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배신의 강
배만식
4월에는 서울에서 의령경찰서 궁유지서로 발령을 받았던 순경 우범곤이 술에 만취해 칼빈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5개 마을 주민 무려 62명을 사살하고 35명을 부상시켜 온 나라를 뒤집어 놓더니 5월에는 장성자란 여자가 건국 이래 최대 어음사기사건을 일으켜 정치 경제계의 다수 권력자들이 감옥에 갔다.
집에서 감금 상태로 있던 경란은 어른들 말대로 학교 선생에게 시집가기로 약속하고 바깥 외출이 허락되었다. 경란의 연락을 받고 야근 후 아침에 퇴근하여 마산역으로 갔다. 마산역 뒷산의 나무들은 한층 드높아진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어느새 붉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고 있었다.
역 구내에서 만난 하늘색 투피스 차림의 경란의 얼굴은 안 본 사이에 야위어 해쓱하고 침울해 보였다.
우리는 역 앞 길 건너에 있는 건강보험공단 오른편에 붙어 있는 작은 추어탕 집에 들어갔다.
추어탕을 시키고 경란과 마주 앉았다. 티브이에서는 연합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풀려난 거야.”
“어른들 말 대로 하겠다고?”
“.......”
경란은 대답을 못하고 눈길을 피했다.
밥을 어떻게 다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밥을 먹자마자 그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가포로 가서 돝섬으로 갔다. 배를 타고 돝섬에 내리자 우리는 그렇게 크지 않은 섬의 내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어시장이 건너다 뵈는 섬의 북쪽 해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어시장은 언제나처럼 넘쳐나는 사람들과 차량으로 시끌벅적한 상황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이미 해는 중천에서 조금 서쪽으로 비켜섰고 멀지 않은 곳에 무학산이 하늘의 경계를 짓고 서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경란의 손을 당겨 모아 잡고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어?”
“.......”
“그래, 우리 약속은 어쩌고? 언약도 하고 수도 없이 몸으로도 한 그 약속은 어쩌라고?”
경란은 나의 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 품에 쓰러져 안겼다.
나는 성이 나서 고함을 지르고 경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미 경란은 마음이 굳어진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흘렀다. 철썩이는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침내 더 할 말이 없었다.
파도를 맞으며 버티고 섰던 바위를 보자 비로소 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코에 느껴졌다.
바닷가 바위에 새까맣게 붙어 있던 홍합들을 떠올렸다. 언젠가 마산 직원들과 놀러 와서 홍합을 맨손으로 채취할 거라고 만졌다가 손가락 끝이 면도날로 베인 것처럼 갈래갈래 찢어졌던 기억이 아련했다. 여전히 홍합은 새카맣게 붙어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나보다야 학교 선생님이 낫지, 잘 생각했어, 하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또 나도 모를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우리 사랑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죄수를 상대하는 교도관보다는 학교 선생님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직업이 아니던가? 내가 생각해도 그건 더 이상 사랑의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마음이 돌아서버린 애인에게 사랑의 약속을 내세우며 더 좋은 직업을 가진 사내에게 가려는 것을 원망할 순 없는 일.
인생의 초년인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던 것이 되고 만 우리의 서글픈 사랑, 그날의 데이트는 마산역에서의 배웅으로 끝이 났다. 만나서 울기만 하던 경란을 싣고 멀어져 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나는 참담한 심경이 되었다.
마침내 열차는 떠났다. 곧게 뻗은 두 가닥 철로 위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나의 연인, 나의 경란이, 이제부터 경란이는 나의 여자가 아니다. 나의 애인, 나의 아내가 아니다.
나는 앞뒤 맞지 않는 헛소리를 횡설수설하며 어리석은 모습을 종일 보여준 것이 후회로 남았다. 좀 더 쿨하게 보내주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마음 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별 여행
경란이 떠나고 2주일 후였다.
