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발디비아항에서 남태평양의 섬 타이티로
2월28일
남아있던 칠레돈 천페소와 미국달러 7불로 감자3킬로, 사과2킬로, 바나나1킬로, 계란9개를 추가로 더 구입하였다. 식량이 모자라는 것 보다는 남는 게 더 낳지 않을까 해서 였다. 11시30분경 출항절차를 마치고 12시경 배를 폰툰에서 떼어냈다. 하늘이 더 없이 맑고 파랬다. 이곳도 이제 가을이 시작된다. 강을 따라 조류와 함께 6노트의 속도로 내려갔다. 강 하구에는 안개가 덮여있었다.
14시경. 넓은 바다로 나왔지만 짙은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예보와는 달리 약한 북풍이 불어와 돛을 올리지 못하고 엔진으로만 항해하였다. 타이티까지 실제 항해할 거리는 약5천마일이 될 것이다. 인트레피드에는 500리터의 연료가 실려 있다. 이 연료로는 기주로 천마일밖에 갈 수 없다. 바람이 잘 불어주어야 4월 초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서도 짙은 안개는 걷힐 줄 몰랐다. 바람 없는 바다를 콩닥콩닥 가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마는 마음이 편칠 않다.
자정 무렵 뒤 따르는 어선과 코스가 맞물려 무전으로 불렀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안개가 짙어 마스트등의 불빛마저도 희미하게 보일정도여서 레이더와 AIS(선박위치송수신시스템)장치로 주변의 배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나아갔다. 가끔 작은 어선들은 2마일쯤 가까이 접근 되어서 알람이 울리곤 했다. 신호가 선수 쪽에서 잡힐 땐 신경이 곤두섰다. 서로의 항해등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태여서 배가 가까이 붙기 전에 크게 진로를 틀어서 위험범위 안에 들어가기 전에 서로의 의사를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작은 어선들은 영어로 소통이 전혀 안되기 때문에 진행방향을 틀어 보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얼마 후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졌고 별들이 바다를 향해 바짝 내려앉아있어 하늘이 얼마나 맑은지 가늠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해 돛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상예보대로 남서풍이 아니라 북풍이 불어 겨우 바람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크로스홀드로 평속 5노트의 속력으로 나아갔다.
3월1일
날이 밝을 무렵 다시 안개가 짙게 끼더니 바람이 약해지면서 속도가 3노트대로 떨어졌다. 그렇게 한 2시간정도를 달렸을까 바람이 서쪽으로 조금 돌아서면서 북북동 방향이 되었다. 그 바람에 상승각을 맞추다 보니 배의 항로가 거의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서쪽으로 계속가게 되면 변풍대에 들어서게 되므로 연안을 따라 남위 30도까지 약 600마일쯤 올라간 다음 그곳에서 남위20도를 향해 동북동 방향으로 가게 되면 계속 순풍을 탈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내일 저녁에나 되어야 순풍이 분다고 한다.
저녁 무렵 목이 말라 탱크에 있는 물을 마셨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픈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하수의 상태가 나쁘면 끓여먹지 뭐하고 생각했는데 장거리 항해라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생각 끝에 가장 가까운 항에 재 입항하여 생수를 넉넉히 사 가지고 가기로 했다.
3월2일
바람이 북풍이어서 진행하기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북서쪽에 있는 탈카화노(Talcahuano)로 가기에는 오히려 방향이 나은 편이었다. 오후4시경 탈카화노의 어선부두에 도착하여 장거리 항해를 하는데 물의 상태가 좋지 않아 긴급회항했다고 하니 당일내로만 다시 출발하면 재입항 재출발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이곳에 호세라는 세일러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인트레피드가 도착하자마자 도와주어서 일을 원만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의 집은 산 언덕위에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집에 있다 보니 배가 들어오는게 보여서 나왔다고 하였다. 오랜 기간 외양어선 선장으로 일하여서 영어도 잘하였다.
물과 약간의 부식을 더 구입한 뒤 21시경 불기 시작한 뒤 바람과 함께 탈카화노항을 출발했다. 어선옆에 배를 대어 놓았는데 선원들이 굉장히 친절했다. 배를 떼어내고 출발하는 동안에도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항을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혀 지형을 모르기 때문에 해도와 레이더를 보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만을 빠져나와 외해로 나아갔다.
자정 무렵 넓은 바다로 접어들자 바람이 더욱 강해져서 속력이 6-8노트를 넘나들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주 돛을 2단계 줄이고 짚세일을 3분의 1쯤 감아 들여 배가 덜 기울어지게 했다. 배가 안정이 되고 속력은 변함없었다.
3월3일
20노트 이상 되는 순풍을 받으며 배는 잘 나아갔다. 3미터가 넘는 파도에 올라탔다가 아래도 미끌어져 내려갈 때는 며칠 전에 칠한 선저 페인트가 벗겨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데 이렇게 바람이 불다니 이것이 바로 무역풍이라는 것인가?
바람이 강해서 속도가 잘나는 것은 좋지만 배가 많이 기우뚱거려서 생활하기가 불편하다. 내일저녁쯤 되면 바람이 15노트로 떨어진다고 한다. 바람이 약해지면 세일을 더 펼쳐서 같은 속도를 낼 수 있고 해면의 거칠기가 덜해지니 순항이 기대된다. 지금은 속도는 좋지만 돌발 상황이 생기면 대처하기 좋은 기상은 아니다.
앞쪽 보조 돛이 주 돛에 가려 바람을 받지 않게 하지 않도록 발디비아에서 구입한 스핀네커폴을 걸었다. 보조 돛이 접혔다 다시 펼쳐지면서 받는 강한 압력에 세일이 상하는 일도 방지될 뿐 아니라 꾸준히 바람을 받을 수 있어 속도가 떨어지는 일도 없다.
오후4시경 구름한 점 없던 하늘에 자그마한 솜뭉치들이 떠 다닌다.
‘저런 구름이 나타나면 바람이 늘 강했었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가 ‘푸욱’하고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고 가까이서 들려서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물체! 바로 고래였다. 고래는 불과 좌현에서 2미터쯤 떨어진 곳에 등을 내밀고 참았던 숨을 불어내었던 것이었다. 파도소리에 뭍여 배가 달려오는 소리를 감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얼른 보아도 덩치가 인트레피드보다 큰 것 같았다. 저런 고래와 충돌한다면 고래가 요트에게 공격당했다고 생각하고는 반격에 나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에게 공격당해 배를 손상당했다는 얘기를 책에서도 읽었고 또 세일러들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7노트의 속력으로 고래와 충돌했다면 그 고래도 멀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메라를 가지러 간 사이에 고래는 뒤쪽으로 멀어져 물속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고래가 있는 곳에 물이 허옇게 부셔져서 잠수함이 달리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고래도 꽤나 놀랬을 것이다. 아쉽게도 사진에 담지 못했다.
밤이 되고서도 바람은 여전했다. 하루 동안 150마일이 넘는 거리를 항해해왔다. 하늘이 너무도 깨끗해 은하수가 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어 보였다.
다음 목적지(확실한 것은 아님)로 정해 놓은 타이티까지 4,158마일을 남겨두고 있다. 원래 발디비아에서 타이티(실제로는 타이티본섬에서 좀 더 떨어진 작은 섬)까지는 4,216마일이다. 지금까지 380마일을 달렸으니 3,836마일이 남아야 하지만 무역풍을 타기 위해 타원형을 그리며 항해하고 있기 때문에 북위20도까지는 목적지까지 거리가 항해한 만큼 줄어들지 않는다.
항로를 정하는데는 먼저 남태평양을 건너가고 있는 에드워드문(케리비안에서 파나마를 거쳐 남태평양을 지나 현재 괌에 정박중)으로부터 받은 정보와 프랑스에서 출발해 같은 코스를 항해한 레디 알리아호의 항해이야기(100일간의 세계일주)를 참고로 하고 있다. 막연히 가는 것보다는 먼저 항해한 사람들의 항해기를 통해 현지 사정을 알고 가는 것이니 만큼 마음이 편하다.
3월4일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바람이 약간 약해졌다. 2단계로 줄여져 있는 주 돛은 그대로 두고 앞쪽의 보조 돛을 전부 펼쳤다. 보조 돛을 펼치는 것은 간단하다. 롤러를 돌리는 줄은 놓아주고 돛 끝을 잡아당겨 돛을 바람에 맞도록 각을 맞추어 주면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주 돛을 더 올리려면 돛대 쪽으로 가서 작업을 해야 하고 콕핏에서 잠깐 만에 하는 보조 돛의 작업과는 달리 쉽게 할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좀 더 바람이 더 약해지면 주 돛도 더 올려서 바람을 받는 면적을 넓혀야한다.
10시경 칠레본토에서 360마일 떨어진 변방의 섬 로빈손 크루소에를 동쪽으로 120마일쯤 떨어져서 북동쪽으로 나아갔다. 로빈손 크루소에보다 1600마일 더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이스트 섬이 있는데 그곳도 칠레령이라고 한다. 직선항로로 가자면 이스트 섬을 거쳐서 가는 게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무역풍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스트섬보다 약 500마일쯤 더 북쪽으로 지나갈 예정이다.
배터리가 동이 나서 엔진을 걸어 충전에 들어갔다. 35시간 동안 잘 가동해주었다. 레이더와 지피에스, 그리고 AIS에 가끔 노트북도 켠다. 그리고 냉장고 하나가 가동되고 있으니 풍력발전기와 태양열발전시스템이 풀로 가동되어도 계속 감당되지 않는 것 같다. 한 2시간쯤 엔진을 이용해서 충전을 도와주어야한다. 인트레피드의 배터리는 수협을 통해 저렴하게 구입한 것인데 사실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작은 베터리도 가격이나 성능에 따라 오래 버티는 힘이 다르듯이 배에서 쓰는 베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충전 없이 사용할 경우에는 그 성능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 신혼부부와 에스타도스섬에서 1주일 가량 같이 있는 동안에 나는 몇 번이나 엔진을 돌려서 충전한 반면 그들은 단 한 번도 충전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몇 시간 인가 드릴을 사용하기도 했다. 장거리 항해의 경우 충전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베터리의 성능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2시경. 바람이 15노트로 줄어들어서 주 돛을 모두 끌어올렸다. 아직은 6노트의 속도를 계속유지하고 있다. 바다가 많이 편안해졌다. 기상예보에 의하면 당분간 이런 정도의 바다가 계속되거나 아니면 더 약해진다고 한다. 바람이 더 약해지면 바람의 힘으로 계속해서 배가 한쪽 방향으로 누워있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롤링이 심해진다. 해서 보조 돛인 제노아대신에 더 큰 세일인 제네커를 걸어야 한다. 제네커세일은 제노아와 스핀네커의 장점을 따서 만든 세일로 얇은 천으로 만들어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져 바람을 받는 면적을 최대화한 세일이다. 제네커세일은 그 크기 때문에 혼자서 다루기 쉽지 않은 세일이다. 특히 제네커세일을 내려야 할 경우 바람이 강해지려고 할때가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른 세일은 어딘가에 감겨있거나 고정시킬수 있지만 인트레피트의 경우 제네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롭게 달아서 올려야 하고 사용 후에는 반드시 다시 철수해야 한다. 그래서 제네커 세일을 올릴 때는 늘 마음이 무겁다. 그렇다고 속도가 나지 않는 걸 참는 건 더욱 못할 일이어서 결국에는 세일을 올리게 된다.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다 멈추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만큼 더 바람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속력은 떨어졌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트롤링 낚시를 시작했다. 지금껏 발디비아를 출발해서 두 번 트롤링낚시를 내려서 두 번다 낚시 바늘을 잃었다. 이제부터는 낚시를 내리고서는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낚시를 거두어야한다. 낚시 바늘도 넉넉하지는 않다.
1시간쯤 지났을까 고기가 한 마리 걸려들어 고무줄이 쭈욱 늘어나더니 이내 어신이 사라져버렸다. 미쳐 손 쓸 사이도 없었다. 낚시 줄을 걷어 올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늘이 달아나 버렸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큰 고기 이길래!’
‘안되겠다. 밑줄을 와이어로 바꾸어봐야 겠다.’
한국에서 어부들이 사용하는 삼치용 낚시 바늘도 이제 일곱개 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다른 바늘도 있긴 하지만 그 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식으로 바늘을 잃어버린다면 얼마가지 못할 것이다. 0.6미리 와이어로 바꾸어 루어를 내린지 30분쯤 지나자 다시 어신이 왔다. 일순간 고무줄이 팽하고 늘어났다. 얼른 낚시줄을 낚아채자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끙! 도대체 무슨 고기야?’
수초도 되지 않아 다시 줄이 느슨해져버렸다.
‘또 떨어져 버렸나!’
줄을 걷어 올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낚시 바늘 바로 앞에서 와이어가 터져버렸다.
‘아무래도 릴낚시를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이거!’
릴낚시를 사용하면 고기가 물어 강력히 저항할 때 줄이 풀려나가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배가 달려가는 속도가 6노트가 넘어 고기가 달아나는 속도를 감안하면 릴줄이 얼마나 길어야 배의 속도를 줄이고 릴 낚시대를 잡고 녀석들과 파이팅 할 채비를 할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
‘한번만 더 그냥 내려보자! 이번에는 1미리 와이어로 바꾸어야겠다.’
