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연설 실력자이지만 몽양 여운형은 20C 최고 연설가로 다들 꼽는다.
다음은 몽양의 연설 일부분이다.
연설 1) 임시정부의 요인 34살 여운형 일본 제국호텔 연설/1919년 11월
1. 목적 : 임시정부 내부 분열 목적
2. 연설 일부분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이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입니다. 일본 정부에게 이를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겠습니까.”
3. 결과
몽양 여운형의 사자후는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들의 마음도 뒤숭숭. 임시정부 내부 분열이 목적이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헷갈려 …, “어떻게 저런 불령선인을 초대해서 저런 명연설로 우리 일본에 먹칠을 할 수 있스므니까!” 항의가 속출하면서 일본 하라 내각이 총사퇴하는 계기가 됨
연설 2) 고향 양평에서의 에피소드(episode)
하루는 고향 양평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말 타고 지나던 양평군수가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대 말을 듣고 보니 느낀 바가 크다. 오늘로 친일 단체(일진회)을 그만두겠다”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함.
* 몽양 여운형/현대철봉법(서상천, 1935)에 사진/경향신문, 김경호 기자
몽양 여운형은 타고난 스포츠맨, 축구, 농구, 육상, 유도, 권투 등 경기단체 회장과 임원으로 조선체육회 11대 회장 겸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승인에공헌, 조선중앙일보사장(1933)으로 베를린 올림픽(1936) 마라톤 시상식 사진에서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말살해 보도 주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중국 상해 원정할 때 평양축구단 환송 기념강연회(1935년 2월)
“운동으로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만들고, 경기를 통해 투쟁심을 길러야 한다”고 열변 토함“
앞에는 커다란 트럭이 서있고,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경찰차 1대가 갑자기 나와 몽양을 차를 가로막자 (정병준, 이화여대, 1995)
몽양의 차는 속도를 줄였고 이 기회에 한지근이 차 뒤 범퍼에 올라타 저격을 함.
*
혈농어수(血피혈濃짙을농於水) : 피는 물보다 진하다.
*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모대학 연설 중의 일부
"
어느 산중에서 호랑이가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놀다가 잠에 빠졌다. 아기 호랑이는 어미곁을 떠나 놀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나물캐던 여인이 아기 호랑이를 불쌓이 여겨 바구니에 넣어 집으로 가져 왔다.
어미 호랑이는 슬피 울며 이산 저산을 헤맸다. 하루는 너럭바위 위에 앉자 산밑에 집을 바라보니 강아지, 병아리, 고양들이 서로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 무리 중에 자기 새끼가 있는 것을 보고 어미 호랑이는 어흥하고 산을 드렀다 놓으며 쏜갈같이 내리 뛰었다.
바로 새끼 호랑이 이었다.
이는 피는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피도 섞을 수 없다. 아무리 섞으려 해도 안되는 것이다."
*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 (1886, 5, 25~ 1947, 7, 19, 62세) 양평 묘골 집에서/사진 양은석
여운형암살(呂運亨暗殺)과 임시 통일정부수립의 좌절
1. 개념 : 1947년 7월 19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21세 한지근(韓智根) 등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
* 암살 가담자 : 한지근, 한현우, 양근환, 염동진
2. 내용
- 1944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독립운동 조직
-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섬.
- 좌우합작운동 :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金奎植)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함. - 잠시 정계를 떠남
-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임
- 그러나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난항을 거듭
- 암살 :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달리는 차 뒤 범퍼에 올라탄 괴한 한지근의 3발의 총격을 받고 암살.
- 여운형에 대한 12번 테러 일지/우익진영 테러 1순위
1) 테러이유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립하면서 사회주의에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
2) 광복 이전
(1) 1925년 12월 임시정부 시절/임시정부의 본분을 벗어나 개인적인 명예를 추구하고 다닌다는 비판을 받아 괴한의 습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구타를 당함.
