중고기中古期(23대 법흥왕 - 38대 진덕여왕), 하대下代(39대 소성왕 - 56대 경순왕)

1대 박혁거세 한기 7140년(BC. 57년) - 56대 경순왕 한기 8132년(AD. 935년),

56대 992년 간

 

   역대

      왕명

      재위 기간

                   역사 개요

   1대

   박혁거세

  BC.57-AD.4

   13세 등극 국호 서라벌, 수도 금성

   2대

   남해차차웅

  AD. 4 - 24

   석탈해 사위 정사 위임, 병선 왜구 격퇴

   3대

   유리이사금

        24 - 57

   6부명 개정, 성씨 내림, 도솔가 창작

   4대

   탈해이사금

        57 - 80

   국호 계림 개정, 김알지 탄생

   5대

   파사이사금

        80 - 112

   월성 구축 백성 이주, 주변 병합 국위 선양

   6대

   지마이사금

        112 - 134

   백제 연합 말갈 격퇴

   7대

   일성이사금

        134 - 154

   농본정책 경지 개간, 백성 사치 금함

   8대

   아달라이사금

        154 - 184

   현 설치, 도로 개통 내치 힘씀

   9대

   벌휴이사금

        184 - 196

   탈해왕의 손자

   10대

   나해이사금

       196 - 230

   벌휴왕의 손자

   11대

   조분이사금

       230 - 247

   벌휴왕의 손자

   12대

   첨해이사금

       247 - 261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 동생, 고구려 국교

   13대

   미추이사금

       261 - 284

   김씨 왕가의 시조

   14대

   유례이사금

       284 - 298

   조분왕 큰아들, 백제와 수교

   15대

   기림이사금

       298 - 310

   조분왕 둘째 아들, 국호 신라 개정

   16대

   흘해이사금

       310 - 356

   기림왕 후사 없어 군신 추대 등극

   17대

   내물마립간

       356 - 402

   중국 문물 수입

   18대

   실성마립간

       402 - 417

   백성 추대 등극, 내물왕 태자에게 피살

   19대

   눌지미립간

       417 - 458

   牛車法 제정, 고구려 묵호자 불교 전파

   20대

   자비마립간

       458 - 479

   고구려 백제 공격 나제동맹 맺음

   21대

   소지마립간

       479 - 500

   김씨

   22대

   지증

       500 - 514

   왕 칭호 사용, 이사부 우산국 점령

   23대

   법흥

       514 - 540

   율령 반포, 연호 건원, 이차돈 순교

   24대

   진흥

       540 - 576

   순수비, 이차돈 순교, 대가야 멸망

   25대

   진지

       576 - 579

   이름 사륜

   26대

   진평

       579 - 632

   이름 백정

   27대

   선덕여왕

       632 - 647

   진평왕 맏딸, 이름 덕만, 첨성대 건립

   28대

   진덕여왕

       647 - 654

   이름 승만

   29대

   무열

       654 - 661

   김춘추, 나당연합 외교, 백제 멸망

   30대

   문무

       661 - 681

   고구려 멸망, 동해 대왕암 수장 유언

   31대

   신문

       681 - 691

   만파식적 제작

   32대

   효소

       691 - 702

   설총의 이두 정리

   33대

   성덕

       702 - 737

   혜초 왕5천축국전 저술

   34대

   효성

       737 - 742

   이름 승경, 성덕왕 둘째 아들

   35대

   경덕

       742 - 765

   김대성 불국사 창건

   36대

    혜공

       765 - 780

   여자 행세, 대공?김지정 난, 신종 주조

   37대

   선덕

       780 - 785

   혜공왕 죽임, 이름 양상, 내물왕 10세 손

   38대

   원성

       785 - 798

   홍수로 먼저 도착 즉위, 독서출신과 설치

   39대

   소성

       798 - 800

   2년 만에 병사 왕위 쟁탈전 벌어짐

   40대

   애장

       800 - 809

   숙부 김언승 왕위 찬탈 시해, 해인사 창건

   41대

   헌덕

       809 - 826

   친당정책, 패강 300리 장성 축조

   42대

   흥덕

       826 - 836

   완도 청해진 설치 장보고 관리

   43대

   희강

       836 - 838

   3촌 균정 척살 왕위 계승, 김명 난 자살

   44대

   민애

       838 - 839

   희강왕 추대 상대등, 왕 자살 뒤 등극

   45대

   신무

       839

   민애왕 죽이고 왕위 등극, 이홍의 저주 死

   46대

   문성

       839 - 857

   신무왕 태자, 장보고 반란, 염장에게 피살

   47대

   헌안

       857 - 861

   후사 없어 왕족 응렴 사위 삼아 왕위 계승

   48대

   경문

       861 - 875

   이름 응렴

   49대

   헌강

       875 - 886

   처용무 유행, 사치 환락

   50대

   정강

       886 - 887

   경문왕의 둘째 아들, 진성여왕 오빠, 병사

   51대

   진성여왕

       887 - 897

   이름은 만, 淫行, 兵制 퇴폐, 나라 혼란

   52대

   효공

       897 - 912

   궁예와 견훤에게 영토 빼앗김, 정사 혼란

   53대

   신덕

       913 - 917

   후사 없어 백성 추대 등극

   54대

   경명

       917 - 924

   신덕왕의 태자, 후당에 구원 요청 실패

   55대

   경애

       924 - 927

   후백제 침공, 포석정 天祭 중 자살

   56대

   경순

       927 - 935

   견훤 추대, 왕건에 항복, 경주 事審官 餘生

      

                         전성기강역도                  동서통일강역과                   왜 정벌도(붉은색)

                                                             나당전쟁도                         * Daum Blog 인용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열국시대 한국의 왜倭 분국分國 경영사(임승국의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대진국본기의 일본기를 인용하여 대진국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덧붙인다. 아울러 3한과 가야시대에서 말하는 분국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으니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졸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속했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고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나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민으로써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의 노예다. 왜인들은 이 때 산과 섬에 근거하여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이 통상했다. 바다를 건너 천 여리에 대마국(대마도)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 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사방 300여 리 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반여언의 옛 읍임

 

* 임나任那일본부설 (이경진, Daum 블로그)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고대사에서 왜倭나라가 대한 남부지방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근대사에서는 일본이 한국, 만주, 중국을 침략한 사실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대동아건설이라는 거짓 구호를 내세워 호도하는 것이다.

일본역사교과서는‘대한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는데 대화大和정권이 임나라는 곳을 식민지로 삼아 임나일본부를 두었다. 대화정권에서 파견된 역인役人(관리)이 주재하여 군정軍政을 폈다’라고 고대일본의 대화정권이 대한의 남쪽에 식민지를 두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본교과서의 역사부도에는 대한 남부지방이 가라(임나)로 그려져 있고 일본의 고대 신공왕후시대에 이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경영하였다고 조작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학자들의 학설이 있는데 대부분 일본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참고하여 한국경영설을 조작한 내용이 주류다. 이 학설들은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조작하였기 때문에 일본사학계에서 조차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의 사기, 일본서기, 3국사기에서 대부분의 기록들이 임나는 대마도 일대를 지칭한다.

 

* 출선기관出先機關 즉 출장소설出張所說 : (1949년 천황주권국가를 표방한 칸마사토모, 쯔다소우키치, 이케우치히로시 등이 발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은 5세기의 역사를 기록한 웅략천황기雄略天皇紀에 단 한 차례 일본부의 기록이 있는데 일본부 장군들이 임나왕의 명에 의해 신라의 침공을 견제하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임나일본부의 대부분 기록은 6세기의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에 나온다. 그러나 흠명천황기의 기록은 일본부가 임나의 작은 나라 한지(우두머리)들과 신라를 물리치기 위한 작전회의 성격이 대부분이고 조세 징수나 군사 동원 등 정치적인 내용은 없으므로 국가 경영에 대한 내용은 전혀 기록이 없다.