1미리 와이어라 이건 줄을 묶을때부터 느낌이 다르다. 차라리 원줄이나 낚시 바늘이 부서지면 부서졌지 웬만한 압력에는 터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어떤 녀석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줄을 바꾸고 파도를 등지고 잔뜩 내려앉은 검은 구름사이로 해질녁까지 달렸다. 한번 줄이 늘어지기는 했지만 그건 제대로 걸리지 않은 것이었다. 밑줄이 너무 굵어서 녀석들이 눈치를 챘는지 통 소식이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해서 줄을 걷어 올렸다.
‘아직 먹을게 많으니까 나중에 바람 없어 엔진으로 달릴 때 할까나!’
큰 고기는 20센티쯤 되게 토막을 내어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한 2센티쯤 두께로 썰어서 스테이크처럼 구워먹으니 그저 그만이었다.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번갈아 가며 먹었었는데 된장이 떨어진지도 꽤 되었다. 김치찌개 한 가지만 먹으니 금방 물려버렸다. 고기라도 잡혀야 생선찌개와 생선구이로 메뉴를 바꾸어 볼 수가 있다.
‘내일 아침나절에 릴낚시로 한 번 더 해보자!’
바람이 세어져서 주 돛을 1단계 축범했다. 밤이 되기 전에 축범을 해두어야 안심하고 토막잠이라도 잘 잘 수 있을 것이다. 달도 없는데 구름까지 가득하니 필시 밤에는 칠흑같이 어두우리라.
3월5일
새벽3시경 배의 율동이 약해졌다. 파도를 타고 나가는 리듬도 달라졌다. 속도계를 보니 5노트대로 속력이 떨어졌다. 현창을 밀고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마스트 등 불빛만 보일뿐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척에 배전의 모습도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축범을 해제시켜 속도를 높여야 안 되겠나!’
‘밤에 뭐하러! 속도가 5노트나 되는데 내일아침에 하지!’
조금씩 속도를 더 내도록 하는 게 모여서 나중에는 그 차이가 크게 된다. 특히 장거리 항해 때에는. 이런 걸 생각하면 늘 작은 갈등에 놓이게 된다. 돛을 올릴 것이냐 말 것이냐?
날이 새기 얼마 전이었다. AIS시스템을 통해 12마일쯤 뒤쪽에 상선한척이 포착되었다. 선명은 포어스탈 디아만테(Forestal Diamante)이었는데 12노트의 속도로 진행 중이었다. 인트레피드가 297도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 배는 283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배의 진행방향을 인트레피드의 선수에 맞추어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배를 항로를 계속 지켜보았지만 전혀 침로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포어스탈 디아만테! 포어스탈 디아만테! 여기는 범선 인트레피드!’
몇 번 포어스탈 디아만테를 부르니 대답이 들려왔다.
‘인트레피드! 여기는 포어스탈 디아만테!’
무전을 통해서 그 배가 우리배의 선수로 통과해 갈 것인지 선미 쪽을 통과해갈 것인지 물었다. 다행히 뒤쪽으로 통과해가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코스를 약간 변경하여 인트레피드의 선미쪽으로 맟추었다. 포어스탈 디아만테호는 일본 선적의 배로 남미쪽과 동북아시아를 오가는 배라고 하였다. 일본인이 타고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선장을 포함해서 필리핀 선원만 20명이라고 하였다. 선주는 일본인이지만 관리는 한국인이라고 하며 서툰 발음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그 배는 일본 도착일은 4월3일이었다.
‘12노트로 한 달이면 일본까지 간단 말인가? 그럼 나도 6노트로 계속가면 2달 만에 갈수 있단 말이네!’
대략 계산을 대어 보니 정확히 직선코스로 계속 6노트만 유지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바람을 찾아 둘러가고 있으니 실제 진행속도는 4-5노트가 고작이다. 중간에 바람이 약해질 것을 감안하면 정말 잘 가야 3개월 안에 갈수 있을 것이다.
일출이 없는 흐린 아침이었다. 날이 밝자 주 돛을 전부 펼쳐 올렸다. 속력이 6노트가까이 올라갔다. 그러나 점점 바람이 약해지고 있어 가끔은 풍력발전기가 돌아가지 않는다.
오전 10시경 콕핏에 앉아 윈드베인(배 뒤쪽에 달린 바람을 이용한 자동조타기)에 밧줄을 살펴보니 금속부분과 연결된 끝쪽이 밧줄이 헤어졌다. 조타를 오토파일럿으로 바꾼뒤 끝부분을 좀더 늘여서 매듭을 하고 낡은 부분은 끊어내었다. 대서양을 항해할때였다. 라스팔마스를 출발해서 강풍을 뒤에 업고 달리고 있을때 윈드베인 끝부분이 끊어지는 바람에 배가 저절로 돌아가버렸고 그 때문에 앞쪽 보조 돛이 포어스테이에 꼬여서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그런 험악한 경험이 있기에 미리 점검하고 보강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출발하고서부터 내내 그 밧줄만 쳐다보면 ‘저걸 손봐야 하는데!’하는 마음에 부담이 늘 있었다. 그런 일을 하고 나니 흐뭇하다. 밧줄이 꺽이는 부분에 설치되어 있는 도르래에도 기름을 쳐주니 삑삑 거리던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시 조타를 윈드베인에 맡겨놓고 오토파일럿 스위치를 껐다. 배는 평속 5.5노트정도의 속도로 매끄럽게 달려 나가고 있다.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계속되는 바람에 4-5미터에 달하는 긴 너울파도가 끊임없이 달려온다. 너울파도위에 생긴 거친 파도라야 1.5미터 정도이다. 그때였다. 아침나절에 내려놓았던 트롤링 낚시의 고무줄이 팽팽하게 늘어나 있었다.
‘어! 뭐가 걸렸나?’
얼른 줄을 잡아채고 보니 묵직하게 느껴지는 저항감, 드디어 고기가 걸려 들었다. 줄을 서서히 당기면서 감당하기 힘들면 배를 풍상으로 돌려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그런대로 잘 끌려왔다. 낚시 줄은 배의 후미를 따라 오면서 좌우로 크게 왔다갔다했다. 얼마 후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은빗비늘을 번쩍이며 마지막 발버둥을 치려한다. 다랑어였다. 녀석이 공기를 한번 들이켜 힘이 못 쓰는 순간 번쩍 들어 콕핏으로 끌어올렸다. 살이 통통하게 찐 다랑어는 길이가 53센티에 무게는 3킬로그램 가량 되어 보였다. 눈은 500원짜리 동전만한데 그 속에 맑고 검은 눈동자는 구슬만했다. 물기를 머금은 몸뚱아리는 은빛과 검은 빛이 뒤섞여 번쩍였다. 녀석은 팽귄 같이 작은 날개를 두 개 가지고 있었다. 잡아먹기에 너무 아름다운 녀석의 머리통은 15센티 가량 되었다. 녀석의 눈을 가리고 목을 잘라 두동강을 내었다.
‘미안하구나!’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을 땐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데 내 손으로 직접 살생을 하고 먹으려니 늘 그런 마음이 생긴다. 머리 부분은 바다로 돌려보내고 몸체는 다시 두 등분하여 비닐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끼니마다 생선반찬을 먹어도 삼사일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트롤링낚시를 걷어 넣었다. 오후로 넘어가면서 몇 일간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걷혀 가는 게 보였다. 구름 띠가 남동쪽에서부터 벗겨지기 시작하여 저녁 무렵이 되자 파란하늘이 완전하게 들어났다. 햇빛을 받은 바닷물색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퍼시픽블루라는 연청색물빛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붉은 노을이 서녁 하늘을 물들였고 곧이어 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자 고향 앞으로!’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봄이 오면 돌아온다던 그 친구는 돌아올 줄 모르~~네!’
술친구들의 한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서둘러라! 인트레피드! 속도를 높여라!’
3월6일(일)
바람이 점점 약해져 자정무렵에는 속력이 4노트대로 떨어졌다. 벨러스트킬의 복원력이 바람의 미는 압력보다 강해지기 시작하여 배가 좌우로 크게 롤링을 하기 시작했다. 선수를 30도가량 풍상(바람이 불어오는쪽)으로 돌려 거이 서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속도도 좋아지고 롤링도 없어졌지만 배는 원래 항로와 점점 사이가 벌어졌다.
새벽 2시경 별들이 하나둘 빛을 잃어가더니 3시경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은 것이었다. 잠시 후 바람이 슬슬 살아나기 시작하여 돛을 힘차게 밀기 시작했다. 속도가 좋아졌다. 코스를 다시 원래대로 변경하였다.
날이 샐 무렵 구름들이 걷히면서 남동쪽에서부터 파란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름이 있을 때가 바람이 잘 불어주어서 하늘이 걷혀 가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다.
아침식사는 어제께 해놓은 식은 밥과 조개통조림을 넣고 끓인 미역국 그리고 다랑어 구이를 준비했다. 늘 흔들리는 배안에서도 음식만은 잘 만들어 먹는 편이다. 음식이 좀 부실할 때는 요트를 타고가다 침몰당해 오랫동안 구명정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연명한 표류기를 읽곤한다. 그러면 아무리 초라한 음식일 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내가 언제든 마실 수 있는 물마저도 그들에게는 간절한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낮에는 바람이 좀 약해져서 가끔 뒤뚱거리기도 했지만 속력이 약간씩 붙을 땐 부드럽게 파도를 타고 넘는데 조용하기까지 해서 비행기 안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 피트 상공에서 시속 천 킬로의 속력으로 달리는 비행기 안에서 속도감을 느낄 수 없듯이 마치 그냥 멈춘듯한 느낌이 들어서 속도계를 보았다. 5.7노트였다. 속도가 5노트 이하로 떨어질 땐 제네커를 올리려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 참았다. 오후4시가 넘어가면서 하늘의 구름 량이 늘었고 바람도 제대로 불어주어 속력이 6노트대로 회복되었다. 제네커를 올렸다면 배가 미친듯이 달려 나가 마음에 부담이 꽤나 되었을 것이다. 제네커를 올리지 않기를 잘한 것이다.
오후4시30분 남위30도 서경81도35분을 북서진하여 통과하였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래야 남쪽으로 225마일 떨어진 칠레령 아레잔드로 셀키크(Alejandro Selkirk)섬인데 여전히 제비갈매기와 또 다른 물새도 보였다. 갈매기는 육지 쪽에서 보는 살이 통통하게 찐 그런 갈매기와는 다르게 날렵했고 작은 물새는 검은 색 몸에 꼬리부분에 흰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작은 물새는 나는 모습이 나비와 비슷했는데 날면서 꼬리로 물을 탁탁 치면서 계속 날개 짓을 해 대었다. 바다와 장단을 맞추며 노는 것처럼 느껴졌다.
3월7일(월)
밤 동안 바람이 약해졌다가 멈칫하더니 아침이 되어서는 바람이 동남동으로 바뀌었다. 돛의 바람을 반대방향으로 받도록 하였다. 속력이 4노트대로 떨어졌다.
9시경. 파란 하늘빛에 반사되어 물색도 밝은 파아란 색으로 바뀌었다. 바람이 더욱 약해져서 속력이 3노트로 떨어졌다. 제네커를 올리려고 로프(헬려드와 시트)을 확인해보니 헬려드가 지난번에 안쪽 보조돛을 올릴때 감겨올라가 있었다. 그냥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만약에 문제가 생기고 혹 그때가 기상이 좋지 않을때라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어 제네커헬려드(헬려드란 돛을 올리는줄)가 꼬인 곳을 바로 해야했다. 아래쪽에서 매듭을 다 풀어 줄이 쉽게 당겨 올라오도록 해놓고 마스트를 타고 올라갔다. 배가 좌우앞뒤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지만 올라갈수록 그 흔들림의 거리가 커져서 거머리처럼 마스트에 찰싹 달라붙어서 올라가는데도 진땀이 났다. 좌우 롤링도 롤링이지만 파도를 살짝 타고 넘을 땐 말 등에 탄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의 실수도 큰 사고와 연결되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손잡이와 발판을 디뎌서 마스트꼭대기에 가까스로 올라가 꼬였던 줄을 바로 해놓고 내려왔다.
미리 제노아(큰 보조돛)를 내려놓고 제네커가 올라가면서 한 번에 잘 펼쳐질 수 있도록 세팅해놓은 다음 헬려드를 당겨 제네커를 끌어올렸다. 그런 다음 커버를 벗기는 줄을 당겨 올리니 형형색색 아름다운 제네커가 한 번에 활짝 펼쳐졌다. 미풍이었지만 속력이 5노트이상으로 올라갔다.
‘아자! 전속항진이다!’
15센티 오징어 한 마리가 갑판위에 올라와 있어 씻어서 말려두었다.
‘웬 횡재!’
한낮에는 바람이 더 약해져서 속력이 가끔 3노트대로 떨어졌다. 선실안에 가만히 있어도 열기가 느껴졌다. 온도계의 수온주가 29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하늘이 변하면 바다도 변했다. 바다는 파란 잉크를 물에 부어놓은 것 같이 온통 짙은 파랑색으로 변했다.
