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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왕국의 문장
레온 왕국의 역사에 대해 다루기에 앞서, 왕국이 들어서기 전 레온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본래 레온은 로마 군단 - 쌍둥이 7군단(Legio VII Gemina) - 의 주둔지였다. 또한 금 유통의 중심지이도 했기에, 레온은 곧 히스파니아에서 중요한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로마의 세력이 약해지자, 도시는 아리우스파 서고트족에게 점령당한다. 717년에 레온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무어인들에게 정복당한다. 이후 도시는 30여 년 동안 이단자들의 지배를 받다가, 742년에 기독교 왕국인 아스투리아스의 첫 수복 도시가 된다. 레온이 아스투리아스에게 가지는 의미는 각별했는데, 과거 로마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과거 서고트족이 다스릴 당시 교구가 설치되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레온 왕국”이 역사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전편에서 이미 밝혔거니와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3세가 죽고 나서 그 영토가 삼분되었을 때이다. 알폰소의 장남 가르시아는 레온을 맡아 다스리게 된다. 그런데 그는 치세 4년만인 914년에 죽음을 맞이한다. 가르시아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레온은 그의 둘째 동생 오르도뇨가 다스리다가, 오르도뇨가 죽고 난 후에는 막내 프루엘라의 소유가 되었다. 프루엘라 2세는 아스투리아스, 레온, 갈리시아 전 지역을 다스리다가 925년에 죽게 되는데, 이때 또 다시 영토 분열이 발생한다. 왕위를 이을 자로 선왕의 아들 알폰소 프로일라스가 선택되었는데, 오르도뇨의 아들들 - 산초 도르도녜스, 알폰소, 라미로 - 은 이 처사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사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팜플로나의 왕 히메노 2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형제는 사촌을 갈리시아 지역으로 몰아내고, 차지한 영토를 서로 나누었다. 레온 - 이제부터 “레온”은 아스투리아스 지방까지도 포괄하는 말이 된다 - 은 알폰소(“수사왕el Monje” 알폰소 4세)가, 아직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갈리시아는 산초가 왕이 되어 다스리게 되었다(산초는 프로일라스가 죽고 나서야 완전한 갈리시아의 왕이 되는데, 929년에 그가 죽자 갈리시아는 다시 레온 왕국의 영토가 된다). 막내 라미로는 아스투리아스 쪽의 몇몇 지방을 다스리는 ‘유명무실한’ 왕의 칭호를 받았다.
알폰소는 931년에 왕위를 동생 라미로(“악마왕El Diablo” 라미로 2세)에게 물려주고 수사가 된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1년 후 그는 프루엘라 2세의 두 아들과 함께 왕위를 되찾기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그는 동생에게 패배하고, 실명의 형을 당하고는 사아군의 수도원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는 933년에 불운한 삶을 마치게 된다.
라미로 2세
라미로 2세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그가 무슬림과의 군사적 충돌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기독교 세력들의 연합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다. 934년에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압드 알-라흐만 3세는 사라고사의 이슬람 세력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부 기독교 왕국의 침입을 꾀했다. 이에 라미로는 카스티야, 나바라 등 외부 세력의 지원군과 함께 반격을 시도한다. 두 군대는 시망카스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아랍 측 연대기에 의하면, 전투 개시 전에 일식이 발생하여, 이틀 동안 양측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후 벌어진 전투(Battle of Simancas, 939)는 며칠 밤낮을 걸려 계속되었는데, 결국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라미로는 950년에 원정을 단행하여 탈라베라(현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에서 무어군을 격파하고, 마드리드와 톨레도 지방을 장악했다. 이때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사람들이 군대가 정복한 지역에 유입되는 현상 - “레포블라시온(Repoblación, 英 Repoplation)” - 이 발생하였다.
그의 치세 중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건은 바로 카스티야의 독립이다. 왕국 동부에서 뛰어난 무용으로 그 세력을 키워가던 페르난 곤살레스는 931년에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카스티야의 역사에 관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라미로 2세가 95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오르도뇨(오르도뇨 3세)가 왕위를 잇는다. 그의 통치는 초반부터 위기에 직면했다. 배다른 동생 산초가 왕위를 요구하며 나바라와 카스티야를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국내의 반란과 알-안달루스 무슬림들의 공격에도 대처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문제들을 잘 해결한 것 같다. 특히 무어군을 리스본에서 격파한 후, 그는 곧 이단자들에게서 휴전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다.
오르도뇨는 그의 아버지 시대부터 시작된 방비 강화를 계속 진행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위에서 언급했던 카스티야의 페르난의 딸 우라카와 결혼하기도 했으나, 후에 페르난이 산초와 손을 잡자 우라카를 버린다.
