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5. 도시들과 수도원 운동의 대두
초기 기독교는 외진 농촌 지역보다는 주로 도시들(에베소와 버가모 등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헬라어권 도시들)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들, 특히 항구들은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고대 세계에서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철학 사상이 퍼지는 고전적 수단의 하나였다. 이곳들은 또한 시골에 비해 더 많은 익명성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관습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시기에 자신을 감출 수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은밀히 모일 수 있었고, 믿는 바를 기념하고 외부자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나눠 줄 수 있었다.
기독교와 로마 제국 도시들과의 관계는 현저하게 커졌다. 그래서 후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채택되었을 때 서방 기독교에서 '시골 거주자'라는 의미의 라틴어(paganus)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옛 로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원래는 종교적 의미가 전혀 없던 라틴어가 이렇게 전통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주로 지칭하는 말이 된 것이다.
기독교가 제국 도시들에 깊이 자리를 잡아가자, 몇몇 의미 있는 제도적 발전이 이어졌다. 그 중 하나가 '대도시 주교'(metropolitan bishop), 즉 한 특정 기독교 공동체가 아니라 한 도시 내 모든 교회들의 명목상의 지도자인 주교의 등장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로마의 주교이다. 기독교가 합법화된 후, 이 대도시 주교들은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 주교는 도시 로마의 제국적 권위와 연관된 상징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 안의 도시들에서 기독교가 성장하는 것을 긍정적 발전으로 보았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이 커가는 중요한 증거일 뿐 아니라, 기독교가 도시 문화와 사회를 변혁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밀가루 반죽 안의 누룩과 같아서 작은 양이지만 점차 성장하여 결국은 모든 것을 더 낫게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발전이 그렇게 긍정적인 일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기독교 신앙이 도시에서 확장되면 타락한 제국의 도시들을 도덕적,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베제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반대되는 경우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도시의 비도덕성과 방탕함(이것은 초기 기독교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다)이 결국 교회를 오염시키고 부패하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초기 기독교에서 일어난 중요한 발전들 가운데 하나가 수도원주의의 대두이다. '수도승'(monk)과 '수도원주의'(monasticism)라는 말은 '독신의' 또는 '홀로'라는 뜻을 가진 모나코스(monachos)에서 유래했다. 수도원 운동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동부 지역의 외진 산악 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역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은 중심지와 그로 인한 산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연단과 고독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273년에 부모의 집을 떠난 사람으로, 점증하는 이 추세를 잘 대표해 준다.
죄에 물들어 있고 산만하게 하는 세상에서 떠나는 일은 이들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떠나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 생활을 홀로 금욕하는 삶으로 보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공동체적 종교 생활로 보았다. 그리하여 5세기에는 공동체적 접근이 우세하게 되었다.
초기의 중요한 수도원 하나가 파코미우스에 의해 320~325년 경에 세워졌다. 파코미우스는 일반적으로 공동체 형태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가 세운 수도원은 후대 수도원 제도에서 원칙이 될 기풍을 만들어 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한 감독자의 지도하에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공동생활을 따르기로 동의했다. 수도원의 물리적 구조도 수도원의 영적 가치들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도원 건물들은 하나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떠남의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매력을 주었다. 4세기에 이르자 동방의 기독교 지역, 특히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많은 수도원이 생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서방 교회에서도 이 운동을 채택하게 되었다. 5세기에 이르면 수도원 공동체들이 이탈리아, 스페인, 갈리아에 나타난다.
이런 추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더 강화되었다. 6세기에는 이 지역의 수도원 숫자가 상당히 늘어났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가장 종합적인 수도원 '규칙'(베네딕투스회 회칙)이 출현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480년경-550년경)는 525년경에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 베네딕투스 공동체는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는 개념을 중시하는 규칙을 따랐는데, 이것은 정기적인 단체 기도 및 개인 기도와 성경 읽기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 수도원들은 로마 제국 붕괴 이후에 기독교 신학과 영성을 전달하는 주체가 되어 중세의 신학적, 영적 르네상스가 도래할 길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