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 때 원폭 투하 직후의 참상을 찍은 몇 안 되는 사진들이 존재한다.
바로 ‘주고쿠 신문’의 사진기자였던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 1913년∼2005년)’가
폭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유키 다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그것이다.
폭탄이 터진 후 약 3시간 뒤에 찍은 사진들이며, 원폭 폭발 직후를 담은 유일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면 화상에 의해 부상을 입은 히로시마 여자상업학교, 히로시마 제1중학교 학생들이
미유키 다리에 앉거나 서서 경찰에게 식용유로 치료를 받고 있다.
물론 화상에 식용유로 치료가 될 리는 없었고, 통증을 달래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사진을 찍은 요시토에 의하면 이 학생들은 온 몸에 화상 물집이 잡혀 있었고
물집이 터지자 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늘어졌다고 한다.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열기와 열풍으로 인하여 산발이 되어 있고, 옷이 찢어져 있으며 화상을 입은
팔을 치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피폭되었던 부상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흘러내렸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 및 좁은 범위 내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유기 생물체가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 희생자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이 폭격으로 인해 의사와 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고군분투했으나 피해 상황은 초월적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지(Triage)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 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사선 화상은 DNA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은 다른 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며
혈관세포를 파괴하고 위장관세포를 파괴해 구토와 설사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영양 흡수가 안 되니, 아무리 먹여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이토록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 만에 죽어갔다.
방사선 피폭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뼈저린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 의사들은 비타민 A을 주사하기도 하였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곳부터 살이 썩어 나가더니 그런 다음에는 예외 없이 죽는 것이었다.
14만 명의 희생자 중 군인이 20,000명이었다. 2총군 대부분이 죽었다.
이 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으로선 이 총군 병력의 피해도 심각한 일이었다.
미군의 본토 공격을 앞두고 일본군은 결호작전을 계획하였고, 2개의 총군이 각각 서일본과 동일본
지역을 맡았다. 히로시마의 2총군 사령부 및 병력은 바로 이 서일본 방위 무를 맡은 부대인데,
이 부대가 통째로 소멸한 것이다. 10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일본인 생존자들에 의해서 맞아죽었다는
증언도 있고 일본인 의사로부터 치료를 거부 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폭발 직후, 에놀라 게이는 사력을 다해 도주하고 있었다.
폭발의 반대 방향으로 비행하고 있었기에 최초의 폭발 장면과 버섯구름을 제대로 목격한 이는
B-29 꼬리 맨 뒤쪽에 있던 후미 기총수(Tail Gunner) 밥 캐런 중사뿐이었다.
그가 찍은 7장의 사진이 히로시마 폭발을 상공에서 촬영한 최초의 것이다.
정작 폭발을 계측하라고 보내놨던 그레이트 아티스트에서 찍은 사진은 제대로 나온 게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안전거리에 들어서자 폴 티비츠 대령은 다른 대원들도 폭발 현장을 볼 수 있도록 에놀라 게이의
비행 방향을 조금 틀었다.
거대한 버섯구름과 그 밑에 통째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도시를 목격한 대원들은
“이제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항법사 밴커크 대위)라거나
“우리가 티니안에 귀환하기도 전에 일본은 백기를 들 것”(부기장 루이스 대위)이라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너무나 엄청난 위력과 그것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투하했다는 사실 때문에 굳어버린 대원들도 꽤 있었다.
놀랍게도 윌리엄 파슨스 대령도 그 중 하나였다.
에놀라 게이는 방사능을 띈 버섯구름이 점점 확산되자 관측을 멈추고 다시 전속력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후미 기총수 밥 캐런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후, 1시간 반이 경과하여 히로시마에서 무려 667km나 떨어진
지점에서도 버섯구름은 그때까지 보였다고 한다.
에놀라 게이는 총 14시간의 작전 비행을 마치고 오후 3시경 티니안 기지에 착륙하였다.
