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12
주촌면의 소나무 두 그루. 허리 숙여 경배하며 주인의 무덤을 지키다.
노거수이야기 12. 주촌면의 소나무 두 그루
허리 숙여 경배하며 주인의 모덤을 지키다 |
완당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는 몇 가닥의 거친 필선으로 그린 집 한 채, 그 양쪽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으로 선 간략한 구도로 이러어졌다. 인위적인 기교와 형식을 버리고 정신을 담아낸, 조선시대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완당은 제자 이상적(1804~1865)에게 주려고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왼편에 적힌 화발이 그 사연을 담고 있다. 완당은 이 글에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옛 스승을 외면하지 않고 두 번이나 청나라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부쳐준 데 대한 고마움을 밝히고, 그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했다. '세한도'에서처럼, 소나무는 예부터 시.서.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이다. 엄동에 흰눈을 지고 서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으니 충절이요, 우뚝하니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태는 기품이요, 낭떠러지 바위틈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것은 청빈이라고 했다. 굳이 시인묵객이 아니라도, 우리 겨레는 평생 소나무와 더불어 살았다. 해산을 하면 소나무 장작으로 가마솥을 달궈 물을 끓었다. 고고성呱呱聲이 울리면 솔가지나 숲을 끼워 금줄을 쳤다. 소나무를 타고 놀며 자라서 혼인을 하게 되면 대례상에는 소나무로 깎은 기러기가 올랐다. 소나무 몇 그루 잘라다 집을 지어 늙은 부모를 봉양했고, 삶을 마치면 소나무 관에 모셔 뒷산 소나무 아래 묻었다. 아들과 함께 벼슬 버린 김양증金養曾의 무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곧은 나무는 용처가 많다 보니 자라기 바쁘게 잘려 나가지만, 굽고 비뚤어진 나무는 살아남아 선산을 지킨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마다 제 역할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겠지만, 무덤가에 선 나무라면 으레 소나무가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세태와 기호가 변한 오늘날은, 이 속담도 '빈 말'로 전략할 처지가 됐다. '선산 지키고 선 굽은 소나무' 한 그루의 운명을 지켜보며 갖게 된 씁쓸한 감회가 그렇다. 기형 수목들이 정원수나 분재로 각광받는 바람에, 굽고 뒤틀린 나무들이 오히려 '귀한 몸' 대접을 받고 팔려가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인터넷 경매를 통해 유명세를 치르는 나무가 있다기에 수소문을 해보니, 주촌면 선지리 선지마을 뒤편 언덕의 무덤가에 선 소나무가 주인공이었다. 가슴높이의 둘레가 2m 가까운 도래솔이다. 잔가지 하나 없이 미끈하게 뻗어 오른 둥치가, 신기하게도 지상 4m 높이에서 90도로 허리를 꺾고 서 있었다. 영락없이, 주인 혹은 어른을 모시는 사람의 지극히 공손한 자세를 연상케 한다. 끝부분에 촘촘히 몰려서 난 가지가 드리워 놓은 그늘자리에는 자그마한 문인석文人石이 홀笏을 들고 서 있다. 나무는 무덤을 향해 경배하듯 고개를 숙이면서, 문인석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가려주는 듯도 보인다. 소나무와 문인석이 나란히 지키고 있는 이 무덤에는 조선 성종조의 인물인 김양증金養曾 (1452~?)이 잠들어 있다. 김양증은 의성 김씨로,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후 여러 곳의 지방관으로 재임하며 선정을 펼쳐 이름이 높았다. 성종 21년(서기 1490) 현감으로 재직했던 남해현南海縣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난 후 주민들이 거사비를 세워 추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양증은 동래현령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그가 은거지로 택한 곳이 김해의 거인리居仁里(지금의 외동)였다. 벼슬을 버린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김양증은 이조정량으로 있던 아들 억저마저 불러 내렸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던 아들까지 사직시켜 함께 은거한 것은,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 때의 일이다. 연산군 4년(1498)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는 『성종실록』의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빌미로 칼바람을 일크켜 신진사류들을 겨누었다. 