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김남주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출생사망
1946년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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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어어,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즐겨 말하던 시인. 피 · 칼 · 학살 · 전사 · 비명 · 피투성이 · 죽창 · 대창 · 도살장 같은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내던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가 걸어간 길은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그 길은 반봉건 · 반외세에 맞서는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 이 끊임없는 싸움”의 길이며, “밥과 땅과 자유”를 되찾는 “유혈의 투쟁”의 길이다(「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저 먼 나라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사랑한 김남주는 감옥을 떠돌며 병마와 싸우다가 혁명과 투쟁의 시편들만 남기고 마흔여덟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뜬다.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낸 시인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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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다. 그는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이듬해에 자퇴해버린다. 그가 대입 검정 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그는 대학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선다. 1972년 그는 유신 헌법 선포에 맞서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반유신 투쟁 지하 신문 『함성』을 제작해 배포한다. 이어 1973년에는 『함성』의 맥을 잇는 『고발』을 제작하다가 체포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8개월 만에 풀려나지만 전남대에서 제적된다. 1974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습작을 하던 그는 같은 해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꽃이 보이지 않는다 / 피가 보이지 않는다 / 꽃은 어디에 있는가 / 피는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피가 잠자는가 /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 꽃이다 영혼이다 / 피다 육신이다 /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 꽃이여 영혼이여 / 피여 육신이여 //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 영혼을 던져 보았는가 /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 파도의 심연에서 /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 꽃이다 피다 / 육신이다 영혼이다 /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 그대는 / 새벽을 출발하여 / 폐허를 가로질러 / 황혼을 만나 보았는가 /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 무엇을 보았는가 /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 꽃을 닮고 있던가 / 피를 닮고 있던가 / 죽음을 닮고 있던가 / 그대는 /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 새벽을 기다려 보았는가 그때 / 동천(東天)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 서천(西天)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 죽어버린 별 / 죽으러 가는 별 / 죽음을 기다리는 별 /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 보았는가 // 그대는 겨울을 / 겨울답게 살아 보았는가 / 그대는 봄다운 /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 동토를 녹이던가 /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 봄의 중턱에서 /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 죽창을 깎고 있던가 // 아는가 그대는 /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 그대는 아는가 /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 꽃이여 피여 / 피여 꽃이여 / 꽃속에 피가 흐른다 / 핏속에 꽃이 보인다 / 꽃속에 육신이 보인다 /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그것이다!
김남주, 「잿더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1991)
「잿더미」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등단작 가운데 한 편이다. 김남주는 여기서 힘찬 리듬의 반복 속에서 꽃 · 보리 · 잡초 · 찔레꽃 · 곰팡이 · 누룩 등으로 표상된 작고 힘없는 온갖 것이 어떻게 “바위” 같고 “암실” 같은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뚫고 나아가는지 노래한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를. 이런 것이 저희를 짓밟고 억누르는 현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가시’이고 ‘죽창’이다. 아마도 김남주에게 그것은 시였을 것이다. 그의 시를 두고 김준태는 “혁명성 · 전투성 · 역동성 · 순결성”의 시라고 말하는데, 이런 점은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또렷하게 나타난다.
김남주가 다시 광주로 와서 사회 과학 서점 ‘카프카’를 연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서점 ‘카프카’는 김남주가 시대 정신과 민족 정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키운 사상의 요람이다. 그는 거기서 『창작과 비평』을 즐겨 보고, 프란츠 파농과 네루다의 책을 되풀이해 읽고,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호치민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한 제3세계 혁명가들이 걸어간 형극의 길을 되새긴다. 이후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차리기도 한 그는 1978년 서울로 올라와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그는 수배중에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번역해 내놓기도 한다.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9년에 들어 붙잡히고 만다. 이듬해인 1980년 그는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1992년 세 살 된 아들 토일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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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고약한 시대 험한 구설”을 만나 꽃다운 젊음이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시드는 바람에 마흔이 갓 넘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만다. 하루 한 시간의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깥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없던 그의 젊음은 전주교도소의 음습한 구석에서 잔혹하게 시들어간다. 군산 제일고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1982년 11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간 뒤 교도소에서 김남주와 함께 복역하다가 먼저 출감한 교사 시인 이광웅은 그가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읽기로 보냈다고 전한다. 이광웅은 김남주에게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네루다의 일어 번역 시집, 복사판 하이네의 정치 시집 등을 빌려 읽는다. 김남주는 제 육신의 삶을 가둔 감옥의 질곡을 꿋꿋하게 버텨내며 6개 국어를 익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나하고는 무연한 것이 / 창 너머 담 밖에 와 있나 보다 / 봄이, 자연이, 멀리에 가까이에 / 푸르고 푸른 나무들은 / 햇살 머금어 더욱 빛나고 / 하늘하늘 가지들은 바람이 일어 춤을 추겠지 / 그리고 산과 들에는 이름모를 새들 / 날 저물어 / 금빛 나래 접으며 황혼을 펼치겠지 부챗살처럼 /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의 날개, 나의 노래는 / 나의 햇살, 나의 바람, 나의 혼은 / 어디에 어디에 내가 있는가 / 황혼에 쓰러진 거목이 되어 버림받고 있는가 /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있는가 /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있는가 /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 대지의 별,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몸이 되어 / 증오의 벽을 허물고 있는가
김남주, 「봄」,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왜 “푸른 나무들” “햇살 머금어” 빛나는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할까. 왜 그는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될까. 김남주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작품 활동보다는 민중 문화 운동이나 농민 운동에 더 깊이 투신한다. 그러다가 1979년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인물로 구속되어 1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아홉 해나 감옥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다.
