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원류를 아니 ‘살 길’이 보이네” ‘한갓 고국의 부활을 떠들지 말라 전통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만이…’ 국호 지리 물산 풍속 신앙 등 자각 쉽게 읽고 느끼게 쓴 민족교육 고전 IMF극복·세계화의 출발점 삼자
21세기가 눈앞에 와 있다.바야흐로 세계는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학적 공유사회의 길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 문명사의 흐름이 이럴진대 이에 발맞춰 나가기는커녕 북은 먹지 못해 굶어죽는 지경까지 이르고 남은 제법 살만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IMF의 경제적 신탁통치를 받기 시작했다.현대사에 와서 북은 북대로,남은 남대로 우리 민족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있다.
달포 전 출근길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모습을 발견하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삿짐 쓰레기인 듯한 큰 뭉치의 생활쓰레기 봉지 속에서 다른 쓰레기들과 섞여 구겨진 태극기가 어렴풋이 그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태극기를 스스럼없이 쓰레기더미 속에 버릴 수 있는 민족의식이라면 단언컨대 우리는 오랫동안 이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우리라는 민족구성원들 뿐이다.결코 남의 나라,남의 민족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우리를 돕는다 해도 그들의 이익과 부합할 때 돕는다.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몇몇 시민조직이 ‘아나바다’운동을 펼치고,외국자본을 들여오기 위해 아무리 고급 경제정책을 펼친다 해도 민족 전구성원이 동참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다.
현재의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물질적 처방보다는 정신적 처방이 우선되어야 한다.우리 민족 전구성원들에게 내 나라 내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슴 속 깊이 새겨주지 않고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은 이런 의미에서 눈길을 끈다.우리는 이 땅에 왜 살고 있는가.우리는 이 땅에 무엇하러 왔는가.우리는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우리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우리의 민족전통은 무엇이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육당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조선상식문답’을 통해서 그 궁금증을 풀어주려 노력하고 있다.‘조선상식문답’ 앞부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선인에게 가장 결핍한 것은 조선에 관한 상식이어서 앉아서 천하를 이야기하되 자기의 생활을 의탁(依托)하고 있는 사회·문화·품물(品物)에 대하여는 다만 몽연매여하여 맹(盲)이요,농(聾)이요,또 아(啞)임을 면치 못한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그러나 기왕은 모르거니와 자주독립하여 내가 내 임자 노릇을 하게 된 금일 이후에야 무엇으로서 조선을 몰라도 가(可)한 핑계를 삼을 것인가.그러나 조선인의 조선을 알지 못함은 다만 민중 그네만을 책(責)할 것이 아니라 그네로 하여금 배우고 알고 그리하여 관감분발(觀感奮發)할 만한 조선지식의 문로(門路)를 주지 아니한 책(責)이 따로 있을 것이다.한갓 고국(古國)의 부활을 떠들지 말라.그 전통의 멀고 깊고 또 아름다움을 분명히 아는 이만이 조선사람일 것이다’.
조선,대한이란 이름의 뜻은 무엇이며 언제부터 쓰였는가.동국해동,대동이라 함은 무슨 뜻이며,백의민족이란 무엇인가.조선의 전통음식은 무엇이며,조선의 유명한 술은 무엇이며,남주북병(南酒北餠)은 무슨 말인가.백일을 차리고 돌을 잡히는 의미는 무엇이며,장가든다는 말은 무엇인가.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대보름과 가위는 어떤 명절인가.조선의 민족성은 무엇이며 조선역사의 특징은 무엇인가.단군은 누구며,동학이란 무엇인가.유교 불교 천주교는 어떻게 전래했으며 한글이라는 말은 언제 생겼는가 등등 국호 지리 물산 풍속 명일 역사 신앙 유학 제교 어문 등 10개의 주제항목으로 나누어 우리나라의 민족적 상식을 문답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위와 같은 단어나 용어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문해 보자.
육당은 이 글을 쓴 시기에 대해 간기에서 27회 선언기념일이라 하였으므로 아마도 1946년일 것이다.육당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다.당시 그가 비록 생존을 위해 친일적 행동을 보였을지라도 ‘조선상식문답’을 통해 그의 가슴 속에 민족에 대한 깊은 통한(痛恨)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제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 민족은 당장이라도 새로운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새로운 독립선언이란 민족정신을 올바로 세우는 의식개혁의 선언이다.단지 민간운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3·1운동과 같이 거족적 거국적 시민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민족적 상식조차 모르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조선상식문답’과 같은 민족교과서들을 찾아내어 읽혀야 한다.올바른 민족적 가치관이 그들 가슴 속에 바로 서 있을 때 한국의 세계화는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가치관 없이 어설픈 세계화를 외치다가는 서구를 동경하는 종속주의에 물들어 결국 또 한번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릴 수도 있다.해외여행을 가고,외국어 연수를 떠나고,외국어 학원에 드나들고 어설픈 외국어를 지껄인다고 해서 세계화되는 것은 아니다.
흔한 말이지만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의 뜻을 다시금 되새기자.자칫하면 패권주의적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육당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애국애족의 정신은 스스로를 알고 깨닫는 일이 선행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육당의 ‘조선상식문답’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청소년들에게 쉽게 읽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민족교육적 고전이다.이제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참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국가와 민족을 생각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