오르도뇨 3세가 956년에 죽자, 비로소 왕위를 그리도 탐하던 산초(“비만왕el Craso” 산초 1세)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어렵게 맺은 결실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2년 후 그는 사촌 오르도뇨에 의해 폐위당한다. 오르도뇨는 페르난 곤살레스의 딸과 결혼한 처지였기 때문에 카스티야의 지원을 받았다. 산초가 폐위된 이유로 그들은 - 별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 산초의 비만함을 들었다.
사촌(“el Malo우둔왕” 오르도뇨 4세)에게 쫓겨난 산초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 살까지 빼가며 -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는 나바라 출신인 외할머니 토다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고, 무어인들과 조약을 맺은 다음, 레온과 나바라의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959년에 그는 사모라를 점령하고, 얼마 후에는 다시 왕이 되었다. 이때 오르도뇨는 그의 별칭처럼(‘el malo’는 영역하면 ‘the Bad’로 할 수 있는데, 본 역자는 그의 어리석은 행적을 고려하여 ‘우둔왕’으로 번역했다) 전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데, 그는 아내를 버림으로써 카스티야의 지원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를 도와줄리 만무한 칼리프 앞으로 찾아가 넙죽 엎드렸던 것이다. 결국 그는 962년에 사망한다.
산초가 왕위를 되찾자, 그는 곧 무슬림들과 맺었던 조약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는 무어인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그는 카스티야와 갈리시아의 귀족세력들이 커가는 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966년에 독살 당함으로써, 죽음마저 편안하게 맞이하지 못했다.
산초의 아들 라미로가 차기 왕이 되었다(라미로 3세). 그가 즉위할 당시 그는 겨우 5살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는 두 섭정의 도움을 받았다. 둘은 모두 라미로의 친척이었으며, 수녀였다. 한 명은 고모 엘비라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어머니 테레사 - 그녀는 남편이 죽자 수녀원에 들어가 있었다 - 였다.
그가 아직 미성년자인 시기에, 그는 칼리프 알-하캄 2세(الحكم الثاني)와 평화조약을 비준하고, 갈리시아를 침략하는 바이킹에 맞서야 했다. 성인이 되자 그는 살다나의 백작 고메스의 딸 산차와 결혼하였다. 라미로는 국가를 전제 군주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 분리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던 갈리시아와 카스티야와의 사이가 소원해졌다. 급기야 982년에 갈리시아 귀족들은 오르도뇨 3세의 아들인 베르무도를 갈리시아의 왕으로 내세우게 된다. 라미로가 984년에 죽자, 레온의 왕위도 베르무도에게 넘어가게 된다.
“병약왕el Gotoso”(‘el Gotoso’는 ‘통풍에 걸린’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베르무도 2세는, 애초에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지역의 귀족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터라 권력도 약했으며, 개인의 역량도 보잘 것 없는 인물로 보인다. 치세 초기에 그는 카스티야 지방의 불안한 동정에 걱정해야 했다. 그는 코르도바의 무슬림들에게 보호를 요청했는데, 정작 레온의 영토로 들어온 군대는 도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복을 위해서였다.
군대를 이끌고 온 자는 “신의 영광에 따른 승리자(Al-Mansur bi-llah)” 이븐 아비 아미르(أبو عامر محمد بن عبد الله بن أبي عامر الحاجب المنصور, 기독교인들은 그를 “알만소르Almanzor”라 불렀다, 이하 “알만소르”)였다. 그는 다수의 베르베르 용병들이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레온과 카스티야를 공략했다. 985년에 알만소르는 바르셀로나를, 997년에는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 성 야고보의 무덤은 훼손하지 않았다 - 약탈했다. 또한 나바라 왕국도 그의 공격을 감당해야 했다. 알만소르는 나바라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고, 협정을 맺은 후 왕의 딸과 결혼하고 나서야 원정을 끝마쳤다.
이런 강적에 대항하여 베르무도가 취한 행동은 그저 사모라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레온 왕국에게는 다행하게도 - 그리고 그 개인에게는 불행하게도, 999년에 그가 예전부터 앓아오던 통풍(痛風)이 악화되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이동할 일이 있을 경우 들것에 실려 다녔다. 그해에 베르무도는 비야누에바 델 비에르소에서 사망하였으며, 현 레온 대성당의 전신인 카라세도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들 알폰소(“귀족왕el Noble” 알폰소 5세)였다. 그가 5살일 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선왕의 두 번째 부인이자 그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엘비라가 잠시 섭정 노릇을 했다. 그녀는 1007년에 섭정을 그만두고 수녀가 된다. 알폰소는 내전과 무어인들의 침략의 시기를 극복한 후, 반도 북서부의 기독교 세력을 재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는 군사적, 정치적 재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성 미겔 대수도원(현 프랑스 생-미셸-드-퀴사 대수도원)의 원장인 올리바가 그를 “전 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치켜세우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불운했다. 포르투갈 북부 지방에 있는 비세우를 공략하던 중 그는 적군의 화살을 맞고 사망했다.
