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일 (화) 촬영.
전시를 열며...
영월 창령사 오백나한은 이미 오래전 폐사된 절터에서 발굴된 까닭에 종교적, 역사적 배경도 흐릿하지만
관람객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존재입니다.
그 질박하고 친근한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연상되기 때문 아닐까요.
이번 특별전시는 창령사 오백나한이 홀로 주인공입니다.
여러 전문가와 작가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시각으로 오백나한을 바라보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 냅니다.
단지 신앙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마치 우리 주변에 대한 일상을 이야기하듯 전시를 풀어나갑니다.
꾸밈없이 수수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는 오백나한,
때론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고, 때론 깊은 사색을 끌어내기도 하는 그 신묘한 힘을 함께 느껴보고자 합니다
혹시 당신의 마음을 닮은 나한을 만난다면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진솔한 이야기를 건네 보시기를...
춘천박물관. (이 곳에 수록된 사진들은 클릭하면 모두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이 열리고 있는 2층 전시실로 올라 갑니다.
전시장 입구에 "현대 삶속의 나한"이란 주제의 현대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상 바로 보기 / 최중갑 / 높이 62cm / 2002,문경돌
머릿속에 새겨진 톱니바퀴와 팔각 볼트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현대 인간상을 표현했다.
머리는 자그마하게 묘사하여 뇌, 즉 사고하는 정신이 물질의 지배를 당했음을 말했다.
공동체의 어르신을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했던 위엄과 체면의 수염은 이제 추한 골칫덩이 매듭으로 변해간다
돌 위에 새겨진 염원 / 이형재 / 종이에 엷은색 / 2017.
이 땅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다. 산이며 바위며... 바위에 기원의 의미로 새긴 미륵, 신장, 보살, 마애불은
오랜 풍화의 시간을 지나 바위의 본 모습과 기원의 염원은 둘이 아닌 게 된다.
어느 시절 염원을 담아 정성으로 새겨진 조상(彫像)이
염원과 기도를 안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풍화로 돌이 되어가는 경계에 있는 그 순간에 눈길이 닿았다.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시간의 마모에 의해서 모습이 지워지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유로운 회귀인 것이다.
불음佛音 / 최영식 / 종이에 엷은색 / 100 * 50cm / 2018.
너는 누구를 닮으려는가? 국립춘천박물관의 나한상들은 돌아서는 내게 언제나 그렇게 묻는다.
근대 만공선사滿空禪師는 "백초시불모白草是佛母" 란 선서禪書를 남겼다.
민초, 즉 백성이 부처의 어미라는 의미겠다.
민초를 닮은 창령사 터 나한을 보면 팔만대장경의 설법이 그 표정에 다 들어있다.
만언萬言이 필요치 않다.
저 무언의 표정이 주는 자비의 설법이야말로 큰 울림으로 내게 오지 않는가.
내 이웃의 온갖 모습을 다 닮은 형상으로
모든 것을 베풀고 나누며 희생해 중생을 구제하는 행이 거룩하지 않은가,
풍우설상風雨雪霜,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의 표상은 덤이라 할 것이다.
강원의 미소 / 홍석창 / 조개껍질 위에 아크릴 / 2018.
강원도 영월 남면 창원리 창령사 터 오백나한상. 친근하고 소박하며, 꾸밈없고 천진한 강원인의 모습이다.
불상 광배와 같아서 선택한 조개껍질과
그 위에 오색 채색 선이 매개가 되어 천년의 나한상에 깃든 강원의 정체성을 오늘에 되살려보고자 했다.
강원의 미소, 영월 창령사 나한상 / 홍석창 / 옥양사에 엷은 색 / 2016.
전시장 입구입니다. 입구에는 훼불된 나한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였고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정책적으로 억누름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불교문화재가 물리적인 손상을 입게 되는데, 이를 통틀어 "훼불"이라고 합니다.
창령사 나한상도 이 시기에 훼불되어 300여 점의 나한상 가운데 64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서진 상태로
발굴되었습니다.
창령사 나한상은 영월 주민 김병호 씨가 영월 남면 창원리에서 나한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201년과 2002년에 발굴하여 중국 송나라 휘종 숭령 연간(1102~1106)에 주조된 숭령중보(崇寧重寶)와
고려청자 등과 함께 300여 점의 나한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로 미루어
창령사가 고려 12세기 무렵 세워졌던 사찰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령사는 발굴 자료와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한상을 만든 석재.
영월은 석회암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영월에 동굴과 시멘트 공장이 많은 것도 모두 석회암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령사 오백나한상을 만든 석재는 근처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화강암입니다.
