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제1차 한일 협약 체결(1904) :〔체결 과정〕노일 전쟁이 일본측에 승산이 보이자 황무지 개척안을 철회하는 대신 8월에는 한국의 외교․재정으로부터 국권을 빼앗기 위한 수단으로 특명 공사 하야시 콘스케(林權助)는 외무대신 이하영(李夏榮)을 상대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고문 정치〕재정에 일본인 고문(顧問), 외교에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게 하였고, 중요한 외교 문제는 사전에 일본의 허락을 받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고문 정치(顧問政治)가 시작되었다.
⇨7월 24일.
⇨8월 11일.
② 순종 황제 즉위(1907) : 1907년 오늘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황제가 즉위한다.
그는 같은 해 7월 19일 일제의 강요로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7대 왕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순종의 재위기간은 불과 3년 남짓.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의 왕위는 상실되고 만다.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창덕궁으로 쫓겨나 한 많은 삶을 살다 1926년 4월 25일 이승을 하직한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 이른바 6․10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③제11대 전두환 대통령 당선(1980) : 1980년 오늘 전두환 국가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함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 보궐선거에 단독출마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 열린 투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 대의원 2천5백40명 가운데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2천5백25명.
이중 한 표만 무효 처리되고 2천5백24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6개월 동안의 잔여 임기를 마친 뒤 이듬해 1981년 2월 실시된 대선에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했다.
④ 독사신론(讀史新論) 연재(1908) : 8월 27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대한매일신보에독사신론이라는 제목의 사론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해 9월15일까지 1차분이 연재되고 다시 10월29일부터 12월13일까지 2차분이 연재돼 50회까지 나아간 이 미완의 사론은 우리 역사에서 근대적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독사신론은 그 즈음 일본 학계의 영향 아래 조선 사학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단군부정론(檀君否定論) 등에 대한 대타(對他)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실제로 김택영(金澤榮)의동사집략(東史輯略, 1902)과 그 증보판인역사집략(歷史輯略,1905)은 그 때까지 전승되던 단군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었고, 현채(玄采)의 동국사략(東國史略,1906)은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미마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런 역사 인식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로 파악하고 ‘독사신론을 통해 민족을 주체로 삼는 역사 기술을 시도했다.
신채호에 따르면 동국(東國) 즉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민족은 선비족.부여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土族)의 여섯인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5족을 정복하고 흡수해서 동국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
동국 역사를 일본 민족과는 무관한 부여족의 역사로 파악함으로써, 그는 일선동조론과 단군부정론을 동시에 돌파하고자 했다.
신채호는 특히 신라가 이족(異族)인 당(唐)을 끌어들여 동족(同族)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민족적 시각에서 단죄했다.
민족을 상상된 공동체로 파악하는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충분한 실증에 밑받침되지 않은독사신론은 낡은 사관의 창고라고 할 만하지만, 그 때까지의 왕조 중심 역사 서술을 민족 중심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보성을 띠고 있었다(고종석, 2003).
⑤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국제 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1960) : ⇨12월 16일.
⑥ 강화에서 처음으로 콜레라 환자가 발생(1997) : 처음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콜레라는 19세기 영국의 인도침략 후 대유행했고, 중국 북경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1922년(순조21-22년)경에 기승을 부렸다.
"평양에 윤행괴질(輪行怪疾)이 삽시간에 번져 토사 끝에 쓰러져 죽기를 열흘 안에 1천명씩이나 하는데 백약이 무효하여 속수무책이었으며 그후 팔도에 만연, 한양에서만 13만명이 죽었다."
는 평안감사 김이교의 보고서가 《순조실록》에 보인다.
선조들은 콜레라를 괴상한 질병이라 하여 '괴질', 돌림병이라 '윤질'(輪疾), 다리 마비가 온다고 '마각온'(痲脚瘟)등으로 부르다가,
중국에서 '호열자'(虎列刺)란 말이 도입되어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일제 초기에는 일본이 이 전염병을 앞잡이로 내세워 침략해 왔다 하여 콜레라환자를 격리수용하려는 일본경찰과 분노한 민중이 자주 유혈충돌했기도 했다.
⑦ 장면 총리, 시정연설에서 북진통일론 배격(1960) : "북진통일과 같이 무모하고 무계획한 슬로건을 지양하고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며 유엔감시하의 남북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정책을 수행한다."
⑧ 선경그룹, 제2이동통신 사업권 포기 발표(1992) :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지정된 후 정계를 비롯 온 국민으로부터 정실 부당선정여론이 비등하자 사업권을 포기하겠다고 공식 발표.
체신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반납에 따른 재선정은 차기정권으로 넘긴다고 발표.
⑨ 황희선생묘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炭縣面) 금승리(金蠅里)에 있는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의 묘.
1976년 8월 27일 경기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방촌( 村) 황희(黃喜)의 묘이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묘 둘레는 34m, 높이가 4m로, 봉분의 규모가 크다.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護石)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봉분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이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사방으로 화창(火窓)이 투각된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봉분 좌측에 묘갈(墓碣)이 있고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하나씩 서 있다.
묘역 아래에 있는 원모재(遠慕齋) 앞 언덕에는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
그러나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그 옆에는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비각에 보호되어 있다.
장수황씨 대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⑩ 황희선생영당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汶山邑) 사목리에 있는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의 영당.
1976년 8월 27일 경기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대표적인 청백리인 방촌( 村) 황희(黃喜)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황희의 호를 따서 방촌영당이라고도 한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에 반구정(伴鷗亭)․앙지대(仰止臺)․경모재(景慕齋)와 함께 이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셨다.
영당은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타버렸고,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측면은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초익공(初翼工) 양식의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龕室)을 두고 그 안에다 영정을 모셨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소란반자로 되어 있다.
건물 주위에는 담이 반듯하게 둘러쳐져 있고,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장수황씨 대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⑪ 대우조선 노사분규 타결(1987) : 1987년 8월 27일 오전 1시 40분.
양동생 대우조선 노조위원장과 노조 측 협상 대표들이 거제 옥포 대우병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석규(21) 씨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
노조 지도부가 분향소 앞 연단 쪽으로 다가가자 “수고했다”며 박수치는 소리와 함께 “해명하라”며 야유하는 목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했다.
양 위원장은 감격에 겨워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근로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협상은 원만히 타결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들의 처지가 곧 내 처지인 만큼 얻어낼 수 있는 데까지 얻어 내보려고 노력했습니다”라며 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달 8일 시작해 19일 동안 진행된 격렬한 파업과 긴 협상 끝에 분규가 타결된 순간이었다.
대우조선 파업은 8일 낮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옥포리 대우조선 사내운동장에서 근로자 수천 명의 연좌농성으로 시작됐다.
27일 0시 55분 옥포관광호텔 회의실에서 노사대표가 합의문에 공동서명한 뒤 악수를 하면서 협상은 마무리됐다.
노사 양측이 최종 합의한 사항은 회사 측이 주장한 급여인상액 4만 원과 근로자 측이 요구한 5만 원의 중간선인 4만5000원이었다. 기본급 1만5000원 인상에다 현장수당 1만5000원 인상, 주거수당 1만5000원 신설 등이 담겨 있었다.
노사분규 관련자와 구속자에 대해 회사가 관계기관에 선처를 건의하고 사무직 사원과 기능직 사원의 출입증 색깔을 통일하는 등 17개 합의사항을 이끌어냈다.
이 씨 장례는 7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노사분규의 회오리에 휘말린 거제 현장에 내려와 묵으며 노조집행부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
당시 조선산업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1987년 대우조선 노조 파업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한 ‘6·29 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노사분규 사건이었다.
7월 초 울산에서 현대엔진이 노조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현대 계열사로 노사분규가 이어졌다.
7월 하순에는 부산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국제상사 등 다른 대기업으로 파업이 번졌다.
8월 초 공장 밀집 지역인 마산과 창원 대구 구미 광주 전북 수도권 등으로 노동운동이 확산됐고, 8월 중순에는 전국 동시다발로 파업이 계속됐다.
당시 3저(低) 호황으로 경기가 좋아지면서 근로자들의 분배 욕구가 늘어난 데다 운동권 학생의 위장 취업과 재야 시민단체의 분규 현장 가세 등 노동운동에 정치 투쟁까지 가미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선업 호황으로 ‘알짜배기’가 돼 많은 대기업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은 1987년엔 이처럼 노사분규의 대명사였다.
정부가 밝힌 원인은 비브리오균에 의한 식중독. 보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이틀간 시간을 달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보건사회부는 ‘콜레라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며 ‘예방조치를 취하면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장담과 달리 괴질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들끓는 여론에 보사부는 ‘급성장염’이라고 둘러대다 감염자가 402명에 이른 9월9일에야 ‘신종 콜레라’라는 판명을 내렸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무 보고해야 할 콜레라 발병을 보름 동안이나 몰랐던 한국은 국제적 망신을 샀다.
정부의 오판과 늑장 대응, 갈팡질팡 속에 1969년 콜레라는 10월24일 경북 울진에서 마지막 환자가 보고되기까지 1,538명이나 감염돼 137명이 사망하는 기록을 남겼다.
광복 직후 1만여명이 사망한 적이 있으나 건국 이후 최악의 피해다.
콜레라는 2003년 이후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았지만 1969년은 오늘날과 닮은 꼴이다.
