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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네스코 ‘코뿔소’(새로읽는 고전:48)
◎이념은 없다,인간만 있다
멀쩡한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해
이웃들에게 미친듯이 달려든다
나치가 설쳐대던 20세기 전반 유럽
‘코뿔소’는 당시 정치상황을 비유
그러나 코뿔소가 그때만 있었던가. 적지 않은 사람이 외젠 이오네스코의 극은 난해하다고 불평한다.‘아메데’에서 인물들이 사는 방으로 들어오는 대문짝만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며,‘코뿔소’에서 멀쩡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짐승으로 변하는 까닭은 무엇인가.그의 사상과 작품세계를 간략히 알아보자.
1912년 루마니아에서 출생한 이오네스코는 이듬해 부모를 따라 파리로 이사한다.아홉 살 되던 해 그는 누이와 함께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로 가 한동안 지낸다.
그곳에서의 평화롭고 행복한 어린시절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봄에 앵초꽃이 피면서 길이 열렸어요.또하나의 신비였죠.‘…’ 겨울에는 땅이 진흙탕이 되면서 길이 막혔어요.걸어다닐 수가 없었죠.그러다가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어요.꽃,다람쥐,노래하는 새,그리고 황금빛 곤충들,모든 것이 생명으로 충만해지죠.진흙탕과 마른 나무의 팔이 기지개를 켜면서 되살아났어요.나는 그게 정말 죽은 세상이 부활하는 장면이라고 느꼈어요”
어린 이오네스코에게 계절의 순환은 타락한 세계의 표시가 아니었다.사계절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하나로,꼬리를 물고 연달아 이어지는 자연의 국면들이었다.그는 우주 만물의 다양성과 단일성을 동시에 경험한 셈이다.
시골 마을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은 항상 현재시점에서 세상의 변화를 초연히 바라보았다.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마을은 작은 둥지면서 동시에 광활한 우주였고,외로움이면서 또 공동체였습니다.완벽한 세계였죠”
패러다이스에서의 삶은 기쁨과 경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복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다시 파리로 돌아와 살면서 이오네스코는 시골에서 맛보았던 기분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낙원은 평생 살아나갈 무서운 현실 앞에 언뜻 스쳐 지나가는 서곡에 불과하며 평화와 행복의 끝에는 반목과 대결이 뒤따르고 있었다.
세상은 폭력, 이별, 전쟁,그리고 죽음으로 가득찬 곳이었다.성장하면서 이오네스코는
“악이 바로 우리들 사이에 있으며,바로 이 순간 우리를 갉아먹고 파괴하고,또 세계의 경이로움을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오네스코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이 그릇된 신앙이나 배타적인 이념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내팽개치는 것이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무고한 이웃을 수단이나 제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았고,그러한 움직임이 한 단체나 지방의 경계를 넘어 나라 전체를 삼키는 무서운 소용돌이로 변해갔다.그들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였고,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중 가장 큰 세력이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이었다.
히틀러가 독일국민에게 제시한 이상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부각시키는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설득력이 뛰어났고 전염성 또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코뿔소’ 서문에 이오네스코가 기록한 나치주의자들의 시위 광경은 그의 친구 루지몽이 목격한 것으로 히틀러의 등장을 전후해 풍미한 독일의 국민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총통과 수행원들이 조그맣게 보이면서 멀리 거리의 끝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그들이 가까이 오자,나는 사람들이 흥분하면서 그 기분나쁜 친구를 향해 광적으로 환호하는 것을 보았다.흥분상태는 히틀러의 도착과 함께 조수처럼 퍼져나갔다.무엇보다 나는 그 광적인 열기에 경악했다.그러나,총통이 아주 가까워지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자 나의 마음 속에서도 똑같은 광증이 솟아나 나를 사로잡으려는 걸 느꼈다”
후에 루지몽은 ‘코뿔소’의 주인공 베랑제로 등장하여 사람들이 무더기로 코뿔소로 변하는 현실에서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오네스코의 드라마는 언제나 활짝 열린 무대로 시작한다.어릴 적 시골 생활의 추억을 연상시키는 세계다.이곳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지만 투명한 상태여서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고,만물이 약동함에도 불구하고 늘 고요와 평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공간은 외부 세력에 유린당하고 불행한 곳으로 변한다.그 영향으로 인물들이 인형 기계 또는 동물로 변한다.이질적인 요소의 침투로 인간성이 상실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인물들은 종종 정상적인 말 대신 문법,형태,그리고 의미가 박탈된 소리를 내뱉는다.
대사가 오히려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심지어 단단한 물체처럼 서로에게 던져진다.또,물건들에 의해 무대가 채워져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공간으로 변한다.
‘코뿔소’의 1막은 넓고 한가한 광장에서 시작되는데 비해
2막은 서류와 책으로 가득찬 법률사무소에서 펼쳐진다.바깥의 사람들은 시시각각 코뿔소로 변하고,법률사무소 근처까지 접근한 코뿔소떼는 계단을 부수고 들어오려 한다.언제 사무실이 코뿔소떼에 의해 점령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 안의 인물들은 작은 공간에서 더욱더 위축된다.
‘코뿔소’는 20세기 전반 유럽의 정치상황에 대한 시적 이미지다.작가는 인간의 영성이 비뚤어진 믿음에 의해 압도되어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지적한다.그런 예는 독일만의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옛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의 공산주의 혁명,그리고 가깝게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인종청소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는 사랑과 이해보다는 광기를 띤 야만적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