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
시사저널 인터뷰 기사<2011/11/27 19:43>
□2011즉문즉설 “여성에게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
□이야기손님 : 현경 유니온 신학대 교수
□진행 : 황대권 권미강
□주최 : 생명평화결사 주관 :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후원 : 한겨레
□일시 : 2011년 11월 24일 목요일 밤 7시
□장소 :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지하2층)
□현경소개
1979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1981년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유학길에 올라 1989년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모교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7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총회 사상 처음으로 제1세계 신학자가 아닌 아시아 출신 여성으로 주제 강연을 맡았다. 그 자리에서 성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강연한 이후, 세계 각국에서의 폭발적인 찬사와 비난, 그리고 강연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세계 진보 신학의 산실이라 일컬어지는 유니온 신학대학의 종신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종교간 세계평화위원회의 최연소 및 최초 아시아계 여성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튀는 외모와 사고를 지닌 그녀는 학문, 사회운동, 영적 수련,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여성·환경·평화 운동가로 활발히 활동중이다.
저서로는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2』『미래에서 온 편지』 등이 있다.
유니온 신학대 현경 교수, 크리스마스에 협박 받아
'증오범죄'로 추측...학교측,
"현경 교수 안전 위해 순찰 돌 예정"
▲ 현경 교수 현경 유니온 신학대학교 교수가 이번 협박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진보적인 신학을 펼친다는 뉴욕 맨하튼 유니온 신학대학교. 이 학교 최초의 동양인 종신교수인 현경 교수는 지난 2006년 크리스마스 연휴 뒤 끔찍한 전화 메시지를 받았다.
"제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면서, 네가 존경하는 체게바라 남미 혁명가와 북에 가서 둘 다 목을 자르라는 아주 무서운 말을 남겼더라고요. 그리고는 여성에게는 그야말로 치욕적인 '멍청한 XX'(You stupid cunt)라고 했어요.“
지난 4일, 뉴욕 맨하튼 유니온 신학대학교 교수연구실에서 기자와 만난 현경 교수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는 지난 11년간 이 학교에서 여성신학과 평화, 종교간 대화 등 진보적인 주제로 강의를 해왔다. 특히 2006년에 학기 중 부시 행정부의 대북, 대 이슬람 정책의 잘못된 점에 대해 강의를 한 바 있다. 현경 교수는 당시 수업을 들은 학생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냥 넘어 갔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크리스마스엔 현경 교수 사무실 앞에 걸린 쿠바 혁명가 체게바라의 포스터에 엑스표시와 함께 체게바라 이마에 나치의 상징 문양이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2005년 크리스마스 전후 두 차례나 자신의 집에 있는 조각상의 머리가 잘려 나간 경험까지 더하면 3년 연속으로 크리스마스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협박을 받은 것.
현경 교수, 크리스마스 때마다 협박 받아
조각상은 멕시코의 혁명 예술가로 유명한 디에고 리베라의 대표작 모조품이었다.
결국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현경 교수가 진보적이고, 체게베라를 존경하고 있다는 등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커졌다. 더 이상 우연이 아님을 느낀 현경 교수는 지난 4일 경찰에 신고했다. 물론 학교측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현경 교수는 사실 이번 역시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가장 큰 이유는 길 건너에 위치한 컬럼비아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
"우리 학교 역사상 이런 일이 없었대요. 그런데 지난해 컬럼비아 대학에서도 흑인 여자 교수의 사무실 앞에 '누즈'(Noose)라고 흑인들을 교수형 시켰던 끈을 달아놨던 일이 있었어요. 또 유태인 교수의 사무실 앞에다가는 '나치' 표시를 해놓는 일도 벌어졌었어요.“
현경 교수는 "미국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이슬람 등 다른 문화나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적 분위기가 진보적인 학풍의 컬럼비아나 유니온 신학대학의 젊은이들까지 망가뜨리고 있다"며 "이번 사건을 공식화해서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학생들에게도 알려야 할 것 같았다"고 심경 변화 이유를 밝혔다.
그는 이어 "내 안전도 걱정됐지만 더 슬펐던 것은 어떻게 우리 학교(유니온 신학대학교) 같이 진보적인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가슴이 아팠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와 관련, 유니온 신학대학교 측은 재발을 막기 위해 범인이 밝혀지면 법적인 절차를 밟을 계획.
4일 만난 매리 맥나마라 유니온 신학대학교 부총장은 "우선 총장 명의로 전체 학생들에게 이번 사건에 대한 전체 공고가 나갔다"며 "더 많은 절차가 필요하지만 앞으로 현경 교수의 사무실과 집 앞에 CCTV를 설치하고, 경찰이 매 8시간마다 그의 안전을 위해 순찰을 돌 예정"이라고 밝혔다.
학교 측은 개강 뒤인 2월 이후 더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동일인이든 아니든 만약 자수를 한다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법적 책임까지 묻게 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다.