그레이트 아티스트와 빅터 91은 환영 행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중간에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에놀라 게이가 티니안에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태평양 전략공군 사령관 칼 스파츠(Carl A. “Tooey” Spaatz) 대장은
수훈 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미리 준비해놓고 활주로에서
기다리다가 티비츠 대령이 에놀라 게이에서 내리자마자 훈장을 수여했다.
티비츠는 훈장 수여를 전혀 예상 못했기 때문에 왼손에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윌리엄 파슨스 대령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의 마지막 업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는 몇 주 전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통해 전달받은 리틀 보이 우라늄 발사체
인수증 원본에 사용 기록을 추가로 기재하고 서명했다.
The above materials were carried by Parsons, Tibbets & Co.
to Hirohito as part of “DOOMSDAY”, leaving Tinian at 051645
상기 물품들은 05시 16분 45초에 티니안에서 출발하여, 파슨스 및 티베츠 등이 히로히토에게
“최후의 날”의 일부분으로서 배송하였음.
이 전례 없는 참혹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현실부정이었다.
니고연구의 총책임자이자 일본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박사가 원폭 투하 다음날인 8월 7일에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현장을 조사하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원자폭탄임을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평범한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장 위의 니시나 박사의 히로시마 방문조사에는 정보 부서를 담당하는 참모본부 제2부장이던
아리스에 세이조(有末精三) 중장이 동행하고 있었고 그는 니시나 박사로부터 이것이 원자폭탄임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대본영은 여전히 그럴 리가 없다고 일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상층부가 현실도피&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는 항복과 관련된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취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게 항복 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협상은 진행 중이었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대일 참전을 생각하던 소련으로서는 그걸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원폭 투하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어이없는 조건을
내거는 강경파가 서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미국은 일정에 따라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 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은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은 너무 늦었던 것이다.
더구나 8월 9일 회의 중에 두 번째 핵이 떨어질 때까지도 일본 지도부는 미국에게 더 이상
핵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하층부에서는 이미 소문이 다 퍼진 뒤여서 다음 공격 타겟이 어디냐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물론 보도통제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히로시마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들 선명한 버섯구름을 목격했고,
히로시마의 피난민들을 보았다.
그리고 민간 보도는 통제되었을지언정, 군 통신망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 전역의 군부대 장교들 사이에선 하루 만에 히로시마에 무언가 강력한 폭탄이 터졌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알려졌고 그 폭탄의 종류가 원자탄이라는 것도 금세 전파되었다.
이는 군부에도 대혼란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8월 7일 밤에 오사카에서 격추되어 포로가 된 전투기 파일럿 마커스 맥딜다의 사례가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측에서는 장군이 직접 포로 심문을 진두지휘했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일본도로 목을 치겠다며 칼끝을 목과 입으로 겨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구한 대답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의 정체, 그리고 그 폭탄의 다음 목표이었다.
일개 전투기 파일럿인 맥딜다에게는 그런 고급 정보 따위 없었고, 그는 대충 자신이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설명한 다음(대답을 안 했다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으로
다음 타겟이 도쿄나 교토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와 별개로 히로시마의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도쿄가 다음 타겟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것은 이 시기에 일본 관동지방에 뿌려졌던 미군 삐라다.
정황상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이후-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인 8월 8일 오후에서 9일 오전 정도인 듯하다.
일본 국민에게 고함!!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이 삐라에 쓰인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주의하여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일본 국민들은 지금 중대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연합군 수뇌부는 삼국공동선언에 의거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제시하여
무익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일본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미국은 현재 몇 명을 희생시킬지 모르는
무서운 원자폭탄을 발명하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원자폭탄은 단 한 개만으로도 그 거대한 B-29 폭격기 2천대가 한 번에 투하할 수 있는 수준의
폭탄의 위력에 필적한다. 이 무서운 사실은 여러분은 히로시마에 폭탄 한 개가 떨어졌을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익한 전쟁을 지속하려는 군사상의 모든 것들은
무서운 원자폭탄에 의해 파괴된다.
