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피아노의 합창
오종락
새색시 얼굴처럼 반들반들 윤기 나는 몸매를 자랑하며 서있다.
나루터 무대에 즐비한 그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곳으로 외출 나온 피아노들은 예사로운 악기는 아닐 성싶다. 음질 좋기로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간택되어 온 피아노의 거대한 집합체가 아니겠는가!
피아노 한 대 한 대는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새로운 피아니스트 짝꿍을 만났다. 그 짝꿍의 섬세한 손길을 만나자 그 몸속에서 청아한 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둘은 나룻배와 뱃사공처럼 한 쌍의 연인이 되어 신바람 나게 연주를 해댔다. 가을밤 나룻가에서 만난 환상의 콤비는 손발을 맞춰 가며 고운 선율을 내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다. 무대 위에는 이런 짝꿍들이 무려 일백 쌍이나 된다니 참으로 놀랍다. 그 일백의 합창소리는 빗줄기와 불빛을 타고 나루터 건너편 마을까지 아련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을비는 오케스트라 선율에 따라 춤을 추듯 부슬부슬 내려 관중들의 머리와 어깨 위를 촉촉이 적셨다. 무대는 세계적인 지휘자 금난새가 혼신의 힘을 바쳐 지휘하고 있었다. 나룻가에 울려 퍼지는 100대 피아노 합창은 그야말로 장엄하고 우렁차기 그지없었다. 지휘자는 무소로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10번 키에프의 대문”이란 곡으로 오프닝 문을 열었다. 지난 10월 1일 대구 화원동산 사문진 나루터에서 열렸던 “100대 피아노 콘서트” 행사장의 모습이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자, 아내는 3년 전 관람했던 100대 피아노 행사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올해는 놓치지 않고 꼭 보고 싶다고 했다.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에 느꼈던 피아노 선율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시간을 내어 아내와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다. 기다리던 10월 1일 공연 날이 다가왔다. 즐거운 맘으로 오전에 가벼운 산행을 다녀온 후 저녁 공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 가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 7시 공연을 앞두고,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져만 가고 있었다. 모처럼의 공연 관람을 방해할 심상인지 날씨가 심술을 부렸다.
내가 창밖을 자꾸 내다보며 ‘귀신 통’은 “쉽게 만나는 게 아닌가 봐? 날씨가 도와주지 않네!” “3년 전 공연 날도 바람이 몹시 불고 꽤나 쌀쌀했었지?” 하니까, 아내는 “옛사람들이 피아노를 ‘귀신 통’이라고 부른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라고 했다. 아내는 조바심이 나서 공연장 인근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예정대로 공연은 하는지 물어본다. 비가 와도 공연은 예정대로 한다고 전해 준다.
오전에 등산을 다녀온 터라 몸은 몹시 노곤했다. 무거운 몸에다 비까지 계속 내리며 나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갈까 말까 수차례 망설였다. 아내도 망설이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공연 2시간 전이다. 용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며 포기하면 또 1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용기를 내어 가봅시다. 하니, 아내도 좋다고 했다. 비옷과 우산, 컵라면을 챙겨서 출발했다.
공연장 인근 도로가 정체를 빚을 것을 대비하여, 버스를 타고 화원유원지 정류장에 내려 공연장으로 향했다. 우린 일기가 불순하여 올해는 관람객이 좀 적게 왔을 거라고 예측하면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운무가 낀 희미한 조명 아래 관중들이 어마어마하게 운집해 있었다. 내가 아이고! 웬 관중들이 이렇게 많아! 하자, 아내도 뜻밖이라며 깜짝 놀랐다. 예상과는 달리, 1만 관중이 형형색색의 우비를 입고 질서 정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좌석을 거의 다 꽉 매웠고, 무대와 멀리 떨어진 맨뒤 좌석만 몇 개 비어있었다. 일부 관중은 무대 가까이 관중석 좌우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동안 몇 년 사이에 홍보가 많이 된 영향일까? 우중에도 관람객이 이렇게 많이 오다니 정말 놀라웠다.
대구시민들이 이처럼 피아노 선율을 좋아 하나? 그렇지 않으면 지휘자 금난새의 명성 때문일까? 뮤지컬 꽃미남 가수 정동하를 보기 위해서 온 걸까? 아니면 가을밤 운동 삼아 나룻가에 바람 쇠러 나온 사람들일까? 비도 제법 내리는데…?. 자못 궁금하기만 했다. 그중에서 어느 하나일 테지만 엄청난 규모라는 사실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왼쪽 관중석 중간쯤 외곽에 서서 관중들 틈바구니에 끼워 관람한 지 한 시간 가량 흘렀다. 자세도 불편하고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제대로 기분이 나지 않았다. 무대와 대형 스크린 쪽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좋은 자리가 없는지 물색했다.
