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그것은 인간들의 일일 뿐입니다. 꿀벌과 호박벌들은 웅웅거리면서 초여름의 정취를 마음껏 만끽하며, 꽃가루를 다리에 묻혀가며 이꽃 저꽃을 옮겨다니며 분주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느새 꽃들은 자리를 바꿨습니다. 이름도 채 모르는 꽃들은 앞마당에 가득 피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줍니다. 국화와 장미도 꽤 자라났습니다. 이제 이 꽃들은 지금 자라고 있는 꽃들과 다시 자리바꿈을 하겠지요.
미국의 현충일이라 할 수 있는 '메모리얼 데이' 연휴의 일요일, 하늘은 맑았고 집안일은 꽤 많았습니다. 메모리얼데이는 미국인들에겐 전통적으로 '바비큐 데이'로 불리우며 집 뒷마당 그릴마다 고기며 소시지들이 구워지는 냄새들이 가득 차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름방학을 맞이하기 전, 계절의 변화로 인해 찌부둥했던 몸을 조금 쉬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직장인에겐 잔디와 정원을 관리한다던지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아울러 영양보충까지 하는 시간으로까지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메모리얼 데이 연휴는 본격적인 휘발유 수요철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9월달의 노동절까지 여행철 성수기로 간주되어 휘발유 가격이 오르고, 이와 더불어 항공료, 숙박비 등이 성수기 요금을 적용해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올해, 여느때보다 좀 심적으로 불안한 메모리얼데이 연휴를 맞게 됐습니다. 일단 자꾸 오르는 휘발유 가격 때문에 가계 경제조차도 긴축되어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 평소같았으면 마켓들이 미어터지도록 마지막까지 고기며 칩이며 먹거리를 사러 오는 사람들의 물결도 찾아볼 수 없고, 코스트코 주유소는 아침부터 조금이라도 싼 휘발유를 넣으러 오는 사람들로 인해 미어 터지는 광경을 보면서 미국의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주유소들을 지날 때마다 가격 고시판들은 갤런당 휘발유 가격이 4달러가 넘어갔음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고, 이로 인한 생활의 변화는 눈에 분명히 띄는 것입니다.
예, 분명히 사람들은 덜 먹고, 덜 쓰고, 이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물가가 앙등하면서 구매력까지 축소되어버리는 스태그 플레이션은 분명히 시작됐고, 이 계절이 올 때까지 베짱이처럼 세계의 에너지를 마구 소비하며 살았던 미국인들은 지금 그들에게 닥친 '겨울'이 불편하고, 두렵고, 싫습니다.
그래도, 평소에 하던 건 하던 가락이어서, 메모리얼 데이 바비큐는 아직도 저에겐 중요한 행사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전 개스 그릴까지 공짜로 하나 생겨서, 이걸 안하고 넘어가기가 그랬답니다.
얼마전 옆집 루디 아저씨가 차고 문을 열어놓고 무언가를 뚝딱거리며 조립하고 있었습니다.
"뭐해요, 루디?"
"잘 왔네, 조셉. 이걸 좀 잡아 주겠나?"
저는 바비큐 그릴로 보이는 물건의 다리를 잡고 루디가 잘못 끼운 쪽을 바꿔끼울 때까지 약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이제 됐네. 고마워."
"루디, 그릴 새로 샀어요? 좋네."
"그래서 말인데, 조셉. 우리는 원래 쓰던 게 있다네. 우린 바비큐 그릴이 두 개씩 필요하지 않으니, 그걸 자네가 가져가 쓰지 않겠나?"
아, 개스 그릴, 하나 있으면 좋지요. 원래 저도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래기도 했었는데... 차콜 그릴은 음식맛을 매우 깊고 좋게 해 주지만, 매번 사용하려면 숯불을 피우고, 또 그 불이 백열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일단 붙은 불은 조절하기가 힘들다는 사실 때문에 약간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때로는 차콜의 양이나 라이터의 양을 잘못 맞춰 그만 고기를 홀랑 태워먹은 적도 몇번 있었고, 그때마다 개스 그릴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곤 했는데... 엉뚱하게 이렇게 그릴이 하나 생겼군요. 그날로 당장 개스통을 하나 구입해선 여기에 LP개스를 가득 채우고 바비큐 그릴에 연결해 놓고, 쓸 날만 기다리고 있었더랬습니다. 바로 '그 날'이 왔군요.
