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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묵상글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기도로서 위로하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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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도로서 위로하는 우리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위의 세 말씀으로 나눔을 하려고 하는데
위의 세 말씀을 연결하여 결론과도 같이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나는 반드시 보리라!
-구원을 받게 되리라!
-나는 꼭 행복하리라!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죽어서라도 꼭 주님을 보고야 말리라 마음먹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꼭 봐야 합니까?
그것은 오늘 욥기에 의하면 그분이 먼지에서 일어서는 분, 곧 부활의 주님이시고
오늘 로마서에 의하면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신” 분, 곧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욥처럼 사는 동안 고생고생하였는데
고생만 하고 주님마저 못 뵈면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고,
이렇게 고생했으니 주님 뵙는 것을 상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는데
사랑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고통을 사랑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고생을 부활로 보상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고 왜 삽니까?
사랑과 부활의 주님이 안 계신다고 믿고
그래서 고통을 사랑으로, 고생을 부활로 보상받지 못한다고 그리 믿는 사람은
그래서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자살을 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부활과 구원의 하느님 때문에
-성인들의 통공을 믿고
-육신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사람을 믿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행복하면 되겠습니까?
앞서 봤듯이 우리가 믿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없도록,
우리의 행복 안에 그들의 불행을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불쌍하고 불행한 모든 영혼을 품지 못한다면
가까운 이들의 영혼이라도 우리는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이란 불쌍하고 불행한 영혼을,
살아있는 영혼이건 죽은 영혼이건
기도로서 위로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그들을 위해서
적어도 위령 성월인 11월 한 달만이라도 아니 오늘만이라도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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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 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만남과 죽음의 신비를 봅니다.
사실, 우리는 두 개의 탄생과 두 개의 죽음의 문을 통해 이 변화의 길을 갑니다. 곧 첫 번째 죽음과 탄생의 문은 어머니의 탯줄을 끊는 죽음과 동시에 태어나는 이 세상에서의 지상탄생이며, 두 번째 죽음과 탄생의 문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과 동시에 태어나는 하늘나라에서의 천상탄생입니다. 두 개의 문을 통과할 때마다 눈을 감고 낯선 곳으로 오고 낯선 곳으로 가기에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첫 번째 문을 통과할 때 세상의 부모들이 기다리며 기뻐하였듯이, 두 번째 문을 통과하면 기다리며 기뻐하는 천상형제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이 세상으로 오는 통로요 이 세상과의 만남이며, 하늘나라로 가는 통로요 하늘나라와의 만남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도 먼저 간 이들의 죽음을 통해, 이 자리에 와서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의 죽음이 오늘 우리 만남의 통로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죽고, 현재를 충실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이처럼,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짓고,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파우스티나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습니다.”(1코린 15,51-56)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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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천상을 희망한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천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한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사실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말이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하겠느냐’ 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물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 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주님의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더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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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비봉 추모관’이었습니다. 그곳에는 1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함께 있습니다. 볕이 좋은 가을날에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이 계셨던 무덤으로 달려가듯이 추모관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이 계신 곳에는 동생 수녀님이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을 갖다 놓았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연도를 바치면서 이제는 기억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책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갔습니다. 생각했으면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술 때문에 실수하는 자식을 보면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금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약주를 좋아했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성경 필사를 하였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였던 시메온처럼 늘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었고,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으니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일을 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했기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쌀가게를 하였고, 작은 슈퍼를 하였고, 밥장사를 하였고, 파출부로 일을 하였습니다. 고된 일을 하셨기에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펠리컨이 새끼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펠리컨처럼 자녀들을 위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아들이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아들과 함께 3년을 지냈습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옷을 제대로 입듯이 어머니가 함께했던 첫 본당 신부였기에 큰 어려움 없이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곧은 느티나무처럼 강하였다면 어머니는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웠습니다. 어머니는 대녀들이 많았고, 대녀들을 잘 챙겼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이 예수님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처럼 대녀들이 아프면 제게 봉성체를 부탁하였고, 대녀들의 자녀들이 혼배를 하면 제게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믿었고,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으니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아버지는 정신력이 강했지만 체질은 약하였습니다.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이 않아서 일찍 틀니를 사용하였고, 혈압이 높아서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부드러웠지만 체질은 강하였습니다. 치아가 좋아서 돌아가실 때까지 튼튼한 치아를 사용하였습니다. 머리카락도 검었고, 혈압도 정상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강한 정신력과 어머니의 강한 체질을 닮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체질은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늘 신경이 쓰였습니다. 부드러운 음식을 선호하였습니다. 이제는 하얀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어서 염색을 하지 않지만, 머리카락도 일찍 하얗게 돼서 염색을 하였습니다. 