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제게 성령이 임하신 증거는
제가 죄인임을 아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은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는 언제나 먼지를 일으킬 뿐이오니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정결한 마음,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본문 주해)
11~12절 : 바울 사도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니 병이 났고 악귀도 떠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에게서 희한한 능력이 나오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부족과 연약을 자랑하는 바울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질병은 고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은 바울의 능력이나 유명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13~16절 : 그런데 유대인 제사장의 아들들이 이러한 바울의 기적과 능력을 흉내내다가 오히려 귀신들에게 당하고 만다.
이들이 ‘제사장’인 것은 유대교 제사장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제의를 관장하는 제사장으로 추측된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제국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변질된 모습을 보여준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동일하게 예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들이 원하던 일-귀신을 축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귀신에게 제압당하여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도망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 이름을 이용하기 위해 불렀고,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17~20절 :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자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었다.
둘째,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셋째,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불태워졌는지 그 가격을 따지면 은 오만이 되었다. 그것은 500일의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들의 돈벌이의 도구를 없앤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따른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20절, 새번역)
21~22절 : 이렇듯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바울은 한창 부흥의 불이 붙은 에베소를 떠나기로 작정한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로마에까지 가기를 계획한다.
그래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케도냐로 먼저 보내고 자기는 얼마 동안 아시아에 더 머물러 있었다.
(나의 묵상)
스게와의 아들들은 ‘제사장’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쉽게 말하면 귀신을 쫓아내는 전문 무당들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이었다. 바울의 의해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보니, 그것이 자신들의 돈벌이에 꼭 필요한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존재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며 능력을 이용하려다가 귀신들에게 오히려 당하고 만다.
예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저 남들에게 전해 들은 것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나도 과거에 그렇게 흉내내는 공부(?)를 많이 하였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 소원 등을 위해 예수 이름을 불렀고, 심지어 본문과 비슷한 모습으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를 얼마나 많이 외쳐댔는지 모른다. 그때 귀신들이 내게 달려들지 않은 것이 은혜이다.
예수님도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직 나의 욕망과 혹시 모를 능력을 기대하면서 예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예수 이름을 무슨 부적처럼 기대하고 사용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주문이 아니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중얼거리고, 때로는 외쳐대는 그런 주문이 아니다.
그 이름은 내가 깊이 알아가야 할 이름이요, 인격적으로 만나야 할 분의 이름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달라졌다.
전에는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나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지금은 세상에 붙은 마음을 떼어 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에베소 사람들이 은 오만이나 나가는 마술책을 불살라 버린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된다. 더 이상 사단의 궤계에 속아 살지 않겠다고,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버리겠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앙고백을 했지만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은 녹록치 않다.
그러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꼭 필요하고 또 간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매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더 이상 무엇이나 된 양 근엄하게 주님을 부르지도 않고, 자기 암시를 위해 무한 반복으로 외치는 등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주문이 아니다.
오직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주님께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매일의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어김없이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세상이 알 수도, 줄 수도 없는 평안과 기쁨이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 하고 부를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을 부르는 그 호칭 안에
변화된 제 삶의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저의 죄인됨과 십자가에 연합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달라졌으니
눈치 보지 않고
아버지 품속의 어린 아이가 되어 마음껏 주님을 부릅니다.
어린 시절,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며 조곤조곤 말을 많이 하던 저를 보고
‘아이고, 웬 말이 이래 많노?’ 하시면서도 귀여워하시던 아버지 웃음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날 우리 예진이를 보며 제가 하는 말과 꼭 같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서로를 보며 웃음보를 터뜨립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달라졌다고 조잘대는 저를
주님이 기뻐하실 것을 생각합니다.
주님과 함께 웃음보를 터뜨리며 기뻐하는 아이가 된 듯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