해질녁이 다되어가자 바람이 더 약해지면서 앞쪽으로 돌아섰다. 제네커를 내리고 엔진을 가동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서쪽하늘엔 초승달이 방긋 웃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3월8일(화)
일출과 함께 아침이 시작되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북풍이었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항해로 속력이 5노트정도 나왔다. 출발 후 처음으로 비구름이 레이더에 잡혔다. 그 비구름은 우현쪽 4마일쯤 밖에 있었는데 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비구름을 제외한 다른 하늘은 흐리지만 밝은 날이었다.
육지 그러니까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까지의 거리가 450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 두 마리씩 보였던 새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식사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감자와 당근을 넣고 볶다가 양파와 밥을 같이 섞었다. 그리고 토마토를 썰어 넣고 토마토 케찹을 뿌렸다. 완성된 볶음밥을 접시에 담고 계란프라이를 하나해서 그 위에 얹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맛도 좋았다.
점심때는 쇠고기와 감자, 양파, 마늘을 넣고 국을 끓였다. 그리고 다랑어 구이를 해서 식은 밥과 함께 먹었다.
바람이 완전히 사라져 수면이 거울같이 변했다. 이젠 육지와의 거리가 너무멀어서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검은 물새 한 쌍과 제비갈매기 한 마리가 배 주위를 맴돌며 따라왔다.
‘아니! 쟤들은 밤에는 어떻하지! 잠을 자려면 바다에 앉아야 할 터인데 그러면 물고기들이 가만 놔둘까? 얘들아! 잘 때 배위에서 자!’
3월9일(수) 남태평양에서 받은 특별한 선물
아침은 현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치위로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 위로는 구름한 점 없는데 멀리 낮은 구름들이 주변을 빙둘러 포위하고 있었다. 동녘하늘에는 일출을 예고하는 듯 구름들이 붉게 물들어 있다. 잠시 후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한 점의 강렬한 빛, 그러나 이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실체는 이글거리는 태양이었다. 순식간에 태양은 구름위에 올라섰고 그 모습을 더 이상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바람은 없었다. 바다색은 청색 잉크를 부어놓은 듯했다.
7시경 12마일쯤 떨어진 곳에 남동쪽으로 18노트의 속도로 항해하고 있는 상선한척을 발견했다. 선명은 모닝 케서린(Morning Catherine)으로 목적지는 칠레 산 안토니오(San Antonio:칠레의수도 산티아고 부근의 항구도시)였다. 선박의 왕래가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무전을 한번 해볼까하다 그만 두었다. 나만큼 저들은 사람이나 배가 반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모닝케서린호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인트레피드-마산, 인트레피드-마산, 디스이즈 모닝케서린’
우리 배의 원래선명은 인트레피드인데 한국선박이나 한국인 항해사들이 보면 알게 하려고 선명 옆에 인트레피드의 선적지인 마산을 추가로 입력해놓았다.
‘디스이즈 인트레피드, 고 어헤드’
‘체널 공육’
‘으-응! 공육이라고 이건 한국말인데!’
반가운 마음에 후딱 대답을 하였다.
‘무전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체널 09번으로 부탁합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모닝케스린호는 선주는 일본이지만 운영사는 한국 부산의 동진해운이라고 하였다. 부산과 울산을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칠레 산 안토니오로 향하고 있는 자동차 운반선이라고 하였다. 선장 김광남씨(52세)는 제주서귀포가 고향으로 해양고를 나왔다고 했다.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 기관장등 항해 팀은 모두 한국인이고 나머지 미얀마선원들이라고 하였다.
‘인트레피드는 몇 명이 탑승하고 있습니까?’ 모닝케스린호의 선장이 물어왔다.
‘아~예! 지금 혼자 항해하고 있습니다.’
‘아이구 그래요, 외롭겠습니다.’
‘견딜만 합니다.’
‘어떤 연유로 혼자서 그런 장거리 항해를 하고 있습니까?’
나는 인트레피드의 지금까지 항적과 항해이유에 대해서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배는 점점 멀어져서 12마일이든 선박간의 거리가 16마일이 되었다. .
‘조금만 빨리 알았으면 배를 좀 접근해서 김치라도 좀 떨어뜨려 주고 갈것인데 말입니다.’
‘선장님!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아직 한국음식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레이더를 좀 봐야겠습니다.’
잠깐 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무전이 날라왔다.
‘지금 배를 그쪽으로 돌려 갈테니 인트레피드도 이쪽으로 배를 돌려서 내려오십시오, 도저히 그냥 못가겠습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뱃머리를 돌리겠습니다.’
나는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선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외벽에 ‘EUKOR'이라고 크게 써 붙인 초대형 자동차 운반선이었다.
‘저! 저! 저! 저리 큰 배로 김치를 가져다 주려고 배를 돌려오다니!’
나는 갑판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모닝케서린호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단언컨대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인 뿐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정이 있는 나라이다. 그 순간 한국사람이라는게 너무나 가슴 뿌듯했다.
모닝케서린호는 북서쪽으로 인트레피드는 남동쪽으로 서로의 항로와 반대편으로 교차하여 두 선박 모두 좌현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다시 원래의 항로로 돌아섰다. 그런 과정에 김광남선장께서 선교로 나와 사진을 찍었고 미얀마 선원들이 선미에서 김치가 들어있는 스티로폴박스를 물에 떨어뜨렸다.
배는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바다에 떨어진 김치를 찾아 모닝케서린호가 만들어 놓은 물길을 따라갔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모닝케서린호와는 몇 백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박스가 떨어진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북서쪽으로 가고 있는데 모닝케서린호로부터 무전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쪽이 아닙니다. 스타보드쪽으로 30도쯤 방향을 돌려서 가십시오, 그러면 검은 비닐봉투에 싸여진 스티로폴 박스가 보일 겁니다.’
김광남 선장께서 모닝케서린호의 선교에서 망원경으로 이쪽을 보면서 물에 떠있는 박스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 금방 박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배를 박스쪽으로 접근하여 보트훅크를 이용해 건져 올렸다.
두 겹의 검은 비닐봉지 싸여진 박스 안에는 배추김치가 4킬로, 갓김치가 1킬로, 창란젖 500그램, 깻잎김치 500그램, 참치통조림4개, 450그램짜리 고추장2개가 들어있었다.
‘이리도 골고루 챙겨주시다니!’
냉장고에 보관되어있던 4킬로쯤 되는 묵은 김치를 꺼내었다. 말이 김치지 얼었다 녹았다를 수십 번, 상온에 노출된 적도 여러번 된 골동품이다. 김치가 생각날 때 한 두 개만 집어먹으면 김치생각이 싹 달아난다. 묵은 김치를 꺼낸 자리에 얼떨결에 새로 보급 받은 김치와 반찬을 넣었다. 마침 아침식사전이어서 갓김치와 배추김치를 조금씩 덜어내어 식은 밥과 함께 먹었다. 싱싱한 배추와 갓에 풀먹인듯한 양념이 입에 척척 달라붙는다.
‘김치와 반찬이 배에서 먹는거라 짭짤합니다. 너무 많이 잡숫지마세요.’
모닝케서린호 김광남 선장께서 당부한말이 생각나지 않는게 아니지만 손으로 쭉쭉 찢어 먹는 김치 맛에 정신이 혼미해서 아무생각이 없었다.
‘나는 좋다마는 잠깐 동안이지만 자동차운반선을 김치운반선으로 만들었다고 저 선장님 회사에서 혼나는 것은 아닐까?’(부산일보 기자님 이 이바구는 실지 마이소~)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갇혀서 북풍, 혹은 북서풍이 허너적거린다. 기상정보에 의하면 3-4일 동안은 제대로 된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한다. 가능한 한 가장 적게 엔진을 사용하는 상태에서 흘러가는 조금의 바람이라도 받기 위해 돛을 올려 나아갔다. 연료만 많이 있다면 조용한 바다에서 전력 걱정없이 콩닥콩닥 거리를 줄여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문제는 연료여서 조금이라도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좋아지면 엔진을 중지 하곤 한다. 그러나 잠시일 뿐 전체적으로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다.
오후5시경 서풍이 제법 강해져서 선수를 북서쪽으로 해서 바람을 거슬러 평속 3.8노트의 속도로 올라갔다. 얼마 후 해가 지고 석양이 붉게 물든 다음 밤이 찾아왔다. 달님이 점점 커가고 나타나는 곳도 조금씩 높아진다. 계속해서 커진 달은 10일쯤 후엔 만삭이 될 것이다. 배가 수면을 가르고 나아감에 따라 물속에는 수많은 야광충이 반짝거렸다.
3월10일(목)
가벼운 바람이 불어 작은 물비늘이 이는 아침이었다. 맑은 하늘은 향해 힘차게 솟은 태양은 금새 금물결을 만들었다. 그리고 뱃고물에서 태양으로 가는 금붉은 오솔길이 만들어졌는데 길은 시간이 갈수록 넓어지더니 마침내 조각 조각 흩어져 버렸다.
햇빛이 선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바람은 여전히 앞쪽에서 불어온다. 너무 약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10시경 정면 바람을 피해 항로를 목적지에서 20도쯤 내려잡았다. 속도가 5노트대로 높아졌다. 곧 제대로 된 바람이 불 것이다.
아침 식사 때 다랑어구이를 해먹었는데 냉장고에 오래 보관되어 있다 보니 맛이 좀 덜했다. 시간이 갈수록 영양소가 파괴되는 모양이다. 냉장 보관되어 상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오래될수록 맛이 없어진다. 싱싱할 때는 안 씹어도 저절로 넘어갈 정도였는데 이제는 많이 씹어주어야 한다. 다랑어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있다.
‘우짜지?’
‘맛있게 다 먹어준다고 약속했는데!’
‘남은 고기야 바다에 던지면 고기밥이 될 터인데 뭔 고민인가 그냥 버리는 게 아니잖어! 버리고 새로 잡어! 아니지 새로 잡고 버려!’
‘그! 그럴까! 그래 그게 낳겠지!’
배고픔을 덜기위해서가 아니라 맛을 위해서 있는 고기를 버리고 다시 잡으려니 영 마음이 내키진 않는다. 하지만 똑 같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이런 일이라도 벌여서 지루함을 달래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우짜지?’
오후에는 남쪽에서 구름대가 다가왔지만 넓게 펼쳐진 온화한 구름이어서 원하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엔진사용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감이 없질 않다. 먹구름이 기다려진다. 내일 낮 부터는 바람이 분다고 한다. 낚시는 하지 않았다.
밤10시경 바람이 서남서로 바뀌면서 미약하나마 배를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속력은 4노트대였다. 밤에는 낮은 구름대가 레이더에 잡히면서 알람을 울려대었다. 바람이 오나 하고 밖을 내다보니 바다는 조용하기만 했다.
3월11일(금)
어둠이 걷혀가는 하늘에 나타난 구름들이 반가웠다. 회색하늘의 상층에는 다리미도 다려 놓은듯한 엷은 구름이 가득 펼쳐져있고 중층에도 솜사탕을 찢어놓은 것 같은 큰 구름대가 듬성 듬성 보였다. 그리고 수면가까이에는 아직은 커지 못한 자그마한 뭉게구름이 인트레피드를 중심으로 수평선을 따라 빙 둘러 포진하고 있었다.
일출이 시작되고 남을 시각, 태양은 동녘하늘의 구름에 가려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구름 건너편 하늘은 또 다란 세상이라도 있는 듯 붉게 빛나고 있다.
반대쪽 하늘 저 멀리에는 짙은 구름들이 더 많이 있는 데 비구름인지 아니면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인지 수면에서 하늘을 향해 1킬로 쯤 무지개가 솟아있다.
7시 반 쯤 되자 태양이 구름위로 솟아올라 이쪽세상을 밝혀주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잠시 선실로 내려가 있다 올라왔는데 구름층이 엷어져있었다.
‘바람이 일어날 징조로 알았는데...!’
아침에 조타 석에 앉아 등짝에 받는 햇볕을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지 않았다. 아침에 선실온도는 섭씨 27도였다.
막 남위25도 서경90도를 통과했다. 이곳에서 정북으로1,400마일 위쪽에 갈라파고스 섬이 있다. 그리고 칠레 본토와 남서태평양의 외딴섬 이스트섬은 각각 천여마일씩 떨어져있다. 11일간 발디비아에서 항해해온 거리는 1,230마일(실제 항해거리1,400마일) 목적지 타이티까지는 3,420마일이 남았다. 아직도 남위20도 서경100도까지는 북서쪽으로 항로를 잡고 올라가지만 그곳에서부터는 일직선으로 타이티까지 갈 것이다. 그곳까지는 620마일 남았고 그지점에서 타이티까지는 2,930마일이어서 실제로 항해해야할 거리는 3,550마일이다. 순조롭게 항해가 계속된다면 4월6일~8일 사이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한국과의 시차는 출발이후 조금씩 늦어지기 시작해서 이제 15시간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한국이 아침7시면 이곳은 하루전날의 오후4시이다. 거꾸로 이곳을 기준으로 하면 이곳이 아침7시면 한국은 같은 날 밤 10시이다.
