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水原華城] 성곽길
□ [수원] 화성 성곽길 스탬프 투어
□ 일 시 : 06월 07일 (첫째 금요일 / 흐림 /17º ~ 26º/ 습하고 무지더웠슴)
□ 출발지 :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3가.(팔달문 로타리)
□ 도착지 :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3가.(팔달문 로타리)
□ 산행구간 : 팔달문 → 서장대 → 장안문 → 동장대.(원점산행)
□ 코스 : 팔달문(八達門)→서남각루(西南角樓)→서남암문/서남포사(西南暗門/西南舖舍)→서포루(西舖樓)→
서암문(西暗門)→서장대(화성장대) 華城西將臺→서노대(西弩臺)→서2치(西2雉)→서포루(西砲樓)→
서1치(西一雉)→서북각루(西北角樓)→수원 화서문(水原華西門)→북서포루(北西砲樓)→북서적대(北西敵臺)→
장안문(長安門)→화홍문(華虹門).북수문(北水門)→용연(龍淵, 龍池)→북암문(北暗門)→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동북포루(東北舖樓 각건대)→동암문(東暗門)→
동장대(東將臺)또는 연무대(鍊武臺)→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동북노대(東北弩臺)→창룡문(蒼龍門)→동남각루→수원화성박물관→화성행궁→화서문안내소(선물수령)→팔달문(八達門).
약 11.1km / 4시간 27분.(식사시간 포함/스탬프 찍으러 안내소방문)
□ 카메라와 함께한 청마(靑馬).
□ 사진 청마(靑馬).
몇년전에 다녀오고, 오랜만에 다시 수원화성을 들려 보기로하고 대전역에서 09:11분 열차를 타고 10:40분에 도착하여 13번 버스를 타고 팔달문정류장에 내려 서남각루(西南角樓) 방향으로 걷기로하고 팔달문 안내소에 들려 지도를 얻을려고 서있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분이 스탬프함에서 도장을 찍는것을 보고 이야기를 했더니 자세하게 잘 알려주어 안내소에 예기를 했더니 스탬프북을 한권을 주시며 1경에서 10경까지 찍으면 소정의 자그만 선물도 준다고 하여 첫번째 팔달문 9경에 스탬프를 찍으며 걷기를 시작한다.
스탬프를 찍으며 다니는 재미도 솔솔한데, 안내소를 찾는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것 같고 한참을 찾아야만 하고 성곽길을 벋어난 곳에도 가야하고, 스탬프 10개를 다 찍으면 다시 화서문 안내소와 연무대 안내소 두곳중 한곳을 선택해서 그곳으로 다시가야만 완료가 된는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많이 소요가되고 날씨까지 습하고 무더워서 조금 힘들엇다. 그리고 화성행궁 스탬프를 찍을려면 입장료를 내고 행궁으로 들어가 찍고 나와야만 한다. 물론 나이가있어 무료였지만... 스탬프투어를 끝내고 시장에서 만두를 맛응 보았는데 와우 맛이 정말 좋드라구요..
수원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 화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남포루(南砲樓)
남포루는 팔달산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릅니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습니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습니다.
서남암문(西南暗門 西南舖舍)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내 비상 출입문입니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습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습니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입니다.
*오성지 : 다섯 개의 구엄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서3치
서3치는 서포루와 서남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서3치 바깥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팔달산에 설치한 다른 치성에 비해 길이가 길습니다. 치성 안쪽으로는 여장에서 1m 정도 돌출한 담을 쌓고 가운데 출입구를 냈습니다. 적대와 비슷한 구조는 서3치와 남치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서포루(西舖樓)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포루 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효원의종
수원시의 상징물인 시목(은행), 시화(철쭉), 시조(비들기) 그리고 수원화성과 홍화문을 전면을 새겼으며 그 규모는 구경 2.15m, 높이 3.54m이고 총중량이 3,300관(약12.5톤)에 이르는 대형종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서암문(西暗門)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입니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풍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합니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꺽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습니다.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입니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쥐휘소로 썼습니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현륭원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좋아진 형태입니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령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습니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령닌 성조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와 '시문'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입니다. 1795년 성조가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현판의 글씨를 직접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지은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편액은 정조(正祖 재위기간 1776~1800)의 어필(御筆·임금의 글씨)입니다.