그가 문득 눈에 들어온 창밖의 봄에 하염없이 시선을 빼앗긴 것은 감옥살이의 시름겨움 탓만도, 바깥 세상에 대한 참을 길 없는 그리움 탓만도 아니다. 이런 하염없음은 생명 있는 것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 어떤 이데올로기의 환상이나 논리로도 막을 길 없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살아 움직이는 동물적 생명 의식의 꿈틀거림, 빼앗긴 삶의 기본 터전인 자연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원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유보 없이 베풀어져야 한다.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갑고 부드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자연의 혜택을 인위적으로 차단하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너무 비좁고, 쥐며느리, 지렁이 등 불결한 벌레들이 너무 많이 기어다녀 독서에까지 지장을 주는 관 속 같은 0. 75평 방”에 가두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뜨거운 아랫도리 억센 주먹의 이 팔팔한 나이에 / 형제여,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사슬 묶여 쇠사슬 벽 속에 갇혀 / 노래하고 목청껏 / 힘껏 일하고 / 내달려 전진하고 기다려 역습하고 /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 이 창창한 나이에 /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승리하고 패배하면서 / 빵과 자유와 피의 맛을 보아야 할 / 이 나이, 이 팔팔한 나이, 이 창창한 나이 / 서른다섯의 결정적인 순간에 / 긴 침묵으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형제여
김남주, 「형제여」, 『진혼가』(청사, 1984)
그는 때로 감옥 속에서 이처럼 거칠게 삶의 괴로움을 토해낸다.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 살아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 지하의 물이 되어 숨 죽여 흐르고 /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한다네 //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김남주, 「벗에게」, 『진혼가』(청사, 1984)
그러나 감옥에서도 자주, 잔인한 벽 속에 갇힌 육신은 비록 마른 꽃처럼 시들어갈지 모르나, 그의 정신은 이처럼 승리에 대한 바래지 않는 신념으로 빛난다. 시련을 참고 견뎌 아름다운 미래를 쟁취하려는 그의 불타는 의지, 새벽을 향한 양심의 외로운 투혼은 감동적이다. 그 잔인한 벽 속의 세계에 대해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곳에 처넣어 두면 소도 말도 개도 다 죽습니다. 닭도 오리도 죽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사람만은 살아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렇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불행의 시대, 압제의 시대, 분단의 시대, 신식민지적 예속의 시대, 우리의 삶을 노예적 굴종과 질곡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시대에 빼앗기고, 찢기고, 떠난 삶을 원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인간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바다에 제가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버린 시인은 그 신념을 부여잡은 채 소도, 말도, 개도, 닭도, 오리도 죽어 나갈 비참한 바닥, 극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의 시적 창조력은 고갈되지 않아, 오히려 더욱 첨예한 민족 해방, 민중 해방의 정서를 밑바탕에 깐 서정 시편들을 내놓는다. 집필 기구의 차입이 금지되어 있는 음침한 감옥의 부자유 속에서도 터져 나오는 시적 창조의 충동을 어쩌지 못해 버려진 빈 우유곽이나 은박지 등에 못으로 긁어나간 그의 시편들은 때로는 불덩이처럼 우리 가슴을 데일 듯이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못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수감 생활 당시 종이가 없어 은박지에 새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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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나온 첫 번째 시집 『진혼가』, 1987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그리고 1988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그 뜨거운,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 낳은 열매들이다. 김남주는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9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다. 때로 그의 시가 참을 수 없는 독설의 형태로 소시민적 일상성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헤집고, 안온한 우리 의식의 내벽을 긁어 피 흐르게 하는 것은, 그의 시적 근원의 참혹한 절실성 때문이 아닐까. 김남주는 “미군이 없으면 / 삼팔선이 터지나요 / 삼팔선이 터지면 /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못 다 쓴 시」) 같은 살벌한 반미시를 쓴다. 「못 다 쓴 시」는 민족적 당위인 분단의 극복을 말하는 작품인데, 여기에 함께 드러난 개인적 영달과 축재를 앞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가차없는 분노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1988년 12월 21일 9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전주교도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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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이념의 시적 표현이 지나치게 반생명 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이것은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동물적 삶의 원리를 조장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찬서리 /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옛마을을 지나며」)와 같이 빼어난 구절을 거느린 서정시는 한결 넉넉하게 삶과 자연을 아우르는 시인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강퍅한 마음들의 갈등과 충돌이 그칠 날이 없고, 약육 강식의 동물적 지배 원리가 횡행하는 타락한 시대에 가난한 생명을 위해 뭘 하나라도 남겨둘 줄 아는 삶의 지혜에 대한 환기는 뜻있는 일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는 네 번째 시집 『솔직히 말하자』(1989), 다섯 번째 시집 『사상의 거처』(1991), 여섯 번째 시집 『이 좋은 세상에』(1992)를 내놓는다. 1990년에는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을 펴내고, 1992년에는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를 잇달아 선보인다. 김남주는 1991년에 제9회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자로 결정되고, 1992년에 제6회 ‘단재상’ 문학 부문상을 받는다. 이어 1993년에 들어 제3회 ‘윤상원상’을 받은 그는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2월 13일 새벽에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1995년에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나오고, 1999년에도 시집 『옛마을을 지나며』가 나온다.
1992년에 나온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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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 침묵일까 / 관망일까 / 도피일까 / 밑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 // 무엇일까 / 박해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 짓눌린 삶으로부터 /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 잠든 마을을 깨우는 일 / 첫닭의 울음소리는 아닐까
김남주, 「시인이여」,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죽었지만 ‘살아’ 있다. 누구보다도 힘차게, 생생하게, 굽힐 줄 모르는 정신으로 그는 살아 있다. 암흑의 시대, 박해의 시대에 침묵과 관망과 도피를 넘어, 우리의 짓눌린 삶을 제대로 펴고, 우리를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깨우는, 첫닭의 울음 소리로 그는 살아 있다.
김남주가 생전에 쓰던 안경과 만년필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출생사망
1946년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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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어어,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즐겨 말하던 시인. 피 · 칼 · 학살 · 전사 · 비명 · 피투성이 · 죽창 · 대창 · 도살장 같은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내던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가 걸어간 길은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그 길은 반봉건 · 반외세에 맞서는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 이 끊임없는 싸움”의 길이며, “밥과 땅과 자유”를 되찾는 “유혈의 투쟁”의 길이다(「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저 먼 나라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사랑한 김남주는 감옥을 떠돌며 병마와 싸우다가 혁명과 투쟁의 시편들만 남기고 마흔여덟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뜬다.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낸 시인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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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다. 그는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이듬해에 자퇴해버린다. 그가 대입 검정 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그는 대학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선다. 1972년 그는 유신 헌법 선포에 맞서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반유신 투쟁 지하 신문 『함성』을 제작해 배포한다. 이어 1973년에는 『함성』의 맥을 잇는 『고발』을 제작하다가 체포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8개월 만에 풀려나지만 전남대에서 제적된다. 1974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습작을 하던 그는 같은 해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꽃이 보이지 않는다 / 피가 보이지 않는다 / 꽃은 어디에 있는가 / 피는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피가 잠자는가 /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 꽃이다 영혼이다 / 피다 육신이다 /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 꽃이여 영혼이여 / 피여 육신이여 //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 영혼을 던져 보았는가 /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 파도의 심연에서 /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 꽃이다 피다 / 육신이다 영혼이다 /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 그대는 / 새벽을 출발하여 / 폐허를 가로질러 / 황혼을 만나 보았는가 /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 무엇을 보았는가 /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 꽃을 닮고 있던가 / 피를 닮고 있던가 / 죽음을 닮고 있던가 / 그대는 /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 새벽을 기다려 보았는가 그때 / 동천(東天)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 서천(西天)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 죽어버린 별 / 죽으러 가는 별 / 죽음을 기다리는 별 /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 보았는가 // 그대는 겨울을 / 겨울답게 살아 보았는가 / 그대는 봄다운 /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 동토를 녹이던가 /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 봄의 중턱에서 /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 죽창을 깎고 있던가 // 아는가 그대는 /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 그대는 아는가 /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 꽃이여 피여 / 피여 꽃이여 / 꽃속에 피가 흐른다 / 핏속에 꽃이 보인다 / 꽃속에 육신이 보인다 /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그것이다!
김남주, 「잿더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1991)
「잿더미」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등단작 가운데 한 편이다. 김남주는 여기서 힘찬 리듬의 반복 속에서 꽃 · 보리 · 잡초 · 찔레꽃 · 곰팡이 · 누룩 등으로 표상된 작고 힘없는 온갖 것이 어떻게 “바위” 같고 “암실” 같은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뚫고 나아가는지 노래한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를. 이런 것이 저희를 짓밟고 억누르는 현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가시’이고 ‘죽창’이다. 아마도 김남주에게 그것은 시였을 것이다. 그의 시를 두고 김준태는 “혁명성 · 전투성 · 역동성 · 순결성”의 시라고 말하는데, 이런 점은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또렷하게 나타난다.
