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국문인 8.9월호 >
수레를 만드는 법과 부리는 기술
김홍은
글을 쓰는 작가는 작품을 발표 하면 독자들로부터 평가를 받게 된다. 작품 평을 한다는 것은 즐겁지가 않다. 수필가가 쓴 작품을 지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름대로 작가의 사상과 감성에 따른 사물을 바라본 시각(視覺), 지각(知覺)의 심리적 관점을 표현한 정감을 헐뜯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감정은 시시비비가 따르게 마련이다. 시시비비가 없으면 문학이 아니다.
이번 한국문인 8,9월호의 신작품은 16편으로 이들 작품을 주제의 유사성과 연관성으로 분류하여 묶어보았다. 독자로 하여금 작품의 줄거리를 읽고 수필의 작품성을 비교하여 느끼게 하는데 의도를 담았다.
오늘 따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이 생각난다.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하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것이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로서, 입으로만 수인(輸人)이며, 여인(輿人)이며, 거인(車人)이며, 주인(輈人)이라 하지만,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하며,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도통 연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책을 헛읽는 다는 것이니, 학문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 한심하고 기막힌 일이다.’
바로 수필문학에 있어서 우리 작가들은 이런 변폐(便閉)는 없는 건가.
1. 산책과 여행의 언어
김영덕의 <공지천 산책길>이다. 초저녁, 공지천 갈대숲에는 이 동네 사람들이 산책을 즐긴다. 잠자리에 들려는 개개비는 마지막 노래를 합창하느라 분주하다. 화사하게 피어난 아까시아꽃 향기가 석양의 산책길에 진동한다. 순백의 이팝나무도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냇가에는 노란창포꽃이 무리지어 고개를 내밀고, 뚝방 비탈에는 금계화도 한창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었다. 생태계의 소리를 공지천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지도 3년은 더 된다. 죽어가던 하천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어떤 젊은 부부 유모차에는 강아지가 두 마리나 타고 있다. 한 마리는 빨간 셔츠를 입었고, 또 한 마리는 물방울무늬 옷을 입었다. 두 마리 모두 머리에는 리본을 꽂았다. 또 어떤 사람은 강아지를 품에 감싸 안고 걸어간다. 한 마리만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마리 세 마리를 힘겹게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개와 달리기도 한다. 이 동네의 개들이 참으로 호강한다.
눈에 거슬리는 것 또한 유난히 많았다. 마치 전폭기 같은 굉음을 폭발하며 돌진하듯 내달리는 오토바이, 거들먹거리며 큰 소리를 질러대는 술주정꾼, 담배를 꼬나물고 역한 담배냄새를 뿜어대는 사람, 굵고 기다란 막대기를 질질 끌고 가는 사람, 사납게 생긴 개를 앞세우고 다가오는 사람, 자전거 핸들에서 두 손을 놓고 곡예를 하듯 질주하는 애들도 많다. 아주 날카로운 눈으로 흘겨보는 이도 더러 눈에 띈다. 오늘 공지천은 이 동네의 사랑받는 하천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역동적이며 표정 또한 화사하고 생기가 넘친다. 그만하면 또 다시 그녀와 함께 찾아와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의암호 수변공원 쪽에서 누군가 색소폰 연습하는 소리가 밤하늘을 울린다. 아직은 서툰데도 귀가 즐겁다.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을 공지천 산책길이다.
최무규의 <노추산 모정탑길>이다. 노추산 계곡에는 한 어머니의 가없은 사랑으로 조성된 3,000여개의 크고 작은 돌탑이 1㎞쯤 되는 거리에 늘어서 있다. 「모정탑길」이다. 탑은 절이나 공원 같은 곳에 가야 볼 수 있는 불교의 산물인데, 이 깊은 계곡에 3.000개나 되는 탑을 쌓아 놓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다.