3) 1945년 광복 이후
(1) 1945년 8월 18일 오후 1시 종로구 계동 자택 : 길 가던 중 괴한들에게 곤봉으로 동생과 함께 구타당함.⇒ 시골로 요양
(2) 1948년 9월 7일 저녁 종로구 원서동에서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였으나 행인 도움 구출 됨
(3) 1945년 12월 초 황해도 연백군 배천온천(여관) 괴한 침입
(4) 1946년 1월 종로구 창신동 : 괴한 5명이 자택에 침입, 때마침 여운형 다른 곳에 있어서 위기 모면
⇒ 미영소 3국 외상회담(1945년 12월 16일 ~ 26일) : 한국 5년간 신탁통치안 논의, 우파 여운형 테러시도
(5) 1946년 4월 18일 종로구 반서동 청계천 관수교 위에서 괴한들에 포위되어 격투를 벌이다 행인들의 도움으로 구출 – 좌우합 작노력(여운형,김규식,안재홍), 5차례 방북, 조만식, 김일성만나 좌우,남북합작 노력
* 여운형 말 :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고 말함.
(6) 1946년 5월 25일 밤 10시경 서울 종로 괴한 습격 ⇒ 사주에 의한 수류탄 테러 시도 사전에 발각되어 무사.
- 우파인 김구식, 원세훈 등과 좌우 합작 노력
(7) 1946년 7월 17일 괴한들에 의해 중구 신당동에서 차에 태워져 야산으로 끌려가 재갈을 물리고 묶은 다음 정치 활동을 그만 둔다는 문서에 서명하면 살려주겠다는 협박을 했으나 타고난 건장함과 운동 실력으로 괴한들을 제압한 후 산에서 벼랑으로 뛰어 내려 탈출함(미군정 경무부 암살 체포범 3명 체포 했으나 처리 오리무중)⇒ 어운형, 김규식이 허헌, 김원봉과 만나 좌우합작 노력
* 1946년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발족 : 우파 김구식, 원세훈 좌파 성주식, 정노식, 이강국 참여
(8) 1946년 10월 7일 종로구 계동 자택에서 괴한 4명이 납치 2일 간 집앞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묶었으나 감시 소홀을 틈타 스스로 결박을 풀고 탈출 함 ⇒ 계기 :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발표
(9) 1947년 3월 17일 종로구 계동 자택 침실 폭파사건 ⇒ 출타 중이어서 무사
계동 집 아궁이에 설치되었던 폭탄이 폭발 집 반쪽이 날아감.
(10) 1047년 5월 12일 저녁 자동차 타고 혜화동을 지나다 자동차 후미에서 권총 총탄이 날아 들었으나 차량의 속도로 총알을 피할 수 있었음 ⇒ 범인 체포되었으나 처리는 오리무중
(11) 1947년 7월 19일 오후 13시 15분경/IOC 가입 축하 기념으로 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 축구 경기가 열린 날 당시 조선체육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장이었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전에 명륜동 지인의 집에 있다가 옷갈아 입으려고 독립신문 주필 고경흠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계동집으로 가던 중 오후 13시 15분경에 혜화동로타리 왼쪽 파출소 앞에서 대형 트럭과 경찰차 1대가 여운형 리무진을 가로막은 후 차 뒤 범퍼에 올라탄 평북출신 극우파 21세 한지근(본명 이필형, 7월 23일 경찰 범인 한지근) 3발 총탄에 심장과 배에 2발 관통,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이송 중 2여분만에 사망. 동승한 경호원 박성복이 뒤쫒았으나 동대문서 경찰이 가로 막아 범인 놓침. 여운형(근로인민당) 추모식 시작 : 1965년 죽은지 18년만에 처음.
