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20: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20: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20:10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20:11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20:12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20:13 "주님께 노래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다."
20:14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20:15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20:16 바로 그 사람은 주님께서 사정없이 뒤엎어 놓으신 성읍들처럼 되어서, 아침에는 울부짖는 고통 소리를 듣고, 대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어야 했는데.
20:17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20: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 주해
1. 백성들의 죄는 마음 판에 새겨져 있고 그 마음은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병들었다(렘 17:9).
1) 토기장이 하나님은 회개하면 재앙을 거두시고, 반역하면 복을 거두신다.
2) 하나님은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가혹한 심판을 집행하신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상상도 못할 인신제사로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3) 예레미야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했으나, 도리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다.
- 백성들은 “안전하다, 평안하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좋아할 뿐이다.
2. 바스훌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성전에서 재앙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그의 목에 나무 고랑을 채워 가두었다(2절).
1) 바스훌은 “그의 거짓예언” 때문에 재앙을 당하는 친구들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게 된다.
2) 거짓 복음을 듣는 자는 거짓 선지자와 같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마 15:14).
3. 바스훌의 태형과 투옥은 예레미야에게 처음으로 가해진 물리적 박해이다. 그리고 이때 성경은 예레미야를 처음으로 “선지자”라고 언급한다.
1) 예레미야는 이미 수차례 무시와 헐뜯음을 당했고,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다.
2) 성전에서 물리적인 박해와 수모를 함께 당한 예레미야에게 낙심과 절망이 온 것 같다.
렘 20: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4.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속임”이라고 말한다.
1)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의 부르심이 이런 삶이며, 이런 수치와 수난을 당하는 일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속임”으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속았음”으로 표현한다.
2)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을 거절했었지만, 주님이 더 강하심으로 결국 선지자로의 부르심에 복종하였다.
3) 그 결과는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날마다 예레미야를 조롱한다.
5. 선지자는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얻는 자리”가 아니라, 어찌보면 명예로운 직분이다.
고후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고후 3:9 유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면, 의를 베푸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 된 것, 생명을 주는 영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2)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직분이며, 언약 백성들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존경하고,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 정상이다.
3)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돌아온 것은 “명예와 존경”이 아니라 “조롱과 모욕”이었다.
6. 예레미야가 사람들의 웃음거리와 놀림감이 된 이유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파멸과 멸망을 선포했기 때문이다(8절). 즉 여호와의 말씀 때문에 그가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한 것이다.
1) 너무나 고통스러운 그는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노라고 결단하였다.
2) 하지만 그의 속에서 불타는 마음으로 인해 별도리 없이 다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렘 20: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7.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서, 다시 말씀을 전하면, 무리와 친한 친구들이 오히려 예레미야를 고소하려고 달려든다.
렘 20:10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1) 수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마골 밋사빕!(사방의 두려움)”이라고 외쳤다.
- 마골밋사빕은 하나님이 바스훌을 저주하여 바스훌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무리들은 그 저주의 말을 도리어 예레미야에게 퍼붓고 있다.
2) 명예를 먹고 사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수많은 무리들의 조롱과 저주로 깊은 멍이 들었다.
- 그런데, 결정적으로 예레미야의 마음이 무너지고, 절망하게 된 것은 “친한 친구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자로 돌변한 것이었을 것이다.
3) 친했던 친구들이 “예레미야가 실수를 하면 그를 덮쳐 보복하자”라고 말했다.
- 친했던 친구들은 “예레미야를 보복할 적”으로 여기고, 예레미야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린다.
8.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결혼도 하지 말고, 자녀도 낫지 말라고 하였다.
1)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인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꾀하였다.
2) 그런데, 이제는 예레미야와 친하던 친구들이 예레미야를 혼내주고 보복하자고 한다.
3) 정말 예레미야는 무리들의 저주대로 마골밋사빕(사방의 두려움)이 되었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식하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찬송으로 돌아선다.
렘 20:11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1) 예레미야가 전쟁 중이라면 용사이신 하나님의 보복으로 승리감을 누리게 된다.
2) 그러나 같은 유다 백성들의 수치, 한 때 친했던 친구들의 쓰러짐, 고향 사람들의 실패로 인하여 예레미야가 무엇을 얻겠는가?
3) 교만하고, 악한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하나, 그들의 멸망이 예레미야에겐 위로가 되지 않는다.
10. 비록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인정하시고, 예레미야를 위해서 보복을 해 준다고 하여도, 예레미야는 패역한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마골-밋사빕”으로 살아가고 있다.
1)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 권력과 부를 버린 선지자, 결혼도 하지 않는 선지자는 심판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종일 조롱과 모욕을 받는다.
2) 하나님이 함께하는 선지자, 그 말씀이 심장에서 불붙듯이 타올라서 전하는 선지자도 보통 사람이 느끼는 배신과 조롱과 외로움으로 괴로워한다.