석회암은 결 때문에 조각이 어렵고 습기에도 약해 나한상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화강암을 구했을 것입니다.
나한상의 재질을 조사한 결과 창령사와 직선거리로 약 10km 가량 떨어진 제천 송악산 인근이 가장 유력한
석재 산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송악산 화강암과 이 화강암으로 만든 나한)
머리가 잘렸던 훼불 나한상을 복원해 놓은 모습.
나한은 부처나 보살상과 같은 성상聖像처럼 번쩍이는 금으로 장식되지도,
화려한 광배를 이고 있지도 않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신의 형상에 비하면 세속적 영역에 속하지만,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인간으로서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머물며
나와 실은 다르지 않은 높이에 있는 오백나한이기에 누구나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아주 살며시 표정을 짓는 눈과 코, 입에서 배어나오는 미소,
그 형태의 원만함이 평온을 찾는 우리의 마음을 끌어 당깁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친숙한 존재임을 표현하기 위해
나한 고유의 얼굴은 돌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빈자리에는 나와 당신의 표정만이 남아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왼쪽 나한상의 입술에는 붉은 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영월 창령사 터에서 발굴된 나한상 중 일부는 입술에 지금도 선명하게 붉은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일부러 색을 입힌 흔적인지 광물의 풍화로 생긴 현상인지 확인하기 위해 X-선 등, 과학적 분석을 한 결과
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붉은색 안료인 연단을 칠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나한상의 입술에 붉은색의 립스틱을 짙게 칠해 드렸던 것이였습니다.
두건을 쓴 나한상.
두건은 말 그대로 머리에 쓰는 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지장보살이 쓴 쓰개도 두건이라고 부릅니다.
제천 사자빈신사 터 석탑(1022년)내 나한상이나
서울 승가사 승가대사상(1024년)도 이러한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가사를 입고 두건을 쓰는 경우는 지장보살과 나한이며, 조사祖師와 유마거사처럼 나한의 경지에 이른 경우도
두건을 표현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심의深衣를 입고 머리에 쓰던 복건도 두건과 비슷합니다.
복건은 온폭 천으로 만들므로 폭건幅巾이라 하는데, 폭幅,자는 너비, 단위, 가장자리를 나타냅니다.
장삼을 입은 나한상.
장삼은 중국에서 불교 복식의 법복으로 정해졌으며 현재까지도 깃이 곧고 오른쪽으로 여며 입는,
소매가 넓은 포袍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장삼은 저고리인 편삼褊衫과 하의인 치마가 허리에서 위아래로 합쳐 연결된 형태에서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도 많이 착용한 복식 형태가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승려의 장삼이 도포와 두루마기로 발전되었습니다.
가사를 입지 않고 장삼만 착용한 장삼형 나한 복식의 큰 특징은 없으나,
가사와 함께 착장한 형태의 장삼보다는 소매가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사를 덮어쓴 복두의 가사.
머리 위까지 가사를 뒤집어쓰고 선정禪定에 든 나한을 복두의 나한이라고 합니다.
북위시대(386~534) 중국에 선불교를 전한 달마達磨의 모습에서 많이 보았던 옷차림입니다.
달마는 북위시대 숭산 소림사에서 9년간의 면벽面壁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중국에 선불교를 전한 인물입니다.
고요히 선정에 든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가사를 뒤집어쓴 창령사 나한상 모습은 47점에 이를 정도로
월등히 많습니다.
치열하게 구도의 길을 걸었던 옛 선승들의 표식인 가사를 뒤집어쓴 나한상이 이렇게 많은 것은
나한상 조성 당시 창령사에 참선하는 승려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사袈裟를 통견通肩으로 입고 있는 나한
통견형 가사는 양어깨를 덮는 가사 착용법으로 <사리불문경 舍利佛問經>에
"국왕의 식사에 청함을 받았을 때나 마을에 들어가 걸식을 할 때,
좌선을 하거나 경을 읽을 때, 각처를 돌아다니거나 나무 아래에서 수행할 때 통견을 한다"고 하여
위엄을 갖추어야 할 때 입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견형 가사는 양어깨에서 가사가 자연스럽게 무릎까지 내려와 덮는 형식입니다.
창령사 오백나한상 중에는 가사를 여미지 않아 가사 안에 입은 장삼의 모습이 드러난 상도 있고,
왼쪽 어깨에 가사를 고정하는 둥근 고리 착장구 형태를 표현한 나한상도 있습니다.
가사袈裟를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입고 있는 나한.
편단우견은 가사를 착용할 때 오른쪽 어깨를 내놓고 왼쪽 어깨만 덮는 형식을 말합니다.
상대방에 경의를 표하는 예법입니다.
