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지내는 바닥은 나무바닥이다. 가로세로 각각 내 검지 하나와 손바닥 다섯뼘 만치 긴 나무조각이 다닥다닥. 조각이지만 조각조각 붙은 조각은 아니다. 같은 바닥이지만, 나무 조각마다 무늬가 다르다. 지도같다. 그럼 그 안에 생물이 살지도 않을까. 높이와 깊이가 있고 넓이와 부피가 있는 세계가 나무무늬 안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만큼 작아질 수 있다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비율만큼 작아져야 하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만큼은 아니더라도 목소리를 들을만큼 충분히 작아진다면. 나무 판 하나가 하나의 우주가 될 거고, 그럼 이건 바닥 우주, 타일 우주, 이렇게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우주라는 개념어를 쓰고 싶지 않다. 우주가 막막한 건 우리가 우주라 부르기 때문이지 막막하여 우주라 이름 붙인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냥 동네라고, 뭔, 됐다. 그냥 바닥이라고 하고싶다. 그럼 한 쪽 바닥에 사는 생명체는 다른 바닥을 모르다가 세월이 지나면 바닥과 바닥사이 틈에도 갈 것이고, 그럼 그 생물체 가운데 똘똘한 하나는 자기네들만큼이나 큰 바닥이 또 있을 것이라고 들뜰 테다. 오랫동안 나머지는 믿지 않겠지. 그러다 수십세기가 지나고, 믿는 단계를 거쳐 교류하는 단계가 되면 다른 바닥 생명체끼리 이런 대화도 하지 않을까. 요즘 그 바닥은 어때요? 이 바닥은 영.. 하고 말이다. 세력확장보다는 연대하는 나의 아름다운 바닥 나무들. 좋다. 2. 그들은 나와 같이 사는지도 모를 거다. 나도 모르니까. 상상 속에서나 이해할 수 있는 아주 크고 작은 사이니까. 벌레는 알까. 저기, 벌레 한 마리 지나간다. 아주 작은 개미 한 마리. 반갑다 개미. 개미는 자꾸 침대 밑으로 들어가려 한다. 거긴 뭐가 없는데. 내가 보기엔 뭐가 없는데.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방바닥에 가만 엎드려서 햇살 받으며, 개미도 쉬면 좋겠다. 부지런하지 말고 좀 쉬면 좋겠다. 사회성 곤충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자기 집에서 80%가 쉬고 20%만 일을 한단다. 불쌍한 20% 가운데 너도 하나가 아니니, 그러니까 게으름 좀 피운다고 뭐라할 개미가 없어. 쉬자 같이. 알아 들으면 좋겠다. 바닥이 너무 넓어서 그렇다면 내 손바닥에서 나와 같이 살자고 하고 싶다. 아니면 내 등 위에서. 내 등 위에서.. 나는 늘 이렇게 바닥에 배를 붙이고 살고만 싶다. 3 바닥에 엎드려있다가 돌아누웠다. 개미가 있다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없으니까. 시원하다. 바닥은 늘 시원하다. 여름에도 시원하다. 등을 붙이고 눞는다. 발바닥이 차가워져서 불안한데도 자꾸 잠이 온다. 잠이 오는데 으슬으슬해서 잠은 못 드니까 별의 별 즐거운 생각이 다 드는 거다. 내 생각의 팔할은 바닥에 머리를 붙여야 나온다. 바닥에 누워야 꿈을 꿈다. 꿈은 바닥에 누워 꾸어야지. 과학에 누워 꾸는 꿈은 언제나 금방 사라지고 헛되다. 침대는 과학아닌가. 나쁜침대 나쁜과학. 바닥에 누워 꾸는 꿈만이 진정하다. 바닥에 누워야만 하늘을 나는 꿈을 꿀 수 있다. 하늘을 날며 꿈을 꿀 수는 없다. 달릴때도 꿈을 꿀 수 없다. 함부로 일어나면 안 된다. 꾸었던 꿈을 곱씹고 챙긴 뒤에 일어나야 한다. 안 일어난다면 더 좋은 일이고. 4 바닥에 누워 있다가 배가 고프면 일어나기 싫다. 일어나기 싫은데 짜증이 나진 않는다. 왜냐면 나는 바닥에 누워 있으니까. 바닥에 누워서는 얼굴을 찡그릴 일이 있어도 그러지 않는다. 왜냐. 나는 바닥에 누워 있으니까. 바닥에 누워서 얼굴을 찡그릴 일에 진정 얼굴을 찡그린다는 건 바닥과 내가 하나되지 못함이다. 그럴 때는 교회 속 이단과 같다. 바닥을 떠야 한다. 이 바닥을 떠나라 그런 사람은. 아무튼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먹고 누우면 더 행복하겠지. 행복할 때 불행을 대비하지 않으면 큰 일이니까 싶어서 꿈틀거린다. 바닥에서는 꿈틀대야 한다. 함부로 벌떡 일어서면 삶의 행복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뒹굴뒹굴 굴러도 좋다. 바닥에서 열심히 그러나 기분좋게 구르다 보면 벽을 만난다. 벽은 벽이다. 나는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잘못 구르면 벽도 만나고. 문에 부딪혔는데 문고리가 너무 높아 팔을 뻗어도 열 수가 없다. 얼마나 괴로울뻔하지만 내가 바닥이라 안 괴로운지 그 오묘함이란. 바닥에 누워서는 어떤 고통도 다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안전지대다. 문을, 발가락 끝으로 열심히 연다. 겨우겨우 엄지를 문고리 위에 얹어서 밑으로 슉슉 내렸다. 발바닥이 뭉쳐서 힘들었는데 그래도 열렸다. 이센티 정도 열여서 행복하다. 