3선 개헌안의 별관 날치기 통과를 둘러싼 정쟁과 미디어법 공방, 콜레라와 신종플루로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초기 대응 미숙’마저 비슷하다.
당국의 안이한 대응 속에 신종플루 환자가 3,000명선을 넘어섰다. WHO 핵심 관계자의 ‘이론적 추정에 따르면 한국도 1,000만명이 감염돼 1만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경고가 오싹하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8/26)
⑬ 부전조약(不戰條約 ; 켈로그-브리앙조약,Kellogg-Briand Pact)
체결(1928) : 제1차 대전 후, 세계 각국은 전쟁 재발을 방지하고 전쟁의 참화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목적으로 국제연맹을 창설(1920년)하지만 정작 창설을 주도했던 미국이 가입하지 않아 무력해 보였다.
제네바 해군 군축회담(1927년)도 별 성과가 없자 독일의 재침을 우려한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은 미국에 전쟁방지를 위한 양국간 협정을 제안한다.
켈로그 미 국무장관이 협정을 다자간 협정으로 확대하도록 수정 제안함으로써 탄생한 조약이 1928년 8월27일에 미국.독일.소련 등 15개국이 파리에서 조인한 켈로그-브리앙조약이다.
부전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국제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자는 국가간의 약속이었지만 조약 당사국인 독일과 일본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약을 깨뜨렸다.
조약위반국에 대한 제재규정을 두지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언제나 그렇듯 국제관계의 기본은 힘이었다.
⑭가장 짧은 전쟁(1986): 세계전 사상 가장 짧은 전쟁은 영국과 동아프리카의 잰지바르섬과의 싸움으로 단 38분만에 끝낸 것이다.
「로슨」제독이 이끄는 「영」함대가 반란군을 진압하러가서 먼저 항복을 권고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오전 9시 2분부터 함포 사격을 퍼붓자 9시 40분게 백기가 올라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⑮ 롤랜드 힐(Rowland Hill)&우표 : 전세계 모든 나라에 있다.
오직 영국에만 없다.
뭘까. 우표의 국가 표시다.
영국은 왜 예외일까. 최초이기 때문이다.
만국우편연합(UPU)도 저작권을 인정해 유일한 예외로 자리 잡았다.
근대 우표의 등장은 1840년. 여기서 의문이 나옴 직하다.
이전에는 우편제도가 없었을까. 있었다.
로마 시대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비용이 많이 드는 후불식이었지만 우표도 존재했다.
영국이 근대 우표의 종주국이 된 것은 이 사람 덕분이다.
롤랜드 힐.
1795년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1세부터 아버지 학교의 조교로 일하며 천문학을 가르치고 과학실습교재 수리로 돈도 벌었다. 과학실습실과 수영장, 난방을 갖춘 쾌적한 학교 설립운동을 주도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육ㆍ사회환경 개선운동으로 명성을 얻는 그는 1837년 우편사에 길이 남을 논문 ‘우체국 개혁론’을 펴냈다. ▦ 발송자 요금 부담
▦ 전국 단일 요금체계
▦ 요금선납형 우표제 도입
▦ 귀족층 무료우편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논문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취인이 요금을 내지 않으려고 툭하면 우편물 수령을 거부하는 통에 적자 투성이였던 우편제도에 발전의 길이 열렸다.
기득권층의 반대를 뚫고 영국은 1840년 5월 롤랜드가 제안한 우편제도를 채택했다.
롤랜드의 친구인 인쇄업자가 선보인 접착성 우표와 철도업자 헨리 아처의 아이디어인 촘촘하게 구멍 뚫린 우표 전지(1848년)도 영국식 우편제도의 전세계로의 확산을 앞당겼다.
1854년부터 10년간 장관급 우편국장으로 재임 후 은퇴, 1879년 8월27일 84세로 세상을 뜬 롤랜드는 주요 도시에 동상으로 남아 있다.
최초의 우표인 액면가 1페니 우표의 240장짜리 전지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꿈의 수집 대상으로 손꼽힌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7)
⑯ 홍위병, 中다싱현 집단학살(1966) : 8월 27일 붉은 완장을 찬 수천 명의 젊은이가 중국 베이징(北京) 남부 다싱(大興) 현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4류 분자(지주, 부농, 반혁명세력, 악질분자) 척결을 명분으로 광기(狂氣) 서린 살육에 돌입했다.
6일간의 학살로 태어난 지 38일된 유아부터 80세 노인까지 325명이 사망했다. 또 22가구는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
홍위병. 공산주의 혁명 전통에서 ‘신성한 지위’를 갖고 있던 단어였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사진)의 중국에서 홍위병은 집단 최면에 걸린 무정부주의적 폭력조직으로 전락했다.
1966년 72세의 마오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이름붙인 마지막 혁명극을 무대에 올렸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수정파의 득세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국가의 정치구조와 전 국민의 사회생활,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통째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4구(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내세우며 사회 전체에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를 걷어 내려고 했다.
기존 권위에 반기를 들라는 마오의 호소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회집단은 학생이었다.
그해 5월 베이징대에 ‘혁명지식인들이 모두 (혁명)전투에 참가할 것’을 선동하는 대자보가 붙자 마오는 “1960년대 베이징의 코뮌 선언”이라며 환호를 보냈다.
들불처럼 전국의 학교에 혁명조직이 결성됐다.
8월 18일 수백만 명의 청년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몰려들었다. 붉은 완장을 찬 채 톈안먼 위에 올라선 마오는 어린 학생들에게 ‘정치적 세례(洗禮)’를 했다.
홍위병들은 구시대로부터의 정신적 해방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마오 개인에 대한 숭배에 빠지면서 권력자의 정신적 노예로 추락했다.
혁명가 흉내를 내던 홍위병은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종말을 맞는다.
각 분파가 정통 마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폭력적인 내분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도시 노동자와 농민들이 젊고 오만한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오는 1967년 홍위병의 해산을 명령했고, 전국에 정규군을 투입했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현대사의 ‘잃어버린 10년’으로 치부되는 것처럼 홍위병은 중국인들이 잊고 싶어 하는 가장 비참한 기억 중 하나가 됐다.
이제 노년을 준비하는 당시의 홍위병 중 일부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변혁을 이끌고 있겠지만 대다수는 궁벽한 오지로 쫓겨난 채 시대의 사생아로 남아 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2007)
⑰ 프랑스-오트 볼타(Haute Volta) 정상회담(1969) : 1969년 오늘 서부 아프리카 오트 볼타 공화국의 라미자나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 프랑스의 퐁피두(Pompidou) 대통령을 방문한다.
두 정상은 파리의 엘리제 대통령궁에서 만나 오트 볼타의 불황 타개책을 논의한다.
오트 볼타는 1960년 8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지만 불안한 정국과 경제난으로 혼란을 거듭했다.
오트 볼타의 라미자나 대통령은 1966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오트 볼타의 현재 국명은 부르키나파소다.
⑱ 치치스터, 세계일주 항해 시작(1966) : 8월 27일 영국의 모험가 치치스터가 플리머스에서 시드니까지 약 2만 3,000㎞에 달하는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했다.
1929년 12월 치치스터는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단독비행을 시작으로 세계일주에 첫발을 내딛었다.
1931년 그는 플로트가 달린 쌍발기를 제작해 태즈먼 해를 가로지르는 최초의 동서횡단비행을 시도했으나 요코하마[橫浜] 근처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그는 바다로 눈길을 돌려 세계일주 항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53년 대양항해를 시작했고, 1960년에는 플리머스에서 뉴욕시티까지 약 40일에 걸친 최초의 대서양 단독횡단항해에 성공했다.
마침내 1966년 8월 27일 그는 세계일주에 도전해 107일 만에 성공적으로 항해를 마쳤다.
1967년 1월 29일 다시 플리머스를 출발한 그는 119일 동안 약 2만 5,000㎞에 달하는 항해 끝에 귀환하는 기록을 세웠다.
치치스터의 마지막 단독항해는 1971년 1~2월 포르투갈령 기니와 니카라과 간의 항해였다.
1967년 5월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⑲ 기타 오늘의 역사
0410 서고오트 족, 로마에서 물러감
1747 정철의'송강가사' 성주본 간행
1858 대서양에 해저전성 매설작업 시작
1882(조선 고종 19) 흥선대원군, 청 나라에 납치되어 끌려감
1902 미국, 프랑스 파나마운하회사의 권리를 4천만달러에 매수
1904 세계최장의 시베리아철도 개통
1906 학제개혁(각급학교령 공포)
1908 에티오피아군, 소말리아국경 침공
1920 조선일보 제1차 무기정간(~9.2)
1921 상하이에서첫 극동 올림픽 대회
1926 미-파나마동맹조약 성립
1928 미국에 세계최초의 천연색영화 등장
1936 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
1939 독일 세계최초의 제트기 하인켈 178 실험 비행성공
1939 베를린에 첫 TV수상기 등장
1943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해채
1945 미군 B-29기 일본중소도시 폭격 강화
1953 제1차 판문점 전정회담 개최
1953 기독교문화사 설립.기독교 출판기관.김성준목사에 의해 서울 중구 충무로4가 148에 설립되었다.