알폰소 5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베르무도가 왕이 되었다. 베르무도 3세는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가지는데,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1세 이후 이어져오던 “페레스 왕가(Pérez Dynasty, 알폰소 1세는 칸타브리아 공작 페드로의 아들이며, Pérez는 ‘페드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의 마지막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029년에,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2세가 베르무도의 여동생 산차와 결혼하기 위해 레온의 궁정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그의 영토에서 추방했던 벨라 형제 - 로드리고와 이니고에게 암살당한다. 이때 나바라의 산초 3세가 카스티야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의 아내는 카스티야의 마요르(“무니아”로 불리기도 한다)였고, 그는 죽은 백작의 매제가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산초는 그의 아들인 페르난도를 새로운 카스티야 백작으로 앉힌다. 이후 그는 정복활동에 나서, 1035년에 그가 죽었을 때는 두에로강(江) 북쪽의 메세타 고원은 나바라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1034년에는 도시 레온을 점령하여 베르무도로 하여금 갈리시아로 도망치게 하고, 산초는 “전 히스파니아의 황제(Imperator totius Hispaniae)”라 자칭했다.
산초 3세가 죽자, 베르무도는 수도 레온을 되찾고 그동안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렸으나, 1037년 타마론 전투(Battle of Tamarón)에서 그의 매제이자(1032년에 산초 3세는 페르난도와 산차의 결혼을 강행했다) 산초의 아들인 페르난도에게 패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었다. 후계자도 없이 죽었기 때문에, 레온 왕국은 산차와, 그의 남편인 페르난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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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1세
페르난도(“대왕El Magno” 페르난도 1세)는 레온 왕국을 다스리게 되면서 이미 가지고 있던 “카스티야의 백작위”를 버리고, “카스티야의 왕”을 자칭했다. 1039년에 그는 자신을 “전 히스파니아의 황제”라 칭했는데, 이 칭호의 사용은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와 교황 빅토르 2세를 분개하게 했다. 하지만 페르난도가 사용한 칭호는 레온을 비롯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지역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의미이지, 하인리히와 빅토르가 생각하는 ‘로마 황제’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의 치세 중에 그의 형제들이 다스리는 두 나라 - 나바라와 아라곤의 침입이 있었는데, 나바라의 가르시아 5세는 1054년 아타푸에르카 전투(Battle of Atapuerca)에서, 아라곤의 라미로 1세는 1063년 그라우스 전투(Battle of Graus)에서 각각 사망함으로써 페르난도의 성공적 방어로 막을 내린다.
잠시 그라우스 전투에 대해서 언급을 좀 더 해야겠는데, 그 이유는 그라우스 전투가 레콩키스타 중 전투의 하나이기도 하면서,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손을 잡고 또 다른 기독교인들과 싸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1063년 5월에 라미로 1세가 이끄는 아라곤 군대와 사라고사의 왕 알-무크타디르(al-Muktadir)의 군대가 그라우스에서 격돌했는데, 알-무크타디르를 돕기 위해 페르난도의 아들 산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전투에 참전했다. 전투 결과는 이미 밝혔듯이 라미로의 사망과 아라곤의 패배이다. 이 전투는 또한 레콩키스타의 영웅 “엘 시드(El Cid)”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이하 “엘시드”)가 처녀 출전한 전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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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드
페르난도는 1065년 6월 성 요한 축일에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신은 성 이시도르 교회의 제단에 모셔졌다. 임종 직전에, 그는 세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큰아들 산초는 카스티야를, 둘째 알폰소는 레온을, 막내 가르시아는 갈리시아를 유증 받았다. 또한 두 딸에게도 도시를 주었는데, 엘비라는 토로를, 우라카는 사모라를 받았다.
