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번화가를 밝히던 영란등(鈴蘭燈), 금속물 공출로 사라지다
파고다공원의 철대문과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책도 그 대열에 포함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 꾸며 꽃~파는 아가~~씨
이것은 가수 금사향(琴絲響; 1929~2018)의 빅히트곡인 「홍콩(香港) 아가씨」 노래의 첫 소절이다. 그렇다면 이 홍콩 아가씨가 파는 꽃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 노래의 뒷부분을 조금만 더 흥얼거리면 그 정답이 “영란꽃”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저절로 알 수 있다.
백합과(百合科)에 속하는 식물인 영란(鈴蘭, 스즈란)은 필시 그 꽃의 생김새가 글자 그대로 방울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테고, 그러한 탓인지 지금은 대개 ‘은방울꽃’으로 통용되고 있다. 『동아일보』 1933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꽃도 보고 약으로도 쓰는 약초에 대한 상식 몇 가지, 가정주부들의 유의할 일」 제하의 기사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에서 열린 ‘약용식물전시회(藥用植物展示會)’와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는 가운데 이 꽃의 특성과 별칭(別稱)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1) 비비추; 영란(鈴蘭), 군영초(群影草)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화초 좋아하는 이는 항용 ‘방울꽃’이라 하거나 혹은 일본말로 ‘스즈랑’이라면 더 잘 압니다. 이것은 북한산(北漢山)에 자연생이 많고 또 여학생의 책상 우에도 많습니다. 일반으로 이 꽃은 관상용(觀賞用)으로만 알지마는 달여 먹으면 지금 의학계에서 유일한 심장병 특효약으로 치는 ‘지기다리스’ 엽침제(葉浸劑)에 다음 가는 강심제(强心劑)입니다.
더구나 이 꽃은 일찍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의 교가(校歌)와 교표(校標)에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35년 2월 14일자에 실린 「[교문(校門)을 나서는 재원(才媛)을 찾아서, 중등편 (1)] 숙명여고보(淑明女高普), 단아하고 향내 좋은 색시꽃을 만들 때 처녀들의 앞길은 한없이 빛난다」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색시꽃’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 ‘숙명’이라고 하면 벌써 누구나 색시꽃(鈴蘭)을 연상하고 따라서 색시꽃 그대로 기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연 색시처럼 얌전하고 색시꽃처럼 머리만 숙이고 있는 것이 색시꽃의 특색은 아닙니다. 담박하고도 고결하고 숨어 있으면서 어디서 나는지 알지 못하는 향내를 내는 것이 색시꽃의 특징이오, 사람들이 사랑하는 점입니다. 교기(校旗)에도 색시꽃, 교가에도 색시꽃, 여러 학생을 색시꽃대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그 학교의 목적이랍니다.
그런데 식민지의 수도 경성, 그것도 불야성(不夜城)을 이룬 번화가의 밤을 밝히는 존재 역시 영란꽃이었다. 1924년에 일본 교토 테라마치(京都 寺町)의 거리에 처음 등장했다는 ‘영란꽃’ 모양의 가로등(街路燈)인 이른바 ‘영란등(鈴蘭燈, 스즈란토)’이 조선에도 건너와 여러 지방의 밤거리에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거리에는 이러한 영란등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자료를 뒤져보았더니, 『경성일보』 1928년 10월 9일자에 수록된 「본정 입구(本町 入口)에 스즈란등(スズラン燈, 어대전기념(御大典記念)으로 설치」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경성의 명물(名物) 혼부라(本ブラ)의 입구 본정(本町, 혼마치) 1정목, 정내(町內)에서는 어대례기념(御大禮記念)으로서 이 무렵부터 각헌별(各軒別) 10칸(間; 1칸=1.818미터) 간격으로 녹색(綠色)으로 칠한 미려(美麗)한 스스란 촉광등(スズラン 燭光燈)을 건설하여, 10일 시등(試燈)을 시도, 드디어 11일부터 일제히 등화(燈火)하여 명물인 혼부라에 일색채(一色彩)를 더하게 되었다. 