바야흐로 조선조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 임금과 간신배로 가득한 조정에서 물러난 부자는, 한 번도 거인리를 벗어나지 않고 밭갈이와 낚시질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임란 순절' 김득기공 배출한 충절 가문 궁금한 것은, 김양증이 타계한 시기는 4백 년 전인데 비해 무덤을 지키고 선 소나무는 수령이 2 백년 정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후손들이 심은 것인지 아니면 저절로 솟아나 자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후손들이 심었다면 숭조정신이 빛나는 일이요, 저절로 자란 것이라면 그의 깨끗한 삶에 대한 자연의 감응이라 할 만하다. 묘역에는 허리 숙인 소나무 말고도 200~400년 수령의 노송이 여러 그루 있었지만 대부분 고사해 밑둥치만 남았고, 무덤 남쪽에 서너 그루가 서 있다. 허리 숙인 소나무는 자세히 보면 주간이 휘어져 자란 것은 아닌 듯하다. 꺾어진 부분에서 위쪽으로 옹이가 남아 있어, 원줄기가 부러지자 가지가 주간을 대체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김양증은 연산군의 폭정에 대항하기보다 관직에서 몸을 빼내어 은거했다는 점에서, 백성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준 김양증의 후손이 있다. '임란 사충신'의 한 사람인 증贈 호조참판 김득기 공이 그 사람이다. 김공은 1549년 거인리(외동)에서 태어났다. 통덕랑을 지낸 부친 삼성이 억저공의 아들이니, 김양증에게는 증손이다. 공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으나 증조부와 조부의 영향인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어버이를 섬겼다. 그의 삶이 바뀐 건 나이 44세 되던 해 봄이었다. 부산포를 통해 물밀듯 들이닥친 왜적들이 김해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은 것이다. 공은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는 6대 독자 어린 아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분연히 의거했다. 머리카락 한 줌과 도포를 벗어 아들에게 쥐어준 후 김해성으로 달려가 송빈(1542~1592), 이대형(1543~1592), 류 식(1552~1592) 등 세 충신과 합류해 김해성을 지켰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김해성을 포위하고 고립작전을 펴던 왜병은 보리를 베어다 계단을 쌓아 김해성을 넘었다. 동문을 지키던 김득기공은 마지막가지 항전하다 쓰러졌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절을 기려 선조 33년(서기 1600) 첨지중추부사를 추증했고, 고종 8년 다시 호조참판을 가증했다.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 종전까지 '7년 전란'을 겪은 김해부민들은 병화를 수습한 후 진례면 무송마을에 사우를 마련해 이들 충신의 위폐를 모시고 향사했는데, 송담사松潭祠라고 편액했다. '소나무 송'자와 '못 담'자가 '소나무처럼 푸른 충절이 어린' 사당을 의미함을 알겠기에 더욱 숙연해지는 이름이다. 김해성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임란 충신들을 모신 사당은 송담아에서 표충사, 송담서원 등으로 이름이 격상되다가 조선조 말 고종의 왕명으로 관직을 높이면서 김해성 안의 동상도에 사충단四忠壇을 지어 위패를 옮겨 모셨다. 지금은 다시 분산성 중턱으로 이건하고 주변을 정비해 김해시와 유림이 1946년 구성한 표충회表忠會가 중심이 되어 사충신이 순절한 음력 4월 20일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명당은 후손의 정성이 만드는 것" 사람들은 조상의 묘터를 정할 때 이른바 '명당明堂'을 구한다. 후손들의 발복을 위해서이다. 누구는 묘를 잘 써 정승에 올랐고, 누구는 무덤자리를 잘못 골라 패가망신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풍수전문가들은 자리도 중요하지만 후손들의 마음가짐과 정성이 뒤따르지 않는 명당은 없다고 말한다. 막연히 복을 바라는 욕심 대신 조상을 모시는 경건한 자세와 스스로를 갈고 닦는 수신이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만들고 복을 불러 온다는 것이다. 김양증의 묘소가 있는 선지리 일대에도 선인이 춤추는 소맷자락 형국(仙人舞袖形), 거북이가 용으로 화해 승천하는 형국(龜龍上天形) 등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후손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곳이 명당이라면, 증손자인 득기공이 44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김양증의 묘소는 결코 명당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부귀영화를 삶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에 길이 남아 '김해의 정신'으로 추앙받는 증손자를 두었다는 점에서, 김양증의 묘소는 부귀영화 대신 소나무처럼 시퍼렇게 살아있는 충절을 물려준 '우국애민의 명당'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소나무가 주인의 무덤을 향해 경배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2년 여 전, 후손들이 이 나무를 팔았기 때문이다. 