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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의 한계
(약 1:12-15)
지금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온 나라가 욕심의 가스로 가득차 있다는 점입니다. 지나 14일 설교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사회의 상위그룹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일류대학 출신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일류사회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OECD 34개 국가 중에 부패인식지수가 27위이고 행복지수는 32위이니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얼마나 상위그룹이 부패했는지 국무총리 후보로 내세우는 인물마다 세금 포탈, 부동산 투기, 직무 관련 업체 비리문제, 병역 의혹, 논문표절 등에 모두 걸립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장관 내정자 가운데 잡음이 나오지 않은 인사는 거의 없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어쩌다 정권에 등용할 참신한 재목감이 이리도 부족한 나라꼴이 되었습니까?
한국사회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문턱을 넘어서고 있으나 세계가 선진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대한 지도층의 부패장벽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쩌다 부패로 만연된 한국사회 상층부 되었습니까? 그동안 1970년대부터 시동된 경제근대화가 한국사회 상류층 지도자들을 도덕적으로 병들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군사정권이 경제성장에 주력한 결과 1980년대부터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나 도덕적으로는 오염도가 극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한국사회의 지도자들은 선비정신을 지조처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근대화 과정에서 선비정신의 가치관에서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전락된 것이 한국사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독재정권이 배워준 대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투적인 삶이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출세 경쟁에 가장 민감한 상류 지도층인 정치가들과 대기업의 중역들, 고급공무원들과 고급 장성들은 물론이고 사회를 정화시켜야 할 법조인들, 교수들, 예술인들까지 그 모두 이런 전투적인 삶에 매진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치든지 상류층에 끼어들기 위해 세력가에게 줄을 서면서 엄청난 뇌물을 바치고 정경유착과 정략결혼을 서슴없이 결행하고 정보를 미리 빼내어 부동산투기, 자녀 군대면제 등, 그 좋은 머리와 인맥을 마음껏 악용했던 것입니다. 특히 보수진영 인사일수록 부패지수가 높음으로 총리나 장관 후보들이 청문회 때마다 검은 부패의 뿌리들이 뽑혀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종교계만이라도 바르게 서 있다면 얼마든지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 선거나 연합기관장을 선출하는 데 몇 억 이상의 선거자금이 든다고 하니 기가 막힙니다. 신앙 좋다는 총대들이 모인 총회에서 선거전에 돈 봉투가 뿌려지고 많이 뿌린 쪽이 당선되고 있으니 사회 정화는커녕 사회로부터 비난만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한국사회의 상위층들이 출세와 재산축적을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다보니 얼마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는지 상위층 10%가 국가 전체소득 45%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65% 소득으로 90%의 국민들이 나누어 먹는 비참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새누리 정권은 이런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감소해주고 서민들에게만 악착같이 세금을 걷어 들이고 있으니 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 나가서는 재벌들이 중소기업이나 동네 골목 상권까지 침투하여 서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가니 서민들은 점점 빈곤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류층이 그 많은 재산으로 무엇을 합니까? 뉴스에 의하면 외채의 주요인이 상류층이 사들이고 있는 사치성 소비재의 증가 때문이라고 합니다. 골프채, 고급 승용차, 화장품, 심지어는 바닷가재, 웅담, 양주 수입은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온 나라가 온통 욕망의 거품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살리는 길은 욕심의 거품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처럼 욕심으로 가득차면 나라의 장래는 멸망뿐이 더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경고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 기독교인 각자부터라도 개인적으로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욕심을 버리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1. 그러면 욕심이란 과연 무엇을 말합니까?
목회하면서 많은 교인들과 상담할 때에 욕심 때문에 고민하는 분이 많습니다. “목사님, 나는 욕심이 너무 많아 문제입니다. 기도나 금식을 많이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금식할 때는 욕심이 사라진 것 같았는데 평상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욕심에 매여 삽니다. 그러니 언제나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좋지요?’라고 합니다.