혼부라당(本ブラ黨)에게는 비상(非常)한 기쁨으로 환영 받고 있는데, 누구라도 정내각호(町內各戶)는 20원(圓)씩 출자하고 보조(補助)는 정내조합비(町內組合費)로써 약 7천 원의 거비(巨費)를 던져 43본(本)을 세우는 것 외에 본정 입구(本町 入口) 시노사키문구점(篠崎文具店)과 우편국(郵便局)에 걸쳐 미장(美裝)한 아치(ア-チ)를 세우기로 되어 있으며 …… 스즈란등은 백촉광(百燭光) 1개(個) 외에 20촉광 4개를 점등(點燈)하는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 거듭하여 나오는 ‘혼부라’라는 말은 그 시절의 유행어이기도 했던 ‘긴부라(銀ブラ)’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어에 ‘부라부라(ぶらぶら)’는 “어슬렁어슬렁”하거나 “빈둥빈둥”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므로 ‘긴부라’는 곧 “일본의 최대 번화가인 ‘은좌통(銀座通り, 긴자도리)’를 쏘다니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인 셈이다. 이러한 표현에 빗대어 ‘경성의 혼마치 거리를 쏘다니는 것’을 ‘혼부라’라고 하며, 이런 행위를 즐겨하는 이들을 일컬어 바로 ‘혼부라당(本ブラ黨)’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대전’ 또는 ‘어대례’라는 표현은 이른바 ‘소화천황(昭和天皇)’의 즉위예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행사는 1928년 11월 10일에 거행되었다. 그러니까 혼마치 입구에 줄지어 등장한 스즈란등은 이 당시 천황의 즉위식을 기념하는 뜻에서 세워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에 더하여 ‘본정 2정목’ 쪽에도 추가로 스즈란등이 배치된 것이 1934년의 일이었는데, 『조선신문』 1934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영란등(鈴蘭燈)의 기념(記念)」 제하의 사진설명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본정 2정목 서부번영회(西部繁榮會)에서는 다년(多年)의 현안(懸案)이던 영란등이 준공되었으므로 1일부터 기념대매출(記念大賣出)을 개시하여 오후 5시부터 관계관민(關係官民)을 혼비루(本ビル; 빌딩) 누상(樓上)에 초대하여 성연(盛宴)을 베푼 것과 더불어 회원(會員)은 결속하여 ‘밝은 거리, 사기 좋은 가게’를 모토(モット-)로 득의양양하게 대봉사(大奉仕)를 하는 의기(意氣)가 넘친다고. (사진은 오늘)
그런데 이처럼 식민지 조선의 번화가를 화려하게 밝히던 영란등은 불과 15년에 세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 수명을 다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전시체제기의 끝자락을 향해가던 상황에서 부족해진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해 1941년 10월 1일 이후 이른바 ‘금속류 회수령(金屬類 回收令)’이 본격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3월 20일자에 수록된 「서울 밤의 풍물시(風物詩), 영란등(鈴蘭燈)도 응소(應召), 철회수(鐵回收)의 국책(國策)에 따라 금일(今日)부터 철수(撤收)」 제하의 기사에 이렇게 채록되어 있다.
서울의 거리에 황혼이 찾아오면 별빛보다도 더 찬란히 피어나서 저녁의 산책꾼들에게 그지없는 도회의 정서를 엮어 아름다운 풍물시(風物詩)를 읊어주던 ‘스스란(鈴蘭燈)’의 등불이 밀려드는 시국의 물결을 타고 영예의 응소가 되어 출정을 하게 되었는데 봄 가을 여름 겨울 사시장철 변함없이 이 거리의 사람들에게 정들어오던 ‘스스란’ 등이 하직을 하고 응소되어 가는 날은 오늘 20일부터 30일까지 사이에 일제히 그림자를 감추기로 된 것이다. 회수일과 장소는 다음과 같은데 회수되는 시각은 매일 오후 열 시부터여서 갈림의 눈동자인양 마지막 불빛을 돋운 채 사라지게 되었다.