김남주가 다시 광주로 와서 사회 과학 서점 ‘카프카’를 연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서점 ‘카프카’는 김남주가 시대 정신과 민족 정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키운 사상의 요람이다. 그는 거기서 『창작과 비평』을 즐겨 보고, 프란츠 파농과 네루다의 책을 되풀이해 읽고,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호치민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한 제3세계 혁명가들이 걸어간 형극의 길을 되새긴다. 이후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차리기도 한 그는 1978년 서울로 올라와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그는 수배중에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번역해 내놓기도 한다.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9년에 들어 붙잡히고 만다. 이듬해인 1980년 그는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1992년 세 살 된 아들 토일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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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고약한 시대 험한 구설”을 만나 꽃다운 젊음이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시드는 바람에 마흔이 갓 넘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만다. 하루 한 시간의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깥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없던 그의 젊음은 전주교도소의 음습한 구석에서 잔혹하게 시들어간다. 군산 제일고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1982년 11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간 뒤 교도소에서 김남주와 함께 복역하다가 먼저 출감한 교사 시인 이광웅은 그가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읽기로 보냈다고 전한다. 이광웅은 김남주에게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네루다의 일어 번역 시집, 복사판 하이네의 정치 시집 등을 빌려 읽는다. 김남주는 제 육신의 삶을 가둔 감옥의 질곡을 꿋꿋하게 버텨내며 6개 국어를 익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나하고는 무연한 것이 / 창 너머 담 밖에 와 있나 보다 / 봄이, 자연이, 멀리에 가까이에 / 푸르고 푸른 나무들은 / 햇살 머금어 더욱 빛나고 / 하늘하늘 가지들은 바람이 일어 춤을 추겠지 / 그리고 산과 들에는 이름모를 새들 / 날 저물어 / 금빛 나래 접으며 황혼을 펼치겠지 부챗살처럼 /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의 날개, 나의 노래는 / 나의 햇살, 나의 바람, 나의 혼은 / 어디에 어디에 내가 있는가 / 황혼에 쓰러진 거목이 되어 버림받고 있는가 /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있는가 /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있는가 /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 대지의 별,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몸이 되어 / 증오의 벽을 허물고 있는가
김남주, 「봄」,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왜 “푸른 나무들” “햇살 머금어” 빛나는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할까. 왜 그는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될까. 김남주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작품 활동보다는 민중 문화 운동이나 농민 운동에 더 깊이 투신한다. 그러다가 1979년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인물로 구속되어 1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아홉 해나 감옥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다.
그가 문득 눈에 들어온 창밖의 봄에 하염없이 시선을 빼앗긴 것은 감옥살이의 시름겨움 탓만도, 바깥 세상에 대한 참을 길 없는 그리움 탓만도 아니다. 이런 하염없음은 생명 있는 것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 어떤 이데올로기의 환상이나 논리로도 막을 길 없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살아 움직이는 동물적 생명 의식의 꿈틀거림, 빼앗긴 삶의 기본 터전인 자연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원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유보 없이 베풀어져야 한다.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갑고 부드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자연의 혜택을 인위적으로 차단하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너무 비좁고, 쥐며느리, 지렁이 등 불결한 벌레들이 너무 많이 기어다녀 독서에까지 지장을 주는 관 속 같은 0. 75평 방”에 가두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뜨거운 아랫도리 억센 주먹의 이 팔팔한 나이에 / 형제여,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사슬 묶여 쇠사슬 벽 속에 갇혀 / 노래하고 목청껏 / 힘껏 일하고 / 내달려 전진하고 기다려 역습하고 /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 이 창창한 나이에 /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승리하고 패배하면서 / 빵과 자유와 피의 맛을 보아야 할 / 이 나이, 이 팔팔한 나이, 이 창창한 나이 / 서른다섯의 결정적인 순간에 / 긴 침묵으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형제여
김남주, 「형제여」, 『진혼가』(청사, 1984)
그는 때로 감옥 속에서 이처럼 거칠게 삶의 괴로움을 토해낸다.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 살아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 지하의 물이 되어 숨 죽여 흐르고 /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한다네 //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김남주, 「벗에게」, 『진혼가』(청사, 1984)
그러나 감옥에서도 자주, 잔인한 벽 속에 갇힌 육신은 비록 마른 꽃처럼 시들어갈지 모르나, 그의 정신은 이처럼 승리에 대한 바래지 않는 신념으로 빛난다. 시련을 참고 견뎌 아름다운 미래를 쟁취하려는 그의 불타는 의지, 새벽을 향한 양심의 외로운 투혼은 감동적이다. 그 잔인한 벽 속의 세계에 대해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곳에 처넣어 두면 소도 말도 개도 다 죽습니다. 닭도 오리도 죽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사람만은 살아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렇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불행의 시대, 압제의 시대, 분단의 시대, 신식민지적 예속의 시대, 우리의 삶을 노예적 굴종과 질곡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시대에 빼앗기고, 찢기고, 떠난 삶을 원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인간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바다에 제가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버린 시인은 그 신념을 부여잡은 채 소도, 말도, 개도, 닭도, 오리도 죽어 나갈 비참한 바닥, 극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의 시적 창조력은 고갈되지 않아, 오히려 더욱 첨예한 민족 해방, 민중 해방의 정서를 밑바탕에 깐 서정 시편들을 내놓는다. 집필 기구의 차입이 금지되어 있는 음침한 감옥의 부자유 속에서도 터져 나오는 시적 창조의 충동을 어쩌지 못해 버려진 빈 우유곽이나 은박지 등에 못으로 긁어나간 그의 시편들은 때로는 불덩이처럼 우리 가슴을 데일 듯이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못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수감 생활 당시 종이가 없어 은박지에 새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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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나온 첫 번째 시집 『진혼가』, 1987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그리고 1988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그 뜨거운,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 낳은 열매들이다. 김남주는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9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다. 때로 그의 시가 참을 수 없는 독설의 형태로 소시민적 일상성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헤집고, 안온한 우리 의식의 내벽을 긁어 피 흐르게 하는 것은, 그의 시적 근원의 참혹한 절실성 때문이 아닐까. 김남주는 “미군이 없으면 / 삼팔선이 터지나요 / 삼팔선이 터지면 /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못 다 쓴 시」) 같은 살벌한 반미시를 쓴다. 「못 다 쓴 시」는 민족적 당위인 분단의 극복을 말하는 작품인데, 여기에 함께 드러난 개인적 영달과 축재를 앞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가차없는 분노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1988년 12월 21일 9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전주교도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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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이념의 시적 표현이 지나치게 반생명 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이것은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동물적 삶의 원리를 조장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찬서리 /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옛마을을 지나며」)와 같이 빼어난 구절을 거느린 서정시는 한결 넉넉하게 삶과 자연을 아우르는 시인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강퍅한 마음들의 갈등과 충돌이 그칠 날이 없고, 약육 강식의 동물적 지배 원리가 횡행하는 타락한 시대에 가난한 생명을 위해 뭘 하나라도 남겨둘 줄 아는 삶의 지혜에 대한 환기는 뜻있는 일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는 네 번째 시집 『솔직히 말하자』(1989), 다섯 번째 시집 『사상의 거처』(1991), 여섯 번째 시집 『이 좋은 세상에』(1992)를 내놓는다. 1990년에는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을 펴내고, 1992년에는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를 잇달아 선보인다. 김남주는 1991년에 제9회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자로 결정되고, 1992년에 제6회 ‘단재상’ 문학 부문상을 받는다. 이어 1993년에 들어 제3회 ‘윤상원상’을 받은 그는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2월 13일 새벽에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1995년에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나오고, 1999년에도 시집 『옛마을을 지나며』가 나온다.