그 때마다 대답하는 말이 있습니다. 욕구와 욕심은 다르다고 가르쳐 줍니다. 즉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欲求)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소유욕, 명예욕, 오락욕 등입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살고, 피곤하면 수면을 취해야 회복되고 남녀 간에 성관계를 맺음으로 자녀가 태어날 수 있고 소유욕이 있어야 경제가 발전하고 명예욕이 있어야 인재가 생기고 오락욕이라는 욕구를 통해서 문화가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구와 욕심은 엄연히 구분돼야 합니다. 그러면 종교에서 말하는 욕심은 무엇입니까? 기본적인 욕구를 벗어나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과욕을 말합니다. 지나치게 과식(過食)하는 것, 하나님이 정하신 일부일처제를 벗어나 다른 이성과 음란관계에 빠지는 과색(過色),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재물을 축적하는 것,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지나친 출세욕, 지나치게 오락에 빠지는 것이 바로 욕심이나 탐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청년들 중 상담하러 와서 묻기를 “목사님, ‘마5:28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느니라’고 했는데 저는 자주 그런 생각을 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라고 합니다. 그 때마다 대답해 줍니다 “성욕과 음욕은 다릅니다. 성욕이 없다면 어떻게 남녀 간에 결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음욕이란 어느 여자를 보고 구체적으로 성적으로 범하려는 나쁜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한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두 남녀가 사랑해서 서로 성욕을 품는 것을 결코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기 애인이나 아내를 보고 성적 느낌 전혀 없고 개나 닭 보듯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기 여인을 모독하는 죄가 아닌가요? 그러나 자기 애인이나 아내가 있음에도 다른 여인을 성적으로 범하려는 구체적인 의도를 품을 때 이미 간음한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훔치겠다는 생각을 품거나 누구를 미워하여 죽이려는 계획을 품을 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지만 이미 도둑질이나 살인한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구와 욕심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욕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처녀에게 두 군데서 혼담이 들어왔답니다. 동쪽에 사는 총각은 집안이 좋고 돈은 많지만 얼굴이 못생겼고, 서쪽에 사는 총각은 집안은 가난하지만 인물이 잘생겼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네가 동쪽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왼편 손을 들고 서쪽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손을 들어라.’고 했더니 딸은 두 손을 다 들었습니다.
얘기인즉 밥은 동쪽에 가서 먹고 잠은 서쪽에 가서 자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기본 욕구마저 버리는 금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먼저 지나친 욕심은 우리에게 많은 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과식이나 과색은 건강을 해치고 지나친 소유는 결국 자기 뿐 아니라 자기 가정까지 해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딤전6:9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딤전6:18에서 “부하려는 자들이 힘쓸 것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들이 되게 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전 10:31절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권고합니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랑하시는 벙커원교회 형제자매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결혼이나 사업을 하든지, 혹은 여행이나 오락을 하든지 언제나 명심할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힘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우리가 욕심을 품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낳습니다. 우리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라는 15절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을 품으면 마치 임산부가 아기를 잉태한 것처럼 욕심이 우리 속에서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기를 낳듯이 죄를 낳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은 마귀의 미끼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할 때에 욕심이라는 미끼로 유혹합니다.
본문 13절에서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영어로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하는데 하나는 테스트(test)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시험해 보시는 것을 말합니다. 연단을 시키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넘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단어는 ‘템프테이션(temptation)'으로 ‘유혹’으로 번역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욕심이라는 달콤한 미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다 약점이 있습니다. 어느 분은 이성에 약하고 어느 분은 돈, 어느 분은 명예에 약합니다. 마귀는 그 약점의 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유혹합니다.
어느 여자 분은 남편에 대해 늘 불만을 품고 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비족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러운지요? 여자는 그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다 보니 모든 것 다 잃고 처량한 신세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털리는 것입니다.
돈 욕심이 많은 사람에게 너무나도 확실한 투자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한 두 번의 재미를 보게 되는 것이 악의 소굴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시험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비롯됩니다. 마약과 춤, 향락과 도박 등등의 미끼로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그것을 덥석 물면 낚시에 꾀여 결국 죄의 소굴로 깊이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게하시는 신앙이 좋고 지혜가 많아서 엘리사라는 당대의 유명한 선지자의 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물질욕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엘리사가 당시 강대국인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더니 나아만은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많은 은과 비단으로 사례 했습니다. 옆에 있던 게하시는 그 화려한 물질이 너무나 탐이 났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엘리사는 적당한 사례도 거절하고 한 가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이미 마음에 품은 욕심에 이끌려서 주인 몰래 나아만을 쫓아가서 주인이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한 후 은 두 달란트와 두벌의 옷을 받아 왔습니다. 그 결과 게하시는 문둥병에 걸리는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지 않고 품고 있으면 죄를 짓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금 년 4월 초 성완종 리스트 때문에 한국사회가 큰 충격을 받으면서 정치계의 엄청난 비리가 들어날 것처럼 떠들썩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액을 받았다는 권력가들의 수사는 슬그머니 들어가고 엉뚱한 노건평 씨 수사만 하는 정부를 보면서 또 한 번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기독교인으로 너무나 부끄러운 것은 성완종 씨가 서산감리교회 장로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출신으로 2조원 규모의 경남기업 회장이 되고 19대 국회의원,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을 정도로 상위층이 되었으면 기독교인으로 자족해야 함에도 더 큰 출세를 위해 탐욕을 부리면서 기업의 자금을 자기의 출세를 위해 마음대로 도용하고 수감될 위기에서는 점집을 찾아 점도 치고, 여기저기 돈으로 구명운동을 하다가 결국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경 말씀이 진리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사랑하시는 벙커원교회 형제자매 여러분들이여,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달콤한 욕심이라는 미끼로 유혹하는 줄 아시고 늘 깨어서 기도하고 경건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죄를 계속 짓고 있으면 마침내는 사망의 날이 옵니다.
