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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 42. 주리고 목마를 때 - 마 25: 46. 영벌과 영생
마 25: 42. 주리고 목마를 때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에게는 하지 아니하였다고 증언하셨다.
1]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의 정죄 받은 이유를 35-36절의 문장 형식을 빌어 고발하고 있다. 특히 '아니하였고'(*, 우)라는 부정어구를 5번에 걸쳐 후렴구로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심판 기준의 적극적 의미를 강조 하고 있다.
즉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다.
* 마 19: 19 -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한편 예수께서 이 같은 강경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은 적어도 말세, 종말의 때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荒廢)하여질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 딤후 3: 1-5 –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마 25: 43. 아니하였느니라.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
1]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받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곧 죄 때문이다.
죄를 회개치 않고 죄 씻음을 받지 못한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저주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궁극적 장소는 지옥이다. 그곳은 ‘영원한 불’의 장소이다.
* 막 9: 43, 48 –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계 20: 10 -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곳은 마귀와 악령들을 위해 예비 된 곳이지만,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 모든 사람도 거기에 들어갈 것이다.
마 25: 44. 어느 때에 -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
그들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했다.
1]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구절 역시 37-39절의 경우처럼 판결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있다.
저주의 판결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다만 놀랄 뿐이다. 그들은 양들이 자신의 선행을 잊어버리듯, 자신들의 악행(이웃에 대한 무정과 무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Bengel).
(1) 그들이 놀란 이유는
① 자기들의 기억으로는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돌보아 드리겠느냐는 사실 때문이다.
② 심판의 임금으로 오신 주께서 굶주리고 나그네 되어 목말라하며 감옥에 갇힌 고난 받는 자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③ 무엇보다 양들이 마지막 날에 보답받기 위해 예수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닌 것처럼, 염소들은 마지막 날 보응(retribution)받는 것을 멸시해서 형제들에게 냉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필시 예수의 형제들에게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2) 그들이 하였다고 주장하나 주님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① 사람 앞에 나팔을 불었다.
* 마 6: 2 -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②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였다.
* 마 6: 5, 16 –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③ 지옥 자식이 되게 하였다.
* 마 23: 15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④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
* 마 23: 23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⑤ 더럽고 불법이 가득했다.
* 마 23: 25, 27-28 –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5: 45. 지극히 작은 자 -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
그때 임금이 대답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1]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구절은 40절과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40절과 구별되게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이웃에 무관심했던 염소에게 있어서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큼의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받는 자에게 대해 무신경한 자는 그들의 형제와 친구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다.
부활 승천하여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 자신은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것이다. 주의 관심은 그들에게 있다.
주의 제자들은 며칠 후면 온 세계로 보내질 것이다. 이제 주께서는 일반 신자들이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을 영접하기를 원하신다.
2]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주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천국을 상실하고 지옥에 던지 울 큰 죄악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믿음을 증거 한다. 전도자들에 대한 태도는 주님께 대한 태도를 나타낸다.
그들이 참된 신자들이라면, 주의 종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겼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정한 자들은 주를 믿는 자가 아닐 것이다.
전도자들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중요한가? 주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요 13: 34)’는 새 계명의 실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새 계명이 큰 계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죄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서는 서로 사랑함을 실천치 않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사는 자요, 새 생명이 없는 자요, 중생치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 요일 2: 9-11 –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 요일 3: 9-10, 14-15 –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마 25: 46. 영벌과 영생 -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부활 승천하여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 자신은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것이다. 주의 관심은 그들에게 있다. 주의 제자들은 얼마 후면 온 세계로 보내질 것이다.
이제 주께서는 일반 신자들이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을 주님을 영접하듯이 영접하기를 원하신다.
1]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다. 여기서 저주받은 자들의 벌과 의인들이 받은 보상을 영원한 생명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영벌'(*, 콜라신 아이오니온)은 영원한 징벌(punishment)을 뜻한다. '콜라시스'는 '잘라내다'의 뜻의 '콜라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죄인의 교화와 훈육을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징계를 의미한다.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혹자는 본문의 '영벌'이 궁극적으로는 염소들을 구원키 위해 내려진 교정적 차원에서의 벌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 어느 곳에서도 지옥에 처한 자의 회개나 교회가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최후 심판이라는 관점에서의 '벌'을 이야기할 때 '콜라시스'보다는 공의에 입각한 엄격한 보복이라는 뜻의 '티모리아(*)가 더 적합하다.
