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8. 큐티
마가복음 15:1 ~ 15
빌라도의 판결
관찰 :
1) 예수님께 질문하는 빌라도
-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 종교지도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작정을 했다. 그렇기에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관리들이 출근하지 않은 바로 그러한 때에 관정으로 가게 된 것이다. 새벽에 관정으로 가서 재판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 무리들은 당일 반드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의 관정으로 갔다. 유월절을 바르게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유월절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악독하고 불의한 일인지를 이러한 기사 자체가 설명하고 있다. 이 일에 시간도, 장소도, 원수도 하나가 되고 있다. 빌라도는 A.D. 26 ~ 36년까지 유대를 통치한 로마의 총독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멸시한 다소 거친 총독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 빌라도에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가 되어서 몰려와 재판을 청하는 일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 2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사뭇 다른 그 어떤 느낌을 받았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그렇기에 빌라도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요청대로 유대인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에 재가하면 그만이었을 일을 다르게 다루고 있게 되는 것이다. 새벽부터 몰려와서 귀찮게 하는 이 사안에 대해서 빌라도가 대충 처리하지 못하게 된 이유도 또한 그것일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다시 재판하는 자리에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는 질문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재판의 핵심 안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반역이라고 고발을 했고, 새벽일지라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는 로마에 반역하는 행위를 재판해야 하는 명분으로 이 재판을 집도하고 있었다.
- “네 말이 옳도다”는 것은 빌라도가 말하는 것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에 주님은 ‘네 말이 옳다’고 하신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 자체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고, 아이러니가 되는 것이다. 진짜를 진짜기 때문에 고발했는데 진짜가 진짜이기 때문에 사형이 언도되는 상황이다. 주님은 그렇기에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 3절.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 이들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다 날조해서 고발하고자 하고 있다. 빌라도가 들어도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 4절.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 일반적으로 이렇게 일방적인 고발이 이루어지면, 상대편에서도 그에 대한 변명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꾸하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셨다. 오히려 빌라도가 답답해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 5절.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 예수님을 고발하는 많은 소장에 대해 예수님이 침묵하시자 그것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은지를 아는 빌라도가 도리어 답답해서 놀랍게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 사람 예수를 위한답시고 deal을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을 살려보겠다고 deal을 제안하는 빌라도
- 6절.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deal을 하고자 한다. 유월절에 사면하는 자신의 권한을 통해서 이 사람을 놓아주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빌라도의 권한이었다. 이것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심은 있었으나 자신의 향후 로마에서의 앞날을 위해서 유대지역의 통치를 잘 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자신의 권한을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는 것에 사용하고 있다. 빌라도 역시 자신의 이 제안이 예수님을 살리게 될 것이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제안의 핵심은 빌라도 자신이 가진 권세로 자신이 판단하기에 죄 없는 예수를 살릴 수 있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의견을 따르겠으니, 향후에 너희가 내 명령과 다스림을 잘 따라야 한다는 차원의 거래를 하고 있다. 빌라도는 양심이 있었지만 그 양심을 사용하지 못하고, 추악한 거래로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고 있다.
- 7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 빌라도는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바라바와 비유하여 선택하라고 하고 있다. 바라바는 열심당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무력 항쟁 중에 살인을 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사형이 언도된 상황이었다. 이를 예수님과 거래하는데 사용하고자 하고 있다. 이 인물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빌라도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 들게 하고자 했으나 빌라도표 잔머리의 결과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딴판으로 흐르게 된다.
- 8절.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 이 무리들은 지금 생각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자들이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기에 이 새벽에 광분한 무리들이 전례대로 사람을 놓아주도록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바라바를 구하고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불의한 바라바보다 예수를 더 악한 존재로 치부하기로 한 것이다.
- 9절.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 10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놓아주지 않은 것은 분명히 죄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불의한 재판에 회부되어 모든 인류를 위한 죄 짐을 지게 되시고 있는 것이다.
- 11절.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동원하여 바라바를 선택하게 한다. 이 선택을 통하여 예수님은 바라바보다 더 악한 존재로 치부하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집단이 광신적 세력이 되어 가장 존귀한 분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3) 책임을 회피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내어주는 빌라도
- 12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 이제 빌라도는 치사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책임을 피해가기에 급급하여 무리들에게 재판의 판결을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 굉장히 민주적인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더구나 당시 로마법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직무유기이고, 자신이 할 책임을 미루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대야에 물을 담아오게 하여 손을 씻는 퍼포먼스, "生show"까지 하는 것이다.