미국은 이 원자폭탄을 여러 개라도 쓸 준비가 되었으며 여러분들이 이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천황 폐하께 청원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미국 대통령은 여러분들에게 요구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신속히 받아들여,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종용하는 바이다.
따라서 일본 국민 여러분은 즉시 무력저항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단호히
원자폭탄을 비롯한 우수한 무기들을 사용하여 이 전쟁을 신속하고 강제적으로 종결시킬 것이다.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한편 일본 군부는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뒤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 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띠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 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 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원자폭탄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트리니티(서해문집 출판)에서는 일본의 대공 부대는
대규모 폭격에 너무 익숙해져서 비행기 몇 대에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Atomic bombing of Nagasaki)
칼 스파츠 태평양 전략공군 사령관과 커티스 르메이 제21폭격사령관, 폴 티비츠 제509혼성비행단장,
파슨스 대령 등 원폭 투하 작전의 핵심 인물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을 성공시킨 후 괌에 모여
다음 작전을 논의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대외적으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바로 다음 원폭 투하 작전을 속행하기로 결정하고 워싱턴 D.C.에도 보고하였다.
당초 계획은 8월 11일 투하를 목표로 했고 앨버타 프로젝트의 과학자들도 이 일정에 맞추어
팻 맨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부터 일본 기상 상황이 안 좋다는 일기예보가
들어오자 티비츠 대령을 위시한 지휘부는 8월 9일까지 일정을 당기라고 명령했다.
앨버타 프로젝트 소속 과학자들도 어디까지나 현역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명령에 따라야 했다.
2번째 원폭 투하 작전의 제1폭격 목표는 고쿠라, 제2목표가 나가사키였다.
목표가 2개로 줄어든 것은 사흘 전에 히로시마가 지도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전에 투입된 B-29는 총 6대로 줄어들었다. 기본적인 작전의 얼개는 히로시마와 거의 동일했다.
기상관측기 2대. 앞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에놀라 게이는 나가사키 작전에도 출격했다.
제1목표 고쿠라에 대한 기상관측이 임무였다.
제2 목표 나가사키 기상관측은 Laggin’ Dragon(호출부호 빅터 95).
예비기 1대. 이오지마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역할은 풀 하우스(Full House,
기체번호 44-27298, 호출부호 빅터 83)가 맡았다.
타격대 3대. 원자폭탄 투하는 복스카(Bockscar, 기체번호 44-27297, 호출부호 빅터 77)가 담당했다.
원래 위대한 예술가(The Great Artiste, 기체 번호 44-27353, 호출부호 빅터 89)의 기장이자 뛰어난
비행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찰스 “척” 스위니 소령이 임시로 복스카의 조종을 맡았다.
제393 폭격비행대대에서 토머스 패러비 소령과 폭격 솜씨 제일을 놓고 겨루던 폭격수 “예술가”
커미트 비헌 대위도 복스카로 옮겨왔다. 원래 당초 계획에서 첫 번째 작전 투하는 에놀라 게이,
두 번째 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첫 번째 작전에서 위대한 예술가에 폭발 관측을 위한 과학 장비들을 잔뜩
설치해놓다 보니, 두 번째 작전에서 이 장비들을 해체하고 다른데 옮기기가 너무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와 승무원 팀만 바꾼 것이다.
따라서 폭발 계측 임무는 당연히 위대한 예술가가 계속 담당했다.
사진 촬영과 관측은 Big Stink(호출부호 빅터 90)이 맡았다.
두 번째 작전에서는 윌리엄 파슨스 대령을 대신하여 프레드릭 애시워스(Frederick Ashworth)가
폭탄 관리 담당으로 복스카에 탑승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뉴욕타임스 윌리엄 로렌스 기자가 취재를 위해 복스카에 동승하였다.
팻 맨은 폭축형, 내파형 원자폭탄이었으므로 리틀 보이와 달리 B-29가 이륙 중 추락하더라도
유폭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팻 맨은 조립 및 장전을 마친 상태로 복스카에 적재되었다.