진보 학풍 대학, 교수 상대 '증오 범죄' 잇따라
지난해 10월, 컬럼비아 대학 티처스 칼리지 흑인 교수인 마돈나 콘스탄틴 교수의 연구실 앞에 '누즈'(흑인들을 교수형 시켰던 끈)가 발견돼 논란이 일었다.
이후 학생들은 흑인에 대한 명백한 인종차별적 '증오 범죄'라며 시위를 벌이는 등 한동안 학교 안팎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뉴욕타임즈, CNN 등 주류 언론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보인 바 있다. 비슷한 기간 한 유태인 교수의 연구실 앞에 '나치' 상징 문양(卍)이 그려져 있어 역시 논란을 일으켰다.
유니온 신학대학 측은 이번 현경 교수의 경우도 '증오 범죄'형 협박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매리 맥나마라 유니온 신학대학교 부총장은 "학생들끼리 장난으로 상대방 물건 등에 낙서를 하는 경우는 많이 봐 왔다"며 "하지만 교수를 상대로 나치 상징을 그린다든지 엑스표시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증오범죄'(Hate Crime)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민족, 동성애자, 특정종교인 등 자신과 다른 사람 또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층에게 이유 없는 증오심을 갖고 불특정한 상대에게 테러를 가하는 범죄행위를 일컫는 말. 나치주의자, 쿠클럭스클랜(KKK)등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범죄 등이 실례
시사저널 제 655호에 실렸던 현경 교수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에코페미니스트 현경 교수 인터뷰
외국 영화에서 보았던 피크닉 가방. 왼쪽 가슴 위에는 커다란 꽃. 2주 전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교육방송(EBS) 화면에 등장하는 현경 교수(본명 정현경·미 유니온신학대 종신교수)는, 소풍이라도 떠날 것 같은 채비였다. 오후에 제자들과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일약 세계적인 여성 신학자로 떠오른 현경 교수는 초교파를 연구하는 기독교 신학자인 동시에 숭산 스님으로부터 '대광명'이란 법명을 받은 불교학도이기도 하다. 그는 종교 간 벽을 허무는 신학자에서 벗어나 생명 여성주의 쪽으로 나아가 있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 종교평화위원회 최연소 회원이기도 한 현경교수는 자신을 '살림이스트'라고 말한다. 지구와 생명을 살려내는 사람. 그가 교육방송 특강에서 '내 안에 있는 여신을 찾자'고 주장하는 까닭도 생명평화 운동과 연관된다.
하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그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은 힘찬 박수를 보내고 있지만, 보수 교회는 그에게 '레드 카드'를 내밀고 있다. 지난 7월13일(토) 오전 9시, 서울 인사동 경인화랑 찻집에서 기자와 마주 앉은 현경 교수는 월드컵 열기와 붉은 악마들에 대한 예찬으로 말문을 열었는데, 인터뷰 내내 거침이 없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물러서거나 비켜가지 않았다.
질의/ 한국 축구선수 중에 누구를 좋아하는가?
황선홍을 좋아한다. 모든 걸 다 겪은 남자의 얼굴이 있다. 그 표정, 아, 축구도 너무 잘 한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패스 능력도 뛰어나다. 한 신문에도 썼지만 한국 남자 정말 멋있다.
질의/ 종교인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종교인들이 국가, 한국 때문에 응원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붉은 악마 때문에 응원한 것 같다. 종교는 모순이 많고, 일관성이 없을 때도 있다. 종교인들이 축구, 즉 승리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고 불쌍하게 여겼다면, 세계 종교는 문제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종교를 가지든, 한국인은 정말 다 무당의 딸, 아들인 것 같다. 이번 월드컵에서 느꼈다. 이렇게 무기(巫氣)가 많은 나라,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축구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한풀이를 좋아한 것이다. 축구라는 매개를 통해 여자 안에 이미 있는 리비도, 열망이 표출된 것이다.
질의/ 왜 이름에서 성을 뗐는가?
호주제 폐지를 위해서 그랬다. 부모성을 함께 쓰는 분들도 있는데, 어머니 성도 결국은 어머니의 아버지 성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성을 쓰지 않는다. 이름도 바꿨다. 원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어질 현(賢)에 구슬 경(璟)으로 아주 여성적이었는데, 검을 현(玄)에 거울 경(鏡)으로 바꾸었다. 현은 도덕경에 나오는 오묘한 암컷(현빈)에서 따왔고, 경은 불교의 맑은 거울에서 빌어왔는데, 일종의 메타포다. 여성들에겐 거울 콤플렉스가 많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는 동화처럼 말이다. 나는 부서진 여성들이 찾아와서 나(검은 거울)를 찾아와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으면 그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질의/ 왜 여신을 강조하는가?
여신의 시대, 모계사회가 훨씬 길었다. 청동기, 철기시대, 그리고 기마민족과 무기의 도입과 함께 가부장제가 더 발전했다. 긴 인류 역사를 놓고 보면 5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제는 트림 한 번 하는데 불과하다. 너무 초조하게 남자와 평등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웃음). 물론 여성에 대한 불평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성폭력을 비롯해 직장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은 아직도 여전하다. '간 큰 남자' 시리즈 같은 것은 남자들의 엄살이다.
