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하던 혁명가도 피해갈 수 없었던 사랑
김구(金九) 선생의 순애보 – ‘자싱(嘉興)의 처녀 뱃사공’
이역만리 중경에서(충칭, 重慶) 1942년에 찍은 사진.
입가에 어린 잔잔한 미소가 아름답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 등을 역임한 김구 선생은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 도쿄 천황폭살 미수사건과 같은 해 4월, 상하이에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외 10 여명을 살상한 윤봉길(尹奉吉)의 거사를 지휘한 배후로 지목되어 현상금 60만엔과 함께 지명수배 당했다.
일제의 집요한 추적에 시달리던 이 해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의 김구 선생을 중국의 가흥일보(嘉興日報)에서 문예편집자로 활약한 샤넨성(夏輦生)씨가 역사적 배경과 함께 '백범일지(白凡逸志)'에 기술된 실화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 낸 것이 '김구 선생 가흥피난기(嘉興避亂記)'라는 부제목으로 출판한 소설 '선월(船月)' 이다.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 의거를 지휘한 이후 일제의 압박을 피해
가흥(嘉興, 자싱)에서 지낼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백범, 진동생, 이동녕, 엄항섭)
김구 선생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중국 광둥(廣東) 출신의 상인 장쩐치우(張震球)라는 이름으로, 1932년 4월29일 중국 샹하이 법학대학 총장인 추푸청(秋風淸)의 도움을 받아 변장을 하고 인적이 드문 야간에만 이동을 하며 추 총장의 고향인 저쟝성 자싱(浙江省 嘉興)에 도착하여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57세의 독립운동가와 20세의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周愛寶)는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일제의 추적을 피해 김구선생이 은거했던 중국의 저쟝성 자싱(浙江省 嘉興).
그렇다면 두 사람의 순애보는 어떤 내용일까.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는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와의 사랑을 고백하며 회고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남경서 데리고 있던 주애보(주아이바오)를 거기를 떠날 때 고향 가흥(자싱)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 되는 것은 그 때 여비 백원만 준 일이다. 그녀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
백범 선생께서 `부부 비슷한 관계'라고 언급했던 바로 이 여인, 주아이바오(朱愛寶)다.
백벙일지.
주아이바오는 추 선생 집 인근의 호수에서 배를 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처녀 뱃사공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추 선생 댁 부엌일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자싱의 추 선생 집도 일제의 추적에서 안심할 수 없는 곳이었다.(일전에 김구선생 피난처를 소개하면 당시 상황을 전했었다) 일제의 추적이 감지되면 인근에 있는 추 선생의 양자인 천동성(陳桐生)의 집에도 숨고,,, 때로는 풍찬노숙도 했다.
어느날 김구가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식당주인은 그가 일본군이 현상금을 걸고 추적하는 사람임을 알고 현지 보안부대에 신고했다. 그 과정에서 식당주인은 다시 일본군에 신고했다. 중국군 보안부대장은 김구의 사람됨을 알고는 김구를 풀어주었고, 일본군은 화풀이로 이 부대장을 살해하고 만다.
김구선생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가흥(嘉興, 자싱)에서 지낼 때 임정가족들과 함께.(1935년)
“임시정부 하면 곧장 상해가 연상되지만 실제 상해 임시정부는 10년 남짓 하고,
나머지 기간은 千辛萬苦의 長征 길이었다.”
둘째열 왼쪽부터 송병조, 이동녕, 백범 김구, 이시영, 조성환,
뒷줄 왼쪽부터 연미당(엄항섭의 부인), 엄항섭, 조완구, 차이석, 조성환의 부인.
급히 도망가는 김구를 배에 태운 것은 바로 아이바오였다. 그날 밤 아이바오와 김구는 미친 듯 쫒아오는 일본군을 피해 `물오리산'이라는 작은 산의 좁은 동굴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김구 선생은 열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도 이동령(李東鈴) 등의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일을 추진했다. 그녀는 일제의 수색을 피하며 급히 도망가야 할 때 마다 한걸음에 달려가 뱃머리에 배를 대고 김구를 태워 삿대를 저었으며 때로는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한 김구 선생을 간호하며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이역 만리에 홀로 숨어지내던 김구 선생과 처녀뱃사공 아이바오 사이에 감사와 사랑이 싹튼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중국의 전형적인 강 마을.