1992년에 나온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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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 침묵일까 / 관망일까 / 도피일까 / 밑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 // 무엇일까 / 박해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 짓눌린 삶으로부터 /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 잠든 마을을 깨우는 일 / 첫닭의 울음소리는 아닐까
김남주, 「시인이여」,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죽었지만 ‘살아’ 있다. 누구보다도 힘차게, 생생하게, 굽힐 줄 모르는 정신으로 그는 살아 있다. 암흑의 시대, 박해의 시대에 침묵과 관망과 도피를 넘어, 우리의 짓눌린 삶을 제대로 펴고, 우리를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깨우는, 첫닭의 울음 소리로 그는 살아 있다.
김남주가 생전에 쓰던 안경과 만년필
출생사망
1946년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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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어어,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즐겨 말하던 시인. 피 · 칼 · 학살 · 전사 · 비명 · 피투성이 · 죽창 · 대창 · 도살장 같은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내던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가 걸어간 길은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그 길은 반봉건 · 반외세에 맞서는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 이 끊임없는 싸움”의 길이며, “밥과 땅과 자유”를 되찾는 “유혈의 투쟁”의 길이다(「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저 먼 나라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사랑한 김남주는 감옥을 떠돌며 병마와 싸우다가 혁명과 투쟁의 시편들만 남기고 마흔여덟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뜬다.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낸 시인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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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다. 그는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이듬해에 자퇴해버린다. 그가 대입 검정 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그는 대학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선다. 1972년 그는 유신 헌법 선포에 맞서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반유신 투쟁 지하 신문 『함성』을 제작해 배포한다. 이어 1973년에는 『함성』의 맥을 잇는 『고발』을 제작하다가 체포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8개월 만에 풀려나지만 전남대에서 제적된다. 1974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습작을 하던 그는 같은 해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꽃이 보이지 않는다 / 피가 보이지 않는다 / 꽃은 어디에 있는가 / 피는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피가 잠자는가 /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 꽃이다 영혼이다 / 피다 육신이다 /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 꽃이여 영혼이여 / 피여 육신이여 //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 영혼을 던져 보았는가 /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 파도의 심연에서 /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 꽃이다 피다 / 육신이다 영혼이다 /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 그대는 / 새벽을 출발하여 / 폐허를 가로질러 / 황혼을 만나 보았는가 /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 무엇을 보았는가 /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 꽃을 닮고 있던가 / 피를 닮고 있던가 / 죽음을 닮고 있던가 / 그대는 /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 새벽을 기다려 보았는가 그때 / 동천(東天)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 서천(西天)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 죽어버린 별 / 죽으러 가는 별 / 죽음을 기다리는 별 /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 보았는가 // 그대는 겨울을 / 겨울답게 살아 보았는가 / 그대는 봄다운 /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 동토를 녹이던가 /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 봄의 중턱에서 /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 죽창을 깎고 있던가 // 아는가 그대는 /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 그대는 아는가 /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 꽃이여 피여 / 피여 꽃이여 / 꽃속에 피가 흐른다 / 핏속에 꽃이 보인다 / 꽃속에 육신이 보인다 /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그것이다!
김남주, 「잿더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1991)
「잿더미」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등단작 가운데 한 편이다. 김남주는 여기서 힘찬 리듬의 반복 속에서 꽃 · 보리 · 잡초 · 찔레꽃 · 곰팡이 · 누룩 등으로 표상된 작고 힘없는 온갖 것이 어떻게 “바위” 같고 “암실” 같은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뚫고 나아가는지 노래한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를. 이런 것이 저희를 짓밟고 억누르는 현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가시’이고 ‘죽창’이다. 아마도 김남주에게 그것은 시였을 것이다. 그의 시를 두고 김준태는 “혁명성 · 전투성 · 역동성 · 순결성”의 시라고 말하는데, 이런 점은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또렷하게 나타난다.
김남주가 다시 광주로 와서 사회 과학 서점 ‘카프카’를 연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서점 ‘카프카’는 김남주가 시대 정신과 민족 정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키운 사상의 요람이다. 그는 거기서 『창작과 비평』을 즐겨 보고, 프란츠 파농과 네루다의 책을 되풀이해 읽고,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호치민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한 제3세계 혁명가들이 걸어간 형극의 길을 되새긴다. 이후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차리기도 한 그는 1978년 서울로 올라와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그는 수배중에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번역해 내놓기도 한다.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9년에 들어 붙잡히고 만다. 이듬해인 1980년 그는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1992년 세 살 된 아들 토일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김남주는 “고약한 시대 험한 구설”을 만나 꽃다운 젊음이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시드는 바람에 마흔이 갓 넘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만다. 하루 한 시간의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깥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없던 그의 젊음은 전주교도소의 음습한 구석에서 잔혹하게 시들어간다. 군산 제일고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1982년 11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간 뒤 교도소에서 김남주와 함께 복역하다가 먼저 출감한 교사 시인 이광웅은 그가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읽기로 보냈다고 전한다. 이광웅은 김남주에게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네루다의 일어 번역 시집, 복사판 하이네의 정치 시집 등을 빌려 읽는다. 김남주는 제 육신의 삶을 가둔 감옥의 질곡을 꿋꿋하게 버텨내며 6개 국어를 익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나하고는 무연한 것이 / 창 너머 담 밖에 와 있나 보다 / 봄이, 자연이, 멀리에 가까이에 / 푸르고 푸른 나무들은 / 햇살 머금어 더욱 빛나고 / 하늘하늘 가지들은 바람이 일어 춤을 추겠지 / 그리고 산과 들에는 이름모를 새들 / 날 저물어 / 금빛 나래 접으며 황혼을 펼치겠지 부챗살처럼 /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의 날개, 나의 노래는 / 나의 햇살, 나의 바람, 나의 혼은 / 어디에 어디에 내가 있는가 / 황혼에 쓰러진 거목이 되어 버림받고 있는가 /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있는가 /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있는가 /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 대지의 별,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몸이 되어 / 증오의 벽을 허물고 있는가
김남주, 「봄」,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왜 “푸른 나무들” “햇살 머금어” 빛나는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할까. 왜 그는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될까. 김남주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작품 활동보다는 민중 문화 운동이나 농민 운동에 더 깊이 투신한다. 그러다가 1979년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인물로 구속되어 1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아홉 해나 감옥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다.