질의/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7년 동안 강의를 하고 1996년 다시 유니온대로 떠날 때 '작은 고추론'으로 화제가 되었었는데.
작은 고추는 맵지 않다, 오직 작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작은 것이 아름다웠다. 시청 앞에서 배꼽티를 입고 붉은 악마들과 신나게 놀았는데, 멋있는 아줌마라고 칭찬도 들었다. 그 아이들의 감성, 언어가 참 좋았다. 신문기자가 '전쟁나도 이렇게 나와서 싸울 거냐?'고 물었더니 붉은 악마들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 때와 너무 달라서 좋다.
질의/ 요즘 신세대를 어떻게 보는가?
요번에 책(<미래에서 온 편지>)을 쓸 때, 지구를 구하는 민병대(살림이스트)를 모집했는데, 자원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 책 뒷표지에 이렇게 쓰려고 했다. '경고 : 30대 이상의 남자가 이 책을 볼 경우, 심신 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가 너무 얌전하고 고상했다. 제목도 '그래, 나 꼴뚜기다'라고 하려 했다. 그게 한국문화에 대한 나의 선언일 수 있었다.
질의/ 왜 하필 꼴뚜기인가?
1991년에 세계교회협의회 사상 처음으로 제3세계 여성으로서 주제 강연을 했다. 그때 제3세계와 여성 신학자들이 2천년 유럽 신학, 남성신학, 엘리트 신학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신학이 나왔다고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세계적인 신학 잡지에 다 소개가 됐는데, 한국에 왔더니 한국의 보수 매체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나를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빨간 글씨로 매일 회개하라고 쓴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질의/ 요즘도 그런가?
요즘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보수 교회에서는 내 책을 절대 읽지 말라고 한다.
질의/ 교육방송 텔레비전에서 '21세기 특강'을 맡았는데, 주제가 무엇인가?
메리 데일리가 이런 말을 했다. '신이 남자이면, 남자가 신이 된다'. 그렇다고 여자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21세기가 여성의 세기가 된다고들 하는데, 여자 중심주의가 되어 남자를 노예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피라밋의 맨 위에 있는 남자가 여자만 짓누르는 게 아니다. 돈없는 남자, 유색인종 남자, 동성애자 남자 등 자기와 다른 모든 남자를 누른다. 남자도 여자 못지 않은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피라밋의 구조를 축구공의 구조로(웃음) 바꾸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반지름에 있는 그런 문명을 만드는 게 페미니즘이다. 남자가 깨어나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에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질의/ 9·11사태를 현장에서 목격했는데.
그날 현장에서 문명의 전환을 예감했다. 그것은 여신의 레드 카드였다. 9·11 테러는 두 가부장제의 충돌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미국 자본주의의 마초가 충돌한 것이다. 종교 근본주의자와 마초 근본주의자가 만나면 죽고 죽이는 상황밖에 없다. 이건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레드 카드다. 뉴욕에서 오래 살았는데, 뉴욕에서 처음으로 종교성을 발견했다. 전 도시가 성소가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가장 큰 계기는 슬픔이다.
뉴욕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밤에 행진을 하고, 마리화나를 피우던 유니언 파크가 성소로 변했다. 테러 피해자 가족이 '내 아들이 무역센터에서 죽었다. 내 아들의 이름을 팔아 다른 나라의 아들딸을 죽이지 말라'라고 쓴 편지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았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럼 당신이 먼저 평화가 되십시오'라는 간디의 말도 다시 나왔다. 미국의 모든 대학에서 이슬람 강의가 개설되었다.
질의/ 여신은 누구인가?
마리아 김바투스같은 고고학자가 일생을 두고 가부장제 이전의 여신 문명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분의 연구에 의하면, 신이 여신이던 시대, 모계 시대가 훨씬 평화롭고, 군사력보다는 농경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고 한다. 인간 안에 있는 공격성은 스포츠로 표현되고 군대는 방어 위주의 소규모였다고 한다.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이다. 문명의 핵심이 정복이 아니라, 축제와 나눔, 돌봄이었다. 이것이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21세기 새로운 문명이다. 호주제 폐지, 가족법 개정, 남녀 고용평등제 등도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사람을 가장 억압하는 것이 종교적, 상징적 억압이다. 제도나 의식보다는 상징, 영성, 종교성 등 무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질의/ 왜 그렇게 당당한가?