아마 페르난도는 죽으면서 그의 아들들이 각자의 영토를 가지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랐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맏이 산초(카스티야의 산초 2세)였다. 그는 엘시드와 함께 얀타다 전투(Battle of Llantada, 1068)에서 둘째 알폰소(“용감왕el Bravo” 알폰소 6세)를 격파한다. 하지만 둘은 다시 손을 잡게 되는데, 막내 가르시아의 갈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가르시아는 포르투갈 백작 누누 멘데스(Nuno Mendes)를 몰아내고, 1071년에 자신을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의 왕”이라 칭했다(이때 처음으로 “포르투갈의 왕”이라는 칭호가 언급되었다). 이에 맏이와 둘째는 연합하여 막내에 맞선다. 결국 가르시아는 두 형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는 세비야로 도망친다. 처음에 산초와 알폰소는 차지한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얼마 후 산초는 또 다시 알폰소에게서 등을 돌리고 동생을 공격한다. 이번에도 그의 “부관(alférez - 본래 ‘alférez’는 직역하면 ‘소위少尉’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데, 역자가 당시 의미에 맞게 의역했다. 식자 분들의 양해 바란다)” 엘시드의 도움을 받아, 그는 카리온 강에서 벌어진 전투(골페헤라 전투Battle of Golpejera, 1072)에서 동생의 군대를 간신히 격파할 수 있었다. 알폰소가 그의 이슬람 봉신의 땅 톨레도로 도망치고 나서, 그는 레온의 왕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모라의 우라카를 비롯한 레온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 반란이 일어나 산초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사모라를 포위했는데, 그는 한 사모라 귀족에게 암살당했다.
맏형이 암살당하자, 둘째 알폰소가 카스티야와 레온, 갈리시아의 왕이 되었다. 전래 영웅시(cantar de gesta) 중 하나인 “시드의 노래(Cantar de Mio Cid)”에는, 엘시드가 알폰소를 부르고스의 산타 가데아 교회로 데려가 ‘자신이 산초의 살해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맹세하도록 시키는 대목이 있다. 이는 알폰소가 왕위에 올랐을 때 친족살해의 의심을 받음과 더불어 귀족들에게 밉보였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통치의 기틀이 잡히자, 알폰소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마음껏 분출한다. 그는 국내 법령을 정비하고, 레콩키스타를 열심히 수행하여 아랍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우선 그는 반도 북부의 기독교 세력들을 장악했으며, 1085년에 톨레도를 점령함으로써 재정복 활동의 중요한 거점을 재차 확보했다. 이로써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왕으로 돋움 했고, 이미 1077년에 그는 “전 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어 있었다.
이슬람 측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 별로 믿을 만하지는 못한 - 이야기에 따르면, 알폰소와 세비야 타이파(طائفة,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하던 독립적인 소규모 무슬림 국가)의 재상 이븐 아마르는 같이 체스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내기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왕이 이길 경우 재상의 ‘매우 호화로운’ 탁자와 그의 노예들(set of men)이 왕의 것이 되지만, 재상이 이길 경우 왕은 세비야 공략을 중단해야 했다. 체스의 결과는 재상의 승리였으며, 왕은 자신의 말을 지켜 세비야에서 귀환한다. 이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당시 이베리아의 상황을 우화적으로 드러낸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알폰소는 비교적 무슬림들에게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치세 중에는 아랍어가 새겨져 있는 동전도 발행되었으며, 그의 정부(情婦) 중에는 세비야의 자이다(Zaida of Seville)도 있었다(어떤 기록에서는 그녀가 본래 세비야 왕의 며느리daughter-in-law였다고 전한다). 물론 이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시각이고, 당시 기독교 영토 내의 무슬림들은 그야말로 ‘목숨만 간신히 이어가는’ 처지였을 것이다.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자 알폰소는 이슬람 타이파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조공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세력들은 부유해졌으나, 타이파들은 나날이 가난해지고,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중세(重稅)를 매겨야 했기 때문에 치안을 비롯한 국력이 점점 쇠퇴해갔다.
알폰소의 치세 중에 프랑스의 시토 수도회가 사아군에서 포교활동을 펼쳤다. 또한 프랑스 수도사 베르나르를 1085년에 최초의 톨레도 대주교로 임명했으며, 그의 딸 우라카, 테레사, 엘비라를 프랑스 왕자들에게 시집보냈다. 혹자는 이러한 친(親)프랑스적 움직임의 배후에는 알폰소의 두 번째 아내 부르고뉴의 콘스탄스가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어쨌든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카스티야-레온에는 프랑스의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는 이베리아 북부의 문화적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그는 교황과의 관계도 개선하였다.
한편 엄청난 조공에 시달리던, 세비야의 왕 알-무타미드 3세를 비롯한 타이파들은 북아프리카 알모라비데(英 Almoravids, المرابطون)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알모라비데의 지도자 유수프 이븐 타슈핀(يوسف بن تاشفين, 이하 “유수프”)는 이를 받아들여 7천의 군사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다. 이들은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가 어느덧 반도 북부의 아즈-잘라카(az-Zallaqah, 西 사야카, 이하 “사야카”)에 당도한다. 그동안 유수프의 군대는 알-안달루스의 무슬림들까지 계속 합류하여 그 군세가 3만에 이르렀다.
