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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제목 ※ 호스티스[Hostess]
작가 유키하나
팬카페 눈꽃♡유키하나 (http://cafe.daum.net/youllso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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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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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1
"안 추워?"
"응. 별로"
며칠동안 눈을 뜨자 마자 밥부터 챙겨먹고 해변에 나와 있었다. 철썩 철썩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와 그와 함께 다가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 볼과 귀를 붉게 물들였다.
같은 동해여서인지 하얀 백사장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어렸을 적 고향에서의 일들이
떠오르곤 했다. 혹시나 8년 전의 일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작은 기대 하나만으로 이렇게
추위를 견디고 있는데, 한 번 사라진 기억은 쉽사리 되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바닷가에서 살다시피하는 내가 걱정되는지 제영은 내 옆에 털썩 앉더니
내 어깨를 그의 팔로 감쌌다. 속초 오고나서 그는 처음으로 바다에 나온 것 같다.
"왠일이야? 바다 안 나왔었잖아"
"너만 없었어도 안 나왔어. 너도 참 강철체력이다"
"내가 원래 좀 튼튼하지"
그를 향해 베시시 웃어 보이자 그도 날 따라 웃어버린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파고들었고 갑자기 좋아지는 기분 때문인지
그의 어깨에 편안히 기대었다. 그에게서 내게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망망대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잠깐 동안은 지금의 복잡한 모든 일들을 잊을 수 있는 듯 했다.
"바다 정말 오랜만이다. 바다 마지막으로 본 게 나 열아홉 살 땐데.."
"히익. 정말? 5년 동안 바다 한 번도 안 봤어?"
"티비에서나 봤지."
"왜?"
"짜증나서"
"..에? 짜증?"
"아니, 그냥..."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비밀 투성이다.
왜 모두들 내게 진실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거지?
"옆에 있어줘. 항상"
"응? 응.."
"떠나면 안 돼"
"응.. 안 떠나"
"정말로."
약해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의 애처로운 눈빛이 내 가슴을 울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릴 기댔다.
가끔 이렇게 불안하고 위태로운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이 정도는 처음이었다.
"가끔은 자신이 없어. 내가 널 지켜줄 수 없을까봐"
"........."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가끔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곁에 있었다면 훨씬 더 안전하고 행복했을텐데."
"....바보 같은 소리 마.."
"가도가도 상처뿐이었어 내 인생은- 이런 내 인생이 지긋지긋했지만
널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어느 순간에 생각했어. 상처뿐인 인생이라도 좋다고-."
"............"
"내가 상처받는 한이 있어도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
"제영이가 가게 보고 있겠다고 했어"
"아아. 저녁 드셔야죠"
"응, 그래야지. 비랑이는 먹었어?"
"아뇨. 아직. 같이 먹어요"
하루 종일 가게를 보시느라 피곤하실 것 같은데
아줌마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으시고 그저 웃기만 하셨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좋아 보여?"
"네. 엄청 엄청 좋아보이세요"
"당연히 좋지. 제영이 웃는 거 오랜만에 보거든. 거의 4, 5년 만인가?"
"정말요?"
"응. 고등학교 그만두고나서는 거의 웃질 않았어. 아니,
웃음이 줄어든 건 그 전에 지 아빠 죽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땐 정말 잘 웃는 애였는데-. 제영이가 웃음이 많이 인색하지?"
"..조금요.."
"워낙 어렸을 때 곱게 큰 애라서 집안 갑자기 기울면서 상처가 컸을거야.
에미라면서 정작 그 녀석 힘들 땐 난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어.
가게도 다 저 녀석이 고등학교 그만두고 벌어다 준 돈으로 얻게 된거야. 휴우-"
아줌마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한숨을 내쉬셨다.
"비랑아. 우리 제영이 많이 좋아하니?"
"네? 아.."
갑작스런 아줌마의 물음에 잠깐 동안 머뭇대곤 베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도 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었기에-
"이제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연 적이 없어.
5년 전에.. 아니 아니야. 이 얘긴 나중에 제영이한테 직접 듣는게 좋을 것 같다.
비랑이가 잘해줬으면 좋겠어. 많이 힘들었던 녀석이니깐,
그 동안 많이 아파했었으니까 이젠 안 아팠으면 좋겠어. 내 아들이.."
"..저 많이 노력할게요.. 아프지 않게 제가 지킬꺼에요"
Vol.52
ㅡ♪♬♪♭♩♪♬♪♭♪♬
어느덧 속초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을 때쯤, 한참 동안 울리지 않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고 043으로 시작하는 발신 번호를 한참동안 들여다 보고나서
조심스럽게 폴더를 열자 다급한 정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빨리! 빨리 도망쳐요! 그 여자가 갈 거에요!"
"뭐?!"
"빨리! 방금 막 나갔단 말예요. 얼른 다른 데로 가요!"
폴더 너머로 들려오는 정민이의 목소리가 유제영에게도 들렸는지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고,
이내 불안함에 떨려 오는 내 입술과 눈빛을 바라보더니 방안으로 들어가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더니 내게도 바지와 티셔츠를 던져 주었다.
폴더를 핸드백 속에 쑤셔 넣고 옷을 갈아입자 이내 가게 밖으로 날 끌고 나온다.
"엄마! 급하게 내려가 봐야할 것 같애. 나중에 다시 들릴게"
"벌써 가려구? 왜 이렇게 갑자기.."
"미안- 조금만 있다 올거니깐 걱정하지 마."
"그래. 조심해서 잘 가"
"안녕히 계세요"
억지로 씽긋 웃어 보이고 몸을 틀기가 무섭게 유제영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좁은 길을 따라서 나가는 동안 유제영은 핸드폰으로 콜택시를 부르는 듯 했고,
동네를 들어오는 길목에 서서 10분 정도 기다리자 택시가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로 가주세요"
터미널로 가는 동안 택시 안에서는 침묵만이 유지되었다.
막연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건 분명 나 뿐만은 아닐 것이라.
손톱을 잘근잘근 계속해서 물어뜯는 동안에도 머리 속에선 계속해서 정민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대는 듯 했고, 가슴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어댔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끼더니 내게도 청색의 캡 모자를 씌워준다.
그를 바라보자 내게 눈을 찡긋 해보이며 내 어깨를 감싸더니 터미널 안으로 걸어간다.
"천안 가는 버스, 제일 빠른 걸로 두 장이요"
터미널 의자에 가방을 안고 앉아 있는데 그가 표를 끊고 음료수를 뽑아 온다.
그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받아들자 내 옆에 털썩 앉더니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터미널 여기 저기를 훑어보고는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넨다.
"윤정아.. 이제부터 윤정아 하자."
"응?"
"앞으로 너 부를 때, 정아야. 이렇게 부를게."
"응.."
"넌 나 부를 때 이름 부르면 안 돼."
