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떼가 국가에서 정한 교육과정을 이수할 때는
"일제"가 한 것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산맥은 '태백산맥'부터 시작했고, 철도와 도로는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부터 시작했다.
조선은 유교와 중국 사대에 빠져서 현실은 무시하고, 중국도 안 하는 공자왈, 맹자왈만 하는 망해도 '싼' 나라로
지도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면서 제대로 된 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어도 '간첩'이라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미개한 나라라고 배웠다.
그런데, 지구 상에 500년을 유지한 왕조가 하나도 없다는 것
- 그래세 세계사를 "외울게 많으니 선택하지 말라"라고, '학력고사 때 과목 선택하면 바보짓'이라고 그렇게 강조했나 싶다.
그런 나라가 사회적 제도와 국토관리 체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어디선가 '백두대간'과 '산경표'라는 책이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조선의 도로체계와 세금을 거두고 운영하기 위해 제도를 바꾸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도로와 해운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장로의 4대 강 수로를 이야기하면서 연안 해운뿐만 아니라 '내륙 해운'도 존재했다는 것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6대 대로는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서대로, 북관대로, 관동대로, 강화대로
를 얘기하고,
몇 개를 더해서 10대 대로라고 하면
봉화대로, 충청 수영로, 통영 별로, 수원 별로(정조능 행로)를 포함한다.
2021년 여름에는 정조능 행로를 답사했다.
길 자료를 다음 카페 '옛길 따라-옛길문화방'에서 얻었으며,
구글어스에 그린 자료를 카카오 지도에 주요 지점을 점을 찍고
휴대전화로 보면서 스쿠터를 달렸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출발한다.
마지막 임금인 고종이 거처하셨던 곳으로 맞은편 길은 지금 국악로라고도 불린다.
국악 및 한국무용에 관련된 상품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고종께서 각별히 판소리를 좋아하셨다는..
국악로 답게 서울 소리 박물관이 있다.
국악로-돈화문로를 따라 종로 쪽을 오다 보면 왼쪽 건물 사이로 '대각사'가 있다.
33인 중의 한분으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불교계 인사(한용운 스님도 변절하지 않았다)인 용성스님이 서울에 세우신 포교당 궁궐에서 지척인 거리에 절을 세우고 직접 풍금을 치면서 포교하셨다는
이 길의 끝에 판소리 전용 극장이 생긴다.
판소리 전용 극장터에 생긴 단성사.
한 때 맞은편의 피카다리, 길 건너의 서울, 파고다 공원의 허리우드와 함께 종로 3가 극장가를 만들었다.
건물 입구 왼쪽에 기념비가 있다.
맞은 편의 피카다리. 건물 앞 공터가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의 마지막 장면 무대다
길은 여기서 우회전하여 종로통으로 접어든다.
탑골 공원, 파고다와 탑골 모두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었기에, 즉 원각사 터 어었기에 생긴 이름이다.
종로 2가 YMCA호텔 왼쪽에 있는 2층짜리 긴 건물의 정체가 바로 종로 경찰서이다.
김두환을 잡아 가두고, 고등계 특무가 조선인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재판도 없이 가두던.
지금 종로 경찰서는 안국동 로터리에 있다.
길은 여기서 다시 좌회전하여 숭례문으로 이어진다.
을지로 입구를 지나 한국은행 앞 교 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숭례문으로 간다.
여기부터 일본인의 거리였다.
남산 총독관저(구 안기부터) - 소공로 - 한국은행 - 서울 시청 - 총독부(중앙청) 이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라인이다.
광화문 - 육조거리 - 종로통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중심축을 덮어 버린다.
한때 백화점 라인도 있었다.
"신신 - 롯데 - 미도파 - 화신" 어딘지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남대문을 끼고돌아 서울역을 간다.
경복궁을 사용하고 있었을 때라고 하면, 광화문, 시청 - 남대문 용산 - 삼각지 - 한강진을 길로 사용했지 싶다.
길은 이대로 철길을 따라 한강을 간다.
당시의 길을 따라 철길을 직선을 놓으면서, 옛길은 그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90년대에는 볼 수 없었던 아파트들.
어떤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용산참사'라는 이름으로 기억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은 자기 식구들도 도구로 생각해서 죽을 수 있거나, 죽을 줄 알면서도 집어넣는다.
89년 부산 동아대 사태 때도 그랬고, 이 때도 그랬다.
또 산업체 노사 문제나 재개발 현장에서는 범죄자인 조직폭력배들을 손쉽게 자기네 친구이자 동료로 받아들인다.
