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나는 또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천천히 떠날 준비를 하곤 한다. 참으로 오래된 태생적인 역마살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다리와도 같았던 역마살도 나이 60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느때 부터인가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것에 나 스스로도 적지않게 놀라곤 했다.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안스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더해져만 가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젊은날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방식의 '더불어 함께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죽으나 사나 한 사람의 손을 꼭 부여잡고 보폭을 맞추어가면서 미리 그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고 헤아려가면서 어떻게든 즐거운 시간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남겨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여행이란 말이야. 낯선 것을 차차 전혀 낯설지 않게 하나하나씩 바꾸어가는 과정인 것이야' 라는 모토(motto) 아래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코로나 19 사태만 번지지 않았다면 아마....... 적어도 그 사이에 두 번 이상은 해외여행을 다녀왔을 것이다. 여행 버킷 리스트는 점점 늘어만 가는데........... 코로나 19 사태는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원치 않게 먹어두었던 나이 덕분(?)에 백신 주사는 맞았는데........ 닫힌 단절의 빗장이 어서 열리기만을 기다려 볼 수 밖에.......... 아내가 오매불망 염원하고 있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방문이 무조건 1 순위가 될것이다. 파리에 머물다 지루해지면 마르세이유로 가서 코트쥐다르라는 프랑스 지중해 해안을 따라 걸어서 제노바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가는 트래킹 여행이 나에게는 로망 1 순위이지만 말이다. 아테네로 들어가 산토리니를 거쳐 터키 보드룸으로 해서 남서부 해안을 돌아보고 카파토키아에서 벌룬을 태워주고픈 마음도 순위권에 들어 있다. 6월의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인 돌로메티에서 열흘 정도 실컷 산악 트래킹을 할 계획도 순위권 안이다. 우리 부부의 간절한 로망이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과감하게 시도하지 못하는 산티아고 순례길도 항상 강력한 여행 후보권에 있다. 진정한 동유럽이랄 수 있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트래킹 여행도 가야하고, 터키남부 리키아 트래킹도 가야 하는데........ 파리 노틀담 사원의 복원과 바르셀로나 성가족 성당의 완공은 꼭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기로 약속까지 한 마당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가 우리의 두 발로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 멀지 않게....... 언젠가는 반듯이 다가올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슬퍼하거나 암울한 생각에 좌절하지는 않는다. 운명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기 전 날까지는 항상 굳건하고 당당하게 걷고있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챠밍여사와의 여행은 그 날까지 계속 될것을 잘 알고있으니까 말이다.
오늘도 내일도 내 수첩에는 새로운 버킷 리스트들이 하나 둘 늘어갈 것이니까 말이다.
'얼씨구, 이게 뭐지?'
서재 책꽃이에서 찾는 자료가 있어서 오래된 메모장들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는데 오려놓은 신문 스크랩과 함께 방바닦으로 쏟아지는 자료들 사이로 칼라 팜플렛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집어들어 펼쳐보니 텐트 살 때 나온 품질 보증서랑 설치 설명서가 아닌가? 얼핏 생각에 십년인가(?) 십이년 전인가 쯤에 벌어졌던 일이지 싶다. 대형 텐트가 있었음데도 코베아 텐트 광고를 잡지에서 보고는 무조건 구입하고 말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이상하리만치 유독 마음에 들어서 무척이나 아꼈던 것이 바로 그 코베아 브랜드의 텐트였다. 첫 시연에서 이 설치 설명서를 살펴가면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힘들게 설치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우중 캠핑에서 돌아와 강변에서 세탁과 건조를 시키면서 대형텐트를 혼자서도 너끈하게 설치할 수 있게끔 따로 혼자서 연습까지 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아꼈던 텐트이건만.......... 그나저나 '그 텐트 지금 어디 두었지?'.......... 허 참........... '지금 당장 혼자서 설치할 수 있을까?'
내 여행의 모토는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익숙하게끔 만나서 친해지기 위한 여행'을 추구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이지?' '당연히 익숙해야만 하는것이 어떻게 이렇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지?'
약간의 당혹스러움마저 느끼게끔 만드는 이 감정을 쉽게 떨쳐내지를 못하겠다.
'익숙하다 못해 친숙해야만 하는 것이 돌연 익숙하지 못하고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이것은............. ?????'
캠핑은 한때 나에게 있어서 전부였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산이며 계곡이며 들로 산으로 엄청나게 싸돌아 다녔다. 거기에다 툭하면 험지나 오지로 백 패킹(요즘은 주로 비박이라 하더라만)을 다녔다. 나의 여행 이력은 학창시절 두텁고 무거운 군용 A형 텐트를 둘러메고 치악산 월악산 꼭대기서 자고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되었었는데........
새만금 방조제 사업이 한창이던..........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선유도로 들어가 장자도에서 장군봉에 올라 바위봉우리 위에서 백 패킹을 한것이 도대체 언제였지? 그럼 마지막 캠핑이 도대체 언제였던 거야? 그 해 가장 춥고 폭설이 쏟아지던 날에 덕유산 야영장에서 겨울 캠핑을 했던것이....... 아마도 그것이 마지막 캠핑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내 기억상으로는......
허겁지겁 여행기를 찾아보니 2013년 크리스마스 시기였다는 기록이 눈에 들어 온다.