"그럼?"
"음.. 오빠라 그래라. 오빠"
평소 같았으면 펄쩍 뛰었을 말이건만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탓에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불안함에 크게 한숨을 내쉬자
싱긋 웃으며 나를 그의 품안에 안아 버린다.
"너무 불안해 할 거 없어. 다 잘 될거야"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여있었던걸까.
무작정 돈을 벌겠다는 일념 하나로 클럽에 들어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다 이 사람도 만나고. 그리고…
어쩌면 클럽에 들어온 게, 그리고 또 어쩌면 이 사람을 만난 게 잘못일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어쩌면. 이 모든게 처음부터 연관지어져 있던 "운명"이란 건 아닐까.
"운명"이라면,
이렇게 내 인생과 젊음과 사랑이 끝나버릴 운명이라면,
난 평생 운명을.
몇 백년 전부터 혹은 몇 천년 전부터 이어져 있을 운명을 원망할 것 같다.
10분쯤 기다렸을까.
기다리던 천안행 버스가 도착하고 중간 쪽의 좌석에 털썩 앉았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유제영이 먼저 입을 떼었다.
"김지혜가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속초에 있는 거"
"글쎄.."
"하긴 뭐. 그 권력에, 재력에 우리 둘 못 찾는게 이상한거지"
그는 말을 마치며 살짝 웃어 보였고, 내가 그를 따라 웃어버리자
이내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켜자
제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아아. 엄마한테 전화해주려구."
익숙한 번호. 지루하고 긴 신호음.
그리고..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
"타악-! 꺄악! 그만해!! 흐흑. 제발 하지 말란 말이야"
?!
"엄마?!!"
"제발. 제발. 내가 잘못했어. 제발! 흐흑 제발 용서해줘"
"엄마! 여보세요? 엄마! 무슨 일이야?!"
울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걸려 온 딸의 전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공포에 가득 찬 엄마의 목소리는 내게 극심한 불안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엄마의 비명소리와 흐느낌, 애원이 유제영에게까지 들려왔는지
그도 또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엄마. 대답해봐. 엄마 나 비랑이야. 엄마"
"흐흑. 그 땐 나도 너무 힘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흐흑"
"엄마. 무슨 말 하는거야. 엄마!"
"제발. 제발. 이젠 잊을 때도 됐잖아. 흐흑. 나도.. 나도"
"엄마? 엄마!"
"나도 잊을게. 제발. 흐흑. 그 때 네가 했던 짓 다 잊을게. 아무 것도 모르는채로 살게. 제발 흐흑"
"엄마.. 왜 그래. 여보세요? 엄마! 옆에 누구 있는거야?"
가슴이 쿵쾅쿵쾅 숨쉬기도 힘들만큼 너무도 거세게 뛰어댔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계속해서 엄마를 불러보았지만,
엄마는 공포에 가득찬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울며 애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흐흑. 이미 8년이나 지났잖아. 나도 정말 힘들었어. 흐흑. 제발. 제발 지워줘."
Vol. 53
8년?! 또 8년 전이야.
도대체 8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8년 전 강릉에서의 일. 대체 뭐였을까.
한참 동안 엄마의 비명소리가 이어지더니 뭔가에 세게 부딪히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전화는 끊겨버렸고, 거세게 뛰어대는 가슴을 꽈악 부여잡으며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몇 번을 다시 걸어봐도 지루한 신호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몰라. 모르겠어. 또 8년 전이야.. 이젠 지겨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여기서도 8년 전, 저기서도 8년 전.
도대체 8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후우. 기억하고 싶어.
기억해내고 싶어. 정말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마. 분명히 안 좋은 일이었을거야. 그러니까 지워져버린거지.
가슴아픈 일은, 가슴에 묻고 살면 안되는거니까. 평생 그 상처 때문에 아파할테니까.
나중에… 네가 8년 전의 일을 기억해낸다 해도 상관없다고 판단될 때,
그 때 다시 돌아올거야. 너 마음 아파할까봐 신이 내려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하자."
그는 말을 마치며 씁쓸히 웃었다.
아, 이 사람 또한 고등학교 때 안 좋은 기억이 있었지.
그래.
신이 내려주신 은총‥ 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손을 꼬옥 잡았다.
차 안에 히터를 틀어놓아서인지,
마주 잡고 있는 그의 손과 날 안고 있는 그의 품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 때문인지
바들 바들 떨리던 몸은 점점 진정되었고, 이내 나른함이 밀려들었다.
..
"잘 지냈어?"
"나야 뭐. 근데 누구?"
천안에 도착해 그가 향한 곳은 입시 학원이었다.
학원 아래서 전화를 걸자 베이지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가 달려나왔고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만
이내 내게 시선을 옮기며 누구냐고 물어오길래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밝게 웃으며 내 인사에 답하는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유제영과 닮아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며칠만 신세 좀 질게. 누나"
"그래 뭐. 여기 집 키야. 먼저 가 있어. 마치는대로 바로 갈게. 근데 애인인가봐?"
"아, 응"
"잘 어울린다. 크크. 야. 가서 밥 해놔. 안해놓으면 쫓아낼꺼니까!"
"아, 알았어 진짜. 나만 보면 그 말 밖에 안하냐?"
"으이구. 나한테 너는 밥돌이로밖에 안 보인다 임마"
장난스럽게 유제영의 짧은 머리를 부비대곤 뛰어서 계단을 올라가버린다.
그녀에게서 받아든 집 키를 주머니에 쑥 집어넣더니 이내 내 손을 꼭 잡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천안 지리 잘 아나봐?"
"응. 청주 가기 전에 1년 정도 여기서 살았었거든."
"아아.. 근데 누구였어?"
"사촌누나야. 나보다 두 살 많아. 근데 아직도 날 애 취급해."
"쿡쿡. 아까 보니깐 누나한테 찍소리 못하더라?"
"시끄러. 내가 봐주는거야 여자라서"
정말 웃긴다니까. 자존심 하나는 끝장나게 세가지고 말야.
유제영이랑 어딘가 닮았다 했더니, 사촌누나였구나.
닮긴 했는데 이미지는 많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했다고.
이내 버스가 도착해 20여분을 달려 아파트가 불쑥 불쑥 솟아있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고, 그는 익숙하게 단지 내의 마트로 들어갔다.
"그 인간. 분명히 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겠지. 아마 쌀도 없을거다"
"쿡.."
쇼핑 카트에 여러 가지 반찬거리도 담고, 쌀도 사고, 과자도 몇 봉지 사고나더니
갑자기 삼겹살이 먹고 싶다며 육류 코너로 나를 질질 끌고 간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고기를 유심히 살펴본다.
"맛있어요. 근데 이제껏 한 번도 못 봤는데, 신혼부부인가봐요?"
"네?"
"네 맞아요. 삼겹살 7인분 주세요"
"헉. 그걸 누가 다 먹어?"