경성전기회사에서는 이 ‘스스란’등을 철거해 가기 전에 전선(電線), 전구(電球)를 미리 설비하여 거리를 변함없이 불야의 성으로 밝게 하기로 되었는데 당분간은 ‘스스란’등을 떼어버린 후에라도 그대로 두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회수된 물건의 수량과 금액은 정연맹 이사장이 명확히 해두고 대금요 관계 책임자가 저축에 두었다가 장래에 설치할 때 시설비로서 충당케 하기로 되어 있다.
▴ 20일, 21일 본정(本町) 1정목(丁目), 본정 2정목, 본정 3정목, 본정 4정목, 본정 5정목.
▴ 22일, 23일 신정(新町), 태평통(太平通), 미생정(彌生町), 영락정(永樂町), 약초정(若草町).
▴ 24일 25일 남대문통(南大門通) 1정목, 남대문통 2정목, 남대문통 3정목, 남대문통 4정목, 남대문통 5정목.
▴ 26일 장곡천정(長谷川町), 소화통(昭和通), 고시정(古市町), 강기정(岡崎町), 한강통(漢江通) 1정목.
▴ 27일 황금정(黃金町) 1정목, 황금정 2정목, 황금정 3정목, 황금정 4정목, 황금정 5정목.
▴ 28일 황금정 6정목, 종로(鍾路) 1정목, 종로 2정목, 종로 3정목, 종로 4정목.
▴ 29일 종로 5정목, 종로 6정목, 명치정(明治町), 원정(元町) 1정목, 원정 2정목, 원정 3정목.
▴ 30일 한강통(漢江通) 2정목, 노량진(鷺梁津), 연병정(練兵町). 이밖에 ‘스스란’등 있는 곳.
이에 따라 각 가정에서는 “가정광산(家庭鑛山)을 파내자”라거나 “가정광맥(家庭鑛脈)을 발굴하자”라고 하여 유기(鍮器, 놋그릇)와 같은 생활도구는 물론이고 철제 광고판, 화로, 재떨이, 파손 농기구 따위의 쇠붙이를 포함한 각종 금속물을 공출(供出)하도록 독려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길거리와 공공장소에서는 동상(銅像)이라든가 우편통(郵便筒, 우체통)이 속속 사라지고, 전쟁무기를 만들 원재료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이 대열에 포함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행(朝鮮銀行)의 간판(看板), 철문(鐵門), 철책(鐵柵), 철쇄(鐵鎖) 등 20톤(噸)에 달하는 금속물이 수거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쇠창살이 먼저 떼어지고 건물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철책도 일괄 철거되어 그 자리는 석원(石垣, 돌담장)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밖에 대화정(大和町, 지금의 필동)에 자리한 정무총감관저(政務總監官邸)의 철대문도 금속물공출로 인해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3.1만세운동 당시에 독립의 함성과 만세군중의 행렬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탑골공원(塔洞公園, 파고다공원)의 철대문이 금속물회수의 제물이 되어 사라진 것 역시 이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매일신보』 1943년 2월 17일자에 수록된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 철산(鐵傘), 부(府)에서 헌납(獻納)하기로 결정(決定)」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흔적도 남아 있다. 여기에 나오는 ‘철산(쇠우산)’이라는 것은 경성운동장 야구장 관중석 중앙 스탠드의 덮개 지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호화스러운 의사당(議事堂) 천정의 ‘샨데리아’를 보고 우리 도죠 수장(東條 首相)은 “아직 여기도 회수할 동철제품이 상당히 있다……”고 하여 총후 1억 국민에게 더욱 분발할 깊은 감명을 준 바 있거니와 실로 우리 신변에는 미영격멸에 쓸 ‘무기’를 만들어내일 동철제품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총후 120만 부민에게 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경성부에서는 저 광대한 야구장(野球場)의 대철산(大鐵傘)부터 거두어 들이여 필승결전의 싸움터에 동원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반도 구계(球界)와 야구팬들에게 오랫동안 낯익은 이 철산은 소화 2년(1927년) 경전(京電)에서 특별기부하여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약 〇〇톤, 이걸 부셔놓으면 실로 산더미 같은 철이다. 부에서는 근근 기술자를 대이어 이걸 떼어가지고 관계당국에 정식으로 헌납수속을 취할 터인데 부 이찌기(市木) 사회과장은 철산의 응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 (하략)
그런데 이러한 금속물 공출 또는 헌납에 관한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다음의 몇 가지 신문기사에 드러낸 내용도 추가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앞의 것은 『경성일보』 1943년 4월 2일자에 수록된 「철비(鐵扉, 쇠문짝)를 탄환(彈丸)으로, 진유(眞鍮)도 마차(馬車)에 실어서」 제하의 기사이고, 뒤의 것은 『매일신보』 1944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예복(禮服)과 칼 두 자루 헌납(獻納)」 제하의 기사이다.
