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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0강 열왕기상 솔로몬 왕국의 번영과 분열 -
(13) 마음대로 다스리는 왕, 왕상 12:25-33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왕권 확립을 위한 세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일로서, 세겜을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지정했습니다. 둘째는 군사적인 일로서 부느엘(브니엘)에 요새를 건축합니다. 셋째는 종교적인 일로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갓 왕이 된 여로보암의 마음에는 치명적인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떼어주신 열 지파 사람들이 매년 3대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곤 하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정통 왕조인 유다 왕 르호보함에게 돌아가고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열 지파를 예루살렘에 못 올라가게 하려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지정하신 예배의 모든 원리를 자기 임의대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여로보암이 바꾸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가 절대로 바꾸지 말아야할 것들입니다. 이 저녁에는 여로보암의 악행, 그것을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배 대상을 바꾸었습니다(28).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우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 20:3-7). 그러나 여로보암은 1,2,3계명 모두를 범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28). 두 금송아지를 ‘이스라엘아,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아론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라고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아론이 오랜 애굽 생활에서 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익숙해 진 것처럼, 여로보암도 애굽 망명 생활 동안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배운 것 같습니다(11:40). 금송아지를 다름 아닌 ‘출애굽의 구원을 주신 여호와’라고 소개함으로써 정통 여호와 신앙을 계승하는 척 했지만,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였습니다. 아론과 우상숭배자들에게 쏟으신 심판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출 32:27,28).
둘째, 예배 장소를 바꾸었습니다(28a-30). 하나님은 모세 때부터 예루살렘 중앙성소에서만 예배드리라고 미리 명령하셨고(신 12:4-14), 성전 봉헌식 때 구름 속에 여호와의 영광을 보이사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 성소로 인준하셨음을 보이셨습니다(7:10,11). 그러나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너희가 다시는 힘들게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종교적 편의를 봐주는 척하면서, 금 송아지 두 개를 각각 ‘벧엘’과 ‘단’에 두었습니다. 두 장소를 예배 중심지로 선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두 장소의 역사적 의미와 지리적 요건 때문입니다.
‘벧엘’은 족장시대에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여호와께 단을 쌓은 곳이며(창 12:8; 28:11-19), 사사 시대에는 언약궤를 둔 곳이고(삿 20:26), 사무엘이 해마다 순회했던 영적 중심지입니다(삼상 7:16). 지리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인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이고(삿 4:5; 대상 7:28). 북이스라엘의 거의 남단에 위치하여 예루살렘에게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밖에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절기를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가는 북쪽 순례객들이 꼭 경유해야 할 곳이므로, 여로보암은 그곳에 금송아지를 길을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훗날 선지자들은 저 대단한 벧엘(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우상의 집, 허무의 집)이라고 개칭하여 정죄합니다(호 4:15,5:8,10:5).
‘단’은 본래는 ‘레센, 라이스’였지만, 사사 시대 때 단 지파들이 라이스 사람들을 진멸하고 차지하고는 ‘단’이라고 명했습니다(삿 18:27-29). 그들은 불법적으로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제사장 삼고, 미가에게서 빼앗은 은으로 만든 신상을 그곳에서 오래도록 섬겨왔습니다(삿 18:30,31). 단은 북이스라엘 최북단에 있어서, 북쪽 지역의 지파들에게는 비교적 접근이 쉬웠던 것입니다. 어디 거기까지 가냐, 여기서 제사 드려, 편의를 봐주는 것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북이스라엘이 죽는, 여로보암이 저지른 거대한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예배 수종자를 바꾸었습니다(31). 하나님은 레위 자손들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만을 제사장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28:1-4;신 18:1-8). 그러나 여로보암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폐하고 일반 백성 중 자원하는 모든 자들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일개 왕이, 하나님께서 세운 아론계열, 사독계열 제사장을 해고하고 아무나 세운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행했던 일인 것이지요. 우스꽝스러운 예배, 오히려 인상이 찌뿌려지는 예배 하나님 받으시지 못하시는 예배가 드려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날 비인가 신학교에서 마구 마구 속성완성 목사님들을 배출하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만 거룩하냐고 제사장직을 요구했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적했다가 향로불에 죽은 250명의 이스라엘 지도자들도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여로보암이 제사장을 일반인 중에서 자원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뽑는다고 말한들, 저들은 어쩜 그래 겁도없이 제사장이 되겠다고 하고 또 되었던 것일까요? 왜 그렇게 자원해서 제사장을 하고 싶어했을까요? 그들이 가졌던 무엇이 부러웠던 것일까요? 사람들 앞에 주목받는 명예가 부러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제사장을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오해를 했던 것일까요? 레위인들보다 자신들이 더 성경대로 제사장직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저는 수시로 저를 의심합니다. 바른 목회자인가?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인가? 