기분이 좋은 듯 씨익 웃으며 아줌마에게 고기가 든 봉지를 받아드는 그의 모습에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다정하게 내 어깨를 감싸 안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막연한 원망과 불안함 속에서도 이렇게 마주 잡은 손 하나뿐으로도 웃을 수 있는 이유.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사랑"이란 마법이었다.
Vol.54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을거라는 유제영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1104호 그녀의 집의
찬장과 베란다에는 온통 라면 뿐이었다. 거실 여기저기에 널부러진 옷가지들과
술병, 과자봉지.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싱크대에는 하지 않은 설거지 거리가 가득했다.
편한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두시간 가량 설거지와 청소에 매달리자 돼지우리같던
이 곳이 점차 집의 형상을 띄어갔다. 거실에 고기와 소주를 벌여놓고 있는데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유제영이 짜증을 내며 문을 열자
활짝 웃는 얼굴의 사촌 누나가 구두를 벗어 던지며 들어온다.
이내 그녀는 깨끗한 거실에 벌려진 고기판과 술판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야. 유제영. 니가 웬일이냐? 누나한테 삼겹살을 다 쏘고? 캬아. 집 깨끗하다~"
"누나 예뻐서 쏘는거 아니니깐 걱정 마셔. 옷 갈아입고 나와"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높게 머리를 올려 묶고 나온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 그러고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요? 난 정희란이에요. 저 녀석 고종사촌"
"아, 전 나비랑이요"
"와 이름 이쁘다. 내 이름은 진짜 촌스러운데. 몇 살이에요?"
"스무살이요"
"아, 난 스물 여섯. 말 놓을께요. 비랑씨도 말 놔요"
"아, 네."
"말 까라니까? 제영아! 일로와. 빨리 고기 궈"
"아, 좀 알아서 해! 내가 누나 종이야?"
"나 비랑이 시집살이 시켜도 돼?"
"씨…"
음흉한 미소를 띄는 희란언니를 바라보곤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만
기어코 궁시렁대며 집게를 들고 거실에 털썩 앉아버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나와 희란언니는 마주보며 웃어버렸다.
몇 잔의 술잔이 오고 가고, 이젠 술이라면 신물이 난 탓에 얼마 마시지 않은 나와는 달리
벌컥 벌컥 소주를 들이킨 희란 언니는 취기가 오르는지 두 볼이 빨개져 있었다.
"제영아. 히끅. 너어~ 이제 김지혜 고 년이랑 안 만나는거지?"
"어? 어어. 안 만나"
"그래그래. 잘 했어. 김지혜보다야 우리 비랑이가 훨훨 낫지. 그치 비랑아아~ 히끅"
"누나. 취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
"아냐아냐. 누나 하나~도 안 취했거든. 제영아. 요 앞에 마트 가서 사이다 좀 사와라. 목이 칼칼해. 히끅"
"으휴. 기다려"
한심하다는 듯 희란언니를 바라보다 TV 위에 있던 잔돈을 주머니에 넣고
현관으로 향하는 그를 따라서 일어서자, 그는 손을 내젓는다.
"됐어. 나 혼자 갔다올게. 누나랑 같이 있어줘"
"으응."
유제영이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희란언니는 나를 꽈악 안아버린다.
"제영이... 정말 불쌍한 애야.. 상처도 많은 애고."
"........."
"제영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말야. 히끅. 외삼촌 돌아가시고선 맨날 빚쟁이들이 쫓아왔거든.
그 때, 누군가가 제영이를 잘 보듬어줬어야 했는데. 아무도 그러질 못했어. 히끅.
외숙모도 쓰러지셨었거든. 근데 어느 날, 걔가 내 자취방에 찾아왔어. 학교를 그만둬버렸데.
제영이 착한데다가 공부도 참 잘 했었는데 말야. 아깝더라고. 히끅.
어떻게든 다시 공부시키려고 했는데, 당최 내 말을 들어야지.
히끅- 1년쯤 여기서 살다가 청주로 가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거야.
처음에 걔, 나이트 웨이터도 했었고 노가다도 했었다?
김지혜랑 만난 것도 그 때 만난거야. 제영이가 그 때 돈 많은 여자 하나 골라잡아서
히끅. 평생 돈 걱정 안하고 살고 싶다고 했었거든. 김지혜가 지를 마음에 들어 하니까
그냥 사겨버린거지. 5년 가량 사귀면서 단 한번도 김지혜를 마음에 둬 본 적이 없댔어.
근데 김지혜네 아빠가 제영일 되게 괴롭혔어. 그렇겠지. 돈도 없고 학벌도 구린
그 자식을 김지혜 애인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근데.. 졸라 웃기지 않냐?
정작 제영인 김지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야. 제영이한테 그 때 하는 말이.
푸하. 김윤무 그 새끼가 하는 말이..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더라.
5천만 원 건네주면서 이거 먹고 떨어지랬데. 제영이, 비록 김지혜한테 돈보고
접근한 거라고 하지만... 누가 그런 취급받고 싶겠냐? 아, 정말 좆같아. 안 그.."
"누나.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어어. 제영아! 언제 왔어? 헤헤"
"누나 취했어. 그만 들어가"
"아냐 아냐~ 나 안 취했는데."
안 취했다고 버티는 희란언니를 침대 위에 눕혀 놓고, 아무 말 없이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를 거들기 위해 바닥에 깔았던 신문지를 접으려 하자,
내가 접으려던 신문지를 빼앗아 재빠르게 접어서 비닐 봉지 안에 넣어버린다.
"됐어. 내가 할게. 들어가서 쉬어."
"도와줄게."
"그냥 쇼파에 앉아 있어."
"우리 한 잔 더 할까? 아까 보니까 냉장고에 맥주 있던데"
왠지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띄워 보기 위해 괜히 큰 소리로 웃으며
얘길 건네자, 한 잔 더 하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두 개 꺼내온다.
"탁-"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캔 하나가 건네지고, 내가 쇼파 위에 올라 앉자
빠르게 거실을 치우더니만 이내 캔을 들고 내 옆에 털썩 앉으며 리모콘으로 TV를 켠다.
정치인들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고,
국회의 모습이 담겨진 화면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국회의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제영은 신경질적으로 TV를 꺼버렸다.
알 수 있었다.
그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김지혜네 아빠야."
"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 신문이나 TV에서나 봤나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내 마음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대답을 해주었고,
실장이 내게 주었던 봉투 속의 사진이 떠오르면서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까 누나가 한 말... 기억하지마."
"........"
"...나로썬 잊고 싶은 기억이야"
힘없이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피식- 웃어버리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없이 약하고 지쳐보이는 그가 안쓰러웠다.
나 같은 여자.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마음 고생하지 않고 행복했을지도 모르는데.