(1)
보성전문학교장(普成專門學校長) 김성수 씨(金性洙氏)는 16년 전부터 계동정(桂洞町)의 자택을 지키고 있던 철대문(120관) 3매(枚)를 탄환(彈丸)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키게 해달라고 1일 오후 해군무관부(海軍武官府)에 헌납(獻納), 더욱이 마차(馬車) 1대(台)의 진유(眞鍮), 동제(銅製)의 식기류(食器類)도 개인(個人)으로서 동시에 헌납했다.
(2)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朴重陽) 씨는 대동아전쟁 이래 솔선하여 집에서 가지고 있는 유기를 모조리 헌납하였는데 전국의 긴박을 절실히 느낀 씨는 마지막으로 씨가 한국(韓國) 시대 때 착용하였던 대관의례복과 놋단추와 진유로 장식을 한 칼 두 자루를 12일 해군무관부에 헌납하였다. (사진은 박중양 씨의 예복)
이들이 헌납한 금속물이 향한 곳은 모두 동일하게 ‘해군무관부(海軍武官府)’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은 병참기지로서 조선의 해안선 경비 또는 출사준비(出師準備), 해군사상의 보급, 해군을 위한 헌금(국방헌금, 비행기, 금속물 헌납 등)의 취급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던 군사조직이었다. 여기에 나오듯이 김성수와 박중양의 사례를 보면 일제의 식민지배체제를 지탱하는 힘이 비단 그들의 무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 이 글은 『민족사랑』 2023년 5월호에 게재하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각주 1) 가수 금사향은 평남 평양 태생이며, 본명이 최영필(崔英弼)이다.
각주 2) 이 노래는 손로원(孫露源, 1911~1973) 작사, 이재호(李在鎬, 1919~1960) 작곡으로 만들어졌으며, 1954년 가수 한복남(韓福南, 1919~1991)이 설립한 부산 소재 도미도레코드(Domido Gramophone)에서 취입 발매되었다. 본명이 이삼동(李三同)으로 경남 진주 출신인 작곡가 이재호는 일제패망기에 다수의 군국가요(軍國歌謠)를 지은 탓에 『친일인명사전』 (2009)에 그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각주 3) 『매일신보』 1927년 1월 27일자에 수록된 「교표(校標)와 교가(校歌) (1)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 은하옥로(銀河玉露) 같은 영란(鈴蘭)의 정혼(淨魂), 깨끗하거라, 향기러워라」 제하의 연재물에는 이 학교의 상징적(象徵的)인 존재로 교가와 교표에 등장하는 ‘영란꽃’에 대한 소개글이 잘 정리되어 있다.
각주 4) 일본천황의 즉위대례는 통상적으로 선대 천황의 사망 시점에서 몇 해의 간격을 두고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한 탓에 요시히토(嘉仁; 제123대 천황)의 경우 대정(大正) 연호의 개시일은 1912년 7월 30일이었지만 즉위예식은 3년이 지난 1915년 11월 10일에 거행되었다. 마찬가지로 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천황)의 경우에도 소화(昭和) 연호의 개시일은 1926년 12월 25일이었지만 즉위예식은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928년 11월 10일에, 그리고 아키히토(明仁; 제125대 천황)의 경우에도 역시 평성(平成) 연호의 개시일은 1989년 1월 7일이었지만 즉위예식은 해를 바꿔 1990년 11월 12일에 각각 진행되었다.
