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로 나아갈지니라”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초보를 ‘버리고’... 초보를 버리라고 합니다.
초보를 버리고 완전함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완전함이란 바로 견고함입니다.
완전한데 나아가지 못하면 히6:1절부터 8절까지 전체를 계속 반복해서
제자리를 밟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초보의 기독교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완전한데 나아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한 편 강도도 주님이
구원하셨는데 나중에 회개해도 됩니다. 그러나 방학 숙제가 밀리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하려면 아주 바쁜 겁니다. 간혹 가다가
한 몇 개월씩 병원에 입원해서 하나님과 단독 면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밀린 숙제 한꺼번에 하는 겁니다. 그렇게 몇 번 하다 안 되면 하나님께서
‘너는 숙제만 하고 가는 게 차라리 낫겠다’ 하시곤 데려가십니다. 그게 최상입니다.
더 이상 가능성이 없으면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완전한데 안 나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처음부터 다시 밟아가야 됩니다. 이게 보통 피곤하고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성령의 보증을 받고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이 자유를
누려야 하느냐 하면 이게 안 되면 마귀가 자꾸 끌어 내립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안 매고 있으면 마귀가 우리를 끌어내려 그만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초를 반복 닦도록 만듭니다. 크고 싶어도 마냥 어린아입니다.
지금 그런 목사들이 유뷰브에서 떠들어대고 있는데 젖병을 들고 있는 줄 모릅니다.
이걸 보는 것이 보통 고통이 아닙니다. 마귀가 자꾸 참소하니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흡사 어린아이가 강아지하고 싸우는 꼴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첫 번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면 아담 안의
것에 대해서는 이미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는 일망타진 되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데 안 나가면 마귀의 참소에 의해 아담 안의 죽었던 행실을
매 번 반복해서 회개해야 됩니다. 죄의식이 어디선가 계속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이 어디서 오는 지도 모르고 맨 날 그 죄가 기억나는 데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다시 밟아오는 겁니다. 진리를 따라 완전한데 나가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하는 회개는 하나님이 시원하게 안 받아 주십니다.
뚜렷한 말로 한 마디 한 마디 분명하게 해야 정확하게 받아주시지 방언으로
두루뭉술하게 해 버리는 회개는 제대로 안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방언은 영에
도움은 되지만 그것이 마음에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겁니다. 마음에 맺히는 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언어로 한 마디 한 마디 주님 앞에 고백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조차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라는 겁니다. 이런 것은 진리를 깨닫기 전의
지난날의 신앙만으로 족한 겁니다. 그러므로 이걸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야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초보입니다. 무슨 표적이나 증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내적인 역사를 일으켰을
당시 그에 대한 성경적인 객관적인 증거가 있으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렇게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앙입니다. 아직도 밖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증거를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린 신자들은 그런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고 의심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보세요.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나이 86세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99세 나타나셨습니다.
86세부터 99세가 되도록 무려 13년 만에 나타나셨습니다. 나 같으면 어떻게 견디겠나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마디 한 마디
그 내용만 들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신 그 말씀이 아브라함 안에 들어와서
그를 움직인 겁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은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그 말씀이 아브라함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나타나지 아니하셔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서 그를 움직였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성공한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좇는 이들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바로 롬4:18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되게 하려 하심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이미 완료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피동으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상태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의 하나님의 말씀을 창15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는 순간 ‘되게 하려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
속에서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믿는 자 곧 현재적으로 믿고 있는 자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초보의 세 번째는 세례입니다. 세례 받을 때에 교회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것을 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주기도문 외워보시오.
사도신경을 외워보시오’ 그게 무슨 세례의 조건이 되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어느 목사가 ‘나는 교회 청년으로 있을 때에 내 모습이 온전치 못해서 성찬 예식
때에 떡도 안 받고 포도주도 안 받았습니다. 내 모습이 시원치 않았어요’ 라고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건 세례의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성찬이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생각해 봅시다. 육체를 가진 어떤 인간이 떳떳하게
그 떡과 잔을 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거룩해져서 그 잔을
받으려면 누가 받을 수 있겠어요. 고전11장에서 그것을 범하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한다는 말은 바로 세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례가 뭐냐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의미를 모르고 그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예수의 몸과 피를 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가 행위의 죄를 짓고 회개를 하지 않아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과 한 몸, 한 떡, 한 영이 된 이 비밀을 모르고 그걸 먹으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인해 약한 자도 많고 병든
자도 있고 심지어 죽는 자도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고전11:27-30)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두고 예를 들겠습니다. 이것 하나 만드는
비용이 천원 쯤 들겠습니까? 이 돈 자체의 가치는 이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그러나 이 돈에 한국은행장의 직인이 찍히면 오만원의 가치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세례의식과 같습니다, 세례의 의식과 세례의 의미가 이만큼 다릅니다.