알폰소는 유수프를 격파하기 위해 6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 전투 전 유수프는 알폰소에게 전갈을 보내었는데, 이에는 세 가지 선택을 강요했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 이슬람으로의 개종, 조공(جزْية, Jizya), 전투였다. 알폰소는 앞의 두 가지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두 군대는 결국 사야카에서 일전을 펼치게 된다(Battle of az-Zallaqah, 1086).
전투는 금요일 새벽에 알폰소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전투 전에 유수프는 그의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부대는 각각 세비야 왕이 이끄는 15,000명의 병사들, 유수프가 직접 이끄는 11,000명의 병사들, 인도식 검(Indian swords)과 투창으로 무장한 4천의 흑인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비야 왕의 부대가 그날 오후까지 기독교 군대를 상대하다가, 유수프의 부대가 적군의 뒤로 돌아가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놀란 알폰소의 군사들은 전투를 계속할 의욕을 잃고 전장에서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이때 비로소 유수프는 남은 부대에게 명을 내려 전투를 완전히 끝내버릴 것을 지시했다. 완벽한 이슬람 군대의 승리였다. 기독교 군사들 중 살아서 도망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59,5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했으니, 전멸로 봐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왕은 백 명의 기사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쳐 나왔으나, 전투 중에 당한 극심한 부상으로 다리 하나를 잃게 된다(Only 100 knights made it back to Castile. Alfonso VI survived the battle but he lost his leg). 사상자는 비단 기독교군 측만 아니라 - 비록 그 수치가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지만 - 이슬람군 측도 상당했다. 전장은 피로 흠뻑 적셔져 미끈거리기까지 했고, 이 때문에 훗날 이곳은 “미끄러운 땅(az-Zallaqah = slippery ground)”로 불리게 되었다.
“미끄러운 땅”에서의 패전으로 타이파들에 대한 알폰소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왕국에 닥쳐온 위협을 물리쳐야 할 때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엘시드를 찾았다. 사실 왕과 엘시드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과거 산초와 알폰소가 싸울 당시 엘시드는 산초의 편이었으며, 알폰소가 명실상부한 왕이 되고 나서는 정치적 불화로 인해 엘시드는 카스티야-레온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국에 의탁해 있었다. 이처럼 둘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엘시드는 알폰소의 요청을 받아들여 1087년에 알폰소의 궁정에 복귀한다.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동쪽 영토를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엘시드는 사라고사로 돌아갔고, 왕국의 동부는 다시 유수프의 공세에 휘둘려야 했다. 그리고 레콩키스타의 전투 중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뼈아픈 패배이며, 알폰소에게 있어서는 독자(獨子)를 잃었던, 우클레스 전투가 발생한다(Battle of Ucles, 1108).
1108년 5월 초에 그라나다, 코르도바, 발렌시아, 무르시아 등지에서 징집된 유수프의 군대는 카스티야-레온을 향해 진군한다. 27일 그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우클레스 성 앞에 당도한다. 무슬림군은 주위 방어를 무력화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성을 점거하는 데는 실패한다. 알폰소는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나서려 했지만, 77세라는 고령과 이전 전투에서의 부상으로 인해 진두지휘하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군의 총대장으로 그의 아들 산초 - 그는 알폰소와 왕의 첩 자이다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 를 임명한다. 당시 산초의 나이는 15살이었는데, 왕은 부관으로 알바르 파녜스 백작을 임명하여 아직 미숙한 아들의 군대 운용을 돕도록 했다.
산초의 군대는 28일 우클레스에 당도했다. 다음날 기독교 군대와 무슬림 군대는 곧 있을 전투를 위해 진형을 짰다. 유수프는 우선 코르도바 부대를 최전방에 내세우고, 주력인 그라나다 부대를 그 뒤에 배치했다. 양익에는 무르시아, 발렌시아 부대를 배치해 측면을 방어하도록 했다. 산초의 배치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알바르 파녜스를 비롯한 부장들이 왕자에게 부적절한 조언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군대의 주력이라 볼 수 있는 중무장 기사들은, 보병의 지원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무슬림 군대의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우선 코르도바 군사들이 강력한 기사들의 돌격에 쓰러지는 것은 보기 좋았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양익에 배치되어 있던 무슬림 병사들은 우선 적 보병들이 기사들을 지원하러 오지 못하도록 멀리 쫓아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기사들의 후방을 노렸다. 또 비록 코르도바 부대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2선의 그라나다 부대는 건재했다. 곧 기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그야말로 학살당했다.