혈압이 높아서 일찍부터 약을 복용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체질을 닮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을 닮은 것이 사제생활에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체질 때문에 건강에 관심을 가졌고, 아직까지는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앞장서서 끌고 가는 성격도 좋겠지만 뒤에서 밀어주는 성격도 좋았습니다. 저 역시도 하느님을 믿고, 신앙 안에서 충실히 살아 언젠가 천상에 계신 부모님을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합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현재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씻어 주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현실에서의 삶만이 있다면 고통과 아픔 앞에 좌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가난한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 이런 이들은 참된 행복을 만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현재는 천상에서의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므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현재 우리들이 바라는 것들이 과연 영원한 삶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영원한 삶에 장애가 되는가! 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합당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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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이 말씀이 저에게는 참으로 많은 위로를 주는 듯합니다.
고행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당장의 행복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 즉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뵙는 곳입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이 하느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며 그분과 대화하는 곳, 그곳에서 먹고 마시고, 푸른 풀밭에 몸을 누일 수 있는 곳, 그곳에 우리는 우리 행복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연옥의 영혼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이미 하늘나리에서 천상 행복을 누리고 있는 영혼들에도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영혼에게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영혼들을 위해 잠시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위해서.
동행 서비스
저녁 시간 약속 자리를 마치고
전철을 타러 전철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
동행 서비스(여성안심 귀가)입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런 서비스가 있었으면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여성이 아님에도 그 서비스가 너무 반가웠습니다.
제가 여성이 아님에도 그 서비스를 신청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층 밝아진 세상을 보며 웃음 지으며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한테도 ‘동행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아프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슬프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세상을 등지지 않았을 사람들을 위해
동행 서비스~
우리 주님의 모습.
함께, 걷고, 먹고, 웃고, 잠들고, 이야기하고….
그 안에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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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매일 게임만 하고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공부하지 않고 게임만 하는 자녀의 모습에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그러자 아이도 큰 소리로 말합니다.
“잘 알아. 공부 안 하면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겠지. 그러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고, 또 제대로 된 직장도 얻지 못할 거야. 연애도 못 하고 내 집을 가질 수 없겠지. 그래도 공부는 재미없어.”
이 아이는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것일까요? 모르는 것일까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안다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공부를 학창 시절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고나서 또 신부답게 살기 위해서는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의 무게를 느끼면서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는 게 아니다.”라는 스티븐 코비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진정한 앎은 행동을 반드시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교리를 통해 또 성경 말씀을 통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과연 진짜 앎일까요? 행동하지 않으면 입으로만 안다고 할 뿐 진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행동으로 나의 진짜 앎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갑자기 들이닥친다고 하셨습니다. 그 시간과 그 장소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도 그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준비한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로,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는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 준비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 주님을 제대로 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우리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준비하는 위령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위령의 날에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잘 맞이하려는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준비해야 한다고 말만 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이 아닌 몸으로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있고, 또 그 주님을 잘 맞이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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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당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로레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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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의 묘지 양쪽 입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가 죽는다’라는 뜻으로 메멘토 모리(Men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와 비슷한 말입니다. 특히 위령의 날 오늘 마음에 담고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제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희망과 위로를 반영하는 성인들이기에 위령성월은 “희망과 위로 성월”로 또 “성인성월”로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례력으로 대림시기를 앞둔 마지막 시기 11월은 성인성월로 생각해 모두가 성인들을 기리며 성인들처럼 한 번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은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짧은 강론에서 “우리는 더불어의 여정에 선물인 거룩함으로 불리었다.” 말씀하시며 새삼 우리의 삶은 성화의 여정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거룩함은 ‘행복한 삶’을 위해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날로 행복해지는, 노화의 여정이 아닌 성화의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또 11월 위령성월의 기도지향으로 교황인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나에게 힘을 주고 내가 성령께 경청하며 교회와 동행할 때 분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말씀하셨습니다. 이어 “교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a process)’으로, 그는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된다. 이런 과정중에 그는 더욱 사랑이 많아지고, 더욱 자비로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인내하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처럼, 더욱 인내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끝없이 인내하며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해야 할 우리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의 날이자 우리의 삶을 깊이 성찰해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매일 생미사와 더불어 연미사를 봉헌하며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됩니다.