서노대(西弩臺)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노대는 적의 도향을 살피고 깃방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습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합니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 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깍아 마감하였습니다.
서2치(西二雉)
서2치는 서포루와 서암문 사아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서2치는 팔달산 정상으로 향하는 급한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어 규모가 작습니다. 붉은 빛을 띤 다양한 크기의 성돌이 잘 남아 있는데, 평지 성벽보다 규모가 큰 장방형 석재를 하부에 설치하여 하중을 지탱하도록 했습니다.
서포루(西砲樓)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습니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습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서1치(西一雉)
서1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치성은 보통 좌우 방어 시설과 100m 이상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1치는 서북각루에서 약55m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화서문에서 뻗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을 향해 크게 꺽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치성을 가깝게 설치한 것입니다.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쌓인 통로로 서남암눈에서 서남각루에 이르는 길.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습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습니다.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입니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습니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화서문은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해 격을 낮추어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짝지붕 형태입니다.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줍니다.
화서문(華西門)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글씨입니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입니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습니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화서문(華西門)은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돌로 된 기부에 홍예문(虹霓門)을 두어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습니다.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塼築) 옹성(甕城)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입니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975년 수원 화성을 중수 공사할 때 보수되었습니다.
서북공심돈(北西空心墩)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입니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꺽이는 위치에 설치했습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습니다.
수원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북포루(北砲樓)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큽니다. '군포루'라고도 불렸습니다.
북서포루(北西砲樓)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이 중 평탄한 곳에 지은 북서포루가 가장 높습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릅니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만 남아 있습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 세 줄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습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입니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습니다.
홍이포(紅夷砲)
길이 : 216cm, 구경 : 10cm, 중량 : 1800kg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정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써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남향을 선호하기 때문에 남문인 팔달문을 정문으로 생각하는데, 수원 화성에서는 왕이 북문으로 행차하기 때문에 북문이 정문이 되는 것입니다.
'장안문'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옛날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에서 따온 것입니다. 6 · 25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8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조선 전기에 세워진 서울 남대문에 필적할 만한 당당한 외관을 갖추었고, 남대문에서는 볼 수 없는 항아리 형태의 옹성 등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춘 진일보한 성문 건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 장안문(長安門)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입니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습니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합니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합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북동치(北東雉)
북동치는 장안문 동쪽 북동적대에 붙여서 세운 치성입니다. 치성은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 쌓은 시설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북동적대 위치에서 성곽이 급하게 꺽이기 때문에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적대에 치를 덧붙였습니다.
북동치는 장안문을 지키는 중요한 위치이므로 가장 크게 치성을 만들고,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는 총안과 타구를 설치했습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는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에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북수문(화홍문)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습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습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합니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북수문(화홍문) (北水門 華虹門)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입니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습니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힙니다.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습니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전회'를 주축으로 수원주민이 힘을 모아 10년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습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하였습니다.
북암문(北暗門)
북암문은 화성 북쪾에 낸 비상 출입문입니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합니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릅니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습니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보물 제1709호)
동북각루(방화수류정) (東北角樓 訪花隨柳亭)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용두(龍頭)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습니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입니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습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습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습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이 사려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남아 있습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편액은 부여 흥산 출신의 서예가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1909~2000)의 글씨입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란 모자와 비슷해보면서 '각건대(角巾臺)'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갖췄습니다. 여장과 건물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지붕 양 끝에 놀리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동북포루의 특징을 살려 2019년에 다시 복원했습니다.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입니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합니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睥睨)를 세웠습니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입니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시 계단을 추가했습니다.
동장대(연무대)
동장대(東將臺)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 '라고도 불립니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습니다.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습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이 있습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행사를 베풀었습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습니다.