기사도의 화신인지 그저 무모한 어린아이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돌격해 들어간 기사들 중에는 총대장 산초도 끼어있었다. 산초의 말이 죽고 그가 땅바닥에 널브러지자, 그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몸을 던졌다가 죽음을 맞았다. 영웅적인 능력을 발휘한 7여명의 기사들은 산초를 데리고 포위망을 빠져나와 왕자를 조그마한 성(the small castle of Belinchón)에 피신시켰다. 파녜스 백작도 일군의 병사들과 함께 전장에서 퇴각했다. 한편 무슬림 군대는 전투 중에 유명한 이맘(إمام, 이슬람교의 학식이 풍부한 학자의 존칭)인 알-야줄리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들은 포로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3천여 명의 병사들의 목이 잘려 창에 꽂힌 채 전시되었다(산초의 부장이었던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머리가 가장 높이 걸렸다). 우클레스가 점령된 뒤에, 한 무슬림 소영주(Mudejar lord)가 산초가 있는 성으로 찾아가 왕자를 비롯한 기사들을 죽였다. 이후 유수프는 계속 정복활동을 벌이지만, 이후 소규모의 성들을 차지하는 것 외에는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회군하게 된다. 알폰소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다음해인 1109년에 숨을 거둔다.
알폰소 6세의 죽음은 여러 측면에서 애석함을 감출 수 없지만, 특히 그 뒤를 이을 적자가 없다는 것이 가장 그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왕의 딸 우라카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결혼했다가 1107년에 레이몽이 죽으면서 과부가 되었다. 선왕은 죽기 전에 우라카로 하여금 아라곤의 알폰소 1세와 재혼하도록 했다. 아라곤과의 연계를 통해 알모라비데의 공세를 막아내려 한 것이다.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티르에 의하면, 알폰소 1세는 “남자들과 있을 때는 진정한 용사이지만, 여자와는 그렇지 않았다(a real soldier lives with men, not with women)”라고 전한다. 톨레도 대주교인 프랑스인 베르나르는 우라카와 아라곤의 알폰소가 먼 친척관계임을 지적하면서, 이 결혼이 근친결혼이기 때문에 둘은 맺어질 수 없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결국 둘은 1109년 10월 몬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선왕으로서는 안타깝게도,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우라카는 카스티야-레온의 공주로서의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알폰소는 장인의 뒤를 이어 ‘전 히스파니아의 황제’를 꿈꾸었으니 말이다. 또한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도 불화에 일조했다. 둘은 자주 심한 말다툼을 하였으며, 뒤에는 소규모 전쟁까지 벌어졌다. 결국 1111년에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별하게 된다. 이후 우라카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는데, 고메스 곤살레스를 비롯한 애인들이 그녀를 위로해 주었을 테니,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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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카 여왕
우라카가 독보적인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어도 그녀의 치세는 순탄치 않았다. 힘 있는 귀족들은 서로 반목했으며, 계속 그녀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으려는 전남편과는 계속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배다른 여동생 테레사는 그녀의 남편인 포르투갈 백작 엔리케가 죽자, 공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며 우라카에게 도전했다. 뒤에 그녀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아버지는 레이몽이었다)의 도움으로 여왕은 비로소 나라를 안정되게 이끌어간다.
"콤포스텔라 연대기(Chronicon Compostellanum)"에 따르면, 우라카는 1126년에 해산 중 사망했다(아이의 아버지는 애인인 페드로 곤살레스 백작이었다). 그녀가 죽자, 아라곤의 전남편은 더 이상 그녀의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여왕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녀의 치세 중에도 열심히 활동했던 아들 알폰소(“황제el Emperador” 알폰소 7세)였다. 알폰소의 즉위로 보르고냐 왕조(Casa de Borgoña, 알폰소의 아버지가 “부르고뉴의 레이몽”인 것과 관련 있다)가 개창한다. 어머니가 죽기 전 그는 갈리시아의 왕이었는데, 이제 그는 카스티야-레온의 왕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광활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는 곧 각 지방에 창궐한 반란세력들을 토벌하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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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7세
아라곤과 나바라의 왕 알폰소 1세가 직계자손 없이 죽자, 나라의 주도권을 두고 군부와 귀족들 간의 갈등이 빚어졌다. 이에 알폰소 7세는 라 리오하를 점령하고, 사라고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나바라-아라곤 연합군까지 격파하고, 두 왕국을 속국으로 삼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그는 곧 영토의 지나친 확대로 인해 관리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히스파니아의 소국들(Marca Hispanica,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줄줄이 늘어선 카탈루냐 소국들을 가리킨다)” 정벌을 도왔다.