4미터쯤 되는 긴 너울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달려간다. 바람이 좋아져서 범주속도가 4노트 이상 올라갔다. 제네커를 올릴 것인가를 생각하며 한동안 고민하다 관두었다. 아직 변풍지역이어서 괜히 몸만 분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한낮이 되자 선실 안에 제법 후끈거렸다.
오후2시경이었다. 어느새 구름들이 서로 뭉쳐져서 제법 큰 뭉게구름이 되어있었다. 특히 뒤쪽에 포진하고 잇는 구름은 거의 하늘은 4분의 1쯤 덮을 만큼 컸다. 너울 파도위에 일어나 파도 속에는 가는 백파가 일고 있었다. 반가웠다. 속도가 5노트를 넘어섰다.
제대로 된 바람이 아니어서 3-5노트사이를 오락가락하면 나아갔다. 속도가 3노트대로 떨어지면 배가 많이 뒤뚱거려서 그 여파로 돛이 좌우로 쓸리면서 계속해서 조금씩 상처를 입고 있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무역풍이여! 어디로 갔는가!’
낮에 속도가 3노트대로 떨어졌을때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제네커를 올렸었다. 속도가 떨어졌을때 제네커를 올려놓으니 가관이었다. 펼쳐졌다간 배가 기우뚱하면 접쳐버리기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거추장스럽기만 하였다. 제네커를 올리기위해 공들이는 시간을 생각하면 울고 싶을 뿐이다. 다시 내려서 백에 넣어 선실로 가져 내려가 보관해두었다.
‘뭐 이러면서 공부하는 거지 뭐! 안 그래!’
풍하로 내려가는 돛달리기는 바람이 일정이상 불어주어야 제대로 된 항해를 할 수 있다.
3월12일(토)
밤사이 바람은 약했지만 평속4노트정도의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돛이 쓸려 아파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편안한 밤이었다.
일출에 반사되는 구름 양이 더욱 많아진 아침이었다. 7시쯤부터 오른쪽에 비구름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더니 얼마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발디비아를 출발해서 처음 맞이 하는 비였다.
‘저 비가 지나가면 바람이 시작될꺼야! 그럼! 그럼!’
갈매기 5마리가 아주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나는 모습이 마치 매와 같았다. 바람을 타고 노는 것이 갈매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녀석들의 색깔은 완전히 하얀색인데 꼬리부근에 검은 반점이 있었다. 꼬리날개는 제비를 닮았다. 연안의 살찐 갈매기와는 다르게 전투기처럼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수면위로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찾지 않는 걸보면 아침을 배부르게 먹은 게 분명하다.
비구름이 다가와 잠시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금새 그쳐버렸다. 왜냐하면 그 구름이 배를 앞질러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비구름이 지나가자 바람이 뒤바람에서 앞쪽으로 돌아서 북풍이 되었다. 잠시 리칭(바람을 옆에서 받고 달림) 상태가 되어 속력이 나는가 싶더니 다시 바람이 약해지면서 돛이 펄럭이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속력이 3.5-4노트정도 나왔다. 이래도 못하고 저래도 못하는 속력이다. 엔진을 같이 사용해서 북쪽으로 항로를 좀 더 올려쳐주고 싶지만 연료를 생각해서 마음을 억누르고 오직 인내심으로 버티기에 들어갔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 가까스로 모여 있던 구름이 태양의 열기에 다시 흩어졌다. 그러나 바람이 계속 유지되어 돛대를 좌우로 ‘까닥 까닥’ 거리며 나아갔다. 기상도를 보면 북위23도 위쪽부분이 좀더 바람이 좋기 때문에 일단은 북서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바람의 느낌이 약간 더 좋아질 때 쯤 제네커를 올렸다. 속력이 평속6노트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제네커로 시원하게 달렸지만 저녁이 되자 걱정이 살살 되었다. 밤중에 바람이 강해져서 제네커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 제네커를 철수하기로 하였다. 제네커를 잘 펼쳐지게 스핀네커폴을 이용해 중심점을 밖으로 옮겨놓았고 반대편 시트(세일을 조절하는 로프)도 좀더 바같쪽에서 버티도록 메인 붐 끝에 도르래를 달아 당겨놓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세팅되어있는 것들을 해제 하였다. 그런 다음 시트를 느슨하게 한다음 제네커 커버를 당겨 내리는데 돛대꼭대기에 걸려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배가 돌아가 풍상으로 향하게 되자 속력이 빨라지면서 배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내리려든 제네커를 주변에 있는 밧줄로 고정해두고 콕핏으로 돌아가 배를 안정시켰다.
배를 바로 가도록 한 다음 다시 제네커 커버(노끈을 이용해 말아 올리고 내리는 스타일)를 내리려 했지만 내려오지 않아 그대로 두고 핼려드를 늦추어 주어 세일전체를 내리려했다. 제네커세일은 무겁지는 않지만 그 면적이 넓어서 덮개로 감싸지 못해 앞 갑판이 바람이 날리는 세일로 난리통이 되어있는데 아니! 그런데 핼려드가 내려오지 않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앞일!
‘야! 이것 대형사고인데!’
정말 세일자체가 내려오지 않고 걸려 있으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다. 그러나 밑쪽에 세일을 감아 안고 몇 번 힘을 주고 당기자 한 번에 주르륵 내려왔다. 그 때문에 중심을 잃어 까닥하면 있어서는 안 될 큰일이 날 뻔 했다. 내려온 세일을 자루 속에다 쑤셔 담고 세팅에 사용되었던 모든 줄을 전부 거두어 들였다. 줄이 한 가닥 돛대에서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루를 선실로 들여 놓을 수가 없어 돛대부근에 묶어두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돛대에 올라가서 줄을 풀기로 했다.
밤에는 메인세일만 펼치고 평속 4.5노트로 북서쪽으로 향했다. 오늘 밤까지만 북서쪽으로 올라가고 내일부터는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기로 했다. 갈수록 바람이 강해진다고 한다. 바람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메인세일과 짚 세일을 모두 올려놓으면 속도가 빨라지기는 하지만 세일에 받는 압력이 약해져서 배가 좌우로 롤링을 할 때 세일이 계속 밀리지 못하고 펄럭거리게 된다. 속도가 좀 덜 나더라도 메인세일 한 장으로 버티며 바람이 좋아지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하루 종일 트롤링낚시를 했다. 낮 동안에 두 번. 해가 지고 난 뒤에 두 번 어신이 있었으나 모두 줄을 잡아채기 전에 달아나 버렸다. 혹시나 해서 밤에도 낚시를 걷지 않았다. 대형오징어가 걸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달이 꽤 많이 커졌다. 따로 렌턴을 켜지 않아도 데크에서 작업이 가능했다.
3월13일(일)
새벽5시 비구름이 다가와 한바탕 비를 퍼붓고 지나갔다. 덕분에 속력이 6-8노트로 좋아졌다. 잠시 비를 맞고 조타기를 조작했더니 한기가 몰려온다. 옷이 너무 얇아 금방 몸이 젖었기 때문이다. 몸을 데우기 위해 식은 밤 한덩이를 냄비에 넣고 끓여 이번에 공수받은 배추김치와 창란젖갈을 함께 먹었다. 실내온도는 25도를 가르켰다.
구름대가 흘러감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계속 변하고 있어 또 다시 윈드베인(풍력 자동조타기)를 조절하러 나갔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 제법 큰 백파가 계속 따라왔다. 이 정도 바람에 저렇게 큰 백파가 일어나다니 하고 생각하고 유심히 보니 동녘하늘에 떠 있는 낮은 구름이었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그 곳만 희미하게 동이 터고 있는 것이었다.
6시경 일출이 시작되었지만 군데 군데 빈틈사이로 붉은 기운이 있을 뿐 구름이 가득덮힌 아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구름은 허물이 벗겨지듯 소리없이 사라져 솜털처럼 부드러운 구름들만 남았다. 바람이 약해지고 백파가 사라졌다. 엔진을 가동했다.
8시경 오메가 레이디 미리암(Omega Lady Miriam:유조선)호가 우현으로 100미터쯤 떨어져 인트레피드를 추월해갔다. 그 배는 밴쿠버쪽, 정확히는 체리포인트(Cherry Point)라는 곳으로 간다고 하였다. 교신이 끝나고 해도를 펼쳐서 남아메리카 끝단에서 밴쿠버쪽으로 선을 그으니 정말 이곳을 통과하게 되어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붐을 고정시키다 보니 앞쪽 도르레에 줄이 엉켜있길래 풀기위해 앞쪽으로 갔다. 꼬여있는 줄을 풀어놓고 돌아오는데 붐이 좌우로 흔들리더니 내 머리를 쳤다.
‘주인님 정신 차리십시오. 퍽!’
그 줄을 풀므로 해서 붐이 자우로 흔들리는지를 깜박 있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둔탁하고도 강력한 붐펀치였다. 순간 머리통과 내용물이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사라져 엔진을 사용해 5시간째 항해중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바람을 일으킬만한 그런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뒤에 따라오는 먹구름이 비를 내리면서 따라오고 있지만 기껏해야 30분이면 그 곳을 벗어날 것이다.
돛대위에 걸려있는 제네커 밧줄을 풀기 위해 돛대로 올라갔다. 돛대의 높이는 16미터이다. 아파트 5층 높이이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항해중인 상태에서 돛대위에 올라가는 것은 오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다. 밑에서도 흔들리지만 위쪽에서는 그 폭이 너무나 커서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특히 발을 옮기다 그 발이 다음 발판을 밟기 전에 흔들릴 때는 너무도 위험했다. 작업을 마치고 내려와서 긴장된 근육을 풀기 위해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었다.
오후4시. 10시간 만에 그나마 쓸만한 바람이 불어왔다. 평속 4.5노트로 전진했다. 제대로 된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타이티보다 500마일쯤 가까운 마퀘사스로 목표지점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바람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오후5시. 날치가 나는 모습을 보았다. 남태평양에서는 처음 보는 날치였다. 바람이 다시 약해졌다. 아무래도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야 할것 같아 코스를 북북서로 돌렸다. 해질 무렵 맥주 1캔을 꺼내어 바람을 부르는 고사를 지냈다. 3분의 1은 바다에 뿌리고 나머지는 내가 마셨다.
‘신이시여! 바람을 주소서!’
3월14일(월)
약한 바람이라도 한껏 담아보려고 돛을 열고 안간힘을 쓰지만 배가 기우뚱거리기 때문에 10초 간격으로 돛이 펄럭거린다. 속도는 3-4노트, 돛의 쓸림만 없다면 그런대로 참고 갈만한 속도이다. 뭐 참지 않을 뾰족한 수도 없다만. 코스를 풍상쪽으로 돌리면 속도(SOG)도 나아지고 돛의 쓸림도 없지만 반면에 목적지로 접근하는 속도(VMG)는 더 낮아지기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나마 가는 것이 최선이다.
잔뜩 흐린 아침이었다. 그래도 구름이 많다는 것은 바람이 좀 더 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태양이 브라인드 창을 살짝 누르듯 구름을 열고 붉은 눈을 드러냈다. 오늘따라 그 모습이 악마의 눈 같았다. 태양은 계획대로 잘 되는 지를 확인하고 다시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구름양이 없어지고 창공은 푸르렀다. 수평선위로 빙 둘러 뭉게구름으로 성벽을 쌓아놓았다. 틀림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유람선에서 본다면 말이다.
7시경부터 바람의 방향이 동북동 방향으로 돌아서서 속도가 조금 나아졌다. 그에 따라 돛의 성가신 펄럭임도 없어졌다. 생각해보니 그래도 어쨌거나 어제부터는 거의 돛 달리기만 하고 있다.
8시부터 다시 바람이 약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체적으로 오전에는 바람이 없는 편이다. 11시경부터 바람이 남동풍으로 바뀌면서 약간 강해졌다. 그 바람에 힘입어 풍력발전기도 ‘으지지지지’소리를 내면서 돌아가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바람이다!’
이제 본격적인 바람이 시작되려나보다 생각되어 살짝 마음이 들떴다. 제노아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펄럭거려서 늦추어놓았던 메인세일도 탄력 있게 당겨 올렸다. 여지껏 몰랐던 짜릿한 시속6노트.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하늘을 살펴보니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다만 뒤 따라 오던 큰 비구름 두 개 중 하나가 왼편으로 통과해서 인트레피드를 앞 질러 가고 있었다.
‘이제 좀 제대로 불어주라! 안되겠니?
‘맛만 보이소~!’
바람결에 들려오는 대답과 함께 20분후 상황이 종료되었다.
미적거리든 바람이 오후2시가 되면서 솜이불처럼 덮고 있던 구름이 북서쪽으로 빠르게 걷혀져갔다. 바람이 불어왔다. 배의 속도가 5노트를 넘어섰다. 구름들은 계속 쳐다보면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잠시 딴 생각을 하다 다시 보면 어느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층 구름은 보이지 않지만 중층구름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보면 곧이어 제대로 된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른다.