 

* 기마騎馬민족설 : 출선기관설이 일본서기에서 조차 임나를 경영하였다는 일본부의 성격과 맞지 않으므로 정략적으로 조작한 학설이다. 동북아시아 계통의 기마민족이 만주에서 대한으로 이동하여 한동안 남한을 지배하다가 (마한)진왕의 자손이 4세기 초에 일본 북큐우수로 건너가 왜한倭韓 연합왕조를 건국하고, 숭신천황崇神天皇이 되었으며 5세기 초에는 그 자손인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북큐우수에서 키나이로 진출하여 야마토왕조를 창시한 뒤 일본열도를 통합하고 대한 남부지방을 경영하다가 7세기 중엽 임나 경영을 중단하였다는 학설이다.

 

* 왜倭 자치기관설 : 출선기관설의 수정론이다. 학문적으로 조작된 임나일본부설이 정설로 인정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분국설을 발표하여 반론을 제기하자 1970년대 이후 임나일본부설을 재수정하여 가야지역의 일본인들이 자치기관을 형성했다는 학설이다.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에는 임나일본부가 외교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자치기관을 형성할만한 일본인의 대규모 정착 근거가 없다.

 

* 분국설分國說 : 1963년 북한의 김석형이 제기한 학설로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기본적인 발상이 역전환된 획기적인 학설이다. 선사시대 이래 3한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가야인이 히로시마 동부와 오키야마지역에 임나국을 세우고, 서부에 백제계 분국, 동북쪽에 신라계 분국, 동쪽에는 고구려 분국을 세워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은 왜인들이 세운 대화정권과 한국인들이 세운 분국들과 각축 기록이다. 일본 동부의 대화정권은 5세기 중후반부터 서부 일본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가야계 분국이었던 임나국에 전략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임나일본부다.

 

* 백제사령부설 : 대한의 역사학자 천관우가 제기한 학설로 백제가 가야지역에 설치한 군사령부다. 이 학설은 일본서기나 3국사기와 전혀 다른 주장이다.

 

* 외교사절설 : 1970년대 스즈키야스타미, 우케다마사유키, 오쿠다쇼우, 키토우키요아키의 학설로써 그들의 저서 고대왕국과 조선제국에서는 6세기 전반 왜 왕권은 한국의 금속문물을 수입하는 대신 백제에 병사를 파견하고 무기를 공급하여 동맹 관계를 맺었다. 대화 왜가 임나에 파견한 사신들이 주둔하며 임나의 요청에 의하여 주둔군을 관장하였다.

 

       

          경주 석탈해왕릉           석탈해왕 인도           허황옥왕비릉                허황옥왕비

         * Daum Blog 인용        Colla왕국 추적도        인도 물고기상                 파사석탑

 

* 일본제국 식민지시대 일제는 한국에 관한 서적을 모두 수거하여 불태웠다. 역사서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복식사나 음식에 관한 서적에 이르기까지 불온서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걷어들였는데 수집한 문서가 조선총독부 관보에 51종 20여 만 권으로 기록되어 있다(광복 뒤 출간, 제헌국회사,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문정창). 이어 일제는 조선 병탄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조선사를 왜곡, 조작하였는데 이마니시(금서룡今西龍)를 비롯한 일제의 어용사학자들이 주도하였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사지침을 보면

 

첫째,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둘째, 전편全篇을 상고上古3한(선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3국, 통일신라, 고려, 조 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셋째,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史話, 사실史實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고 되어 있다. 편찬에 참여하고 왜곡과 조작에 참여한 이마니시의 충실한 추종자 한국사학자들이 내세운 실증사학의 실체다. 상고사는 한인의 한국시대와 한웅의 신시시대를 잘라내고 선군왕검부터 시작하였으며 선군왕검은 신화로 각색하였다. 고려사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조선사는 당쟁과 붕쟁으로 날을 새운 민족으로 폄하함으로써 역사적 우위에 일본사를 접목시켜 한국 병탄을 합리화하고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한국사에 대한 회의와 지도자들에 대한 모멸감을 지니도록 그래서 일본인의 우월감을 각인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역사문화정책은 한국인의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

 

* 흔히 대한고대사는 세계사의 봉건제도시대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서양의 중세 영주와 기사, 중국의 주나라 봉건제도, 일본의 에도시대(강호江戶시대) 성주와 다이묘(대명大名) 형성기가 유독 대한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인식하였는데 대한사의 열국시대의 성읍국가시대가 중세의 봉건시대임

◎ 가야의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야문화의 특질, 신경철)

학계에서는 가야의 성립을 토착설과 북방민족 이주설 두 갈래로 논란이 되었는데 근래 가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두고 북방민족 이주설이 설득력 있는 정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북방민족 이주설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음

 

* 도질토기陶質土器의 사용 : 도질토기는 북방 토기로써 AD. 3세기 말 금관가야 중심부였던 낙동강 하류 김해와 부산지역 고분에서 출현하여 영남 각지에 산재한다.

 * 순장殉葬 : 한국 토착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부여 등 유목민 습속인바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었다.

 * Ordos형 동복銅腹 : 북방 유목민의 청동솥인데 북부여 제작으로 추정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되었다.

 * 무기武器의 훼손毁損 풍습 : AD. 3세기 말 무렵 추정, 김해 대성동 45호 고분에서 발굴된 대도大刀는 일부러 구부려 부장副葬함. 북방 유목민족 풍습이다.

 * 갑주甲?(갑옷)와 마구馬具 :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는 북방 피혁 갑주문화인바 중국 동북방 선비족과 부여가 원류다.

 * 묘제墓制 : AD. 3세기 영남에서 발굴된 묘제는 목곽묘로써 관묘제도와 다름. AD. 2세기 후반 추정, 양동리 162호묘에서 발굴되었다.

 * 선행先行 분묘墳墓의 파괴 : 의도적으로 선행 묘를 파괴하는 행위는 앞 체제를 부정하는 유목민족의 풍습이다.

 

                     나정                       남당 박창화          일본 궁내성도서관                 계림

             박혁거세 탄생설화         화랑세기필사본                                           김알지 탄생설화

(2006년 8월, 건축물 구조대로 판명됨)                                                         * Daum Blog 인용

 

* 중국 3국지의 가야 12국명(4개국 이름 모름)

구야국狗邪國(김해), 안야국安邪國(함안), 반로국半路國(고령), 불사국 不斯國(창령), 독로국瀆盧國(거제),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밀양), 고순시국古淳是國(창원),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성)

 

* 3국유사의 가야 7국명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冠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 가야의 역사 (김세기의 사라진 가야의 역사, 이영식의 가야사 개관, 김영심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백제)

 

* 가야의 역사는 기원 전후 한국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한기 7750년경)에 한국 북쪽의 내륙에서 끝났다. 중국의 3국지, 3국사기, 일본서기 등 문헌에서는 대략 12개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60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들과 동등하게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여 년 전이다. 3국유사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의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본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 양산, 창녕지역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 장수, 임실, 남원지역에서도 가야문화가 확인되고 있다. 가야의 어원은‘가라’에서 온 말인데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한다.

중국 3국지에는 3세기경(한기 7400년경)에 경남지방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는데 구야국, 안야국, 반로국, 불사국, 독로국, 난미리미동국, 고순시국, 고자미동국 등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금관가야, 아라가야의‘가야’란 말은 고려시대 3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라는 어휘를 붙여 지은 것이다. 3국유사는 가야 5, 6개국이 낙동강 서쪽에 있고, 이는 변한 소국들이 3세기 이후 가야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 7국과 가라 10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AD. 1 - 3세기에 낙동강 연안의 변한 소국들이 AD. 3세기 이후 가야 또는 가라의 5, 6개 연맹체를 구성하여 3국시대에 공존하였다고 했다. 3국유사 가락국기 5장 가야조에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령 대가야, 상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 성산가야(변진가야), 고성 소가야, 창녕 비화가야가 기록되어 있다.