2013년 이면........... 캠핑을 등한시 한지가 어느새 8년이나 되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헐!!!
세상에 이럴수가......... 그동안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며 살았던 것이지?
장자도 장군봉 백 패킹 모습(한참이나 지난 어느 젊었던 시절에........)
덕유대 야영장에서 2013년 크리스마스에........ 겨울 캠핑을....
베란다의 다용도실을 모처럼 열어 본다.
깔판에 백패킹 텐트 2개와 해먹과 대형텐트 하나는 시야에 들어 오는데 설명서에 나오는 코베아 텐트는 보이지 않은다. 타프도, 테이블이나 의자도, 침낭이나 코펠도 보이지 않는다. 거 참 이상하다. 그후에 캠핑한 기억이 없는데......... 배낭은 뭐....... 크기별로 수북하게 쌓여 있다. 화롯대는 보이지 않는데 커다란 숯 봉지와 가스 연료도 잔뜩 쌓였다.
책상에 멍하니 앉아서 이 뜻밖의 황당한 상황에 대하여............. 수 년간의 지나간 기억세포들을 재생시켜 보는데, 성능이 구닥따리에다가 메모리 카드 용량 부족때문인지......... 그저 가물가물거릴 뿐이다.
문득, 사물보관함이 다용도실 외에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내 사무실 창고 한켠의 박스더미를 확인하려 부랴부랴 차를 몰고 달려간다. 다급하게 박스더미를 열어보니........ 그곳에 모두 있었다. 코베아 텐트며 침낭에 계절별 캠핑용 이불 보따리랑 타프와 미니 테이블까지....... 아뿔싸, 코펠은 부분적으로 녹이 슬었다. 새로 구입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제서야 잊었던 기억 테이프들이 마구 되살아 난다. 처음 이사할 때 버린것들이 제법 있었고, 다시 아파트로 이사할 때 공간적인 이유로 여기에 따로 분리해서 보관해 왔던 사실을 말이다. 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캠핑여행을 시작하는 후배를 위해 코오롱 텐트를 빌려 주었다가, 다음에 아예 가지라고 하나 선물했었고, 대현 텐트 하나는 보관상 실수로 얼룩이 져서 이사때 폐기처분 했었다. 그러고보니 낚시 가방을 통째로 폐기 쳐분해 버렸었구나....... 플라이 낚시 하나는 남겨 놓았어야만 했는데......... 코베아 가스 램프는 언제나 반갑다. 캠핑 낭만의 완성은 가스 램프지.......... ㅎㅎㅎ
8 년이나 방치해둔 캠핑한테 미안해서 부랴부랴 나들이 여행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나와 챠밍여사의 일정을 살피고 스케줄 조정을 거쳐서 가급적 가장 빠른 시간에 캠핑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장마철에 접어든 시기여서 작업 일정과 날씨 사이에 조율이 만만치가 않다. 우격 다짐으로 날짜를 정하고 유로 2.000 예선 경기가 모두 끝나는 수요일 아침에 우리는 출발했다. 여행에서 돌아 온 다음날 새벽에 축구 16강 경기가 재개되니까....... 날씨야 어찌되었건 일단 날짜는 기가막히게 잘 선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경북 봉화)로 잡았다.
지난날 태백이나 정선. 영주. 안동으로는 여러번 여행을 다녔으면서도 그 한복판이자 강원도와 경북의 경계인 봉화 여행은 한 번도 제대로 다녀 본 기억이 없는데서 봉화를 선택했다. 청량산은 여러번 다녔어도 청옥산은 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청옥산 자연휴양림 캠핑장은 마니아들에게 겨울 캠핑의 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않았던가.
챠밍여사는 국도로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직업상의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서둘러 씽씽 달릴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고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커피에 주점부리 정도만 있으면 조수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주변 정취에 한껏 취하고, 흘러나오는 분위기 짱나는 음악에 또 취해서 흥얼거리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모처럼의 나들이 여행을 만끽하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물론 내가 소개하고 녹음해준 음악이지만........ Goran Karan의 (stay with me)를 시작으로 제시카 심슨. 그리스 디 버그. 스카이 락. 스팅이 줄줄이 불려 나오기 시작한다.
국도를 타고 살미를 지나 송계 다리를 건너고 수산을 지나 단양에 접어든다.
영주를 지나 봉화로 가자면 중앙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챠밍 여사는 오로지 국도를 요청한다. 꾸불꾸불 옛 죽령 고갯길 구도로를 올라간다. 죽령 마루에 올라서니 옛 휴계소 자리에 조경 공사가 한창이다. 옛날 생각에 잠시 머물다 가려고 차에서 내리는데 툭 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않고 고갯마루를 한참이나 걸어내려갔다가 되돌아 올라 온다. 도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외진 산마루에도 많은 변화가 느껴진다.
한 때는 이곳을 지나치려면 오로지 꾸불꾸불 여기길 밖에 없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나름 휴식을 취한 후에 발걸음을 향한 곳은 (부석사) 이다.
이번이 몇 번째 부석사 방문인지는 헤어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참으로 오랫만의 방문이라는 사실이다. 차량의 내비게이션이 이끌어주는 대로 가는 길이지만, 분명하게 사뭇 달라져 있는 주변의 풍광들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부석사는 고즈넉한 경관만큼이나 아주 운치있고, 거기에다가 높은곳에서 사방으로 내려다 보이는 주변 풍경이 아주 빼어난 곳으로 기억된다.