* 고경흠의 증언 : 여운형 죽기 전에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
* 한현우 증언 : 탑골 공원에서 죽이려고 다가 가는데 여운형이 알아보고 "어이, 현우군! 오랜만일세."라고 어깨를 툭툭 쳐주며 인사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일 수 없어서 송진우를 먼저 죽였다. 한현우 ⇒ 고하 송진우(한국민주당) 암살범(1945년 12월 30일)
* 참고
주요 암살자 : 송진우(한국민주당, 1945년 12월 30일), 장덕수(한국민주당, 1947, 12월 7일). 김구(한국독립당,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일 여운형은 경기 참관 후 창경궁에서 미군정 경제 협조처의 존슨과 만나 안재홍의 뒤를 이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정장관(국무총리격)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존슨을 만나 저녁후 고향인 양평 묘골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었다고 함.
4) 여운형 암살사건 : 여운형이 사후 27년인 1974년이 돼서야 밝혀짐. 공소시효(살인사건 15년) 지난 후
- 암살이유 : 한지근, 한현우, 양근환, 염동진 등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 사건의 주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 나감.
-
- 이들은 당시 극우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白衣社, 극우반공테러단체)’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
-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
- 양근환과 염동진은 한지근(본명 이필형, 21세)과 한현우에게 무기를 제공
- 이들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나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증언.
5) 결론 : 해방정국에서 테러 행위에 관여한 보수우익단체(백의사 염동진이 한지근에 총을 건내 주고 사주한 사건)가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에 불만을 품고 보수우파와 상호 연계하여 그를 제거한 사건임
6) 평가 :
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이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집을 근거로 활동했음에도 경찰에 의해 적발되지 않음
나.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했음에도 그 배후와 진상이 밝혀진 적이 거의 없었음.
다. 암살사건 발생 이후 경찰이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었음을 볼 때, 경찰스스로 이 사건을 사실상 방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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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인민장 1947년 8월 3일 11시 35분
서울운동장 장례식장 울려퍼진 봉도가/안기영 작곡
아! 우리의 몽양 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땅 위에 떨어진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있나니
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를 갚으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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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1945년 여론조사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여운형 암살(呂運亨暗殺)과 임시 통일정부수립의 좌절 2
3.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
1)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발족 : 1946년 7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 우익 인사들이 연합하여 만든 위원회 ⇒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좌익(여운형, 허헌(許憲), 정노식(鄭魯湜), 이강국(李康國), 성주식(成周寔)), 중도 좌(여운형), 중도 우(김규식), 우익(김규식, 원세훈, 김붕준(金朋濬), 안재홍(安在鴻), 최동오(崔東旿))를 포괄하는 인사들로 구성
2) 목적 : 남북협상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및 좌우 사상을 넘어 임시 통일정부 수립
3) 미군정의 태도 : 1946년 5월 미소공동원회가 휴회 된 직후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 적극 지원
- 이승만 : 단독정부론(1946년 3월) ⇒ 한국민주당(송진우, 장덕수, 김성수 등)지지했으나 대 부분의 정치세력 반대
● 정읍발언 : “통일정부 수립이 어렵기 때문에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라고 주장(1946년 6월 3일)
- 미군정 : 반소반공’ 의식을 가진 이승만, 김구 등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좌우익을 연결할 수 있는 중도파 인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목 후 좌우합작운동 적극 지원
4) 좌우합작7원칙 발표/1946년 10월 7일
첫째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셋째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여하고 중요한 산업은 국유화 하며 지방자치제를 확립한다.
넷째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한다.
다섯째 정치 운동자를 석방하고 남북·좌우의 테러 행동을 제지한다.
여섯째 입법기구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일곱 번째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의 자유를 보장한다.
5)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 한국의 하나된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 및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미소(美蘇) 양국(미국 대표 소장 A.V.아놀드, 소련 대표 중장 T.E.스티코프)의 대표자 회의
* 미소공동위원회
가. 목적 : 모스크바 3상회의(이영소 3국 외상, 모스크바, 1945,12,16)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정부수립 지원 및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미소(美蘇) 양국(미국 대표 소장 A.V.아놀드, 소련 대표 중장 T.E.스티코프)의 대표자 회의
나.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 12월 16일 ~ 25일) 결정문
A. 한국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국가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가혹한 지배의 잔재를 조속히 청산하기 위하여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산업·교통·농업 등의 발전과 민족문화 발전을 위한 제반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이다.