 

* 임나는 일본서기에 많이 거론되었고 임나일본설을 정착시키려고 일본인들이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광개토왕비(한기 7597년, AD. 400년), 3국사기 강수전(한기 7800년경, AD. 7세기), 진경대사비(한기 8129년, AD. 932년)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고구려인들과 신라인들이 사용하였다. 임나는‘임의 나라, 주인의 나라’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다. 두 나라는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역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가야의 대명사로 쓰였다. 임나일본부는 왜왕이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라는 학설이 정설이다.

 

* 한기 7597년(AD. 400년)에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로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가야의 역사는 전기가야 김해의 가락국과 후기가야 고령의 대가야로 나누어진다. 여러 가야국의 인구는 대개 3000명에서 3500명 정도의 소규모였으나 김해의 구야국과 함안의 안야국은 2만명에서 2만5000명의 대국이었다. 3국사기와 3국유사에 기록된‘포상 8국의 난’은 사천, 고성, 칠원, 마산지역의 가야가 김해지역의 해상교통로를 빼앗기 위해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했던 전쟁이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가락국(김해), 한기 7757년(AD. 560년) 경에 안라국(함안), 한기 7759년(AD.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신라의 회유와 무력에 차례로 통합되어 지배세력의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대부분은 김유신처럼 신라에 귀속하여 진골 대우를 받았다.

 

* 김해 금관가야 : 변한 소국 구야국이 발전한 나라다. 6개 부족장들이 구지봉에서 제사를 지낼 때 6개 알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여섯 동자가 되었는데 큰 맏이가‘수로’로써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중개무역 성행하였으므로 크게 번창하였다. 김해 양동리 고분 유적이 대표적이며 AD. 5세기 이후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지닌 맹주였다. 한기 7729년(AD.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 함안의 아라가야 : 변진의 안야국이 발전하였다. 서부 경남지역 중심과 남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AD. 3세기(한기 7400년경) 안야국을 중심으로 포상 8국이 연맹하여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신라와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여 국가연맹을 형성하고 주도하였다. 함안읍 말이산 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성의 소가야 : 변진의 소국이었던 고자국이 발전하였다. 한국 남부지방의 여러 나라들과 일본의 교통로의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 창녕의 비화가야 : 북서쪽에는 대가야와 접경하였고 남서로는 아라가야와 접경한 삼각지로써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신라가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하였던 거점지역으로 신라에 복속된 뒤 진흥왕이 척경비를 세웠다. 창녕의 교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성주의 성산가야 : 벽진가야라고도 하며 성주읍내 성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 고령의 대가야 : 현재의 고령읍에 있었다. 중국의 3국지에서는 미오야마국이 발전하였다고 하였으나 변진의 반로국설이 정설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건국설화가 있으며, AD. 4세기(한기 7500년경)에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AD. 5세기(한기 7600년경)에는 철을 생산하여 교역함으로써 여러 가야국들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역하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합천, 함양, 거창, 산청지방을 복속하였고 소백산맥 넘어 남원, 운봉고원까지 평정하여 섬진강을 장악함으로써 하동까지 진출하여 거대한 영역국가로 발전하였다. 한기 7759년(AD. 562년)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경주 첨성대                 북한산                     토함산석굴암            석가탑(무영탑)

                                              진흥왕순수비                                       * Daum Blog 인용

 

* 사로斯盧(신라가 국가형태를 갖추기 전의 성읍시대 이름)의 시왕始王(시조)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왕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눈수嫩水(만주 흑룡강)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거기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에 닿았다. 여기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자가 있어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居世干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동만주 길림성 부근 추정)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이라고도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예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는 3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려서 3가라加羅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중략) 영락(고구려 광개토대왕 연호)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대왕)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함 (임승국의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 신라라는 국호는 6세기 초 지증왕 때 지정되었는데 그 전에는 사로, 사라, 서나, 서라, 서벌로 불리었다. 이는‘새로운 나라’,‘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고대사회에서 성역으로 섬겼던‘수풀’의 뜻이 있다. 신라는 고대국가들처럼 성읍국가(부족국가)로 시작되었다. 성읍국가로써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를 잡은 급량, 사량, 본피, 한지, 습비, 사로 등 6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경주는 신라 1000년의 도읍지다. 한 고을이 천년을 이어 도읍지로 역사를 이어온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경주는 본래‘새 벌’,‘서나벌’,‘서라벌’이라고 불렀다. 지금의‘서울’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한기 7140년(BC. 57년)에 경주평야에 세운 나라로써 건국 당시에는 6개 부족을 바탕으로 형성된 진한 12개국 중 하나로 가장 작은 나라였다. (박)혁거세는 급량 출신으로 거서간이 되었는데 사량 출신의 (김)알영과 혼인하였다. 이는 6부족에서 가장 강대한 두 부족이 연합함을 뜻한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인도 Cholla 왕국 도래설과 수로왕비 허황옥의 아유타국 도래설)으로부터 진출한 새로운 세력 (석)탈해부족에게 복속된다. 탈해부족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혁거세부족을 제압했는데 탈해가 죽자 해체된다. 이후 신라는 부족연합 또는 군사정벌로 성읍국가를 통합하여 연맹국가가 되었으나 성읍국가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신라가 비록 종주국 역할을 하였다고는 하나 영향력이 미약하여 성읍국가들은 신라 수도 금성으로 쳐들어오는가 하면 토착세력들 가운데는 중국의 군현과 내통하는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한기 7500년 경(AD. 4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 동남부의 군현을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 대 세력이 한국 중부지역에서 대립하자 한기 7550년 경(AD. 4세기 중엽) 낙동강 유역의 성읍국가들이 신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 연맹국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를 고증하는 것이 지도자의 호칭이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은 권력 통합의 의미가 아니었는데 내물마립간(AD. 356년 - 402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마립간(으뜸가는 지배자)은 권력자로써 권위를 부여한 명칭이다. 이 시대부터 왕권이 확립되고 왕위를 세습한다.

 

* 김유신은 신가라加羅 국왕 구해의 증손으로 다섯 가라국들이 모두 신라와 혈전을 벌여 망하였으나 신가라는 나라를 양도하였으므로 김구해에게 감사하여 식읍을 주고 준귀족으로 대우하였다. 김구해의 아들 김무력은 병사로써 구천의 싸움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인 전공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귀골들은 김무력이 외래의 김씨라 3성과 차별하여 혼인을 허락지 않았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이 놀러나갔다가 3성 김씨 숙흘종의 딸 만명의 아름다움에 추파를 통하여 임신하였다. 숙흘종이 노하여 만명을 가두었는데 도망하여 금물내(진천)의 김서현의 집으로 찾아가서 혼인을 하고 김유신을 낳았다. 유신이 방탕하였으나 모친이 눈물로 회유하여 학업에 종사하여 17세(3국사기에서는 15세)에 화랑이 되고 중악산, 임박산에 들어가 참선을 하고 검술을 익혀서 명성이 났다. 그러나 유신은 가라 김씨였기 때문에 벼슬할 길이 없음을 알고 총신이었던 내성사신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를 사귀었다. 하루는 유신의 집 부근에서 제기를 차다가 일부러 춘추의 단추를 떨어뜨리고서 막내누이 문희를 불러 단추를 달게 하였다. 문희의 엷은 화장을 하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몸매와 얼굴이 춘추의 눈을 홀렸으므로 정이 통하여 임신하고 김유신은 김춘추의 매부가 되었다. 김용춘이 죽고 김춘추가 정권을 장악하자 김유신은 장수의 자질로 신라의 한 군주가 되었다. 이어 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유신은 소뿔한(장수와 재상을 겸직한 관직. 각간은 이두문)의 지위로 신라의 병마대권을 장악하였다. 김유신의 역사기록에는 거짓 전공이 많다. 3국사기에서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전술이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하였으나 패전은 감추고 작은 승리를 과장한 거짓들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어떻한 인물인가? 김유신은 백전백승의 명장이 아니라 노회한 정치가였으며 그 평생의 업적은 전공이 아니고 간계에 의한 정치였다. 신라 부산현(송도 부근) 조미곤의 예화가 3국사기 김유신전에 실려 있다. 백제의 출중한 부여성충과 임자를 무녀巫女 금화를 꾀여서 이간질하여 결국은 임자의 참소로 부여윤충은 당나라의 강남을 도모하려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동생 윤충이 울화로 죽고 성충 또한 홀대를 당하여 의자왕과 관계가 소홀하여지자 무녀 금화의 간계는 더욱더 악랄하였다. 백제 산천의 지덕이 험악하니 쇠로 진압한다면서 백제 땅의 쇠를 녹여 말뚝을 박았으므로 백제의 쇠가 탕진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금화를 불가살이不可殺라 하였다. 이에 성충이 상소를 올려 금화를 탄핵하니 금화가 자기 세력을 동원하여 성충을 참소하였다. 왕은 성충을 감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도 고마미지(장흥)으로 내쫓고, 서부은솔 복신을 가두니 이들이 모두 성충을 따르는 무리였다. 성충이 옥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유언의 상소를 올렸으니