- 13절.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무리들은 마치 짠 듯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부르짖는다. 십자가의 형벌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아는 빌라도는 새벽부터 눈이 벌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광폭해지는 무리들을 보면서 두려움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파병된 로마 병정의 수에 비해 예루살렘의 치안은 다루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빌라도의 생각에 만일 민란이 나면 목숨이 위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향후의 정치적인 바탕에 흠이 잡히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 14절.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 그러한 상황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또 주장했다. 십자가는 로마 군대가 식민지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한 바로 그 처형 방법이었다. 성경에서 신명기에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죽여 해가 지도록 걸어두지 말라 명하시고 계시다(신 21:23). 그 이유는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유대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이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대제사장직을 돈을 주고 샀고, 또 그것을 자신의 사위에게 또 되팔았으며, 그 본전의 수십 배를 남기기 위해서 종교적인 매점매석을 자행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할 행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구하고 있다.
-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빌라도를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결정을 내리게 함으로, 법적인 효과가 내려지게 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 공식적인 일이 되도록 결정하게 한 것이다. 매우 악하고 독랄한 술수가 아닐 수 없었다.
-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기에 채찍질을 했다. 원래 십자가 형은 반역한 이방 노예들에게 주는 형벌이었다. 때문에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부끄럽고, 가장 추악한 형벌이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 형을 부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로마를 전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한 죄로 채찍질과 십자가형을 부과받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이 원하던 로마로부터 유다를 회복시키길 원했던 메시야의 모습이다. 만일 자신들이 원하던 존재가 이렇듯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메시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 메시야를 죽이고자 하는 주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그 모든 일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꼬이고 꼬인 상황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만 더 증거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가르침 :
1) 빌라도도, 유대 지도자들도 모두 이 재판이 얼마나 비열하고 불의하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자신들이 다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불의한 의도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참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2) 빌라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거래를 했다. 바라바를 내어줌으로 빌라도가 죄가 없다고 판단한 예수가 바라바보다 더 악독한 죄인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기록으로 남기게 되고,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통치에 순종하게 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존재를 제거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악독한 뒷거래 속에서 바라바는 놓여지게 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니은 이러한 추악한 뒷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역전시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시게 된다.
3) 노아 홍수 이전의 조폭이 판을 치던 세상이나 빌라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 간의 거래나 비슷하게 여겨진다. 이런 극악무도한 진흙탕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그 중심에서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위대한 사역, 거룩한 십자가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사탄 마귀가 알 수 없는 십자가의 비밀이 그렇게 열려지게 되고 있는 것이다.
적용 :
1) 이 세상의 권세는 참된 권세가 아니다. 세상 권세를 탐하는 자나, 세상 권세에 길들여진 자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과 생각과 판단이 함몰되어 참된 권세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참된 권세에 순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권세자 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권세를 지니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이미 그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계시다. 가장 불의한 재판속에서 자신을 끝까지 내려놓으시고, 그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주님을 찬양함이 가장 복되고, 귀하고, 은혜가 되는 이유이다. 주님만이 참 권세이심을 찬양하자. 그 권세를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하나님의 크심을 찬양하자.
2)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도망간 상황에서, 아니 사실은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향후에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위하여 그 생명을 드릴 수 있도록 보존해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이 떠나게 하신 상황에서,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상황은 너무나 분하고, 또 두렵고, 고통스럽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심각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너무나 차분하고,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계시다.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참기 위해서 숨을 고르시는 가운데,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시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심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의 고난을 감내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오실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래 참는 것을 따라야 할 것이다. 바로 내가 지금의 상황에서 그 어떤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본을 따름으로 이기는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환경은 극복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명령이 되는 것이다.
3) 불의한 재판 중에 분연히 가시 면류관을 벗어버리고, 채찍을 빼앗아 그들을 치는 것이 주님의 방법이 아니셨다. 그 모든 수난을 받지 않으실 수 있는 실력과 능력이 있었지만, 그 수난을 다 당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셨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순교와 핍박들. 이 모든 것들을 피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게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그렇다면 감내해야 한다. 내가 인정받지 못하고 사역에 있어서 의도한 대로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만 옳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어떤 사역보다 우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