마르카 히스파니카
1135년에 알폰소는 레온 대성당에서 - 그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 “전 히스파니아 황제의 관”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국가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레콩키스타의 수장이 되어 기독교도의 영토 수복에 앞장서야 할 의무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 왕국이 그의 권위를 존중한 것은 아니다. 특히 포르투갈의 백작인 아폰수 1세는 “황제”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였으며, 1140년에는 레온에서 독립하기까지 한다.
알폰소는 신앙심이 깊은 군주였다. 그는 피테로에 수도원을 건립함으로써 국내에 시토회의 영향력을 높였다. 또한 그는 군제 개편에도 관심이 많아서, 심지어는 알모라비데의 군제를 참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최종적으로 레콩키스타에 쏟아졌다. 1139년부터, 그는 알모라비데를 상대로 한 여러 차례의 원정을 단행한다. 기독교 군대는 톨레도 근처의 오레하에 위치한 요새를 점거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알폰소 황제 연대기(Chronica Adefonsis Imperatoris)”에 전한다.
"… 이른 아침에 성은 함락되었으며 성내 탑들은 기독교 기사들로 빼곡히 찼다. 왕실 기장이 높은 탑 위에 게양되었다. 기장을 내건 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레온과 톨레도의 황제이신 알폰소여, 부디 장수하소서!”
1144년에 알폰소는 코르도바까지 진격한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가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을 때, 그는 나바라의 가르시아 6세와 바르셀로나의 베렝게르 4세와 함께 십자군을 일으킨다. 십자군은 카탈루냐인, 프랑크인, 제노바인, 피사인 등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였다. 이들은 1147년 10월에 부유한 항구 도시 알메리아를 정복한다. 이로써 카스티야-레온은 처음으로 지중해를 향한 항구를 소유하게 된다.
1146년에는 알모아데조(朝) 무슬림 세력이 침략해왔다. 이에 알폰소는 남부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고, 알모라비데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1151년에는 베렝게르 4세와 투딜렌 조약(Treaty of Tudilén, 현 스페인 피테로)을 맺었는데, 조약에서 둘은 정복해야 할 안달루시아(알-안달루스)의 지역에 대한 정확한 규정을 조율했다.
1157년에 알메리아는 알모아데의 소유로 넘어갔다. 알폰소는 당시 원정을 나가있던 상태였는데, 알메리아 소식을 알게 되자 곧 회군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는 길에 무라델(현 스페인 비소 델 마르케스)의 고갯길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자연사했다). 그는 분명 ‘황제’로 불리기엔 조금 부족한 군주였을지도 모른다. 특히 그는 카스티야를 큰아들 산초에게, 레온을 둘째 페르난도에게 각각 물려주어 반도 내에 다시 통일된 국가가 성립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자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며, 레콩키스타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하였다. 치세 말에 알모아데의 침략을 받았지만, 그들에게서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최선의 인물은 아니었더라도, 그는 분명 좋은 지도자였다.
레온의 새 왕이 된 페르난도(페르난도 2세, 그는 선왕과 바르셀로나의 베렝겔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치세동안 귀족들과의 불화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는 암살 기도까지 있었지만, 그는 의연히 이러한 위기들을 잘 넘겼다. 형인 카스티야의 산초 3세가 죽고 나서 아직 3살밖에 되지 않은 알폰소 8세가 왕위에 오르자, 페르난도는 조카가 미성년인 동안 카스티야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레온은 포르투갈과도 갈등을 겪었는데, 페르난도가 아폰수 1세의 딸인 우라카를 아내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둘의 결혼은 1175년에 ‘친척간의 결혼’이라는 이유로 교황에 의해 무효화된다) 두 왕국은 전쟁에서 맞붙게 된다. 이 짧은 전쟁은 페르난도가 아폰수를 1169년에 바다호스에서 사로잡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데, 사위는 장인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 장인을 풀어준다. 또한 페르난도는 남쪽 영토인 에스트레마두라에 그의 신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한다.
페르난도 2세는 1188년에 죽는다. 그는 전투에 임했을 때는 좋은 기사이며 무서운 전사였지만, 정치적 능력이라던가 정부조직 따위에는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유일한 아들인 알폰소(알폰소 9세)가 레온의 왕위에 오른다. 무슬림 역사가인 이븐 칼둔(ابو زيد عبد الرحمن بن محمد بن خلدون الحضرمي)에 의하면, 왕이 한번 분노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고 한다(그래서 이븐 칼둔은 왕을 ‘침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Baboso’이라고 지칭했다).