본문에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 마음에 욕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선악과를 볼 때에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았는데 욕심을 품고 선악과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생긴 것으로 보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욕심이 신앙의 눈을 가리게 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채 지나니까 마침내는 사망의 날이 이르고야 만 것입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 절대로 여리고의 재물에 손을 대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외투를 보는 순간 그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훔친 후 감췄다가 마침내 돌에 맞아 죽는 끔찍한 날을 만났습니다. 삼손은 신앙은 좋았으나 음란에 약했습니다.
너무 매혹적인 데릴라가 유혹할 때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안목의 정욕의 주범인 눈이 빠지고 매일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다가 비참하게 죽는 날을 만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욕심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과식, 과음은 위장병의 원인이요, 과속은 사고의 원인입니다. 과소비는 빈곤의 원인이요, 과로는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어떤 의학 연구가는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 100번 정도 암에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체내에서 인터페론이 생성되어 항암 작용을 해주기 때문에 암을 이겨내고 건강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거짓을 일삼고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짜증스런 삶을 살면서 욕심을 버리지 않게 되면 저항력이 감소되어 결국 암에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금방 죽지 않습니다.
죄는 10개월 동안 욕심의 복중에 잠복해 있다가 죽음이라는 사산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정글 속에는 사람이나 산돼지를 잡아먹는 뱀이 살고 있는데 얼마나 힘이 센지 일단 뱀에게 휘감기게 되면 뼈가 으스러지고 통째로 삼켜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돼지나 다른 것을 통째로 삼키고 나면 그것을 다 소화시킬 때까지는 꼼짝도 안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뱀을 잡아다가 가죽을 벗겨서 핸드백도 만들고 허리띠도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욕심 때문에 죽는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고려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정이 두터운 친구 셋이서 여행을 하다가 길에서 묵직한 금덩어리 하나를 주웠습니다. 셋은 이로 인하여 깊은 우정에 금이 갈까 봐 금을 팔아서 셋이 똑같이 나누어 갖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뜻밖의 횡재를 축하하는 뜻으로 술을 사다 마시며 실컷 즐기자고 하였습니다.
셋 중 하나가 술을 받으러 인근 주막으로 가다가 엉뚱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옳지, 술에다 독약을 타서 둘을 죽이면 금덩어리는 몽땅 내 것이 되겠지.’ 그 자는 술에다 독약을 탔습니다. 한편, 남아 있던 두 친구들도 금에 대한 욕심으로, 술 받으러 간 친구를 죽이자고 모의하고 오자마자 살해했습니다. 그리고는 좋아라 하면서 받아 온 술을 실컷 퍼 마셨습니다. 얼마 안 되어 둘도 피를 토하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여, 인생의 문제는 지나친 욕심에 있습니다. 욕심을 이기어야 합니다. 욕심은 너무나 달콤하고 유혹적이라 이기기 힘들지만 이기면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본문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라 했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이긴다는 말입니다.
욕심의 유혹을 이기면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점은 유혹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인격자는 유혹을 뿌리칩니다. 우리 성도는 말과 행동으로 ‘아니요'라고 하는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구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하나님이 이길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갈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막강한 시위대장의 아내의 유혹를 받았습니다. 거절하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아니요.’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요셉을 ‘옳다 인정하신 후에’ 강대국의 총리대신으로 만드셨습니다. 다니엘도 우상에게 잠깐 고개만 숙이면 높고 화려한 생활이 보장되지만 거절하면 사자의 밥이 되는 기로에서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왕으로부터 더 큰 신임을 받게 되고 자기 동족이 구함 받는 역사를 만났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 건너간 때는 23세 때였습니다. 미국에 가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초등학교는 18세 이상은 다닐 수 없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여자 교장은 23세의 안창호를 퇴교 시켰습니다.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실망을 안고 하숙집에 돌아오자 하숙집 영감님이 말하기를 ‘자네는 키도 작아서 17세라고 속을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머나먼 땅에 와서 살려면 적당히 거짓말도 해야 살지 무슨 정직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안창호 선생은 ‘나는 입학을 못하면 못했지 연령은 속일 수가 없다.’고 하자, ‘미련하다.’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정직하게 산 결과 하나님은 나중에는 우리나라의 큰 지도자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벙커원교회 형제자매 여러분이여, 마귀는 여러분의 약점을 잘 알고 그 틈을 이용하여 유혹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에 일시적인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지 마시고 유혹이 올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상급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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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넘흐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김태복 목사.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