(단양 여행) 이나 (소백산 여행)을 검색해 보면 항상 (부석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하는 부석사에는 반듯이 (영주 부석사) 라는 부제가 따라 붙는다. 단양은 충북에 속하고 영주는 경북에 속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적지않은 사람들이 아예 (소백산 부석사)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이런 의아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부석사 경내를 향해 은행나무 숲길을 오르다보면 만나게되는 일주문에는 분명하게 (태백산 부석사) 라고 적혀있으니 말이다. 부석사가 놓인 위치에서 올려다 보면 분명 소백산 자락이 보인다. 그러다보니 누군가가 (소백산 부석사)라고 한다고 해서 별반 무리가 될것 같지는 않은데.........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태백산을 떡하니 이름에 붙여놓은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주소상으로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 자락에 있는 사찰임이 분명하니 차라리 봉황산 부석사(鳳凰山 浮石寺) 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부석사는 경북 의성 등운산 자락에 자리잡고있는 고운사의 말사로서 두 사찰 모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로 알려져 있다. 부석사가 고운사(騰雲山 孤雲寺)의 말사인것은 분명하나 창건 연대로 보자면 부석사(676년) 이고, 고운사(681년)인것을 보면 조금의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부석사가 화엄사상의 종찰로서 불법을 수련하는 도량에 머물렀다면, 고운사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즐겨찾던 지식의 요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최치원(崔致遠)이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찾아든 곳이 바로 고운사였다. 의상대사께서 창건할 당시의 사찰 이름은 '높은 구름'의 의미를 담은 고운사(高雲寺) 였던것이, 최치원이 이곳에 머물면서 그의 자(字)를 따서 '고독한 구름'을 뜻하는 고운사(孤雲寺) 바뀌게 되었다고 하니. 그 사연 또한 멋스럽고 옛스러워 정겹다.
당시를 살펴보자면, 의상 스님이 청운의 꿈을 품고 당나라에 유학하던 시절이었다. 현지에서 곧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스님은 고국의 안위를 걱정하여 서둘러 귀국을 하게 된다.(670년) 신라의 조정에 당나라의 침공 사실을 알린 스님은 홀연히 서라벌에서 사라졌다. 동해안의 어느곳에 관음보살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접한 의상 스님은 한걸음에 달려가 양양의 해안동굴에 기거하면서 이레동안 기도를 올린끝에 관음보살을 만나게 되었고(671년), 관음보살의 말씀처럼 그 자리에 사찰을 짓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낙산사 이다.
스님은 낙산사를 창건하면서 그곳에 5년을 머물다가 다시 길을 나섰는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불사를 일으키려 하던중에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영주땅 봉황산 자락이었다. 부석사를 창건한 스님은 이곳에서 40일 동안 법회를 열어 화엄사상을 설법하였다. 이땅에 화엄종이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게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의상 스님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명산대찰 치고 창건일화에 의상대사(義湘大師)나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설화나 전설이 서려있지 않은곳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무수히 많은 사찰의 창건에 일일이 관여하였다면 아마도 족히 한 오백살 씩은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삼국시대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난 직후였으니 가히 한반도내에 제대로 다리나 놓였을리가 없고 길이 만들어 지지도 않았을 시대였으리라. 스님의 신분으로 천리마를 타고 달릴 수도 없었겠고, 길목마다 주막이나 묵어갈 숙소도 없었을 시대였다면........ 사람이 한평생 돌아나녀보았자 한반도를 한바퀴나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을까? 먼 훗날 김정호 선생께서 한반도를 돌아볼 때만 해도 인구가 늘어나고 사방에 마을과 길이 놓이고 난 다음이었을테니........ 혹, 대부분이 뻥???
의상과 원효는 같은 구도자의 길을 걷는 동지이자 학우였지만, 동시에 희대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함께 당나라로 떠났을때 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동지이자 학우였지만, 두 사람이 당주의 경계지역에 도착하여 이른바 해골바가지 사건을 계기로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계속하고 원효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면서부터 두 사람의 길은 전혀 다르게 갈라지고 만다.
불사를 일으키려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의상은 영주땅 봉황산 자락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중생구도에 나섰다. 그러자 원효도 인근의 청량산 자락에 청량사(淸凉寺)라는 청정도량을 세웠으며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전해온다. 이처럼 동시대를 살아간 두 스님이야 말로 한국 불교 역사의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것이다.
은행나무 숲길을 올라가면 우선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나 이제부터는 사찰의 경내에 속하니 옷매무새도 고치고 마음을 경건히 하라는 암시를 넌지시 건네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돌기둥만 남아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옆으로 비켜나 서있다. 돌기둥의 사이에 커다란 나무기둥(당간)을 끼워서 세우고 동기둥 사이에 구멍으로 걸쇠(쐐기)를 끼워서 세우는 장치다. 높다란 당간 위에는 주로 깃발 형태의 표시로 절간의 영역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행사등을 멀리까지 알리고자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누군가의 바램과 소망을 담은 작은 돌무더기로 수북한 비석을 지나면 가파른 돌계단 위로 천왕문(天王門)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지극히 보편적인 가람의 배치 형태라 볼 수 있겠지만, 이제까지 나타난 사찰에 이르는 은행나무 언덕 숲길이나 일주문을 지나 이제사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천왕문을 보더라고 이곳의 부석사가 어떤 정도의 사찰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람이란 여러 승려들이 불상을 모시고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로서 사찰 또는 절이라고도 부른다.