1954 육군 군종감실 창설 예배
1956 정읍 부정투표 사실폭로 1953년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한국 지역 방위선 '클라크라인' 철폐 발표
1957 멕시코와 아카폴코 부근에 지진
1958 국제우주여행회의, 로켓의 평화 이용 결의
1961 혁명재판 개졍
1962 새나라자동차 공장 완공
1962 미국 마리너 2호 발사 성공
1963 캄보디아, 월남과 단교
1966 전국에 수해. 사망 77명-이재민 10만5천명
1966 문화대혁명 기간 중 집단학살 사건 발생
1970 관세청 발족
1971 서울지검, 이범렬 부장판사를 뇌물수수혐의로 연장신청 29일 형사지법 판사 39명 사법권독립 침해라고 집단사표 전국으 로 확산돼 사법파동 일어남
1973 경주 155호 고분 발굴
1976 미국 메사추세츠 공대, 최초로 유전자 합성에 성공
1976 중국 당산 지역에 강진. 1백만명 희생
1978 제1차 한미군사위원회 개최
1978 경북도교위 가짜교사자격증 사건관련 74명 구속
1979 신민당-통일당, 합당 선언
1979 한국레슬링선수단 몽고에 최초로 파견
1980 첫 여성기술사 탄생 (박광자-정영희)
1980 이디오피아군 소말리아 국경침공
1980 영국-사우디 외교관계 재개합의
1981 정부, 교육세 신설
1983 북한, 청진항을 중국에 개방
1983 한국, 국제기능올림픽 5연패
1985 남북적십자 제9차 본회담, 평양인민문화궁전서 개최
1986 태풍 베라호 강타, 34명 사망 및 실종, 재산피해 372여억원
1987 경찰,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박순자 모자의 출국정지 요청
1989 일본 자위대, 태평양 군사훈련에 참가
1991 교통부, 택시요금 거리병산제를 67개시로 확대실시
1992 선경그룹,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포기하겠다고 공식 발표
1992 한국주재 중국대사관 개관
1999 미국 마이클 존슨, 11년만에 남자 육상400m에서 세계신기록 (43초18)수립
오늘의 인물
①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8.27) : 조선조 초기의 학자.
선산 사람.
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한 후 겸예문이 되었고, 성종 때 형조판서까지 되었다.
고려 야은의 학통을 이어 제자 수백명을 양성하였으며 은연중 서울의 학자와 대항하였다.
연산군때 무오사화가 일어나 부관 참시형을 당하였다.
② 홍범도(洪範圖 ;1868.8.27 - 1943) :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자성 출생.
막노동을 하다가 1907년(융희 1)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고, 북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며,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3․1운동 후 대한독립군 총사령으로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분전하였고, 20년 「봉오동전투」에서 매복전술로 일본군을 대파하였으며, 「청산리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독립군을 무장해제 하려던 소련군과도 충돌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③ 김창숙(金昌淑 ; 1879.8.27 - 1962) : 독립운동가.
유학자.
정치가.
호는 심산(心山).
경상북도 성주 출신.
1909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려 체포되었으며, 19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20년 귀국하여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21년 다시 중국에 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27년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 본국으로 압송, 복역 중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45년 민주의원의 의원이 되었으며, 이승만(李承晩)정권에 항거,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유교정신의 재현을 위해 힘썼다.
46년 성균관대학을 창립, 초대 학장에 취임.
62년 건국훈장 대한국민장이 추서되었다.
④ 서 일(徐一; 1881.2.26 ~ 1921.8.27) : ⇨2월 26일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백포(白圃).
'청산리전투'의 숨은 주역 서일 선생 !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백포(白圃) 서일은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1911년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서일의 관심은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 데 쏠렸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쳤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북로군정서로 확대발전시킨 항일무장단체에서는 군사력을 키웠다.
총사령관 김좌진의 지휘하에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총재였던 서일을 이 전투의 숨은 주역으로 끌어올린 것도 그가 조직한 북로군정서였다.
청산리전투 후 북로군정서는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한다.
서일은 이곳에서 다른 독립군부대와 세를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될만큼 그 위치가 독보적이었다.
1921년 1월, 대한독립군단이 우수리강을 건너 좀더 안전한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로 이동하고 다른 독립군부대도 이곳으로 집결하자 일본은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러시아를 위협한다.
1921년 6월28일, 일본을 상대하기가 버거웠던 러시아가 2대의 장갑차와 30여문의 기관총을 앞세워 독립군부대를 공격한 이른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수십명~수백명이 사망하고 800~1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타격을 입자 서일은 통분을 참지못하고 8월 27일 자결로 생을 마친다.
⑤ 조용순(趙容淳 ; 1898.2.19 - 1975.8.27) : 일제 강점기에 판사를 지낸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제7대 법무부 장관과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2월 19일.
⑥ 김상용(金尙鎔 ; 1902.8.27 - 1951.6.22) : 경기도 연천 출생. 시인.
호는 월파(月坡).
일본 리쿄(立敎)대학 영문과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서 교편.
「문장(文章」지(誌)를 통해 문단에 등장.
동양적 서정성(抒情性)이 짙은 감미로운 작품을 발표하였다.
해방 후 한 때 관계(官界)에 발을 들이기도 했으나, 이 후 일생 교원 생활을 하며 시작(詩作)에 전념했다.
저서에는 그 시대의 불안․우수를 노래한 시집 <망향(望鄕)>이 있다.
1951년 6월 부산 피난지에서 정치무대로 쓰여졌던 김활란의 집인 「필승각」파티에서 게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켰다.
별 뜻없이 집에서 치료하다가 의사의 잘못된 투약으로 6월 22일 어처구니 없이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월 22일
⑦ 장준하(張俊河 ; 1915.8.27 ~ 1975.8.17) : [요약] 한국 언론인 겸 정치가.
《사상계》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으며,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정희 정권에 맞섰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다.
활동분야 독립운동, 언론, 정치
출생지 평북 의주(義州)
주요수상 막사이사이 언론상(1962)
주요저서 《돌베개》
[본문] 평북 의주(義州)출생.
일본의 도요[東洋]대학 예과를 거쳐 니혼[日本]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 그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비서로 활약하였다.
귀국하여 1953년 종합교양지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으며, 19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으로 복귀하였으며, 1973년 민주통일당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정희정권에 맞섰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으나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하였다.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에 《돌베개》가 있다.
(두산백과사전)
⇨ 8월 17일.
⑧ 이주일(李周逸 ; 1940.10.24 ~ 2002.8.27) : ⇨10월 24일.
코미디언.
본명 정주일
별칭 코미디의 황제
'코미디 황제'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주일 씨가 2002년 오늘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주일 씨는 1965년부터 연예계에 몸담은 뒤 1979년 텔레비전 방송에 뛰어들면서 희극배우로서 명성을 얻었다.
1992년에는 경기도 구리에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힘겨운 투병을 하면서도 금연 공익광고를 찍어 '이주일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범국민금연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⑨ 드라이저(Herman Theodore Dreiser ;1871.8.27 - 1945.12.29 : 미국의 소설가.
가난한 독일 이민의 아들.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사회의 암흑면을 폭로.
대표작에 <아메리카의 비극> <시스터 캐리> <금욕의 인간> <거인> <자본가> 등이 있다.
알바니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테레사는 1928년 아일랜드 라스프란햄의 '동정 마리아회'에 들어갔다.
그뒤 인도로 가 '로레토회' 수녀가 되었으며, 벵골의 엔탈리에 있는 여학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인도 시민권을 취득한 후, 1946년 수녀원을 나온 그녀는 간호학을 배워 캘커타의 빈민촌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한 테레사 수녀는 인도 관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나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로마 가톨릭 인사들로 인해 숱한 난관에 부딪치면서도 나병 환자, 버려진 아이들, 노인들에 대한 봉사를 계속했다.
이밖에도 전세계 어디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교회를 세웠다.
만년에 그녀는 이혼․피임․낙태에 대해 공식적인 반대입장을 천명하기도 했다.
1990년에 대수녀원장직을 공식 사임했으나 적절한 후계자가 없어 1997년 3월 인도 태생의 니르말라 수녀가 임명될 때까지 실질적으로 계속 대수녀원장직을 수행했다.
제1회 교황 요한네스 23세 평화상(1971)과 노벨 평화상(1979)을 수상했으며, 1963년에는 인도 정부도 국가 차원에서 그녀에게 상을 수여했다.
사후 그녀의 장례식은 평생을 인도의 '빈민굴의 성자'로 살아온 단순한 삶과는 대조적으로 성대한 국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는 그녀가 평생을 몸바친 '사랑의 선교회' 1층 방 한 귀퉁이에 안장됐다.
******마더 테레사 수녀 탄생 : 평생 인도 캘커타에 거주하며 봉사와 희생의 삶을 보냄으로써 "살아있는 성인", "가난한 자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테레사(Theresa of Calcutta) 수녀가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공화국의 스코예프에서 출생했다.
1928년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간 테레사 수녀는 1937년 그곳에서 "아그네스"라는 이름으로 종신서원을 했다.
아그네스는 "아기 예수의 성녀"라는 의미를 지니며, 테레사 수녀는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추구했다.
테레사 수녀는 1963년 '사랑의 선교 수사회'를 설립했으며, 이 단체는 1965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아 교황 직속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테레사 수녀는 희생적인 삶으로 1971년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과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7년 9월5일 '사랑의 선교 수사회 본부'인 마더하우스에서 87세로 운명을 달리한 그녀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듯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⑫ 엡스타인 사망(1967) : 비틀스 매니저.