집사람 보내는 메일 속에는 지인들의 응원메세지도 가끔 보내온다. 오늘 아침에 당도한 메시지 속에는 참치에 고추장을 발라 구워먹으라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고추장이 많이 남아있어 저걸로 뭐하나 하고 고민했는데 마침 잘되었다. 점심때 참치고추장구이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2센티쯤 가로로 잘라져 있는 참치에 고추장을 흠뻑 묻혀서 굽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기가 두꺼워서 안까지 잘 익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해서 가위로 잘게 잘라서 골고루 고추장을 묻혀주었다. 그런데 고기가 익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음! 뭐지?’
그렇다. 바로 장어구이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특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도꼭대기에 살짝 살짝씩 백파가 보이기 시작하여 가끔 속력이 6노트를 넘나들었다. 잠시 후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가끔은 속도계가 7노트를 넘어서기도 하였다. 바람도 조금 강해졌지만 무엇보다도 방향이 남풍이어서 바람을 옆에서 받고 가게 되어서 속도가 나게 된 것이었다.
저녁에 일몰이 시작될 무렵 갈매기 한 마리가 배 주위를 맴돌았다. 지금까지 나타났던 갈매기들은 몇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녔는데 녀석은 나처럼 혼자였다. 그리고 앞에 보았던 갈매기와는 달리 육지가까이에서 흔히 보는 그런 갈매기였다. 워낙 문명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만나서 여서 인지 녀석에게 느끼는 마음이 사뭇 다르다. 저나 나나 이 지구라는 행성의 바다에 떠있는 지구가족이라는 그런 마음 말이다.
‘어이! 친구 갑판위에서 좀 쉬어가게!’
그러나 갈매기들은 결코 신세지는 일이 없다.
초저녁에는 구름이 많았지만 밤이 되어 가면서 하늘이 맑게 개었다. 달님도 이제 그 크기가 꽤 커졌다.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3월15일(화)
새벽 3시경 돛이 펄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바람이 약해졌다. 배의 속도가 3노트를 오르내렸다.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니 잔뜩 흐린 날씨였다. 그러나 유심히 보니 엷은 구름사이로 희미하게나마 별빛이 조금 보였다. 레이더에서 수시로 비구름을 잡아내어 알람을 울려 더 이상 잠을 자는 것을 포기했다.
두꺼운 구름층 때문에 오늘은 일출이 없었다. 구름이 하늘은 80퍼센트정도 덮고 있었다. 오늘도 아침바람은 그리 좋지 못하다. 왼편에는 큰 비구름 덩어리가 있어 그곳에 무개개가 피었다. 한 쌍의 제비갈매기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사이좋게 배 주위를 날아다녔다.
8시가 되면서 뒤따르든 구름이 인트레피드를 추월했다. 바람과 파도가 일었다. 쾌속전진. 11시경 페닉스와 덴버의 시간대로 들어왔다. 한국과의 시차가 8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시계를 앞쪽으로 한 시간 당겼다. 실제로는 16시간 늦은 지역이지만 그렇게 계산하면 복잡해서 이곳이 한국보다 8시간 빠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두운 구름은 다 사라지고 부드러운 솜털구름만 평화스럽게 펼쳐져있다. 그런데도 바람이 불어 5노트대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ABBA를 들으며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살펴 보았다. 남아있는 10여개의 사과 중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골라서 하나를 먹었다.
‘이러다가 끝날 때까지 상태가 안 좋은 것만 먹게 되는 것은 아닌지!’
감자를 보니 몇 개가 벌써 곰팡이 피어있었다. 그중에서 좋지 않은 것 10개를 골라 삶았다. 그런데 이번에 산 감자는 생긴 것은 감자인데 색깔은 고구마였다. 그리고 삶을 때 향은 고구마였는데 먹어보니 감자였다.
‘허! 거참!’
나머지는 감자는 해수로 깨끗이 씻어 햇볕에 잘 말린 다음 보관했다. 채소나 과일을 구입할 때는 상온에 그냥 보관된 것을 사야한다. 차가운 서리를 뿜어내는 곳에 보관된 것으로 구입하게 되면 하루 이틀이면 껍질이 할매뱃가죽처럼 시들고 빨리 맛이 변하고 상한다. 될 수 있으면 상온의 것으로 사되 상처가 없고 단단한 놈으로 사면 가능한 오래 버티어 준다.
계란은 오래가는 식품 중에 하나이다. 십 여일이 지났지만 아직 하나도 변질 된 것이 없다. 계란을 살 때도 산란날짜를 확인해서 좀 비싸더라도 최근 것으로 사야한다.
비타민 C 공급원으로 자두와 사과를 샀었는데 자두는 3일전에 다 떨어지고 사과만 남았다.
저녁이 되어 일몰이 시작되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구름아래를 지나 해가 물속으로 가라앉아서 일몰자체도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파도가 석양에 물들어갔다. 춥고 긴 남아메리카항해를 떠올렸다. 그때의 한 가지 바램은 오직 춥지 않은 무역풍대에 어서 가는 것이었다. 험난한 파도를 뚫으며 꿈에 그렸던 곳. 그곳을 지금 항해하고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 웬일일까, 모든 게 지나면 추억이 되지, 특히 그 추억이 힘들었든 것 일수록 말이야. 물새 한 마리가 나타나 꼬리로 물을 튀기면 날고 있었다. 잠시 후 밤이 찾아왔다.
3월16일(수)
지난밤은 순조로운 항해였다. 평속5노트로 내내 달릴 수 있었다. 오늘 역시 짙은 구름에 가려 일출을 볼수 없었다. 어둠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데 검은 제비 갈매기 한 마리와 흰색 제비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에 바람을 가득안고 날아 다녔다. 녀석들은 고개를 바다쪽으로 떨구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해면에는 물새한마리가 여전히 꼬리를 수면에 탁탁 치며 날았다.
8시경. 비바람에 인트레피드를 따라 잡으면서 바람이 강해져서 속력이 7노트를 넘나들었다. 주 돛 한 장 만 펼치고 거의 풍하(바람을 정확히 뒤에서 받음)로 달려갔다. 해면이 상당히 거칠어져있다. 풍력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레이더에 주변의 비구름들이 여러 개 잡혔다.
한낮이 되면서 구름이 걷혀 태양이 온 하늘은 차지했다. 그러나 구름이 없어도 바람이 잘 불어주고 있다. 제대로 된 무역풍위에 올라탄 것이다. 주 돛 하나로는 평균속도가 5노트정도 밖에 나오지 않아서 스핀네커폴을 이용해서 안쪽의 작은 짚세일을 반대편으로 타이트하게 펼쳤다. 속력이 5.5노트로 올라갔고 짚 세일도 펄럭이지 않았다. 타이티까지는 2,920마일 남았다. 평속5.5노트로 계속 달릴 수 있다면 하루에 130마일씩 거리를 줄여나가 23일 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마퀘사스까지는 2,345마일로 18일이면 갈 수 있다. 바람이 계속 좋으면 타이티까지 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마퀘사스로 갈 수도 있다.
배 선실 마루바닥 아래와 공기가 잘 통하도록 나무로 만든 바둑판모양의 환기창이 있다. 그것은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아래에 있는데 먼지나 쓰레기 조각이 가장 많이 떨어지는 곳이어서 밑에 모기장처럼 촘촘한 철망이 쳐져있다. 오늘 보니 그 곳에 오물이 제법 많이 모여있었다. 창을 들어내어 오물을 걷어내고 먼지를 털어낸 다음 해수로 깨끗이 씻은 다음 햇볕에 말려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바닥이 훤하게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내친김에 마루바닥도 쓸고 걸레로 구석구석 정성을 들여 닦았다. 태평양에 들어서고 나서 부터는 맨발이다. 청소후에 선실을 걷는 기분이 산뜻했다. 청소와 정돈은 언제나 사람을 기분좋게 한다.
맑은 하늘아래 잘 달린 하루였다. 해가 니웃 니웃 서녁 하늘로 저물어져 갔다. 새파란 하늘은 배경으로 중간 중간에 떠 있는 작은 구름들이 석양에 반사되어 붉에 물들어갔다. 배가 부르기 시작한 달은 낮부터 미리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이 시작된다.
3월17일(목)
새벽3시. 후미쪽 18마일 뒤에서 배가 한 척 나타났다. 그 배의 코스가 인트레피드와 비슷해서 신경이 쓰였다. 인트레피드가 265도로 항해하는 반면, 그 배의 코스는 295도였다. 12노트의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문제는 선수를 인트레피드 앞쪽으로 잡고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트레피드의 속도가 느리긴 해도 앞쪽에서 가고 있기 때문에 교차지점이 되면 충돌의 위험이 있어 보였다.
무전으로 상선 그라루스(Grarus)를 불렀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항로를 물었다. 일본으로 가고 있는 배였었는데 선원은 필리핀과 러시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내가 코스를 좀 조정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인트레피드를 자기배와 나란히 가도록 하자고 하였다. 추월을 하는 배가 피추월선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라루스 이쪽은 범선인데 지금 방향조정이 어려우니 그쪽에서 이 배의 뒤쪽으로 통과해 가기 바란다.’
다행히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였다. 실제로 바람을 뒤쪽에서 받아 돛을 양쪽으로 펼쳐놓았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방향전환이 쉽지 않았다.
그라루스가 인트레피드를 추월해가고 한참있다 날이 밝아왔다. 일출이 시작된 동녘하늘은 구름이 많았고 나머지 하늘에는 잘 정돈된 천수답처럼 구름이 층계를 이루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속력이 5노트이하로 떨어지며 풍력발전기가 작업을 멈추었다.
8시경. 큰 비구름대가 다가와 바람과 파도를 일으켰다. 속력이 6.5노트로 올라갔다. 풍력발전기가 일을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은 뒤 덮었고 많은 비가 내렸다. 그러나 동녘하늘로 뒤 돌아보니 조그맣게 열려있는 파란하늘. 바람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온도는 26도, 기압은 1,021미리바였다.
아침반찬으로 미역국을 준비했다. 마른 미역을 물에 불려서 씻은 뒤 물을 붓고 홍합통조림 하나를 따 넣었다. 가스불을 켜고 한참을 끓이다가 파(숨어있는 것을 찾아냄)와 마늘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었다. 훌륭한 미역국이 완성되었다. 미역국은 만들기 쉽고 맛도 좋다. 서양 사람을 배로 초대했을때 미역국을 끓여주면 대체적으로 그들 입맛에 거슬리지 않아 했다.
밥(2일이상분을 한꺼번에 하기 때문에 늘상 찬밥)과 미역국, 그리고 배추김치, 갓김치, 젓갈과 함께 먹는 아침식사였다. 장거리 항해를 하고 나면 배가 쑥 들어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현상유지도 어려울 듯 하다. 영화를 보면서 아침을 먹었다. 날이 험악하지 않을땐 식사시간이 제일 즐겁다. ‘콰이캉의 다리’를 네섯번째 보고 있다. 명작은 가끔 다시 보아도 볼 만하다.
정오가 되어 해가 하늘 한가운데로 오면서 먹구름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솜털구름만 수평선을 따라 가득했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기 1시간 전에 달이 동녘에 떠올라 방긋 웃고 있었다. 만삭이 다 되어 갔다. 하룻동안 132마일을 달렸다.
3월18일(금) 오밤중에 만난 강풍
‘무슨소리지!’
새벽1시경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에 잠이 깨어 지피에스를 보았다. 코스가 북쪽으로 향해 있었다. 얼른 콕핏으로 나가 윈드베인 해제시키고 직접 조타기를 잡아 배의 선수를 바로 잡았다. 배는 바람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가 여기저기서 배를 올라탈 듯 따라왔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족히 9-10노트는 될 것 같았다. 파도 위를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분명 위험한 속도였다. 배가 파도에 올라탔을 때 한쪽으로 선수가 돌아가게 되면 선체는 크게 기울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하지 않는 방향에서 돛에 바람을 받게 되기 때문에 더욱 상황이 나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천막에 가려 풍향계를 볼 수 없었지만 파도 방향과 컴파스를 보면서 바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타기를 조작했다. 그러나 메인세일을 축범하지 않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윈드베인에 조타기를 걸어 똑 바로 갈수 있도록 몇 번이고 조절을 햇다. 그리고는 되었다 싶어 축범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때였다.
‘펑, 타닥! 퍽!’
큰 파도하나가 배의 꽁무니를 한쪽으로 밀어서 선수 왼편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여파로 왼쪽으로 펼쳐져 메인세일이 바람을 반대편으로 받게 되었다. 맨처음 ‘펑’하고 돛에 압력이 바뀌더니 그 힘에 의해 ‘타닥’하고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퍽’하고 메인세일이 붐과 함께 반대편으로 날아가 쳐 박혀버렸다.
‘이거 어떻게 된거야!’
눈에 보여야할 붐과 메인세일이 보이지 않았다. 조타석 위에 천막이 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개를 숙이면 보여야할 세일이었다.
‘'허! 이거 붐이 날아가 버린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데 배가 움직여 붐이 다시 원위치로 멀쩡히 돌아왔다.
‘휙, 팡’
‘붐은 괜찮네!’