독일에 가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독일 여성들이 내 강의 내용보다는 '당신은 왜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는가?'라고 물어왔다. 몸집이 나보다 크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한 박사들인데.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나는 너무나 비가부장적인 아버지, 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부모가 있었다. 그리고 동양의 상징 체계는, 유교 문화가 있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여자를 존재론적으로 악이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여자는 갈비뼈라고 했고, 여자로 인하여 악이 들어왔다고 했다. 여성, 물질, 자연이 다 악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론적 열등감이 없다. 유교 이전에는 여성이 중심이었고, 5천년 무속의 역사는 가장 에코(생태론)적일 수도 있다. 자연적이고 인간 안에 있는 폭발적 생명력이 무속의 근거가 되어 있다. 문화, 문명의 유전을 인정한다면, 5백년 유교의 역사는 무속과 같은 생명 중심의 문화에 비하면 트림에 불과하다. 그 여자들의 피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고추제국주의에도 불구하고 트림에 흔들릴 수 없어서 당당하다고 말했다. 그때 유럽 여자들의 집단 무의식에 들어 있는 마녀사냥을 알게 되었다. 유럽 인구가 얼마 안 되던 중세에 9백만 명의 여자가 마녀라는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각 마을의 튀는 여자는 다 죽인 것이다. 그게 유럽 여자들에게 유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질의/ 텔레비전 특강 반응은 어떤가?
반응이 좋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온 방청객들이 가득하다. 자리가 모자란다. 2회 밖에 안 나갔는데, 두고 봐야 한다. 회가 거듭될수록 강도가 강해질 것이다. 처음에 너무 세게 나가면 프로그램이 없어진다고 PD들이 엄포를 놔서, 내가 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다. 오프라 윈프리 같은, 할말 다 하는 방송국을 세워야겠다. '좃도 없는 놈'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우리가 매일 욕을 쓰는데, 욕도 못하게 하고 '똥'이란 말도 못한다. 선정적인 얘기, 성적인 얘기, 특정 종교에 대해 심하게 비판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나마 프로그램이 살아서 나의 사상을 펴는 게 낫다며 PD들이 많이 설득한다. 여자를 가장 억압하는 것이 종교이다. 종교가 여자를 무시할 수 있는 모든 상부구조를 마련해줬다.
질의/ 왜 기독교신학을 선택했는가?
학생운동 때문이다. 신학은 전혀 생각하지 않던 문학소녀였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우리 선배들이 남자들에 의해 개끌려가듯이 끌려갔다.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했는데, 서울대에 다니던 남자 선배가 그 이유를 알려주겠다며 데리고 간 곳이 창녀촌이었다. 그 빈민촌에서 야학 교사를 했고, 청계 피복 노조의 오락 교사도 했다. 3대째 기독교 집안인데, 창녀촌과 거기 사는 아이들을 보고 나서 '하나님 없다. 있다면 직무유기다.
나는 하나님을 파면시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순진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신과 싸워야 답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이제 신학을 25년하고 나니까 다시 예술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질의/ 초교파에 관한 연구는 언제 시작했나?
숭산 스님의 제자가 되면서 불교 명 상을 시작했고, 7년 전에 세계종교평화위원회에 들어갔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 불교 이슬람 지도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일하는데 그분들이 너무 존경스러웠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어, 종교는 언어시스템이구나, 영어, 불어, 한국어가 있듯이 다 다른 말로 궁극적 존재에 대해 표현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우주의 눈으로 보면 기독교, 불교, 이슬람이 다 우주의 자녀이다.
질의/ 한국의 초교파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특히 개신교는 너무 배타적이다. 도리어 불교, 가톨릭은 많이 열려 있는 것 같다.
질의/ 개신교가 그렇게 배타적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의 종자가 배타적인 것이었다. 개신교 안에 너무나 많은 종파와 전통이 있는데, 미국의 근본주의, 문자주의가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미국 자본의 세력을 가지고 온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미 군정, 한국의 성장주의와 함께 한국 기독교도 새마을 운동을 한 것이다.
질의/ 기독교를 사랑하는 이유는?
기독교를 사랑한다기 보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내 가족이다. 그런데 가족 중에 예쁜 사람만 있나? 미운 사람도 내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한다. 한국 기독교 안에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는 분들도 많다.
질의/ 최근 총리서리가 된 장상 총장에게서 배웠는가?
아주 모범적인 교수님이셨다. 그분한테 바울신학을 배웠는데, 보통 바울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장상 선생님은 바울 안에서 여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았다. 총리를 시키려면 정권 초기부터 시키지,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았을 때 시켜서 아쉽다. 그러나 역사는 서서히 변한다. 물꼬를 트는 것은 중요하다. 여자 총리가 나왔으니까 여자 대통령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질의/ 신을 설명하는데서 벗어나 신을 표현하겠다고 했는데.
너무나 많은 사설을 붙이는 것이 도리어 신을 추상화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내가 믿는 예수, 신을 아주 작은 모양이라고 해도 표현을 하면서 신의 느낌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래서 생명음악회와 여신축제도 했고, 9월에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초청해서 생명평화음악회도 하고, 제주도에서 여신 캠프를 열려고 한다. 나는 여신을 문명의 메타포로 쓰고 있는데, 사실 신은 남자가 아니다. 가부장적 문명에서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신을 얘기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남자 신을 내세운 것이다. 그것을 치유하고 균형을 잡으려면 여성성이 있는 신을 표현해야 한다.