내 설교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인가 존귀한 성도님들에게 그래도 하나라도 더 본이 되는 모습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성도님들 앞에 참 부끄러울 때 뿐인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 그런데도 저 겁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왜 저들은 저리 편법을 써가며, 거짓을 이야기하며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공의와 심판의 주님이심을 믿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외치는 이들인 것입니다. 늘 떨고 있는 지도자, 나침반처럼 정북을 맞추기 위해 늘 떨고 있는 지도자, 여러분 그런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먼저는 저를 위해서 그리고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들을 위해서 늘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넷째, 예배 날짜를 바꾸었습니다(32,33). 하나님은 초막절을 7월 15일에 지키라고 하셨습니다(레 23:33-44, 민 29:12).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 절기를 8월 15일로 임의 변경했고, 불법적 산당 제사장들은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로보암은 벧엘 제단에서 직접 분향하기도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은 철저히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여로보암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면 다윗에게처럼 견고한 왕조를 주겠다’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신뢰했다면(11:38), 정치적 불안감도 없었고 거짓 예배들을 고안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도자 여로보암만 탓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명령했고, 나라의 정책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신실하게 순종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른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의 행보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마치 압살롬을 따르지 않고 다윗을 향해 나아왔던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 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일을 역대하 11장 13-16절이 이렇게 기록됩니다.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대하11:13-16)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제사장들, 레위인들이 여로보암과 아들들에 의하여 다 해임을 당했던 것인데, 그때 뭐라고요?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 한 순간 분노하고 힘들고 마음이 맞지 않아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는 돌아와야 해요? 저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바른 하나님이 아닐 때, 저들이 드리는 예배의 장소가 하나님 정해주신 것이 아닐 때, 제사를 섬기는 사람이 정통 제사장이 아닐 때, 저들이 지키려는 절기가 엉터리 절기일 때, 우리는 과감히 저들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금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들의 걸음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험악한 시대, 함께 공멸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복된 이들인 까닭입니다.
신천지에서 돌아와 다시금 그들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 중에 신현욱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신천지 안에서 바울로 불리웠던, 신천지의 교리를 체계화하고 지금의 신천지 복음방, 모든 교재와 교안을 만들고, 녹음기 같은 복음방 강사들을 세웠던 분입니다. 근데 몇 해 전 서산제일교회에 신천지 교리반증 세미나에 오셔서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신천지 교육을 너무 너무 재미있게 들으시면서 배우시던 권사님 내외가 계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분들이 교육을 받으시고 이제 뭐 거의 끝마무리 단계였던 것이지요? 보혜사 이만희를 소개하는 단계에서 이야기를 듣더니, 그 다음날부터 교육에 안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은 손가락에 꼽는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신천지에서 복음방 강의를 하는 동안 그렇게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장로님도 권사님도 전도사님도 집사님도 다 보혜사는 이만희 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냥 거기 머물러 신천지 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지켜야할 것들을 잘 기억하시고, 존귀한 생명의 길에서 떨어지지 마시고, 늘 모든 순간 참된 예배자가 되어, 허락하신 기회와 복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 더욱 존귀하게 쓰임받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보십시오. 이렇게 대놓고 하나님을 떠났던 여로보암, 그렇게 악한 길을 걷던 여로보암은 13장 1절부터 악행을 일삼고 있습니다. 사울왕이 걸었던 길, 제사장 대신, 자신이 분향하는 크나큰 월권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울왕에 대한 일화를 한 번만 듣고 한 번만 읽어보았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을, 오늘 여로보암은 그렇게 분향을 손수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여로보암에게 급파하십니다(1-3). 남유다 출신의 한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서 여로보암에게 말씀하십니다. 왜요? 조금전 살펴보신 대로 제대로 된 제사장, 레위인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다 해임되거나 남유다로 다 내려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참된 선지자들이 남아있질 않았고,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숭배 정책에 아첨하는 거짓 선지자들, 자원하여 제사장이 된 엉터리들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대하 11:13-16). 오늘 그 선지자가 도착해서 이런 선포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왕상13:2)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이 제단은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제단이요, 제사의 구실을 할 수 없는 제단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포는 정말로 요시야 왕 때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찾아둔 본문 읽어드리겠습니다. 정확하게 그대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왕하 23:15,16).