각주 5) 1941년 8월 29일에 공포된 칙령 제835호 「금속류 회수령(金屬類 回收令)」은 “철(鐵), 동(銅) 또는 황동(黃銅), 청동(靑銅), 기타 동합급(銅合金)을 주재료로 하는 물자”를 회수대상물건으로 삼았으며, 부칙(附則)에 따라 1941년 9월 1일부터(단, 조선, 대만, 화태 또는 남양군도에서는 10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하도록 했다.
각주 6) 이에 앞서 『매일신보』 1942년 3월 14일자에 수록된 「응소(應召) 받는 가로등(街路燈), 금속회수(金屬回收)에 전부 동원(全部 動員)」 제하의 기사에는 “12일 오전 9시 반부터 태평통 체신사업관에서 열린 국민총력 경성부연맹, 경기도금속회수사무소 주최로 열린 ‘가로등회수협의회’에서 관계 당국자가 회동하고 금속회수품 회수에 가로등도 단연 응소시키기로” 결정된 사실과 아울러 그 대체품으로 목재 또는 세멘트로 가로등을 만들어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각주 7) 조선총독부 신청사(경복궁)의 쇠창살 제거와 철책 철거 및 돌담장 복구와 관련한 자료로는 『매일신보』 1941년 4월 9일자에 수록된 「자취 감추는 철책(鐵柵), 불요불급(不要不急)의 철물(鐵物)은 전부회수(全部回收), 공원(公園) 은행전(銀行前)의 면모일변(面貌一變)」 제하의 기사와 보도사진; 『매일신보』 1942년 3월 12일자에 수록된 「출정(出征)하는 쇠창살, 총독부(總督府)의 철(鐵)창살 전부회수(全部回收)」 제하의 보도사진; 『매일신보』 1943년 2월 18일자에 수록된 「철책(鐵柵)을 석장(石墻)으로, 총독부(總督府)서 솔선시범(率先示範)」 제하의 기사; 『매일신보』 1943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총독부 철책응소(總督府 鐵柵應召), 말없이 환송(歡送)하는 청원(廳員)의 결의공고(決意鞏固)」 제하의 기사와 보도사진; 『경성일보』 1943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미영격멸(米英擊滅)에 자, 출정이다! 총독부의 철책취외(鐵柵取外) 공사 개시」 제하의 기사와 보도사진; 『조선(朝鮮)』 1943년 3월호 ‘권두화보’에 수록된 「총독부(總督府)의 철책(鐵柵)도 적격멸(敵擊滅)에 응소(應召)’ 제목의 보도사진; 『경성일보』 1943년 4월 18일자에 수록된 「장식도 소쇄(瀟洒)하게, 철책(鐵柵)에 대신하는 총독부(總督府)의 석원(石垣)」 제하의 기사와 보도사진 등이 있다.
각주 8) 이에 관해서는 『조선(朝鮮)』 1942년 3월호에 게재된 「오노 정무총감(大野 政務總監) 관저(官邸)의 문비(門扉) 응소(應召)」 제하의 박스기사가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그해 3월 19일 인부 5, 6인의 손으로 철대문이 떼어지고 그 자리에는 격자문양으로 만든 소나무 대문이 대신 세워졌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각주 9) 탑골공원의 철대문은 유휴자원의 회수를 실행한다는 명분으로 1941년 3월에 걸쳐 한 달간 실시된 ‘금속류특별회수기간’에 철거되어 사라졌다. 이에 관한 사진자료로는 『매신사진순보(每新寫眞旬報)』 제279호 (1941년 3월 11일 발행), 26쪽에 「철동제품(鐵銅製品)에 동원령(動員令)」 제하의 기사와 관련하여 ‘파고다공원의 문비(門扉) 취외(取外)’ 장면으로 소개된 것이 있고, 또한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펴낸 『전진하는 조선(前進する 朝鮮)』 (1942), 80쪽에 ‘철류회수(鐵類回收); 경성파고다공원의 철책 응소(鐵柵 應召)’라는 것도 남아 있다.