살며시 그의 어깨에 기대며, 손을 꼬옥 잡았다.
지금으로썬 나만이 그의 곁에 있어줄 수 있으니까-.
"잊으면 되잖아.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무슨 수를 쓴다 해도 과거는 현재나 미래가 될 수 없어.
모든 걸 다 잊어 버리고 새로 시작하면 되는거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기엔... 이제까지 내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 많다.."
Vol.55
그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게 가까워졌다.
아무런 스스럼없이 촉촉하게 젖은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잠깐동안의 짧은 키스가 끝나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그가 손으로 내 턱을 잡곤 이내 다시 입을 맞춘다.
약간은 깊은 듯한 프렌치 키스.
은은하게 퍼져오는 알싸한 맥주향 때문인지, 기분 때문인지 정신이 몽롱해졌다.
내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체온이,
그의 입술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나를 가슴 벅차게 만들었다.
살짝 입술을 떼고는 싱긋 웃어보이더니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지금 군대에 가 있다는 희란 언니의 오빠 방 침대에 나를 눕히고
그는 한없이 다정한 중저음의 목소리톤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길다란 손가락이 내가 입고 있는 남방 단추를 풀러가기 시작했고,
또 한 손으로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제껏 술집에서 일하면서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져 보았지만,
이렇게 지독하게 가슴 떨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설레임과 행복.
"흐음-."
버티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화사한 햇살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뜨자, 나를 꼭 안은 채로 자고 있는 제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이제 정말 봄이구나…
제영이 잠깐 동안 뒤척거리더니 이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눈을 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버리는 그의 모습에 나도 따라서 웃어보였다.
"잘 잤어?"
"응.."
"벌써 열한시네. 누나 일어났겠다."
침대 옆의 서랍장 위에 놓여진 탁상 시계를 보더니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푸르고 서랍장 위에 놓여진 옷을 입기 시작한다.
방향을 틀어 그를 바라보자 옷을 입던 그의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아- 뭘 봐. 보지마."
"쿡쿡"
"쳇.."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주곤, 빙긋 웃어보인다.
"나 나가서 누나 밥 해줘야 되거든- 더 자고 이따 나와."
그가 닫고 나간 문 밖에서는 늦은 아침을 만들고 있는지,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속 쓰려"를 연발하는 희란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계속 누워 있는건 희란 언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주섬 주섬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아- 속 쓰려 정말. 나 어제 비랑이한테 실수한 거 없지?"
"응"
"나 마실 것 좀 줘"
"누나가 갖다 마셔. 나 밥 하잖아"
"쳇. 비랑이는 아직 자?"
"응."
"그래. 아. 속 쓰리다. 나 씻고 올게"
곧 옆의 욕실에서 "쏴아-"하는 샤워기 소리가 들려 왔고,
아침 준비가 끝났는지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 일어났네? 아침 먹을래?"
"응. 나갈게"
제영의 뒤를 따라 나가자 구수한 밥 냄새와 콩나물국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고,
이내 나를 의자에 앉히더니 한 그릇 가득 밥과 국을 퍼다 준다.
"나보고 이걸 다 먹으라고?"
"많이 먹고 나가자. 천안 구경 시켜줄게"
"그렇게 돌아다녀도 돼?"
"상관없어. 김지혜가 찾으면 또 도망가면 되지 뭐."
"그게 뭐냐?"
"뭐긴-. 무서울 게 뭐 있어. 네가 내 옆에 있는데."
Vol.56
"예전에 여기서 잠깐 알바했었는데-"
중심가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어가며 그는 나지막히 웃었다.
어제 밤, 희란 언니가 술에 취해 떠들어댔던 얘기들이 스쳐갔다.
익숙하게 카페 구석에 있는 푹신한 쇼파에 몸을 기대며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고,
붉은색 램프가 깜빡거림과 동시에 액정에는 "현시우"라는 글자가 깜빡거린다.
"응"
"어디야-"
"천안"
"왜 그래, 너"
"뭐가"
"지혜 힘들게 하지 말라고 했지"
"먼저 시작한 건 걔야"
"지혜가 뭘. 지혜 만나면서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린건 너야"
그는 입가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시우. 니가 김지혜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니가 나랑 걔 사이에 끼어 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거든? 특히 나한테는-"
"니가 좋아하는 애-"
폴더를 닫으려다 멈칫 하고는 다시 수화기를 가져다 대고
잠자코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더니 느릿느릿- 꽉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죽여버린다."
폴더를 닫아버리는 그의 안면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곤 크게 한숨을 내쉰다.
"..왜 그래..."
"어? 아냐. 아무 것도"
분노였다. 따뜻함으로 포장한 그의 목소리 뒤에 숨겨져 있는 감정은-.
금새 굳어 있던 얼굴을 풀며 빙긋 웃어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 마실래?"
"응? 나- 레몬에이드"
"기다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핸드백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고
액정에 뜬 번호가 모르는 번호인 탓에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비랑씨? 저 신은우에요"
"은우씨?! 웬일이에요? 언니들 말로는 은우씨랑 연락 안 된다던데, 지금 어디예요?"
"지금 공항이에요. 잠깐 외국 나갔었는데, 비랑씨한테 꼭 해줄 말이 있어서 들어왔어요"
"외국요? 은우씨 무슨 일 있었어요?"
"만나면 다 얘기해 줄게요. 지금 어디에요?"
"천안이요"
"그럼 내가 그리로 갈테니까 핸드폰 계속 켜둬요. 알았죠?"
"네, 알았어요"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겨버렸지만, 난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폴더를 닫았다. 은우씨가 외국에 나갈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설령 나갔다 한들,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올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불현듯, 내 뇌리에 스치는 것은 "김지혜"라는 이름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멍하게 있어?"
"어? 아냐. 아무 것도-"
"..마셔"
"으응"
그가 건네주는 컵을 받아들자 플라스틱 컵과 얼음이 부딪혀 달각거린다.
컵에 꽂혀 있던 빨대로 레몬에이드를 휘휘 젓다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아, 저기- 방금 은우씨한테 전화왔었거든"
"은우? 아아- 그 때 그.. 근데 왜?"
"외국 나갔다 왔는데, 나한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데."
"그래?"
짧은 침묵.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그만의 생각에 빠져버린 듯 했다.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이곤, 단순하고 일상적인 얘기들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계속해서 웃고 떠들었지만, 내 머릿 속에선 은우씨의 말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고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언뜻 언뜻 어두운 표정을 내비쳤다.
"은우씨! 진짜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늘 불안하게 지냈죠. 은우씨는요?"
"저라고 뭐 편했겠어요?"
만약 내 생각대로 은우씨가 김지혜 때문에 외국에 나갔었던 거라면,
많이 힘들기도 하고, 마음도 불편했을텐데. 씨익 웃어보이는 그의 미소는 예전처럼 편안하기만 했고,
그닥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던 유제영과 은우씨는 아직까지도 서로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듯 했다.