간혹 아이들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이 있어, 빈 좌석이 한두 개씩 생기기도 했다. 빈 좌석이 생길 때면 잽싸게 가서 비에 젖은 의자에 덥석 앉았다. 또 공연을 보다가 앞줄에 더 좋은 위치에 좌석이 생기면 앞으로 이동하고 또 이동하기를 세 차례. 드디어 맨 앞줄에서 네 번째 줄. s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와 출연진들의 얼굴이 눈에 확 잘 들어왔다.
늦게 도착하였지만, 좋은 좌석을 잡았다는 기분 좋은 안도감을 느끼며, 좌우를 살펴보고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관중들이 비옷을 입은 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지어 앉아, ‘오케스트라 비’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흰색, 파란색, 노란색 등 각양각색의 우비를 입고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에서 엄숙함마저 느끼게 했다. 언뜻 성당의 미사나 세례식을 보는 듯했다. 관중들의 복장에다 내리는 비와 가을밤이 만들어준 환상적인 연출이었다. 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분위기와 음악에 서서히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피아노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에 취하고, 가을밤 내리는 비에 내 마음을 내어주고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많은 관중들도 대부분,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란 것을, 말은 안 해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왼쪽 옆좌석, 다정히 앉아 공연을 보는 나이 든 자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맛있는 간식을 서로 권하며 공연의 맛을 더하고 있다. 이들에겐 내리는 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우리 부부도 질세라, 셀카로 기념사진을 한 컷 찍으며 기분을 내었다. 그 순간, 우측 옆에 앉은 새댁은 곁눈질로 우리를 응시했다. 그런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재미를 더해 주었다.
잠시 후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고 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와 함께 피아니스트들은 차이코프스키의 역사를 담은 “1812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의 순간과 퇴각의 역사적 사실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국가 〈주여,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삽입되어 있었다. 러시아 국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질 때는, 전쟁에 패한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눈물인 양, 빗줄기도 점점 더 세차게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정규 관현악곡에 쓰이지 않는 대포소리와 조총소리가 제정 러시아의 승리를 알려주며 곡을 끝맺었다. 오늘날 우리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이런 음악조차도, 왠지 내 가슴을 더욱 쓸어내리게 했다.
비를 맞으며 이 음악을 듣고 있는 수많은 관중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 하고 잠깐 생각에 잠긴 순간, 이태리 작곡가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에게 지휘자는 운집한 관중들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그는 재치 있게 세계 최고 수준의 관중이라며 후한 평가를 해주었다.
그는 비를 맞으며 운집한 관중들을 위해, 1920년대 예술 음악과 재즈를 결합한 새로운 시도로 관객을 사로잡은 “거쉰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라는 곡을 신명을 다해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도 훌륭한 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여기저기서 ‘부라보, 부라보’를 연신 외치며 화답했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무대에서 이처럼, 비옷 입은 많은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본 것은, 그도 난생처음인 모양이다. 관중들의 이런 모습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지, 자신의 스마트폰에 담은 후 무대를 내려갔다. 그도 오늘 밤의 추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무대의 피아노 소리가 잠잠해지자, 꽃미남 뮤지컬 배우 정동하가 ‘오페라의 유령’ 이란 곡을 부르며 깜짝 등장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율동에 관중들은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연이어 ‘사랑’이란 곡을 부르며 관중들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함께 비를 맞으며 사랑의 분위기를 띄웠다. 관중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환호했다. 무대 앞쪽 일부 관중들은 일어서서 몹시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내도 소녀같이 함께 일어서서 큰소리로 따라 부르며 무척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오늘 밤 ‘내자’의 공연 행차에 동행하기를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 순간부터는 내리는 비도 성가신 존재가 아닌 친구로 여겨졌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관중들은 ‘앵콜, 앵콜’을 외쳤다. 앵콜송을 부르기 전 그는 말했다. 서울서 내려와 노래 몇 곡 부르고 떠나기가 자기 자신도 몹시 아쉽다고 했다. 금년 대구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크나큰 은혜를 입은 도시가 바로 대구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관중을 배려하는 매너가 돋보이는 가수였다. 그의 앵콜송이 끝나자마자, 무대는 순식간에 커튼으로 가려졌다. 무대 뒤편 나루터 쪽에서 불꽃이 연달아 솟아올랐다.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는 신호였다. 불꽃은 보슬비 내리는 회색 빛 가을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관중들은 ‘브라보, 브라보’를 연호하며 공연이 끝남을 아쉬워했다.