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붐을 밑에서 잡아주는 붐뱅시스템의 와이어가 터져서 붐 자체가 바람의 압력으로 하늘로 30도정도 올라가 있어서였다. 일단 바람을 받는 면적이 적어져서 배가 조금 안정이 되었다. 다시 윈드베인을 잘 맟추어 배가 바로 가도록 해놓고 마스트 밑둥으로 기어가 메인을 2단 축범 까지 끌어내렸다. 일단은 완벽하게 축범을 하는 것보다는 바람을 적게 받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배의 속도가 줄어들어 정신이 좀 들었다. 붐이 왜 날아갔는지 확인해보니 붐이 넘어가지 못하게 잡아놓은 줄에 연결된 샤클이 부러져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붐이 넘어가면서 그 반동으로 붐뱅 와이어까지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반대편 마스트에서 뒤쪽으로 걸어놓았던 런닝백스테이가 붐펀치에 풀려 날아다녔다.
붐을 잡는 로프를 다른 밧줄을 연결해 임시로 잡아두고 콧핏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친듯이 날아다니는 백스테이를 잡아다가 다시 고정시켰다. 속력이 여전히 7노트를 넘나들었다. 1시작쯤 그렇게 달리자 바람이 좀 잦아졌다. 그때 다시 갑판으로 나아가 축범 줄을 탄력있게 당기고 2단 축범 홀에 돛을 걸어 제대로 당겨 올려놓았다. 다른 일들은 어둠이 걷히면 하기로 하고 선실로 들어왔다.
레이더에서 구름이 잡혀 경보가 울렸었는데 이렇게 큰 바람이 일지 몰랐다. 이제부터는 밤에 큰 비구름이 다가오면 미리 축범을 해야겠다.
오늘도 흐린 아침이었다. 바람이 약해졌다가 8시를 넘어서자 바람이 강해졌다. 오늘 아침은 참치김치찌개를 끓여 새로한 밥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이틀 동안은 이 밥과 찌게로 떼우게 될 것이다. 또 새로 밥과 국을 만들때 쯤이면 항해거리가 250마일쯤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한낮이 되자 바람이 좀 약해졌다. 메인세일을 다시 끌어올렸다. 속도는 4-5노트였다. 날이 화창하게 개어서 더웠다. 수온계를 보니 29도였다.
윈드베인은 바람을 이용해서 조타하도록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바람이 없을 땐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오토파일럿을 사용하게 되는데 며칠전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원인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로프야 휀더며 창고를 꽉 채운 물건들을 끄집어내어 흔들리지 않는 곳에 묶어두고 창고 아래로 내려갔다. 원인은 오토파일럿을 고정하고 있는 볼트가 때문이었다. 볼트가 모두 조금씩 풀려있었다. 볼트4개를 힘껏 조였다. 오토파일럿을 지지하는 구조물이 흔들리면서 선체외벽을 계속 문질러 5미리 정도의 홈이 파여 있었다. 좀더 파고 들어가면 밖이다. 외벽과 구조물 사이에 작은 나무판를 끼워 넣고 망치로 때려 넣었다. 좁은 공간에서 작업하다보니 자세가 불안정했다. 왼손으로 나무를 잡고 오른손을 엑스자로 꼬아 뒤쪽에서 망치질을 했다. 총 5번 중에 4번은 명중하고 1번은 왼손에 맞추었다. 맞을 땐 몰랐는데 작업을 마치고 나니 왼손 집게손가락 안쪽 마디위에 피가 흘러나와 맺혀있었다. 피는 선홍색이었다. 피를 보니 내가 아직 잘 살아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배가 흔들려서 작업이 쉽지 않았다. 오후 내내 작업에 매달려 당분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근본적으로 원인을 없애려면 오토파일럿 구조물과 조타기 구조물을 용접해야 한다.
오늘은 낮 동안 바람이 좀 약한 편이었다. 그래도 어젯밤에 많이 달려두어서 하루 동안 128마일을 달렸다. 해가 지고 나서부터 바람이 불어와 속도가 빨라졌다. 만월이어서 멋진 월출을 기대했지만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밤중에는 구름사이를 달리고 있는 달님을 볼 수 있었다.
3월19일(토)
바람이 좋은 아침이었다. 일출이 시작될 땐 구름이 많았지만 이내 하늘이 파랗게 열리기 시작했다. 기온은 27도 기압은 1017밀리바였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바람 약했다 강했다를 반복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원인모를 두통 때문에 편치 않았다.
낮 동안 프로펠라 샤프트로부터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잡는 작업을 했다. 선실내부의 엔진과 선실 밖 물속의 프로펠라는 스텐레스 봉으로 연결되어있는데 이 봉을 감싸고 있는 밀실(스턴튜브)로부터 물이 들어오는 것이다. 밀실속에 넣는 석면패킹을 1개더 밀어 넣고 조였다. 수면보다 아래에 있어서 잘못하면 물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총 4군데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샤트프쪽이고 나머지는 엔진냉각수, 화장실용 해수 유입구, 개수대용 해수유입구이다. 샤프트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밸브만 잠그면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파도가 1.5미터에서 2.5미터정도로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난다. 특히 뒤 바람을 받고 가다보니 좌우로 흔들리지 않을 때가 없다. 어디에 몸을 지지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목표지점을 타이티에서 마케사스로 바꾸었다. 타이티섬과 마케사스 사이의 거리는 약 800마일이지만 이곳에서 각 섬으로 가는 거리는 500마일정도 차이가 난다. 마케사스를 거쳐 웨스턴 사모아로 가는 일정으로 항해계획을 변경했다. 오늘 항해한 거리는 128마일이다. 마케사스까지 남은 거리는 1,946마일로 현재속력이라면 15일이 걸려서 4월4일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부산까지 남은 거리를 재어보았더니 직선거리로는 7,750마일이었고 사모아, 봄페이, 찌찌시마, 시모노세키로 거쳐 가는 항로로 재어보니 8,340마일이 나왔다.
3월20일(일)
흐리고 바람이 약한 아침이었다. 속도가 5노트이하로 떨어졌다. 아침의 선실온도는 27도였다. 간밤에는 비구름의 출몰이 없어서 편안했다. 낮 동안에도 여느 날처럼 평이했다. 엷은 중층구름은 굵은 붓으로 칠해놓은 듯 했고 그 아래 낮은 구름들이 서쪽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발디비아를 떠나온 지 벌써 20일이 되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라고 20일동안의 항해가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목적지를 얼마나 잡느냐에 따라 느끼는 마음도 다른 것 같다. 1주일 항해도 멀게 느껴지지만 하루 항해도 나름대로 또 지루한 시간이 있다. 목적지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시간이 잘 안갈 것이다.
마젤란이 이 바다를 건너면서 날씨가 좋아 태평양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괴혈병과 굶주림으로 가장 많은 선원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태평양이라는 이 거대한 대양의 광활함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이었다.
밤11시경, 바람이 강해져서 주돛을 1단계 축범하였다. 낮은 구름들이 자주 출몰하여 레이더가 경계를 서느라 바빴다. 하루 동안 138마일을 달렸다.
3월21일(월)
비구름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먹구름에 해를 가린 아침을 맞았다. 파도가 꽤 높아졌다. 뒷 바람을 받고 나아가고 있어 실제 느끼는 파도는 덜 하지만 예보에 의하면 3.5미터의 파도라고 한다. 앞으로 5일간은 바람이 좀 센 편이라고 한다. 기울어가는 달이 밤8시경 떠올랐다. 아직은 달이 항로를 밝혀준다. 오늘은 1단계 축범된 상태로 133마일을 달렸다.
3월22일(화)
바람이 강한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하늘을 덮고 있었다. 한국과 시차가 7시간대의 지역으로 들어왔다. 선수를 돌려 투아모투 하오(Hao)로 목표지점을 바꾸었다. 하오를 거쳐 가는 항로가 사모아까지 150마일 정도 거리가 짧았다. 낮 동안에는 가스렌지를 청소하였다. 밤에도 바람이 이어져 속도가 잘 났다. 하루 동안 143마일을 달렸다.
3월23(수)
낮 동안은 흐렸다. 145마일을 달렸다. 온도는 28도 기압은 1013밀리바였다. 바람이 시속 16노트(초속 약8미터)의 속도로 불어 파고는 2.5미터였다. 칠레 발디비아를 출발한지 23일째다. 그 동안 항해해온 거리는 2,900마일이다. 투아모투 하오섬까지 남은 거리는 1,420마일로 11일정도 걸릴 것이다.
며칠 전부터 멍한 상태가 되었다. 하루 하루 날짜만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최선이다.
3월24일(목)
태양이 구름사이 좁은 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잘 가고 있어요! 덕분에!’
이렇게 대답이라고 하고 싶었다. 맑은 일출을 본 것이 언제였든가? 얼마 전부터는 파란 하늘보다 구름이 더 많아졌다. 덕분에 바람이 좋아 속도가 빨라졌다. 하루 동안 무려 162마일이나 달렸다. 바람은 꾸준히 불고 있지만 뒤 따라 오던 파도로 인해서 속도가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파도가 배를 뒤에서 밀면 긴 내리막이 생겨 속도가 7-9노트로 빨라졌다가 물마루에 올랐을 때 잠시 주춤한 뒤 파도가 앞서가기 시작하면 오르막이 되어서 속도가 4-5노트로 떨어진다. 끊임없이 파도의 산을 오르내리며 가고 있는 것이다.
달이 점점 작아져서 반달이 되었다. 달은 자정 무렵이나 되어야 떠오를 것이다. 깜깜한 밤에 콕핏에 나와서 배가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난다. 이럴 땐 선실로 내려와 영화나 한편 보는 것이 낫다.
3월25일(금)
간밤에는 하늘이 맑아 별들이 가득했다. 은하수도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가 속한 은하계에만 수천억 개의 별이 있다는데 그러한 은하계가 또 수천억 개가 된다고 하였다. 도대체 이 우주는 얼마나 큰 것일까?
몇 일만에 보는 수평선에서의 일출이었다. 낮 동안은 하루 종일 맑았지만 바람이 많이 불었다. 파도의 높이가 4미터에 가까웠다. 뒤따라오던 파도가 말려서 부서지면 그 소리에 깜짝 놀라곤 하였다. 인트레피드는 앞과 뒤가 모두 날렵하게 되어있어 뒤에서 따라오는 파도의 영향을 덜 받는다. 하루 동안 166마일을 달려 어제의 속도기록을 갈아치웠다.
3월26일(토)
발디비아를 출발한지 26일째이다. 짙은 구름으로 일출은 없었다. 낮에는 비구름이 두 차례 인트레피드를 따라와서 비를 뿌리고 앞서갔다. 해가 지고도 한번 더 비가 왔지만 밤 동안은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이곳은 비가 오더라도 비구름아래에서만 비가 오기 때문에 그 지역만 어둡다. 오후에 들어서면서 바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161마일(남은거리 944마일)을 달렸다.
3월27일(일)
맑은 아침, 기온은 28도였다. 아주 적당한 바람이 불었다. 너무 강해 거칠지도 않고 그렇다고 속도가 떨어지지도 않은 그런 바람이었다. 평속 6노트정도로 몇 날을 계속 달릴 수 있는 일은 인트레피드처럼 무거운 배에 있어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저녁 무렵 한국과 시차가 6간대인 지역으로 들어왔다. 하루 동안 158마일(남은 거리 786마일)을 달렸다.
밤11시경이었다. 선실에서 잠을 자다 베터리가 부족하다는 경고음을 듣고 일어났다. 베터리가 약하면 제일먼저 선박위치송수신시스템인 AIS 가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고 이어서 레이더가 다운된다. 선잠을 자고 일어나서인지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주변에 몸을 지탱할만한 것을 잡으며 거의 기다시피해서 콕핏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엔진을 가동시켰다. 엔진회전수를 1400RPM에 맞추어 놓고 다시 선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잠시 계기들이 작동을 하는가 싶더니 멈추어 버렸다. 엔진이 돌아가게 되면 선실을 밝히는 등도 환해지기 마련인데 그대로였다. 전력계를 체크해보니 역시나 발전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네! 갑자기 발전을 하지 않다니!’
이렇게 생각하는데 엔진룸에서 높을 압력을 못견뎌 공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핏~’
‘아니! 팬벨트라도 끊어졌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엔진룸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벨트는 멀쩡했다. 그런데 엔진룸에서 고무타는 냄새가 나는게 느껴졌다.
‘뭘까? 이 냄새는?’
‘안되겠다! 일단은 엔진을 멈추고 확인해보자!’
콕핏으로 나가 엔진을 정지 시키고 선실로 내려왔다. 제일먼저 팬밸트를 확인해보니 이상이 없었다. 장력도 좋고 손상된 부분도 없었다. 고무타는 냄새가 나긴하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손으로 엔진을 만져보니 평소보다 많이 뜨거워서 냉각수를 보충시켜주었다. 그리고 발전기를 체크해보았으나 외부 상으로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자~아! 그렇다면 뭐가 문제지, 일단 엔진룸을 열어놓은채 시동을 걸어보자!’