그가 문득 눈에 들어온 창밖의 봄에 하염없이 시선을 빼앗긴 것은 감옥살이의 시름겨움 탓만도, 바깥 세상에 대한 참을 길 없는 그리움 탓만도 아니다. 이런 하염없음은 생명 있는 것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 어떤 이데올로기의 환상이나 논리로도 막을 길 없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살아 움직이는 동물적 생명 의식의 꿈틀거림, 빼앗긴 삶의 기본 터전인 자연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원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유보 없이 베풀어져야 한다.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갑고 부드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자연의 혜택을 인위적으로 차단하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너무 비좁고, 쥐며느리, 지렁이 등 불결한 벌레들이 너무 많이 기어다녀 독서에까지 지장을 주는 관 속 같은 0. 75평 방”에 가두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뜨거운 아랫도리 억센 주먹의 이 팔팔한 나이에 / 형제여,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사슬 묶여 쇠사슬 벽 속에 갇혀 / 노래하고 목청껏 / 힘껏 일하고 / 내달려 전진하고 기다려 역습하고 /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 이 창창한 나이에 /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승리하고 패배하면서 / 빵과 자유와 피의 맛을 보아야 할 / 이 나이, 이 팔팔한 나이, 이 창창한 나이 / 서른다섯의 결정적인 순간에 / 긴 침묵으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형제여
김남주, 「형제여」, 『진혼가』(청사, 1984)
그는 때로 감옥 속에서 이처럼 거칠게 삶의 괴로움을 토해낸다.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 살아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 지하의 물이 되어 숨 죽여 흐르고 /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한다네 //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김남주, 「벗에게」, 『진혼가』(청사, 1984)
그러나 감옥에서도 자주, 잔인한 벽 속에 갇힌 육신은 비록 마른 꽃처럼 시들어갈지 모르나, 그의 정신은 이처럼 승리에 대한 바래지 않는 신념으로 빛난다. 시련을 참고 견뎌 아름다운 미래를 쟁취하려는 그의 불타는 의지, 새벽을 향한 양심의 외로운 투혼은 감동적이다. 그 잔인한 벽 속의 세계에 대해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곳에 처넣어 두면 소도 말도 개도 다 죽습니다. 닭도 오리도 죽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사람만은 살아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렇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불행의 시대, 압제의 시대, 분단의 시대, 신식민지적 예속의 시대, 우리의 삶을 노예적 굴종과 질곡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시대에 빼앗기고, 찢기고, 떠난 삶을 원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인간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바다에 제가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버린 시인은 그 신념을 부여잡은 채 소도, 말도, 개도, 닭도, 오리도 죽어 나갈 비참한 바닥, 극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의 시적 창조력은 고갈되지 않아, 오히려 더욱 첨예한 민족 해방, 민중 해방의 정서를 밑바탕에 깐 서정 시편들을 내놓는다. 집필 기구의 차입이 금지되어 있는 음침한 감옥의 부자유 속에서도 터져 나오는 시적 창조의 충동을 어쩌지 못해 버려진 빈 우유곽이나 은박지 등에 못으로 긁어나간 그의 시편들은 때로는 불덩이처럼 우리 가슴을 데일 듯이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못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수감 생활 당시 종이가 없어 은박지에 새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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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나온 첫 번째 시집 『진혼가』, 1987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그리고 1988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그 뜨거운,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 낳은 열매들이다. 김남주는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9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다. 때로 그의 시가 참을 수 없는 독설의 형태로 소시민적 일상성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헤집고, 안온한 우리 의식의 내벽을 긁어 피 흐르게 하는 것은, 그의 시적 근원의 참혹한 절실성 때문이 아닐까. 김남주는 “미군이 없으면 / 삼팔선이 터지나요 / 삼팔선이 터지면 /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못 다 쓴 시」) 같은 살벌한 반미시를 쓴다. 「못 다 쓴 시」는 민족적 당위인 분단의 극복을 말하는 작품인데, 여기에 함께 드러난 개인적 영달과 축재를 앞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가차없는 분노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1988년 12월 21일 9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전주교도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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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이념의 시적 표현이 지나치게 반생명 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이것은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동물적 삶의 원리를 조장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찬서리 /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옛마을을 지나며」)와 같이 빼어난 구절을 거느린 서정시는 한결 넉넉하게 삶과 자연을 아우르는 시인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강퍅한 마음들의 갈등과 충돌이 그칠 날이 없고, 약육 강식의 동물적 지배 원리가 횡행하는 타락한 시대에 가난한 생명을 위해 뭘 하나라도 남겨둘 줄 아는 삶의 지혜에 대한 환기는 뜻있는 일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는 네 번째 시집 『솔직히 말하자』(1989), 다섯 번째 시집 『사상의 거처』(1991), 여섯 번째 시집 『이 좋은 세상에』(1992)를 내놓는다. 1990년에는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을 펴내고, 1992년에는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를 잇달아 선보인다. 김남주는 1991년에 제9회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자로 결정되고, 1992년에 제6회 ‘단재상’ 문학 부문상을 받는다. 이어 1993년에 들어 제3회 ‘윤상원상’을 받은 그는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2월 13일 새벽에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1995년에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나오고, 1999년에도 시집 『옛마을을 지나며』가 나온다.
1992년에 나온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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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 침묵일까 / 관망일까 / 도피일까 / 밑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 // 무엇일까 / 박해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 짓눌린 삶으로부터 /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 잠든 마을을 깨우는 일 / 첫닭의 울음소리는 아닐까
김남주, 「시인이여」,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죽었지만 ‘살아’ 있다. 누구보다도 힘차게, 생생하게, 굽힐 줄 모르는 정신으로 그는 살아 있다. 암흑의 시대, 박해의 시대에 침묵과 관망과 도피를 넘어, 우리의 짓눌린 삶을 제대로 펴고, 우리를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깨우는, 첫닭의 울음 소리로 그는 살아 있다.
김남주가 생전에 쓰던 안경과 만년필
출생사망
1946년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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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어어,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즐겨 말하던 시인. 피 · 칼 · 학살 · 전사 · 비명 · 피투성이 · 죽창 · 대창 · 도살장 같은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내던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가 걸어간 길은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그 길은 반봉건 · 반외세에 맞서는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 이 끊임없는 싸움”의 길이며, “밥과 땅과 자유”를 되찾는 “유혈의 투쟁”의 길이다(「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저 먼 나라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사랑한 김남주는 감옥을 떠돌며 병마와 싸우다가 혁명과 투쟁의 시편들만 남기고 마흔여덟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뜬다.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낸 시인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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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다. 그는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이듬해에 자퇴해버린다. 그가 대입 검정 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그는 대학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선다. 1972년 그는 유신 헌법 선포에 맞서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반유신 투쟁 지하 신문 『함성』을 제작해 배포한다. 이어 1973년에는 『함성』의 맥을 잇는 『고발』을 제작하다가 체포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8개월 만에 풀려나지만 전남대에서 제적된다. 1974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습작을 하던 그는 같은 해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꽃이 보이지 않는다 / 피가 보이지 않는다 / 꽃은 어디에 있는가 / 피는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피가 잠자는가 /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 꽃이다 영혼이다 / 피다 육신이다 /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 꽃이여 영혼이여 / 피여 육신이여 //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 영혼을 던져 보았는가 /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 파도의 심연에서 /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 꽃이다 피다 / 육신이다 영혼이다 /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 그대는 / 새벽을 출발하여 / 폐허를 가로질러 / 황혼을 만나 보았는가 /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 무엇을 보았는가 /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 꽃을 닮고 있던가 / 피를 닮고 있던가 / 죽음을 닮고 있던가 / 그대는 /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 새벽을 기다려 보았는가 그때 / 동천(東天)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 서천(西天)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 죽어버린 별 / 죽으러 가는 별 / 죽음을 기다리는 별 /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 보았는가 // 그대는 겨울을 / 겨울답게 살아 보았는가 / 그대는 봄다운 /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 동토를 녹이던가 /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 봄의 중턱에서 /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 죽창을 깎고 있던가 // 아는가 그대는 /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 그대는 아는가 /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 꽃이여 피여 / 피여 꽃이여 / 꽃속에 피가 흐른다 / 핏속에 꽃이 보인다 / 꽃속에 육신이 보인다 /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그것이다!