질의/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만약 내게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다면 모든 생명이 메시아라는 정도의 콤플렉스일 것이다. 하나의 잘난 사람이 깃발을 드는 것은 가부장적 모습이다. 고정희 시인이 쓴 '하나보다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처럼 수천수백의 얼굴을 나타내고 싶다. 작지만 단단한 사람들이 함께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
질의/ 소설가 박상륭씨가 새로운 메시아는 종교간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좋은 말씀이다. 메시아는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고 생명의 기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양기가 아니라 음기에서 올라오는 보살핌과 살림의 문화로 가야 한다.
질의/ 현경 교수의 역할을 여자 세례 요한으로 봐도 되는가?
그거야 해석자의 자유다. 나는 살려내는 사람, 생명 여성주의자, 살림이스트다. 남녀노소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다.
그간 선보인 퍼포먼스를 보면 제사장처럼 보였는데. 그게 내 역할이다. 나는 목사 과정을 전부 마쳤는데, 마지막에 '노'했다. 왜냐면 내가 너무 많은 권력을 가졌다. 박사에다, 석사 학위가 셋이지, 거기다 종신교수다. 이런 권력이 여성과 나 사이를 멀게 만들 것 같다. 목사 안수는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 기능적인 근거일 따름이다. 옛날 사제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우주, 민중이 선택했다. 나는 가부장적 사제는 하지 않겠다. 성과 속을 나누는 것도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유럽적 사고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질의/ 현경 교수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내가 튀니까(웃음). '하자 센터' (조혜정 교수가 서울시 지원을 받아 세운 대안적 직업학교) 동아리인 '소녀들의 페미니즘' 동아리 소속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읽혔는데 웃다가 울다가 난리였다. 걔네들이 내 책을 작은 영화로도 만들었다. 그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 책은 무슨 책이지? 성경책. 잘 때 베고자는 책. 슬플 때 읽는 책'(웃음)
소녀들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이번에 고정희 10주기 추모제를 그 소녀들이 열었는데, 내가 사제로서 도와주러갔다. 그때 내가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는데, 소녀들의 첫 마디가 '정말 색깔 죽인다. 이 머리 어디서 하셨어요?'(웃음)였다. 사제로서 도와주러 갔는데, 제례에 관해 묻지 않고 머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너무 귀엽고, 예뻤다. 하자 애들이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애들인데, 나는 정서적으로 맞는다.
내가 퍼포먼스나 출판기념회를 할 때 하자 애들이 도와줬다. 내 책을 읽은 20대 남자는 자기 부인과 읽고, 부인이 임신했을 때는 뱃속의 아이에게 내 책에 나오은 여신 10계명을 읽어줬다고 한다. 아내 배에다 대고 '여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여신은 기, 끼, 깡이 넘친다'라고 읽어줬다는 것이다(웃음)
질의/ '깡'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해 보인다.
깡없으면 우리가 4강에 올랐겠는가? 깡이 없었으면 나같은 여자가 서구 신학의 첨탑이라는 유니온신학대의 종신교수가 되었겠는가? 사실, 나보고 실력없다고 말들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실력이 없으면서도 여기까지 온 게 내 실력이다. 내 영혼의 실력이다. 내가 한국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대학 4년 내내 데모하느라 제대로 된 교육 못 받았다. 그때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다 금서였다. 기초가 너무 없다. 외국에서도 '그래, 나 실력없다. 꼴등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의 실력은 창녀촌, 청계 피복 노조에서 일했던 그 실력, 그 깡이다. 지하실에서 나 고문하던 아저씨(경찰)한테 '눈을 보며 이야기합시다, 아저씨도 저 같은 딸이 있죠? 이 직업이 너무 괴로우시죠?'하던 것이 내 실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 국제적인 경력이 너무 슬펐다. 미국에서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중고등학교 때 라틴어, 철학을 다 떼고 대학에 온 유럽 애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쩌고 나오면 나처럼 기초 교육이 안 된 애들은 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니네가 제 3세계 슬픔을 아느냐, 그리고 니네들이 바로 그 원인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이 많느냐, 내가 니네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잘 모를지 모르지만,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민중들의 울음 속에서 나온 그 신학은 니네들보다 훨씬 더 잘 안다라고 한다. 나보고 영어 못한다고 하면, 니네들 한국어 잘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
유니온신학대에서도 내가 일본 사람만 됐어도 억울한 일을 덜 당했을 것이다. 교수 사회에서도 인종 차별이 있다. 내 위에 일본 출신 남자 교수가 있었는데, 나는 한국 출신에다 여자여서 입지가 더 어려웠다. 그런데 나는 교수회의에서도 이상한 얘기 나오면 '당신, 인종차별주의자냐'라고 대든다. 정말 내가 깡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무당의 딸은 무당에게로, 교회는 교회답게'라는 삐라를 만들어서 뿌렸다.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무당의 딸은 다 잡아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너무 불안해서 집을 옮긴 적도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니 멋대로 해라'. 마틴 루터는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과감하게 죄 지어라'라고 했다. 나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깡으로 살 수 있었다.