진주, 대학시절 젊었던 우리의 추억이 배어있는 곳, 거기서 우리는 마지막 이별여행을 하기로 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서늘했다. 진주역에서 만난 우리는 역 앞에서 백반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촉석루로 갔다. 사백여 년 전, 논개가 적장을 안고 뛰어내렸다는 바위도 다시 찾아보고, 고색창연한 촉석루에 올라 지난 날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그곳을 찾았던 우리의 추억들을 찾아내어 가슴에 담고 다시 진양호로 갔다.
진양호에서 배를 빌렸다. 언제나처럼 내가 배를 젓고 경란은 양산을 쓰고 앉았다. 산은 이미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우리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마지막 이별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조금은 분노의 마음을 싣고 거세게 노를 저었다. 배는 쑥쑥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래도 물을 튀기지 않으려 신경을 쓰면서 경란을 바라보며 배를 저었다. 눈이 마주치자 경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야위었지만 아름답다. 물은 푸르고 깊었다.
멀리 하늘 까마득히 제비가 날아다니는데 가까이는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비행하고 있고 호수는 거울처럼 잔잔했다. 경란은 즐겨 입는 분홍색 원피스를 두고 이날은 하얀 투피스 정장차림이었다. 아니 하얀색이 아니고 상아빛이었다. 핸드백도 상아빛으로 갖추었고, 양산은 분홍색 꽃무늬에 내부는 검은 천으로 되어있는 것을 쓰고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경란은 헤어지긴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다는 투로 진지하게 대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자 참을 수가 없어 나는 또 어리석은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내게 짜준다던 조끼며 적금 통장은, 소록도로 간다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철아! 말 안 들으면 부모님이 영원히 안 보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오늘 이러려고 만난 건 아니잖아? 현실을 인정해야지. 나도 너와 결혼해서 살길 바랐지만 어른들이 저렇게 반대하시는데, 네 부모님도 극구 반대한다고 엄마가 말씀하셨어. 엄마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며 바늘도 안 들어가. 말하기 곤란하지만 네가 교도관이란 말에 더 반대하셨어.”
“교도관이기 때문이라고? 부모님이 서로 잘 안다는 말은 내가 가난하다는 말이겠지?”
나는 바보같이 경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사건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젓던 노를 그만 멈추었다. 배는 바로 멈추지 않고 관성으로 건너편 섬을 향해 계속 미끄러져 나아갔다. 노에서 배 안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의 물에 젖은 모래 위로 그 물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위에 경란의 작고 아담한 발이 하얀 구두 속에 놓여 있다. 그 위로 탐스런 종아리, 백자 같이 고운 하얀 허벅지가 있었다.
완전범죄
그 넓은 진양호 위 한 가운데 주변에 사람이라곤 우리뿐이었다. 조용하고 지극히 정적인 데이트였지만 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퇴색되고 무감각해져 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지금에 와서야 이별을 요구하는 가증스런 배신자, 경란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영화에서 본 그대로 배를 뒤집어 버릴까? 그러다가 바로 떠오른 생각은 경란이 나보다도 더 수영을 잘한다는 것, 우린 둘 다 강폭이 백 미터도 더 되는 그 용두강을 쉽게 헤엄쳐 건널 수 있었기에 물에 빠뜨려도 죽을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쉽게 말하면 경란은 물에 빠뜨려 죽일 수도 없는 배신한 여자다.
갑작스런 이별 통고, 그것을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뻔뻔스런 경란의 행위에 속으로 몹시 분노했지만 나는 충격으로 얼굴만 하얗게 질릴 뿐 제대로 말도 못하고 옹졸하게 머릿속으로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혹시 내 아이가 경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기적 같은 생각도 해 보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경란이 수영을 잘 한다고 해도 물속에서 내가 붙들고 있으면 익사시킬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
목을 조르면 목 졸라 죽인 흔적이 나타나지만 물속에서 익사하기까지 붙들고 있으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
배를 저으며 경란이 몰래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트를 빌리는 곳도 섬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주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늘 아득한 높이에 제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경란을 빠뜨리고 물속에서 5분만 못 올라오게 머리를 누르고 있으면 끝난다. 배를 뒤집어버릴까?