김남주, 「잿더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1991)
「잿더미」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등단작 가운데 한 편이다. 김남주는 여기서 힘찬 리듬의 반복 속에서 꽃 · 보리 · 잡초 · 찔레꽃 · 곰팡이 · 누룩 등으로 표상된 작고 힘없는 온갖 것이 어떻게 “바위” 같고 “암실” 같은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뚫고 나아가는지 노래한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를. 이런 것이 저희를 짓밟고 억누르는 현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가시’이고 ‘죽창’이다. 아마도 김남주에게 그것은 시였을 것이다. 그의 시를 두고 김준태는 “혁명성 · 전투성 · 역동성 · 순결성”의 시라고 말하는데, 이런 점은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또렷하게 나타난다.
김남주가 다시 광주로 와서 사회 과학 서점 ‘카프카’를 연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서점 ‘카프카’는 김남주가 시대 정신과 민족 정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키운 사상의 요람이다. 그는 거기서 『창작과 비평』을 즐겨 보고, 프란츠 파농과 네루다의 책을 되풀이해 읽고,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호치민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한 제3세계 혁명가들이 걸어간 형극의 길을 되새긴다. 이후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차리기도 한 그는 1978년 서울로 올라와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그는 수배중에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번역해 내놓기도 한다.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9년에 들어 붙잡히고 만다. 이듬해인 1980년 그는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1992년 세 살 된 아들 토일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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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고약한 시대 험한 구설”을 만나 꽃다운 젊음이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시드는 바람에 마흔이 갓 넘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만다. 하루 한 시간의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깥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없던 그의 젊음은 전주교도소의 음습한 구석에서 잔혹하게 시들어간다. 군산 제일고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1982년 11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간 뒤 교도소에서 김남주와 함께 복역하다가 먼저 출감한 교사 시인 이광웅은 그가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읽기로 보냈다고 전한다. 이광웅은 김남주에게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네루다의 일어 번역 시집, 복사판 하이네의 정치 시집 등을 빌려 읽는다. 김남주는 제 육신의 삶을 가둔 감옥의 질곡을 꿋꿋하게 버텨내며 6개 국어를 익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나하고는 무연한 것이 / 창 너머 담 밖에 와 있나 보다 / 봄이, 자연이, 멀리에 가까이에 / 푸르고 푸른 나무들은 / 햇살 머금어 더욱 빛나고 / 하늘하늘 가지들은 바람이 일어 춤을 추겠지 / 그리고 산과 들에는 이름모를 새들 / 날 저물어 / 금빛 나래 접으며 황혼을 펼치겠지 부챗살처럼 /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의 날개, 나의 노래는 / 나의 햇살, 나의 바람, 나의 혼은 / 어디에 어디에 내가 있는가 / 황혼에 쓰러진 거목이 되어 버림받고 있는가 /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있는가 /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있는가 /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 대지의 별,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몸이 되어 / 증오의 벽을 허물고 있는가
김남주, 「봄」,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왜 “푸른 나무들” “햇살 머금어” 빛나는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할까. 왜 그는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될까. 김남주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작품 활동보다는 민중 문화 운동이나 농민 운동에 더 깊이 투신한다. 그러다가 1979년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인물로 구속되어 1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아홉 해나 감옥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다.
그가 문득 눈에 들어온 창밖의 봄에 하염없이 시선을 빼앗긴 것은 감옥살이의 시름겨움 탓만도, 바깥 세상에 대한 참을 길 없는 그리움 탓만도 아니다. 이런 하염없음은 생명 있는 것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 어떤 이데올로기의 환상이나 논리로도 막을 길 없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살아 움직이는 동물적 생명 의식의 꿈틀거림, 빼앗긴 삶의 기본 터전인 자연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원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유보 없이 베풀어져야 한다.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갑고 부드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자연의 혜택을 인위적으로 차단하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너무 비좁고, 쥐며느리, 지렁이 등 불결한 벌레들이 너무 많이 기어다녀 독서에까지 지장을 주는 관 속 같은 0. 75평 방”에 가두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뜨거운 아랫도리 억센 주먹의 이 팔팔한 나이에 / 형제여,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사슬 묶여 쇠사슬 벽 속에 갇혀 / 노래하고 목청껏 / 힘껏 일하고 / 내달려 전진하고 기다려 역습하고 /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 이 창창한 나이에 /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승리하고 패배하면서 / 빵과 자유와 피의 맛을 보아야 할 / 이 나이, 이 팔팔한 나이, 이 창창한 나이 / 서른다섯의 결정적인 순간에 / 긴 침묵으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형제여
김남주, 「형제여」, 『진혼가』(청사, 1984)
그는 때로 감옥 속에서 이처럼 거칠게 삶의 괴로움을 토해낸다.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 살아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 지하의 물이 되어 숨 죽여 흐르고 /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한다네 //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김남주, 「벗에게」, 『진혼가』(청사, 1984)
그러나 감옥에서도 자주, 잔인한 벽 속에 갇힌 육신은 비록 마른 꽃처럼 시들어갈지 모르나, 그의 정신은 이처럼 승리에 대한 바래지 않는 신념으로 빛난다. 시련을 참고 견뎌 아름다운 미래를 쟁취하려는 그의 불타는 의지, 새벽을 향한 양심의 외로운 투혼은 감동적이다. 그 잔인한 벽 속의 세계에 대해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곳에 처넣어 두면 소도 말도 개도 다 죽습니다. 닭도 오리도 죽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사람만은 살아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렇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불행의 시대, 압제의 시대, 분단의 시대, 신식민지적 예속의 시대, 우리의 삶을 노예적 굴종과 질곡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시대에 빼앗기고, 찢기고, 떠난 삶을 원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인간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바다에 제가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버린 시인은 그 신념을 부여잡은 채 소도, 말도, 개도, 닭도, 오리도 죽어 나갈 비참한 바닥, 극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의 시적 창조력은 고갈되지 않아, 오히려 더욱 첨예한 민족 해방, 민중 해방의 정서를 밑바탕에 깐 서정 시편들을 내놓는다. 집필 기구의 차입이 금지되어 있는 음침한 감옥의 부자유 속에서도 터져 나오는 시적 창조의 충동을 어쩌지 못해 버려진 빈 우유곽이나 은박지 등에 못으로 긁어나간 그의 시편들은 때로는 불덩이처럼 우리 가슴을 데일 듯이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못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수감 생활 당시 종이가 없어 은박지에 새긴 시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84년에 나온 첫 번째 시집 『진혼가』, 1987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그리고 1988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그 뜨거운,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 낳은 열매들이다. 김남주는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9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다. 때로 그의 시가 참을 수 없는 독설의 형태로 소시민적 일상성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헤집고, 안온한 우리 의식의 내벽을 긁어 피 흐르게 하는 것은, 그의 시적 근원의 참혹한 절실성 때문이 아닐까. 김남주는 “미군이 없으면 / 삼팔선이 터지나요 / 삼팔선이 터지면 /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못 다 쓴 시」) 같은 살벌한 반미시를 쓴다. 「못 다 쓴 시」는 민족적 당위인 분단의 극복을 말하는 작품인데, 여기에 함께 드러난 개인적 영달과 축재를 앞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가차없는 분노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1988년 12월 21일 9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전주교도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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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이념의 시적 표현이 지나치게 반생명 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이것은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동물적 삶의 원리를 조장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찬서리 /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옛마을을 지나며」)와 같이 빼어난 구절을 거느린 서정시는 한결 넉넉하게 삶과 자연을 아우르는 시인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강퍅한 마음들의 갈등과 충돌이 그칠 날이 없고, 약육 강식의 동물적 지배 원리가 횡행하는 타락한 시대에 가난한 생명을 위해 뭘 하나라도 남겨둘 줄 아는 삶의 지혜에 대한 환기는 뜻있는 일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는 네 번째 시집 『솔직히 말하자』(1989), 다섯 번째 시집 『사상의 거처』(1991), 여섯 번째 시집 『이 좋은 세상에』(1992)를 내놓는다. 1990년에는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을 펴내고, 1992년에는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를 잇달아 선보인다. 김남주는 1991년에 제9회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자로 결정되고, 1992년에 제6회 ‘단재상’ 문학 부문상을 받는다. 이어 1993년에 들어 제3회 ‘윤상원상’을 받은 그는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2월 13일 새벽에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1995년에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나오고, 1999년에도 시집 『옛마을을 지나며』가 나온다.