나보고 실력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실력은 정말 꼴 같지 않은 것이다. 여기저기 외국 책 번역해서 종합해서 내면서, 오리지날리티도 없으면서, 여성신학은 학문도 아니라는 소리나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얘기 받아들일 수 있다. 틱 낫한, 숭산 스님 만나면서 우리나라 남자 학자들을 다 용서하기로 했다. 그들도 약소민족의 열등감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질의/ 지금 여기에서 요청되는 참 종교인은 누구인가?
생명을 살려는 것이 참 종교의 역할이다. 평화가 있어야 생명이 살 수 있다. 또 정의가 없는 평화는 노예제도다. 거기서는 생명이 꽃피울 수 없다. 예를 들면 아프가니스탄 같은 데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 나무도 다 죽는다. 평화의 문제는 정말 생명의 문제다.
질의/ 그 생명 평화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백만 가지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 옛날 운동권에서 여자 기죽이는 방법으로 제1모순이 있고, 제2모순이 있다는 식의 얘기는 믿지 않는다. 자기가 처한 장소에서 제일 꼴리는 것, 제일 억울한 것을 하라는 것이다.
땅을 살리는 문제라면 유기농을 하고, 호주제가 문제라면 호주제를 폐지하는 등 자기가 처한 모든 자리에서 정말 동시다발적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한 기업이 내는 천억 원보다 모든 국민이 천원 씩 내는 그 돈이 훨씬 힘이 있다. 나는 하나보다 더 좋은 백만의 얼굴이어라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여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한 잘난, 거룩한 마초, 군주 같은 신이 아니라, 남자들 안에도 있는 여신, 나누고 보살피는 그 여신이 몇 백만의 꽃처럼 다 다른 색깔,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이 새로운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질의/ 예술가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예술가를 원하는가.
삶의 예술가(웃음). 특별한 기능을 배우는 예술가가 아니고 삶의 설치 미술가라고 할까. 그것은 내 삶일 수도 있고, 우리들의 삶일 수도 있다. 생명을 표현하는 모든 매체를 동원하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내가 공연할 때도, 설치 미술, 무용, 음악 여러 도움을 받는다.
질의/ 왜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아까 말했던 평화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사 논문을 쓸 때 아주 희한한 경험을 했다. 아시아 여성 해방이 논문 주제였는데 이전에 아무도 쓰지 않아서 모델이 전혀 없었다. 아시아 전역을 누비며 인터뷰를 해서 쓰려는데, 주위에서 이런 논문은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논문으로는 박사가 될 수 없다는 문화 권력의 압력이었다.
나는 죽어도, 죽은 서양 남자의 이론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는 아시아 여성에 대해서 쓰고 싶은데, 기독교 신학 안에는 그것을 담아낼 방법론, 그릇이 없었다. 고민을 많이 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때 선을 배우고 있었는데, 기독교와 불교를 섞어서 기도와 명상을 하곤 했다. 그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내가 몸 밖으로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됐다. 그런데 그때 어떤 분이 나타나서, 계속 나를 도와줬다. 꿈에 나타나서 내가 필요한 자료며 논문을 일러줬다. 어떤 때는 패널 토론까지 시켜줬다(웃음). 밤에 자다가 깨어나서 막 메모를 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 3년 동안 안 써지던 논문을 두 달만에 끝냈다. 거의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은 느낌이었다. 그분과 여러 신화적인 경험이 많았다.
질의/ 그분이 누구인가?
내가 꿈에 똑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 누구입니까,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니까 '꿘인'이라고 답하더라.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50~60대 아주머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종교 백과사전을 뒤지다 보니까 꿘인이 나왔다. 관세음보살이 중국에 가서 여신이 되었는데 그 여신의 이름이 꿘인이라는 것이었다. 너무너무 놀랐다. 왜 중국 여신이 나에게 나타났을까. 명상할 때 그분이 나타난 풍경이 낙산사 앞에 있는 의상대 같았다.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거기를 찾아갔다. 나는 그 절이 어떤 절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너무너무 커다란 관세음보살이 서 있었다. 갑자기 내 인생의 퍼즐이 착착착 맞아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난 기독교의 신학 박사학위를 쓰면서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을 때, 나를 도와준 신화적 인물이 중국의 여신이었고, 그것은 관세음보살의 현현이었다, 그리고 나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낙산사에 와 있는 것이었다.
주지스님한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부터 정식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융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우주에 신화적인 것들이 떠돌다가 어느 순간에 동시적으로 나타나 얘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하바드에 교수로 있을 때 숭산스님을 만나 불교에 대한 속성 과외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매일 두 시간씩, 할아버지가 손녀 가르치듯이 '옳지, 옳지' 하시며 가르쳐 주셨다. 숭산스님이 '대광명'이라는 법명을 내리셨다. 그때 하바드 대학원생으로 있던 현각 스님도 만났다. 그 다음에 틱 낫한 스님도 만나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질의/ 왜 한국을 떠났는가?