11. 14-18절은, 생일을 저주하는 예레미야의 탄식이다.
1) 욥도 깊은 고통 속에서 생일을 저주했었다(욥기 3장).
2) 예레미야는 모태에서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그 소식을 아버지께 알리는 산파를 저주한다.
- 그는 산파가 자신을 죽였으면 좋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고 모태가 그의 무덤이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한다.
12. 예레미야는 자신을 저주하는 절망에까지 빠져든다.
1) 친구들에게조차 조롱과 박해를 받으면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가 당하는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하게 한다.
20: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2) 예레미야가 전한 심판이 집행됨으로, 예레미야는 참 선지자로 인정을 받는다.
3)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마치 자신이 받는 조롱과 모욕과 저주가 죽는 날까지 그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13.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장에서 불타 올라,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참 선지자도 관계의 무덤으로 인하여 “무덤에 들어갈 수 있다.”
1) 심판의 복음, 무덤의 복음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무덤에 들어간 경험”을 한다.
2) 그로 인하여 그는 말로만 심판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친히 무덤에 들어가서, 무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음으로 생명을 얻는 경험을 하는 선지자가 된다.
14. 생명을 얻는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가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시한다.
1) 무리들은, 예수님의 친한 벗들은 죄 없는 예수님,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때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다.
2)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를 죽인 죄인들을 살리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
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인 죄인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으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 나의 묵상
1. 비참한 존재와 회개
예레미야와는 이유가 다르지만, 예레미야가 속았다는 말은 공감된다. 나도 생명으로 섬기는 자란 의미를 알지 못하고 부르심에 응했다. 속은 것이다. 주님의 의도와 내가 가야하는 길을 알지 못하고 생명으로 섬기겠다고 하였다. 예레미야의 절망도 이해가 간다. 돈과 권력은 좋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자이니, 그런 것은 없어도, 명예와 존경과 감사만은 얻어내고 싶다. 물론 명예를 얻어내고자 목회를 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견딜 수 없다. 나의 선의를 알아주지 않는 조금의 반대도 기분이 나쁘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생명 목회를 하지 못했다. 예레미야가 받은 반대의 1/100정도만 받아도 나의 마음은 무너졌고, 절망했다. 예레미야가 받는 치욕과 모욕이라면 말씀을 도무지 전하지 못할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면, 말씀이 그 심장에서 불타 올랐다는 말씀이 나를 찌른다. 그는 참 선지자다. 불타오르는 말씀이 치욕과 모욕을 이기는 자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말씀을 희석시키는 자다. 말씀을 전하여 모세처럼 존경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예레미야처럼 적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누구의 종인가?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가? 뻔한 대답을 회피하고 목회를 해 왔다. 부르심의 목적과 상관없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참선지자로 고난을 받는 자가 아니라, 나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
2.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나타내다.
복음의 목적이 생명이고, 생명을 얻고 나누기 위해서 불렀다는 주님의 말씀이 내 심장에서 불타오르기를 원한다. 아무리, 전하지 않겠다고 결단을 해도, 생명을 얻게 하는 그 복음이 내 심장에서 불타 올라, 내 뼈까지 태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 마음 판에는 죄가 새겨져 있고, 이 마음은 속이고 병들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의 부패를 아시고, 복음의 목적이 생명이고, 목회의 목적이 생명임을 알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복음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삼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을 것이다.
주님 때문에 존경과 인정과 대접을 받기만 하고, 주님 때문에 멸시와 조롱과 반대와 손해는 받고 싶어하지 않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주님을 이용하여 자기를 주장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생명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받는 어려움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감사하다. 날마다 어긋나는 나를 날마다 복음의 길로 이끌어 올리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한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는 예레미야의 찬양을 구한다. 무덤에서 말씀을 받아 먹으면서, 하늘 아버지의 잔치에서 아들의 기쁨을 구한다. 구속의 은총으로 무너진 나의 마음을 일으킨다. 세상에서 무너진 마음에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나를 용납하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용납한다. 그 은혜에 의지하여 생명에 이른다. 그 주권적인 은혜가 은혜의 왕노릇 아래에 거하게 하며, 다시 생명을 주는 말씀을 받아 먹게 한다. 생명의 떡을 먹으며 주님을 찬양한다.
◈ 묵상 기도
주님을 따르는 길은 분명히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주님을 따르는 자는 명예와 존경을 받고, 더 잘되면 보란듯한 삶도 보장받는 것처럼 거짓에 속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치욕과 모욕을 받고, 손해를 보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바른 믿음을 주옵소서.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좁은 길임을 알고,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공급받게 하옵소서. 눈에 보이는 결과를 찾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레미야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비록 속아서 순종했지만, 이 죄인을 부르시고, 세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생명을 주는 복음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옵소서. 그 말씀에 사로잡혀 생명력있게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오늘은 엠티와 세례식이 있습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성령께서 확증해 주옵소서. 세례식을 통하여 영적으로 주님과 연합되는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