노추산은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알려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에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와 맹자가 태어난 추(鄹)나라의 이름을 따서 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노추산은 신라시대 문장가 설총과 조선시대 강릉이 낳은 대학자 이율곡이 입산수도한 곳으로 유명하다. 산 8부 능선 전망 좋은 언덕에는 이 두 분을 모셔놓은 사당(二聖臺)도 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차옥순 할머니는 무슨 까닭으로 이 산에 들어와서 26년간 돌탑을 쌓은 것인가. 스물셋의 나이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강릉으로 시집 온 차옥순 할머니는 4남매를 두었지만 아들 둘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편마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계속되는 고난 앞에 할머니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산신령이 나타나 3,000개의 돌탑을 쌓으면 집안의 우환이 사라질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희망이 돌탑을 만들었고 그 돌탑은 사랑의 성지가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할머니의 혼이 담긴 돌탑을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고, 그 옆에 조그만 돌탑 하나를 쌓았다.
앞으로 더욱 잘 가꾸어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 지를 일깨워 주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윤숙경의 <초여름의 바이칼 호수>는 86세 노령의 여행기다.
비행기 안에서 지루함을 달래라고 틀어준 영화가 ‘제독의 연인’이였는데 영화의 배경에 이르쿠츠크가 포함되어 있어서 좋은 안내서가 되었다. 이르쿠츠크 시내를 주마간산 격으로 시내 구경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알혼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사휴르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사막인지 초원인지 분간이 안 가는 풍경들이 스쳐갔다. 가끔 자작나무와 전나무 군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디를 가나 호수의 푸른 물결이고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들이다. 부르칸은 이곳 원주민인 부랴트인들의 언어로 창조주를 뜻한다고 하는데, 과연 세계의 샤먼들이 최고의 성소로 생각하며 아낄 만하다.
건너편은 바이칼의 푸른 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뒤에는 길게 장벽을 이룬 프리모르스키 산맥이 호수를 지키고 있다. 마치 흰 테를 두른 듯 잔설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이곳 부랴트 주민들의 종교적 장식물인 세르게(오보)의 화려한 오색천을 연상시킨다. 사휴르타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알혼섬으로 건너갔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 마치 꿈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으로 후지르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앉아서도 누워서도 바이칼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특급 전망을 가진 통나무 방갈로였다. 전기가 들어 온지 10년 밖에 안 될 정도로 개발이 덜 되었고 문명의 혜택과 거리가 멀었다. 덕분에 끝없이 넘실거리는 호수의 물빛을 벗 삼아 태고의 신비에 흠뻑 젖어 바이칼에서의 꿈같은 첫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섬 일주로, 섬의 이름인 ‘알혼’이 ‘나무가 없다’, ‘메마르다’라는 뜻이라더니 나무, 풀도 거의 보이지 않고 울퉁불퉁한 구릉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간간히 지나가는 소 떼나 양 떼를 보니 아직 계절이 이른 탓에 풀이 잘 보이지 않을 뿐 사람이 살고 가축들이 살아갈 정도의 초원은 있는 모양이다.
알혼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이 가까이 느껴지며 빛나는 북극성.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의 반짝거리는 별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은 어릴 때 읽고 나서 늘 가슴에 담아오던 바이칼이었다. <유정>의 한 많은 주인공들의 넋은 어디에 있을까. 시베리아 어느 곳 자작나무 숲속에서 깊은 안식을 취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저 깊고 푸른 바이칼 호수 속을 헤매고 있을까.
2. 추억과 회상의 음률
임두환 <추억의 흑백사진>이다. 추석 이튿날이었다. 떠들썩하던 아들 딸네 가족이 떠나버리니 집안은 휑하고 마음이 허전했다. 오늘은 명절 뒤끝이라서 특별히 갈 곳은 없고, 느긋한 마음으로 책장 속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그동안 ‘남는 것이 사진뿐’이라며 가는 곳마다 찍어 놓았던 사진들이다. 이것을 흑백과 칼라로 구분하고 학창, 군대, 직장, 가족, 여행지별로 분류하니 9권의 사진첩이 되었다.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어느덧 6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와 아내의 인연은 남달랐다. 1968년도의 일이다.