내가 하바드에서 아시아 여성 해방신학을 가르칠 때 사실 나는 너무 괴로웠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나를 박해하는 것이었다.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김명곤씨가 도와줘서 사물놀이를 연주하고, 원주민들이 춤을 췄다. 그것 때문에 나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유니온신학대에서는 '학교를 가장 빛낸 졸업생', 어떤 잡지사에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창조적인 신학자'같은 명예를 받았는데, 이화여대에서 교수 평가를 받을 때 0점을 받았다. 그래서 진급이 안 되었다.
학교 어른들한테 물었더니 '네가 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대가 원하는 식의 논문을 써라'라는 것이었다. 1996년, 나는 한국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대를 떠난 것이다. 그때 유니온대에서 종신교수로 오라고 했다. 종신교수는 학교에서 쫒아낼 수가 없고, 은퇴를 안 해도 된다. 3년 일하면, 1년을 쉴 수 있다. 지난 번에 히말라야에 갔던 것도 안식년을 이용해 간 것이다. 이 다음에는 이슬람 나라에 가서 1년 살고 싶다.
코란을 연구하는 게 아니고 이슬람의 신비주의, 수피즘을 공부하고, 이슬람 여성들의 삶을 이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살펴보고 싶다. 내가 유니온에서 세계종교를 가르치는데, 경전보다는 살아있는 종교를 가르친다. 나는 살아있는 종교의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다. 삶의 영성, 이슬람 불교의 영성으로 접근하면 못 만날 사람이 없다. 세계를 다니며 느낀 게 지구가 너무나 작은 파란 별이라는 것이다. 나는 요즘 누가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물으면, 나는 지구인이라고 답한다. 한국에서 났다는 것은 생명의 우연이다.
미국 PBS에서 방영한 프로그램 중에 <최초의 이브>가 있는데, 인류의 조상은 동부 아프리카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초적으로 모두 아프리카인이다. 그런데 흑인들을 무시한다. 국경, 국적 같은 역사의 우연을 놓고 싸우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구가 너무 작고, 너무 아파서 폭발 직전이다. 지금 빙하기보다 더 빨리 종이 소멸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그것을 못 느끼고 있다.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지구를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질의/ 한국 개신교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을 텐데.
한국 개신교는 깨어나야 한다. 자기만 옳다는 아집에 빠져 있다. 예수처럼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사회적 약자를 보살펴야 한다. 내가 왜 기독교인이냐면, 기독교처럼 가난한 자, 창녀와 세리 등 밑바닥 삶이 가장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한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부서진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 때문에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게 너무 아름답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그러지 못한다. 교회 건물도 힘의 상징으로 지어놓고, 큰 교회 목사들은 자기 아들에게 세습시키려고 하고, 자기 큰 교회 유지하기 위해 밑바닥 삶은 얘기하지 않고 아직도 반공주의 같은 얘기나 하고 있다. 붉은 악마는 안 된다며 하얀 천사를 내놓는데, 그게 얼마나 식민지적인 개념인가. 백인 제국주의의 개념이다.
제일 먼저 우리 개신교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가장 억눌리고 가난한 자와 함께 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닮아야 한다. 딴 것 없다. 예수님을 닮자. 두 번째, 예수님을 따랐던 초대 교회의 평등한 예수 공동체를 닮아야 한다. 지금 목사님이 왕인 한국 교회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지, 예수님의 초대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평등한 자들의 잔치다. 그걸 닮자.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식, 네 자식이 어디있는가, 세습 그만하자. 그리고 한국 교단이 신학교에 대고 이런 것 가르치지 말라고 간섭하는 것 그만 둬야 한다. 신학교가 비판하지 못하면 학교, 교회, 나라 다 망한다.
질의/ 불교도 문제가 많지 않은가.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부장적 불교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적 모슬렘도 마찬가지다. 불교에도 성차별이 너무 많다. 부처님은 생명 평등에 대해 얘기했는데, 왜 성별에 걸려 넘어지는가. 불교야말로 그러면 안 된다. 불성에 무슨 남자, 여자가 있는가. 최초의 자유의 메시지로 돌아가면, 굉장히 자유로와진다. 특히 개신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내 종교 사랑하는 거 좋다. 그런데 절에다 불을 지르면 안 된다. 다른 종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질의/ 요즘 어떤 기도를 하는가?
모든 생명이 정말 자기답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인간은 인간답게, 개는 개답게, 나무는 나무답게, 바다는 바다답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한다. 생명이 화두이다. 오죽하면 내가 살림이스트라는 말까지 만들었겠는가. 내가 이런 야한 책(<미래에서 온 편지>)을 쓴 까닭도 시간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지구에게 시간이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줄 지구가 없을 것 같다. 애들이 피부암에 걸려 죽고, 물 때문에 전쟁하고, 전쟁 때문에 지구는 더 파괴되고.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자, 그리고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얘기하자,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면,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자는 것이다. 미래가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하자는 것이다.
질의/ 세계종교평화위원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가?
