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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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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아산시 문화관광 -
Ⅰ. 아산의 자랑 9
Ⅱ. 관광지 15
Ⅲ. 사찰/성지 22
Ⅳ. 산/계곡 26
Ⅰ. 아산의 자랑
◈ 이순신(1545~1598)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과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 (李貞)과 어머니 변씨(卞氏)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 여해(汝諧)이다. 공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 되던 해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權管)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奉事), 발포 만호(萬戶),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參軍), 사복시주부(主簿), 조산보 만호, 선전관(宣傳官), 정읍 현감(縣監)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발탁되었다. 공은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 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20여만은 일사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그러나 공은 5월초 1차 출동 때 옥포, 함포, 적진포에서 40여척을 격파 승리한데 이어 5월말부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충동 때, 사천, 당포, 당황포, 울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연이은 안골포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충청 등지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1594년 당황포, 장문포 등지에서 왜적을 소탕하였으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보호에 힘을 쏟던 중 모함으로 사형 받게 되었으나 약포 정탁(鄭琢)의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權慄)장군의 막하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원균(元均)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 1598년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겼다. 그 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 중 12월 16일 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었다. 공은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였으며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꺽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時調)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선조 37년(1604)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追封), 좌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훈(策勳)되었으며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의 어라산(於羅山)에 위치하여 정조대왕의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가 세워졌다. 이곳 현충사(顯忠祠)외에도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여수의 충민사(忠愍飼)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 맹사성(1360~1438)
청렴결백한 정치가이자 멋과 풍류를 아는 도인
孟思誠은 1360년(공민왕9)~1438년(세종20),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신창.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명장인 최영(崔瑩)의 손녀 사위이다. 온양 출신으로 1386년(우왕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 하여 춘추관검열이 된 데 이어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그가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강호 사시가가 있다.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 하였다 한다. 맹사성의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로 하였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 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 장영실( ? ~1442)
과학의 발전과 실용화에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이자 발명가
蔣英實은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은 아산(牙山).
세종 조의 찬연한 정신문화 위에 다채로운 과학기술의 힘을 더한 사람은 장영실이었다. 그는 동래부 관노의 소생인데, 그의 선조는 아산 사람이었다. 장영실은 과학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세종5년(1423)에 발탁되어 노예의 신분에서 면제되었으며, 사직의 벼슬에 올라 세종14년(1432)에는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의 제작에 착수하였고, 각종 천문의 제작을 감독했다. 세종15년에는 호군의 벼슬에 승진하였고, 세종이 역상에 관한 모든 기구를 제작하고자 할 때 정인지, 정초 등은 고전을 연구하게 하고 장영실이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특히 세종20년(1438) 경복궁 뜰에 혼천의를 간직한 흠경각을 세우는데도 모든 공역을 담당하는 공헌을 하였다. 「혼천의」제작을 완료하였고, 이듬해에는「갑인자」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는 한편, 물시계인「천평일귀」, 「앙부일귀」, 「해성정시의」및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는「규표」등을 제작감독 했다. 특히 세종 23년 (1441)에는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그의 감독하에 제작된 국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불경죄로 파면을 당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서 측우기를 만들었으며 기계, 건축, 과학의 발전과 실용화에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이며 발명가이다.
◈ 김옥균(1851~1893)
개화파의 급진적 지도자, 근대화와 선구자
金玉均은 조선 고종때의 정치가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 (古筠), 고우(古愚) 시호는 충달, 병기(炳基)의 아들이다. 1872년(고종9) 문과에 급제 옥당승지(玉堂承旨)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일본에 건너가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부사 김만식(金晩植)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척신(戚臣)들이 정권을 잡고 사대사상이 팽창하여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허세(虛勢)를 부리고 있어 나라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지라 김옥균은 이를 개탄하여 박영효,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등과 협력하여 독립당을 조직하고 국정을 개혁하여 낡은 폐습을 타파하려고 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박영효, 홍영식 등과 협력하여 거사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주둔군의 방해로 3일만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와다(岩田周作)라 변명하고 오가시마리(小笠原)섬과 홋카이도(北海道), 도쿄 등지를 전전하면서 10년을 지냈다. 1894년 3월 28일 상해로 건너간 김옥균은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이듬해에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죄명을 씻기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순종 때에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을 받고 관리를 보내서 제사지내는 대우까지 받았다.
◈ 이지함(1517~1578)
민생과 정치를 두루 살피는 사회개혁가이자 현실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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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어 걸인청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걸인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의 흙담 움막집에서 지내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으며 일년의 신수를 보는 토정비결을 저술하였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고농아집을 저술하였으며,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이 마포에 찾아와 그를 도연명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에 제향되었고 1713년(숙종39)에는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윤보선(1897~1990)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재야 지도자
尹潽善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본적은 충청남도 아산, 호는 해위. 그리스도교의 집안인 윤치소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게이오대학에 유학 중이던 20세 되던 해 학업을 중지하고 여운형을 따라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약관의 나이에 의정원의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 농산국 고문을 역임하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 시장, 상공부장관에 기용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비민주적인 정치를 행하자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1954년 야당인 민주당 소속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후 4, 5, 6대 민의원을 지냈다.