감히 일어서서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일어서서는 문을 활짝 열어재끼고도 느낄 수 없는 행복이 바닥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일어난다. 나는 행복에 겨워 다시 시원한 바닥에서 기지개를 켜고 발가락을 쭉쭉 피고 무릎을 올려 손으로 발바닥을 주물러도 본다. 행복하다. 5. 일어나기 앞서 마지막으로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엄지 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면 느낌이 좋다. 땀이 없을 땐 슥슥 소리가 들리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코 크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열심히 한다. 신나게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핀잔주지 않는다. 땀이 났을 땐 뽀드득뽀드득 느낌만 있고 소리가 없다. 세게 하면 팍팍팍팍 소리가 나는 것도 같으나 나만 들리는 수준이라 문 건너 사람은 아예 모르는 거다. 이렇게 은밀하면서 간단한 일은 두발로 선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행복하다 행복해. 6. 고픈 배를 부여잡을 일은 없다. 바닥에 붙어서 부엌까지 가고 싶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일어나자. 일어나서 부엌까지, 맨발로 바닥을 느끼며 살살 걷는다. 벽에 어깨를 퉁퉁 부딪히며 바닥을 꾹꾹 밟으며 걸어갔다. 찬장에서 후루룩 국수와 오징어 짬뽕을 찾았는데 뭘 먹을까 너무 고민이 되어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잠깐 부엌 바닥에 누웠다. 후루룩 국수를 들어 표지를 본다. 그러고 다른 쪽 손을 들어 오징어짬봉을 본다. 부엌에 들어온 엄마가 나를 보았다. 엄마 물 좀 올려줘. 엄마는 엄마야, 하며 내 몸을 타고 넘어 냄비에 물을 붓고 불에 올렸다. 그러고 식탁에 앉아서 턱을 괴고 아무데나 바라봣다. 엄마도 누워 있다 왔지. 내가 누워서 물었다. 엄마는 얼굴 한 쪽에 배겟자국이 나 있었다. 응. 편해 보였다. 얼굴이 살짝 부은 게 행복해 보였다. 엄마도 기분 좋지. 내가 또 물었다. 엄마는 응. 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출출하다고 했다. 엄마도 누워봐. 싫다. 부끄럽지. 추접게 왜 바닥에 누워. 엄마는 계속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괴고 말했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었다. 싱그르르르르 벙그르르르르 쑈오오오가 했다. 아. 나는 바닥에서 얻은 행복이 후두둑 떨어질까 느릿느릿 일어나서 물에다 스프를 넣었다. 넣고보니 내가 뜯은 라면이 후루룩 국수였다.아까 왜 고민했지. 늘 고민은 이랬다. 고민은 고민할 때 풀리지 않고 행동할 때 풀렸다. 아니면 고민은 나도 모르게 풀렸다. 바닥에 누워서 고민했기 때문에 고민이 괴롭지 않아서 고민의 기억조차 없었기에 쉽게 행동했나 싶어서 바닥이 고마웠다. 후루룩 국수를 끓이는 데 엄마도 배고프다고 했지. 그래서 후루룩 국수는 엄마 주기로 했다. 나는 오징어 짬뽕을 먹으면 되니까. 7 엄마가 후루룩 국수를 먹다가 바닥에 한 젓가락 면발을 흘렸다. 아, 바닥도 먹고 살아야 하지. 바닥은 국수를 먹을 줄 모르는데. 그럼 바닥에 방해지. 바닥은 면발의 방해로부터 해방되어야 해. 엄마보다 내가 빠르게 휴지를 잡아서 바닥을 치웠다. 엄마는 다시 멍하게 국수를 먹었고 나도 오징어 짬뽕을 먹었다. 맛있었고 나는 맨발이었다. 맨발로 라면을 먹으면 김치 없이 먹어도 느끼하지 않다. 양말신고 먹으면 김치를 먹어도 뭔가 느끼하고 거북한데 말이다. 8 나는 먹고 그릇을 담그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바닥에 누웠다. 바둑이가 따라왔다. 바둑이는 개껌을 물고 다가와서 내 옆구리에 붙었다. 바둑이는 바닥에서 개껌을 씹지 않으면 늘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개껌을 씹다가 한번씩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다시 씹으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이는 개껌을 씹는 일이 내가 바닥에 엎드리거나 누워있는 일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 둘다 한 가지 한 공간에서 몰입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구름이는 개껌에 나는 바닥에. 이 모두 바닥이 있어 가능한 일이지. 벽보다는 바닥이 먼저지. 문보다도 바닥이 먼저지. 9 엄마가 멀리서 나를 불렀다. 훈아. 방청소좀해라. 나는 햇살이 드는 바닥에 먼지를 바라보던 참이었다. 먼지가 날다가 앉다가 내가 불면 또 날고 새로운 먼지가 오고 있던 먼지가 가고 나는 재미보던 참이었다. 엄마 내 방은 깨끗해요 깨끗해보이지 않지만 사실이 그래요. 그리고 내 방인데 알아서 할게요. 