가사는 가로로 짧게 이어붙이는 제堤와 세로로 길게 이어 붙이는 조條로 구성된 네모난 천 모양으로
인도 복식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창령사 오백나한상에서 가사 자락은 왼쪽 팔 위에서부터 무릎 아래로 흘러 내리거나,
이 부분을 오른쪽 무릎보다 두툼하게 표현하여 가사의 주름을 표현하였습니다.
나한은 수행자인 승려 복식을 하고 있습니다.
가사로 대표되는 수행자복식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왕궁을 떠나 사냥꾼의 거칠고 해진 옷을 바꿔 입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는 승가의 의복을 누더기 천인 일명 분소의糞掃衣를 선택함으로써
수행자로서 모든 욕심을 버리는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가지런한 밭고랑 형상을 한 田相衣로 변화하여 수행자의 몸가짐이 반듯하게 지켜지도록 하였습니다.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인도와 다른
기후적인 요인으로 장삼長衫 위에 가사를 착용하면서 가사와 장삼은 불교 복식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관음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던 인도의 고승인 승가대사僧伽大師 신앙이 유행하면서
머리에 두건을 쓴 이국적인 승려 이미지가 널리 유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머리에 두건을 쓴 나한상이 유난히 많이 제작됩니다.
동물을 안고 있는 나한(좌)과 정병을 들고 있는 나한.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나한상.
나한이라는 명칭에는 "마땅히 사람과 하늘의 공양을 받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공양물 중 보배로운 구슬은 여러 가지 원하는 것을 뜻대로 이룬다고 하여 여의보주如意寶珠라고도 불립니다.
이외에도 염주, 법륜法輪, 불자拂子(마음의 티끌이나 번뇌를 털어 내는 수행 도구),
동물, 정병淨甁, 경전經典, 홀笏 등을 들고 있는데, 이는 나한의 신통력이나 위력을 상징합니다.
암굴 속 나한(좌)과 바위에서 나투는 나한(우)
자연 속에 노니는 나한상.
산과 바위, 동굴 등은 자연의 공간을 상징하기에 아주 적합한 요소입니다.
창령사 오백나한상도
내면의 성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속계와 구분 짓는 이상적인 공간을 자연으로 설정합니다.
거칠게 다듬은 판석형의 세모난 암석 뒤로 얼굴을 비죽히 내민 나한상은 바위 뒤에서 순간 얼굴을 드러낸
나한을 마주한 찰나의 느낌을 줍니다.
또 다른 상은 바위를 쪼개 그 안에 갇혀 있던 나한을 드러낸 듯도 합니다.
나한의 대좌는 대부분 치밀하게 조각하지 않아서
나한상이 자연의 상태 그대로 앉아 있음을 나타낸 것도 있습니다.
의자에 앉은 나한(좌)과 무릎을 꿇은 나한.
두건을 쓰고 홀을 든 나한. 손을 모은 나한
가사를 두른 나한. 바위 위에 앉은 나한.
수행하는 나한. 가사를 두른 나한.
손을 모은 나한. 두건을 쓰고 홀을 든 나한.
기쁨.
화.
슬픔.
사랑.
공감.
수행하는 나한 두건을 쓴 나한.
두건을 쓴 나한.
손을 모은 나한
정진하는 나한 바위 뒤에 앉은 나한
암굴 속 나한.
생각에 잠긴 나한 합장하는 나한.
수행하는 나한 소매를 걷어올리는 나한.
이야기하는 나한 가사 밖으로 손을 내민 나한.
미소띤 나한 합장하는 나한.
선정에 든 나한. 어깨에 가사를 걸친 나한.
보주를 든 나한.
전시장 모습입니다. 전시장 바닥에 붉은 벽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자세히 보면 글도 새겨 놓았는데요.
입구에 있는 자작나무 쉼터 천정에도 같은 글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합니다. 사랑, 슬픔, 상실 우울 등등이...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스럽습니까?
오백나한의 수많은 표정을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과 함께 진심으로 웃고 슬퍼할 수 있는 그들과 달리 개인적인 욕심과 온갖 무거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묻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스럽습니까?
전시장을 거닐면서 벽돌에 새겨진 기쁨, 행복, 원망, 두려움, 분노, 슬픔과 같은 여러 감정이 담긴 글귀들,
그리고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게 온전히 웃고, 울고 기뻐하는 창령사 오백나한의 얼굴들에서
잠시나마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기쁜 마음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작가노트- 김승영.
첫댓글 두건과 복건이 또 다른모습입니다
각양표정의 나한들...
감사히 보고갑니다
나한들을 보고 있노라니 행복해 지네요 무한의 표정에서 절로절로 미소지어 집니다.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