1960년 4.19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합동회의에서 내각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혁명으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물러났으며 74년 정계를 은퇴하여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재야 지도자가 되었다. 저서로는 회고록 구국을 위한 가시밭길"등이 있다.
Ⅱ. 관광지
▣ 외암민속마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1999년 12월 28일) 국가에서 지정 보호하고 있는 마을로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밑에 위치하고 있는 외암리 민속마을 에는 약5백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다. 문중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아서 큰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이끼 낀 돌담을 돌면 이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돌담너머로 집집마다 뜰 안에 심어 놓은 과일나무 및 마을 입구의 장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초가지붕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밖에 많은 민속 유물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이 참판댁과 중요민속자료 95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암군수댁(건재 가옥)은 아름다운 정원과 더불어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장소이다. 최근에는 이곳에서 사극이나 영화 촬영이 종종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 온양민속박물관
권곡동에 위치한 온양민속박물관은 우리민족이 살아온 발자취와 민속자료들을 입체적으로 전시하여 우리 고유 전통문화의 정취를 느껴보게 하고 세계속에 한국문화의 독창성을 선양할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22,000평의 대지에 건립되었다.
정문을 지나면 시원스럽게 조성된 뜰에 전시된 연자방아, 디딜방아, 너와집 등이 조화를 이루며 1,900여평의 전시실에는 민속자료 20,000여점이 4개의 전시실과 1개의 소 전시실로 나눠 13개 분야로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제1전시실은 한국인의 일생, 의식주, 생활모습, 제2전시실은 직업, 제3전시실은 민속공예, 민속신앙 등을 생동감 있게 전시하고 있으며 전통혼례를 올릴 수 있는 생활문화관도 갖추고 있다.
▣ 맹씨행단
맹씨 행단이란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檀)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조선 초의 명정승 고불 맹사성(1360-1438)의 옛집을 부르는 이름이거니와 우리 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사적 제109호이다. 맹씨행단이 자리잡은 자리는 풍수적으로도 매우 길하여 기를 담은 자리라고도 한다. 맹씨 행단은 본래 고려말의 최영장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이웃집에 살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최영이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주었고 그 후 맹사성 일가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으로 보아 이 집이 처음 지어진 연대는 올려보아 14세기 중엽으로 짚을 수 있다. 기록으로 성종 13년(1482), 명조 10년(1632)에 안채가 크게 증수 되었다고 하며 개수한 뒤로는 사당에 봉안 하고 계향이 되었다고 한다.
▣ 신정호관광지
신정호는 수면이 92ha이며 1926년에 만들어진 인공호수 이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수려해 사계절 휴양지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 이기도하다. 주변에 신정호관광지가 조성되어 잔디광장, 야영장, 조류사, 체육시설, 조각공원, 8.45m의 이충무공동상이 있다. 특히 조각공원내에는 조각품과 야생화원이 조성되어 지역주민 및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예술체험의 장으로 활용되고있다. 또한 신정호관광지 입구의 생태공원은 3천여평의 부지에 소나무, 철쭉, 영산홍등 각종 식물 21종이 식재된 자연학습 공원으로 팔각정자등의 편의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적합한 이곳은 청소년 심신단련장, 직장의 단체모임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인근에는 민물장어, 닭갈비 등의 토속음식점이 있다.