‘신이 천시와 인사를 살피건데 머지않아 병역의 화(전쟁)가 닥칠 것인 바 육로로는 탄현 (보은)을 막고, 수로로는 백강(서천 기벌포)을 막아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 다.’

하고는 식음을 끊고 28일 만에 옥사했다. 고구려 연개소문이 죽기 1년 전이었다.

한기 7851년(AD. 654년)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를 이으니 이가 곧 태종 무열왕이다. 태종은 부친 김용춘 때부터 대왕의 실권을 가졌으나 다만 동서인 백제 무왕(왕비가 신라 선화공주)과 왕위 다툼에서 악화될 세간의 여론을 의식하여 선덕과 진덕 출가여승을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태종은 왕이 되어서 사위와 딸 김품석 부처의 앙갚음에 몰두하였고 백제의 침입이 자심하므로 태자 법민을 당나라에 보내 원병을 청하였다. 당나라 또한 이 때 당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절치부심하여 여러 번 고구려를 쳤다가 모두 실패하였던지라 신라와 연합을 호기로 삼았다. 신라를 도와 먼저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천마총금관                분황사탑                      남산마애불              울주 천전리각석

                                                                                                          * Daum Blog 인용

 

# 한기 7857년(AD. 660년) 3월에 신라 왕자 김인문이 당의 행군대총관 소정방과 함께 군사 13만명을 거느리고 래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남양)에 이르렀다. 신라 태종이 금돌성(음성)에 진을 치고 태자 법민, 대각간 김유신에게 병선 100척으로 영접케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신라 병사는 뭍으로 진격하고, 당은 해상으로 지쳐올라가 7월 10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에 서 만나자.’

고 했다. 법민과 김유신이 금돌성으로 돌아와 김품일, 김흠순 등 여러 장수들을 앞세워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진군했다.

의자왕은 조정의 의견이 분분하자 귀양 가 있는 흥수에게 사람을 보냈다. 흥수가 진언했다.

‘당나라 군사는 기벌포를 넘지 못하게 하고, 신라의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대 왕은 궁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국의 적들이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꺾인 뒤 배후를 치면 백전백승할 것이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임자의 무리들이 참소하여

‘성충이 옥에 갇힘을 원망하여 요사스런 술책으로 왕을 핍박하려 하니 당군은 기벌포를 지 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게 하여 들이친다면 항아리 속의 쥐를 잡는 것처럼 쉽게 양군을 궤멸할 수 있을텐데 어찌 험한 곳을 막아 시일을 허비하며 우리 군사의 사기를 꺾 으랴.’하였다.

의자왕이 이 때 총기가 흐려지고 간언에 귀가 열려 승낙하였다.

7월 9일에 신라 대장 김유신과 김품일 등이 5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무난히 탄현을 넘어 황등야군(논산과 연산 사이)에 이르자 장군 부여계백을 보내어 신라군사를 막으라 명하였다. 계백이 출전하면서

‘아아, 탄현의 천험의 요새를 내주고 5천의 군사로 열 배의 적을 막으라하니 앞 일을 알겠 다.’

그리고는 처자를 불러

‘적군의 포로가 되어 수치를 받기 보다는 내 손에 죽어라.’

며 처자를 죽이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고구려의 안시성주 양만춘은 5천의 군사로써 당 나라 군사 70만을 깨뜨렸는데 일당백이면 어찌 겁내겠는가!’하고 황등야군에 이르러 적을 맞아 싸우니 신라군이 네 번 쳐들어왔다 가 네 번 패하여 1만여 희생자를 냈다.

김유신이 네 번을 쳐들어가 네 번을 패하자 소정방과 약속한 10일 기한을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품일과 흠순에게 말했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고, 당나라 군사 역시 패한다면 신라의 수십년 간 계획이 허사가 된다. 만약 당군이 이긴다고 하더라도 신라는 모멸을 당할 것이다.’

흠춘이, 오늘 10배나 되는 군사를 가지고도 이기지 못했으니 신라인들은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아들 반굴을 진중으로 부르고, 이어 품일도 아들 관창을 불러 말했다.

‘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오늘 1만의 화랑으로도 수천의 백제군 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곧 신라의 화랑이 망하는 일이며 신라 또한 망하는 길이다. 너 희들은 화랑의 장수들인데 화랑을 망치려는가? 신하로써는 충을 다 하고, 자식으로써는 효를 다 해야 하는데 나라의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버려야 충과 효를 다 했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충효를 다 해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의 일이다.’

반굴이 거느리는 화랑의 무리를 이끌고 백제 진영에 들이쳐 장렬하게 전사하니, 관창은 그 때 나이 비록 16세였으나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백제 진영으로 돌진하여 싸우다 사로잡혔다.

계백이 용기를 가상히 여겨 투구를 벗겨보니 아직 앳된 소년이라 무훈을 칭찬하고 살려 돌려 보냈다. 관창은 신라진지로 돌아와 살아 돌아왔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다시 백제 진중으로 쳐들어갔다. 계백이 다시 사로잡았으나 목을 쳐 말에 묶어 돌려보내자 아버지 품일이 목을 안고 울었다. 이를 목격한 신라군이 총공격을 하여 육박전을 벌렸으므로 군사가 적은 백제군이 죽기로 맞았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결국 백제군 5000명은 계백을 위시하여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강 입구 기벌포에 도착하였으나 갯벌을 만나 행군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풀과 나무를 갯벌에 깔아 어렵게 행군을 하였는데, 의자왕이‘항아리 속의 자라를 잡으려고 기벌포를 지키지 않았기에’그나마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의직이 죽기로 싸워 순사하니 신라 군사들도 의직이 죽은 곳을 조룡대라고 이름 지었다. ‘여지승람與地勝覽’ 에 소정방이 의직군을 대파하여 의직이 죽은 것을 용을 죽였다 하여 조룡대라 한다 하고, 백마를 미끼로 사용하였다 하여 백마강이라 하였다 하였으나 백마강(백강, 일본사의 백촌강)이란 이름은 그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허황된 것이다. 해상잡록海上雜錄의 의직이 죽은 곳이란 말이 옳다.

김유신이 계백을 격파하고 11일에 백강에 다다르니 소정방이 기한을 어겼다고 신라 독군 김문영을 효수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불같이 노하여

‘신라가 당의 번국(속국屬國)이냐! 백제는 놔두고 먼저 당과 싸우자!’