하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니 방도 하면서 마루도 한 번 닦아다오. 하고 말했다. 도치법이었다. 나는 엄마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일체의 것들을 혐오한다. 먼지는 어디서 살라고. 먼지가 바닥이 아니면 어디서 살라고 먼지를 닦아내나. 먼지는 청소포에서 살지 않고 걸레에서 살지 않는다. 먼지는 쓰레기 통에서 살지 않고 먼지는 주로 바닥에서 사는 것이다. 나와 먼지는 같은 곳에서 사는 것이다. 왜 같은 곳에 사는 사람을 내가 먼저 밀어내야 하나. 먼지는 내 발이 빠질만큼 쌓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 먼지는 없다. 알아서 왔다가는 것이 먼지다. 먼지는 이기적이지 않다. 그런 먼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도대체 뭔지. 우리는 우주의 먼지가 아닌가. 우리가 바닥우주에 산다면. 바닥 주인은 분명 나처럼 게으를 것이다. 그 신은 우릴 청소할 마음이 없는데 그 신의 엄마가, 아들, 오늘 방 좀 치워 하면 어떻게 되나. 우린 그 말 한마디에 우리 우주에서 추방당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우주에서 사라진다는 말이 그런 것이다. 열심히 사는데 먼지라서, 청소대상이라서 사라지는 일이다. 나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먼지의 세계에 재앙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10 신이 있다면 나같은 사람이 아닐까. 어느 날 바닥에 엎드렸는데 바닥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옆에는 신의 엄마가 키우는 바둑이가 개껌을 물고와 착 엎드린다. 신은 햇살이 드는 곳의 먼지를 바라보며 행복해하기도 하고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의 먼지를 생각하며 걱정하기도 한다. 언젠가 햇빛이 들겠지. 해가 움직이면 들겠지 하고. 신은 사실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커튼을 치거나 가리거나 가구를 옮기면 모든 먼지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다. 그 바람에 날아가는 먼지가 많은 것 또한 신의 손길이 아닌가. 신은 가만 있어야 한다. 가만 있으라. 신은 가만있고 싶은데, 그건 먼지들의 꿈이기 때문에 먼지들은 강렬하게 꿈을 꾸어 우주로 자신들의 파동을 전하고, 바닥에 붙은 신은 계속 그대로만 있고 싶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가만있고 싶은데 우리 게으르고 행복한 신은 엄마가 있다. 엄마가, 방 좀 치워 , 치우는 김에 마루도 좀 치워, 하는 바람에 셀 수 없이 많은 우주가 청소 당하는 것이다. 우주의 운명이다. 11 반대로 말하면 바닥에서하면 나는 신도 될 수 있다. 바닥에 붙어서는 별 별 꿈을 다 꾼다. 하늘을 날 뿐만 아니라 신도 될 수 있는 거다. 자고로 바닥에 누워서 넉넉히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은 신이 될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신이 될 자격이 있다. 함부로 몸을 굴려 우주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신이 되어야 한다. 초인은 서양에서 했으니까 방에서는 신이 되자. 신이 되어 좋은 점은 움직이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12. 바닥에서는 꿈틀 거리거나 쭉쭉 펴야지 파닥거리면 안된다. 굳이 몸부림 치려면 옆에서 개껌 씹는 바둑이와 함게 바닥바닥대야 한다. 파닥파닥은 급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바닥바닥대자. 그래야 바닥과 함께 행복하다. |
첫댓글 안녕하세요 메끄님 타 작품에 댓글 부탁드릴게요~
얼 깜빡했어요 다행 얼른 확인해가지고 ㅎㅎ 달게요! 읽고! 종옥씨에 달았습니당~
"작기로는 안이 없고 크기로는 밖이 없다"란 석가모니의 말이 떠오르네요
오래전에 읽었는데 이제야 댓글 다네요. 솔직히 처음 읽었을때 정말로 바닥에 엎드려서 졸다가 쓴글인가 싶을정도로 뭐지? 싶었습니다. 주인공의 정신세계에 공감대 형성이 하나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흡사 즉흥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써내려 간거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엉망으로 소설이 완성 될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마...맞아요... 엎드려 졸다 쓴 글...즉흥적으로..첨부터 끝까지....ㅈㅅ..
"바닥"을 가지고 끝가지 밀고 나가는 힘이 좋습니다. 다만 '바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가 더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