흑백사진을 보고 있으니 지난날의 추억이 새롭다. 아날로그가 디지털시대로 된지 오래다. 스마트폰과 셀프카메라가 바람과 실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지만 어설퍼지는 마음은 피할 수가 없다. 요즘은 드론(Drone)까지 나타나 탑승 없이도 공중을 날며 자유자재로 촬영을 하지 않던가? 참으로 세상은 요지경(瑤池鏡)이다. 살기 좋은 시절이지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그 옛날 순수하고 꾸밈없던 아날로그, 흑백사진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웬일일까? 정, 그 따사로운 정 때문이 아닐까?
이수 <취미와 색소폰>이다. 일흔 여섯인데, 색소폰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서도소리 명창이었던 이은관 선생은 80이 넘어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하여 생전에 그 배운 실력으로 멋진 삶을 살다 가셨다거나, 조선조 때 추재 조수삼이란 사람은 80 몇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다는 얘기를 해줬다.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장롱 속 악기로 남을 확률이 높아보였다.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너무도 지대해서 이제는 음악을 떼어놓고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클래식이든 대중가요든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들어야 일종의 침묵의세계적으로 5대 악기로 불리는 셀마, 야나기사와, 야마하, 케논볼, 폴모리아 등은 고가 악기 군에 속하고 프랑스제 셀마는 한국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악기이다.
노년이 아무리 쓸쓸하고 외롭다하여 가만히 앉아 화장터 갈 날만 헤아릴 순 없지 않은가, 악기라도 하나 사들고 동요 한 곡 연주해봄은 어떨까? 색소폰 살 때 계음 짚는 방법을 일러 줬더니 집에 가서 얼른 동요 한 곡 되더란다. 그 양반도 그 재미를 알았으면 좋겠다.
변명옥 <가슴을 적시는 장사익의 노랫소리>다. TV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더 없이 맑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마음을 끌어당겼다. 60년 전 아득한 기억의 저 끝자락에 고무줄놀이를 하던 발놀림과 그 시절 동무들의 웃음소리가 그립고 서러움이 밀려왔다.
소리꾼 장사익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그야말로 몇 초 안되는 노랫소리에 내 마음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바로 15년 전 쯤 일이다. 짧은 순간의 노래에 그렇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의 음색은 맑지만 한이 스며있고 고음으로 갈수록 소리가 더 맑아진다. 아침을 먹는데 장사익씨가 거기에서 자고 아침에 생음악으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주인이 자랑을 했다. 정말 부러웠다.
땅 설고 물 선 곳에 아버지를 묻고 돌아와 깜박 잠이 든 아들에게
“야야, 문 열어라.”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가 문을 여니 어두움 속에서 찬바람만 가슴에 달려들었다고 노래한다.
대전공연에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노래하는데 눈물이 쉴 사이 없이 흘러 내렸다. 거리의 노숙자로 하층민들이 사는 판잣집에서 무지한 이웃여자의 무시와 천대 속에 별별 욕을 들으며 산 그 시인이 어떻게 이 세상을 그리 아름답게 그리고 아이처럼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다고 했을까? 젊은 날에는 인기를 누리는 공연은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런 내가 장사익의 공연이 있는 날에는 광주, 대전, 서울까지 달려갔다. 그의 공연을 보고 오면 며칠은 행복했다.
3. 역사가 남기는 이야기
하병우 <나폴레옹의 이야기>다.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과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은, 함께 있고 싶어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걷는 속도를 바꿀 줄 안다는 점이다. 즉 걷는 속도를 조금 줄이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들은 바삐 서둘다가 걷는 속도를 조금 줄이면 그 속에 생각과 재발견을 찾기 마련이다. 인생사에서 능숙하게 숨을 돌리며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됨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 수준을 높이 설정할수록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지고 낮게 설정할수록 쉽고 편안해 진다. 노력해도 인생이 즐겁지 않거나 거기에 더해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면 그것은 실패와 손해일 뿐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완벽을 기대하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가진 진주는 정말 이것이야!’ 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센트 헐레나」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드 라 카세」 백작과의 대화 중<유럽> 제 민족 간에 ‘내셔널리즘’을 촉진하고 유럽의 화합을 증진시키기 위한 자기의 계획을 말하였다. 그의 말은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있어서 유럽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나폴레옹 3세의 성향과 정책도 역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다른 몇 가지 문제에 관하여 언급한 뒤에 황제는 말하였다.