세례냐 침례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식 자체보다 진정한 결혼은 합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혼식을 더 중요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혼식 보다 중요한 것은
결혼 자체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단은 다른 곳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다시 세례 받으라고 하는데도 있습니다. 사실은 세례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세례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성령이 역사해서
내가 마음의 할례를 받았는가 그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따라서 표면적 세례가 아니라 이면적 세례가 세례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입니다.
따라서 물세례의 의식에 대해 자꾸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초보라는 겁니다.
한국 교회는 약세니 침례니 하며 싸웁니다. 그러면 죄인을 침례시켰다고
제대로 의롭게 되는 것이고 약세를 하면 가짜 의인이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초보의 네 번째 안수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아야 비로소 위임을 받은 제사장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설교를 할 수 있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목사 안수 안 받아도 복음을
전하고 싶으면 전하세요 다만 나는 목사라고는 말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리고 초보의 다섯 번째는 부활문제입니다. 고전15: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예수의 무덤에서 다시 사심과 죽은 자 가운데, 곧 그 안에서 부활이 다릅니다.
예수의 다시 사심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아담 안에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겁니다. 그래서 롬8:10은 말씀하시기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므로 아담 안에 죽은 우리를 다시
살렸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부활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다시 사심이 있습니다. 첫 열매입니다.
유대인의 절기를 보면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날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삼 일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초실절은 곡식의 첫 단을 묶어서 하나님께 흔들어 드리는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단에 묶인 우리가 다 하나님께 드려진 겁니다. 예수님이
혼자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우리는 이미 그 분에게 성령으로 인해 한단으로 묶였습니다.
초실절에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이 첫 열매이신 예수의 다시 사심의 의미입니다.
주님과 한단에 묶이면 너희는 땅에서 살다가 언젠가 내게 올 것이다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진리의 성령으로 오셔서 ‘너희 안에 거하겠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다시 사심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심이 따릅니다. 아담 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서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도다’(엡2:1)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죽은 자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이걸 못 믿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답답해하는 겁니다.
고전15장은 부활장이라고 하는데 예수의 다시 사심이 있고 난 다음 성도들의
마지막 날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며 생명’(요11:25)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임하셔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현재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부활이 없으면 장차 부활도 없습니다. 현재 죽어 있는 사람이 죽으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사람은 죽어도 영원히 삽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고전15:12절에서 50절까지 길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죽었던 자들이었던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신 사건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마지막 때의 껍데기를 바꾸는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고전15:51-52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것이 바로 마지막 날에 있을 형체 부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역사적인 다시 사심은 알고, 마지막 날에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은 알지만 그분이 우리 안에 임하셔서 아담 안에서 죽었던
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자꾸 뭉개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담 안에 머물면서 잘 가르치려고 하는 목사에게 당신 지금 선 자리는
죽으면 불 못으로 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말을 해 줘도 그 사람이 사망에 의한
암 병은 무서워해도 사망을 가지고 죽으면 불 못에 간다는 사실은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요일 4장 2절은 말씀하기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합니다.
‘육체로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사실 이것만 생각합니다. 영어성경만 봐도 육체로 가 아니고 육체 안에
오신(in the flesh)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귀신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봤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시고 그의 성결의 영(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롬1:4) 그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이를 부인하면 하나님께로 난 영이 아닙니다.
요14:16-20절 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신다 하시고는 바로 내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오신다고 하십니다. 오셔서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육체 안에 임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적그리스도(anti Christ)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겁니다. 인자이신 예수를 거역을 해도 기회가 있지만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인자는 우리 안에 오실 수 없으나 성령은 우리
안에 임하셔서 생명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은 마음의 할례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만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게 바로 하늘과 땅이 바뀐 천지개벽이 된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이
안 믿어지니 이 말씀을 떼어 내 버리고 막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천국은 언제나 죽어서 가는 천국입니다. 현재 천국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기는 현재 천국이 없는 사람은 장래 천국도 보장 못합니다.
천국은 항상 현재입니다 지금부터 영원한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우리가 부활했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면 부활이지요. 그래서 엡2:1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게 바로 부활입니다.
내가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씨가 들어왔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초보의 마지막 여섯 번째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이야깁니다.
이것은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 하는 말입니다. 이것 또한 초보입니다.
그래서 천국지옥을 봤다는 사람은 아직 그 사람은 사망의 그늘 아래 음부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건 경고일 뿐 결코 그 사람의 신앙의 계급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천국지옥을 봤다는 교수가 전국을 순회하고 있으니 총체적인 초보입니다.
성경은 이런 초보들을 버리고 그 이상의 자격을 갖추자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초보들을 빨리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입니다.
오늘은 기본이 왜 중요한지 다시한번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감사한것은 마귀가 환경으로, 내면으로
참소해도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치고 들어가면 다시 평정한 상태로 돌아 갑니다.
아멘!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목 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우리들의 영혼 또한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낙심과 불안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고 앙망할 때마다 우리의 얼굴을 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