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가슴 전성시대, 그 전과 후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
안정숙
가슴에 관해서는 좀 자신이 있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슴계의 ‘김혜수’였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일도 순전히 큰 가슴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또래보다 발육이 빨랐던 내 가슴은 짓궂은 시골 남자아이들의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체육 시간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어느 날, 내 가슴팍을 가리키며 키득거리는 놈들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날 밤 서울 사는 이종사촌 언니들이 물려준 옷상자를 뒤져 브래지어를 찾아내 젖가슴을 단단히 구겨 넣으며 나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팬티에 처음으로 피를 묻혔던 날도 그랬다. 학교 도서관 맨 아래 칸에서 잠자고 있던 성교육 책자를 정독했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무뚝뚝한 의사가 환자에게 하듯 담담하게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지금 생각하면 안쓰럽기까지 할 정도로 조숙한 아이였는데 그래도 엄마가 어떤 축하의 말을 해줄까 하는 기대는 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간 엄마가 근엄하고 낮은 목소리로 일러준 것은 앞으로 조심해야 할 남자들의 세계가 전부였다.
그때 우리 반에는 또래보다 한 살 많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학교 대표 육상 선수였던 그는 전국대회를 앞두고 다른 학교에서 합숙훈련 중이었다. 담임선생의 말은 이랬다.
“대회 참가자들의 신체 사이즈 즉, 키, 몸무게, 가슴둘레 등을 제출해야 하는데 아무개가 없으니 누군가의 것을 대신 재야한다.”
상식적으로 그것은 합숙훈련을 하는 학교에서 일괄 처리하거나 아니면 며칠 뒤 그가 돌아왔을 때 하면 될 일이었다. 체육 시간에 출렁거리는 내 가슴을 보고 키득거리던 놈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들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말없이 나를 호명했다. 내 가슴은 만장일치로 ‘누군가의 가슴’이 되어 반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기가 까발려졌다.
물론 담임이 단순히 내 사이즈가 궁금해서 없는 말을 지어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키랑 몸무게는 어쩌고 하필 가슴둘레만 재고 말았는지, 그때만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젖 몽우리가 생긴 이후로 선생이건 누구건 간에 남자가 내 가슴 사이즈를 잰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고미숙 선생이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회 억압 때문에 여성 자신이 스스로 인생을 주도하는 생채 에너지가 부족해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사춘기 소녀의 눈에 여자의 몸은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여자의 가슴과 성기는 남자를 흥분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고, 예쁜 언니들은 꼭 놀러온 사촌오빠에 '일'을 당하곤 했다. 그만큼 내 몸에, 우리들 스스로에 무지한 시대였다. 그렇게 사춘기 소녀에게 생채기를 냈던 가슴이 비로소 숭고한 사명을 할 때가 왔다. 엄마가 된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날 당시 내가 알고 있던 모유 수유, 즉 젖에 대한 상식은 딱 두 가지였다. 출산을 하면 자연스럽게 젖이 돈다는 것. 신생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양분이라는 것. 육아가 낭만적이기만 할 리는 없겠지만 한쪽 팔로 능숙하게 아이 머리를 받치고 온화한 표정으로 눈을 맞추며 젖을 물리는 건 초짜 엄마의 로망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철철 흘러넘쳐야 할 젖이 고장 난 수도꼭지 물처럼 찔끔거렸다. 젖무덤에 빨갛게 손자국이 새겨질 만큼 주물럭거리며 한 시간을 물려도 아이의 작은 입술은 어항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안타깝게 헐떡거렸다.
징조가 있긴 했다. 보통 임신부들은 갑자기 늘어난 가슴 크기에 답답해하거나 희열을 느낀다고들 했다. 하지만 내 가슴은 임신 전과 비교해 겨우 한 사이즈 늘어났을 뿐이었다. 심지어 출산 전에 들른 산후조리원 원장으로부터 그다지 큰 가슴은 아니라는 치욕스런 말까지 들었다. 한창 젖가슴이 부풀어 오르던 시절, 순전히 가슴 때문에 김혜수로 불렸던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하다니.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조리원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가슴이 핸드볼 공만하게 부풀어 올랐든, 야구공만 하든, 우리 모두는 수유실이라는 공개 석상에서 젖가슴을 풀어헤치는 것조차 쭈뼛거리던 신출내기들이었으니까. 간호사들은 시간이 흐르면 양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도 굳게 믿었다. 며칠 뒤면 젖이 펑펑 쏟아질 거라고.