영국의 록 그룹 비틀스를 세계적인 무대로 끌어 올린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
1967년 오늘 33살 젊은 나이에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한다.
각기 개성이 독특한 멤버들의 관계를 조율했던 엡스타인의 죽음은 비틀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영국의 행정가이자 교육가로 15년 동안 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적이고 엄격한 자기훈련을 강조하였다.
최초로 우표를 발행하는 우편제도의 개혁을 가져와 근대 우편제도의 아버지라 부른다.
잉글랜드 우스터셔주 키더민스터에서 출생하였다.
영어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15년 동안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적이고 엄격한 자기훈련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림·천문학·수학·수송기관 등 넓은 분야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종래의 우편료가 배달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고, 또 요금이 비쌌던 것을 균일하고 값싸게 하는 방법으로 1840년 최초로 우표를 발행하였다.
이러한 1페니 우편제도가 크게 성공을 거두자 세계 각국이 잇달아 이 제도를 본받아 우표를 발행, 그를 근대 우편제도의 아버지라 부른다.
⑭ 찰스 도스(Charles Gates Dawes ; 1865.8.27 ~ 1951.4.23) :
도스 플랜의 주창자일 뿐 아니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첫 출발은 변호사. 4대조 할아버지와 부친이 각각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덕분에 손님이 많았다.
명성과 재산을 쌓은 그는 29세에는 가스등 사업에 손대고 33세에 연방 통화감독관에 올랐다.
매킨리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와준 대가다.
금융을 익힌 도스는 1902년(37세) 센트럴투자신탁은행을 세워 행장으로 근무하던 중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소령으로 자원 입대, 종전까지 근무하며 준장으로 예편했다.
돌아온 참전용사 도스에게는 하딩 대통령은 초대 예산국장 자리를 맡겼다.
도스는 유럽 주둔 미군의 보급을 책임졌던 경험을 살려 각 부처가 제멋대로 사용하던 예산을 단일예산제로 바꿔 연 20억달러씩 연방 예산을 절감해냈다.
도스의 다음 여정은 독일 배상문제 처리. 1923년 국제배상위원장에 지목돼 배상기간을 연장하는 도스 플랜을 내놓았다.
대독 경제차관을 주도해 독일의 초물가고 탈출과 전후 부흥의 계기도 제공했다.
덕분에 1925년 영국 체임벌린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쿨리지 대통령과 짝을 이뤄 부통령에 오른 것도 1925년이다.
대통령보다 장황한 취임연설을 한 탓에 임기 내내 쿨리지와 불화를 겪다 퇴임한 뒤 영국대사를 맡았다.
윈저공에게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을 소개한 사람이 도스라는 주장도 있다.
대공황기에 재건금융공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마친 그는 1951년 4월23일 은행가로서 사망했으나 그의 ‘음악’은 아직까지 살아 있다. 엘튼 존과 클리프 리처드가 불렀던 올드 팝송 ‘이츠 올 인 더 게임(It’s all In The Game)’이 독학한 피아니스트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가 작곡한 곡을 편곡한 것이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8.4.23.인터넷한국일보)
⇨4월 23일.
⑮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 ; 1855 - 1937.8.27) : 명문 카네기멜런대학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생전에는 훨씬 유명했다.
록펠러ㆍ카네기에 이어 미국 3위의 재산가였으며 10년11개월을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며 번영과 거품ㆍ대공황을 맛봤다.
74명에 이르는 역대 미국 재무장관 중 세번째로 장수한 그는 대통령 셋을 거친 유일한 재무장관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멜런은 출생(1855년)의 제비뽑기부터 운이 좋았다.
은행장인 부친에게서 27세에 경영권을 물려받았으니까.
코카콜라 등 될성부른 기업을 발굴해 부를 늘리던 그는 제조업에도 뛰어들어 세계 굴지의 알루미늄 회사인 알코아, 석유 메이저 걸프(1987년 셰브론과 통합)도 사들였다.
45세에 결혼한 25년 연하의 아내의 외도로 12년 만에 이혼한 뒤 1차대전 특수로 돈벌이에 매진하던 그는 전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21년 하딩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발탁된 것.
멜런은 세금감면에 온 힘을 쏟았다.
부유층의 소득세와 법인세를 3분의1 수준으로 깎고 연방 지출도 50억달러에서 30억달러로 줄였다.
레이거노믹스의 원형을 그의 감세정책(Mellonomics)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재무장관직을 떠난 것은 대공황 때문.
재정상태가 나빠진 탓에 소득세를 1922년 수준으로 인상하면서도 ‘공황은 체질 개선의 기회’라며 인위적 경기부양에 반대하는 그를 후버 대통령은 영국대사로 내보냈다.
멜런은 자선과 탈세혐의에 맞서는 데 말년을 보냈다.
1937년 8월27일 사망 직전에 그가 세운 멜런연구소는 1967년 카네기공과대학과 합쳐 카네기멜런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고소를 취하하는 대신 그가 소유한 미술관을 개인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국가에 기증한다는 타협의 결과물이 오늘날 뉴욕 국립미술관이다.
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
8월 27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27장 전문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② 잠언 27장
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찌니라
고후10:12, 고후10:18
3.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잠12:16, 에3:6
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6.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7.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8.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창4:14
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10.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찌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삼하10:2, 요7:5
11.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시127:5
12.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13.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찌니라
14.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눅11:27
15.
다투는 부녀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16.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18.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딤후2:6
19.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잠17:3, 눅6:26
22.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찌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렘5:3
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24.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시89:39, 렘13:18
25.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26.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27.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 오늘과 내일을 위한 지혜
○ 만족함이 없는 사람의 눈
오늘의 샘터
① 헤겔의 말 : 『큰 정열없이 세계사의 대업이 이루어진 일이 없다.』
② 테레사의 말 : "모든 것, 모든 움직임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모든 사물, 모든 행위 속에 존재합니다."
③ 김상용의 망우리 묘지 : 묘비에 그의 시 <향수>가 새겨져 있다.
「향수」전문 !
『이적 끊진 산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고.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오늘의 이야기(My-Story)
① 우리나라 한국 Korea 는 Corea로 원대복귀하여야 합니다.
② 국민은 국사를 알아야 합니다<국사 교육의 철저>
각인각자 각개는 일기쓰기와 성경공부를하여야 하고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의 뿌리를 알아야 하며,
인류는 문화사<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역사
① 제1차 한일 협약 체결(1904) :〔체결 과정〕노일 전쟁이 일본측에 승산이 보이자 황무지 개척안을 철회하는 대신 8월에는 한국의 외교․재정으로부터 국권을 빼앗기 위한 수단으로 특명 공사 하야시 콘스케(林權助)는 외무대신 이하영(李夏榮)을 상대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고문 정치〕재정에 일본인 고문(顧問), 외교에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게 하였고, 중요한 외교 문제는 사전에 일본의 허락을 받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고문 정치(顧問政治)가 시작되었다.
⇨7월 24일.
⇨8월 11일.
② 순종 황제 즉위(1907) : 1907년 오늘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황제가 즉위한다.
그는 같은 해 7월 19일 일제의 강요로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7대 왕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순종의 재위기간은 불과 3년 남짓.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의 왕위는 상실되고 만다.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창덕궁으로 쫓겨나 한 많은 삶을 살다 1926년 4월 25일 이승을 하직한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 이른바 6․10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③ 제11대 전두환 대통령 당선(1980) : 1980년 오늘 전두환 국가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함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 보궐선거에 단독출마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 열린 투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 대의원 2천5백40명 가운데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2천5백25명.
이중 한 표만 무효 처리되고 2천5백24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6개월 동안의 잔여 임기를 마친 뒤 이듬해 1981년 2월 실시된 대선에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했다.
④ 독사신론(讀史新論) 연재(1908) : 8월 27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대한매일신보에독사신론이라는 제목의 사론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해 9월15일까지 1차분이 연재되고 다시 10월29일부터 12월13일까지 2차분이 연재돼 50회까지 나아간 이 미완의 사론은 우리 역사에서 근대적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독사신론은 그 즈음 일본 학계의 영향 아래 조선 사학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단군부정론(檀君否定論) 등에 대한 대타(對他)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실제로 김택영(金澤榮)의동사집략(東史輯略, 1902)과 그 증보판인역사집략(歷史輯略,1905)은 그 때까지 전승되던 단군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었고, 현채(玄采)의 동국사략(東國史略,1906)은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미마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런 역사 인식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로 파악하고 ‘독사신론을 통해 민족을 주체로 삼는 역사 기술을 시도했다.
신채호에 따르면 동국(東國) 즉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민족은 선비족.부여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土族)의 여섯인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5족을 정복하고 흡수해서 동국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
동국 역사를 일본 민족과는 무관한 부여족의 역사로 파악함으로써, 그는 일선동조론과 단군부정론을 동시에 돌파하고자 했다.
신채호는 특히 신라가 이족(異族)인 당(唐)을 끌어들여 동족(同族)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민족적 시각에서 단죄했다.
민족을 상상된 공동체로 파악하는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충분한 실증에 밑받침되지 않은독사신론은 낡은 사관의 창고라고 할 만하지만, 그 때까지의 왕조 중심 역사 서술을 민족 중심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보성을 띠고 있었다(고종석, 2003).
⑤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국제 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1960) : ⇨12월 16일.