이렇게 생각하며 콕핏으로 올라가 스타트 키를 돌렸다. 그런데 아니 엔진시동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스타트모터가 돌아가지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스타트키를 몇 번 돌려보니 예전보다 좀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혹시 스타트키가 그대로 물려 있었던 것인가?’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스타트키를 돌려서 시동을 걸고 키를 놓게 되면 자동으로 정상위치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혹시나 해서 스타터 모터에 손을 대어보니 불덩이였다. 그렇다. 엔진과 함께 5분간 스타트 모터가 함께 돈 것이다. 아~ 있어서는 안 될 고장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엔진이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람이 약해지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이다.
일단은 전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레이더와 컴파스 지피에스와 냉장고의 전원을 껐다. 원양이기 때문에 배가 있다고 하더라도 큰 상선이나 어선일 것이이기 때문에 선박위치송수신 시스템 하나만 작동해두고 일단을 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3월28일(월)
고장 난 스타트모터를 수리해보기로 했다. 아침에 날이 밝아 와서 선실내부가 환해 질 무렵 기다린 다음 엔진룸의 커버를 들어내어서 선실안쪽에 흔들리지 않도록 묶었다. 그리고 엔진 밑에 달려있는 스타트모터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모터는 아주 공간이 좁은 곳에 있어서 작업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인내심과 정성으로 조금씩 조금씩 볼트를 풀고 전선을 분리해내어 모터를 엔진으로부터 분리해내었다.
뜯어낸 모터를 분해해보니 특별히 고장이라고 볼 만한 곳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전문적인 지식은 없기 때문에 분해조립을 하다보면 혹시 될까해서 해보는 것이었다. 일단은 모터내부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엔진에 장착했다. 그런데 어제는 꼼짝도 안하던 모터가 오늘은 ‘끼이릭’하며 반 바퀴를 도는게 아닌가?
‘야! 이것봐라 잘 하면 되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풍력발전기와 태양열판이 배터리에 전력을 꽉 채울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다시 시도해보니 이번에도 ‘끼이릭’하고 돌아가다 멈추어버렸다. 증상이 꼭 배터리가 약해서 시동이 안될 때 일어나는 것과 똑 같았다. 그러나 베터리는 이미 충분했기 때문에 모터가 좋지 않을 것 이었다.
모터를 다시 뜯어내어서 이번에는 아주 꼼꼼히 청소를 하기로 하였다. 모터를 분해하여 커버는 물에 씻어서 말리고 배선부분의 먼지는 칫솔과 이쑤시게로 모두 깨끗이 긁어내었다. 자석이 있는 부분도 혀바닥으로 할타도 될 정도로 깨끗이 닦았다. 아침에 시작한 작업이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일하는 게 밥맛이 있을까 해서 식사를 거르고 작업을 했더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기대하는 마음이 백배가 되어 모터를 다시 엔진에 부착시켰다. 그런 다음 스타터모터를 돌렸다. ‘끼이리릭’ 그런데 이번에는 모터가 아주 조금 더 돌더니 멈추어 버렸다.
‘안되는 것인가?’
어제께 부산요트장에 정병언씨와 일본의 친구에게 전화로 이 상황을 의논했었다. 그들 모두 스타트모터가 5분정도 엔진과 함께 돌았다면 현장에서 수리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남는 게 시간인데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값진 공부를 한 것으로 만족하고 여기에서 포기해야 될 것 같다. 코일이 타버려 전문 장비와 기술 없이는 수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미련을 못 버리고 한 번 더 시도했다. 이번에는 프로펠라가 물살에 돌아가도록 해두고 스타트모터를 돌려보았지만 허사였다. 완전히 미련을 버렸다. 허기가 져서 더 이상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엔진 시동을 걸고 나서 키가 스타트위치에서 운전위치로 자동으로 돌아오지 않는 일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배가 아니라 자동차에서 경험했었던 일이다. 조금만 신경을 쓰고 키를 돌렸던들 알 수 있었던 일이었고 키가 평소와 다르게 조금 부드럽지 못하다고 느꼈을 때 키 박스에 윤활제 한 방울만 쳤더라면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망할 때도 없다. 자업자득이다.
다음목적지를 투아모투 하오섬으로 잡고 가고 있었는데 그곳은 수리소가 없는 작은 섬이다. 타이티나 사모아로 목적지를 변경해야 했다. 타이티까지는 1,120마일로 앞으로 9일정도 더 가야 할 것이다. 바람이 잘 불어주어야 하는데 예보에는 바람이 점점 약해진다고 하여 걱정이 좀 된다. 하루동안 151마일을 달려서 하오섬까지의 거리가 635마일로 줄어들었다. 잘하면 4일 늦어도 5일이면 도착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바꾸어 먹어야 한다.
낮 동안은 모든 전원을 끄고 항해하였다. 낮에 태양열판과 풍력발전기로 전력을 확보해놓아야 밤에 레이더를 작동해서 자투리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이다. 냉장고를 계속 켜지 못하면 최근에 받은 김치도 곧 시어 버릴 것이다.
‘아! 순간에 실수가 모든 것을 망쳐놓는구나!’
내가 생각해도 나는 맛있는 김치를 먹을 자격이 없다. 신 김치를 먹으며 긴 반성의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할 필요가 있다. 도리킬 수 없는 일이다. 엔진은 비록 사용할 수 없지만 식량과 물이 넉넉하고 몸 또한 건강하지 않은가!
‘힘내자! 아자! 아자! 아자! 아자!’
해가 지기전 전력계에는 충전량이 좋았다. 그래서 해가 지고 나서부터는 레이더에게 감시를 맡기고 선실에서 좀 쉬었다. 그런데 밤10시경 전원이 약해져서 레이더 작동이 멈추었다. 그때부터 배의 모든 전원을 끄고 항해를 시작했다. 10여일 동안 배 한척 안보였던 곳이긴 하지만 혹시모를 일이다. 알람시계를 20분 간격으로 맟추어놓고 알람이 울릴 때마다 머리를 밖으로 내밀고 주변을 확인했다. 바람이 여전히 잘 불어 주고 있어서 풍력발전기는 열심히 충전을 하고 있었다.
3월29일(화)
새벽2시경 풍력발전기가 그동안 전력을 깨나 모아놓았다. 다른 전원은 모두 끄고 오직 레이더만 가동시켰다. 그리고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레이더는 새벽5시경 다시 멈추었다. 지금은 배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별 어려움이 없지만 투아모투를 지나 타이티에 가까워지면 배들이 늘어날 것이다.(사실은 끝까지 배가 한 대도 없었음)
원래 가기로 한 투아모투 하오섬에서 스타트모터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제일 좋은데 방법이 묘호하다. 하오섬에 배를 대어놓고 비행기를 타고 타이티를 갔다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럴 시간에 계속가는게 시간을 훨씬 절약하는 것이다. 혹 누군가가 타이티에서 스타트모터를 사서 하오섬으로 부쳐주면 딱 좋긴 한데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레이디알리아의 100일간의 세계일주 책을 읽어보면 타이티에서 수산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장영보씨라고 있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분과 연락이 될 것이며 또 그분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한국으로 연락해 그분의 연락처를 수소문 해줄 것을 부탁해두었다.
낮 동안 전원을 모두 끄고 최대한 적력을 모았다. 혹시나 해서 오후3시경 다시 한 번 스타트 모터를 돌려보았는데 소용없었다. 기대했던 것 만큼 실망만 컸다.
현재 스타트모터가 고장나게 된 이유와 고치거나 새것을 구매할 장소에 대해서 인도양몰디브에서 지중해를 항해하면서 알게 된 리투아니아 엔드류와 독일 바비부부에게 문의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다. 두 사람 다 타이티에 가면 수리 및 구매가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낮 동안은 바람이 약해졌지만 어젯밤에 많이 달려와서 152마일을 줄였다. 그나마 거리를 많이 줄여가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다.
3월30일
밤사이에 바람이 잘 불었다. 맑게 게인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날씨가 화창하면 바람이 좀 약해지지만 태양열 발전기는 발전을 많이 한다. 전력이 좋을때 누려왔던 사치스러운(지금생각해보니) 일들은 하지 못한다. 음악감상, 영화보기도 못할 뿐아니라 메일을 보내고 받는 것도 필요할 때만 잠시 노트북을 열어 확인하고는 바로 꺼야한다. 김치도 한 끼가 다르게 시그러워져 가고 있다.
한낮에는 바람이 좀 주춤하였다. 오랫동안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다보니 우리에 갇힌 닭이나 돼지와 같다. 자고 먹고! 먹고 자고! 단지 닭과 돼지와 다른 것이 있다면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에 갇힌 닭과 돼지가 생각이 있다면 얼마나 고달프겠는가를!
하루 동안 143마일을 달렸다. 투아모투 하오섬까지는 340마일 그리고 타이티까지는 825마일을 남겨두고 있다. 이곳에서 110마일 남서쪽에 레아오라는 섬(Reao)이 있는데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투아모투 제도에 거의 접근한 것이다. 내일부터 2일간은 바람이 9-10노트로 내려간다고 한다.
해가 지고 나서부터 바람이 약해져서 풍력발전기가 게으러게 돌아갔다. 하늘이 맑아 별이 총총했다.
3월31일
칠레 발디비아를 떠나온 지 꼭 한 달이 지났다. 화창한 날씨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유인도 레아드 섬이 55마일 거리로 가까워졌다. 지피에스화면에 항로근처에 있는 투아모투의 섬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람이 슬슬 약해지더니 저녁무렵에는 배의 속도가 3노트대로 떨어졌다. 오늘은 131마일(하오섬까지 209마일, 타이티까지 694마일)을 달렸다.
저녁7시경 맥가이버 증상이 도져서 다시 스타트모터를 돌리기 시도..이번에는 24볼트를 잠시 걸어 시동해보는 것으로 했다. 한국으로 몇군데 전화해서 가능성타진...준비하는데 3시간 밧데리 준비 배선준비..등등...이후 시도 그냥 잘돌아감...마그네트를 작동시켜 플라휠을 돌리려니 힘부족...역시 상태불량...연기풀풀...완전포기
스타트모터는 떼어네고 밧데리 배선은 다시 원위치..그래서 준비하는 3시간동안은 희망을 가지고 보낸시간이다. 나머지 한시간은 별로...
남남동으로 향하던 항해코스를 북북서로 방향을 돌림...위쪽에 바람이 좋다고 함...밤에는 날씨조용...4노트대의속력...조용히 나아감
4월1일
멋진 일출과 함께 4월의 첫 하루가 시작되었다. 간밤부터 바람이 약해져서 풍력발전기가 작업을 중단하였다. 아침7시경에는 타타코토(Tatakoto)섬에 10마일 거리까지 접근하였다. 하지만 산호초섬인 타타코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도를 보면 타타코토섬은 생긴모양이 전복과 같이 생겨서 산호초에 둘러싸여 북쪽으로 갈고리처럼 육지가 형성되어있고 남쪽으로는 점점으로 이어진 작은 섬으로 위쪽과 아래쪽을 타원형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파도가 들어가지 않는 가운데 바다는 낚시나 스토클링을 하기에 아주 좋을 것 같이 보였다.
8시경부터 타타모토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쪽의 갈구리 모양으로 된 육지를 따라 야자수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칠레를 떠나고 처음 보는 육지였다. 섬주변에는 산호초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이 하얗게 일고 있었고 그 안에 백사장이 있고 그 모래위에 키 큰 야자수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긴섬의 북쪽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섬을 바라보았다. 섬의 중간에는 60미터쯤 되는 송신철탑이 서 있었고 섬이 끝나는 서쪽편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야자수 나무 숲 안에 10여채의 집들이 보였다. 망원경으로 사람이 있는지 한참을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무전으로 주변의 있을 사람들이나 배를 불러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하오섬에서 스타트모터를 받거나 그 섬에 정박해놓고 모터를 사러 가는 것을 포기하고 타이티섬으로 바로 가기로 하였다. 낮 동안 속도가 2노트대로 떨어지기도 했는데 오히려 편했다. 배를 표류하는 대로 놓아두고 편하게 쉬었다. 그러나 저녁부터는 바람이 살아나 4노트대로 달릴 수 있었다. 하루동안 89마일을 전진했다.
4월2일
흐린 아침으로 하루가 시작했다. 아침 8시경 좌현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족히 3-4미터는 됨직한 고래꼬리를 보았다. 서둘러 카메라를 준비해서 고래가 다시 떠오르기를 기다렸지만 녀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17시경에는 엔진이 고장 나기 전 가려했던 하오섬(외진 섬이어서 꼭 가보고 싶었는데)으로부터 북쪽으로 50마일쯤 떨어져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북쪽으로 약 460마일 위쪽에 마케사스가 있다. 오늘은 107마일(타이티까지 남은 거리 498마일)을 달렸다. 미풍에 배가 나가는지 서있는지 모를 정도인데 하루가 지나고 보면 그래도 거리가 꽤 줄어져 있다.
4월3일
새벽1시경 환초 타우에레(Tauere)북쪽 3마일 지점을 통과하였다. 마을이 있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등대가 없을뿐아니라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더를 잠시 켜서 섬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나갔다. 간밤부터 속도가 약간씩 살아나기 시작하여 평속 5노트를 유지했다. 수심은 2900미터였다.