“나의 거대한 계획들의 하나는 혁명과 정책으로 인하여 분리 구분되어 온 동일한 지리적 제 민족을 다시 통합하고 집결시키는 일이다”
유럽에는 4,000만 이상의 프랑스인과 1,500만 이상의 스페인인, 1,500만 이상의 이탈리아인, 그리고 3,000만 이상의 독일인이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러한 민족들을 각각 하나의 국가로 통합시키려던 것이 나폴레옹 자신의 의도였다. “이렇게 통합된 나라들을 후손에게 남겨 준다면 이는 고귀한 일이였을 동시에 후세의 축복이다” 고 자신의 남다른 정치철학과 포부를 밝히다 유럽인들에게 원망을 사서 거대한 ‘유럽정복으로 민족통일을 하고자 했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조명래 <유월에 생각한다>이다. 퇴직 전 마지막 근무지가 경상북도 왜관이었다. 그 곳에는 6.25 전쟁 당시 폭파되었던 낙동강 철교가 가까이 있는가 하면, 최고의 격전지였던 다부동, 유학산이 지척이다. 요즘은 낙동강의 칠곡보 옆에 전쟁기념관이 세워져 있어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누구나 그날의 아픔을 느낄 수 있고, 교훈으로 삼아 배우기도 한다.
그때도 6월이었다. 군부대로부터 유해 발굴 현장의 견학을 안내하는 공문이 왔었다. 의무감 같은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그렇게 찾게 된 유학산은 표면으로는 세월의 흐름에 묻혀 전쟁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날 유학산을 다녀온 후 『유학산 사연』이라는 짧은 글을 지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은 300~400년 이전의 일이지만 역사책에 기록해두고 배우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교훈으로 삼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요즘도 다부동 유학산을 지나고 낙동강을 건너 고향길을 오가며 전쟁의 비극을 상기하고는 한다. 6.25 전쟁이 일어났던 그때 나는 첫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였다. 어머니와 누나의 등에 업혀 집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까지 피난을 갔었다. 어릴 적부터 전쟁이야기를 숱하게 들으며 자라서인지 해마다 6월이 되면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2010년 3월 26일 밤 9시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을 받아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었다. 북한은 또 그해 11월 23일 오후 2시에 연평도에 폭탄을 퍼붓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병을 합친 2천 3백명의 병사가 왜군 3만 여명을 크게 물리친 행주대첩에서는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은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도왔던 결과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에도 재일학도의용군 1진 69명이 참전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641명이 자발적으로 참전해 그 중 135명이 전사했으며, 포항여중을 지킨 71명의 학도병을 시작으로 6·25전쟁에 참여한 학도병이 무려 27만 4000여 명에 이른다. 또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공격 직후 실시된 해병대 지원율이 급증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조국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순수한 애국심의 실증이다.
나라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 내 자신이 소중하다면 나라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행주산성에서 치마에 돌을 날랐던 아낙네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 나라, 다부동 유학산에서 목숨 바쳐 조국을 지켰던 청년들의 영혼이 살아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우리의 머리에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지가 있고, 가슴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김원기의 <묘제의 변천>이다. 한국사회도 장묘문화에 대변혁이 오고 있다. 화장 선호는 말할 것도 없고 깊은 산 높은 꼭대기에 있는 분묘를 파묘破墓하여 새삼 화장을 하고 유골을 산골散骨, 자연장, 수목장, 납골, 합묘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노종손에게 가까운 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자고하면 으레 "수 백 년 고이 잠든 체백體魄을 이리저리 옮기는 건 안 될 일, 정 어려우면 묵히람“ 그런데 묵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묘비를 보고 그 자손을 비난을 할 테니 그것도 문제다. 그래서 찾은 방안은 묘는 묵히되 봉분의 흙을 유골 삼아 가져 와 평지에 묻고 그 위에 비석대신 표석을 세워 거기를 산소로 삼고 제사를 지내는 방안이다. 죽으면 썩고 말 시체 하나로 후손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 되고 있다.