다만 앞 단락에서 서술된 안전장치(초록색/붉은색 플러그)는 리틀 보이와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있었으며 폭격 직전에 수동으로 해제해야 했다.
급하게 준비를 한 탓이었는지,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 작전은 시작부터 문제를 드러내었다.
작전 시작 직전의 최종 검사에서 복스카의 예비 연료 펌프가 고장 났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고장으로 약 640갤런(약 2,400리터)의 연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작전 계획대로 일본까지 왕복 비행할 수는 있었지만 매우 빠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펌프를 교체하려면 또 몇 시간이 소요되고, 이미 팻 맨을 탑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티비츠 대령은 그냥 작전 속행을 명령했다.
문제는 계속 이어졌다. 타격대를 구성하는 3대는 심야에 티니안 기지를 이륙한 다음 각자
날아가다가 일본 가고시마현 남쪽의 야쿠시마에서 규합을 하기로 했다.
사흘 전 히로시마 작전에서도 에놀라 게이, 위대한 예술가, 빅터 91은 일출과 동시에
규합점이었던 이오지마 상공에서 정확히 만나 타격대를 구성하여 히로시마로 향했다.
그런데 8월 9일 작전에서는 사진 촬영을 담당했던
Big Stink가 항로와 고도를 잘못 선택하여 규합에 실패하였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Big Stink는 당초 계획 고도보다 9,000피트(2,700m) 가량 더 높은 곳에 있었고
규합 항로도 야쿠시마 상공에서 당초 계획했던 패턴 비행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전대장인 폴 티비츠 대령은 타격대 규합에 15분 이상을 소요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복스카를 조종하는 척 스위니 소령은 Big Stink를 기다리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무려 40분을 야쿠시마 상공에서 소비하고 말았다.
그동안 목표 기상보고가 들어왔는데 고쿠라는 아침 안개가 끼어있지만 곧 쾌청해질 것으로
기대 나가사키 역시 아침 안개가 걸려있고 구름 2/10으로 비교적 쾌청이라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복스카 기장 척 스위니 소령은 제1목표 고쿠라를 폭격하기로 하고, 위대한
예술가만을 대동하여 고쿠라로 향했다.
그런데 복스카가 고쿠라 상공에 도착해보니, 기상보고와 달리 안개가 계속 끼어있고, 더군다나
전날에 제21 폭격사령부의 B-29 폭격대가 인근 야하타 제철소를 폭격한 여파로 짙은 연기가
끼어있어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복스카는 고쿠라 상공을 3번이나 폭격 항정(bomb run)으로 비행하였으나, 안개와 연기로
결국 육안 목표 확인에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무려 50분 이상이 소요되었고 이 와중에
통신 담당 제이콥 비저 중위(히로시마 폭격 때는 에놀라 게이에 탑승)는 인근에서 일본군
요격기의 활동을 통신 감청하고 경고를 발령했다.
더 이상 고쿠라 상공에 머무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척 스위니 소령은 제2목표인
나가사키를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위대한 예술가와 함께 기수를 돌렸다.
이로써 고쿠라는 2번이나 원자폭탄 폭격 대상지에 올랐음에도 이를 모두
피하는 행운의 도시가 되었다.
약 20분의 비행 후에 복스카는 나가사키 상공에 도달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기상 보고와 달리 구름이 많이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연료는 부족해지고 있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척 스위니 소령은 폭탄 담당
애시워스와 상의한 뒤 티비츠 대령의 엄명을 어기고 레이더 조준 폭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결정을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만약 폭탄 투하에 실패하면 기체의 안전과 착륙
중량을 위해서 그 귀중한 원자폭탄을 바다에 버리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고쿠라와 달리 운이 없었다.
순간 구름이 열리면서 나가사키를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맑은
개구부 구역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일본 제국 군부는 원자폭탄을 탑재한 복스카가 규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상층부가 소련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어서 무시되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복스카가 투하한 2번째 핵폭탄이 폭발하였다.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그날 사망했다.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16kt짜리
리틀 보이보다도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이름부터 넓은 섬(広島)일 정도로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산지 지형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막혀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1/4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3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피해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히로시마에 비해 피해가 줄었다는 것이고, 원자폭탄으로 인한 참상은
나가사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간 것은 매한가지였다.