아침6시. 가끔 속도가 6노트대로 올라가기도 하여 흐뭇했다. 바람의 세기는 같았지만 바람이 남쪽으로 약간 도는 바람에 배가 옆 바람을 받게 되어 속도가 좋아진 것이다. 뒤바람으로 갈 때는 바람의 압력이 거의 전부지만 옆에서 바람을 받게 되면 양력의 작용으로 속도가 빨라진다.
11시경 한국과 시차가 5시간대인 지역으로 진입하여 시계를 한 시간 더 당겼다. 경도를 10도 넘어간다던지 지금처럼 시간대 지역을 통과하는 이런 일은 지루하고 긴 항해를 하는 동안 작은 목표가 되어 마음을 달래준다. 오늘은 133마일을 달렸다. 타이티까지는 365마일이 남았는데 바람이 약해지고 있어 3일후인 7일 낮에나 되어야 도착하게 될 것 같다. 이번 항해구간은 세계일주 항해 기간 중 가장 길고 지루한 구간이다. 끝이 없을 것 같아 보였던 목적지가 이제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21시경. 하라이코(Haraiko)환초 북쪽 4마일지점을 통과하여 지나갔다. 바람은 약했고 하늘은 맑았다. 기온은 29도였다.
4월4일
무더운 날씨였다.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갔다. 비가 두 번이 나와서 뱃전을 두들기고 갔지만 정작 바람은 잠잠했다. 하루 동안 111마일(남은거리 254마일)을 달렸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더 안가는 기분이다. 타이티섬의 산의 높이가 2,341미터라고 한다. 날씨가 좋다면 제법 멀리서도 섬이 보이게 될 것이다.
밤11시경 아나아섬 북단에 3마일까지 접근하였다가 방향을 돌려 서북서로 향했다.
4월5일(식목일)
오전에 바람이 좋아 속도가 6노트까지 올라가서 내일 저녁쯤 도착하려나 생각했는데 오후에 접어들면서 바람이 약해졌다. 하루 동안 106마일을 달려 오후 5시가 된 지금 타이티까지는 148마일이 남았다. 일몰이 있을 무렵 속눈썹같이 얇은 달이 나타나 1시간쯤 있다 태양을 따라 서쪽하늘로 내려앉았다. 밤10시경에는 북녘하늘을 쳐다보다 북두칠성을 발견했다. 좀 더 올라가야 보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북극성보다 북두칠성은 하남위에 있기 때문에 남위 17도지점인 이곳에서 북두칠성이수평선에서 약 7도 각도에 떠 있었다. 고향별을 만나서 반가웠다. 한국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4월6일
밤새 바람이 없어 돛을 펄럭이며 흘러왔는데 새벽4시경부터 느닷없는 바람에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속력이 살아났다. 속력이 6노트를 넘어서 좋긴했지만 남은 거리가 90마일이어서 어중간했다. 최소한 7노트는 나와 주어야 어두워질 무렵 타이티 파페에테항에 도착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20마일전 쯤에 돛을 히브투(heave to) 상태로 만들어서 표류하면서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르지 그쯤에서 수호천사라도 나타나서 배를 끌어줄런지!’
엔진만 가동된다면 파페에테항은 밤에 입항하는 것이 어려운 항이 아니다. 엔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항만당국에 사정을 얘기하면 배를 마리나까지 끌어준다고 하긴 하지만 밤에 도착하여 부탁하기도 좀 그렇고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 견인작업을 하기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루라도 일찍 항해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사실이다.
아침6시 메헤티아섬으로부터 북쪽으로 27마일쯤 떨어져서 서쪽 타이티섬을 향해 나아갔는데 메헤티아섬의 형상이 보였다. 지금껏 보아온 환초와는 다른 섬이었다. 새벽부터 오전에는 속도가 좋았으나 오후부터 바람이 약해져서 밤9시는 되어야 타이티 파페에테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후5시경 25마일을 남겨두고 배를 표류시키기로 하였다. 밤에 다시 바람이 조금 강해진다고 해서 표류하기가 조금 불편할 것 같다.
타이티섬은 세로 32마일 가로 16마일로 섬 모양은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향해있는 이 섬의 최고봉은 2241미터나 된다. 인구는 22만명으로 프렌치폴리네시아 118개섬중의 하나로 수도이기도하다.
오후6시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파페에테항의 불빛이 점점 밝아졌다. 나도 배에 정박등을 밝혔다. 36일간의 긴 항해였다. 때론 바람이 강하고 파도가 3-4미터를 넘었지만 내내 무역풍대에서 순풍항해를 하였기 때문에 바다상황 때문에 힘든 일은 없었다. 10일전에 엔진 스타터모터가 고장이나 전기를 마음대로 쓰지 못해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 10일간은 내내 레이더를 사용하지 못하고 직접 견시를 해야 하였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던 것이 그 중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목적지가 눈앞에 있다. 자축파티를 열었다. 콕핏에 앉아 어둠이 깔리고 있는 타이티섬을 보면서 칠레산 와인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어서 속이 찌르르했다. 700미리리터 한 병이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솜씨가 녹슬지 않았다. 저녁 7시쯤 선실 안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배는 2미터 파도에 쉴새없이 출렁거렸지만 그 간의 쌓인 피로 때문에 금방 잠에 떨어졌다.
4월7일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1시였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이제 육지에 도착한다는 약간의 설레임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자고 있지 않으니 배의 흔들림 때문에 멀미가 나려했다. 항해하면서 흔들리는 것과는 느낌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선실입구에 앉아서 어둠속에 밝혀져 있는 파페에테를 바라 보았다. 한결 속이 나아졌다. 새벽2시부터는 작은 짚세일만 한 장 펼치고 서서히 파페에테쪽으로 나아갔다. 항해를 시작하자 배가 훨씬 안정이 되었다.
아침6시가 다 되어가자 날이 밝아왔다. 주돛과 보조돛을 모두 활짝펴고 목적지로 향해 달렸다. 8시경 파페에테항 입구를 7마일쯤 남겨두고 포트컨터롤을 불렀다. 엔진을 사용할 수 없는 사정을 얘기 했더니 견인을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견인비로 340US달러라고 하는게 아닌가?
‘돈이 많지 않아요, 최대한 항입구로 들어가서 마리나 수백미터 앞까지 갈테니 돈이 좀 적게들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을 하자 포터컨터롤은 잠시 대기하라고 하더니 견인 배가 작은 것이 나올것이라고 하며 100달러 미만으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9시30분경 파페에테 항입구에 도착하여 잠깐 여객선이 나오는 것을 피해 대기하여 있다 언제든 혼자서도 쉽게 감아들일수 있는 보조돛 한 장을 펼치고 항안으로 들어갔다. 항입구를 들어가 왼쪽으로 꺽어서 들어가 더 이상 각도를 치고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을때 세일을 감고 항만국에서 나온 작은 보트에 견인되어 마리나에 안착하였다.
배를 대강 정리해두고 고장난 스타터모터를 가방에 담아 메고 입항신고를 하러 갔다. 하루 정박하는데 4만원정도였다. 계류신청을 하고 입국수속을 하려니 본드(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값정도)를 은행에 맡겨놓고 영수증을 함께 가져오라고 한다. 먼저 이곳을 항해해간 문성만씨 얘기에 의하면 은행의 장난으로 30만원정도가 달아난다고 하였다. 타이티돈을 유로로 환전하여 보관한다음 다시 유로를 타이티돈으로 바꾸어서 내어주는 환치기 수법으로 130만원정도를 맡겨놓으면 30만원은 꿀떡하고 100만원만 내어준다고 하였다. 나의 경우 며칠간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고 하지만 하루만 머물렀다 갈 거여서 아까운 돈을 그렇게 쉽게 날릴수는 없었다.
‘오늘 입출국을 다 하겠습니다. 내일아침 해뜨기 전에 사모아로 출발하려 하니 그렇게 해주세요. 이곳에는 스타터모터를 사러 온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얘기 했더니 호의하고는 찾아볼수 없는 인색한 인상을 한 담당자는 은행가서 돈을 맡기고 와야 한다고 하였다.
‘저기! 그럼 스타터모터사서 바로 출발할께요.’
라고 했더니 일단 부품점에 갔다오라고 하였다. 그 길로 2킬로쯤 떨어진 얀마대리점을 찾아갔다. 그곳은 중국사람이 운영하는 마린숍으로 100평규모에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선용품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그 곳에 다행스럽게도 4JH3E 얀마엔진의 스타터모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가격이 90만원정도로 비싼편이긴 했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만약 물품이 없다면 최소한 수일은 머물러야 고장난 모터를 고칠수 있을 터이고 신품으로 받으려면 적어도 10일은 기다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타터모터와 냉각수 펌프 안에 들어가는 인펠러를 스페어로 하나 구입하고 몇가지 필요한 작은 소품을 샀다. 물가는 보통가격의 2-3배정도였다. 12시경 배로 돌아와 신품 스타터모터를 장착했다. 장착하는데 드는 시간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을 시간정도였다. 그리고 스타터키를 돌렸다.
‘딱! 딱!’
앞전과 똑같은 소리만 나고 스타터키가 먹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컹했다.
‘다른 고장도 같이 났다는 말인가?’
엔진실로 내려가 다시 스타터모터를 확인하니 작은 배선하나를 연결하지 않았다. 그 선을 스타터모터 뒤에 꼽고 올라와 스타트를 돌리니 스타터모터가 힘차게 돌아가면 단번에 시동이 걸렸다. 정말 반가운 엔진 소음이었다.
‘츄츄츄츄 파~, 츄츄츄츄 파~’
냉각수파이프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리듬이었다. “츄츄츄츄”는 배기가스와 냉각수가 소음기에서 모여서 압이 올라가는 소리이고 ‘파~’는 냉각수가 힘차게 쏟아져 나오는 소리이다. 엔진을 그래도 걸어놓고 냉장고를 가동시켰다. 냉장고 안은 온도가 오를 때로 올라 그대로는 냄새가 보통 역한게 아니었다.
오후1시30분에 다시 업무를 시작하는 출입국사무소에 찾아가 입출국스템프를 한꺼번에 받았다. 오늘안으로 떠난다는 조건이었다. 그곳에서 면세유 신청을 위한 서류도 함께 받아 남쪽으로 7마일쯤 떨어진 타니아마리나로 갔다.
타니아마리나에서 연료를 채우고 잠시 배를 묶어두고 식료품을 구입하였다. 쌀6킬로, 타이티라면10개, 사과10개, 돼지고기1킬로, 쇠고기500그램, 싸구려양주1병(술값이 무지 비쌌다.), 과일쥬스1병, 일제 1회용된장국1봉지(8회분), 배추2개, 양파5개, 과자1개, 껌한통을 샀다. 모두 계산을 하니 16만원정도 나왔다.
식료품을 배로 가지고와서 풀어놓고 일단 바짝얼어있는 냉장고를 청소했다. 김치와 깻잎 그리고 된장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7개월전에 카나리아에서 받은 조개젓갈은 안 먹는게 나을 것 같았다. 냉장고 내부를 깨끗이 닦고 프라스틱 찬 통은 모두 꺼내어 흐르는 물에 씻었다. 그런 다음 다시 반찬통을 넣고 새로 사온 고기와 배추 그리고 쥬스를 넣어 마무리 했다. 식료품은 그 정도로 해두고 노트북을 들고 마리나 내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곳에서 메일도 확인하고 항해사진도 홈피에 좀 올렸다. 기상을 확인해보니 바람은 좀 약한 편이지만 편안한 바다로 예상되었다.
9시경 다시 배로 돌아와 빈물통에 물을 채워서 갑판위에 실었다. 이것으로출발하기에 필요한 물품실었다. 마리나는 바람이 없고 매우 더웠다. 옷을 벗고 팬티바람으로 수도가에서 풍족하게 물을 쓰면서 샤워를 했다. 물이 낮동안에 달구어져서 따뜻했다. 샤워를 마친 후 배를 폰툰에서 나와 200미터쯤 떨어진 엥커부이로 몰고 가 정박시켰다. 배를 안정시켜놓고 삼겹살을 석줄 구웠다. 고기가 다 익어 갈 무렵 많이 시어져 버린 김치를 넣고 같이 몇분간을 더 구웠다. 완성된 김치삼겹살과 물탄 양주 1컵을 들고 콕핏으로 나와 타이티의 야경을 보면서 맛있게 먹었다. 술맛이 곧 꿀맛이었다.
술자리를 파한 후 침낭을 콕핏으로 들고 나와 밖에서 잠을 청했다. 다행히 모기가 없어 시원한 바람에 낮 동안 달구어진 피부가 숨 쉬게 할 수 있었다. 사실 타이티는 물가가 비싸다는 얘기를 들어서 건너뛰려고 했던 곳이었다. 스타터모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오게 된 것이다. 지인 중에는 퇴직 후 부인과 세계여행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여행을 통해서 그가 예비품 체크리스트에 여러 가지 장비를 조목조목 적고 있을 터인데 이번 스타터 모터 고장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기에 또 준비물 하나를 추가 했을 것이다. 이런 나의 경험을 통해서 다음에 출발하는 사람이 덜 곤란을 격게 되는 일은 이번항해를 통해 얻는 나의 보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