문제는 집으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조리원에서 모유와 분유를 섞어가며 배불리 먹던 아기와 ‘완전모유수유’를 하고 싶은, 젖이 부족한 나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아기는 배가 금방 꺼지니 푹 자지 못했고, 나는 나대로 한두 시간마다 젖을 먹이느라 파김치가 되어갔다. 얼마 안 가 너덜너덜해진 젖꼭지에서 피까지 흘렀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칼에 베이는 것처럼 끔찍한 젖몸살을 앓을 때면 적의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거기다 산후 조리를 거들어주려고 집에 와 있던 엄마들이 한마디씩 폭격을 퍼붓는데,
“네가 많이 먹어야 젖이 잘 돌지!”
시어머니의 타박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젖양이 적고만. 젖양이 적어. 쯧쯧. 분유라도 먹여서 푹 재워!”
딸의 고생이 안타까워 엄마가 툭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조리고 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시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오르는 걸 겨우 밀어냈다. 남편까지 내 속을 뒤집었다.
“충분히 먹인 거 맞아?”
쥐뿔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이나 있을 것이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아 냈던가.
오직 젖가슴만을 무기로 완전모유수유 쟁취에 나선 무모한 여전사.
돌이켜보면 왜 그리 집착했나 싶지만 '모유수유=당연한 엄마의 의무'로 여겼던 초짜는 제 할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가 재앙 같았다.
완전 모유 수유. 모유 잘 나오는 음식. 젖 양 늘리는 방법. 나는 틈 날 때마다 인터넷을 뒤졌다. 수십만 원을 주고 마사지까지 받았건만 결국 실패한 사연, 반대로 젖 양이 너무 많아 슬픈 사연. 젖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동지들, 남편과 엄마들한테 스트레스를 받아 미치기 일보직전인 아군들이 거기 다 모여 있었다. 산모의 스트레스가 젖 양과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사골이나 족발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잘못된 젖 상식’이 엄마들 사이에서 전설로 전해진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소름 끼치도록 고통스러운 젖몸살과 오만 사람들이 참견해대는 동네북 시절을 견뎌낸 장한 언니들의 조언은 한결 같았다. 무조건 열심히 물리라는 것. 아이가 빨면 빨수록 양은 늘어난다고 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시나브로 흘렀다. 정 안 되면 혼합수유를 하면 된다고 마음을 비워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이 찾아왔다. 아! 마침내 젖이 제대로 터졌던 것이다!
한 번 터진 젖은 짜도, 짜도 계속 나왔다. 아기가 채 물기도 전에 분수처럼 솟아올랐다가 아기 얼굴 위로 흩뿌려지는 젖 줄기를 볼 때면 얼마나 황홀하던지. 분유 먹이기를 권했던 엄마는 그제야 내 젖을 ‘참 젖’으로 공식 명명했고, 언젠간 할머니와 서로 “내 젖을 닮았다”며 참 젖 DNA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도 시댁에까지 대놓고 젖 자랑을 하기는 민망해서 '내 젖'만 먹고 자란 아이 몸무게가 상위 1%라는 점만 은근히 강조하며 거들먹거렸다.
아무리 젖이 잘 나와도 젖 물리는 행위 자체는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한다.