⑥ 강화에서 처음으로 콜레라 환자가 발생(1997) : 처음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콜레라는 19세기 영국의 인도침략 후 대유행했고, 중국 북경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1922년(순조21-22년)경에 기승을 부렸다.
"평양에 윤행괴질(輪行怪疾)이 삽시간에 번져 토사 끝에 쓰러져 죽기를 열흘 안에 1천명씩이나 하는데 백약이 무효하여 속수무책이었으며 그후 팔도에 만연, 한양에서만 13만명이 죽었다."
는 평안감사 김이교의 보고서가 《순조실록》에 보인다.
선조들은 콜레라를 괴상한 질병이라 하여 '괴질', 돌림병이라 '윤질'(輪疾), 다리 마비가 온다고 '마각온'(痲脚瘟)등으로 부르다가,
중국에서 '호열자'(虎列刺)란 말이 도입되어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일제 초기에는 일본이 이 전염병을 앞잡이로 내세워 침략해 왔다 하여 콜레라환자를 격리수용하려는 일본경찰과 분노한 민중이 자주 유혈충돌했기도 했다.
⑦ 장면 총리, 시정연설에서 북진통일론 배격(1960) : "북진통일과 같이 무모하고 무계획한 슬로건을 지양하고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며 유엔감시하의 남북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정책을 수행한다."
⑧ 선경그룹, 제2이동통신 사업권 포기 발표(1992) :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지정된 후 정계를 비롯 온 국민으로부터 정실 부당선정여론이 비등하자 사업권을 포기하겠다고 공식 발표.
체신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반납에 따른 재선정은 차기정권으로 넘긴다고 발표.
⑨ 황희선생묘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炭縣面) 금승리(金蠅里)에 있는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의 묘.
1976년 8월 27일 경기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방촌( 村) 황희(黃喜)의 묘이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묘 둘레는 34m, 높이가 4m로, 봉분의 규모가 크다.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護石)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봉분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이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사방으로 화창(火窓)이 투각된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봉분 좌측에 묘갈(墓碣)이 있고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하나씩 서 있다.
묘역 아래에 있는 원모재(遠慕齋) 앞 언덕에는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
그러나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그 옆에는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비각에 보호되어 있다.
장수황씨 대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⑩ 황희선생영당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汶山邑) 사목리에 있는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의 영당.
1976년 8월 27일 경기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대표적인 청백리인 방촌( 村) 황희(黃喜)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황희의 호를 따서 방촌영당이라고도 한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에 반구정(伴鷗亭)․앙지대(仰止臺)․경모재(景慕齋)와 함께 이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셨다.
영당은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타버렸고,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측면은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초익공(初翼工) 양식의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龕室)을 두고 그 안에다 영정을 모셨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소란반자로 되어 있다.
건물 주위에는 담이 반듯하게 둘러쳐져 있고,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장수황씨 대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⑪ 대우조선 노사분규 타결(1987) : 1987년 8월 27일 오전 1시 40분.
양동생 대우조선 노조위원장과 노조 측 협상 대표들이 거제 옥포 대우병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석규(21) 씨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
노조 지도부가 분향소 앞 연단 쪽으로 다가가자 “수고했다”며 박수치는 소리와 함께 “해명하라”며 야유하는 목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했다.
양 위원장은 감격에 겨워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근로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협상은 원만히 타결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들의 처지가 곧 내 처지인 만큼 얻어낼 수 있는 데까지 얻어 내보려고 노력했습니다”라며 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달 8일 시작해 19일 동안 진행된 격렬한 파업과 긴 협상 끝에 분규가 타결된 순간이었다.
대우조선 파업은 8일 낮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옥포리 대우조선 사내운동장에서 근로자 수천 명의 연좌농성으로 시작됐다.
27일 0시 55분 옥포관광호텔 회의실에서 노사대표가 합의문에 공동서명한 뒤 악수를 하면서 협상은 마무리됐다.
노사 양측이 최종 합의한 사항은 회사 측이 주장한 급여인상액 4만 원과 근로자 측이 요구한 5만 원의 중간선인 4만5000원이었다. 기본급 1만5000원 인상에다 현장수당 1만5000원 인상, 주거수당 1만5000원 신설 등이 담겨 있었다.
노사분규 관련자와 구속자에 대해 회사가 관계기관에 선처를 건의하고 사무직 사원과 기능직 사원의 출입증 색깔을 통일하는 등 17개 합의사항을 이끌어냈다.
이 씨 장례는 7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노사분규의 회오리에 휘말린 거제 현장에 내려와 묵으며 노조집행부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
당시 조선산업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1987년 대우조선 노조 파업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한 ‘6·29 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노사분규 사건이었다.
7월 초 울산에서 현대엔진이 노조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현대 계열사로 노사분규가 이어졌다.
7월 하순에는 부산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국제상사 등 다른 대기업으로 파업이 번졌다.
8월 초 공장 밀집 지역인 마산과 창원 대구 구미 광주 전북 수도권 등으로 노동운동이 확산됐고, 8월 중순에는 전국 동시다발로 파업이 계속됐다.
당시 3저(低) 호황으로 경기가 좋아지면서 근로자들의 분배 욕구가 늘어난 데다 운동권 학생의 위장 취업과 재야 시민단체의 분규 현장 가세 등 노동운동에 정치 투쟁까지 가미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선업 호황으로 ‘알짜배기’가 돼 많은 대기업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은 1987년엔 이처럼 노사분규의 대명사였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08)
⑫ 1969년 콜레라 : 마을 사람들이 구토와 설사ㆍ저온증에 시달렸다.
1969년 8월27일, 전북 옥구군 실향민촌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틀 뒤 최초의 사망자가 나왔다.
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사태를 파악한 정부가 원인을 1차 발표한 9월3일, 감염자는 64명, 사망자는 11명으로 늘어났다.
군산과 고창ㆍ부안, 충남 서천까지 확산된 감염지역에서는 동남아를 휩쓸던 콜레라 공포에 떨었다.
정부가 밝힌 원인은 비브리오균에 의한 식중독. 보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이틀간 시간을 달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보건사회부는 ‘콜레라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며 ‘예방조치를 취하면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장담과 달리 괴질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들끓는 여론에 보사부는 ‘급성장염’이라고 둘러대다 감염자가 402명에 이른 9월9일에야 ‘신종 콜레라’라는 판명을 내렸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무 보고해야 할 콜레라 발병을 보름 동안이나 몰랐던 한국은 국제적 망신을 샀다.
정부의 오판과 늑장 대응, 갈팡질팡 속에 1969년 콜레라는 10월24일 경북 울진에서 마지막 환자가 보고되기까지 1,538명이나 감염돼 137명이 사망하는 기록을 남겼다.
광복 직후 1만여명이 사망한 적이 있으나 건국 이후 최악의 피해다.
콜레라는 2003년 이후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았지만 1969년은 오늘날과 닮은 꼴이다.
3선 개헌안의 별관 날치기 통과를 둘러싼 정쟁과 미디어법 공방, 콜레라와 신종플루로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초기 대응 미숙’마저 비슷하다.
당국의 안이한 대응 속에 신종플루 환자가 3,000명선을 넘어섰다. WHO 핵심 관계자의 ‘이론적 추정에 따르면 한국도 1,000만명이 감염돼 1만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경고가 오싹하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8/26)
⑬ 부전조약(不戰條約 ; 켈로그-브리앙조약,Kellogg-Briand Pact)
체결(1928) : 제1차 대전 후, 세계 각국은 전쟁 재발을 방지하고 전쟁의 참화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목적으로 국제연맹을 창설(1920년)하지만 정작 창설을 주도했던 미국이 가입하지 않아 무력해 보였다.
제네바 해군 군축회담(1927년)도 별 성과가 없자 독일의 재침을 우려한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은 미국에 전쟁방지를 위한 양국간 협정을 제안한다.
켈로그 미 국무장관이 협정을 다자간 협정으로 확대하도록 수정 제안함으로써 탄생한 조약이 1928년 8월27일에 미국.독일.소련 등 15개국이 파리에서 조인한 켈로그-브리앙조약이다.
부전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국제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자는 국가간의 약속이었지만 조약 당사국인 독일과 일본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약을 깨뜨렸다.
조약위반국에 대한 제재규정을 두지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언제나 그렇듯 국제관계의 기본은 힘이었다.
⑭ 가장 짧은 전쟁(1986) : 세계전 사상 가장 짧은 전쟁은 영국과 동아프리카의 잰지바르섬과의 싸움으로 단 38분만에 끝낸 것이다.
「로슨」제독이 이끄는 「영」함대가 반란군을 진압하러가서 먼저 항복을 권고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오전 9시 2분부터 함포 사격을 퍼붓자 9시 40분게 백기가 올라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⑮ 롤랜드 힐(Rowland Hill)&우표 : 전세계 모든 나라에 있다.
오직 영국에만 없다.
뭘까. 우표의 국가 표시다.
영국은 왜 예외일까. 최초이기 때문이다.
만국우편연합(UPU)도 저작권을 인정해 유일한 예외로 자리 잡았다.
근대 우표의 등장은 1840년. 여기서 의문이 나옴 직하다.
이전에는 우편제도가 없었을까. 있었다.
로마 시대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비용이 많이 드는 후불식이었지만 우표도 존재했다.
영국이 근대 우표의 종주국이 된 것은 이 사람 덕분이다.