처음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시기에는, 쉽게 경주에서 볼 수 있듯이 사찰이 평지에, 그리고 사람들의 실생활 터전에 아주 가깝게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실라 말기에 들어서 선종(禪宗)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자, 선종의 가르침대로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것을 중요시 하다보니 점차 세속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으로 사찰들이 옮겨가기 시작하였으며, 건축적으로도 그에 따른 새로운 가람배치가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종 사상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토속적인 민간신앙들을 흡수하게 되었고, 새로운 다양한 불교사상들이 유입되면서 한층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교중심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점차 탄압과 약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자 뿔뿔히 흩어지거나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아울러 그런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가람의 배치 형태들도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왕문(天王門)으로 오르는 돌계단 앞에 서면 '이제야 다시 부석사의 품에 안기는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저절로 크게 쉼호흡을 하면서 내자신을 추스르게 된다. 그리고는 계단의 중간쯤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방금 전까지 내가 지나온 길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곤 한다. 늘 이쯤에서 갖게되는 하나의 의식 같은것이라고 해야할까?
진정한 부석사는 바로 여기 이 천왕문의 첫번째 계단에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굳이 가람의 배치 형태를 따지지 않는다해도 부석사는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가 있다.
주차장이 있는 부석리에서 시작하여 언덕이 시작되는 산자락의 초입 매표소를 지나고, (태백산 부석사) 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일주문을 지나 당간 지주를 지나면서 서서히 천왕문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구간을 부석사의 첫번째 구역이라 해야겠다. 방금 지나 온 일주문이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고 방문자로 하여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음가짐을 추스르며 경건해지기를 알려주었음에도 나는 이 구간을 '절반의 정토(淨土) 절반의 세속(世俗)' 이라 생각한다. 일주문 이라는 사찰의 경계를 지났으니 분명 불교의 영역이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 아래자락에서 올라오는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볼때가 아니겠는가? 거꾸로..... 스님이나 불자였던 아니면 여행객이었던 부석사의 경내에서 밖을 향해 내려서다가 천왕문 아래 이쯤에 섰다고 치자. 저만치 아래 일주문을 통해 이미 바깥세상(세속)이 보이기 시작한다. 밖을 향해 길을 내려가는 사람에게 이곳은 이미 절대적인 불교의 영역만은 아닐것이다. 하여 제법 거리가 있는 이 공간을 나는 사바세계(세속)와 불국정토(불교) 사이를 연결해주는 가교이자 여과의 의미를 담고있는 매개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게 되면 그때부터 진정으로 화엄도량인 부석사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 걸어 올라온 첫번째 구역과는 주변의 풍광에서부터 모든것이 차원이 달라보이게 된다. 천왕문에 이르게 만들어주는 돌계단에서부터 양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잘다듬어진 엄청나게 공을들인 장인들의 노련한 솜씨가 엿보이는 인공적인 조형미가 주변의 자연환경과 너무도 멋들어지게 잘 들이맞는다.
가파른 언덕에 가람을 들어앉히다 보니 대지 조성을 위해 거대한 석축을 쌓는일은 필연적이었으리라. 큰 비에도 쓸려나가거나 허물어지지 않는 튼튼한 석벽을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거대한 석축을 쌓았다 치더라고 가파른 경사도 때문에 그 위에 확보할 수 있는 평지는 결코 여유로울 수 있는 정도가 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시 그 겨우만든 평지가 끝나는 지점에 또 새로운 석축을 쌓아 부족하나마 평지를 만들어 얻고, 그 위에 또 석축을 쌓아 평지를 만들어 얻으면서 사찰의 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윗쪽으로 만들어 올라갔다. 이 구역의 모든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인공적으로 사람의 손길에서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노력이 멈추지 않았던 흔적이 사방에 역력하다. 이곳이야말로 부석사의 진정한 본체라 하겠다. 가람의 정통성에 입각한 엄격한 체계와 자연과의 멋들어진 한바탕 조화로움의 질서 위에다 가장 높은곳에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모셔 놓은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이 절로 터져나올 뿐이다.
천왕문의 지나면 스님들이 요사채로 쓰고있는 선열당(禪悅堂)이 있고, 강원을 하는 응향각(凝香閣)이 후편의 산자락에 기대어 서있다. 자인당과 응진전이 들어서 있으며, 안쪽 깊숙한 곳에 참으로 멋들어진 범종루(梵鐘樓)가 있다. 흡사 안양루를 본 떠 만든것 같은 범종루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품위있고 멋있는 종각이 또 어디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건물의 정면은 팔작지붕이며 흐면은 맞배지붕이다. 안쪽으로는 북과 목어가 걸려있은데, 정작 함께 있어야한 범종은 무게때문이었는지 경내의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롭게 종각 건물을 만들어 설치해 놓았다. 뒷쪽의 이층 바닦 부분을 한 칸 뚫어서 계단을 설치해 놓았는데, 이 계단을 오르면 이제까지와 다른 또 하나의 선계가 펼쳐진다. 안양루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배치와 구조를 선택한 선인들의 지혜에 그저 놀라움에 감탄을 연발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은 '안양루야 말로 부석사의 백미' 라 하겠다. 절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무량수전을 꼽지만,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오로지 안양루만이 가득 들어찬다.