귀에 먹먹하게 나의 심장이 뛰는 고동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호흡이 빨라지고 손에 땀이 났다. 배신한 경란을 죽이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배를 뒤집어서 같이 물에 빠지자. 그 다음엔 심호흡을 하고 경란을 붙들고 물속으로 들어가 3분간 버티자. 그리곤 먼저 올라와서 호흡을 하고 다시 경란의 머리를 누르고 못 올라오게 기다리자. 5분이면 끝난다. 5분!
경란이 춘향이처럼 목숨 걸고 기다려달라는 것도 아니다. 숱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부모님이 반대해도 뿌리치고 결혼에 잘들 골인하는데, 누구는 허락하지 않으면 미리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어거지로 결혼을 하는데, 왜? 하필이면 자기만 부모님 말을 그토록 잘 듣는 효녀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복수심에 살의를 느끼는 것은 이 이별이 부모님 뜻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배는 미미하게 앞으로 미끄러져 나아가고 있는데 고추잠자리 한 쌍이 교미를 붙은 채로 우리가 마주 앉은 사이의 왼편 뱃전에 날아와 앉았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려고 마지막 정을 떼고 정리하기 위해 괴로움을 삼키고 있는데 저것들은 이 순간 사랑의 절정에서 몸을 태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학교 선생님인데?”
“어디 중학교 선생님이라고...”
“저번에도 선생님이라고 하더니 원래 그 사람이구나?”
“.......”
이미 부모님에게 설득 당해 교도관이 되어 밤낮없이 죄수들에게 시달리며 힘들게 사는 남자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사모님으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은 분명하였기에 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자리로 시집가겠다는데 못 가게 하는 것은 사랑의 맹세를 떠나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해야 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수긍이 가면서도 흔들림 없는 경란의 모습에 열을 받은 나는 분노에 못 이겨 다시 노를 저었다. 힘차게 배가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날 밤, 처음으로 품에 안겨 행복에 겨워 ‘이게 부부인가’를 되뇌던 경란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울고 싶고 미치고 싶었지만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정말 죽이고 싶었다. 벌써 마음이 떠나버린 사람인데 무슨 헛된 망상인가?
배신감에 복수의 칼을 갈아 도망가는 경란의 등에 꽂아야 했건만 나는 그렇게 모진 놈이 못되었다. 배에서 내린 후 호숫가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다 일어서면서 나는 경란을 안고 마지막으로 잘 살아라 얘기해주며 무덤덤한 포옹을 끝으로 진주역으로 갔다. 복수의 살인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란의 결혼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어렵사리 경란의 결혼일자와 예식장을 알아내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애인이었지만 이별 여행 이후로 연락할 방법도 없고 어떻게 한 번 더 볼 기회도 없었다.
‘83년 1월 23일 일요일, 그날이 경란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내일동 중앙파출소 뒤 2층에 있는 서울예식장 맞은 편 길 건너 골목 깊숙이 자전거를 대어 두고 그늘에 숨어서 예식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 밖에 낙엽지고 그대 떠나갈 때’로 시작되는 유행가의 주인공처럼.