처녀뱃사공 아이바오도 김구선생을 저렇게 태우고 피신시켰을 것이다.
일제의 추격이 심해지자 생각 끝에 추 선생은 김구를 며느리의 친정별장이 있는 하이옌의 남북호(南北湖)의 `재청(裁靑) 별장'으로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8년 전에 샹하이에서 아내를 잃은 김구 선생은 추 총장에게서 "안전한 활동을 위해 가정을 가진 자로 위장할 필요가 있다"는 충고를 받고 아이바오와 함께 선상(船上)생활을 시작했다. 반년이나 숨어 지낸 한적한 이곳에서 김구는 `屠倭實記'를 썼다.
김구와 함께 지내면서 아이바오는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담대한 풍모의 광둥(廣東)상인 장쩐치우(張震球)로 알고있는 이 남자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깊히 사랑하게 된다. 비록 나이가 37세나 차이가 나는 사랑이지만 아이바오는 이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 남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白凡)선생임을 몰랐다.
김 구 선생과 장개석 장군의 회담.
1933년 5월, 김 구 선생과 장개석 장군의 회담이 남경에서 이루어 졌다. 이회담은 윤봉길의사의 의거에 감화를 받은 장개석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회담에서 장개석은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책임자 이청천 장군) 설치를 허락하는 등 이후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을 적극적 지원하기로 약속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자잔한 남색 꽃무늬의 짧은 윗옷에 봉근 솟은 가슴과 허리를 곧게 핀 모습에서 풍만함을 잃지 않는 날씬함은 아가씨의 현숙함과 활발한 풍취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주아이바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김구는 8년전 상하이에서 병으로 죽은 아내와 나이 어린 두 딸을 생각했다. 또 두번이나 아들을 고아원에 보낸 생각이 떠올랐다. 늙은 어머니가 손자를 고아원에서 데려오고 나서 지팡이로 그를 때리면서 "너는 대체 집을 집을 가질 것이냐, 아니면 임시정부를 가질 것이냐"고 화를 내던 과거도 떠올랐다.
1921년, 부인 최준례여사와 아들 김인.
파란만장한 평생에서 가장 단란했던 시절.
그때 김구는 50을 훌쩍 넘기고 환갑을 바라보는 57세였다. 그런 그도 아이바오에게 `부부와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김구는 아이바오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처지다. 어머니에게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되찾는 대업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인 그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뱃사공의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인 것이다.
아이바오는 김구의 어머니에게도 `며느리' 역할을 했다. 김구 어머니가 두 손자를 데리고 자싱에 온 적이 있다. 11살짜리 작은 아들은 아버지 김구를 보고는 할머니 뒤로 숨어버렸다.
얼굴도 검고 낯설은 이 남자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란 말인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날 3대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74세 생신을 맞이했다. 아이바오는 시장 구석구석을 헤맨 끝에 `壽'자가 새겨진 견직물을 사서 `어머니'에게 선물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바오가 돈을 주고 이 선물을 산 것을 알고는 야단을 치셨다.
김구선생의 어머니 곽낙연 여사와 두 아들 金仁(왼쪽)과 金信.
1934년 남경에서 찍은 사진이다.
맏아들 仁은 1945년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머님이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님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님은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님의 청구대로 그 돈은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 것으로 단총을 사서 일본 놈 죽이라고, 도리어 보태어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백범일지』중에서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가짜 부부의 신분으로 김구와 난징에서 동거하던 아이바오는 적들의 폭격기에 무너진 집에서 기어 나왔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때 였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거느리고 충칭(重慶)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결국 이들 `위장 부부'는 헤어지게 된다. (난징에서 주아이바오는 김구의 정체를 알게 된다)
김구는 아이바오에게 "일본과 싸워 이긴 후에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맹세와 함께 급히 돈 100원을 손에 쥐어준다.(백범일지에 나온 대목이다. 수중에 돈 백원밖에 주지 못한 김구의 안타까움을 알 수 있다)
1945년 11월 5일, 충칭(重慶,중경)을 떠나 귀국길에 상해 비행장에 기착한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모습이다.