한편 타격대의 혼란은 원폭 투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규합에 실패해 가고시마 남쪽에서 헤매고 있던 빅 스팅크는 나가사키 시에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멀리서 관측하고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와서 관측과 촬영을 시작하였다.
한편 복스카는 연료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원래 작전 계획은 비상 상황이 생기면 항로 중간에 위치한 이오지마에 착륙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거기까지도 갈 연료조차 없었다는 것.
복스카 기장 척 스위니는 이에 거리상으로 훨씬 가까웠던 오키나와로 가서 비상착륙을 하기로 한다.
복스카가 오키나와 욘탄 비행장 상공에 도착했을 때는 단 한 번의 착륙 시도만 가능할 정도의 연료가
남아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오키나와 관제소에서는 복스카의 착륙 요청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복스카는 플레어를 있는 대로 쏘아올리고 그냥 욘탄 비행장에
강행 착륙을 감행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활주로에 접근하다가 엔진 하나가 연료 부족으로
꺼졌고, 착륙 활주하다가 엔진 하나가 더 꺼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추락하거나 착륙하다 다른
비행기와 충돌하지 않고 무사히 착륙한 게 기적이었다.
복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연료를 다시 보급 받고 겨우겨우 티니안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혼란”은 끝까지 계속되었는데, 윌리엄 로렌스 기자가 최초 보도에서 자기가 탑승했던
폭탄 투하한 기체를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보도해버린 것이다.
작전 직전에 비행팀이 서로 교체된 것을 기자가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제일 불쌍한 건, 자기 이름붙은 기체 빼앗기고 관측 비행이나 해야 했던
복스카 원래 기장 프레드릭 복스 대위였다.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 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 설계
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기폭기(베릴륨과 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 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3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플루토늄 코어가 24시간 교대근무를 해도 본토에서 13일쯤에 제작완료 될
예정이었고 그걸 본토에서 티니안으로 운송해서 조립 시간까지 합해서 작전투입은 19∼20일쯤에나
가능하다는 예상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가능했다.
첫 핵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
이 시점부터 일본 제국의 모든 군부는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의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걸 확실히 인지했다. 원폭이 히로시마의 1회성 단발 이벤트가 아니게 된 이상
언젠간 핵탄두가 전쟁 내내 폭격을 비껴간 교토에 떨어질 게 사실상 확정되었으며, 황실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에 버섯구름이라도 피어오르는 그 순간 일본 제국군은 모든 형태의 명분까지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한다면 일본 수뇌부에겐 참혹한 최후만이 기다릴 것이라는 인식이
지휘부 대부분의 머리에 박히고 말았다.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일본 국민들은 천황을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옥음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그닥 깔끔하지 않았다.
또 그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고문어체로 작성되어있었다.
때문에 이게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방송요원이
일상언어(일본어 구어체)로 해석해 재차 방송하여, 마침내 항복 사실이 대중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나마 결정된 항복에 대해 청년 장교들이 반발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단장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며 천황이 거주하는 궁성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 쑥대밭이 되는 등, 히로히토고 나발이고
화평파를 싸그리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궁성사건이 발생했다.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결하거나 가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 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때문에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로도 불린다.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 생활을 하던 작가 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항복이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즉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고, 왜 항복 요구 타전 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 이미 1945년 초부터 항복 논의가 오갔음을 상기한다면
두 원자폭탄은 그러한 결정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소식을 접한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좀 복잡하다.