롤랜드 힐.
1795년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1세부터 아버지 학교의 조교로 일하며 천문학을 가르치고 과학실습교재 수리로 돈도 벌었다. 과학실습실과 수영장, 난방을 갖춘 쾌적한 학교 설립운동을 주도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육ㆍ사회환경 개선운동으로 명성을 얻는 그는 1837년 우편사에 길이 남을 논문 ‘우체국 개혁론’을 펴냈다. ▦ 발송자 요금 부담
▦ 전국 단일 요금체계
▦ 요금선납형 우표제 도입
▦ 귀족층 무료우편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논문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취인이 요금을 내지 않으려고 툭하면 우편물 수령을 거부하는 통에 적자 투성이였던 우편제도에 발전의 길이 열렸다.
기득권층의 반대를 뚫고 영국은 1840년 5월 롤랜드가 제안한 우편제도를 채택했다.
롤랜드의 친구인 인쇄업자가 선보인 접착성 우표와 철도업자 헨리 아처의 아이디어인 촘촘하게 구멍 뚫린 우표 전지(1848년)도 영국식 우편제도의 전세계로의 확산을 앞당겼다.
1854년부터 10년간 장관급 우편국장으로 재임 후 은퇴, 1879년 8월27일 84세로 세상을 뜬 롤랜드는 주요 도시에 동상으로 남아 있다.
최초의 우표인 액면가 1페니 우표의 240장짜리 전지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꿈의 수집 대상으로 손꼽힌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7)
⑯ 홍위병, 中다싱현 집단학살(1966) : 8월 27일 붉은 완장을 찬 수천 명의 젊은이가 중국 베이징(北京) 남부 다싱(大興) 현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4류 분자(지주, 부농, 반혁명세력, 악질분자) 척결을 명분으로 광기(狂氣) 서린 살육에 돌입했다.
6일간의 학살로 태어난 지 38일된 유아부터 80세 노인까지 325명이 사망했다. 또 22가구는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
홍위병. 공산주의 혁명 전통에서 ‘신성한 지위’를 갖고 있던 단어였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사진)의 중국에서 홍위병은 집단 최면에 걸린 무정부주의적 폭력조직으로 전락했다.
1966년 72세의 마오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이름붙인 마지막 혁명극을 무대에 올렸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수정파의 득세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국가의 정치구조와 전 국민의 사회생활,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통째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4구(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내세우며 사회 전체에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를 걷어 내려고 했다.
기존 권위에 반기를 들라는 마오의 호소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회집단은 학생이었다.
그해 5월 베이징대에 ‘혁명지식인들이 모두 (혁명)전투에 참가할 것’을 선동하는 대자보가 붙자 마오는 “1960년대 베이징의 코뮌 선언”이라며 환호를 보냈다.
들불처럼 전국의 학교에 혁명조직이 결성됐다.
8월 18일 수백만 명의 청년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몰려들었다. 붉은 완장을 찬 채 톈안먼 위에 올라선 마오는 어린 학생들에게 ‘정치적 세례(洗禮)’를 했다.
홍위병들은 구시대로부터의 정신적 해방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마오 개인에 대한 숭배에 빠지면서 권력자의 정신적 노예로 추락했다.
혁명가 흉내를 내던 홍위병은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종말을 맞는다.
각 분파가 정통 마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폭력적인 내분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도시 노동자와 농민들이 젊고 오만한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오는 1967년 홍위병의 해산을 명령했고, 전국에 정규군을 투입했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현대사의 ‘잃어버린 10년’으로 치부되는 것처럼 홍위병은 중국인들이 잊고 싶어 하는 가장 비참한 기억 중 하나가 됐다.
이제 노년을 준비하는 당시의 홍위병 중 일부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변혁을 이끌고 있겠지만 대다수는 궁벽한 오지로 쫓겨난 채 시대의 사생아로 남아 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2007)
⑰ 프랑스-오트 볼타(Haute Volta) 정상회담(1969) : 1969년 오늘 서부 아프리카 오트 볼타 공화국의 라미자나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 프랑스의 퐁피두(Pompidou) 대통령을 방문한다.
두 정상은 파리의 엘리제 대통령궁에서 만나 오트 볼타의 불황 타개책을 논의한다.
오트 볼타는 1960년 8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지만 불안한 정국과 경제난으로 혼란을 거듭했다.
오트 볼타의 라미자나 대통령은 1966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오트 볼타의 현재 국명은 부르키나파소다.
⑱ 치치스터, 세계일주 항해 시작(1966) : 8월 27일 영국의 모험가 치치스터가 플리머스에서 시드니까지 약 2만 3,000㎞에 달하는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했다.
1929년 12월 치치스터는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단독비행을 시작으로 세계일주에 첫발을 내딛었다.
1931년 그는 플로트가 달린 쌍발기를 제작해 태즈먼 해를 가로지르는 최초의 동서횡단비행을 시도했으나 요코하마[橫浜] 근처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그는 바다로 눈길을 돌려 세계일주 항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53년 대양항해를 시작했고, 1960년에는 플리머스에서 뉴욕시티까지 약 40일에 걸친 최초의 대서양 단독횡단항해에 성공했다.
마침내 1966년 8월 27일 그는 세계일주에 도전해 107일 만에 성공적으로 항해를 마쳤다.
1967년 1월 29일 다시 플리머스를 출발한 그는 119일 동안 약 2만 5,000㎞에 달하는 항해 끝에 귀환하는 기록을 세웠다.
치치스터의 마지막 단독항해는 1971년 1~2월 포르투갈령 기니와 니카라과 간의 항해였다.
1967년 5월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⑲ 기타 오늘의 역사
0410 서고오트 족, 로마에서 물러감
1747 정철의'송강가사' 성주본 간행
1858 대서양에 해저전성 매설작업 시작
1882(조선 고종 19) 흥선대원군, 청 나라에 납치되어 끌려감
1902 미국, 프랑스 파나마운하회사의 권리를 4천만달러에 매수
1904 세계최장의 시베리아철도 개통
1906 학제개혁(각급학교령 공포)
1908 에티오피아군, 소말리아국경 침공
1920 조선일보 제1차 무기정간(~9.2)
1921 상하이에서 첫 극동 올림픽 대회
1926 미-파나마동맹조약 성립
1928 미국에 세계최초의 천연색영화 등장
1936 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
1939 독일 세계최초의 제트기 하인켈 178 실험 비행성공
1939 베를린에 첫 TV수상기 등장
1943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해채
1945 미군 B-29기 일본중소도시 폭격 강화
1953 제1차 판문점 전정회담 개최
1953 기독교문화사 설립.기독교 출판기관.김성준목사에 의해 서울 중구 충무로4가 148에 설립되었다.
1954 육군 군종감실 창설 예배
1956 정읍 부정투표 사실폭로 1953년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한국 지역 방위선 '클라크라인' 철폐 발표
1957 멕시코와 아카폴코 부근에 지진
1958 국제우주여행회의, 로켓의 평화 이용 결의
1961 혁명재판 개졍
1962 새나라자동차 공장 완공
1962 미국 마리너 2호 발사 성공
1963 캄보디아, 월남과 단교
1966 전국에 수해. 사망 77명-이재민 10만5천명
1966 문화대혁명 기간 중 집단학살 사건 발생
1970 관세청 발족
1971 서울지검, 이범렬 부장판사를 뇌물수수혐의로 연장신청 29일 형사지법 판사 39명 사법권독립 침해라고 집단사표 전국으 로 확산돼 사법파동 일어남
1973 경주 155호 고분 발굴
1976 미국 메사추세츠 공대, 최초로 유전자 합성에 성공
1976 중국 당산 지역에 강진. 1백만명 희생
1978 제1차 한미군사위원회 개최
1978 경북도교위 가짜교사자격증 사건관련 74명 구속
1979 신민당-통일당, 합당 선언
1979 한국레슬링선수단 몽고에 최초로 파견
1980 첫 여성기술사 탄생 (박광자-정영희)
1980 이디오피아군 소말리아 국경침공
1980 영국-사우디 외교관계 재개합의
1981 정부, 교육세 신설
1983 북한, 청진항을 중국에 개방
1983 한국, 국제기능올림픽 5연패
1985 남북적십자 제9차 본회담, 평양인민문화궁전서 개최
1986 태풍 베라호 강타, 34명 사망 및 실종, 재산피해 372여억원
1987 경찰,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박순자 모자의 출국정지 요청
1989 일본 자위대, 태평양 군사훈련에 참가
1991 교통부, 택시요금 거리병산제를 67개시로 확대실시
1992 선경그룹,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포기하겠다고 공식 발표
1992 한국주재 중국대사관 개관
1999 미국 마이클 존슨, 11년만에 남자 육상400m에서 세계신기록 (43초18)수립
오늘의 인물
①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8.27) : 조선조 초기의 학자.
선산 사람.
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한 후 겸예문이 되었고, 성종 때 형조판서까지 되었다.
고려 야은의 학통을 이어 제자 수백명을 양성하였으며 은연중 서울의 학자와 대항하였다.
연산군때 무오사화가 일어나 부관 참시형을 당하였다.
② 홍범도(洪範圖 ;1868.8.27 - 1943) :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자성 출생.