수면 부족에 회복이 덜 된 몸으로 하루 열두 번 젖을 물려야 하는 산후 두세 달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식탁에 선 채로 미역국에 풍덩 만 밥을 한 숟갈 뜨다가, 심지어는 똥을 누다 말고 튀어나와 젖을 물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티셔츠 사이로 젖가슴이 삐죽이 나온 줄도 모르고 현관문을 열다가 젊은 택배 기사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수유를 하는 새벽 다섯 시 무렵이면 하루의 피로가 몽땅 들이닥쳤다. 뒷목부터 어깨, 허리, 무릎을 지나 발목, 발가락까지 저리는데, 여기가 어딘가? 난 무얼 하고 있지? 왜 굳이 엄마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이 고생이지? 급기야 너무나도 졸린 어린 유모가 자고 싶은 유혹에 아기의 목을 조르고야 마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 <자고 싶다>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야 만다. 아이고, 이 무슨 흉측한 상상이고! 정신을 차려야지 싶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 보지만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은 땅속 깊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겨우 한두 시간 겨우 눈을 붙이고 나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던 무시무시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고통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숨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선이 시퍼렇게 부풀어 오르며 젖이 찰 때의 저릿한 느낌, 아이가 꿀떡거리며 목구멍으로 젖을 넘기는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살이 탄탄하게 오른 아이의 볼과 허벅지에 내 얼굴을 부빌 때면 나는 마치 세상 이치를 다 터득한 노파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풍선처럼 터질 듯 팽팽해진 젖가슴을 꺼내 보이며 남편을 희롱하는 것도 그때나 가능한 유희였다. 그야말로 젖가슴 전성시대였다.
하루 열두 번이 여섯 번으로 줄고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네 번, 세 번, 두 번으로 줄어들다가 드디어 아기가 젖을 찾지 않게 되었던 날. 제 임무를 완수한 뒤 잔뜩 쪼그라들고 축 처진 젖, 김혜수는 언감생심, 크기 마저 다른 짝짝이 젖을 바라보며 나는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아기와 나를 묶어주었던 탯줄이 그제야 완전히 끊어진 느낌이었다. 나 이외의 다른 생명체와 이렇게 오랫동안 시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는 일이 다시 또 있을까. 나는 벌써 이 시간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올 여름. 둘째와 함께 다시 한 번 젖 여행을 시작했다. 첫째는 워낙 이유식을 잘 먹기도 해서 의식적으로 돌까지만 젖을 먹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둘째와는 좀 더 오래오래 이 시간을 나누고 싶다.
어쨌거나 경험자라고 두 번째는 확실히 수월했다. 어찌된 일인지 처음부터 젖이 잘 돌아서 조리원에 있을 때는 초산 언니들의 부러움도 샀다. “꾸준하게 물리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요. 저도 첫째 때는 맘고생 많이 했어요. ” 모쪼록 그들 귀에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하는 식으로 재수없게만 안 들렸기를 바랄뿐이다.
24개월 첫째 아이. 동생 젖을 먹이려고 엄마가 잠시 꺼내놓은 수유패드를 잽싸게 집어가거나 아니면 카메라 렌즈 뚜껑이라도 제 가슴에 집어넣어야 만족한 얼굴을 한다. 뽀로로와 크롱 인형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며 밥을 먹여주고, 업어 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얼굴도 씻겨주고, 미끄럼틀도 태워주고, 자장가를 부르며 토닥토닥 두드려 잠도 재운다.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우린 아주 어려서부터 '엄마 되기'를 준비해 온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목욕과 기저귀 갈이를 핑계로 두 아이의 매끄럽고 보드라운 맨몸을 더듬을 때마다 발칙한 상상에 빠진다. 이 아이들이 봉긋한 젖가슴을 갖게 되는 날, 첫 생리를 하는 날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축하를 해줘야지. 그리고 속삭이리라. 네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얼마나 고귀하고 기쁜 일인지. 너희의 몸, 존재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너희를 낳고 젖을 먹이고 함께 해온 지난 몇 년은 엄마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시기였다고 말이다.
마무리는 조금 도도하고 교훈적이어도 될 것 같다. 엄마 노릇을 하다보면 내가 사서 왜 고생인가 싶게 자신이 움츠러들 때가 있었어. 그런데 삶은 참 오묘하지. 내가 비루하고 누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기쁨도 피어나더라. 햇볕에 바짝 마른 하얀 기저귀나 방충망에 힘껏 달라붙은 새끼 청개구리, 네가 싹싹 비워낸 밥그릇 같이 작고 사소한 것을 보며 엄마가 되길 참 잘했다 싶은 생각과 만나지는 거지.
내가 이러거나 말거나, 나중에 아이를 낳고 말고는, 젖을 먹이고 말고는 순전히 너희들 자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