'콜라시스'는 본문에서 목적적 차원에서의 해석보다는 집행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통해 '지독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히 10: 29 -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특별히 '콜라시스'가 영원성을 강조한 '아이오니온'과 결합 됨으로 형벌의 영원성, 곧 최후 심판으로서의 형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마 18: 8 -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 살후 1: 9 -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유 1: 13 -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이와 더불어 의인에게 약속된 '영생'(*, 조엔 아이오니온)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이 생명은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을 뜻하기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향유하게 되는 지복에 달한 생명으로서(trench),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이 현세에서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부활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살전 4: 14-17 –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한편 '형벌'과 '생명'을 각각 수식하는 형용사 '아이오니온'은 시작 또는 종결이 없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가 없는 시간 개념으로서, 묵시 문학이나 종말론과 연관된 구분들에서는 항상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재림한 이후에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영원한 구별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끊임없는 긴장(緊張)과 그 나라와 주의 재림에 대한 성실한 준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2] 영생과 영벌의 분기점
본문에는 염소로 구별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산 사람들이며 그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사람들은 양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양들은 자기들의 여러 불우한 사람들에게 봉사한 일이 주님에게 한 것인 줄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염소들은 '주님께서 어려운 일을 당하실 때 우리가 언제 공양치 아니했습니까?'라고 항의를 하고 있었으며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전혀 그들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1) 죄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봉사를 할 수가 없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이타주의는 '위선'이다. '인간이 어떻게 이타주의자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거짓이다. 이기주의야말로 인생의 진실한 삶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인생관이다. 강자는 그의 '힘과 능력'으로 약자를 지배하고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에는 보수와 대가가 그들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영양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세포 안에 있는 원형질은 주변에 있는 영양을 흡수하고 자기분열을 되풀이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확장해 나간다. 권력 의지의 원초적인 모습은 영양 의지다.
이 삶의 철학에 있어서 이웃은 모두 나를 위해 있는 것이며, 내가 흡수함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 철저한 이기주의가 삶의 진정한 모습으로 정착하는 것이다.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행로에 곤한 나그네에게 물 한 그릇 떠주기를 거부하였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 9). 이것이 죄에서 해방되기 이전 인간의 모습이다.
속죄의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 45).
그러므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막 10: 43-44 –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기독교 2천 년 역사의 모든 위대한 봉사자들은 모두 다 속죄의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철저한 자기희생의 봉사자가 되게 하였다.
(2) 혈연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와 자기 가족들 뿐이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따지고 보면 자기 사랑의 연장에 불과하다.
동물들이 새끼를 사랑하듯 그들의 가족 사랑은 동물적이며, 본능적이다. 이처럼 인간의 혈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동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피로 맺어진 가족이 성령으로 하나 된 우주적 가족으로 변화되지 아니하는 한 타인에 대한 봉사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때로부터 비로소 봉사자가 될 수 있다. 프랑스 사람 시바이쩌가 아프리카 흑인들의 친구로서 평생을 봉사한 것도, 영국 사람 윌리엄 케리가 인도의 첫 선교사가 된 것도 벨기에 사람 라미엔이 하와이 모록카이 섬에서 문둥이의 친구가 되어 일생을 헌신한 것도 우주적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동양에는 위대한 정복자는 있어도 위대한 봉사자는 없다. 그것은 동양 사상이 가족과 가문에만 집착한 까닭이다.
그러나 신구약을 통하여 성경의 관심은 개인을 기초로 한 '나라'와 '민족'이다.
* 행 1: 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가정'은 없다. 오직 사랑과 봉사로 기초한 우주적 가족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타인을 생각하는 만큼 하나님을 닮아 간다.
(3) 물욕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도 해방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물욕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한 봉사가 불가능하다.
인간이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기 전에는 결코 물욕의 노예에서 자기를 해방시킬 수가 없다. '물질', '재물'은 땀의 결정이며 삶의 열매다.
그것을 어떻게 남에게 그저 줄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생각으로는 전혀 불가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 행 2: 1-4 –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 행 4: 32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봉사의 기회를 주심이요,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이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 혈연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 물욕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는 '염소'의 심판을 받게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이 세상에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광 중에 재림하실 주 예수께서는 모든 나라들과 사람들을 모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며 의인들과 악인들을 나누실 것이다.
* 고후 5: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둘째,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의인들을 위해 예비하신 곳이며 하나님께 복 받은 의인들이 들어갈 영생(永生)의 나라이다.
그러나 지옥은 마귀와 악령들을 위해 예비 된 곳이며 저주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영벌(永罰)의 장소이다.
셋째,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일을 중하게 여기신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와 주의 이름을 가진 작은 성도 하나를 귀히 여겨야 한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를 영접지 않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주의 모든 종과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동시에 또한 의무가 된다.
모든 성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하되, 주의 작은 종 한 사람과 작은 성도 한 사람을 영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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