각주 10) 『매일신보』 1943년 4월 2일자에 수록된 「보전 김교장(普專 金校長)의 수범(垂範)」 제하의 기사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남아 있다.
각주 11) 해군무관부는 ‘진해요항부(鎭海要港部)’에 속한 ‘경성재근 해군무관부(京城在勤 海軍武官府)’라는 명칭으로 1940년 6월 15일에 정식으로 개설되었으며, 처음에는 남산 왜성대에 있던 종래의 해군사무소(남산정 3정목 32번지 옛 해군무관관사 자리)에 두었다가 1944년 2월 13일에 이르러 주식회사 본권번(株式會社 本券番)에서 헌납한 건물(욱정 2정목 78번지 옛 벨기에영사관 자리)로 이전하였다.
031001 ‘색시꽃’이라고도 했던 ‘영란화(鈴蘭花, 은방울꽃)’의 문양이 들어있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표이다. 왼쪽은 『매일신보』 1927년 1월 27일자에, 오른쪽은 『동아일보』 1938년 2월 5일자에 각각 소개되어 있는 것에서 옮겨 왔다.
031002 이른바 ‘소화천황’의 즉위식을 기념하기 위해 경성의 번화가 본정(本町, 혼마치) 입구에 처음으로 영란등(鈴蘭燈, 스스란토)이 설치된 때의 모습이 채록된 『경성일보』 1928년 10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031003 조감도(鳥瞰圖) 제작에 능숙한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郞, 1884~1955)가 그린 ‘경성의 사계’ 엽서세트에는 영란등(스즈란토)이 즐비하게 늘어선 ‘혼마치 입구의 야경(夜景)’이 포함되어 있다. 오른쪽 건물 2층에 ‘기원 2600년’의 표시가 있으므로, 이것이 1940년 당시의 모습이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031004 본정 2정목 쪽에도 영란등(스즈란토)이 추가로 설치된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 『경성일보』 1934년 8월 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031005 『매일신보』 1942년 3월 21일자에는 부족해진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이른바 ‘금속류 회수령’이 시행되면서 한때나마 불야성을 이룬 경성의 번화가를 장식한 영란등(스즈란토)이 일제히 철거되어 사라지는 모습이 채록되어 있다.
031006 『매일신보』 1943년 3월 6일자에는 경기도 도회의원 히라야마 마사오(平山正夫, 송성진의 창씨명)의 유기헌납 사실을 소개하면서 기사의 제목에 “파내자! 가정광맥(家庭鑛脈)”이라는 시국구호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031007 『매신사진순보』 제279호(1941년 3월 11일 발행)에 수록된 탑골공원(즉 파고다공원) 철대문의 철거 장면이다. 사진에 보이는 대문 돌기둥은 1969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동숭동)의 정문의 용도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서울사대부설초등학교의 정문(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8호, 2017년 2월 9일 지정)으로 바뀌어 그대로 남아 있다.
031008 『조선(朝鮮)』 1943년 3월호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청사(경복궁)의 철책 철거 장면이다. 금속물 회수로 인하여 철창이 뜯겨 나간 자리에는 ‘투시형(透視型)’ 돌담장이 대신 만들어졌고, 이 담장은 지난 2008년 광화문 복원공사가 진행될 당시까지도 잔존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031009 경성운동장 야구장(나중의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처음 일산(日傘, 스탠드 덮개지붕)이 들어설 당시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는 『동아일보』 1926년 12월 4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여기에 보이는 이 철제구조물은 1943년에 이르러 금속물 공출의 대상이 되어 여지없이 사라졌다.
031010 『조선(朝鮮)』 1943년 6월호에는 ‘해군특별지원병제’의 발표에 감격한 동원군중이 남산 왜성대 소재 ‘해군무관부’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이곳은 바로 전쟁무기로 전환되는 금속물 공출 또는 헌납품의 최종 수집 창구이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첫댓글 민족사랑 2023년 5월호가 정식으로 발행되었으므로 해당 호차의 이미지 파일로 대체하여 올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