옛날 ‘귀신 통’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피아노가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것은, 현재 화원동산에 있던 옛 사문진나루를 통해서다. 1900. 3. 26.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 보탐이 아내를 위해서 들여왔다고 한다. 그 당시에 들어온 한 대의 피아노가 밀알이 되어, 오늘날 100대 피아노 공연장이 탄생하게 되었고, 관중들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옛 이름 ‘귀신 통’이 이제는 관람객들을 불러 모우는 ‘효자 통’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주 좋은 징조가 아닐까 한다.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같은 세계적인 훌륭한 공연장으로 성장하기를 고대한다.
세상사 사람 일이라는 게, 와불보견(臥不步見, 외출하고 걸어야 볼 수 있고, 누워만 있으면 볼 수 없다는 의미)이 아닌가 싶다. 작은 일도 부뚜막의 소금이 아니던가!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움직이며 나서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동시에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도 얻게 된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움직이며 집을 나섰더니 아주 보람된 시간이 되었다. 일생에 단 한 번 접할 수 있는 뜻깊은 무대에, 부부가 동참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감을 느꼈다. 100대의 피아노가 들려주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누구에게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닐 것이다.
가을밤에 내리는 비는 공연의 운치와 감동을 더욱 진하게 해 주었고, 비를 맞으며 보는 공연은 더할 나위 없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 빗줄기에 마음까지 촉촉이 적셔가며, 100대 피아노가 뿜어내는 밤의 향연을 만끽하고, 좋은 기운을 가슴에 가득 담아오는 밤이었다. (17.10.19)
첫댓글 사문진나룻터에서 "100대 피아노의 합창"행사가 있었군요. 보기 드문 행사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사문진나룻터에서 "100대 피아노의 합창"행사가 있었군요. 보기 드문 행사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저도 무척 기다렸던 공연을 즐기셨네요. 부럽습니다. 가족여행으로 놓쳐 1년을 다시 기다려야겠습니다. 선생님의 글에서 실제 공연을 본 것 같아 정말 감사합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그날의 분위기를 잘 담아 냈습니다.
비오는 나루터에서 100대의 피아노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율, 아마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겠네요.
함께 느끼고 갑니다.
참 좋은 공연을 관람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것 처럼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제 다시 이러한 공연을 하는지 나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대구시민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2회 때 갔었는데 뼈까지 스며드는 강바람에 감기가 걸려 고생 좀 했습니다.
보지못한 것을 본것처럼 잘 묘사해 주셔서 좋은 간접경험을 하네요. 감사합니다.
올해는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가지못하여 섭섭하였는데 글로서 감상 잘 하였습니다. 비오는날 만여명이 운집하여 질서있게 진행할수 있었던 것은, 높은 시민의식이 있어 가능했던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곳을 다녀 오셨네요. 그것도 부부동반 정말 멋 쟁이 교수님이 십니다. 가을비 부슬부슬 내리는 나룻터 100대의 피아노가 토해내는 음율, 우의를 둘러쓰고 다정히 앉아 로멘스에 젖은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이슬비 내리는 밤, 그야말로 옛 사문진 나룻터에서 울려퍼진 피아노 음률에 흠뻑 취한 시간이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시는 오 교수님, 정말 행복해 보이십니다. 좋을 글 잘 읽었습니다.
100대의 피아노합창이란 행사가 있는 줄을 처음 알았습니다.보는 듯 상세한 글을 읽고 가고싶은 맘이 생깁니다.탈 대구시민이 된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더구나 부부가 함께 하기란 어렵지 싶습니다. 두분이 함께 즐기시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화원동산 사문진 나루터 100대 피아노 공연을 보셨군요. 그 음률만큼 섬세하고 감동적인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연장에 함께 한듯 공연 실황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사모님과 멋진 가을 추억 만들고 오셨기에 더 좋아보이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문진 나룻터의 100대 피아노공연 모습이 눈에 보이듯 펼쳐집니다. 가보지 못하여 아쉬웠는데 덕택에 간접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