나는 지난 4월부터 두 달째 멀고 가까운 선조의 산소에서 비석과 상석, 혼유석, 향로석 등 석물들을 시골집 가까운 남향 산자락에 옮겨 와서 합동제단소를 만들고 있다. 12대조 이하 증조부까지의 오래된 비석과 석물을 날라다 석 줄로 진열해 놓으니 얼추 작은 비림을 이루어 고풍하고 장중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비석과 상석들을 죄다 옮기고 거기에 원래 봉분의 흙 세 삽을 묻어 체백으로 삼아서 제사를 지낼 제단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흙을 골호에 담아서 묻을까 하다가 빨리 자연에 섞이라고 그냥 혼유석 위에 뿌려 놓았다. 골분骨粉도 아닌 생흙을 체백으로 여기자는 마당에 골호에 담아서 묻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제단소 입구에 세운 안내문을 이렇게 썼다. 제단소이지만 야외박물관의 기능을 하도록 제목을 <지촌芝村 종가 비림碑林>이라 명명했다. 전통문화의 가장 좋은 보존 방법은 그것을 관광자원화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는 것은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는 지촌 김방걸金邦杰 선생의 역대 주사손胄嗣孫의 합동 제단소입니다. 열선조의 묘소가 험준한 산중에 산재해서 성묘가 극난하여 종가 가까이로 옮긴 것입니다. 옛 어른들이 성력을 다해 만드신 석물과 글씨와 문장을 한 자리에 보존하고 회전會奠을 통해 숭조돈친崇祖敦親의 미풍을 이어가고자합니다. 종친들도 쉽사리 제단소와 종가를 함께 둘러 볼 수 있고 이를 구심으로 더욱 족의族誼를 돈독히 할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도 전통유가의 법고창신法古創新한 장묘문화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단소 조성비는 전액 종중 별묘소別廟所 기금으로 충당하였습니다.
4. 마음으로 들려주는 사무사(思無邪)
김덕기 <하늘냄새>다. 모든 사물에는 냄새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찮은 풀잎하나에서도 냄새는 나며, 좋은 냄새 싫은 냄새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하물며 냄새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람냄새일 것이다. 우리는 제각기 그 품성(品成)에서 풍기는 특정한 냄새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인격의 냄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벼 익는 초가을, 구름한 점 없는 궁창처럼 그런 하늘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아가다형님에게서 나는 냄새가 그러하다.
아가다형님은 이순을 넘기면서 고관절과 양쪽무릎수술을 해야만 하셨다고한다. 궁리 끝에 운전면허증을 취득하셨단다. 올해가 꼭 팔순이고, 운전을 하신지가 이 십년이란다. 이 십년을 하루같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태우고 매일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례하신다. 아가다형님의 차가 떴다하면 항상 빈자리가 없이 만원이다. 행복대학으로, 치매예방수강까지 정말 바쁘시다. 친구들과 맛난 음식을 먹으러 다닐 때에도 기사로 뽑혀 다니신다. 아가다형님은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른 사람이 자기와 부딪치지 않게 하기위하여 한 손에 등경을 들고 가는 시각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 자신도 장애 3등급 판정을 받았으면서 정신은 젊고 마음은 너그럽게,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서하신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늘 똑같은 마음으로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어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다.
아가다형님처럼 ‘대접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대접 받을 수 있게’ 살아갈 자신은 아직 넉넉하지 않으나, 이제부터는 시늉이라도 내며 살고 싶다.
정성려 <텃밭을 가꾸며>다. 30년 전, 시어머님을 모시고 이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한때는 아파트로 이사를 갈까, 이 터에 집을 다시 지을까, 저울질을 했었다. 남편이 직장을 다녔기에 굳이 농촌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편리한 아파트를 선호하는 내 생각과는 달리 남편은 어머님을 모시고 살기에 좋은 이곳에 새로 집을 짓고 살기를 바랐다.
남편은 그 이유로, 어머님이 마을 사람들과 정이 들었고 친구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 어머님께서 밖으로 왕래하기도 불편하거니와 당장 친구도 없으니 날마다 혼자 계시려면 외로울 것은 뻔하다.