▣ 아산만방조제
아산만조제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와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를 연결하는 2,564m의 방조제를 건설하면서 생긴 호수로 너비가 2.2km이며 142백만톤의 농․공업용수를 저장할 수 있는 인공호수이다. 충청남도 아산시와 경기도 평택시 사이에 있는 아산만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곳인데 아산만으로 흐르는 하천 주변은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이 들어와 농사에 많은 피해를 입혔고, 홍수 때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피해를 줄이고 아산만 일대를 관광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1973년에 건설하였다. 방조제가 건설된 후 생긴 아산호는 경기도 평택시에는 농업용수로, 충청남도 아산시 임해 공업단지에는 공업용수로 이용한다. 또한 교통도로로 이용하여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거리가 줄어들었다. 한때에는 조차를 이용한 조력발전소의 후보지로 유력시된 바 있으며 현재는 관광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 삽교호방조제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와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를 3,360m의 방조제로 막아 만든 인공호수로 8,400만톤의 농․공업용수를 저장할 수 있다. 삽교호는 수려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삽교천 방조제의 홍수 조절능력과 방조제 도로의 교통이 탁월하여 관광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길이 3,360m. 최대너비 168m. 높이 12~18m. 삽교천 하구를 가로막은 인공담수호(淡水湖)는 충남 당진․아산․예산․홍성의 4개 시군 22개면 지역을 전천후 농토(2만 4,700ha)로 개발하기 위하여 삽교천지구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1975~1983)의 중추적 사업으로 계획된 것이다. 이 지역은 넓은 평야와 간석지 등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농업용수를 확보하지 못하여 한수해를 자주 겪어왔으며 또 하구에서 흘러드는 바닷물로 유역 일대가 염해와 해식에 시달려왔다. 이와 같은 재해의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해결․개선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저수량 8,400만t의 삽교호가 건설된 것인데, 1976년 12월 착공, 1978년 3월 최종 물막이작업에 성공하고 1979년 10월 완공하였다. 이 담수호의 조성으로 4개 시군 농토의 관개용수가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조제에 부설된 배수갑문(6련 12문)의 용수조절 능력(초당 5,300t)도 기대할 만하며, 그 밖에 공업․생활 용수의 하루 4만 8000t 공급도 가능하게 되었고, 방조제 도로의 이용으로 서울~당진 간 육로 거리가 40km나 단축되는 간접 효과도 거두게 되었다.
▣ 세계꽃식물원
세계 꽃 식물원은 2004년 3월 20일 5천여 평의 유리온실을 리모델링 하여 세계 유명 꽃 1천여 종을 한데 모은 초대형 실내 식물원이다.
1만 5천 여 평의 화훼단지 내에 연중 다양한 테마별 꽃과 식물을 관람할 수 있도록 식물원을 꾸며 1년 내내 20가지 테마의 꽃 축제를 개최하는 꽃 식물원으로서 동백, 튤립, 베고니아, 백합 등을 테마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꽃들을 매달 새롭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식물원은 유리온실 안에 조성되어 다른 곳보다 한 달 이상 일찍이 계절 꽃을 감상할 수 있어 계절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유럽종의 다양한 꽃들이 국내에서는 최초로 선을 보임으로써 꽃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아산스파비스
아산온천지구내 한국 최대의 건강보양 테마온천 시설인 아산 스파비스가 있다. 아산 스파비스는 기존 단순 온천시설과는 달리 국내 최초의 수(水)치료풀인 바데풀의 도입으로 온천과 연계한 건강과 가족 중심의 테마온천이다.
전문의로부터 체질 진단을 받은 다음 체질에 맞는 입욕 프로그램을 추천받을 수 있고 한방 입욕제, 아로마 해독치료 등의 서비스도 곁들이고 있다.
온천수를 이용한 수치료 공간으로 600여평 규모의 대형 바데풀 시설을 자랑하며, 그 외 건강나눔한의원/증진센타, 건강전문식당, 실외온천풀, 남.녀대욕장과 계절에 따라 즐길 수 있는 포도탕, 약초탕, 레몬탕 등 23개의 테마탕과 노천탕 등 건물내 28개의 부대시설과 눈썰매장, 야외공연장, 피크닉장, 베드맨턴장, 미니축구장 등의 옥외 부대시설 등이 있으며, 또한 이곳은 건강, 가족, 테마의 개념을 도입한 대규모 보양온천으로 3,5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곳이다.
▣ 온양온천
온양온천은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 통일 신라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온수군(溫水郡)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의 역할을 수행해 온 기간은 600여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15년(1433년) 정월에 안질치료차 행차한 후, 세조, 현종, 숙종, 명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다수의 기록과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또한 현종, 숙종, 명종때에는 온천에 임행하여 과거를 보게하여 인재를 발굴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때에는 온양온천주식회사가 독점 온천장을 경영하고 1927년 이후는 경남 철도주식회사가 경영하던 신정관과 일본이 소유의 탕정관 등 2개소 뿐이었던 것이 1963년 신천개발이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38개 공의 온천공이 온양온천 중심부에 걸쳐있다.
온양 온천은 지질이 단상흑운모, 각섬석 화강암으로 되어있으며 용출되는 온천 수의 수온이 58℃ 내외로 고온온천이다. 온천수의 주요성분은 마니타온을 함유한 라듐온천이며 약알카리성으로 수질이 좋고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숙박시설, 상가, 음식점, 유흥업소, 온천장 등 주변시설이 잘 발달된 곳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온천 지역 최대의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Ⅲ. 사찰/성지
▣ 현충사
온양온천에서 4km 떨어진 아산시 염치읍 방화산 기슭에 위치한 이순신 장군의 사당으로 공이 성장하여 무과급제 할 때까지 사시던 곳이다. 충무공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신 지 108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 이곳에 충무공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께서 친히 현충사란 이름을 내렸다. 1932년에 일제 때에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중건하였고 1945년 해방 후에는매년 4월28일에 전 국민의 뜻으로 충무공 탄신기념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에는 일생을 충의에 살고 나라를 구하신 높은 덕과 충성을 기려 이곳을 성역화하고 현충사를 중건하였으며 1974년 종합적인 조경공사를 시행하여 오늘 의 경관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정부에서는 이곳을 사적 155호로 인근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는 공의 묘소를 사적 112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본전 내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유물관에는 일생기록이 십경도와 국보 76호인 난중일기 보물326호 장검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충무공이 살던 옛집, 활터, 정려 등이 경내에 있다.