천왕문에서 시작하여 본채(요사채)를 지나고, 범종루를 지나 안양루(安養樓)에 올라 등 뒤로 석탑과 무량수전을 넌지시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태백산맥의 줄기를 바라다보면.........이곳이야 말로 극락세계의 초입이면서도 불국정토의 산마루에 이르렀음이 아니겠는가?
'모두 이루어졌음이라. 돌아와야만 하는 위대한 대자연의 품으로 마침내 돌아온것이라..........'
무량수전에서 아미타여래불상을 대한다.
법당의 한 켠으로 물러서 돌아앉은 아미타여래상 앞에서 차분하게 심신을 잘 추스른 후에 벗어놓았던 신을 다시 신고는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럽게 나부끼고있는 산길을 올라간다. 이제부터는 부석사의 세번째 구역이 되는 것이다. 조사당과 응진전이 그곳에 있다. 이 짧은 산길을 나는 순례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 극락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또 더하여 무엇하랴.........'
일찌기 유흥준 선생님께서 명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편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부석사(浮石寺)를 꼽으시고는 (사무치는 마음으로 가고 또 가고..... 영풍 부석사) 라는 글을 써놓으셨다. 어떻게 그보다 잘 부석사를 설명할 수가 있을까? 나 역시도 부석사를 두 번쯤 다녀본 상황에서 답사기를 읽어보고는 크게 감동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 부석사에 대한 이야기는 유흥준 선생님의 저서에 맞기고......... 천왕문을 지나 본격적인 부석사 경내로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한다.
" 몸을 바람난간에 의지하니 무한강산(無限江山)이 발 아래 다투어 달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니 넓고 넓은 건곤(乾坤)이 가슴속으로 거두어들어오니 가람의 승경(勝景)이 이와 같음은 없더라."
안양루(安養樓)에 내걸려 있는 중수기에 적혀 있는 글귀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안양루에 올라 이토록 빼어난 경관에 취해 시를 읊고 현판에 새겨 매달아 놓았다.
시를 읊을 재주는 없고, 이대로 장쾌한 대자연을 다시 놓아두고 세속으로 돌아가기도 못내 아쉽고 하여 이곳저곳을 오가면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 본다. 그럼에도 기억과 가슴에 고이 새겨 간직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또 한 번 유흥준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언제든 되뇌이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어느정도 안도감이 생겨난다.
답사기에는 논제명찰(論諸名刹) 이라는 제목하에 유흥준 선생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남한땅의 5군데 사찰에 대해 적어놓으신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부석사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으며, 이를 통해서 왜 부석사가 그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찰인지를 대신 표현해 보고자 한다.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 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에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의 무위사(無爲寺) 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안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의 내소사(來蘇寺) 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한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 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쫏는 듯한 절은 영풍 부석사(浮石寺) 이다. "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라고 유흥준 선생님은 꼽았다. 나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유선생님의 모친께서는 운문사를 꼽으셨다고 하는데, 우리집 아내분께서는 인근의 청량사를 최고의 절집으로 꼽는다.
아무때고 이 환란(코로나 19)이 가라앉고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시간을 내어서 논제명찰에 거론되는 절집들을 하나하나씩 다시 돌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또한 우리의 여행 버킷리스트에 새롭게 올려질 것이다.
우리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주변의 풍광이 어딘가 모르게 범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음을 여러곳에서 수시로 느끼게 된다. 쭉 쪽 곧게 뻗었는가 하면 흐드러지듯 붉은 노송들이 강변 바위벼랑 위에나 산자락에 걸치어 있듯이 절묘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한껏 고즈넋한 정취를 한없이 자아내고 있는 풍경들을 말함이다. 골짜기를 휘감아 돌듯 힘찬 물줄기나 아니면 이끼계곡 사이로 달디 단 명경수가 끊임없이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흘러내린다.
기암 절벽 위로 낮은 구름이라도 걸치게되면........ 무릉도원이 그려져 있는 한 폭의 산수화가 바로 그곳이 된다.
천하의 절경이 눈 앞에 가득 펼쳐져있는 그곳을 사람들은 명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입에서 절로 '명당' 이라고 터져나올만한 절경이 펼쳐져있는 곳에는 반듯이 절집이 이미 들어서 있다. 이름난 절집이 들어 서 있는 곳은 무조건........ 일단 명당 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겠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명당의 70% 정도는 절터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중에서 20% 정도는 민간의 무덤(묘지)이 아닐까? 사람이 접근하기도 힘든 높고 가파른 산등성이, 경치가 유독 빼어난 골짜기의 바위벼랑 위에, 너른 들판이 한가득 시야에 들어오는 산자락 이나 거대한 강물이 물굽이를 휘감아 도는 언덕빼기에........ '이거 예사로운 경치가 결코 아닌데' 하면 어김없이 주변에 이미 묘자리가 들어서 있다. 놀랍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하고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을까? 어떻게 여기까지 운구를 하여 묘지를 썼을까?