고 칼을 빼들었다. 소정방이 놀라 김문영을 방면하였다.

 

        

          마의태자 덕주공주           이차돈순교비            불국사다보탑            봉화군 북지리

          월악산 성계계곡            금강산 백율사          * Daum Blog 인용        마애여래좌상

 

# 의자왕은 태자 이외에 적자가 여럿이고 서자들이 40여명이나 되었는데 왕은 그들 모두 좌평 등 관직을 주어 곁에서 보필케 하였다. 이 때 왕자들이 세 파로 나뉘어 태자 효는 ‘북경의 곰나루성으로 가서 지키면서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으자.’ 하였고, 둘째 왕자 태는 ‘솝을(소부리)을 힘껏 지키면서 의병을 기다리자.’ 하였고, 왕자 륭은 ‘소와 술과 폐백을 당군에게 바치고 군사를 물려주기를 간청코자.’ 하였다. 의자왕은 이 세 의견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세 의견을 다 받아들였다. 왕자 륭에게는 강화의 권한을 맡기고, 왕자 태에게는 싸우면서 지키라 하였고, 왕은 태자와 곰나루성으로 도망쳤다. 왕자 륭이 화의를 요청하여 당군이 물러서자 륭은 태자의 자리에 올라 지휘를 하였는데 태자의 아들 문사가 숙부가 태자의 자리에 앉음을 힐난하였으므로 좌우를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항복했다. 당군들이 성으로 입성하자 왕후와 희첩들 그리고 태자의 비빈들은 당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대왕포로 달아나 암석 위에서 강물로 뛰어내렸다. 낙화암의 전설이다. 여러 왕자들은 자살하고 더러는 도망하였고, 의자왕은 곰나루성에 도착했으나 성을 지키는 장수가 임자의 무리들이라 왕을 붙잡아 항복하려고 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려고 했으나 죽지 못해 태자 효와 어린 아들 연과 함께 포로가 되어 묶여서 당군의 진영으로 끌려갔다. 소정방은 목을 찔러 빈사지경瀕死之경에 이른 의자왕을 놀리면서

‘아직도 대국에게 항거하겠느냐?’ 고 비웃었으며

신라 태자 김법민은 항복한 왕자 륭을 놀리면서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내외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 고 앙갚음을 하였다.

신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금돌성에서 솝울로 달려왔더니 소정방이 백제를 멸했으므로 이제 신라를 칠 간계奸計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소정방은 당나라를 떠날 때 이미 백제를 멸하고서는 신라를 쳐서 군량과 군사를 확보한 뒤 고구려를 남과 북에서 협공하려는 당 고종의 밀지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소정방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기옥형이었다. 소정방은 당나라에 안치되어있는 선기옥형이 고주몽의 모사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정방이 나라를 위해 선기옥형을 탐냈는지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선기옥형을 찾으려고 했는지는 그가 선기옥형에 대한 언행을 삼갔으므로 파악할 수 없으나 소정방은 백제를 치고서는 곧 바로 부장들을 동원하여 선기옥형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소정방이 신라군이 늦게 도착했음을 빌미로 신라를 압박한 것도 선기옥형을 빼앗으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올 때 주몽제가 소서노에게 하사한 선기옥형 뿐이었다. 소정방은 고구려를 지목했다. 선기옥형의 원형이 백제에는 없었으므로 고구려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김유신이 이 간계를 탐지하여 태종에게 보고하고 전략을 세웠는데 장수 김다미가 말했다.

‘신라병에게 백제병의 옷을 입혀 당군을 치면 당군이 우리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이므 로 그 때 군사를 움직여 당군을 궤멸하자.’

고 했다. 김유신은 흔쾌히 승낙했으나 태종이 반대하여 당군을 치는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소정방도 신라군의 작전을 알고 신라를 치는 일을 포기했다.

 

# 백제 부흥운동은 - 신라본기, 김유신전, 해상잡록, 당서, 일본서기의 자료를 보면 의병활동을 ‘다물(옛 것을 되찾는다는 뜻, 고조선시대와 고구려에서도 다물군이 있었음)’ 이라 하였으며

남부의 동북(전라도 금산, 진안),

서부의 서반(의병장 부여복신 - 충청도 대흥, 홍주, 임천),

중부(충청남도 연기)에서 의병이 일어나 활발하게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부여복신은 왕자 풍을 왕으로 세워 싸웠는데 고구려의 남생이 구원병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쳐 복신을 응원하였으며, 바다 건너 왜도 화살 10만개를 보내 도왔다.

 

* 신라는 성읍국가로써 경주평야에 위치한 진한 12개국의 작은 나라들 가운데 제일 작은 한 부족국가였다. 그러나 차차 주변 국가를 정복하여 한기 7600년 경(AD. 5세기)에는 국가 형태를 갖추었고 한기 7850년 경(AD. 7세기 중반)에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서쪽의 접경 백제와 북쪽의 접경 고구려가 강대하여 국가의 안위가 늘 불안하였다. 신라는 이를 선린근교善隣近郊의 외교정책으로 지탱하다가 백제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당 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함으로써 동서통일東西統一을 하였다. 통일 뒤 당나라가 한국 경영의 야심으로 설치한 백제의 웅진도독부, 고구려의 안동도호부, 신라의 계림도독부를 축출하여 당 나라 세력마저 제거함으로써 자주적인 한국 통일의 명분을 세웠다. 동서통일의 바탕에는 가야세력의 김유신이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김춘추의 외교가 남달랐던 데 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잠입하여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견제해줄 것을 요청하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사사私事로움을 잊고 3국은 백 성을 모아 당나라 장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이루리라. 전승 뒤에 인의仁義로 다스리자’

며 당나라를 정복할 것을 제안한다. 그 때 중국은 고구려 정복에 실패한 수 양제가 실각하여 그 후유증으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는 혼란기였으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합하면 중원을 경영할 수 있다는 이상을 제기한 것이다. 이미 백제는 상대등 성충이 동의하였으므로 신라가 합세한다면 중원정복의 이상이 실현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일의 불가함을 내세워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에게 2년간 억류되었다. 김춘추는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고구려가 요청한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짓말(토끼와 자라의 용궁 우화 인용)과 김춘추를 구하려는 김유신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김춘추를 방면하였다. 고구려에서 풀려나오자말자 김춘추는 왜로 건너가 연합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하자 다시 당나라로 밀입국하여 정벌 뒤 백제 땅을 신라에 복속한다는 당 태종의 약조를 받고, 스스로 아들 왕문을 인질로 맡기고서 당나라와 연합을 이뤄낸다. 동서통일 뒤 당나라의 한반도 경영 획책을 축출하였지만 이는 대동강 이남의 2국통일 또는 백제 합병의 동서통일로써 고조선과 고구려의 광활한 강역 1/100도 못되는 축소통일이었다. 이후 한민족은 동북아의 넓은 대륙을 잃고 웅지를 펴지 못하였으니 신라의 동서통일은 대한역사에서 대륙한국을 잃어버린 가장 애석한 일이었음

 

* 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 는 사서史書의 기록에 이름만 있을 뿐 사라져버렸는데 1989년 남당 박창화가 필사筆寫한 발췌본拔萃本이 등장하여 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진위眞僞논쟁이 치열하였다. 박창화는 필경사로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근무하였는데 이 때 도서관에 비치된 화랑세기를 몰래 필사한 것으로, 약간의 문제점은 있으나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다.