"꼭 몇 달 전 같다. 그쵸 은우씨?"
"뭐- 그렇네요"
"근데 할 얘기가 있다면서요?"
"아, 네. 외국 나가 있는 한 달 동안 많이 고민했었어요.
사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랑씨만은 알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왜요? 뭔데 그래요-"
"사실 제가 아무 말 없이 외국에 나간 것도 실장님이 시키신 거에요.
지금 제가 비랑씨를 찾아와서 이렇게 얘길 하고 있는건 실장님이 부탁하신 사항에 어긋나는 일이죠"
그는 잠깐 동안 머뭇거리더니 이내 크게 다짐을 한 듯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떼었다.
세 명 뿐인 거실 안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시죠? 김지혜씨가 비랑씨 굉장히 싫어하는거"
"네.."
"그 덕에 실장님이랑 저도 고생 좀 했어요. 풋"
"아, 죄송해요."
"사과는 나중에 해요. 난 오늘 사과 들으러 온 게 아니니까요"
그는 나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지만, 내 마음 한 켠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한 내 이기심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피해를 보는구나. 생각하며 씁쓸히 웃어보였다.
"우선, 실장님 말예요. 이태리로 공부하러 가신게 아니에요.
더 이상 비랑씨 곁에 그 분이 계셔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거죠.
저도, 실장님도 거기까지가 한계였어요. 전 몰랐지만 실장님은 그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일치감치 비랑씨 곁을 떠나셨던 거에요. 그리고 실장님이 갑자기 이태리로 떠나버리신 건,
비랑씨나 제영시에게 좀 더 여유를 주기 위해서였어요. 김지혜씨의 모든 신경이
외국으로 도주하는 것 같은 실장님께 향해 버릴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럼.. 지금 실장님은 이태리에 계신건가요?"
애써 미소 짓는 듯한 은우씨의 선한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비추어졌고,
그와 동시에 내 마음 속에선 막연한 불안함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비랑씨.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사실 실장님, 동해에 계세요.."
"네?"
"근데.. 그게... 사실은....."
".....말씀해 보세요"
"그게 사실은요…"
"....얼른요.."
"...강릉 쪽에.... 뿌려드렸어요.."
Vol.57
"....은우씨..."
"...실장님 부탁이셨어요.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랑씨에게만은-
나중에, 아주 많이 시간이 흘러서. 비랑씨가 스무 살 때의 기억을 추억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해졌을 때, 그 때 말해주라고 하셨어요.
지금 얘기하면, 비랑씨는 평생 그 분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고.."
"..........."
"그치만 제 생각은 좀 달랐어요.. 그래서 이렇게 비랑씨를 찾아온거에요.
난 적어도. 비랑씨만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거짓말..."
"...비랑씨..."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잖아요.. 실장님 지금 이태리에 계신거죠? 그렇잖아요"
뜨거운 액체가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흐릿하게 보이는 은우씨는 고개를 푹 숙인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조금은 넓은 듯한 거실이 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고,
간간히 흐느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내 은우씨는 좀 쉬는게 좋겠다며 돌아갔고,
제영이 나를 부축해 침대 위에 앉혀 주었다.
"마음 좀 진정되면 나와"
조용하기만 한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실장님은 비랑씨가 행복하길 바랬어요.
그 분은 비랑씨를 위해서라면 한 번 뿐이 아니라, 백 번, 천 번이라도 목숨을 버리실 수 있는 분이에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붉은 색으로 물든 넓기만 한 하늘은 마치 그의 한 없이 넓은 마음을 연상시켰고,
이내 멈춰 버린 줄로만 알았던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실장님의 소원이세요."
"죄송해요. 미안해요..."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실장님 몫만큼-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예전 같았으면 좋았을텐데-
지루하고 힘들었던 그 때라면, 지금처럼 괴롭진 않았을텐데…
괴로워서, 너무나 괴로워서 하늘도 바라보지 못할만큼 괴롭진 않았었는데.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이젠, 몇 년뒤면 예전처럼 웃고 지낼 수 있을거란,
실장님의 편안한 미소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사라져 버렸어요.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눈을 뜨고 나면 언니들이 옆에서 자고 있고, 또 지루한 일상이 시작되는-
지독한 악몽이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그만 밥 좀 먹자."
며칠이나 지났을까.
하루 하루 지나간다는 것이 내겐 그저 해가 뜨고 짐의 반복으로만 인식되었다.
방 안에 혼자 앉아있음에도 지루하다거나 외롭지 않았고,
며칠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음에도 허기짐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내 마음 속엔 그런 생각들을 할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영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꽉 닫혀있는 문을 열고 내게 뭐라도 먹여보려 했고,
꼭 잠겨버린 내 마음의 문을 열어보려는 듯 계속해서 말을 건넸지만,
난 정말 맛있고 좋은 음식도- 또 그의 애타는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후우. 이러지마. 이러다 덜컥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벌써 나흘 째 아무 것도 안 먹었어. 제발 먹어라 좀.. 응?"
다 내 잘못이야.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건, 전부 바보같은 나 때문이라구-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게, 응?"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게 했다.
그가 내 옆에 다가와 앉으려는데 거실에서 희란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영아! 나와봐! 빨리!!"
"뭐야. 이따 얘기해!"
"빨리! 지금 뉴스에 김윤무 나와!"
"...잠깐만-"
"김윤무"라는 이름이 들려오는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 버렸고 곧 거실로 나가 버린다.
희란 언니와 제영의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지고, 기자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온다.
"국회의원 김윤무 씨는 오늘 오전 10시, 검찰의 구속 영장을 받고 검찰에 출두했습니다.
그 동안 각종 로비 의혹에 둘러 싸여 있던 김씨는…"
잠시 후, 희란 언니의 통쾌한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랑 딸이랑 나란히 구속되게 생겼구만? 쿡쿡.
김지혜, 김윤무. 그 동안 겁도 없이 날뛰었겠다?"
"그만해 누나. 나 들어가볼게"
이내 방문이 열리고 제영의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김지혜랑 걔네 아빠 구속될 것 같더라. 김윤무는 그 동안 이런 저런 말들이 많긴 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터질 줄은 몰랐어. 그리고 김지혜는 뭐.. 잡다한 죄목이 많더라고.
사기, 협박, 납치, 감금. 그 정도로는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걔.. 살인청부도 했다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이제 밥 좀 먹어. 걔네 벌받잖아-"
"김지혜가 그렇게 당한다고.. 이미 죽어버린 실장님이 살아나기로 한데?
살인청부- 그거 실장님 죽이라고 한 거잖아. 내 말이 틀려?"
"......."
자신이 없어. 앞으로 남은 인생을 떳떳하게 살아갈 자신이…
Vol.58
희란 언니와 유제영은 잠깐 마트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고, 곧바로 나는 옷을 걸쳐 입었다.