산 사람이 바로 옮겨가지 않고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자, 구매자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여러 손을 거치면서 값이 수십 배로 뛰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거래가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져 나중에는 주인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종사宗事에 사용할 기금을 만들기 위해서라 해도, 폭군의 녹봉을 거절하고 초야에 묻힌 김양증 부자의 청직함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사태를 파악한 김해시 역시 이 소나무가 외지로 뽑혀가는 것을 막을 방안을 찾느라 부심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풀렸다. 주촌면의 모 골프장 측이 임자를 수소문해 이 나무를 사들인 것이다. 나무는 결국 지난 봄 골프장의 클럽하우스 앞으로 이식되었다. 비록 역외 유출은 막았지만, 허리 숙여 경배하던 자리를 떠나는 순간 저 충직한 소나무의 기상은 바래고 만 것이 아닐까. 이름 모를 무덤가에도 주인 향한 충절로 우뚝 개운치 못한 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주촌면 농소리의 다른 소나무 한 그루를 찾아간다. 농소는 원래 농사일을 관리감독하는 건물 혹은 그 기관을 이르는 것으로, 밀양 거창 등지에는 조선시대에 조정이 국농소를 두엇다는 기옥이 남아 있다. 그러나 주촌면 농소리는 1920년대 조만강 하류지역ㅇㄹ 간척해 들판이 형성되면서 얻은 이름으로 보인다. 농소와 사덕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작은 행정구역이지만, 마을 앞에는 농소들과 회들, 신망덕들 등 이름에 걸맞은 곡창이 펼쳐져 있다. 남해고속도 서김해톨게이트쪽에서 농소리를 지나 망덕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나지막한 야산 하나가 나타난다. 농소마을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길 좌우로 공장들이 이어져 있다. 동주산업이라는 회사 왼쪽 풀섶을 헤치고 산으로 오르면 마치 앞으로 쓰러질듯 갸우뚱한 노송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 끝에만 잎이 밀생한 선지리의 허리 숙인 소나무와 달리, 사람 키 정도의 밑둥치 부분을 빼고는 온몸이 푸른 잎으로 덮여 있다. 가까이서 보면 가슴높이의 직경이 80cm 정도로, 그리 거목은 아니지만 모양이 특이하다. 허리를 한 바퀴 틀어 몸이 S자로 휘어지면서 땅을 향해 구부러진 형태다. 납작하게 내려앉은 봉분이나 소나무의 크기로 보아 족히 200~250년은 되었음직한 무덤이지만, 깨끗이 보존된 것으로 보아 아직도 후손들이 정성을 다해 관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조상의 무덤에 성묘하는 한식은 이날 하루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농가에서는 밭 갈고 씨 뿌리는 농사철이 시작된다. 그만큼 햇살이 강해지는 시기이니, 휘어진 소나무는 모덤의 주인이 후손들을 생각해 안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무덤 주인이 자신을 향해 절하는 소나무의 몸을 틀어 앞쪽으로 굽혀 놓은 것 같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무덤 앞에 부복한 후손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면, 조상을 기리는 마음도 한결 경건해질 터이다. 무덤은 상석도 비석도 없이 소박하다. 저 속에 누운 이는 청빈하게 살다 간 선비였을까. 아니면 낮엔 밭 갈고 밤엔 길쌈하던 어느 이름 없는 촌부였을까. 인가는커녕 오가는 사람조차 없는 산모둥이, 무덤의 연고나 후손에 대한 궁금증을 산소 앞에 내려놓고 누군지 모를 망자에게 잠깐 묵념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큰 정책이 있는 법, 소나무도 그중의 하낟....)중략)...생소나무나 고송이나 불에 탄 소나무라 할지라도 한 그루 한 그루 기록해 도벌 여부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일 도벌 사실이 있으면 그 내용을 조사해서 보고할 것이며 규정에 따라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부패한 관리나 간교한 백성에게 주지시켜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할 것이다." 조선 정조 때 공포한 '제도송금사목'의 한 부분이다. 200여 년 전 소나무에 대한 국가정책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울창한 송림이 흔적도 없이 깎여 나가고 산소의 도래솔이 정원수로 팔려가는 현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 아닐 수 없다. -한글 참고자료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도감] |
2022.12.10 노거수 탐사 29차/ 김해시 관내노거수
먼지가 풀풀 나는 마지막 길 강옆에 차를 주차하고, 주소지에 이르러 어딜까 둘러보니...
멀리서 보니 소나무 몇 그루 있는 산소가 보였습니다.