제일 먼저 경란의 남동생과 부모님이 택시를 타고 와서 예식장 안으로 올라갔다. 날씨는 겨울이라고 하기엔 따뜻한 편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골목에서 길 건너 예식장, 그 남쪽으로 중국음식점 태화루, 그 남쪽엔 중앙파출소, 예식장 1층은 미미사진관, 그 뒤로 올라가면서 여러 점포가 즐비한데, 멀리 뱃달껄에 있는 믿을백화점이라 씐 안경점 앞에는 젊은 여자 세 명이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시가 넘어가자 마침내 신부화장을 한 경란이 친구인 늠이와 같이 택시를 타고와 식장으로 올라갔다. 그 전에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랑과 우인들도 올라갔는데 점점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해졌다. 하객들이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시가 조금 지나자 경란이 우인들과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신랑과 같이 택시에 올랐다. 노란 택시엔 풍선과 오색테이프가 장식되어 있었다. 떠나는 신혼부부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가슴이 에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아픔이 어떤 건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하객들과 가족들도 모두 예식장에서 떠나갔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숨어있던 골목에서 나와 길을 건넜다. 예식장으로 올라갔다.
2층 예식장 입구 로비엔 경란의 이름과 낯선 남자의 이름이 나란히 신랑 신부란 글자 아래 붙어있었다. 창문으로 비쳐든 오후의 희미한 햇살 속에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텅 빈 예식장 안에는 아무도 없고 방금 전에 그곳에 서 있었을 경란이 두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또 찌르르하게 아프게 떨려왔다. 호흡이 답답했다.
왜 내가 경란의 부모에게 선택되지 못했던가 생각하니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조금 울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의 내 일그러진 얼굴이 보기 싫어 얼른 물을 훔치고 그곳을 나섰다.
이제 경란은 나의 여자가 아니다. 애인도 아니다. 나의 신부가 아니고 나와 평생을 같이 할 내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 경란은 나를 배신하고 떠난 나쁜 여자다. 더 나은 신랑감을 만나 나를 버리고 떠난 여자다.
이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독한 마음이 들었다. 슬프고 괴롭던 기분이 나아졌다. 마음속으로 경란이 행복하게 살아주기를 빌었다.
예식장에서 내려오니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길을 건너서 골목에 숨겨둔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 삼문동 솔밭 제방 위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방에 들어가 드러누워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천정에는 오래된 꽃무늬 벽지가 어둑한 북창에 비쳐드는 오후의 햇살에 더 시들어 보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어머니께서 얼굴을 보이며 물었다.
“철아, 점심은 먹고 다니냐?”
“예, 먹었습니다.”
자연스레 거짓말이 나왔다.
“남자가 밥은 굶고 다니면 안 된다. 꼭 먹고 다녀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시며 삶은 고구마 네 개를 그릇에 담아 물과 함께 방에 넣어주셨다.
“밥은 먹었다고 했잖아요!”
나는 엉뚱하게 어머니께 성질을 부렸다.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한 동네나 다름없는 터라 경란의 결혼을 어머니께서 모를 리 없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 왔기에 나는 갑자기 허기를 느껴 고구마를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다.
편지
그 다음 주 일요일이었다. 문학소녀였던 경란은 책을 많이 읽기도 했지만 편지쓰기도 좋아해서 사흘이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왔다. 고등학교시절과 대학시절, 군 생활 이후 지금까지 경란이 내게 보내준 소중한 편지를 모두 사진과 함께 큰 마대에 넣어 자전거에 싣고 용두교 다리 아래 양지바른 다릿발 아래로 갔다.
거기 앉아서 불쏘시개를 주워 모아 경란의 편지와 사진을 불태웠다. 한 장씩 읽고 차례로 태웠다. 어떤 편지들은 읽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내렸다. 슬프고 괴로운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와 신혼여행을 가기로 약속한 경란이었다.
경란은 제주도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시집살이며 집안 어른들 인사며 정신이 없을 시간에 나는 읽고, 태우고, 연기 속에 앉아 울다가 또 읽고 태우고, 불꽃이 사그라지면 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불쏘시개를 주워 와서 오후 내내 경란의 편지와 사진, 그리고 내 일기까지 남김없이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 강물 속에서 여자들의 알몸을 만져보려다 경란이 엄마에게 잘못 걸려 엄청 맞고 도망가다 똥구덩이에 빠지고 나중엔 역전파출소까지 끌려간 기억이며, 중학시절 호밀밭 가운데 밀을 눕혀 바닥에 깔아 방을 꾸미고 밤이 깊도록 별을 보며 속삭이던 때, 겨울밤 가곡동 제방 끝에서 끝까지 오가며 제방이 짧음을 아쉬워하던 일, 강변 자갈밭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붉은 노을 속에 사랑을 속삭였던 순간까지.