동북공심돈 (東北空心墩)
수원 화성에는 세 개의 공심돈이 있는 데 그 중 남공심돈이 1795년 가장 먼저 세워졌고,
1796년 봄 서북공심돈이 세워지고, 가을에 동북공심돈이 세워졌습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새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입니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습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습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입니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리각'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조 21년(1797)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가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다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습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입니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방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습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습니다. 동북노대는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창룡문(蒼龍門)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입니다. 창 (蒼) 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합니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합니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령장으로 쓰였습니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단계 격을 낮춘 형태입니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입니다. 옹성은 서울 홍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입니다.
창룡문 옹성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습니다.
*치성 :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샇은 작은 성
수원 화성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으로 1795년(정조19) 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습니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합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습니다.
동1포루(東一舖樓)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동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했습니다.
동1치(東一雉)
동치는 동1포루와 동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치는 꿩을 말하는데, 꿩이 몸을 잘 숨기고 엿보기 잘하는 특성이 있어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동1치는 평탄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규모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동포루(東砲樓)
동포루는 동1치와 동2치 사이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보통 평지에서는 규모를 키우고 경사지에는 규모를 줄였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과 여건에 따라 규모와 각 층의 높이를 달리 만든 것입니다. 동포루는 산상 동성구간에서 비교적 평평한 곳에 있지만 주변 성벽이 높지 않아 작게 만들었습니다. 남포루와 마찬가지로 1층과 2층은 낮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이상을 확보했습니다.
동2치
동2치는 동포루와 봉돈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벽에 8곳, 용동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동2치는 1979년에 화성을 복원하면서 다시 쌓았습니다. 본래 성돌이 붉은 색을 띤 반면 새로 쌓은 곳은 가지런히 다듬은 흰색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치성 좌우에 있는 옛 성돌에서 돌을 뜨기 위해 정을 박은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봉돈(烽墩)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입니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봉동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입니다. 높게 쌓은 대 위에 햇불 구멍인 화 (火竇: 횃불구멍) 두 다섯 개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습니다.
동2포루(東二舖樓)
동2포루는 봉돈 남쪽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동2포루는 동1포루와 마찬가지로 사방이 개방된 구조입니다. 측면 3칸인 동1포루에 비해 치성이 짧아서 측면 2칸의 건물로 만들어졌습니다. " "화성성의궤" 에는 동1포루의 모습만 실려 있습니다.
동3치(東三雉)
동3치는 동2포루와 동남각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동3치는 치성 가운데 폭이 가장 넓고 길이가 짤습니다. 성 바깥이 급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어 치성 길이는 짧게 만들고, 주변을 멀리 살피기 위해 전면 폭을 넓게 확보한 것입니다. 다른 치에는 현안을 한 줄만 내었지만 동3치는 폭이 넓어서 현안을 두 줄 설치했습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습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라고 불렀습니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습니다.
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입니다. 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를 만든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칸의 홍혜를 두었습니다. 홍예란 무지개같은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놓이 쌓아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습니다. 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대비했습니다.1922년 큰 홍수로 유실되어 2012년에 "화성성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습니다. 복원한 남수문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하부에 수로를 설치했습니다.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2대 정조가 능행할 목적으로 건립한 궁궐. 사적.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한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정조가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봉수당 서북쪽으로는 모서리끼리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장락당 정면에는 경룡관이라는 누각 형식의 삼문이 있다. 장락당 향좌측의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5량 18칸 건물이다. 복내당 앞에는 유여택(維與宅)이라는 5량가의 8칸 건물이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은 본래 읍치의 득중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행궁 앞으로는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신풍루 향좌측에는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이 있고 향우측에는 집사청, 북군영, 우화관 등이 있다. 원래 읍치 건물에는 남북 군영과 비장청, 무기고 등이 있고 나머지 외정리소, 서리청, 집사청 등은 성곽 축조 때 지은 것들이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양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복원공사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