 

* 공식적으로 일제는 강점기 초에 대한사를 말살하기 위하여 대한사를 비롯한 고서적과 고문서를 낱낱이 수거하여 폐기하거나 소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38년 6월에 발행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를 보면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에 서적 4950종을 수거하였고, 1910년 11월부터 12월 2개월에만 고서적과 고문서 51종 20만여 권을 수거하였다고 기록했다. 또 일본 사학자며 평론가였던 하라타 사카에루(原田 榮)는 저서 ‘역사와 현대, 1981년 발행’ 에서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顧問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가 대마도에 조선사료 탐사를 갔는데 조선고문서류 6만6469매와 고기록류 3576책 그리고 고지도 34매를 은폐하거나 분서(불태움)했다고 실토하고 있다. 일제의 고서 수거에는 복식사服飾史나 음식사飮食史 그리고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대한에 대한 기록이면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어 일제가 얼마나 치밀하게 의도적으로 대한기록을 말살하였는지 그 역사 훼손이 가증스럽다. (일제의 선군조선을 비롯한 대한사 왜곡과 말살 주제의 최태영 박사 글을 우리 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가 따왔고 Daum BLog에 ID 치우천왕이 게재하여 인용함) 그러나 남당 박창화의 증언처럼 일제는 대한고서적이나 문서를 모두 폐기하지는 않았다. 극비의 금기구역인 일본 궁내성도서관에는 수만 권의 대한서적이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화랑세기는 대한고대사인 3국사기 보다 460여 년 앞선 기록임

 

* 마의태자는 경순왕 김부의 왕자 김일이다. 강원도 인제의 김부리 혹은 김부대왕리는 경순왕이나 마의태자와 연관이 있는 마을이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고려 왕건의 위세에 눌려 천년왕국 신라를 스스로 들어 바치려고 하자 피를 토하며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자의 자리를 벗어던져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오빠를 좋아했던 동생 덕주공주가 따라왔다. 마의태자는 세상을 버리려고 하였으므로 공주를 말렸으나 공주는 뜻을 굽히지 않아 두 남매는 거친 삼베로 옷을 해 입고 열매와 풀뿌리를 캐어 먹었으며 바위 틈과 짐승굴에서 잠을 자는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덕주사는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후기 역사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후손이 여진으로 들어가 금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금나라가 신라의 후예라는 기록은 정설이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松漠紀聞’ 에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 청淸 황실의 역사서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는 ‘신라 왕의 성씨를 따라 나라 이름을 금이라고 한다’ 고 했다.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 에는 왕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 라고 했는데 풀이하면 ‘신라를 사랑하고 늘 마음에 새겨라’ 는 뜻이다. 또 ‘시조는 함보(법명, 이름은 김행 또는 김준)인데 60세가 넘어서 망명하였다. 형 아고보홀은 고려에 남았다’ 고 했다. 김준은 의자왕 김부의 손자고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다. 조선 숙종대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에서 김준은 3형제인데 혼자 여진으로 망명하여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함

 

*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한 역사학계의 발표가 활발하다. 중국은 고구려와 대진국 (발해)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조작하여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한다. 또한 제주도 남쪽 대한의 관측시설이 설치된 이어도 (제주도 어부들이 죽으면 간다는 이상향으로 이어도 사나라는 민속노래가 전함)를 분쟁지역화 하려고 하고, 일본은 독도를 다께시마 라며 일본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미나 발표의 요지要旨는, 이러한 상황에서 ‘금金, 청淸나라를 대한사에 편입해야 한다 (2006. 9. 14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고구려연구회 세미나)’, ‘중국의 동

북공정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에서 ‘한漢 . 당唐나라 이후 중국 한족漢族은 만주를 완전히 지배한 적이 없다’ 며 이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국 등 한민족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중국의 지방정권 역사로 편입하려는 악의적인 시도에 대응하는 한국고대사 바로 세우기 문제 제기다. ‘한국역사교과서는 중화中華사상에 물든 사대주의사관으로 만주지역에서 성립된 요遼, 금金, 원元, 청淸나라를 모두 중국역사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 당 이후 중국 본토(중원中原)에 들어선 송宋나라와 명明나라가 북방민족인 금과 청에 각각 정복당했고 당나라 멸망 이후 1949년 공산중국이 건국될 때까지 1000여년 간 한족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중국과 역사 갈등을 겪은 몽골은 흉노 - 선비 - 유연 - 돌궐 - 위구르에 이어 요와 원을 자국역사로 편입했다. 금나라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마의태자의 자손이며,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 청 태조가 형제국이라고 국가의 뿌리를 인정한 바 있다. 금나라와 청나라는 한민족역사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정치적 차원으로 본다면 중앙정부는 35개 국가가 부침을 했는데 지방정권이 700년의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역설이 성립되고, 중국이 확보한 현재의 시점에서 영토문제, 속지국가주의라면 고대국가는 영토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대에서는 영웅천하였으므로 뛰어난 지도자가 떨쳐 일어나 무리를 규합하여 국가를 건설하고 영토를 넓혀 국가를 이루었다가 패망하기를 반복하였다. 중국도 고구려 700여년 동안에 35개 국가가 평균 15년의 부침을 하였지 않은가? 현대의 국경 같이 인공위성으로 측도하여 선을 긋는 명확한 영토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시대의 영토개념을 고대에 적용하려는 의도는 넌센스가 아닌가?

 

* 무영탑無影塔은 석가탑의 별명인데 불국사를 완성한 김대성은 절 안에 두 개의 탑을 짓고자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석수장이를 초빙한다. 아사달이다. 아사달이 신라로 초빙되어 다보탑을 짓고 석가탑을 쌓는 동안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아사녀가 신라로 아사달을 찾아온다. 그러나 탑을 짓는데 여자를 만나는 것은 금기라며 만나지 못하게 하면서, 구지 보고싶으면 달이 밝은 날 밤 불국사 앞 영지影池에 탑과 탑을 짓는 아사달의 그림자가 뜨므로 그림자로나마 남편을 보라고 귀띰을 해준다. 아사녀는 영지에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다보탑만 보일 뿐 석가탑은 보이지 않아, 달이 밝은 밤마다 영지를 헤매던 그녀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영지에 빠져 죽고만다. 탑을 완성하고 나와 뒤늦게 아사녀가 죽은 일을 안 아사달도 영지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

 

◎ 신라왕국, 1000년의 역사

 

* 성읍국가 연맹시대

한기 7140년 - 7711년(1대 박혁거세 BC. 57년 - 22대 지증왕 AD. 514년), 571년 간

 

* 신라라는 국호는 6세기 초 지증왕 때 지정되었는데 그 전에는 사로, 사라, 서나, 서라, 서벌로 불리었다.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라는 뜻으로 고대사회에서 성역으로 섬겼던 ‘수풀’ 의 뜻이 있다. 신라는 고대국가들처럼 성읍국가(부족국가)로 시작되었다. 성읍국가로써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를 잡은 급량, 사량, 본피, 한지, 습비, 사로 등 6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경주는 신라 1000년의 도읍지다. 한 고을이 천년을 이어 도읍지로 역사를 이어온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경주는 본래 ‘새 벌’, ‘서나벌’, ‘서라벌’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서울’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한기 7140년(BC. 57년)에 경주평야에 세운 나라로써 건국 당시에는 6개 부족을 바탕으로 형성된 진한 12개국 중 하나로 가장 작은 나라였다. (박)혁거세는 급량 출신으로 거서간이 되었는데 사량 출신의 (김)알영과 혼인하였다. 이는 6부족에서 가장 강대한 두 부족이 연합함을 뜻한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인도 Cholla 왕국 도래설과 수로왕비 허황옥의 아유타국 도래설)으로부터 진출한 새로운 세력 (석)탈해부족에게 복속된다. 탈해부족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혁거세부족을 제압했는데 탈해가 죽자 해체된다. 이후 신라는 부족연합 또는 군사정벌로 성읍국가를 통합하여 연맹국가가 되었으나 성읍국가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신라가 비록 종주국 역할을 하였다고는 하나 영향력이 미약하여 성읍국가들은 신라 수도 금성으로 쳐들어오는가 하면 토착세력들 가운데는 중국의 군현과 내통하는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한기 7500년 경(AD. 4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 동남부의 군현을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 대 세력이 한국 중부지역에서 대립하자 한기 7550년 경(AD. 4세기 중엽) 낙동강 유역의 성읍국가들이 신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 연맹국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를 고증하는 것이 지도자의 호칭이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은 권력 통합의 의미가 아니었는데 내물마립간(AD. 356년 - 402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마립간(으뜸가는 지배자)은 권력자로써 권위를 부여한 명칭이다. 이 시대부터 왕권이 확립되고 왕위를 세습한다.