내 주장을 접고 남편의 뜻에 따라 새 집을 짓기로 했다. 문턱이 낮은 허름한 오두막집을 철거했다. 2개월 뒤 반듯한 새 집이 완성되니 얼마나 좋았던가. 어머님도 굽은 허리를 펴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방방마다 돌아다니셨다. 그토록 좋아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정말 남편의 생각대로 이 자리에 새 집을 짓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지 않았다면 이곳에 집을 짓지 않았을 것이며, 늦게나마 텃밭 가꾸는 고소한 재미를 맛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나!’ 나는 깜짝 놀랐다. 퇴근해서 텃밭을 둘러보니 글쎄 비료를 고추와 토마토 줄기 밑에 바짝 놓아준 게 아닌가! 적어도 한 뼘 이상은 띠어야 하는데 말이다. 비료기를 씻어내려고 부랴부랴 물을 몽땅 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곡식도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그건 관심과 정성을 들여야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우리 집 텃밭 채소들을 손자 기르듯 가꾸고 있다.
명향기의 <간격의 미>다. 꽃에도 간격이 있다. 틈 없이 꽃과 꽃이 맞닿으며 하나로 보일 때 꽃의 아름다움은 극에 달한다. 사람에게도 간격이 있다. 관계 속에서 서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어울려 살아갈 때 살아있다는 존재감과 함께 평안이 유지된다. 오래도록 유지되는 짝꿍이라 알고 있는 경우에도, 거기에는 밀착된 가운데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숨어있는 것이다. 살면서 변수가 끼어들게 되면 오해가 생기고 거리가 멀어지며 틈이 벌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남편은, 부부는 일심동체이므로 무슨 일을 하던 부부는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어디든 함께 다녔고 tv에서 영화를 보아도 혼자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도 내가 자리에 없으면 혼자서는 보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절대 혼자 먹는 일이 없었다. 늘 잉꼬부부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밀린 일을 하느라 저녁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면 이해는 하면서도 힘들어했다.
오늘 아침, 다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떨어지는 남은 꽃들의 화려한 군무가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지는 모습도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며 나의 마지막 지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성긴 꽃잎사이로 햇살이 내리비추고 등불처럼 아름답던 꽃의 아름다움도 사라졌다. 꽃도 사람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할 때 비로소 더 아름다워진다고 생각된다.
남금선 <경암의 반지>다. 경암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40여 년 전 쯤 일까? 모 방송사의 ‘드라마게임’이라는 프로에서 게스트로 출연해 인생사를 풀어가는 모습이 멋지고 근사해 보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결혼이 굴레라는 것을 알게 될 즈음, 후회하며 그림에만 빠져 현실성이 없던 시절에 우리 동네에 문학 강좌가 생겼고, 그 곳에서 달변(達辯)에 잘생긴 중년의 한 남성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수필에 미친 여자처럼 30여 년 간 벙어리로 지냈던 말들을 토해냈다. 73편의 말들은 한 권의 수필집이 되었고, 선생님은 자꾸만 나를 무리 속에서 왕따 시켰다. 나는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챙기기 위해 스스로 탈퇴? 했다. 언젠가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도망쳐봐, 내가 놓지 않는 한 될까?” 그 자만과 오만이 나를 기분 상하게 했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의 모습을 섬세하게 볼 수 있었다. 젊은 그 시절 감정만 앞세우고 티만 보았던 내 눈에 선생님의 고독이 들어왔다! 별것 아닌 것을 별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했던 그 시절이 다시 올 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선생님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지켜드릴 수 있다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워 보니 경험에서 터득한 교훈이 있다. 부족한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랑만 풍족하다면, 무엇이든 가능한 것을......
경암 선생님께 사과의 반지, 존경의 반지, 사랑의 반지를 끼워드린다.