아내가 일하는 마켓에서 요즘 LA 갈비를 엄청 세일했다고 하는군요. 아내는 갈비를 파운드 당 $3.99 에 사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걸 잔뜩 재서, 우리에게 개스 그릴을 준 루디네도 나눠주고, 어머니 모시고 구워 먹고... 아무튼 즐겼습니다. 코스트코서 닭고기로 만든 수제 소시지를 사서 이것도 함께 구웠지요.
그리고 함께 한 와인은 흔한 것으로. 워싱턴주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콜럼비아 크레스트 그랜드 에스테이트의 2003년산 쉬라즈입니다. 대부분의 워싱턴주 와이너리에서 이 품종을 시라 (Syrah 혹은 Sirah) 라고 분명히 부르는 데 반해 콜럼비아 크레스트만은 굳이 쉬라즈 Shiraz 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호주 와인의 미국내 성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옐로우 테일의 쉬라즈가 미국의 마켓 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미국내에서 시라의 인기를 가일층 끌어올리자, 콜럼비아 크레스트는 자신들의 와이너리에서 만든 시라에 굳이 쉬라즈라는 이름을 붙여 소비자들의 인지도를 끌어올리고자 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어쨌든, 이 와이너리에서 만든 쉬라즈들은 발매된 첫해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가장 베이직 급 와인이라 할 수 있는 투바인 시리즈의 쉬라즈부터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90점 평점을 받으며 '스마트 바이'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지요. 그랜드 에스테이트 급에서 발매된 이번 2003 빈티지의 쉬라즈 역시 꽤 호평받고 있습니다. 각종 와인 관련 매체들로부터 "유혹적" "좋은 선택"이라는 평가들을 받으며 와인애호가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지요.
굳이 제가 이 와인을 딴 건, 일단은 여기 맞추는 음식이 '바비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어쨌든 바비큐 음식에는 뭔가 구조가 튼실하고 질감이 단단하며, 태닌이 확실한 느낌이 있는 와인이 어울려 준다는 것은 와인 마시는 이들에겐 상식에 속합니다. 그리고 양념이 꽤 된 바비큐 고기, 그리고 우리나라식의 숯불갈비 요리에도 어울릴 수 있는 와인으로 저는 늘 레드 진판델과 시라를 우선적으로 들고 싶은데,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 와인 중에선 시라 종의 무게가 흠뻑 느껴지는 샤토뇌프뒤파프, 꼬뜨 로띠 등 론의 정수가 담긴 와인들이 우선 선택의 대상이 되지요. 사실, 어지간한 레드라면 바비큐 요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별로 없지만, 만일 무게감이 덜한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라면 오히려 그레나슈 종의 와인도 좋은 선택이 될 때가 있습니다. 스페인산 가르나챠라면 음식과의 대역이 꽤 넓으면서도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주지요.
예. 장미꽃잎의 내음과 무게가 유혹적인 쉬라즈군요. 신선하면서도 질감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운 피니시. 아내도 매우 좋아합니다. 현실의 감각을 이리도 잊게 해 주는 와인이군요. 닭고기 소시지와 불갈비, 그리고 와인으로 마무리하는 연휴가 평화롭기만 합니다.
세상은 하 수상합니다. 그건 어디든 마찬가지인듯 합니다. 지도자를 잘못만난 국민들에게, 즐거워야 할 연휴는 부담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기서도, 그 하 수상한 세상에서나마 이렇게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남아 있는 저는 아직 행운이라고 해야 할 듯 싶습니다. 감사하고 싶은 이웃들이 있고, 가족들이 있고, 내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감사해야 할 일들, 그리고 희망이 아직까지는 살아 있습니다. 사실 그 '올바른 변화에의 기대'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힘차게, '함께' 서 있고 싶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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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앞마당 한 구석의 버터컵(미나리아재비)도 예쁘게 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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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꽃들은 제 손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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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도 분주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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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아저씨가 주신 그릴에 이것저것 구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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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정말 괜찮은 녀석이예요. 그 가격에, 그 맛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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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오후가 꽉 차서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첫댓글 마지막 사진.... 멋진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