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up Exhibition :: Painting
작가 ▶ 김대연, 김수미, 김시현, 김영성, 안정환, 이창효, 이흠, 정중원
일정 ▶ 2023. 08. 08 ~ 2023. 09. 03
관람시간 ▶ 10:00 ~ 18:00(월, 공휴일 휴관)
∽ ∥ ∽
금정문화회관 금샘미술관 전시실 1, 2, 로비
부산시 금정구 체육공원로 7
051-519-5657
art.geumjeong.go.kr
● 핍진(逼眞) 욕망의 풍경들
김영준(전 부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현 비평,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외래교수)
이제 우리의 일상 목록에서 카메라와 사진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카메라의 발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혁신적이다. 광학과 기계공학, 이제는 전자와 첨단 IT까지 탑재된 데다가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기능이 복합적으로 결합해 있다는 것은 설명할수록 진부해진다. 최초의 카메라는 1825년 프랑스인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와 루이 다게레(Louis-Jacques-Mandé Daguerre)에 의해 발명되었고, 1829년에는 사진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거의 2백 년 전의 일이다. 이 사건은 1차 산업혁명의 성공과 미래를 알리는 거대한 이정표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미술계는 이 사건이 자신에게 어떤 파장을 몰고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마이브리지(Eadweard James Muybridge)의 1883년경에 있었던 일련의 실험들이 간간이 미술사에 일부분을 채우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미술, 특히 회화는 존폐의 기로에까지 내몰려야 했던 위기를 맞이한다. 소위 24개의 카메라로 연속 촬영된 ‘달리는 말’ 연작들은 사실 리얼(實在, Real)과 펙트(事實, Fact)의 분명한 경계를 목격하게 해준 사건이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대신해 주기 전까지 펙트(사실)는 리얼(실재)한 회화가 증명해 왔었다. 카메라와 사진은 그것으로 인해 더 이상 리얼한 회화가 펙트를 담보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내보인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쿠르베(Gustave Courbet)로 시작한 19세기 리얼리즘 회화의 화려한 축제를 끝내고 그 목표와 욕망을 단숨에 지워버린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한 회화, 그러니까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 미술 사조는 과거 낭만주의를 반성하면서 나타났다. 회화의 사실주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또는 가상적으로 옮겨 그리는 기법에 의존하는 예술이다. 19세기에 하나의 장르로 유행했다지만 사실적 묘사의 기원은 훨씬 오래전부터이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라는 것’, ‘가상의 것이 눈에 보인다면 이럴 것’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다른 매체로 옮겨 놓아 예술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쿠르베는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전적인 사실적 회화는 신화나 신앙의 형태조차 리얼한 어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끝없이 새겨 왔었다. 쿠르베가 그것, 그러니까 그러한 관념으로부터 ‘시각’을 분리해 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라는 것은 이 세상을 실재의 것으로 본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실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을까? 또한, 실재가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왜곡 없이 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는 대로 믿는 관습은 근대적 혁명이 가져온 부작용이라 하고 싶다. 어쩌면 플라톤이 이데아(idea)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한 ‘동굴의 우화(Allegory of the Cave)’로 뭇 인간들에게 경고한 것으로부터 인간의 눈을 의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시각 중심사회의 난맥이다. 우리는 ‘매의 눈’이라는 은유를 즐겨 쓰면서도 사실 매나 독수리의 시력과 화각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그 착각은 원근법(perspective)의 발명으로 더욱 공고해졌던 것은 아닐까?
이미 원근법이 발명되기 전에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일종의 신기원을 경험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재현의 수단으로 썼고, 보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에 대한 욕망을 키웠다. 미루어 보았을 때, 인류는 오래전부터 사실적 환영(illusion)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술사는 어쩌면 그 욕망에 대한 특별한 매개와 행위를 기술한 것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미술의 역사는 원시인들이 기억에 의존한 동물의 형상 그리기로부터 시작한다. 그 동물들이 어떤 종인지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차이’를 확실히 묘사해 낼 수 있었다. 구석기인들의 그림을 지금의 미술과 같은 종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지만 실재성에 대한 욕망과 그리기 행위는 여전히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미술 관습과 동일하다.