 

* 3대 유리이사금 때 불리운 ‘도솔가’ 는 가악의 시초며, 경주 일대 6부를 정리하고 성씨를 하사하였고 17관등제를 정비했다. 5대 파사이사금 때는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군비를 강화하여 서쪽 백제를 견제하고 남쪽의 가야에 대비하여 마루성을 축조했고 서울에는 궁성인 월성을 신축했다. 16대 홀해이사금 때는 벽골지(김제)를 축조하여 농업의 혁신을 이루었다. 19대 눌지마립간은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견제하기도 했다.

 

◎ 신라왕국시대

한기 7711년 - 7977년(23대 법흥왕AD. 514년 - 36대 혜공왕 AD. 780년), 266년 간

 

* 김씨 왕가의 세습으로 한기 7650년 경(5세기 중반) 이후에는 왕위 부자 상속제도가 확립된다. 내물마립간 때 한기 7574년(AD. 377년)과 한기 7579년(AD. 382년) 두 차례 고구려의 협조를 얻어 중국 북조의 전진에 사신을 보냈는데 한기 7579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는 전진의 국왕 부견이 ‘경이 말한 해동의 사정이 전과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 고 묻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나라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이 지금 해동은 달라지고 있다’ 고 대답했다. 신라왕국의 건국을 말한 것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원조를 받았는데 광개토대왕비문에 한기 7537년(AD. 340년)에 5만명의 고구려 기병과 보병이 신라 국경지대에 출병하여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와 위의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멀리 낙동강 중부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를 빌미로 신라 조정의 왕위 계승을 간섭하는 등 신라의 자주력을 침해하였다. 고구려가 한기 7624년(AD. 427년)에 도읍을 통구에서 평양으로 남하하자 신라는 위협을 느껴 한기 7630년(AD. 433년)에 적대적 관계였던 백제와 혼인동맹을 맺어 대처한다. 한기 7672년(AD.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신라와 백제는 다시 혼인동맹으로 유대를 강화했으며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했다.

 

* 한편 이 시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기 위하여 개혁적인 통치를 단행하였다. 왕족과 귀족의 혈연에 의한 6부를 개선하기 위해 한기 7666년(AD. 469년)에 경주지역 구분을 새로이 하였으며, 한기 7684년(AD. 487년)에는 우편소 설치하고, 한기 7687년(AD. 490년) 도읍지에 시장을 개설하여 물류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조장했다. 한기 7600년 경(AD. 5세기)에는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를 구축하였다. 이는 황남대총 등 국력을 기우린 사업을 펼친 것으로 증명된다. 지증왕(AD. 500 - 514년)은 김씨 왕실의 종묘인 신궁을 신축했으며, 이로써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통치체제가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정치안정을 위하여 귀족세력과 타협을 도모한 것이다. 이후 법흥왕의 개혁적통치로 왕권은 안정되었고 농사를 장려하고 우경제(농사에 소를 이용)를 시행하여 농업발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 중국의 정치제도를 수입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지도자 성격의 마립간 대신 강력한 통치를 상징하는 중국 왕호인 왕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한기 7702년(AD. 505년)에는 지방행정제도를 주군제도로 확립하였으며, 한기 7699년(AD. 502년)과 한기 7705년(AD. 508년)에는 중국 북조의 북위와 외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기 7579년(AD. 382년) 이래 120년 동안 단절되었던 외교의 복원이었다.

 

* 법흥왕(AD. 514년 - 540년)은 한기 7717년(AD.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을 17관등으로 정비하였으며, 골품제도의 중요규정을 개정하여 진골 귀족회의에서 상대등 선출을 제도화하였다. 국가체제를 법제화, 조직화한 것이다. 아울러 불교를 공인하여 사회적 기반을 확립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사상적 발판 구축하였다. 한기 7733년(AD. 536년)에는 ‘건원’ 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과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자신감을 들어냈다. 진흥왕(AD. 540년 - 576년)에는 국가체제를 재정비함으로써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미 법흥왕 때 합병한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하여 함안의 아라가야, 창령의 비화가야, 합천의 다라가야를 병합하였다. 한기 7759년(AD. 562년)에는 이사부 장군이 고령의 대가야를 쳐서 정복하였는데 이 때 화랑 사다함의 공적이 컸다.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유역을 통합하였고, 이어 진흥왕의 한강유역 정복, 진흥왕(AD. 550년)의 백제의 도살성(천안, 증평 추정) 함락, 고구려의 금현성(전의 추정) 정복 등 차례로 접경 주변을 복속시켰다. 이듬해에는 연호를 ‘개국’ 으로 개정하였으며, 백제의 성왕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한강유역 침략하였으나 신라는 오히려 한강의 상류인 죽령 이북의 고현(철령)과 죽령 이남의 10군을 점령하고, 2년 뒤 한기 7750년(AD.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한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한강유역을 확보했다. 한기 7751년(AD. 554년)에 동맹 위반으로 분격한 백제 성왕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왔으나 이를 관산성(옥천)에서 맞아 오히려 성왕이 전사하고 백제의 30,000 대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강유역은 평야지대로써 물산이 풍부하고, 중국과 해양교통로로써 이후 통일외교정책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후 신라는 점점 강대해져 함흥평야까지 점령하였고, 진흥왕은 창령과 북한산의 황초령과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우고 단양에는 적성비를 세웠다. 한기 7757년대(AD. 560년) 신라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 그러나 이후 한기 7757년(AD. 560년)과 한기 7857년(AD. 660년) 100년 동안에 국토 회복을 노리는 백제, 고구려와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났다. 진평왕(AD. 579년 - 632년) 후반기부터 두 나라의 침략이 본격화되었으며, 선덕여왕(AD. 632년 - 647년) 때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 한기 7739년(AD. 642년)에는 당항성(남양)이 함락 직전의 위기를 겪었고, 낙동강 방면의 제 1선 기지인 대야성(협천)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신라는 서부 국경선인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강화를 도모하였으나 당나라는 여왕의 나라라고 업신여김으로써 신라의 내분을 조장하였고 이는 끊이지 않은 반란으로 점화되었다. 그러나 명신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이 있어 이를 수습하여 평정하였고, 김춘추는 선덕여왕이 퇴위하자 진덕여왕(AD. 647년 - 654년)을 옹립함으로써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여 신라 수호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통일전쟁의 대전환을 모색하였다. 결국 태종무열왕은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등극한 문무왕(AD. 661년 - 681년)이 고구려를 정복함으로써 신라는 통일의 숙원을 달성한다. 이어 옛 고구려 땅과 백제를 경영하려고 도호부를 설치한 당나라를 축출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통일의 의지를 확립한다.