'천기가 발복하여 후대에 영향을 미친다는데' 까마득한 산 꼭대기 뿐이겠는가? 강물 속이나 구름 위에인들 묘지를 못쓸 우리네 조상님들이 결코 아닌 까닭이다.
나머지 10% 정도가 왕능이나 왕궁이나....... 소위 당대에 제일 잘나간다는 풍수가나 지관을 모셔다가 이것저것 죄다 따져서 아주 특별히 선택하는 길지일 것이다. 왜 이들의 비중을 오히려 적게 잡느냐 하면.......... 당대의 내노라 하는 풍수가들이 죄 다 다녀가면서도 길지가 못된다고 판별한 장소에, 어떤 사람이 무덤을 쓴 후에 그 후손이 크게 대업을 이루거나 성공을 하게되면, 그제서야 이미 다녀갔던 풍수가들이 다시 몰려가 죄 다 '천하의 명당 중의 명당' 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꼬락서니들을 여러번 보아왔기 때문이다.
명당이란 유명한 술사에게 큰 돈을 댓가로 지불해야만 얻어지는 곳이 절대 아니라 생각한다. 간절함을 가진 절실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현실이나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때....... 하늘도 감복하여 평범한 땅이 천하의 길지로 형질변경을 하는것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정사 뿐만이 아니라 민담을 포함해서 역사를 두루두루 살펴보아도...... 그넘의 명당이라는 것에서 발생한 발복이 존재 유무를 떠나서 영원하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발복의 유효기간 또한 어디에도 기록된 흔적이 없다. 명당 중의 명당만을 고르고 또 고른 여러 왕조와 권력자들이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고스란히 입증하고 있다. 그렇게 권력과 부의 최고 정점을 찍다가 후대에 패가망신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명당의 후예들 보다는, 그저 고만고만하게 밥 굶지않고 남의 집에 쌀이나 돈 꾸러 가지 않고 재난이나 질병으로 조실부모 하거나 단명하지 않으면서 대대손손 그저그런 삶을 영위해 가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선에서의 삶을 이어가는 가문의 묘터들이 오히려 명당이 아니겠는가?
"풍수란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말로, 땅에는 생기가 흐르고 있는데 이 생기를 받아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법술이 바로 풍수다. 풍수를 처음 체계화 시킨 곳이 중국이라 해서 풍수가 중국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이 땅에도 자생 풍수가 이미 있었음이요, 특히 명당의 모양을 중시하는 형국론은 거의 독보적이라 하겠다.
풍수의 목적은 크게 둘로 나뉘어 지는데 그 첫째가 산 자의 거처인 주택(陽基)을 좋은 땅(吉地)에 지어서 행운을 구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죽의 조상의 묘(陰宅)를 좋은 땅에 잡아 자손의 번영을 꾀하려는 것이니라. 곧 추길피흉(追吉避凶) 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환경의 여향은 물론 땅의 기운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날 짐승도 아무 가지에나 둥지를 틀지 않는다. 바람을 보고 주변을 보고 둥지를 튼다. 산 짐승도 산세를 보고 생리에 맞는 입지조건을 보고 굴을 파느니,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경우에야 일러 무엇하랴.
생기가 오는것과 그 기운이 그치는 곳은 물의 움직임과 함께 한다. 생기가 모이는 곳은 또한 바람의 흩어짐이 없어야 한다. 때문에 물을 얻으려면 마땅히 바람이 없는 곳, 장풍이 잘 된 곳을 골라야 한다. 풍수에서 좋은 땅을 고를 때는 대체로 산과 물 그리고 방위 이렇게 세 가지를 보면 된다.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점혈법(占穴法)이 그것에 따른 술법인데 음양오행을 모르고서는 접근이 어렵다.
" 땅은 말을 한다. 다만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지나칠 뿐이다. 풍수가 어떻게 명당을 찾아내느냐? 풍수는 산과 바람과 물을 애인처럼 사랑해야 하느니,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술사(術士)에 그치고 만다. "
소설가 김종록의 장편소설 <풍수>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발췌를 해 보았다.
스승 태을은 득량을 데리고 호숫가에 앉아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가르침을 건넨다. '지혜로운 자만이 물의 마음을 읽는다. 이곳에 자주 와서 물의 마음을 읽을 일이다' 라고 말이다.
무량수전 앞마당에 서서 얀양루의 누각을 통해 낮게 구름이 드리운 소백산맥의 산자락을 건네다 보고 있으려니 문득 스승 태을의 말이 귓전을 스친다. '지혜로운 자만이 대자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니........... '
분명 앞으로도 내가 이곳 부석사엘 다시 찾아와야 하는 이유도 분명 거기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애초 절간은 도심에서 사람들 생활 근처에 머물렀었다. 하지만 선종사상이 퍼지게 되면서 정적이면서도 신성해야하는 수행 공간의 필요성으로 인해 점차 깊은 산속으로 청정 도량을 만들어 옮겨가기 시작했다. 후대에 절대왕권이나 세도가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유교사상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절간은 더욱 더 깊은 산속으로 도망치듯 옮겨가야만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유들로 절이 산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듯 옮겨가가 시작하면서 절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또한 이런 이유로 해서 전국에 명당이란 명당을 대부분 선점하게 되는 행운까지 생겨났다.