막노동을 하다가 1907년(융희 1)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고, 북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며,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3․1운동 후 대한독립군 총사령으로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분전하였고, 20년 「봉오동전투」에서 매복전술로 일본군을 대파하였으며, 「청산리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독립군을 무장해제 하려던 소련군과도 충돌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③ 김창숙(金昌淑 ; 1879.8.27 - 1962) : 독립운동가.
유학자.
정치가.
호는 심산(心山).
경상북도 성주 출신.
1909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려 체포되었으며, 19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20년 귀국하여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21년 다시 중국에 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27년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 본국으로 압송, 복역 중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45년 민주의원의 의원이 되었으며, 이승만(李承晩)정권에 항거,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유교정신의 재현을 위해 힘썼다.
46년 성균관대학을 창립, 초대 학장에 취임.
62년 건국훈장 대한국민장이 추서되었다.
④ 서 일(徐一 ; 1881.2.26 ~ 1921.8.27) : ⇨2월 26일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백포(白圃).
'청산리전투'의 숨은 주역 서일 선생 !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백포(白圃) 서일은 10여년간 만주벌판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진두지휘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1911년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 왕청현에 정착한 서일의 관심은 오로지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르는 데 쏠렸다.
정신력과 군사력을 힘의 원천으로 믿어온 그는 대종교를 통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가르쳤고,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대한군정부 → 북로군정서로 확대발전시킨 항일무장단체에서는 군사력을 키웠다.
총사령관 김좌진의 지휘하에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총재였던 서일을 이 전투의 숨은 주역으로 끌어올린 것도 그가 조직한 북로군정서였다.
청산리전투 후 북로군정서는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한다.
서일은 이곳에서 다른 독립군부대와 세를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될만큼 그 위치가 독보적이었다.
1921년 1월, 대한독립군단이 우수리강을 건너 좀더 안전한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로 이동하고 다른 독립군부대도 이곳으로 집결하자 일본은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러시아를 위협한다.
1921년 6월28일, 일본을 상대하기가 버거웠던 러시아가 2대의 장갑차와 30여문의 기관총을 앞세워 독립군부대를 공격한 이른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수십명~수백명이 사망하고 800~1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타격을 입자 서일은 통분을 참지못하고 8월 27일 자결로 생을 마친다.
⑤ 조용순(趙容淳 ; 1898.2.19 - 1975.8.27) : 일제 강점기에 판사를 지낸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제7대 법무부 장관과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2월 19일.
⑥ 김상용(金尙鎔 ; 1902.8.27 - 1951.6.22) : 경기도 연천 출생. 시인.
호는 월파(月坡).
일본 리쿄(立敎)대학 영문과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서 교편.
「문장(文章」지(誌)를 통해 문단에 등장.
동양적 서정성(抒情性)이 짙은 감미로운 작품을 발표하였다.
해방 후 한 때 관계(官界)에 발을 들이기도 했으나, 이 후 일생 교원 생활을 하며 시작(詩作)에 전념했다.
저서에는 그 시대의 불안․우수를 노래한 시집 <망향(望鄕)>이 있다.
1951년 6월 부산 피난지에서 정치무대로 쓰여졌던 김활란의 집인 「필승각」파티에서 게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켰다.
별 뜻없이 집에서 치료하다가 의사의 잘못된 투약으로 6월 22일 어처구니 없이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월 22일
⑦ 장준하(張俊河 ; 1915.8.27 ~ 1975.8.17) : [요약] 한국 언론인 겸 정치가.
《사상계》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으며,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정희 정권에 맞섰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다.
활동분야 독립운동, 언론, 정치
출생지 평북 의주(義州)
주요수상 막사이사이 언론상(1962)
주요저서 《돌베개》
[본문] 평북 의주(義州)출생.
일본의 도요[東洋]대학 예과를 거쳐 니혼[日本]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 그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비서로 활약하였다.
귀국하여 1953년 종합교양지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으며, 19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으로 복귀하였으며, 1973년 민주통일당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정희정권에 맞섰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으나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하였다.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에 《돌베개》가 있다.
(두산백과사전)
⇨ 8월 17일.
⑧ 이주일(李周逸 ; 1940.10.24 ~ 2002.8.27) : ⇨10월 24일.
코미디언.
본명 정주일
별칭 코미디의 황제
'코미디 황제'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주일 씨가 2002년 오늘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주일 씨는 1965년부터 연예계에 몸담은 뒤 1979년 텔레비전 방송에 뛰어들면서 희극배우로서 명성을 얻었다.
1992년에는 경기도 구리에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힘겨운 투병을 하면서도 금연 공익광고를 찍어 '이주일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범국민금연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⑨ 드라이저(Herman Theodore Dreiser ;1871.8.27 - 1945.12.29 : 미국의 소설가.
가난한 독일 이민의 아들.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사회의 암흑면을 폭로.
대표작에 <아메리카의 비극> <시스터 캐리> <금욕의 인간> <거인> <자본가> 등이 있다.
⑩ 르 코르비제(Le Corbusier ; 1887.10.6 - 1965.8.27) : ⇨10월 6일.
프랑스의 예술가.
"그는 화가였고 조각가였으며, 더 비밀스럽게는 시인이었다.
그가 그림이나 조가, 시를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직 건축만을 위해 싸웠다.
건축만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정열적이고 복잡한 그의 희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격렬함을 갖고 건축에 임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그에 관한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정말 그를 나타내는 말은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항상 도시를 꿈꿔왔다.
그의 '찬란한 건물군' 건설안은 거대한 정원에서 솟아나는 탑들이다.
그는 이 세기의 가장 매혹적인 수도원과 교회를 지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나는 오늘날의 인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고요와 평화를 위해서 일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샹디가르의 주요 건물 위로는 거대한 '평화의 손'이 솟아오를 것이며, 그 위에 히말라야의 새들이 날아와 쉴 것이다."
앙드레 말로는 루브르궁에서 있었던 르 코르비제의 영결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코르비제는 평평한 지붕을 선호했기 때문에 기와제조인에게, 그리고 유리,콘크리트가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을 주장했기 때문에 석공들에게, 또 건물에서 장식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장식가들에게 원성을 샀다고 한다.
⑪ 데레사 수녀(Mother Teresa (of Calcutta) ; 1910.8.27 - 1997.9.5) : ⇨9월 5일.
알바니아 태생 인도의 수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했으며, 1950~97년 대수녀원장을 지냈다.
알바니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테레사는 1928년 아일랜드 라스프란햄의 '동정 마리아회'에 들어갔다.
그뒤 인도로 가 '로레토회' 수녀가 되었으며, 벵골의 엔탈리에 있는 여학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인도 시민권을 취득한 후, 1946년 수녀원을 나온 그녀는 간호학을 배워 캘커타의 빈민촌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한 테레사 수녀는 인도 관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나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로마 가톨릭 인사들로 인해 숱한 난관에 부딪치면서도 나병 환자, 버려진 아이들, 노인들에 대한 봉사를 계속했다.
이밖에도 전세계 어디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교회를 세웠다.
만년에 그녀는 이혼․피임․낙태에 대해 공식적인 반대입장을 천명하기도 했다.
1990년에 대수녀원장직을 공식 사임했으나 적절한 후계자가 없어 1997년 3월 인도 태생의 니르말라 수녀가 임명될 때까지 실질적으로 계속 대수녀원장직을 수행했다.
제1회 교황 요한네스 23세 평화상(1971)과 노벨 평화상(1979)을 수상했으며, 1963년에는 인도 정부도 국가 차원에서 그녀에게 상을 수여했다.
사후 그녀의 장례식은 평생을 인도의 '빈민굴의 성자'로 살아온 단순한 삶과는 대조적으로 성대한 국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는 그녀가 평생을 몸바친 '사랑의 선교회' 1층 방 한 귀퉁이에 안장됐다.
******마더 테레사 수녀 탄생 : 평생 인도 캘커타에 거주하며 봉사와 희생의 삶을 보냄으로써 "살아있는 성인", "가난한 자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테레사(Theresa of Calcutta) 수녀가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공화국의 스코예프에서 출생했다.
1928년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간 테레사 수녀는 1937년 그곳에서 "아그네스"라는 이름으로 종신서원을 했다.
아그네스는 "아기 예수의 성녀"라는 의미를 지니며, 테레사 수녀는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추구했다.
테레사 수녀는 1963년 '사랑의 선교 수사회'를 설립했으며, 이 단체는 1965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아 교황 직속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테레사 수녀는 희생적인 삶으로 1971년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과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7년 9월5일 '사랑의 선교 수사회 본부'인 마더하우스에서 87세로 운명을 달리한 그녀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듯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⑫ 엡스타인 사망(1967) : 비틀스 매니저.
영국의 록 그룹 비틀스를 세계적인 무대로 끌어 올린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
1967년 오늘 33살 젊은 나이에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한다.
각기 개성이 독특한 멤버들의 관계를 조율했던 엡스타인의 죽음은 비틀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후 비틀스는 팀원들 사이의 불화가 극심해지고 1971년 공식해체된다.
⑬ 롤랜드 힐(Rowland Hill ; 1795.12.3 ~ 1879.8.27) : ⇨12월 3일.
영국의 행정가이자 교육가로 15년 동안 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적이고 엄격한 자기훈련을 강조하였다.
최초로 우표를 발행하는 우편제도의 개혁을 가져와 근대 우편제도의 아버지라 부른다.
잉글랜드 우스터셔주 키더민스터에서 출생하였다.