경찰에게 수사권 독점을 맡겨도 되는지? 천황 폐하의 개는 언제 대한민국 국민의 종으로 스스로 바뀌었는지?
현대 서울의 한 복판에서 벌어진 불지옥 현장이다. 곧 인간의 욕심이 현세를 지옥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 증거다.
저 고가를 넘어서 다시 삼각지로 가야 한다.
저 앞에 삼각지가 보인다.
기억에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저기에 회전 교차로가 있었다고 한다.
길은 여기서 용산역을 지나 한강으로 간다.
용산역은 깨끗하게 재 개발되어가고 있다.
군 생활할 때 T.M.O를 타고 내리던, 얼마 전까지 집창촌이 있던 공간이 정리되었다.
그 나쁜 짓 하던 포주들이 사장님이 되어 이 부근 사무실에서 비슷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는 다리는 한강대교다.
중간에 노들섬이라는 섬이 있다. 50년을 서울서 살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왔다.
'노들강변에 봄바람~'하는 민요의 무대가 북쪽이다. 말로만 노래로만 50년 하다가 실물을 본다.
한강철교 - 기차가 다니는 길 - 남쪽으로 배들이 보인다. 여의도 선착장이다.
다리 아래로 선착장이 보인다.
한강대교를 건너면 '용양봉저정'이라는 정자가 나오고, 로터리에 '주교사'터 표지석이 있다.
임금님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 다리를 놓지 않고, 배를 묶어서 배다리를 놓는 관청이 있었다는 뜻이다.
전국의 '배다리', '주교'라는 지명은 다 이런 뜻이다. 같은 지명이 많은 이유다.
이럴 때 적벽대전이 생각나야 한다.
한강대교 맞은편 언덕 위에 용양봉저정이 있다.
공사 중이라 길을 막아 놓아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이 길을 다닐 때마다 궁금했던 곳이다.
이번에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정조 임금께서 화성에 가실 때마다 쉬신 곳이라는.
길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우측 언덕 위에 사육신 묘가 있다.
지금은 노량진에서 경찰학원, 임용고시학원이 많지만, 한때는 모든 종류의 고시학원이 다 모여 있는 곳이었다.
공시생의 본향? 그래서 '노량진 컵밥'이라는 음식이 생기기도 했다.
제발 정권에 아부하지 말고, 죽을지언정 바른 길을 가던 선비를 본받으라는 뜻이라는데,
ㅍㅎㅎ 사시한 사람들이 나라 망치는 꼴을 봐라.
보기는 뭘 봤겠나? 으슥한 숲에서 담배 피우고 술 먹고 허튼짓하고,
죽은 자신들의 선조를 우겨서 사육신을 사칠신으로 만드는 꼴을 보면서 다른 걸 배웠나 보다.
이 비석은 생김이나 내용, 글로서도 상당히 가치가 있다.
사육신묘를 나오는데, 전망 좋은 곳이 있다는 표지가 있다.
사육신묘 앞에서 좌회전해서 길은 이어진다.
노들로에서 노량진 길로 들어오는 런던 길이었다.
여기서 골목길로 들어간다.
옛길은 노량진역까지 가지 않고 이쪽으로 나 있었던 것 같다.
노량진역 - 장승배기역 간 도로의 2/3 지점으로 이어진다.
장승배기역 쪽으로 좌회전
장승배기역 직전에 상도로로 가지 않고 큰길 옆 골목길로 주욱 간다.
구 도로를 놔주고 새 도로를 개발한 경우다.
도로를 놓으면서 이런 경우는 아주 많다.
개천을 복개하고 넓히면서 새길을 넓게 만든 경우다.
옛길은 상도로를 좌우로 하여 보라매역 - 대방청 사거리로 이어진다.
이제 여의 대방로를 따라 주욱 간다.
어디까지? 시흥까지. 옛길은 대림사거리에서 여의대방로와 시흥대로로 연결되어 시흥-안양으로 이어진다.
안양천을 따라 이어지던 길 중간에 금산 기슭에 시흥 관아가 있었다.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어서 '은행나무시장'과 '은행나무 공원' 사이 삼거리에 1800년대 말 시흥 현령 선정비가 주르륵 있다. 아마도 이 부근이 현청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현청 옆에 행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1800년대 초 화재로 소실되고, 현청만 중건하고, 다시 이전 등을 거쳐 없어졌다고 한다.
사림의 횡포가 극에 달하던 1800년대 말 임기 1년 남짓한 수명의 현령들이 하면 얼마나 했다고
"영세불망비" 일까? 뭘 얼마나 잘했기에 영원히 대대손손 잊지 않을까?