1992년에 나온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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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 침묵일까 / 관망일까 / 도피일까 / 밑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 // 무엇일까 / 박해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 짓눌린 삶으로부터 /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 잠든 마을을 깨우는 일 / 첫닭의 울음소리는 아닐까
김남주, 「시인이여」,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죽었지만 ‘살아’ 있다. 누구보다도 힘차게, 생생하게, 굽힐 줄 모르는 정신으로 그는 살아 있다. 암흑의 시대, 박해의 시대에 침묵과 관망과 도피를 넘어, 우리의 짓눌린 삶을 제대로 펴고, 우리를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깨우는, 첫닭의 울음 소리로 그는 살아 있다.
김남주가 생전에 쓰던 안경과 만년필
출생사망
1946년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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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어어,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즐겨 말하던 시인. 피 · 칼 · 학살 · 전사 · 비명 · 피투성이 · 죽창 · 대창 · 도살장 같은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내던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가 걸어간 길은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그 길은 반봉건 · 반외세에 맞서는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 이 끊임없는 싸움”의 길이며, “밥과 땅과 자유”를 되찾는 “유혈의 투쟁”의 길이다(「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저 먼 나라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사랑한 김남주는 감옥을 떠돌며 병마와 싸우다가 혁명과 투쟁의 시편들만 남기고 마흔여덟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뜬다.
강렬한 언어들로 전투적 서정성을 빚어낸 시인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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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다. 그는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이듬해에 자퇴해버린다. 그가 대입 검정 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그는 대학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선다. 1972년 그는 유신 헌법 선포에 맞서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반유신 투쟁 지하 신문 『함성』을 제작해 배포한다. 이어 1973년에는 『함성』의 맥을 잇는 『고발』을 제작하다가 체포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8개월 만에 풀려나지만 전남대에서 제적된다. 1974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습작을 하던 그는 같은 해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꽃이 보이지 않는다 / 피가 보이지 않는다 / 꽃은 어디에 있는가 / 피는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피가 잠자는가 /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 꽃이다 영혼이다 / 피다 육신이다 /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 꽃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 꽃이여 영혼이여 / 피여 육신이여 //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 영혼을 던져 보았는가 /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 파도의 심연에서 /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 꽃이다 피다 / 육신이다 영혼이다 /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 그대는 / 새벽을 출발하여 / 폐허를 가로질러 / 황혼을 만나 보았는가 /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 무엇을 보았는가 /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 꽃을 닮고 있던가 / 피를 닮고 있던가 / 죽음을 닮고 있던가 / 그대는 /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 새벽을 기다려 보았는가 그때 / 동천(東天)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 서천(西天)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 죽어버린 별 / 죽으러 가는 별 / 죽음을 기다리는 별 /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 보았는가 // 그대는 겨울을 / 겨울답게 살아 보았는가 / 그대는 봄다운 /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 동토를 녹이던가 /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 봄의 중턱에서 /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 죽창을 깎고 있던가 // 아는가 그대는 /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 그대는 아는가 /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 꽃이여 피여 / 피여 꽃이여 / 꽃속에 피가 흐른다 / 핏속에 꽃이 보인다 / 꽃속에 육신이 보인다 /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 꽃이다 피다 / 피다 꽃이다 / 그것이다!
김남주, 「잿더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1991)
「잿더미」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등단작 가운데 한 편이다. 김남주는 여기서 힘찬 리듬의 반복 속에서 꽃 · 보리 · 잡초 · 찔레꽃 · 곰팡이 · 누룩 등으로 표상된 작고 힘없는 온갖 것이 어떻게 “바위” 같고 “암실” 같은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뚫고 나아가는지 노래한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 /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를. 이런 것이 저희를 짓밟고 억누르는 현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가시’이고 ‘죽창’이다. 아마도 김남주에게 그것은 시였을 것이다. 그의 시를 두고 김준태는 “혁명성 · 전투성 · 역동성 · 순결성”의 시라고 말하는데, 이런 점은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또렷하게 나타난다.
김남주가 다시 광주로 와서 사회 과학 서점 ‘카프카’를 연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서점 ‘카프카’는 김남주가 시대 정신과 민족 정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키운 사상의 요람이다. 그는 거기서 『창작과 비평』을 즐겨 보고, 프란츠 파농과 네루다의 책을 되풀이해 읽고,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호치민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한 제3세계 혁명가들이 걸어간 형극의 길을 되새긴다. 이후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차리기도 한 그는 1978년 서울로 올라와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그는 수배중에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번역해 내놓기도 한다.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9년에 들어 붙잡히고 만다. 이듬해인 1980년 그는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1992년 세 살 된 아들 토일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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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고약한 시대 험한 구설”을 만나 꽃다운 젊음이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시드는 바람에 마흔이 갓 넘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만다. 하루 한 시간의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깥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없던 그의 젊음은 전주교도소의 음습한 구석에서 잔혹하게 시들어간다. 군산 제일고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1982년 11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간 뒤 교도소에서 김남주와 함께 복역하다가 먼저 출감한 교사 시인 이광웅은 그가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읽기로 보냈다고 전한다. 이광웅은 김남주에게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네루다의 일어 번역 시집, 복사판 하이네의 정치 시집 등을 빌려 읽는다. 김남주는 제 육신의 삶을 가둔 감옥의 질곡을 꿋꿋하게 버텨내며 6개 국어를 익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나하고는 무연한 것이 / 창 너머 담 밖에 와 있나 보다 / 봄이, 자연이, 멀리에 가까이에 / 푸르고 푸른 나무들은 / 햇살 머금어 더욱 빛나고 / 하늘하늘 가지들은 바람이 일어 춤을 추겠지 / 그리고 산과 들에는 이름모를 새들 / 날 저물어 / 금빛 나래 접으며 황혼을 펼치겠지 부챗살처럼 /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의 날개, 나의 노래는 / 나의 햇살, 나의 바람, 나의 혼은 / 어디에 어디에 내가 있는가 / 황혼에 쓰러진 거목이 되어 버림받고 있는가 /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있는가 /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있는가 /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 대지의 별,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몸이 되어 / 증오의 벽을 허물고 있는가
김남주, 「봄」,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왜 “푸른 나무들” “햇살 머금어” 빛나는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할까. 왜 그는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절망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될까. 김남주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작품 활동보다는 민중 문화 운동이나 농민 운동에 더 깊이 투신한다. 그러다가 1979년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인물로 구속되어 1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아홉 해나 감옥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다.