메모지에 몇 글자 적어두곤 조용히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다들 안녕-.
무작정 제천행 버스에 올랐고, 10여분쯤 달렸을까.
맑기만 한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도 우는구나.
하늘아- 넌 뭐가 그렇게 슬퍼서 울고 있니.
울지마‥ 울지 말란 말야. 네가 울면, 나도 눈물이 나..
"엄마~"
우울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를 한 톤 높이고, 밝은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대문을 열었다.
나를 반기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와야 정상인데…
너무도 잠잠한 집 안의 분위기 때문에 불안함이 밀려들어 현관을 벌컥 열었다.
잔뜩 어지럽혀진 방 안, 부서져 있는 전화기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알약들.
뭐야… 이거 왜 이래.
"니 에미 찾고 있나 보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
"쿡. 8년 전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는가보네, 이렇게 도망가버린 걸 보면."
"....실장님?!"
"뭐?"
실장님과 꼭 닮은 그 남자.
실장님과는 대조되는 매서운 눈매가 아니었다면 곧이곧대로 실장님이라고 믿었을만큼 닮아 있었다.
"...누구세요?"
"아, 날 기억 못 하고 있나? 이거 아쉽네. 난 널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데 말야"
"........"
"나비랑. 난 어렸을 때부터 너희들을 굉장히 싫어했어.
너희는 내가 누려야 할 모든 권리와 행복을 먼저 누리고 있었거든.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되돌려 받긴 했지만 말이야"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거야.."
"다 앍오 있으면서 모른척 할 거 없어. 아무리 모르는 척 해봐야, 진실은 변하지 않거든
난 마음만 먹으면 너희를 다 죽여버릴 수도 있어. 이미 내 인생은 망해버렸거든.
8년 전 그 날, 니 에미의 말 한마디 때문에 말이야.
그리고‥ 이젠 널 감싸줄 민재도 없잖아?"
"실장님을 알아?!"
그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민재"라는 이름이 터져나오는 순간,
정말 마법처럼 내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내 눈물에 그도 적잖이 당황한 듯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은 내 손을 탁 쳐낸다.
"네가 말하는 실장님이.. 내 동생 박민재를 말하는 거라면, 잘 알고 있는게 당연한 일이겠지"
"...동생?"
"그래. 내 쌍둥이 동생 말야. 예전부터 널 끔찍하게 아꼈었지. 쿡"
"......"
뭐야, 이거-
어떻게 되어 가는거야.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내 뇌리에 순간 섬광과도 같이 번뜩- 스치는 것이 있어,
화장대 서랍 속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사진은 눈에 띄지 않았다.
"뭘 찾고 있는거야?"
"사진, 사진 말야"
"아아. 그거? 여기 내가 넣어뒀는데"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뒤로 돌아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지갑 속에서 사진을 꺼내 내게 홱 던진다. 자꾸만 번져가는 눈물 때문에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진 속의 남자는 분명 실장님이었다.
눈물을 슥 닦아버리고, 벌떡 일어나 그의 앞에 사진을 턱 내밀었다.
"이 사람이 당신 동생이야?"
"아니"
"그럼?!"
"이건 나잖아"
"뭐?"
"너 뭐야, 기억 못 하냐? 그 핏줄 그대로 이어받으셨구만. 쿡. 이건 나야. 그리고 여기-"
지갑 속에서 북원고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의 증명사진을 꺼내더니 내게 내민다.
"이게 민재야"
"...무슨 소리야. 이거 봐. 이게 당신이랑 똑같이 생겼고, 이 사진은 실장님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얼굴이야, 나이 들면서 많이 변하기도 하지. 아아, 하긴 넌 어렸을 때랑 별로 변한게 없네. 훗"
"........"
"특히 우는 모습이 말야.. 네가 대문 앞에 쓰러져서 울고 있던 모습이랑 지금이랑, 정말 똑같아.
솔직히 그 때 난 널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물론 그것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였지만-"
Vol.59
"그 일이라니?"
"니 에미가 날 소년원에 쳐넣은 사건 말야"
"뭐?"
"너 뭐야, 설마 니 에미가 나한테 한 짓을 기억 못 하는건 아니겠지"
"...무슨 짓을 했는데 그러는거야"
"너 뭐냐?"
"왜 기억을 못하는거야. 기억해! 기억해야돼! 날 보면서, 민재를 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란 말야!"
그는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머릿속에서 공이 튀기고 있는 것처럼 퉁퉁대었고, 그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그만.. 그만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난 충분히 힘들어.
실장님에 대한 죄책감에 충분히 시달리고 있다구.."
질끈 감고 있는 내 눈에서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어버린 탓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무슨 말이야 너.."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었어 전부.. 흐흑. 미안해... 미안해 정말로.."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강릉에 데려다 줘."
평일이라서인지, 강릉으로 가는 기차 안은 꽤 한산했고 그만큼 조용했다.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낮은 한숨소리가 내 마음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8년 전, 그리고 8년이 지나버린 지금. 난 너무 험한 길만 골라서 걸어왔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런 바보같은 내 인생의 끝은-..
"이제 말해봐. 민재가 뭐 어떻게 됬다는거야"
"...죽었어.."
"...헛소리마.. 장난할 기분 아니야"
"..장난 아니야.. 이런 거 가지고 장난 안 쳐.."
"........"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닦아내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눈빛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최대한으로 참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봐.. 민재가 뭐 어째다고?"
"나도 괴로워.. 두 번 다신 생각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다시 말해봐! 누가 죽어?! 민재? 박민재가?! 내 동생이 죽었다고?"
그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열차 안의 많지 않은 시선이 우리 둘에게 향했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했다.
"왜.. 내 동생이 왜 죽어! 너 때문이지. 하- 역시 너희랑 우린 같이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어.
너 때문에, 니 에미 때문에 우리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어!!!"
그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너 때문이야"라는 원망섞인 목소리가 울려대고 있었다.
미친 듯이 내 몸을 흔들어대던 그는 이내 지쳤는지, 나를 내던지듯 놓아버리며 의자에 기대버린다.
멍하니 초점없는 눈으로 반대쪽의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미안… 미안해요 정말.
"여기야?"
"응.."
"......."
모래 사장에 앉아 멍하니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철썩대는 파도 소리에도, 내 볼에 와 부딪히는 아직은 찬 바닷바람에도
나는 그냥 눈물이 났다. 이제 우는 건 지겨운데, 이젠 그만 울고 싶은데-.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르고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8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그렇게 금방 잃어버릴만한 사건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미안.. 나 기억상실이거든... 8년 전 일만 기억을 못 해.."
".........."
그는 힘겨운 표정으로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니 에미.. 미혼모인거 아냐?"
"..뭐?"