여러분, 오늘 이러한 말씀의 성취는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선지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왕이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군사와 신하들이 둘러서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용감하게? 무모하게? 겁대가리 없이! 죽을 자리인 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왕의 제사를 방해하며, 왕의 제사가 그릇되었고 허물이 있음을 외쳐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선포이기에, 이러한 선포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왕이 직접 분향하는 엄숙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어떤 선포입니까? 정말 죽음을 각오한 선포입니다. 목숨을 건 설교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무섭고 두려워서 뜁니다. 과연 나 서설원 목사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대언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질 못하기에 오늘도 능력이 없는 말씀,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말씀, 성도들의 마음에 남지 않는 말씀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살아 운동력있는 하나님의 좌우의 날선 검과 같은 말씀을 오늘도 다칠세라, 상처받을세라 싸매고 뭉툭하고 증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도 가감 없이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람은 이 말씀을 전할 때 분명 죽음을 각오했을 것입니다. 왕이 만든 제단 앞에서 분향하고 있는 왕 앞에서 감히 이런 말을 하고 살아남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씀이 선포되었기에, 오늘 그 말씀은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어떤 순간 말씀을 증거해야할 상황이 오시거든, 말씀 있는 그대로 전하시길 바랍니다. 포장하실 필요도 없고, 미사여구로 풀어서 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주신 말씀 그대로, 성경 구절 그대로,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그 목숨을 건 선포에 오늘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보시지요.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여로보암이 그냥 놔둘리 없습니다. 어떻게 했다구요? 4절 상반절 읽어보겠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왕상13:4a) 오늘 이 여러보암의 분노 앞에 이 선지자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어디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해, 어디 하나님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느냐고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기록하지요?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왕상 13:4b-5)
여러분, 이런 상황이 되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생명을 즉시 거두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팔을 마비시키신 것은, 오늘 여로보암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는 완고함을 드러내주신 동시에,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오늘 여로보암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내 앞에 저 엉터리 종교정책에 관하여, 그리고 오늘 월권하여 분향한 일에 대하여 회개하여 살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해요? 자기가 하지 않습니다. 오늘 남에게 시켜서 그것도 회개가 아닌, 치료만 요구했던 것이지요? 한번 읽어볼까요? 체면 때문에 그랬는지, 오늘 여로보암은 주신 기회를 참 어리석게 사용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왕상13:6)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간청합니다(6). ‘공들여 만든 금송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도 아닌,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달라”며 부탁합니다. 참 우리 하나님 속도 좋으시지요?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기도하자 왕의 손이 다시금 회복되었습니다. 그럼 또 어떻게 해야 될까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와 중보로 손이 치료되었으면,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치료해주신 하나님만 바르게 섬기겠노라 하나님 앞에 새로운 결단과 다짐을 해야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치료를 받고나니 또 감감 무소식입니다. 이것이 오늘 영적으로 무지한, 오늘도 감사를 잃어버린,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인 것이지요?
여로보암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부지기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되, 자기가 기도하지 않습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되 죄 자체를 아파하지 않고 죄의 쓴 열매만 거둬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없고 참된 관계의 회복이 없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 그를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참 속도 좋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오래 참으심은 끝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마침내 하시고 싶지 않으신 심판과 징계를 내리셔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저희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더욱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욱 자리를 지켜나가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곤, 여로보암이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라, 일개 선지자에게 사례를 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오늘 선지자는 그 모든 호의를 거절합니다. 왜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이런 명령도 하셨던 까닭이지요? 9절 볼까요?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왕상 13:9)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왕 앞에서도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왕의 놀라운 호의와 친절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선지자, 여러분 오늘 저가 그러해야하고 여러분이 그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보여주시는 선지자의 이 모습,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마음대로 왕이 되었던, 어리석은 여로보암을 닮지 않아야겠습니다. 예배 장소를, 예배 날짜를, 예배드리는 제사장을, 가장 중요한 예배 드리는 대상, 하나님을 바꾸었던 여로보암, 또한 어디 감히 거짓 제단에서 함부로 분향을 하고, 어디라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손을 들고, 자기가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는 어리석은 여로보암을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선지자를 닮아야겠습니다. 언제 어디 누구 앞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선포할 수 있는 사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기에 그 어떤 사례도 받지 않고 자리를 떠나 돌아갈 수 있는 사람, 조금도 내 공로, 내 영광 챙기지 않는 정직한 선지자의 모습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 하일교회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여로보암의 모습은 하나도 없고, 이 선지자의 모습만 늘 보이시는 복된 분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대로 말씀대로 하지 않고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우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정하신 시간, 정하신 장소, 정하신 일꾼들을 통해, 놀라우신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예배하게 하소서.
2.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말게 하소서. 세 번의 회개 기회(예언 선포될 때, 팔 마비 됐을 때, 마비가 풀어졌을 때)를 모두 무시했던 여로보암처럼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게 하소서. 허물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화평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부어주소서.
3. 오늘날, 팔이 말라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적반하장, 말씀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말라버린 팔들을 하나님 치료하여 주소서, 팔과 함께 영혼과 심령을 고쳐주소서, 하나님 경외하고 섬기게 하소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참으로 돌이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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