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진전람회
1920, 1930년대에 아마츄어들이 심취했던 예술사진이란 사진을 회화적인 기준으로 창작했거나 사진의 본래적인 가치를 회화에 두고 제작된 작품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들의 사진개념은 곧 회화적인 개념이었으며 사진의 본질에 대한 파악도 이와같은 영향속에 잠식되었다. 더구나 아마츄어들과 합세하여 영업사진사들까지 그들의 사회적인 대우의 차등을 우려해서 예술사진가로 자처했다. 바야흐로 예술이 사진이라는 명칭 앞에 덧붙여 사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예술사진가들이 내세운 예술사진은 그 좌표가 뚜렷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회화적인 영향하에서 이것을 기준으로 사진을 창작했다고는 하나 회화적인 기준이 애매 모호하여 예술사진 이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예술사진을 주창했던 에머슨(Emerson)의 사진이론은 예술가의 작업이 눈에 비치는 자연의 효과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조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영국의 풍경화가 콘스터블과 커로우 및 바르비종파의 새로운 자연파의 그림들은 고금을 통해서 예술작품의 정점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묘사의 정확성은 생리학적 광학(physiological optics)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이것으로 표현의 정확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註23] 에머슨은 이와 같은 사진예술 미학으로 노오포크 브로우드의 생활과 풍경이라는 늪지대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기록사진을 남겨주고 있다.
한국의 초기 예술사진은 기준이나 방법상의 논의보다는 주로 피사체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스럽게 카메라를 사용하는데서 이루어졌다. 자연관조(自然觀照)의 회화적인 영향이 사진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것은 화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진가들의 회화적 소양은 서양화 보다는 동양화의 영향이 더 강했다. 초기의 사진가들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서화와 병행해서 사진을 하거나 서화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지운영은 서화계의 삼절(三絶)로 알려져 있었고 김규진도 당시의 서화계를 이끌어온 대가였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초기에 개인예술사진전을 가졌던 정해창도 금석학 연구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이렇듯 서화가이거나 이에 대한 소양을 가진 사진가들은 서화와의 비슷한 모방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사진으로 병풍을 만들어 전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개발과 발전에 대한 관심의 부족으로 동양화의 복사물이란 비난을 받게 되었다. 회화적 영향이 사진의 본래적인 가치를 약화시켰지만 예술사진은 확실히 개인이 표현과 카메라에 의한 의미전달을 이룩한 최초의 출발이었다. 작가가 무질서한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고 거기에 미학적인 옷을 입혀 자신의 혼을 불어넣는 창작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성급하지만 예술사진의 제작을 통해서 이러한 것이 이루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예술사진은 회화에 가깝게 접근되어 있었지만 매카니즘의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점차로 일반의 인기를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술사진은 1929년 3월 29일 정해창이 사진전을 개최함으로써 표면화되었는데 전시회가 열리기 전부터 벌써 일반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3월 29일부터 지금의 국제극장 남쪽 광화문빌딩 2층 화랑에서 개최된 정해창사진전의 출품목록은 사절판 40여점과 전지크기 10여점 등 50여점의 인물, 풍경, 정물사진들이었으며 당시의 민족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다 같이 이 사진전을 가리켜 예술사진전이라고 불렀다.[註25]
정해창의 사진들은 영업사진과는 달리 영리를 떠난 사진이었으며 취미로써 오랜 연구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여타 사진과는 다른 감동을 주리라고 모두 기대했다. 이와 같은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서 첫날부터 성황을 이루어 동아일보는 이 사진전을 연일 보도했다. 전시작품들은 인물사진이나 정물사진도 있었지만 역시 풍경사진이 많았고 일반의 관심도 여기에 집중되었다. 개성이 없는 천편일율적인 초상사진만을 보아온 일반인들은 예술적으로 사물을 표현한 작가의 새로운 구성에 이끌리게 되었다. 하찮은 자연풍경들, 즉 강물, 평야, 들판, 산, 하늘의 구름들이었지만, 이것으로 주제를 고상하게 하고 눈에 거슬리는 구성을 피하여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어 회화적 분위기를 충분히 발휘했다.
최초의 예술사진전을 가졌던 정해창은 원래 일본 동경외국어대학에서 독어를 전공한 문학도였다. 후년에는 독문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고고학과 금석학에 심혈을 기울여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룬 방대한 작업을 남겼다. 독문학과 금석학 사이에서 사진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 자신이 말한 적이 있으며 또 사진을 독학으로 공부하던 당시의 관심은 주로 인상주의사진에 쏠려 있었다고 했다.