"너랑 나비원, 내 아빠란 새끼가 바람펴서 낳아놓은 자식들이야.
너네 집이 그렇게 잘 살 수 있었던 건, 그 인간이 너네한테 전부 퍼줬기 때문이지.
근데 그 인간이 죽고, 엄마는 운좋게 돈 많고 권력있는 새끼랑 재혼했고,
엄마는 그래도 정 들었던 곳이라 쉽게 강릉을 떠나지 못했어. 그게 실수였던거야.
민재가 잠깐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어. 물론 전혀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지만.
그 때 민재는 정말 말도 아니었어. 손목 긋는 건 일상이었어. 약도 먹었었고,
죽고 싶어 환장한 새끼 같았지. 니 에미는 민재를 끔찍하게 생각했어.
하긴, 제 배 아파서 낳은 놈이니까-"
"뭐?!"
"쿡.. 그래서 난 처음봤을 때 민재가 미웠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더러운 피가 내 동생 몸에서 흐른다고 생각하면 스치기만해도 소름이 끼쳤어.
근데 말야- 그 년이 그렇게 끔찍하게 아꼈던 민재가 그 사랑을 아주 제대로 되돌려주더군.
니 에미가 아직도 담뱃불을 무서워한다는거 알고 있냐?"
"...아니.."
"민재한테 제대로 당했거든. 한참을 고생하더군. 물론 지금도, 담뱃불만 들이대면- 쿡쿡"
"...실장님이 왜? 우리 엄마한테 왜?!"
"내가 시켰거든."
"뭐?"
"말했잖아. 난 니 에미가 미웠다고. 뭔가 복수를 해주고 싶었는데,
그 때 우울증걸린 민재가 내 눈에 들어왔을 뿐이야. 훗. 근데 더 웃긴건,
니 에미가 가해자로 박민재가 아닌 박민성을 얘기했다는 거지.
쿡쿡. 정말 기가막힌 모정이야. 덕분에 난 내 청춘을 썩혀버렸지"
"...그런데 왜 실장님을 원망하지 않지?"
"내가 시킨 일이거든. 그리고 민재는... 내 동생이니까-"
Vol.60
"제 배 아파서 낳은 놈이니까-"
"기가 막힌 모정이야"
지겹게 담배만 피워대는 민성의 옆에 앉아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며
그에게서 들은 말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비랑-"
떠나온지 채 하루도 안 되었건만, 특유의 로우(low)톤을 가진 그의 목소리는 내게 반가움을 안겨주었다.
나비랑. 돌아보지마. 그 사람을 바라보면 안 돼.
힘들게 쌓아올린 내 탑에 무너지고 말아. 먼저 떠나온 건 너야.
"..뭐야.."
"박민재?"
"또 다른 구경꾼인가-."
"...닮았잖아..."
"쿡-"
민성은 조용히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 제영을 스쳐 지나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쟤랑 가까이 있지 않는게 좋을거야. 결국 상처받는건 네가 될테니까"
"헛소리 집어치워. 나비랑. 일어나"
제영은 내게 다가와 거칠게 나를 일으켰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낮은 한숨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박민성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거야!"
"네 자린 여기가 아니었잖아. 네 자리로 돌아가 이젠-"
"내 자리? 하- 내 자리가 어딘데? 아아- 돈 많은 김지혜 옆? 거기가 내 자리야?! 어? 그래?!"
"...그래.. 그런 것 같아.."
"날 똑바로 보고 말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내 가슴이 크게 요동쳐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내릴 것만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며 모진 말을 내뱉어댔다.
"이젠 내가 지쳤어. 네 옆에 있으면 행복할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오산이었던 것 같아. 난 처음부터 실장님 옆에 있어야 했어!"
"거짓말 마! 박민재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러고 있다는거 내가 모를 것 같아?!
네가 이러면 너 대신 죽은 그 인간 목숨은 뭐가 돼!!"
"난 행복하고 싶었어.. 그냥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야.
근데- 그 빌어먹을 행운이란건, 기가 막히게 날 비껴갔어. 이번에도 역시- 인 것 같아."
"행운같은건 필요없어. 중요한건 행복이야. 네가 원하는 것도 행운이 아니라 행복이잖아."
그는 내 옆에 털썩 앉으며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따뜻함에 전해져 차갑게 식어버린 내 손을 덥혀주었다.
그가 쟈켓 속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내 손에 꼭 쥐어준다.
코팅되어 있는 네잎 클로버와 세잎 클로버.
"행운이 갖고 싶다면 내가 행운을 줄게. 네가 행복을 원한다면 난 행복도 줄 수 있어"
"......."
"고등학교 때, 내게도 행운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정작 중요한건 행운이 아니라 행복이란걸 알게된건 작년이었어.
몇 년동안 행운을 쫓았지만, 결국 내가 찾은건 행복이었거든.
난 이제 내 행복만 바라보고, 내 행복을 지킬거야"
그는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지만, 그런 그의 미소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여버렸다.
"내가 알고 있던 나비랑은 이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었어-"
"그래.. 그렇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아"
그대로 일어나 빠르게 모래 사장을 걸어나왔다.
편의점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성의 옆에 서서 모래사장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까 앉아 있던 자리에 여전히 앉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제영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니 말이 많는 것 같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처받고 아파해"
"...저새끼... 울고있잖아..."
".........."
"왜 안 잡는거야. 너 이기적이잖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옆에 있을 자신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제영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번져 보였다.
행운이든, 행복이든- 내게는 너무 멀리 있나봐.
이젠 헛된 기대같은 건 안해.
둘 중 그 어떤 것이든 이 바람에 전부 쓸려가 버렸으면 좋겠어.
이건 그냥 한낱 꿈일 뿐인 것처럼 말야. 깨어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꿈처럼-
"널 보면 자꾸 마음이 약해져.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네 눈만 보면 다음으로 미루게 돼"
"............"
"너랑 눈만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냥 널 죽여버렸을지도 모르지.
나비랑. 넌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얻은거나 마찬가지야. 후회할만한 일은 하지마"
그는 조용히 말을 건네곤 문을 닫고 나가버렸지만, 내 귓가에선 계속해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대고 있었다.
후회할만한 일이라고-.
난 이미 후회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가 선택했던 모든 것들을 말야…
Vol.61
며칠 동안 사람과의 인연을 끊고 지냈다.
제영도 그렇고, 민성도 그렇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아왔지만 그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이미 내 가슴은 사람으로 인한 상처로 크게 생채기가 나 있었기에-.
어질러진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제 곧 내 이름을 불러대겠지- 라고 생각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려는 찰나였다.
"비랑씨. 비랑씨 안에 있어요? 저 윤정아에요- 문 좀 열어줄래요?"
윤정아… 실장님의 이복누나라고 했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녀를 찾아가라고-.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던 내게
그녀의 목소리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과도 같이 느껴졌다.