B. 한국에 민주적인 임시정부의 수립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대표들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제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한다. 이 위원회의 건의는 미·소·영·중 4개국 정부에게 제출되어 검토된 후 미·소 양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
C. 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임시정부와 민주적 제 단체의 협력 아래 한국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발전시키며, 민주주의적 자치정부를 수립하여 독립국가로 육성시키는 데 그 사명이 있다. 공동위원회는 한국 임시정부와 타협한 후 미·소·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4개국에 의한 최장 5개년간의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할 것이다.
D. 남한 및 북한에 관한 긴급문제의 심의를 위하여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사이에 행정·경제분야에서 부단한 협력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을 검토하기 위하여 미·소 점령사령관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2주일 내에 개최한다.
(1) 1차(1946년 3월 20일 ) : 처음부터 미.소간 의견차이로 인하여 갈등 양상.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 5개년간 신탁통치안에 대해 찬반탁세력 논의를 공동성면 5호 발표로 해결하려 했으나, 미소간 이견으로 미소공동위 5월 초 결렬
(2) 2차(1947년 6월 26일 서울, 7월 1일 평양에서 개최) : 진행 지지부진
가.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혜화동로터리 : 범인 극우파 한지근(본명 이필형) ⇒ 좌우합작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친 몽양 서거
* 참고 : 염동진(백의사 사령)/김영철(임시정부 행동대원 및 서북청년회 행동대장이자 백의사 집행부장)
* 암살 배후설
A. 우익계열 암살설(여운형 평전 이기형시만, 강덕상 명예교수) : 이승만 하수인 장택상 수도경찰총장과 노덕술 친일경찰등 친일경찰세력
B. 김구설(여운형 외조카 박찬기) : 임시절부 행동대원 및 서북청년회 행동대장이자 백의사 집행부장 김영철
C. 남로당 박헌영 계열 암살설(이정식 교수, 2007, 여연구) : 3당합당을 놓고 여운형과 갈등 남로당 박헌영 계열
* 참고 : 백의사(白衣社. White Clothes Party, 극우 반공 테러단체)
1945년 11월경 염동진(廉東振)이 월남한 반공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요인 암살 및 극우 반공 테러단체, 백의사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을 상징, 중국 국민당 蔣介石 휘하 반공 결사단체 남의사(藍衣社)를 모방, 김두한 고문, 염동진 사령, 부사령 박경구
나. 1947년 9월 : 미국 미소공위를 통한 한국문제 해결 불가 ⇒ 국제연합(UN)으로 이관
A. 1947년 10월 18일 미소공위에서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은 UN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할 것을 소련 측에 제안(1947년 10월 18일)
B.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T. F. Shtikov) 소련 대표단 서울 철수 발표 후 10월 21일 평양으로 떠남.
C. 미소공위 결렬 후 중도파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결성
[참고] 미소공동위원회 주요 일정
- 1945년 12월 16 ~ 25일 : 모스크바 3상회의 :이영소, 모스크바
미영소 3개국 외상(外相,미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 )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 1946년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1946년 4월 18일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하면 과거 반탁운동을 불문하고 협의대상으로 참여 시키겠다는 공동성명 5호 발표
: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5년간 신탁통치안)을 지지하기로 선언한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하겠다.