경란을 보내고 그 이듬해 ‘83년 12월 나도 마산 처녀를 소개받아 마산역 근처 동성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과 친구가 된 입사 동기들이 많이 와서 축하해 주었고, 밀양에서도 병화와 정국이 순규 등 많은 친구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경란의 배신에 그토록 슬퍼하던 내가 그 이듬해 바로 결혼한 것은 조금은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그 슬픔은 시간과 함께 차츰 옅어져 갔다.
죽을 만큼 슬펐던 때문이었을까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낸 그 아픔은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 찾아오는 고통의 주기가 길어졌다. 처음엔 경란이 너무 보고 싶어 시집간 동네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마을에서 커다란 고개를 하나 넘으면 경란이 그곳에서 신혼을 꾸리고 살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서 동네 빨래터를 맴돌며 먼발치에서라도 빨래하러 나오는 경란의 모습을 보고 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동네사람 눈에 띌까 걱정되어 마을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경란의 행복에 걸림돌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나중엔 그 자전거 여행마저도 멈추었다.
1년이 지난 후에는 거의 한 주일 동안 시간이 흘러도 경란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때엔 한 달이 가도록 경란을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바람에 간병하느라 온통 정신이 팔려 더 빨리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결혼 후 보석 같은 아들딸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어머님은 회복되어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가족 넷이 오토바이를 타고 근교로 놀러 다니기도 하고, 마침내 경란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토록 고통스럽던 아픔은 완전히 치유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87년에 마산 직장을 그만두고 시청으로 직장을 옮겼다. 처음부터 마산이 아닌 현재의 직업을 가졌더라면 경란의 부모님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본청 근무가 끝나자마자 나는 초동면에 근무지원을 했다. 그곳은 경란과의 마지막 추억이 많이 서린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친구들을 통해 경란이 울산, 부산을 거쳐 현재는 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헤어지고 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미 헤어졌고 서로 각자 결혼을 하였음에도 나는 진정으로 경란을 떠나보낸 게 아니었다. 사진과 편지를 다 태우고 새 출발을 했음에도,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음에도 나는 경란을 사랑했던 추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경란은 나의 유년기에서 사춘기 청년기를 통 털어서 단 하나뿐인 나의 연인이었고, 내 전부였던 여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밤이면 혼자 집을 나와 경란의 옛집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다 추억의 2통 제방을 둘러 돌아오는 일이 가끔 있었다. 경란의 부모님이 집을 비웠던 그날 밤을 떠올리면서.
한번은 그때까지도 초동면 보건진료소에 근무하고 있던 경란의 사촌언니 말숙이 누나에게 경란이 소식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진료소는 오방리에 있는 면사무소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후 한가한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 일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진료소에 들어섰다.
“아니! 이게 누구야? 경철씨네?”
“예, 누님! 저 이곳에 온지 좀 됐습니다.”
“마산에 직장은 우짜고?”
“마산은 그만두고 이곳 시청에 발령받았습니다.”
“잘 됐네?”
“그래, 아직도 누님이 이곳에 근무하신다기에 인사도 드리고 경란이 잘 사는지 소식도 들어 볼라고예.”
“.......”
내가 안부를 묻는 말에 갑자기 누나가 입을 다물었다.
누나는 우리의 깊은 사랑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란이 소식은 못 듣습니까? 누님?”
“응, 경철씨가 모르는데 낸들 우째 아노? 대구에서 식당하면서 잘 살고 있다더만.”
“대구에서 언제부터 식당을 했는가예?”
“그건 나도 자세히는 몰라.”