▣ 봉곡사
봉곡사는 송악면 유곡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이 사찰은 봉수산 북쪽에 있는 동향사 면의 기슭에 조영(造營)되었는데 울창한 송림으로 에워싸인 진입로와 배(背)산이 청정도장의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곳으로 현재 대웅전과 향각전, 그리고 30여개의 료사(寮舍:작은집, 기거하는 곳)가 있다. 봉곡사<연혁誌>에 따르면 이 사찰은 본시 신라51대 진성여왕 원년(887)에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는데 고려 의종 4년(1170)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를 중건하고 절 이름을 [석암사]라 개정한 후에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절 이름을 다시 봉곡사로 개정한 것이라 한다. 옛 돌기와, 청기와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대웅전 및 그 옆에 고방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23 호로 지정되었다.
▣ 세심사
세심사는 염치읍 산양리 영인산 기슭에 있는 오래된 절로써 1530년(중종25)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 의《여지도서》《범우고》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일타(日陀)와 도견(道堅)이 절 입구에 있는세심당(洗 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따와 세심사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안에는 소조아미타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18)에 조성한 것으로 승초(勝初)․원정(元正)․보심(普心)․품관(品 寬)․대운(大云) 등이 그렸다.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 산신 각에는 193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에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다.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청석(靑石)으로 만든 9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231호)이 있는데, 상륜부가 없으며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부도 2기만 있다. 이 밖에 1563년(명종18)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의식집인 청문판 4매가 남아 있다.
▣ 인취사
신창면 읍내리 학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인취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사찰로 경내에 삼층석탑 2기와 극락전과 삼존불상 등이 있으며 경내에서 수습된 기와 와편이 있다. 또한 여름에는 연꽃축제가 며칠 간 성대하게 열리며 그 행사로는 백일장, 시낭송 등이 있어 인취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하고 흥미로운 볼거리와 참여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제공한다.
▣ 공세리성당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인주면 공세리 언덕 위에 세워진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의 본당으로 초기 선교사들이 포구에 상륙하여 전교를 시작한 곳으로 1894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동네 가운데 민가를 교회로 사용했으나 1897년에 사제관이 세워졌고 본당은 1922년에 완공되어 충청남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공주 본당, 안성, 온양, 둔포 본당이 분할되었다.
경내에는 병인 박해 때 순교한 3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130평 규모의 본당과 사제관, 피정의 집, 회합실 등이 있으며 수백년 된 느티나무와 각종 수림으로 쌓여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천주교성지다.
이곳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하여 청주. 옥천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곶고지가 있던 곳이다.
Ⅳ. 산/계곡
▣ 광덕산
광덕산은 해발 699m로 송악면 마곡리, 강당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등산로는 마실(마곡리)에서 동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5개 코스의 등산로가 있다. 시에서 임도를 개설하여 산중턱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광덕산 동쪽에는 광덕사가 있고 호도전래사적비가 있다. 산이 그리 높지 않고 험하지 않아 가족끼리의 등산로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또한 광덕산에는 맑은 계곡과 고목이 아름다운 피서지로 강당골 계곡, 종곡리 계곡, 마곡리 계곡이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이용되고 있다.
▣ 영인산
영인면 아산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 영인산은 예로부터 산이 영험하다 하여 영인산이라 부르고 있고 정상에 백제 초기의 석성으로 추정되는 영인산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이 세워져 있다. 산 정상에 서면 서해바다, 삽교천, 아산만방조제와 아산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국민휴식공간으로 시에서 조성한 자연 휴양림이 있다.
▣ 설화산
설화산은 해발 441m가 되는 붓끝 같은 봉우리가 솟아 있어 문필봉이라고도 하며 그 기세가 매우 영특하여 문필가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이곳에는 칠승팔장지의 명당이 있어 예로부터 투장이 성행하여 가뭄이 들면 투장한 곳을 찾아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관습이 있다. 등산로는 좌부동 오봉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와 외알밀 외암소류지를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 강당골
광덕산 내의 계곡인 강당골은 일명 양화담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물이 맑고 계곡의 주변은 울창한 고목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심산유곡의 정취를 맛볼 수 있으며 계곡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물과 숲과 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곳으로 도시생활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