- 1946년 5월 6일 무기 휴회
-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발언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이 보이지 않고, 통일 정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몰아내도록 세계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
- 1946년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발족
-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 선언
-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1947년 6월 13일 추가위원 확대
- 1947년 6월 23일 남북 재정당 사회단체의 청원서 제출
- 1947년 6월 26일 미소공동위 서울 개최
- 1947년 7월 1일 미소공동위 평양회의 개최
- 1947년 7월 19일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13시 15분경 여운형 극우파 한지근에 의해 암살
- 1947년 8월 28일 미국, 한국 문제를 미,소,영,중 4개국 회담에 맡기자고 제안
- 1947년 9월 17일 한국 문제 UN상정
- 1947년 9월 26일 소련,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 제안
- 1947년 10월 18일 미소공위에서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은 UN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할 것을 소련 측에 제안
- 1947년 10월 21일 소련의 대표단 서울철수 후 평양으로 떠남
-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권고
- 1947년 12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
- 1947년 12월 20일 미소공위 결렬 후 중도파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결성/김규식(金奎植)을 위원장으로 민족자주연맹은 ‘조선을 민주주의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주의를 조선화하여야 할 것’을 내세우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조직체로 발족
- 1948년 2월 10일 백범김구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3000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에서 유엔위원단의 제1안인 가능지역 총선안이 가결
- 1948년 5월 10일/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최초의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
6)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 : 1947년 12월 6일
몽양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한 이후 미소공위는 파탄에 빠졌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 됨에 따라 우남 이승만과 미군정은 가까워 졌고 미군정은 좌익을 제거하기에 나섰다. 사실상 몽양의 죽음은 좌우합작의 물거품이 되었고 미소공위의 피탄은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하여 단독정부 수립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4.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 (1886, 5, 25~ 1947, 7, 19, 61세) : 본관 함양, 호 몽양, 1886년 경기 양평 신원리 (구 주소 경기 양근군 서시면 묘골(묘골리)) 출생.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정치가,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운동 추진, 한국의 7대 독립운동가로 칭송 받음, 금세기 한국이 낳은 인물 중 한사람, 2005년에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기까지 좌익이라는 이유로 공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몽양 영운형 선생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지도자로 남북한에서 모두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전집
1)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우무학당에서 한학공부, 1907년 광동학교 설립
- 1908년 기독교에 입교, 강릉에 초당의숙 설립, 평양 신학교 입학, 선교사를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견학 후 국외 독립운동 필요성을 느끼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감,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 발기인,
-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됨.
- 1920년 고려공산당 가입, 조선중앙일보 사장 취임,
- 1944년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건국동맹 조직.
- 1945년 안재홍과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8월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우익과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함. 12월 조선인민당 창당.
-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 29개 좌익단체 중심으로
근로인민당조직- 좌우합작운동 추진
11대 조선체육회 회장(1946~ 1947년)
- 1947년 7월 19일 21세 청년 한지근(이필형, 만19세)에게 혜화동로타리에서 권총 두발이 심장과 배를 관통 61세 암살당함.
- 1947년 8월 3일 장례식(서울운동장) : 인민장, 국민 60만여명 참석.
건국훈장 대통령장(2005, 2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2008, 1등급) 추서됨.
2) 한국의 7대 독립운동가 : 임시정부 백범 김구, 조선독립동맹. 의열단 약산 김원봉(만주), 미국의 우남 이승만, 하와이 도산 안창호, 한반도의 몽양 여운형, 공산주의자 이정 박헌영(예산), 평양의 고당 조만식
5. 몽양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
1) 미군정 관리 리처드 로빈슨
" 미 국무성은 몽양을 해방이후 조선에서 인기있는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생각이다. 몽양은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고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으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또한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몽양 여운형은 언제나 한국편이었다."고 증언.
2) 주한 미국 총영사 윌리엄 랭던
"몽양은 개인적으로 소련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이들 양국에 대해 절대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영소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고 증언
- 참고문헌
1.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 이정식,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2. 여운형의 암살과 이승만 ,미군정, 윤해동, 역사문제연구소연구원
3. 몽양 여운형 평전, 정병준, 한울, 1995
4. 몽양기념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