이야기는 여기까지 진행되었다. 마을에서 칠순의 할머니가 한 명 왔는데 감기가 걸려 힘들다며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타 갔다.
진료가 끝나고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누님에게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돌이켜보면 이때부터 나도, 경란이도 서로 깊이 사랑했음에도 헤어졌던 것을 깨닫고 뒤늦은 후회로 열병을 앓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심한 세월은 빠르게 흘러 나의 젊음도 시들어갔다.
재회
경란과 헤어지고 17년이 지난 ‘99년, 43세가 되던 어느 봄날이었다.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전화벨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대답 없는 상대를 향해 거푸 말을 건넸다.
“철아! 나야...”
나는 순간적으로 경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머리가 멍멍해지며 몸이 마비되었다. 억지로 마법에서 풀려나오려 애를 써 목에 힘을 주어 말을 건넸다.
“아니? 경란이네?”
“응, 나야! 그동안 잘 있었어?”
경란의 이 물음에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나는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으응... 잘 살지, 너도 잘 있었니?”
“나야 늘 같은 일상이지, 그래, 좋은 직장으로 옮겨서 축하해.”
“응, 고마워 란아, 내가 여기 근무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니?”
“여기 대구 사는 애들 동창 모임이 얼마 전에 우리 집에서 있었거든? 우리 집에 갈빗집 하고 있어서, 그날 친구들이 네 말을 하더라고, 네가 마산에 그만두고 늦게 또 시험을 쳐서 시청으로 옮겼다고, 나이가 서른이 넘어 공부해서 다시 취직했다고 다들 너를 칭찬하더구나. 나도 기뻤어. 축하해 늦었지만.”
“응, 경란아 정말 오랜만에 네 전화를 받으니 좋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시험도 아닌데 너무 추켜세우지 마, 다른 애들은 고시 패스해서 서울 중앙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애들도 있는데.”
“그건 그렇지만, 철아! 언제 시간 나면 너도 우리 집에 놀러와. 얼굴도 함보고, 지난 이야기도 하고, 오면 내가 맛난 갈비 실컷 대접할게.”
“정말? 내가 혼자 놀러가도 될는지 몰라?”
“아이 괜찮아 얘, 친구끼리 세월이 이십 년인데 대구가 뭐 서울처럼 먼 거리도 아니고 아무 날이나 놀러와.”
“알았어. 음, 달력을 보니 요즘 별로 일도 없고 주소 좀 불러줘,”
전율을 느끼며 전화를 끊고 이틀 후 나는 열차를 타고 경란의 대구에 있는 갈빗집을 찾았다.
하루 연가를 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갔다.
대구에서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34-4 낭만갈비’
나는 메모를 보면서 어렵잖게 경란의 갈빗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장소는 동대구역에서 내려 그리 멀지 않은 길 건너편에 있었다. 가게는 1층에 있었고 2층은 아이넥스 PC방이었다. 길 건너 건널목 맞은편엔 ‘서대포 소금구이’집이 있고, 경란의 집은 6차선 아양로와 2차선의 이면도로가 만나는 흰색 타일 외장 벽의 모서리 3층 건물 중 1층이었다.
간판은 소털색의 바탕에 검정색 한글로 ‘낭만갈비’라고 씌었고, 들어가는 입구 왼편 벽엔 노랑과 분홍 바탕에 검정글씨로 ‘무한리필 오늘 집에 안 간다’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마음속으로 장사가 몹시 안 되는 모양이란 생각을 하면서 집 앞 도로변 인도에 4층 건물보다 더 높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무성하게 푸른 잎을 내뿜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경란의 집 앞으로 붉은 색, 검정색 승용차와 하얀색 택시가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다. 택시는 문짝에 ‘척탑병원, 무릎 편하다’란 선전문구가 노랑바탕에 검정글씨로 씌어있었다.
“계세요?”