12월에 갔는데 곰솔 아래 잔디를 곱게 다듬어 두었더이다.
여기도 개발중인가. 주변은 어수선합니다.
정확하게 곰솔인지 소나무인지 안 봤는데... 팔려 간 4번 나무가 소나무이니까 이건 3번 곰솔이 아닌가 합니다.
가락국옛터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29편 중 12편과 15편을 끝으로 도감 따라 노거수를 다 둘러보았습니다.
장유사 전나무를 먼저 보고, 여기 '허리 숙여 경배하며 주인의 무덤을 지키던 소나무'를 마지막 회 차 보았네요.
22편 젤마마을 '왕버들'은 고사하고 없어서 보지 못했으니 28편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김해의 다른 노거수들도 보고 다녔답니다.
여기 나오는 소나무가 골프장에 있다고 하니 한번 가 보려 합니다.
뒤에 나오는 주촌면 노거수 18번 능소리 소나무도 찾아봐야지 한다.
김해 김가의 시조始祖, 수로왕이 세운 가락국駕洛國의 터 김해金海.
그곳의 노거수를 둘러보면서 아쉬웠던 건 관리를 조금만 더 잘해주면 좋겠다는 마음과, 이렇게라도 관리해 주어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주셔서 고맙다는 두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자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나중에 다시 보완합니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라는 도감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터이니,
정치는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지만 이 도감을 펴 낸 김해시장 김종간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소식을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을 구해 주신 김영미 님께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앞으로 다시 꽃이 피는 시기를 찾아서 노거수들을 만나볼까 하는 마음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는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후손들이 얼마나 종사宗事가 힘들면 무덤 앞의 나무를 팔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면 값을 많이 쳐 주겠다고 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허리 숙여 경배하던 그 소나무가 골프장에서 잘 자라기를 빕니다.
쓸쓸하게 홀로 서 있는 소나무다.
길에서 찍었다. 오른쪽의 소나무가 더 큰데 다른 이들의 산소이다.
가운데 나무가 남은 소나무다.
김해 **골프장에 서 있다는 나무다.
도감의 사진을 올립니다.
**농소리 소나무는 다음에 찍어 올립니다.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주촌면 관내 노거수]
번호 | 수종 | 소재지 | 본수 (본) | 수령 (년) | 수고 (m) | 흉고 직경 (m) | 수관목(m) | 비고 | |
동서 | 남북 | ||||||||
1 | 이팝나무 | 천곡리 895-2 | 1 | 500 | 천연기념물 (1편) | ||||
2 | 팽나무 | 양동리 828 | 1 | 300 | 시보호수 | ||||
3 | 곰솔 | 선지리 147-2 전 | 1 | 200 | 12편 (함께있던 나무따로 있음) | ||||
4 | 소나무 (**골프장) | 원지리 1232 구 | 1 | 130 | |||||
5 | 소나무 | 원지리 1232구 130 | 1 | 130 | |||||
6 | 팽나무 | 원지리 678대 | 1 | 150 | |||||
7 | 팽나무 | 덕암 137(덕운사) | 2 | 300 | |||||
8 | 푸조나무 | 천곡 214임 | 1 | 400 | |||||
9 | 곰솔 | 천곡 산52-1임 | 2 | 200 | |||||
150 | |||||||||
10 | 푸조나무 | 내삼리 1348-7도 | 1 | 500 | 도감 27편 | ||||
11 | 팽나무 | 농소 510-32천 (사덕마을) | 1 | 300 | |||||
12 | 팽나무 | 농소 520-26도 (사덕마을) | 1 | 400 | 시보호수 | ||||
13 | 팽나무 | 내삼리 1342-11도 | 1 | 100 | |||||
14 | 왕버들 | 천곡리 1307구(용덕마을) | 1 | 200 | |||||
15 | 팽나무 | 천곡 112도(1198-2옆) | 1 | 200 | |||||
16 | 푸조나무 | 농소 319-3 | 1 | 300 | |||||
17 | 팽나무 | 농소 256 | 1 | 200 | |||||
18 | 소나무 | 농소 산53 | 1 | 250 | |||||
19 | 팽나무 | 양동리 678 묘지주변 | 1 | 300 | |||||
20 | 푸조나무 | 망덕 440 | 7 | 후보목 400 | |||||
200 | |||||||||
200 | |||||||||
400 | |||||||||
200 | |||||||||
100 | |||||||||
후보목 4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