알폰소는 1191년에 친척지간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결혼했다. 둘은 딸 둘과 아들 하나(어려서 죽었다)를 두었으나, 친척지간의 결혼임을 지적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때문에 부부관계는 곧 깨지게 된다. 사실 알폰소는 테레사에게 이미 질려있던 상태였고, 1197년에 그는 카스티야 왕의 딸인 베렝겔라와 재혼한다. 그런데 이 결혼 또한 근친결혼이었다. 당시 카스티야의 왕은 알폰소 8세였으며, 그는 레온의 알폰소와 사촌지간이었다. 이에 교황은 알폰소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둘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베렝겔라는 그녀의 자식들을 데리고 카스티야로 돌아간다. 또한 교황은 레온에 성무 금지령(聖務 禁止令)을 내린다.
하지만 교황은 곧 그의 지시를 변경한다. 만약 왕국 전체의 성무를 금한다면, 왕국의 백성들은 그들의 믿음을 결집시켜줄 성직자들을 잃게 되고, 이들은 곧 이단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성무 금지령을 왕 개인만으로 제한한다(하지만 왕은 이러한 지시에 무관심했고, 또한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알폰소는 치세 말년에 알모아데와의 전쟁에서 카세레스, 메리다, 바다호스 등을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1230년에 숨을 거둔다. 이에 알폰소와 베렝겔라의 아들이자, 이미 카스티야의 왕이었던 페르난도(페르난도 3세)가 레온의 왕위까지 잇게 되는데, 이후 페르난도의 후계자들은 카스티야와 레온 모두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레온은 점점 ‘독립적 왕국’으로서의 의미가 퇴색해간다.
※ 이베리아 침공 전까지의 알모라비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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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리즈가 레콩키스타 기간 중의 기독교 왕국들을 전문적으로 다루기는 하나, 알모라비데가 이베리아 반도의 판도에 끼친 바가 크다고 판단, 짤막하게나마 반도 침공 전까지의 역사를 다뤄보겠다.
알모라비데는 본래 사하라 사막 지방의 강력한 베르베르 부족집단에서 유래했으며, 약 7세기 무렵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이슬람 세력이 된 것은 11세기경이다. 족장 중 한 명인 이븐 이브라힘이 메카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카이루완(현 튀니지 알카이라완)의 모스크에서 설법을 들었다. 모스크의 종교인들은 이븐 이브라힘을 통하여, 그의 부족들이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네 학파(مذهب, 英 Madhlab) 중 하나인 “말리키야(مالكي)”파 출신인 압달라 이븐 야신을 선교사로 파견한다. 그는 정통 이슬람에 박식한 종교인이었다. 이븐 야신과 이븐 이브라힘의 노력으로, 알모라비데는 비로소 진정한 무슬림 세력으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이븐 야신은 법체계를 개선했으며, 이븐 이브라힘은 군대를 선진화시켜, 이제 알모라비데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1053년부터 알모라비데는 확장에 나선다. 이들은 사하라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이슬람 전파에 나서는 한편, 마그레브(이집트 왼쪽으로 뻗어있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일컫는 말)에 걸쳐 있는 사나자 부족(Sanhadja, 베르베르족의 지파)을 격파하고 사막 무역로를 차지하게 된다. 1056년에 이븐 이브라힘이 전투 중 사망하고 지도자 자리가 공석이 되는데, 이때 이븐 야신은 그의 동생 아부-바크르 이븐 우마르(أبو بكر بن عمر)를 새 족장으로 내세운다. 지도자가 바뀐 후에도 정복활동은 계속되어, 알모라비데의 영향권은 모로코를 포함하여 전 북아프리카에 이르게 된다.
1061년에 이븐 우마르는 그의 영토를 재편성하고,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는 영토를 그의 조카 유수프(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인물이다)로 하여금 부왕(viceroy)으로서 통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사막 각지에서 발발하는 반란들을 진압하러 나선다. 그런데 진압에 열을 올리던 이븐 우마르는, 어느 순간 조카의 세력이 자신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커져 있음을 깨닫게 되고, 사하라 지방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는 길에 암살을 당하고 만다(그는 독이 발린 화살에 맞았다). 이로써 유수프는 현 모로코, 서부 사하라, 마우레타니아 지방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된다. 그는 1062년에 도시 마라케시를 세우고, 1080년에 현 알제리 지방의 현지 왕국(kingdom of Tlemcen)을 정복하였다. 1076년에는 아프리카 서부의 가나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절정의 위세를 뽐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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