분명 소련군의 대일전선 참전 기간은 일주일 안팎으로 대단히 짧고 극동에서는 미국보다
그 공로가 매우 적은 건 사실이나 소련의 일본 공격 준비가 양과 질에서 대단히 우수했고 그 준비
기간이 독일의 항복 직후부터 면밀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코 하루 이틀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미국이 소련에게 일본으로의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었고, 참전 시점까지
못을 박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에서 수십만의 병력과 수만대의
장비를 지구 반대편의 동아시아 전선까지 가져왔고, 참전 약속일의 마지막 날에 전격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이 준비한 노력만큼 이미 잡병이 된 수십만 일본 관동군은 대부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장해제했다.
다만, 원폭 투하로 자극받은 스탈린은 극동의 바실렙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만주작전의 조기
실행을 명령한 것은 사실이며, 작전기획 시 당초의 공격실행 예상시점은 1945년 8월
중순이었다가 8월 15일 이후로 단축되고, 최종적으로 8월 9일 0시에 침공이 시작되었다.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더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만 일부 수정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원폭 투하를 여전히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일단 다이쇼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만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당시 일본의 전선은 이미 10개에 육박했고, 관동군은 더 이상 예전의 관동군이 아니었다.
모든 정예관동군 사단들은 본토 방위와 남방 작전으로 빠진 상태였다.
반면에 소련은 오직 일본을 겨냥해서 내려왔고, 사실상 1주일 남기고 다급하게 내려왔다.
거기다가 일본 측도 이미 관동군이 일본군 내에서 최약체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45년 6월달 자체 사찰에서 대본영은 이미 전체 관동군과 지나 파견군 180만 명이
미군 7개 사단보다도 약하다고 평가했다.
관동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일본이 관동군이 무너졌다고 항복할 리가 없다.
이미 관동군 최정예가 갈려버린 사이판 전투나 오키나와에서 졌다고 항복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원폭보다 소련의 참전이 일본의 항복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에서 간과하는 것이 애초에
일본 군부가 마지막으로 소련에 희망을 건 이유가 미국의 융단 폭격과 원폭 투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의 강화를 중재해 줄 카드로 소련을 생각했고 이 구상이 완전히 좌절된 계기는 소련의
참전이지만 그 정도로 일본을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국가는 어디까지나 미국이지 소련이 아니다.
히로히토조차 항복 선언에서 미국의 원자탄을 항복을 결정한 요인으로 발언했지
소련의 만주, 사할린 공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자국의 본토가 공습과 원폭으로 파괴되고 본토의 천황의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
그깟 식민지인 만주에서의 공세가 일본에게 더 골칫거리였을리 만무하다.
일본 군부에게도 가장 중요한 지역은 어디까지나 본토지 식민지가 아니다.
원폭은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고 소련군은 본토에서 떨어진 만주에서의 일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의 지분이 아예 0인건 아닐지라도 소련이 미국보다 일본 항복에서의
공로가 더 크다는 주장은 절대 성립할 수 없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들을 통해 2차 대전 전체가 미국의 공로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최근 들어 그러한
대중적인 관점에 대한 반발과 그동안 묻혀 있던 독소전쟁 등의 재발굴로 소련의 업적이 재평가되며
미국의 역할이 평가절하당하는 수정주의적 견해가 역덕(역사 오타쿠)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실제 소련이 막대한 기여를 한 유럽 전선 뿐 아니라 고작 일주일 참전한
태평양 전선에까지 확대되어 일각에서는 원자탄은 그 이전의 도쿄 대공습 등과 비슷한 일반적인
사건이었고 실제적인 항복 요인은 소련에 있다는 식의 주장이 만연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태평양 전쟁 내내 연합국에 비협조적으로 일관했으며 4년간 일본을 항복시키지 못한
미국과 달리 일주일 만에 소련이 일본을 항복시켰다는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도 설득력이 낮다.
일본은 미 해군의 군함인 미주리호에서 항복 조인식을 했으며 당연히 미국의 이름이 연합국 우두머리에 올랐다.
대일 전선에서의 소련의 공로는 미국은 물론 중국, 영국, 영연방보다도 후순위이다.
“핵폭탄은 위대한 결정이 아닙니다. 그저 정의의 무기고에 있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해리 S. 트루먼 前 미국 대통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