 

◎ 내란시대 - 분열과 자멸

한기 7977년 - 8132년(37대 선덕왕 AD. 780년 - 56대 경순왕 AD. 935년), 155년 간

 

* 전제왕권은 강력한 국가체제로 신라의 강역을 넓히고 외교를 전개하는데는 유리했으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갈등을 수반했다. 황금기였던 경덕왕(AD. 742년 - 765년) 때는 폐지된 진골귀족들의 녹읍이 한기 7954년(AD. 757년)에 부활되었다. 또한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관청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하는 한화정책을 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즉위한 혜공왕(AD. 765년 - 780년) 때는 친왕파와 반왕파의 여섯 차례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런 연유로 경덕왕 말년부터 제작한 성덕대왕 신종은 한기 7968년(AD. 771년) 말에야 완성되었다. 특히 한기 7965년(AD. 768년)에 일어난 귀족 ‘대공의 반란’ 은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반왕파들이 득세하여 왕권을 쥐기도 했다. 끊임없는 내분에 휩싸인 신라는 지방호족들 간의 정권쟁탈이 날로 심해졌다. 9세기 초 애장왕(AD. 800년 - 809년) 때는 숙부가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율령을 개정하고 5묘제도를 확립하는 등 왕권강화에 힘을 썼다. 그러나 소외된 귀족들의 반란이 그칠 새 없었고 이 틈을 타 지방호족들은 세력을 확장했다. 청해진을 근거로 한 장보고가 한 예다. 그 뒤 경문왕(AD. 861년 - 875년)과 헌강왕(AD. 875년 - 886년)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개혁정치를 하였으나 왕권을 정립하지는 못했고 진성여왕이 즉위한 시기에는 내란과 분열이 극에 달했다. 설상가상으로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조세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농민반란의 명분이 되었고, 이를 장기간 수습하지 못하여 50여년의 내란이 지속됨으로써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끝내 한기 8124년(AD. 927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 경애왕을 척살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시기는 견훤과 궁예가 필사적인 전쟁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신라는 각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명맥만을 유지했다. 한기 8115년(AD. 918년) 궁예를 쓰러뜨린 뒤 즉위한 왕건은 신라에 유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고려가 강건해지자 경순왕은 국운이 더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기 8132년(AD. 935년) 11월 스스로 천년사직을 들어 고려에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경주 사심관으로 여생을 보낸다.

 

◎ 신라의 정치, 문화, 사회제도

 

* 골품제도

신라가 고대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귀족 상호 간의 위계질서 확립을 정비한 사회제도로써 성골과 진골 그리고 6두품에서 1두품까지 8개의 신분위계다.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 왕으로 선택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하였다. 진골도 왕족이었으나 왕으로 선택되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다가 성골이 소멸되자 김춘추부터 왕위에 올라 신라 멸망 때까지 진골이 왕위를 이었다. 뒤에 새로운 김씨라 하여 가야의 왕족, 왕비족,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안성 등은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영화를 누렸다. 골품제도는 성골이 소멸한 뒤에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과 일반 백성들로 정리된다. 후기 신라에서는 이 골품제도로 갈등이 깊어져 반 신라세력이 형성된다. 정치적 출세는 물론 같은 신분끼리의 결혼, 가옥의 크기, 옷의 색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제약과 특권은 왕권이 강성할 때는 중앙집권의 수단이었으나 국론의 분열과 갈등의 요인으로써 국운쇠망의 요인이 되었다. 골품제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아니고 고조선시대에서도 지방호족인 5가의 부족장들이 정치를 분담하여 행사하였는데 계급사회의 형성은 정치적인 권력 배분에서 비롯되었다.

 

* 화백제도

호족들의 연합 정치제도로써 그 기원은 연맹시대의 정사당 혹은 남당이라는 제도에서 기원하였다. 이 제도가 활성화된 때는 화백회의장으로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다.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불교의 공인 같은 국가 중대사를 전원 합의에 의해 결정했다. 그러나 통일시기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집사부가 설치되자 실권을 잃었다. 고조선시대에 화백회의가 있었고 신라의 화백제도와 다름이 없다.

 

* 화랑제도

신라시대 국가에서 인재발굴의 의도로 장려한 청소년 수련단체인데 화랑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 이라는 말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고조선의 천지화랑에서 조의(선인)들이 바깥에 나갈 때 머리에 천지화(무궁화)를 꽂았으므로 비롯된 말이다. 화판, 선랑, 국선, 풍월주로도 불렀다. 단체정신에 집착한 교육적, 군사적, 사교적,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력신장에 필요한 군사와 행정 지도자의 양성기관이었다. 또한 골품제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으므로 벼슬과 관직에 대한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도 있었다. 화랑 초기의 원화 남모와 준정은 여성으로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렸는데 무리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춘 낭도들은 인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가 심하여 준정이 남모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원화는 남성으로 바뀌었고 역할도 달라졌다. 한기 7759년(AD. 562년)의 대가야 정벌 때 화랑 사다함의 공적이 크게 부각되었는데 초대화랑은 설원랑으로 알려졌다. 경덕왕 때 충담사의 10구체 향가 찬기파랑가는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미한 노래로써 화랑정신이 쇠퇴해가는 시대 은유적 노래다. 화랑의 조직구성은 화랑 한 명에 승려 약간 명이 포진하고 다수의 낭도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3년 의무기간 동안 단체수련을 하였다. 연령은 15세 - 18세며 명승지와 국토를 순례하여 애국심을 기르고 도의를 연마했다. 고조선시대에 천지화랑이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으로 백제에서는 싸울아비(일본으로 전파되어 사무라이가 됨, 싸울아비와 사무라이의 연관은 언어적으로 무리라는 주장이 있음), 신라에서는 화랑으로 계승되었다. 찬기파랑가, 화랑세기, 세석, 세속5계 등 관련 유적이 있다.

 

* 불교

신라의 불교는 정치 사회적으로 국가경영에 크게 영향력을 미쳤다. 지도자들이 불교를 통해 사회통합과 사상적 일체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우렸기 때문이다. 동서통일에도 불교는 사회통합의 역할이 컸다.

제 1기 - 불교 도입기로 한기 7724년(AD. 527년) 눌지왕 때 아도화상으로부터 받아들였는데 고구려(한기 7569년, AD. 372년), 백제(한기 7581년, AD. 384년) 보다 150여년 뒤졌다. 법흥왕 때 이차돈은 22세의 나이로 법흥왕의 근신이었는데 왕이 불교에 심취한 반면 신하들은 불교의 전래를 우려하고 배척하였다. 왕권이 신권을 제어하지 못하는 정치적 상황이었으므로 이차돈은 불교의 진흥을 위한 법흥왕의 의지를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한다.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입니다’ 라며 불법을 위하여 자신의 한 목숨을 희생할 것을 간언하였다. 왕은 천경림에 절을 지으면서 이차돈이 왕명을 도용하여 불사를 일으켰다고 소문을 내자 신하들이 이차돈을 처형해야 한다고 일어났다. 이차돈은 형장에서 ‘내가 죽으면 기이한 일이 일어나리라’ 예언했는데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쳤다고 한다.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왕실이 돈독한 신자가 되었고 왕이 곧 부처라는 왕권, 국가통치의 기본이 확립되었다. 경주 백율사는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순교비가 있다. 순교비에는 요동치는 땅과 처형되어 구르는 목 그리고 목이 없이 단정히 꿇어앉은 이차돈의 상이 새겨져 있다. 불교식 왕명을 가진 왕은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다.

제 2기 - 불교가 정착한 단계로 7개 사성전(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봉덕사, 봉은사, 영묘사, 영흥사)을 국찰로써 건립하고 국가 차원에서 융성한 불교는 사회사상으로 정착되었다. 공적인 승인을 받아 국가가 불교 흥륭의 기반이었으나 민간 개인적인 수행자로 노힐부득, 달달박박, 광덕, 엄장들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가계와 화엄계 불교가 양립하였다. 신앙적으로는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 관음신앙이 공존했다.

제 3기 - 불교의 개혁기로 선종이 유입되어 불교의 일대 변화가 이루어졌으나 기존의 화엄종과 법상종도 왕실과 지배층에서 융성하였다. 신라 말에 국가가 혼란하자 신인종이 재등장하여 미륵사상 대두되었다. 후고구려를 복위한 궁에는 미륵부처의 환생이라고 자처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