부끄러운 이름 돌에 새기지 말아야 하는데......
길은 석수역 인근에서 시흥대로에서 경수대로로 이름이 바뀐다.
제2경인 고속도로 안양 육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고 바로 좌회전하여 국철 1호선을 따라 이어진다.
이제 주욱 직진이다.
관악역을 지나 우측 개울을 따라가는 길이다.
여기에 만안교가 나온다.
안양이라는 지역 사진에 꼭 나오는 다리
7개의 홍예를 가진 다리라면, 당시에는 매우 물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다리 양쪽의 석축을 쌓은 것을 보면 조선 중기에 상당히 공을 들여서 만든 시설임을 알 수 있다.
돌을 마름모 꼴로 쌓고 시멘트를 바르는 근`현대 양식이 아니다.
그랭이 질로 아귀를 맞춘 것을 보라.
철길을 따라 안양역까지 오면 남쪽 광장 왼쪽 상가 안에
'안양행궁지' 표지석이 있다.
옛길은 명학 육교 삼거리에서 철길을 건너 건너편 산 밑을 따라간다.
안양로에서 '엠에스로'로 바꿔 타다가 호계 삼거리에서 다시 경수대로로 이어져 지지대 고개를 넘어 수원으로 간다.
가는 길 고천동 사무소가 옛 사근행궁 터다
수원의 경계인 지지대 고개에서 비석이 있다는데, 못 보고 지나쳤다. 이제 못 보면 언제 볼 수 있을까?
변강쇠 전에 나오는 경상, 전라에 통문을 돌리는 중요한 장승인 '지지대 유사님'이 계셨던 곳이다.
여기 북쪽은 광주, 남쪽은 수원이라 지지대 장승은 전라, 경상을 관장했다 한다.
이미 해는 떨어져 가고, 중앙분리대가 있어 유턴하기도 힘들다.
간신히 지지대 교차로에 있는 미륵당만 찾았다. 버스 종점 마당에 있어. 없어진 것으로 알았다.
정조 때에 이 지역의 이름이 지지대로 바뀌기 전까지는 미륵현이라고 불렸던 지역이다. 지금은 법화궁이라고 한다니..
미를 부처님이면 용화궁이 맞지 않을까?
옛길은 신작로 오른쪽으로 간다. 지지대 교차로에서 경수대로 우측으로 간다.
만석거 연못을 우측으로 끼고돌아 운동장 사거리에서 행궁이었던 수원성으로 들어간다.
만석공원을 끼고 간다
수원성에 들어왔다.
전주 한옥마을 같은 분위기가 난다.
화성행궁 광장 앞 거리는 종로 사거리다.
3거리 이기는 하지만, 종루가 있다.
교동사거리에서 직진한다.
우회전하면 교동인 만큼. 향교가 행궁산=팔달산에 있다.
지금은 도청도 있고, 다 있다. 결국은 수원을 위한 경기도가 되었다.
엣길은 교동사거리에서 정조로를 따라 서원천을 건너 세류역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지금은 아파트와 낮은 빌라들이 기존의 도로를 싹 밀고 새로 들어서서 예길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세류역에서 다시 수원천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길은 송산 저수지로 우회전하여 용주사를 지나서 융건릉에 이른다.
능침 사찰이라 유교적 요소가 혼재된다.
시대에 따라서는 당연한 일이다. 남양주 광릉 봉선사와 매우 유사항 도량 구조를 가진다.
급하게 화장실에 들렀다.
이런 것을 읽어보면 잘 비우는 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이건 뭘까?
수각이라고 부르는 우물이다.
남양주 봉선사는 왼쪽에 있다. 원래 사찰의 수도가 라고 할 수 있다.
기둥이 돌인 것이 이채롭다.
정작 능에는 관람시간이 끝나서 못 들어갔다.
후일 들를 곳들이 좀 있다.
|
첫댓글 여전히 옛길을 누비고 계시네요. 역사를 헤처가며. 응원합니다~
잊지 않고 답글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작년 올해는 혼자서 해안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연휴가 있어야 몇일 다닐텐데 올해 추석은 어떨까 모르겠네요.
파노라마처럼 과거와 현재가 쉽게 그려짐니다.
구구절절 느낌이 와닿아 마치 스쿠터를 타고 현장을 누비는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시간내서 님이 올린 글 보면서
머릿속 여행을 떠나볼까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본대로 느낀대로
세세한 설명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