대자연의 기운(풍수)이 핍박받는 대상으로 전락한 불교를 위해서 제대로 발복 했음일까?
태고적 신비가 고스란히 잠겨있는 산봉우리에 연꽃처럼 활짝 피어 난 절의 고즈넋한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발길이 접근하기조차 힘든 험준한 바위벼랑에 애초부터 산자락의 일부였던 듯 보이는 석축을 흘려 쌓고 그 위에 절간을 지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던 산비탈이 어느 날인가 시원한 조망이 일품인 천하의 명당으로 둔갑한 것이다. 산세에 따라 각양각색의 특징을 갖춘 절간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아름다운 자태를 체득해 버린 것이다. 주어진 자연의 조건과 어떻게든 조화를 이루려 하였으며 그 안에 종교적 청정도량으로서의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은 어느곳이 되었든 세속의 발걸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저마다 독특한 진입 공간의 구성을 통하여 절과 세속의 간격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게 하였고, 그 사이를 소박하지만 나름의 멋스러운 의미들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숲길 진입로를 통하여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오고 이어서 천왕문과 불이문이 나온다. 물론 모두 다 있는 사찰도 있고 하나만 있는 사찰도 있다. 저마다 다른 이 특별한 공간을 통해서 속세에서 찾아 온 방문객은 마음을 씻고 나서야 구도자의 도량인 산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걷다보면 어느새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부처의 도량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피안의 세계에 도착한 것이다.
부석사를 나오려니 무언가가 뒤에서 잡아당기기 라도 하는것처럼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계절 하나 빠트리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여러번 찾아왔던 부석사였지만 단연 이번 여행이 그 중 압권이라 할만했다. 이제서야 부석사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정도는 해소된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못다한 부석사 이야길랑은 예전의 앞 선 여행기에서 확인해보면 될 것같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풍기에 오면 꼭 들러가는 음식점에 들렸다. 갈비탕 전문점이다. 처음 개업 당시부터 드나들었는데 코로나 19 때문인지 세월 때문인지 약간은 당혹스러울만큼 많은것이 변해 있었다.
음식점 주인도 바뀐것 같고....... 뭔지 모르게 맛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예전의 그 맛이 아니다.
내 입맛이 변한것인가? 다음엔 다른 집에서 한 번 먹어봐야 하겠다. 그땐 알게 되겠지........
다음 목적지인 청옥산 휴양림 야영장으로 향해서 텐트를 치는것이 가장 급선무이겠지만.......
어느때 부터인가 대부분의 휴양림이나 캠핑장의 사용 규정들이 바뀌어 버렸다. 내가 한참 캠핑을 다녔을 때는 거의 아무때나 체크 인이 가능했었다. 아침에 찾아가서 아직 이용자가 남아있으면 옆에 짐을 부려놓고 어디를 다녀와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오후 3시 체크 인 오전 11시 체크 아웃이 규정으로 되어버렸다. 물론 당연하다 싶을만큼 좋아진 규정이겠지만, 오랜 경험자에겐 상당히 불편한 규제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변해 버린것을.......
야영장 체크 인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 가량이 남았고 하늘엔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다.
잠시 고심을 하고 있는 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청옥산으로 가는 길목에 (닭실마을)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봉화 닭실마을과 충재고택(冲齋古宅).
봉화 닭실마을은 17대에 걸쳐 500년 이상을 대물림해서 내려오고 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집성촌(集姓村) 이다. 마을 주민의 절대다수가 안동 권씨이고, 나머지래 봐야 그들 또한 처가나 외가로 연결되는 피붙이들이다.
나즈막한 야산에 기대어 남향으로 들어앉은 아담한 마을은 잘 정돈된 논두렁 위로 여러채의 기와집들이 열을 맞추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양새로 먀냥 한가롭게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을이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한 시골 마을의 하나쯤으로 보는것은 크게 실례를 범하는 일 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곳이 바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불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풍수의 대가들은 하나같이 이 마을을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랄 수 있는 마을의 가장 안쪽이자 윗쪽에 충재고택이 번듯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금닭이 품고 있는 알이 놓여 있는 자리쯤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것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 라고 할 수 있는 충재 선생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터를 잡고 마을이 생겨난 이후로 그 누구도 여기 충재고택의 안쪽으로는 여하간 집을 지을 수 없는 원칙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
택리지에서 이중환 선생은 충재고택을 삼남지방을 통털어 4대 길지 중의 한 곳이라고 꼽았다.
닭실마을(현재는 달실마을이라 부른다)은 입향조(入鄕祖)라고 할 수 있는 충재(冲齋) 권벌(權橃)이 나이 마흔 둘에 낙향하여 집을 지음으로써 생겨난 마을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권벌은 밀양 부사, 형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했고, 나이 일흔에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삭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 라는 당대의 최고 권문세가에 걸맞게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 가운데의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크고 작은 사랑채가 놓여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종가집 치고는 또 나름으로 검소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하지만, 역시나 대문을 들어서면 권문세가의 안채다운 위용을 갖춘 머들어진 기와집이 여행자의 발길을 맞이한다.