"비랑씨, 꼴이 그게 뭐에요. 며칠 동안 이러고 있던 거에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민성이한테 들었어요"
"..언니도 그 두사람 사이를 알아요?"
"그럼요, 당연하잖아요- 비랑씨 이렇게 있으면 어떡해요-"
"......"
"..휴우. 충고 한마디나 해주려고 왔어요. 민성이를 믿지 말아요.
걔가 하는 말 믿으면 안 되요. 민성이랑 비랑씨, 두 사람 만나면 안 되는거였어요.
그만큼 민성이가 위험한 인물이란 거에요. 비랑씨에게는-"
"..무슨 말씀이세요-"
"비랑씨가 잘 생각해봐요. 민성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 이상하다는걸 느낄 수 있을거에요. 민성이.. 모든 일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생각하려 하고, 또 그렇게 믿거든요. 8년 전 그 일도 분명 그 녀석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을거에요"
"..언니도 8년 전 일을 알아요?"
"음- 뭐, 대충은요. 우연히 엄마가 술에 취해서 아빠한테 얘기하는걸 들은 적이 있어요"
"말해줘요.. 자세히.."
"나중에- 비랑씨 마음이 좀 정리되면 말해줄게요. 아참, 이거 받아요-"
그녀는 내게 흰 규격 봉투를 건네주더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나가버렸다.
다시 문을 잠그고 벽에 기대며 밀봉되어 있는 봉투를 뜯었다.
깨끗하게 접힌 A4용지를 꺼내고 봉투를 기울이자 반지가 걸려 있는 목걸이가 주르륵- 하고
내 손바닥 위로 미끄러져 내린다. A4용지를 펼치자 실장님의 깔끔한 글씨체가 나를 맞았다.
[비랑씨, 잘 지내나요? 전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아요.
민성이 형이 그랬었거든요- 죽음은 곧 안식이라고. 편안할 것 같아요. 아주 많이‥
이 반지는.. 음. 내가 비랑씨한테 주려고 매일 갖고 다니던건데 결국 이렇게 주게 되네요.
내가 그러던 것처럼 매일 가지고 다니지 않기를 바래요. 이건 결코 행운의 마스코트가 아니거든요.
그냥 가끔 나란 사람이 생각난다면.. 가끔 꺼내봐줘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요. 비랑씨는 현재랑 미래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좀 길어져 버렸네요. 어쨌든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고마웠어요. 정말 많이 사랑했었구요.
27년, 짧은 인생에 비랑씨를 만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건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행운이고, 행복이었어요.
이제 할말 끝!
난 이제 떠나요, 안녕-]
내 눈에선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정말 지겹도록 울어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해서, 비참하고 서러워서, 그리고- 가슴이 미어져서 눈물이 났다.
"행복한 여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영원히 "불행한 여자"로 남을 것만 같다.
시끄러운 웃음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젯밤에 TV를 켜놓고 잠이 들었나보다.
매일 아침마다 보는 아침 방송의 MC가 밝은 표정으로 멘트를 이어가고 있었다.
실장님의 편지를 읽고 나서 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물론, 아직까지도 사람을 만나지 않는건 마찬가지이지만-.
가끔은 쇼프로를 보며 웃어대기도 하고, 매일 매일 빼놓지 않고 뉴스를 보면서
이 더러운 세상을 욕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 "꾸며진 나"인 이유는-
아직 내 가슴에 생긴 커다란 구멍이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아직 나는 사람과의 만남이 두렵고, 사랑과 그로 인한 갑작스런 행복조차도 두렵다.
이 세상에 정말로 "행복"이란게 존재하긴 하는걸까-.
"오늘의 초대손님은-"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괜시리 짜증이 나서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데,
MC의 한마디가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사랑한 사람에게"로 소설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계시는 윤재희 작가님이십니다!"
Vol.62 完
"안녕하세요-"
재희언니?!
TV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재희언니의 모습에 나는 그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멍하니 TV를 바라보며 잠깐 동안 옛날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네- 저도 "사랑한 사람에게"를 읽어봤거든요. 정말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재훈씨, 재훈씨도 읽어보셨죠?"
"그럼요. 정말 애절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였는데, 어떻게 그런 내용의 글을 쓰실 생각을 하셨나요?"
"제 주변에 그렇게 가슴 아프고 한결같은 사랑을 하신 분이 계셨거든요.
"사랑한 사람에게"는 그 분의 그런 사랑을 지켜보면서 매일 매일 적어뒀던걸 묶은거에요"
"아아- 그렇다면 "사랑한 사람에게"의 모든 일들이 실화라는 건가요?"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엔딩까지도요?"
"..네.. 물론 그 분의 심정은- 제가 짐작한 것일 뿐이지만요."
재희 언니의 눈가에 씁쓸한 미소가 서렸고,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나는 옷을 찾아입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게 맞다면, 재희 언니의 소설 속 주인공은 분명 실장님일 것이다.
읽어봐야 했다.
어쩌면 그 글 속에 내가 원하는 답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그 책은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무작정 페이지를 펼치고 작가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한 여자만을 사랑했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항상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고,
27년 생애에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던 1년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의 육체는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만은 아직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것이라고-.
만약, 정말로 영원이란게 존재한다면,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제 멋대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책이 젖어버릴까봐 황급히 책을 덮었다.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시선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울고 있을 때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그의 눈빛이, 그리고 그의 편안한 미소가
뇌리에 낙인찍히듯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에 행복했습니다. 이제야 당신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내 가슴 속은 텅 비어버린 것처럼 횅하기만 했고,
이젠 정말로 말라버린건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이젠 무감각해져 버린 건지도 모르지…
황량하기만 했던 사막 가운데에서, 드디어 오아시스를 만나는 듯 했는데,
불행하게도 그 오아시스는 그저 신기루일 뿐이었다면-.
아마도 그 때는. "오아시스"로 인해 품었던 희망과 기대감마저도 모두 무너져버릴 것이다.
지금 내가 그렇듯이-.
오아시스도, 희망도 없는 내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뭐가 있을까.
실장님에게 받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제영에게서 받은 세잎클로버와 네잎클로버를 손에 꼭 쥔 채로
엄마의 수납장 위에 올려져 있던 많은 약병들 중에서 하나를 집어들고, 알약을 한 움큼 집어 삼켰다.
만약, 정말로 영원이란게 존재하는 거라면,
이 생애의 모든 기억들을 영원히 지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런데 정말로.
죽음은 영원한 안식일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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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유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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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결말이 신비하네요....이런결말 원하진 않았지만 색달라요 가슴이 아프네요 -
..슬프고재밋고..가슴아파요..
여자주인공 불쌍헤요 ㅠ 재밌어요 근데 결말이 좀;;
재밋어서 스크랩 해갓어요 ^^
번외 가서 봐야겠어요!!!
기분이묘하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