5. 백세시대의 인생여정
인경석의 <세 노인 이야기>다. 예전에 알았던 지인(知人) P 사장을 약 20여 년 만에 만났다. 그는 나보다 10년 이상 연상(年上)으로 노인의 모습이 역력했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자꾸 되묻는 것이다. 혹시 치매(?) 증상이 아닐까. 옛날 일을 정확히 기억하여 또렷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정상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좀 헷갈렸다. 그는 이제 만으로 78세란다. 나는 “금년에 노인 교통카드가 나왔으니 65세예요.”했더니, 10년은 젊어 보인단다.
또 노인 한 분이 도착하셨다. 인사를 하고 보니 그는 S그룹에서 운영하는 대형 종합병원의 원장을 오래 하신 L 박사님 이셨다. 초기에 그 병원을 설립하여 큰 병원으로 키우신 의료계의 원로 중 한 분이다. 그는 금년에 82세라고 했다. 그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있는데도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대화를 하는데도, 두 사람이 서로 큰 소리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나는 보건복지부에 있을 때 내가 모시고 일했으며 유능한분으로 P 사장과도 절친한 사이였던 K 선배 생각이 나서 안부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근 10년 만에 하는 전화였다. 선배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당뇨가 심해서 왼쪽 발목을 잘랐어. 가족의 도움으로 휠체어 타고 가까운 동네 산책이나 나가는 정도야.”한다. 당뇨로 발에 괴사(壞死) 현상이 생겨 발목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K 선배는 P 사장보다 세 살 아래로 75세란다.
오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P 사장이 “나 차비가 없는데.”하는 것이다. 나는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드렸다. 그는 “뭘 이렇게 많이 주노.”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L 박사에게 “나, 요 앞 버스 정류장까지만 좀 데려다 주쇼.”하며 기사가 모는 그의 차에 편승하여 사라졌다. ‘저분이 진짜 차비가 없어서 일까, 아니면 치매 때문일까.’ 나는 혼자서 걸어오면서, ‘인생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로구나.’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앞으로 10년, 15년 후에는 저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 시간이 별로 긴 세월이 아니라 생각하니,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는 건강 챙기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양희선의 <백세시대는 축복인가. 고통인가>다. 문화가 발달되고 경제가 윤택해진 요즘은, 문화시설이나 복지혜택이 많아 어르신들이 더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잘 먹고, 소일거리가 있어 건강하며, 아프면 좋은 약으로 치료하니 백세이상 오래 산다고 한다.
남편은 뜻밖의 낙상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환자와 보호자, 의사와 간호사, 종사자들, 침대에 누운 중환자, 휠체어에 앉은 환자가 서로 뒤엉켜 북적거리는 게 종합병원 현장이다.
고심 끝에 적절한 요양병원을 알아냈다. 보건복지부인증의료기관이자 국가유공자지정병원인 전주시노인복지병원이다. 종합병원에선 모든 일처리를 의무적으로 처리하는 것 같았고, 복지병원은 헌신적으로 따뜻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봉사정신 없이는 노쇠한 어른들을 애정으로 돌볼 수는 없지 않는가? 난생 처음 가본 요양병원에 내 가족을 맡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맘 놓고 오래 치유할 수 있는 복지병원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가 있어 아프기 마련이다. 백세시대는 축복인가, 고통인가 헷갈린다. 고통스럽게 누워서 오래 살면 사는 의미가 있을까? 백세시대는 건강한 삶을 살 때 축복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스스로 지켜야 할 일이다.
홍재석의 <치매 예방은 노년기 선택>이다. 이제 치매 예방은 청년기부터 규칙적으로 하루 3식을 꼭 챙겨 먹고 평생 혼자 즐기는 취미생활로 한 가지를 열심히 배워두라. 장년기에는 생활습관에서 오는 질병은 모두 초기에 치료해야 한다. 치매 예방은 노년기 선택이니 여생에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을 위해 삶의 방도가 되지 않을는지……
첫댓글 여러 장르의 수필을 읽으며 내가 쓰고있는 글의ᆢ 문제점이 뭔가 고민해 보았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 장르의 수필을 읽으며 차옥순 할머니의 장하신 인내와 정신을 본밭으라며 집안의 우환을 막기위하여 돌탑 3000 개를
쌓으시며 수양 하는 마음을 담아 집안의 안녕을 빌고 빌었을 겄이다 십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