왜 우리는 실재성(寫實性, Reality)의 욕망을 그토록 추구해야 했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는 이미지를 재현해 냄으로써 그 너머의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지의 재현은 환영(illusion) 작용을 통해 다른 이에게 의미와 정보를 전달했을 것이다. 단순한 기호로 시작된 소통 수단은 언어를 구조화시켰고 더욱 실재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대상화로 확실한 각인이 필요할수록 복잡한 언어체계와 인식의 구조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인식하고 그것을 어떤 수단을 통해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사실성이 매우 중요한 기재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사실성의 극단을 경험하고 있다. 이 시대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의 차원을 새로운 차원으로 옮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미술에서는 이미 극사실(하이퍼 리얼리즘, Hyperrealism)을 경험했다. 미국 화가 척 클로스(Chuck Close) 등이 그 유행을 이끌었다. 땀구멍이 보이고, 머리카락, 눈썹의 한올 한올, 피부의 작은 주름과 솜털, 작은 상처와 옷의 실밥을 인물화에서 적나라하게 본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보는 평범한 시각의 기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미술 작품으로써의 대상에 대한 일반적인 ‘보기’의 습관을 넘는 과도한 정보를 준다. 이 ‘낯섦’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 Lacan)이 얘기한 ‘실재계(The Real)’을 떠올리게 한다. 실재계는 우리의 평범한 삶을 이루는 상상계와 상징계에서 벗어나 있는 단계이며, 순간, 사건이다. 실재계는 정확하게는, 우리의 현실에서 배제 된 것들, 그러니까 현실의 잉여물, 여백 같은 것이며, 때로는 치명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 했다. 하이퍼 리얼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일반적인 리얼리즘의 회화에서 목격할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순간 멈춤’과 같이 행동이나 시간의 멈춤과 같은 것.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자이가르닉(zeigarnik) 효과1)라 하는데, 하이퍼 리얼의 그림들은 오히려 자이가르닉 효과로부터 알레고리를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기보다 순간 사건의 컨디션을 목격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가 멈춰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 기표(記表, signifiant)의 역할보다는 기표의 자체의 상태를 목격하게 만든다. 미술에서 자르가이닉 효과를 제대로 보여줬던 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멜로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Venus) de Milos)’2) 이다. 헬레니즘(hellenism)의 화려한 기교와 표현력은 분명 고대 그리스 신화를 기의(記意, signifié)로 했으며, 아프로디테의 자태는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야 했다. 그런데 팔이 없는 상태로 발견된 그녀는 분명 ‘결핍’의 상태로 완연한 기표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이다. 이 결핍이 그저 결핍으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허공에 수많은 팔의 포즈를 상상하게 만드는 풍부한 연상작용이며, 이것이 토르소(torso)라는 양식을 개발하게 된 원류이다.
1)자이가르닉(zeigarnik)효과 : 중단된 활동이 오래된 활동보다 더 풍부한 연상을 유발한다는 것으로, 처음에는 러시아 심리학에서 도출된 병리학 용어이다.