영어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15년 동안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적이고 엄격한 자기훈련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림·천문학·수학·수송기관 등 넓은 분야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종래의 우편료가 배달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고, 또 요금이 비쌌던 것을 균일하고 값싸게 하는 방법으로 1840년 최초로 우표를 발행하였다.
이러한 1페니 우편제도가 크게 성공을 거두자 세계 각국이 잇달아 이 제도를 본받아 우표를 발행, 그를 근대 우편제도의 아버지라 부른다.
⑭ 찰스 도스(Charles Gates Dawes ; 1865.8.27 ~ 1951.4.23) :
도스 플랜의 주창자일 뿐 아니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첫 출발은 변호사. 4대조 할아버지와 부친이 각각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덕분에 손님이 많았다.
명성과 재산을 쌓은 그는 29세에는 가스등 사업에 손대고 33세에 연방 통화감독관에 올랐다.
매킨리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와준 대가다.
금융을 익힌 도스는 1902년(37세) 센트럴투자신탁은행을 세워 행장으로 근무하던 중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소령으로 자원 입대, 종전까지 근무하며 준장으로 예편했다.
돌아온 참전용사 도스에게는 하딩 대통령은 초대 예산국장 자리를 맡겼다.
도스는 유럽 주둔 미군의 보급을 책임졌던 경험을 살려 각 부처가 제멋대로 사용하던 예산을 단일예산제로 바꿔 연 20억달러씩 연방 예산을 절감해냈다.
도스의 다음 여정은 독일 배상문제 처리. 1923년 국제배상위원장에 지목돼 배상기간을 연장하는 도스 플랜을 내놓았다.
대독 경제차관을 주도해 독일의 초물가고 탈출과 전후 부흥의 계기도 제공했다.
덕분에 1925년 영국 체임벌린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쿨리지 대통령과 짝을 이뤄 부통령에 오른 것도 1925년이다.
대통령보다 장황한 취임연설을 한 탓에 임기 내내 쿨리지와 불화를 겪다 퇴임한 뒤 영국대사를 맡았다.
윈저공에게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을 소개한 사람이 도스라는 주장도 있다.
대공황기에 재건금융공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마친 그는 1951년 4월23일 은행가로서 사망했으나 그의 ‘음악’은 아직까지 살아 있다. 엘튼 존과 클리프 리처드가 불렀던 올드 팝송 ‘이츠 올 인 더 게임(It’s all In The Game)’이 독학한 피아니스트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가 작곡한 곡을 편곡한 것이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8.4.23.인터넷한국일보)
⇨4월 23일.
⑮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 ; 1855 - 1937.8.27) : 명문 카네기멜런대학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생전에는 훨씬 유명했다.
록펠러ㆍ카네기에 이어 미국 3위의 재산가였으며 10년11개월을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며 번영과 거품ㆍ대공황을 맛봤다.
74명에 이르는 역대 미국 재무장관 중 세번째로 장수한 그는 대통령 셋을 거친 유일한 재무장관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멜런은 출생(1855년)의 제비뽑기부터 운이 좋았다.
은행장인 부친에게서 27세에 경영권을 물려받았으니까.
코카콜라 등 될성부른 기업을 발굴해 부를 늘리던 그는 제조업에도 뛰어들어 세계 굴지의 알루미늄 회사인 알코아, 석유 메이저 걸프(1987년 셰브론과 통합)도 사들였다.
45세에 결혼한 25년 연하의 아내의 외도로 12년 만에 이혼한 뒤 1차대전 특수로 돈벌이에 매진하던 그는 전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21년 하딩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발탁된 것.
멜런은 세금감면에 온 힘을 쏟았다.
부유층의 소득세와 법인세를 3분의1 수준으로 깎고 연방 지출도 50억달러에서 30억달러로 줄였다.
레이거노믹스의 원형을 그의 감세정책(Mellonomics)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재무장관직을 떠난 것은 대공황 때문.
재정상태가 나빠진 탓에 소득세를 1922년 수준으로 인상하면서도 ‘공황은 체질 개선의 기회’라며 인위적 경기부양에 반대하는 그를 후버 대통령은 영국대사로 내보냈다.
멜런은 자선과 탈세혐의에 맞서는 데 말년을 보냈다.
1937년 8월27일 사망 직전에 그가 세운 멜런연구소는 1967년 카네기공과대학과 합쳐 카네기멜런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고소를 취하하는 대신 그가 소유한 미술관을 개인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국가에 기증한다는 타협의 결과물이 오늘날 뉴욕 국립미술관이다.
(권홍우 편집위원.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⑯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 1770.8.27 - 1831.11.
14) : 독일 관념철학의 대표자.
예나․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를 거쳐 베를린 대학 교수를 지냈다.
가정은 검박, 엄숙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차 있었다.
한 때, 셀링과 함께 〈철학 비판 잡지〉를 간행하였다.
그의 철학은 독일 관념론의 최고․최후봉이라 할 장대한 철학 체계로서, 그 근본을 이루는 것은「테제(These ; 정)
․안티테제(Antithese ; 반)․신테제(Synthese ; 합)의
전개를 보이는 변증법으로 그것에 의하면 세계는 이데아(Idea ; 이념) 또는 이성의 변증법적 자기 발전이며, 철학의 과제는 이것을 반성함에 있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정신 현상학><논리학><법철학 강요> 등이 있다.
1831년 콜레라에 걸려 세상 떠남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내다보고 '역사'에 눈을 돌렸다는 데 있다.
헤겔 철학의 체계는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이다.
"경험과 역사가 가르치는 바는 국민과 정부는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운 게 없고, 역사에게 귀납되는 원리에 의하여 행동한 일도 없다는 사실이다."
⇨10월 22일.
⇨11월 14일.
⑰ 린든 B 존슨(Lyndon Baines Johnson ; 1908.8.27 ~ 1973.1. 22) : ⇨1월 22일.
미국의 정치가.
텍사스주(州) 길레스피에서 출생하였다.
텍사스주립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생활을 하다가 대통령 F.D.루스벨트로부터 청소년대책국 텍사스주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1937년 민주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1949~1961년 상원의원에 6차례 당선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남부의 정치가로서 남부의 이권을 대변하는 한편, 대통령 D.D.아이젠하워의 공화당정권하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원내총무로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의회를 조종하고 당의 지도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1960년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J.F.케네디에게 패하고 부통령이 되었으며, 1963년 11월 대통령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제36대 대통령이 되어 케네디의 뒤를 이어 많은 진보적 정책을 착실히 실현하였다.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재선된 그는 위대한 사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내의 사회적․경제적 개혁을 통하여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외교면에서는 대소(對蘇)긴장완화정책의 유지에 노력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으로 인하여 인종대립․달러가치의 하락 등 국내위기를 초래한 데다가 베트남 반전(反戰)의 기운이 고조되고 또한 국제적으로도 평화여론이 강하게 대두되어 1969년 임기만료와 함께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⑱ 기타 오늘의 인물⑲
1590 교황 식스투스 5세 사망
1590 크로키우스 출생.개혁주의 신학자.1612년에 카셀의 영주인 모 리스의 궁정설교자가 되었으며 1613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 득하였다.
1611 스페인 작곡가 빅토리아 사망
1659 샤를 앙시용 출생.다비드 앙시용 장남.브란덴부르크에 사는 프랑스인 거류민의 재판관이며 지도자였고,프리드리히1세의 사료 편찬위원.
1792 우루과이의 제2대 대통령(1835~38) 오리베 출생
1794 프랑스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 처형
1824 맥티어 출생.미국 남감리교 감독.1889년2월 15일 테네시주 내 쉬빌에서 사망.
1858 매킨니 출생.장로교 목사.그는 "언제나 최상의 것을 향해서 일하는"사람이라고 신학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 표명.
1864 티티우스 출생.독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1883-85),베를린대학교(1885-90)에서 공부함.
1872 오버만 출생.미감리회 여선교사,교육가,한국명 오보만.인천 영화여학교 4대 교장으로 취임.
1874 카시러 출생.독일계 유대인인 그는 철학자이며 교육자이고 많 은 글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1881 미국 보수신학자로 웨스터민스터신학교 설립한 메이첸 출생1885 맥닐 출생.장로교 목사.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의 오번 교 회사 강좌 교수.
1887 윤영만 출생.기독교 교육인,독립운동가.영일군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1887 초현실주의 예술가 마르셀 뒤상 출생
1896 송치명 출생.장로교 장로,교육가,이화여학교의 후원회를 창 설,초대회장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02 가수-배우 루디 발레 출생
1902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 출생
1907 럭키금성그룹의 창업자 구인회 출생
1910 김희운 출생.감리교 목사.공산군에 의해 납북됨.
1919 봉오동전투에서 일군에 대승
1921 독립운동가 백서원 세상 떠남
1948 여배우 샐리 스트루더스 출생
1949 야구선수 비더 블루스 출생
1958 미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 사망 - 사이클로트론을 발명해 193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오늘의 샘터
① 헤겔의 말 : 『큰 정열없이 세계사의 대업이 이루어진 일이 없다.』
② 테레사의 말 : "모든 것, 모든 움직임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모든 사물, 모든 행위 속에 존재합니다."
③ 김상용의 망우리 묘지 : 묘비에 그의 시 <향수>가 새겨져 있다. 「향수」전문 !
『이적 끊진 산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고.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