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미니도서관
홍성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 갈 즈음, 우리 동네 인도 양쪽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는데, 걷다 보니 못 보던 것이 눈에 띄었다. 주택가 어느 집 잔디밭에 길가 쪽으로 미니도서관이 생겼다. 그 속에는 책들이 한 20여권 있었다.
마침 집 주인인 듯 흑인 남자가 밖으로 나오길 래
“미니 도서관 네가 만들어 놓았니? 혹은 토론토 시에서 만들어 놓은 거니?”
하고 물어 보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도 아니고 토론토 시도 아니고, 나의 여동생이 만들었다"고 한다.
”정말 예쁘고 참 좋은 아이디어네”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목수기술을 배웠나? 참 귀엽게 만들었다. 대패로 민 깨끗한 새 나무로 만든 미니도서관에서 나무 향기가 신선했다.
어느 날 보니 또 한군데가 생겼다. 그 미니도서관이 있는 쪽에서 반대쪽으로 이것보다 약간 컸는데, 속이 3층으로 된 좁은 공간에 다양한 책들이 촘촘히 있는 걸 보니 이 도서관은 또 언제 생겼나?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 같았다.
“Free library or Exchange” 라고 미니도서관의 이마에 써 있었다.
누구든지 가져가고 싶으면 거저 가져가고, 거기에서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갖다 보고, 다 보았으면 다시 갖다 놓든가 또 다른 책이 있으면 갖다놓고, 서로서로 보면 좋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동네 참 좋은 동네네.......
호기심이 발동해서 문을 열고 보니 어린이들의 동화책부터 소설, 역사, 여행, 곤충연구, 위인전, 영화에 관한 책, 법률에 관한 책, 기독교서적 등 아주 다방면으로 가지각색이다. 책의 크기도 다양하며 흥미를 돋운다. 아주 오래 된 듯 누렇게 바랜 책들도 있다. 나는 왜? 누렇게 바랜 책들에게 더 마음이 갈까? 누군가 오래토록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도 누렇게 바랬지만 소중하게 아끼는 몇 권의 책이 있기 때문일까. 이곳엔 모두 영어로 된 책들이다. 아무리 뒤적여 봐도 한글로 된 책은 없었다.
여행에 관한 책과 요리책 한권씩 가져왔다. 주로 사진들이 많고 커서 보기에 도 좋고 옆에 작은 글씨로 간단한 설명을 해 놓았다. 어서 보고 갖다 놔야지.......
내가 청소년 시절에는 교과서 외의 세계명작 같은 책들은 흔하게 대할 수 없었다.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다 읽은 이어령 씨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와 김형석 교수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 라는 책 등을 읽었고, 사실은 제목이 좋아서 평생의 기억 속에 머물러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동아일보를 보셨는데, 늘 사설을 오려서 스크랩 해 놓고 몇 번이고 다시 보시는 것을 보았다. 때때로 시간이 나면
“성자야, 이리 앉거라” 하시며 대청마루에 동아일보 사설 오려 놓은 것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한문이 섞여 있어서 읽는데 뚝뚝 끊겼고, 잘못 읽은 부분은 다시 읽어보라 하시며 고쳐주셨다. 그 다음은 이 사설에서 잘 모르는 단어들을 다른 노트에 모두 쓰고, 사설 속의 한문도 써서 해석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한글단어는 다 써 놓고 한글사전을 찾아 해석을 다는 데는 척척 해나갔다. 한문을 그림 그리듯 그려놓았는데 아버지는 옥편 찾는 방법을 알려주시고, 이 한문은 이렇게 읽고 이런 뜻이라고 자세히 일러주셨다.
모르는 것은 항상 담배 냄새가 진하게 나던 아버지께 여쭤보면 언제든지 자상하게 가르쳐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결혼하여 애를 안거나 등에 업고서 신문조각이라도 있으면 뚫어져라 읽기를 좋아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처럼 책이 흔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세월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때는 시력이 참말로 좋아서 아주 작은 글씨도 잘 보였는데, 72년의 세월이 나의 눈을 돋보기 3.5를 쓰게 만들었다.
동네 길을 걸으면 이 두 곳의 미니도서관을 지나게 되고 꼭 들여다보게 된다. 오늘은 책들이 많이 나갔나? 또 들어왔나?
동네에 미니도서관을 개인이 마련해 놓다니 고마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는데, 나의 도서관이었던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 토론토의 차가운 겨울 하늘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 2022.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