솟을 대문 앞의 너른 마당으로 인하여 독립된 가옥으로만 보이지만, 실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너른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는 후원에 속하는 독서당과 청암정(靑巖亭) 까지가 충재고택의 한 울타리 안이었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겠다. 어떤이는 청암정이야말로 한 집안의 울타리 안에 있는 정자로서는 가히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기사를 본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기 이 청암정 때문에 봉화를 찾게되고 닭실 마을까지 오게된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자 누마루에 오르면 탁 트인 들판이 보이고 산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보인다.(지금은 관리 보존을 위해 돌다리를 건너 정자에 접근을 통제하고 있지만)
청암정은 담장 밖의 물길을 끌어들여서 정자 주위로 인공연못을 만들고, 그 연못에 휘감겨 있는 거대한 거북바위 위에 한폭의 산수화에나 나올법한 정자를 올려 놓았다. 마치 거북이가 헤엄치는 연못 위에 단층 누각을 세우고 난간과 함께 누마루를 달았다. 여행자가 잠시 쉬면서 땀을 훔치고 가쁜 숨을 고르기가 쉽상이겠지만, 실은 옛 선비의 행색을 갖추고 서책을 읽기에 이만한데가 결코 흔치 않을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두리번 거리던 시선이 누각에서 멈추어 진다.
누가 이 정자를 세웠고 무엇을 하던 곳이 무엇이 그리 대수겠는가?
떠돌이 여행자가 지금 누마루를 차지하고 누웠으니 흐르던 한여름의 시간도 잠시 멈춘것만 같고 이 순간이 영원할것만 같이 느껴지지........ 오호라. 적어도 이순간만은 내가 청암정의 주인이 아니겠는냐?
자고로 선비란 학문에 정진하고, 깨우침을 통하여 스스로를 완성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군왕에게 충성하며 만백성을 고루 보살피는 것이 근본이며, 더하여 때가되면 낙향하여 후학을 가리키는것이 최고의 더목이라고 했다. 하지만 풍류를 즐길 줄을 모른다면 어찌 진정한 선비라 할 수 있겠는가?
정자란 바로 그런것의 한 방편으로 생겨났고 발전해다고 할 수 있겠으며, 청암정에 올라보니 정녕 '선비짓의 호사' 라는것이 어떤것인지 가히 짐작이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청암정의 주변으로는 빼곡하게 울타리를 친것처럼 수목이 울창하여 정자의 누가가에서는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지만, 울타리 밖에선 여간해서 안쪽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권벌은 이곳으로 낙향하여 먼저 집을 짓고 마을을 세운 후에 여기에 청암정을 세운다. 낙향한지 8년이 되던 1528년의 일이다. 닭실 마을에서 권벌의 생활은 유유자적 그 자체였다. 그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청암정을 짓고 5년을 더 권벌은 이곳에서 낙향한 선비로서 선비다운 선비생활에 한껏 취하게 된다. 마침내 파직된지 13년이 자나 그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한 번 벼슬길에 나서서 권세의 달콤한 열매를 맛본 사내는 설혹 목숨을 걸지라도 그 유혹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속성때문이었으리라. 아마도 정계복귀하는 그로서도 앞날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당시 조정 안팍의 상황이 어디 보편타당한 시대였던가?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다. 뒤이어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체포되어 삭주로 유배되었으며,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파직과 유배로 점철된 시간마다......... 닭실 마을에서의 유유자적했던 시간을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워 했을까?
그넘의 벼슬이 무엇이라고........ 권세라는 것이 한여름 밤의 꿈만도 못하다는 것을 조금만 일찍 깨달았었다면........ 봉화당 닭실 마을의 뼈대 있는 안동 권씨 가문이라는 고귀한 신분의 낙향한 선비로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을........
청암정을 나서면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충재 박물관이 나타난다.
전시관에는 충재 선생의 관리 사령장인 교지를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지극히 작은 전시 규모에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여전히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마음에 인근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고 들었던 석천정사(石泉亭舍)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래서 비를 맞아가면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석천정사로 가는 안내 표지판을 찾아보았는데...... 아뿔싸, 어디에도 그런 표지판은 보이지 않은다. 할 수 없이 박물관으로 되돌아가 관리하시는 분에게 여쭈어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여성분께서 뜻밖으로 너무도 친절하셔서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한길까지 나오셔서 직접 일일히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해 주신다. 석천정사 입구까지 차량이 진입할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한동안 주변 정리 공사가 한창이어서 차량통행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고 배려 가득한 안내를 해주셨다.
설명대로 차를 끌고 하천변 소로를 들어갔는데, 한참을 가다보니 가지치기를 한 목재더미와 중장비 바퀴자국이 너절하게 드러났다. 하여 공터 한 켠에 차를 주차시키고 하늘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오락가락하는 빗줄기 사이로 숲속길을 따라 걸어들어 갔다. 개천엔 이 날씨에도 천렵삼아 올뱅이(고동)을 잡고 있는 가족들이 보인다.
숲을 빠져나와서 산자락을 돌아드니......... 또 한 번 입이 딱 벌어지는 멋들어진 풍경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도 안동 권씨 가문의 세도가 은근하게 엿보인다.
마침내 석천정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다음 이야기에서 마저 석천정사를 시작으로 (봉화 여행)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