2)우리에겐 ‘밀로의 비너스(Aphrodite(Venus) de Milos)’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멜로스 섬에서 한 농부에게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원래는 팔이 붙어있는 상태로 완성되었지만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한때 유실된 유물로 간주 되었다가 팔이 부러진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 김대연, Grapes
194 x 90cm, Oil on Canvas, 2021
▲ 김수미, 다화(茶話)
162.2 x 112.1cm, Oil on Canvas, 2017
▲ 김영성, Nothing•Life•Object
138 x 138cm, Oil on Canvas, 2023
▲ 이창효, [No 939] 자두-풍요
60.6 x 60.6cm, Oil on Canvas, 2023
▲ 이흠, show-window story
72.7 x 72.7cm, Oil on Canvas, 2009
지금 8명의 작가가 펼치는 하이퍼리얼의 회화를 목격하고 있다. 전시명이 경계(境界)라는 것이 꽤나 의미 있어 보인다. 이들 대부분 그림의 특징은 핍진성(逼眞腥)3)에 있다. 참여 작가는 김대연, 김수미, 김영성, 이창효, 이흠, 안정환, 정중원, 김시현이다. 김대연의 포도, 김수미의 다화(茶話), 김영성의 無. 生. 物, 이창효의 자두, 이흠의 그림들은 대상을 극단적인 근거리로 데려온다. 마치 돋보기를 통한 관찰과 응시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의 그림은 철저한 관찰을 통한 기술적 재현이 풍미를 이루지만, 이흠의 그림은 이들 중에서도 극단의 원근 시야에 신경을 쓴다. 대부분 화면 앞에 클로즈업된 대상들은 자기만을 봐주길 요청하며 배경을 요원하게 만들었다. 이흠만이 커메라의 포커싱 효과를 얻어 초점에서 제외된 배경들과는 눈을 맞추지 않지만 존재를 설명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유클리드적 3차원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일상성의 개입 여지를 열어놓았다. 접시에 담긴 케잌이나 크리스털 장식품 뒤에는 어떤 우리의 공간이 있다. 사실 김대연의 포도도 그렇긴 하지만 이창효의 자두와 마찬가지로 전면회화(All over painting)에 가깝다. 특히 이창효의 자두는 배경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김수미의 다화(茶話) 시리즈는 김대연의 포도의 공간적 포지션과 닮아있지만, 대상의 상태는 이흠의 것과 비슷하다. 김영성 작품은 배경이나 원근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척 클로스의 인물화 효과가 보인다. 일상에서 우리의 일반적 시각 너머의 잉여를 드러내 마치 광학적 관찰을 경험하게 하는 것 같다.
3)핍진성(逼眞腥) :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시점에서 객관적인 관찰자가 진실에 가깝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이르는 형이상학적 성질이다.
▲ 안정환 No.20 경주 반월성의 고요한 들판
97 x 162cm, Oil on Canvas, 2023
▲ 김시현 The Precious Message
193.9 x 193.9cm, Oil on Canvas, 2018
▲ 정중원 비너스(Venus)
130 x 130cm, Acrylic on Canvas, 2016
안정환, 김시현, 정중원의 그림은 이들과 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안정환은 소위 숲속의 ‘풍경’이다. 나무가 울창한 숲은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그런데 안정환의 풍경은 현실태가 아닌 비가역적인 새로운 풍경이다. 그의 숲속은 비현실적이며 나의 시간을 맞출 수 없는 불연속의
공간처럼 보인다. 김시현은 우리의 전통 오방색 보자기로 무엇인가 싸맨 상태를 보여준다. 화면을 보자기의 상태로 오려 실재감을 더하거나 오히려 중력을 거스르는 모습으로 공중 부유하는 보자기 등 이중적 인식, 이중적 은유 등의 단락을 보여준다. 보자기의 기능을 통해 보자기 속 대상에 대한 은유보다는 보자기의 상태와 불연속적으로 변주되는 공간 간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이 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그림이 정중원의 인물화이다. 정중원의 인물들은 보통 극사실적 표현이 주는 ‘상징(계)’을 넘어선 그 무엇, 익숙한 것에서 보지 못했던 그 무엇을 표현했다기보다는 구체적인 알레고리(Allegory)를 연출한다. 미켈란젤로, 비너스, 오스카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물, 하지만 역사적, 신화적 인물들에 대한 가상적 극사실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기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이 주는 즐거움은 그림 속 대상과 내용보다 시각성(Visuality)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그림은 하이퍼 리얼이라는 타이틀 속에서 궁극의 눈을 환기한다는 점이다. 사진과 닮아있지만 사진이 만들 수 없는 절제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쿠르베의 새로운 세대들이다. 쿠르베 욕망의 현대적 버전이기도 하다. 그들이 하이퍼 리얼 회화로 묶여있지만, 이 기획전을 통해 각각의 다름과 각각의 욕망과 핍진성의 풍경을 목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