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의 생활편의를 위해 발명한 인공지능의 통제 하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호모데우스 그 이후의 새로운 인류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아마도 그런 인류 중 일부는 오히려 퇴행적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인류사를 보면 늘 이분법적 계층 구조 속에서 발전해왔었다. 늘 지배하는 계층이 있고, 그 지배를 받은 다른 계층이 있었다. 그것은 사실 오늘날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층 구분이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에도 그때그때 이합집산의 모습을 보이기는 해도 생산수단을 장악한 집단이 있는가하면 그 생산수단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집단이 있다.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은 본래부터 그것이 자기에게 것인 양 공고하게 지배층을 형성하는가 하면 듣기 좋은 말로 권력을 위임한 자들은 그들의 지배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차이가 없다. 다만 염치의 정도 문제이지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구분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이러한 계층은 선거라는 장치로 진입이나 퇴출이 되는 구조가 아니므로 영속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계층 구분은 다소 낯익지 않은가? 고대 사회의 모습이 그랬고 우리나라의 양반 제도가 그러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는 언제 올까? 아니, 오기는 올까? 사실 이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출발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늘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을 가늠하지 못할 때 국가건 사회건 엄청난 재앙에 노출된 경우는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주는 경고에 대해서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일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재앙을 재앙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제1차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 사이에 일어났다. 그 동안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이래로 수억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제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가까이 보면 반세기이고 멀리보아도 2세기를 넘지 않는 기간이다. 기술의 발달 속도가 그만큼 빨라진 것이다. 그리고 제3차 산업혁명은 20세기 중엽부터 세기말에 이루어졌다.
아무리 넓게 잡아도 한 세기도 걸리지 않은 시기에 새로운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만큼 빨라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제4차 산업혁명의 징후가 농후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혁명이라는 말은 질적인 변화를 내포한다.
말하자면 인류 삶의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뀜을 의미한다. 제1차 산업혁명은 마차를 증기기관차로 대신함으로써 런던 시내를 뒤덮었던 말똥이 사라지게 했다. 거리는 깨끗해졌고 삶은 전보다 쾌적해졌다. 바다에서는 수많은 돛을 단 배를 대신해 증기선이 등장했다.
훨씬 많은 물건을 싣고 훨씬 멀리까지 가게 됨으로 국부를 획기적으로 늘리게 되었다. 수공업으로 힘겹게 옷감을 마련하던 삶이 방적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짐으로써 가격이 저렴해졌다.
어떻든 제1차 산업혁명 이래로 지금까지의 역사는 주로 기계가 인간의 영향력을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이는 인간의 삶의 편의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그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을 뛰어넘는 가공할 일들이 흔하게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 동안 인간의 구축해 놓은 도덕의 틀이 바뀌게 되며, 마침내 인간의 삶은 질적 변화를 보이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시기는 알게 모르게 이미 우리 주변 가까이 와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은 보다 극단적으로 분화되고 마침내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이 낯설어지게 된다. 지금도 주변을 돌아보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산다. 그 기기를 통해 세상을 접하고 특정한 몇몇과의 소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익명으로 위장된 개인들이 활개치고 이로 인해 세상은 점차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를 통제할 어떠한 방법이나 도구도 없다. 인공지능이 영역을 넓혀가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는 것이다. 노래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부터 사람들은 노랫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스마트폰이 생기고부터 사람들은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한다. 네비게이션 덕분에 지리적 사고가 흐려졌다. 앞으로 누구도 힘들게 암기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복잡한 수식을 계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빌딩을 짓는데 쓸데없는 노동력을 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농작물 재배에 인력을 들이려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점차 기억력을 상실해 가고, 보다 안락한 생활에 깊이 빠져들 것이다. 인간은 나태해지고 퇴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집단을 ‘일반’이라 하자. 그런데 실은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은 늘 새로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런 특정한 사람들이 ‘일반’과 다른 형태의 계층으로 등장할 것이다. 내친 김에 이를 ‘일반’에 견주어 ‘이반’이라고 하자. 마침내 인류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일반’과 인공지능을 제어하거나 인공지능과 적어도 공생할 능력을 갖춘 ‘이반’의 두 계층으로 서서히 분화해 가게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관찰해 보면 이러한 계층 구분은 국가 간에도 발생할 수 있다. 즉, 인공지능 기술이 앞선 나라와 뒤진 나라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는 제1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지배국과 식민지가 구분되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김태유 서울대명예교수는 “인류 역사의 첫 번째 대분기가 산업혁명이었다면, 이제 두 번째 대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강조하며 “바로 4차 지식의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도태된다면 또다시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걷게 됩니다”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는 ‘패권의 비밀’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18세기 이후 인류는 두 가지 유형의 국가로 확연히 갈렸는데 지배국과 식민지였으며 다른 유형은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간 계층 구조는 과거처럼 경제적 수탈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피지배 국가는 생산기지 역할을 할 것인 바, 여기서의 생산기지는 그 범위에는 피지배 국가의 모든 것이 망라된다. 결국 개인은 빅데이터라는 괴물에 의해 삶의 전반을 제어당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일찍이 이러한 사회를 내다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빅브라더’가 차츰 현실로 드러날 수 있다는 서늘한 생각이다. 처음 ‘1984년’이라는 소설이 주목을 받은 것은 공산주의 사회의 미래 모습이 그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이후 소련의 붕괴로 소설은 잊혀갔으나 지금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제 지배와 피지배 국가의 둘과 앞에서 본 ‘일반’과 ‘이반’의 개인을 결합해 보면 네 가지 영역으로 분화된다. 즉, 지배-일반, 지배-이반, 피지배-일반, 피지배-이반이 그것이다. 여기서 피지배-일반 영역에 해당하는 인류가 퇴행적 인류가 되며, 이 부류가 불행하고도 인류의 절대다수가 될 것임은 쉽게 짐작이 된다.
반면에 지배-이반 집단은 극소수가 될 것이며, 이 집단이 인류의 모든 삶을 규정하는 이제까지 인간이 상정한 어떠한 신보다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새로운 인간으로 등극할 것이다.
상상은 자유이며,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그 꿈이 어떤 형태이든 말이다. 어떻든 허황한 꿈을 꾸다보니 더위에 짜증만 더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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