사실 나는 그 위원회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 세대를 키우기 위해 일부러 나를 끌어들인 것 같다. 종교평화위원회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캄보디아 지뢰밭에 들어간 것이었다. 우리 회원 중에 한 사람인 캄보디아의 최고승 마하 고사난다를 돕기 위해 들어가서 지뢰 퇴치를 위해 지뢰밭을 걷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때 세계종교평화위원회 총무와 같이 걷게 되었다. 그 분은 위스콘신대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는 종신교수였는데, 교수직을 버리고 우리 단체에 들어왔다. 내가 '당신, 과학자인데,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인류의 미래가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확한 과학의 데이터만 놓고 보면 지구는 곧 멸망한다. 그런데 문명사적으로 보면, 인간은 가장 큰 위기가 일어났을 때 개과천선했다.
세계에 평화를 가르치는 어른들이 인간 안에 있는 영성을 깨우칠 때, 지구의 미래가 가능하다. 그래서 과학자를 그만두고 종교평화위원회에 들어왔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도 우아하게 논문이나 쓸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쓴 <미래에서 온 편지>와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할 것이다>(전 2권)는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을 위한 강령같은 책이다. 지구를 지키는 특공대를 위한 강령이다. 마오의 <레드 북>처럼 읽히기를 바랬다. 그래서 앞으로 영어로 번역해서 아시아의 여성들에게 읽힐 생각이다.
2002-09-21 13:43:27
“사랑은 모두 무죄입니다 사랑하지 않는게 죄일 뿐”
□미국 유니온신학대 현경 교수
오랫동안 남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비난에 외로웠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남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사는 내가 원하는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원하는 대로 일어난다”고 믿으니 놀랄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갈 수 있을 것도 같다.
현경(48·미 유니온신학대) 교수. 이번 방한길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컬러 퍼플>의 원작자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앨리스 워커가 함께 했다. <현경과 앨리스의 神나는 연애>라는 책의 발간에 맞춘 것이다. 앨리스 워커와 함께 쓴 이 책에서 그는 여성과 관련된 12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시와 에세이로 풀어냈다.
“저는 우주의 뜻을 믿어요. 앨리스를 만난 것도 우주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우주가 뭔가 저를 통해 할 일이 있었던 거죠.”
현경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풍으로 알려진 미국 유니온 신학대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종신교수다. ‘경계’를 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불교와 샤먼을 넘나드는 ‘혁명적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자비로운 여성의 얼굴인 관세음보살상을 가리켜 “이것이 내가 아시아 여성으로 보는 성령의 아이콘”이라고 하자 남성 신학자들은 모두 뒤로 넘어갔다. 그 자리에서 역사의 희생양이 된 영들을 불러 초혼제까지 지냈다. 이 사건 뒤 한 쪽에선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창조적인 신학자’로, 다른 쪽에서는 ‘무당’으로, 심지어 ‘마녀’라고까지 비난했다.
현경 교수에게는 걸림이 없다. 심지어 죽음조차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기다려지는 일”이다. 자신을 “불교적 신학자 또는 신학적 예술가”라 밝히며 여성해방신학을 들고 서울, 뉴욕, 남미, 호주로 ‘간증’을 다닌다. 기독교 신학자임에도 불교, 수피즘, 샤머니즘을 넘나든다. 특히 불교와 인연이 깊다. ‘세계 3대 생불’이라는 틱낫한, 숭산스님, 달라이 라마를 모두 친견했다. 틱 스님과 숭산스님은 스승으로 모시고, 달라이 라마는 종교간세계평화위원회에서 함께 일한다.
1999년에는 숭산 스님의 안내로 계룡산 신원사에서 100일간 동안거에 들어갔다. 하루 10시간씩의 면벽수행. 처음 2~3주는 너무 화가 났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들이 떠올랐다. 거의 “연쇄 살인범” 같았다. 이어 슬픔이 밀려왔다. 자신도,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도 모두 불쌍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물에 빠진 듯 옷이 다 젖은 날도 많았다. 다음엔 절망감이 덮쳐왔다. 그마저 넘고 나자 비로소 무념무상이 찾아왔다. 그저 숨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동안거가 끝난 뒤 곧장 히말라야로 들어가 1년간 정진했다. 마지막 날, 하루종일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데 “네가 네 인생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오랜 의문이 비로소 풀렸다.
첫댓글 덕산/ 하하하하! 어디나 극단주의자들은 있는가 봅니다.
세계의 많은 전쟁이 다 기독교계에서 저지를 일입니다.
체케바를 존경한다고 위협 한 사람들도 다 그런 류의 사람인 것 같네요!
우리 손이교수님에게도 호위무사 대동시켜야 하지 않는지요? 하하하하!
호위무사 대장 예 있소이다. 하하하하하!
은하999/ 에~! 그리해주십시여~! 영광입니다만.. 이젠 상극이 상봉하는 시간대로 접어들고 있으니.."호위.."는 옛 이야기가 된듯싶슴다 ! 좋은 세월입니다요~!감사하면서.. (기독교의 역사적인 오류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에서는..)
어찌 뜸하신지요? 두루 살피소서 그 사람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