그가 문득 눈에 들어온 창밖의 봄에 하염없이 시선을 빼앗긴 것은 감옥살이의 시름겨움 탓만도, 바깥 세상에 대한 참을 길 없는 그리움 탓만도 아니다. 이런 하염없음은 생명 있는 것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 어떤 이데올로기의 환상이나 논리로도 막을 길 없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살아 움직이는 동물적 생명 의식의 꿈틀거림, 빼앗긴 삶의 기본 터전인 자연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원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유보 없이 베풀어져야 한다.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갑고 부드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자연의 혜택을 인위적으로 차단하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너무 비좁고, 쥐며느리, 지렁이 등 불결한 벌레들이 너무 많이 기어다녀 독서에까지 지장을 주는 관 속 같은 0. 75평 방”에 가두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뜨거운 아랫도리 억센 주먹의 이 팔팔한 나이에 / 형제여,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사슬 묶여 쇠사슬 벽 속에 갇혀 / 노래하고 목청껏 / 힘껏 일하고 / 내달려 전진하고 기다려 역습하고 / 피투성이로 싸워야 할 이 창창한 나이에 /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승리하고 패배하면서 / 빵과 자유와 피의 맛을 보아야 할 / 이 나이, 이 팔팔한 나이, 이 창창한 나이 / 서른다섯의 결정적인 순간에 / 긴 침묵으로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형제여
김남주, 「형제여」, 『진혼가』(청사, 1984)
그는 때로 감옥 속에서 이처럼 거칠게 삶의 괴로움을 토해낸다.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 살아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 지하의 물이 되어 숨 죽여 흐르고 /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한다네 //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김남주, 「벗에게」, 『진혼가』(청사, 1984)
그러나 감옥에서도 자주, 잔인한 벽 속에 갇힌 육신은 비록 마른 꽃처럼 시들어갈지 모르나, 그의 정신은 이처럼 승리에 대한 바래지 않는 신념으로 빛난다. 시련을 참고 견뎌 아름다운 미래를 쟁취하려는 그의 불타는 의지, 새벽을 향한 양심의 외로운 투혼은 감동적이다. 그 잔인한 벽 속의 세계에 대해 김남주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곳에 처넣어 두면 소도 말도 개도 다 죽습니다. 닭도 오리도 죽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사람만은 살아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렇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불행의 시대, 압제의 시대, 분단의 시대, 신식민지적 예속의 시대, 우리의 삶을 노예적 굴종과 질곡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시대에 빼앗기고, 찢기고, 떠난 삶을 원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인간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바다에 제가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버린 시인은 그 신념을 부여잡은 채 소도, 말도, 개도, 닭도, 오리도 죽어 나갈 비참한 바닥, 극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의 시적 창조력은 고갈되지 않아, 오히려 더욱 첨예한 민족 해방, 민중 해방의 정서를 밑바탕에 깐 서정 시편들을 내놓는다. 집필 기구의 차입이 금지되어 있는 음침한 감옥의 부자유 속에서도 터져 나오는 시적 창조의 충동을 어쩌지 못해 버려진 빈 우유곽이나 은박지 등에 못으로 긁어나간 그의 시편들은 때로는 불덩이처럼 우리 가슴을 데일 듯이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못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수감 생활 당시 종이가 없어 은박지에 새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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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나온 첫 번째 시집 『진혼가』, 1987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그리고 1988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그 뜨거운,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 낳은 열매들이다. 김남주는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 정지로 9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다. 때로 그의 시가 참을 수 없는 독설의 형태로 소시민적 일상성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헤집고, 안온한 우리 의식의 내벽을 긁어 피 흐르게 하는 것은, 그의 시적 근원의 참혹한 절실성 때문이 아닐까. 김남주는 “미군이 없으면 / 삼팔선이 터지나요 / 삼팔선이 터지면 /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못 다 쓴 시」) 같은 살벌한 반미시를 쓴다. 「못 다 쓴 시」는 민족적 당위인 분단의 극복을 말하는 작품인데, 여기에 함께 드러난 개인적 영달과 축재를 앞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가차없는 분노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1988년 12월 21일 9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전주교도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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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이념의 시적 표현이 지나치게 반생명 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이것은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동물적 삶의 원리를 조장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찬서리 /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옛마을을 지나며」)와 같이 빼어난 구절을 거느린 서정시는 한결 넉넉하게 삶과 자연을 아우르는 시인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강퍅한 마음들의 갈등과 충돌이 그칠 날이 없고, 약육 강식의 동물적 지배 원리가 횡행하는 타락한 시대에 가난한 생명을 위해 뭘 하나라도 남겨둘 줄 아는 삶의 지혜에 대한 환기는 뜻있는 일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는 네 번째 시집 『솔직히 말하자』(1989), 다섯 번째 시집 『사상의 거처』(1991), 여섯 번째 시집 『이 좋은 세상에』(1992)를 내놓는다. 1990년에는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을 펴내고, 1992년에는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를 잇달아 선보인다. 김남주는 1991년에 제9회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자로 결정되고, 1992년에 제6회 ‘단재상’ 문학 부문상을 받는다. 이어 1993년에 들어 제3회 ‘윤상원상’을 받은 그는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2월 13일 새벽에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1995년에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나오고, 1999년에도 시집 『옛마을을 지나며』가 나온다.
1992년에 나온 옥중시 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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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 침묵일까 / 관망일까 / 도피일까 / 밑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 // 무엇일까 / 박해의 / 시대의 / 시인의 일 그것은 / 짓눌린 삶으로부터 /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 잠든 마을을 깨우는 일 / 첫닭의 울음소리는 아닐까
김남주, 「시인이여」, 『진혼가』(청사, 1984)
김남주는 죽었지만 ‘살아’ 있다. 누구보다도 힘차게, 생생하게, 굽힐 줄 모르는 정신으로 그는 살아 있다. 암흑의 시대, 박해의 시대에 침묵과 관망과 도피를 넘어, 우리의 짓눌린 삶을 제대로 펴고, 우리를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깨우는, 첫닭의 울음 소리로 그는 살아 있다.
김남주가 생전에 쓰던 안경과 만년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