식당 내부엔 손님이 두 팀 있었고, 경란은 점심시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남편과 같이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경란이 주방에서 나를 내다보고는 고함을 질렀다.
“엄마야! 이게 누구야?”
“.......”
나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경란을 쳐다보았다.
“어서와 철아! 그래,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반기는 경란을 바라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아무래도 난 경란이 때문에 심장병을 얻은 게 틀림없다. 우리가 서로 헤어지던 때가 이십대 후반이었는데 어언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사십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버린 경란을 보니 심하게 고통이 느껴졌다.
경란은 46세, 나는 45세였다. 우리는 이렇게 늙어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란은 파마머리를 몽땅 올려서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세월이 얼굴에 묻어있었다. 그토록 탄력 있고 싱그럽던 젊음은 간 데 없고 어느덧 중년의 여자로 변해버린 란이를 보자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왔다.
“그냥 살았지, 이십 년 세월이 금방이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경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리 와, 철아, 자, 이리로, 여기 앉아!”
조금은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녹색의 앞치마를 한 경란은 햇볕이 잘 드는 창문가에 있는 테이블에 나를 앉혔다. 방석을 꺼내고 자리를 권한 그곳에서는 시내에 오가는 사람들이 잘 내다보였다.
주방에서 일하던 남자가 얼핏 얼굴을 내밀어 내다보는 것이 경란의 등 뒤로 보였다. 저 남자가 경란의 남편이란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곽동수, 내 운명의 사랑을 빼앗아간 사내다. 식당엔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경란은 내 앞에 앉아서 몹시 기뻐하는 눈치였다. 주로 갈빗집엔 저녁에 술손님이 많이 오는 법이다.
이 여자가 지난 세월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앳되고 어린 소녀, 그 아름다운 처녀였던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철아, 잠시만 기다려, 내가 채려 올께.”
다시 나타난 경란은 커다란 쟁반에 등심과 갈빗살을 듬뿍 담아왔다. 채소와 된장 간장에 양파소스, 고추냉이까지 파무침과 마늘도 빠지지 않았다.
“철아, 저기 주방에 있는 사람이 신랑이야, 인사시켜 줄까?”
경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남편 소개시켜준다는 말에 극구 사양했다. 내게서 경란을 빼앗아 간 나의 연적이었던, 나를 그토록 고통 속에 빠뜨린 사내를 진심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과 사모님이 어쩌다가 이렇게 식당을 하며 고생을 하고 있는가?
“철아, 세월이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 그 옛날과 하나도 안 바뀌었네? 나는 다 늙었는데?”
“아냐, 늙기는 뭘 늙어,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워.”
스테인리스 철망으로 된 불판 아래 숯불이 발갛게 피어오르고 고기에서 떨어진 기름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식당 안은 깨끗했다. 제법 품위가 있고 잘 정돈된 식당은 경란의 평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보였다. 창문 근처 실내엔 헤데라 관음죽 춘란 같은 관엽 식물들이 화려한 화분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경란이 능숙한 솜씨로 갈빗살을 늘어놓고 고기를 굽고 소주를 따라주는데 예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마치 17년이란 세월 이전으로 되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약간의 소주와 고기에 오랜 그리움을 섞어 먹고 냉면에 추억을 같이 말아 들이키고 오후 내내 계속된 이야기는 아쉬움 속에 끝났다.
나는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주로 듣기만 하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대식가인 나는 그 많은 고기를 대부분 혼자서 다 먹었다. 식당 일인지라 경란은 수시로 먹고, 나중에 식구들과 먹는다며 내게 고기를 구워주며 계속 수다를 떨었다.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경란의 두 손을 꼭 잡고 말을 했다.
“경란아! 우리,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안 그래도 서로 울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나의 이 말에 경란이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도 눈물이 쏟아졌다. 정류장엔 우리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지난 17년 만의 짧은 만남 후 이별의 순간에 긴 세월의 추억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끝)
배만식 / 2007년 낙동강문학 시 소설 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