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서울아트시네마(www.cinematheque.seoul.kr)에서 열리고 있는
니콜라스 레이 걸작선을 다녀왔어요. 전작 12편을 모두 보았구요.
'여인의 비밀'을 제외하면 11편 모두 '걸작'이라고 부를만한 경이적인 작품들이었어요.
12편을 본 저는 개인적으로 레이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바치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고다르와 트뤼포, 리베트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고다르의 말처럼 니콜라스 레이는 '영화' 그 자체였어요.
트뤼포의 말처럼 니콜라스 레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영화관에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제 의견을 하나 덧붙이자면 니콜라스 레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씨네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레이의 영화들은 주제나 장르 등을 떠나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매혹의 대상이었어요.
회고전 기간 내내 극장에서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레이의 영화에 감염되었어요.
그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운명적인 만남을 수십년 기다려온 것일까요?
레이의 영화는 정말이지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온 연인과 같이 저에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극장에는 저와 같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더군요.
더 많은 사람들이 레이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현실은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군요.
그래서 저는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레이의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올리게 되었어요.
레이의 영화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비디오나 DVD로 출시된 작품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번 기회가 아니면 보시기가 힘드실 겁니다.
그리고 레이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필름으로 보아야지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만들어진 '이유없는 반항', '실물보다 큰', '제시 제임스 스토리',
'파티 걸', '야생의 순수'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콜라스 레이가 '영화'인 것이기도 하구요.
니콜라스 레이! 그에겐 다큐냐, 픽션이냐, 장르냐 하는 문제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그가 하고 싶은 얘기를 카메라로 찍으면 영화를 한 편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단순한 의미에서의 영화가 아니라
위대한 '영화'가 된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서부영화를 찍으면서 당대의 매카시즘을 격렬히 비판하고('자니 기타'),
필름 누아르를 찍으면서 자기에 관한 일종의 다큐('고독한 영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그는 장르 영화의 틀에 있으면서도 픽션과 다큐의 경계가 모호하고 하나의 장르로만 결코
규정할 수 없는 레이만의 장르 영화('러스티 맨', '에버글레이즈에 부는 바람', '야생의 순수')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이용한 공간 감각과 뛰어난 색채 감각을
바탕으로 장르를 초월한 추상화의 경지에 이른 영화('실물보다 큰', '파티 걸')도 만들어내었던 드문 감독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레이의 걸작 몇 편에 대한 저의 간단한 소감을 적겠습니다.
이 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여서 부디 한 분이라도 극장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니콜라스 레이의 걸작 리뷰
1. 그들은 밤에 산다(1949년)
니콜라스 레이의 혁명적인 데뷔작으로 '시민 케인'과 더불어 미국영화 사상 최고의 데뷔작 자리를 다툰다는 전설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반드시 필름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에도 비디오나 DVD로 출시가 되지 않았고 오직 필름으로만 이 영화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봐왔지만 이 영화만큼 아름다운 작품은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클로즈업 장면들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D.W.그리피스의 '꺾어진 꽃',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선라이즈',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열정',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들 등에 등장하는 클로즈업 장면들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입니다. 트뤼포가 이 영화를 보고 브레송적인 미국영화라고 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범죄영화의 플롯을 지닌 운명적인 연인의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는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비롯해서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더 이상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그 정도로 형언 불가능한 압도적인 감동을 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보십시오! 그리고 느끼십시오! 당신의 인생의 영화 리스트에 이 영화가 추가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 어둠 속에서(1951년)
이 영화는 1950년대에 헐리우드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필름 누아르의 걸작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을 연상시켰어요. '이탈리아 여행'과 유사하게 이 영화는 한 인간의 내적인 여정을 자동차를 통한 여행을 통해 보여줍니다. 레이의 영화가 보통 그렇듯이 이 영화는 단순히 필름 누아르로만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장르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멜로드라마, 로드 무비의 속성도 지니고 있지요. 이 영화 역시 레이의 주특기중 하나인 압도적인 클로즈업 쇼트들이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레이는 클로즈업의 대가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가 담아내는 얼굴 클로즈업은 무수한 감정들을 적확하게 포착해냅니다.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무척 세련된 작품으로 시대를 앞서갔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니콜라스 레이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같은 현대 영화 감독들의 선구자로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니콜라스 레이의 공간 감각은 개인적으로 안토니오니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담아낸 풍경의 영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전반부의 도시 풍경과 후반부의 설원 풍경의 대비는 무척 인상적입니다.
3. 러스티 맨(1952년)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를 떠올리게 한 작품입니다. '웨건 마스터'가 시종일관 다큐적인 터치의 로드 무비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러스티 맨'은 시종일관 로데오 경기 다큐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로데오 경기를 보여주려고 만든 영화 같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이 영화의 로데오 경기 장면은 로데오 경기를 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제대로 포착해서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굳이 장르를 규정한다면 웨스턴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레이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웨스턴이외의 멜로드라마, 로드 무비 등 다른 장르적인 속성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빔 벤더스가 '물위의 번개'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영화에 삽입했던 바로 그 유명한 영화입니다. 벤더스가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귀향 장면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그 장면은 벤더스의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니콜라스 레이가 위대한
영상 시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로버트 미첨, 수잔 헤이워드, 아서 케네디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4. 실물보다 큰(1956년)
이 영화는 가히 시네마스코프 미학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멜로드라마에서 점차 호러 영화로 변해가는 복합 장르적인 성격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놀라운 것은 그 거대한 화면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거대한 강박관념의 세계를 그와 맞먹는 거대한 화면이라는 시각적인 수단을 통해 구현해내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는 다양한 색채를 활용한 화면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어서 보는 이들을 감동시킵니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에 내재된 불안을 포착해낸 통찰력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을 영화의 주제나 장르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영화를 관람한다는 시각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야말로 영화적으로 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위대한 점일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정말 고다르의 말이 생각나게 됩니다. 니콜라스 레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