아이바오는 끊임없는 불행 속에서도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 남자'를 기다리면서 꿋꿋하게 버텨나갔다. ‘그 남자’를 위해 신을 만들었다. 붉은 선으로 수놓은 진달래를 바닥에 새기고...
1945년 일본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바오는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배를 저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남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이미 조국광복에 몸을 던진 김구를 만나지는 못한다.
1949년 겨울,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다. 어느 큰 눈이 내린 날, 아이바오는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문지기를 했던 노인이다. 하지만 아이바오는 김구 선생이 서울에서 동포의 손에 암살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만다.
김구선생의 애틋한 순애보가 어려있는
저쟝성 자싱(浙江省 嘉興, 가흥)의 오늘날 모습.
그녀는 배에 올랐다. `그 남자'를 기다리며 진달래꽃으로 수 놓았던 신발을 물속에 넣었다. 그렇게 물 속에 진달래꽃이 피어났다.
김구 선생의 역사적인 존재감 뒤에서 잊혀질 뻔했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사랑이 혁명가나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피해갈 리는 없다.
발췌 :
http://www.mindan.org/kr/newspaper/read_artcl.php?newsid=4675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신 질곡의 삶 - 백범(白凡), 김구
1945년 김구선생이 해방을 맞아 환국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양복 입은 모습의 귀한 사진.
뒷날에 뉘 있어 스스로 나라를
사랑했다 이를 양이면
스스로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이제 白凡 가신 이의
생애에다 물어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나 나라를 사랑했다 생각하지 말아라
1893년, 김구가 18세가 되던 해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쫓기는 몸이 된다. 이후 만주를 유랑하다 1895년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한다.
1896년 단발령으로 국내가 어수선해지자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길에 치하포 나루에서 '스지타'라는 변장한 일본 육군중위를 만나 죽이고 체포되었다. 김구는 인천 감옥에 수감되고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국모를 시해한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함’을 안 고종의 특별사면 요청으로 감형되었다.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 환속하여 1903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한다.
인천감옥 복역중 강제노역을 했던 ‘인천 축항공사장’
치하포 나루에서 왜 장교를 죽이고 사형언도를 받았던 인천 감옥을 탈옥한 후,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7년형을 받고 다시 인천으로 끌려가 복역중, 선생은 인천 축항공사장에서 강제노역을 한 일도 있었다. 같은 복역수 잡범 중에는 김구(金龜)가 왕년의 탈옥수 김창수(金昌洙)인 것을 아는 이가 있었지만 왜놈에게 선생을 팔진 않았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이때 이름을 '김구'로, 호를 '백범'으로 고쳤으며,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장차 독립하면 정부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고 한다.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에 힘을 쏟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의 직위를 역임한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총재가 된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왕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공원 일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거사를 3일 앞둔 4월 26일,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1933년 난징에서 장개석을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 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한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훈련을 지휘하였으나, 일분이 무조건 항복하자 광복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귀국하게 된다. 이때 미 군정이 임시정부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 임시정부 임원들은 각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한다.
1940. 9.17.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 계획을 완료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과 도너번 소장(OSS 총책임자).
1945년 8월 4일, 3개월에 걸친 광복군의 OSS 훈련이 완료됐다. 김구는 곧바로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을 대동하고 서안으로 향했다. 제2지대 본부에서 OSS측과 회의,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작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조국광복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준비했던 이 계획은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경교장 안에 차려진 김구선생 빈소.
온 국민이 항일투사이자 민족지도자인 백범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노선과 대립하며 남쪽만의 단독총선거에 반대해 남북협상을 추진했으나 좌절되었다. 1949년 6월 자택에서 당시 육군보병 소위였던 안두희(安斗熙)의 총탄에 맞아 1949년 6월 26일 74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사후 국민장이 치러져 서울에 있는 효창공원에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매장됐다.
실화를 소재로 한 원작 '선월'(船月, 샤넨성 저)
김구선생과 처녀뱃사공의 순애보를 다루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