죽음이 있어 삶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이 없이 끊임없이 연장되는 삶이라면 도저히 삶이 선물임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수십년전 소스라친 깨달음이었고 지금도 그 체험은 생생합니다. 응접실안 은은한 향기를 발하던 동양란이 향기를 그쳤고 잘 들여다 봤더니 꽃이 떨어 진것입니다. 저는 난향기는 늘 당연한 듯이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알아봤더니 1년 지나야 다시 핀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소스라치게 깨달은 것이 “삶은 선물이다.”라는 자각입니다.
꽃이 지자 꽃향기가 선물임을 깨달았듯이 죽음이 있어 비로소 삶이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파봐야 건강이 선물이었음을 깨닫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와 기쁨으로 선물인생을 살게 하고. 이렇게 살 때 찬미와 감사로 선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물같은 삶에 선물같은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일 것입니다.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곱게 사랑으로 물들어가다 단풍지듯 홀가분한 떠남의 죽음일 것입니다. 봄꽃도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의 격조는 더 뛰어나고, 일출의 찬란도 좋지만 일몰의 장엄함은 더욱 감동적이듯 이런 죽음도 가능할 것입니다. 아주 예전 25년전 써놨던 두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세상 떠나기 몇 년전 노년의 마인라도 수사님이 가을마당 낙엽을 쓰는 모습을 그린 “노수사老修士님”이란 시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낙엽쓰는 노수사님
묵묵히 삶의 뒤안 길에서
낙엽과 함께 집착의 쓰레기들 말끔히
쓸어내는 노수사님
그대로 무념無念,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가을이었다, 자연이었다”-1998.11.9.
이어 다음날은 “죽음”이란 시를 썼습니다.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귀환歸還이다, 해후邂逅다, 화해和解다, 구원救援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다”-1998.11.10.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절박한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오래 많이 사는게 아니라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지혜서의 가르침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되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
이런 깨달음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본질적 깊이의 찬미와 감사의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며 감사임을 깨달아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살게 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미 주님과 일치된 존재들이기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서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살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제2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일치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용기백배 힘이 납니다. 세례성사에 평생 계속되는 성체성사,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유비무환,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 신랑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을까요? 전혀 죽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죽음을 맞이한다면 역시 후회되는 일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준비하며 기다렸다 신랑을 맞이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잘 준비했다 죽음을 통해 주님을 맞이한 젤투르다 성녀였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구원의 혼인잔치에 입장했고, 뒤늦게 등잔을 준비하며 돌아 온 다섯의 어리석은 처녀들 앞에 문은 닫혔고 주님의 냉엄한 말씀이 마음을 얼어붇게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후회해도 너무 늦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를 아시는가?’ 에 앞서 ‘나는 주님을 얼마나 아는가?’ 끊임없이 자문하시시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앎도 깊어집니다. 회개하여 즉시 영혼의 기름 등잔에 신망애의 기름을 가득 채우라는 말씀이요, 늘 유비무환의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깨어 준비하며 기다렸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늘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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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원한 쉼을 향하여>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29ㄴ-30)
주님께서
몸소 지워주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짐을 기꺼이 지고
오늘도
영원한 쉼을 향하여
가슴 벅찬 길을 나섭니다
짐이 무거울수록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마련해주실
영원한 쉼은 그만큼
가벼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메어주신
나눔과 섬김과 살림의
멍에를 오롯이 메고
오늘도
영원한 쉼을 향하여
가슴 벅찬 길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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