그가 심취했던 당시의 사풍(寫風)을 어떻게 자기 작품 속에 이입시켰는지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인상주의적 표현을 사용한 작품은 거의 없다. 카메라가 사물을 재현하는 자연스러움을 중시해서 인위적인 터치라든가 인공적인 영상을 첨가하는 보조수단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사진의 소재가 될만한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촬영했다. 감광도(感光度)가 현저하게 낮은 유리 판을 사용해서 작품을 완성시키므로서 그의 말대로 고심참담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카메라가 만들어준 영상에 최선을 다했다. 정해창은 첫 사진전 이후 1931년에는 대구 · 광주 · 진주 등지에서 지방순회전을 갖기도 했으며 1934년에는 소공동「악랑다방」에서 인형을 주제로 개최한 사진전, 1939년에는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 화랑에서 개최된 개인전 등 전후 4회의 예술자신전을 가졌다.
정해창의 예술사진전보다 2∼3년 늦게 서순삼(徐淳三)도 평양에서 예술사진전을 개최했는데 조선일보는 이를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
「평양 삼정사진관 주최, 본사 평양지국 후원으로 수옥리 본사지국 상층에서 개최되는 제1회 예술사진 전람회는 예정과 같이 23일 오전 10시부터 앞으로 사흘간 개최되어 주최자측에서는 작품 80여점의 진열을 21일까지로 마치었다. 평양에서 첫번 주최인 만큼 벌써부터 인기가 집중되어 있는 터인데 초상, 동물, 화초 등 실로 걸작이 많다고 한다.[註27]」
서순삼의 개인사진전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개최된 것이어서 상기한 조선일보의 보도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초기에 예술사진전을 가진 정해창과 서순삼은 몇 가지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들 두 사람이 다 같이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사진학교를 다닌 점이다. 정해창이 독문과에 재학하면서 동경사진예술학교 연구실에서 사진을 배운 점과 서순삼 역시 동경에서 중학 과정을 마치고 소서구사진학교(小西久寫眞學校)에서 사진을 배운 점이 공통점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은 사진의 영향도 너무 비슷하였다. 예를 들면 정해창이「고무, 브롬오일 등의 인화법을 습득한 후 회화의 이미지를 인화지 위에 옮기려는 사풍을 쫓은 바 있다」고 한 것이라든가[註28] 서순삼이「표준인화에다 피크멘트, 오일, 고무인화 등의 기법을 응용하여」[註29] 작품을 제작한 것 등이 모두 인상주의사진의 영향을 받은 것을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서순삼이 정해창의 뒤를 이어 예술사진전을 개최한 무렵에는 일간신문에서도 이 분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외국의 예술사진을 소개하는가 하면 잡지를 통해 공모전을 개최했다.[註30]
동아일보 기사와 함께 이스트만 코닥회사의 당선작품과 영국 섬튼씨의 작품, 일본「조일 카메라」잡지에서 매월 모집하는 월례 콘테스트의 1등 당선작 등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도 1931년 3월부터 세계의 예술사진을 수 차에 걸쳐 소개했는가 하면 1931년경에는 납량사진공모전(納凉寫眞公募展)을 개최하는 등 예술사진에 대한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와같은 예술사진에 대한 관심은 점차 높아져서 신문 뿐만 아니라 1929년에 열린 조선전람회 공예관에서도 예술사진을 모집[註31]했고 사진재료상인 대택상회(大澤商會)에서도 예술사진전람회를 열었다. 이러한 예술사진의 관심은 일차적으로는 영업사진에 대한 반동이지만, 아마츄어들의 급성장으로 만들어진 취미와 여가의 문화가 예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므로서 창작의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 사진에 대한 보도와 해외사진의 소개 및 사진행사 등을 마련함으로 해서 촉매작용이 되었다. 여러가지 사진행사, 즉 작품전람회나 현상공모전 촬영회 등이 점차로 증가되었으며 이들은 아마츄어들의 사진열을 자극했다. 서울을 비롯해서 지방까지 아마츄어들의 사진단체가 구성되었고 사진에 대한 예술사진이라는 명분으로 의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분별한 열성은 버나드 쑈(George Bernard Shaw)의 표현처럼 한 마리의 새끼를 얻기 위해 백여만개의 알을 낳는 대구와 같이 아마츄어들의 무분별한 사진활동만을 속출시켰다.[註32]
그러나 이들 중에는 -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들을 참고하면 - 대단히 고심해서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정해창이나 민충식 등의 사진은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해서 그 진가를 오늘에 와서 찾을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첫댓글 애머슨의 자연의 모방이란 말이 인상 깊습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 속에서
내 것의 독틈함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듯 닮아 있는 작품 들이 태반이나
닮아 있는 듯 다른 내 작품을 만들어 나가야 겠지요
소견으로는
작품과 내 감정사이의 통로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환한가, 부스러 져 있나 등 그러한 감정들의 교감 말입니다
사진은 가장 짧은 시라고 생각 합니다
우리 사진이 좀더 깊어져아 겠습니다
사진이 점점 어려워 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