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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라이딩
광주 천수극락공원, 남해안 라이딩 출발 전
지난 4월, 전국 일주 라이딩을 제주도에서 시작했을 때, 텐트 치고 자느라 새벽에는 추워서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지금은 5월이지만 아직도 새벽엔 춥다. 그래서 비교적 따뜻한 남쪽 지방, 남해안으로 라이딩의 목적지를 정했다. 한 겨울에도 눈을 보기가 어렵고, 한 겨울인 1월에 동백꽃이 활짝 피는 광양만. 봄이 먼저와 3월 말이면 매화꽃이 만발하는 섬진강 매화마을. 이 따뜻한 남쪽 마을로 전국 순회 두 번째 라이딩을 떠났다.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도 좋지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 그리운 사람들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30년 전 일본 여행을 함께한 문우(文友) 이정석 평론가, 안양고에서 함께 근무하다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긴 김왕현 조각가, 섬마을 고교생에게 저녁밥을 지어주며 야간 공부를 지원하여 대한민국 스승상의 대상을 수상한 조연주 교사, 한국 고미술 작품 복원의 개척자인 고교 동창인 김범수 한국화가,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박육철 서각가를 탐방하는 기대에 찬 출발이었다.
자동차에 MTB 자전거를 싣고 먼저 나주로 가서 평론가와 조각가를 만나고, 목포에서 장학사, 장성에서 고교동창을 만났다. 광주 극락천수공원에 차를 두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강진에서 가죽공예가를 뵈었고, 광양에서 친구와 서각가를 만났다.
목포의 입암산에서 서해를 조망하고, 영산강 하구둑에서 국토개발의 힘을 보았다. 영산강과 섬진강의 자전거길도 달려 보았다. 순천만의 갈대밭과 순천문학관, 세계의 정원을 축소해 놓은 국가정원, 김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 참배 후, 낙동강 자전거길을 달려 부산 을숙도에서 라이딩을 종료했다. 전국 일주 두 번째 코스로 남해안을 달려본 것이다.
※ 여행 일정 : 5. 17 ~ 5. 28(12일)
- 5. 17. 자전거를 SUV 차에 싣고 수원 출발. 나주 도착, 문성암 방문, 영산포, 이정석 선생님댁
- 5. 18. 다도면사무소, 김왕현 선생님댁, 나주 곰탕 점심, 조연주 장학사님과 석식, 김왕현 선생님댁
- 5. 19. 나주 개천길 산책, 장성 김범수 탐방, 광주 극락천수공원에서 라이딩 출발, 죽산보 야영
- 5. 20. 주몽 드라마 촬영 세트장, 영산포, 목포, 영산강 하구둑, 대불공단, F1경기장, 모텔 투숙
- 5. 21. 독천리, 성전, 강진, 영랑생가와 시문학파 기념관, 모란공원, 강진만 라이딩, 강진 호수공원 야영
- 5. 22. 윤00 가죽공예가 탐방, 장흥 고영완 가옥과 배롱나무 군락지, 수문리, 율포 해수욕장, 민박
- 5. 23. 득량만방조제, 벌교, 야간 라이딩, 순천만에서 야영
- 5. 24. 순천문학관, 순천 국가정원, 광양읍, 이승우 선생님댁,
- 5. 25. 하동, 섬진강대교에서 고속도로 진입, 사천, 정촌, 삼웅마을서 야영
- 5. 26. 문산, 이반성, 경남수목원, 마산, 봉하마을, 시산리 강변에서 야영
- 5. 27. 한림, 삼랑진, 을숙도, 광주로 출발.
- 5. 28. 새벽 2시 귀가
A. 라이딩과 여행
1. 남해안 라이딩 출발, 광주에서 목포로
광주시 극락천수공원에 주차하고 자전거를 꺼내 목포와 부산을 향하여 라이딩을 시작했다. 영산강을 따라 내려가 나주 영산포를 지나 목포로 가서 영산강 하구둑을 넘어 남해안으로 부산까지 가서 라이딩을 마친다. 그 다음, 부산에서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이곳 광주로 돌아와 승용차로 귀가할 예정이었다.
광주 시내로 흘러내려가는 영산강, 그 둔치에 자전거길을 잘 만들어 놓았고, 천수공원은 주차장이 무료다. 이 공원에는 관광 안내센터와 영산강 자전거 인증센터가 있다.
가다가 야영과 취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전거 양쪽 가방에 텐트와 버너, 쌀과 반찬, 또 옷과 소지품까지 약 30 kg을 실었다. 100m 쯤 달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출발 장면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진을 촬영 후, 다시 출발했다.
영산강 좌안으로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다가 승천보에서 다리를 건너 우안으로 갔다. 영산강문화관이 나왔고 여러 라이더들도 쉼터에 앉아 있다. 잠시 쉬면서 옆에 혼자 앉은 라이더에게 길을 물었다. 친절히 알려 주어 고마웠다.
나주 영산포구의 내륙 등대가 나왔다. 며칠 전 이정석 평론가와 와 본 곳이다. 둑 위로 가며 만봉천 양곡교를 건너는데 앞지르던 여성 라이더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양쪽에 큰 가방을 달고 가는 내가 특별해서 질문했을 것이다. 부산까지 갈 거라니 혼자 가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그럼 죽산보까지 동행하며 길을 알려주겠다고 조금 앞에서 달렸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짐을 많이 실은 내가 뒤처지자 오르막에 올라갔는데 내려와 동행을 해주었다. 고마웠다. 오르다가 기아의 변속을 잘 못해 체인이 벗겨졌다. 자전거에서 내려 체인을 끼우느라고 또 떨어지자 그 여자는 멈추어 기다려 주었다.
곧게 뻗은 가야길 양쪽으로 금계국이 노랗게 피어 있어 사진을 촬영했다. 라이딩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보고 싶어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100 m 이상 앞서 달려가 대기하다가 내가 가까이 올 때까지 촬영했다. 촬영된 동영상이 조금 아쉽다고 하자 다시 앞으로 달려가 촬영해 주었다. 부산까지 혼자서 달려야 하는 처지라서 길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내 요청대로 동영상을 촬영해주어 무척 고마웠다.
가다가 야영할 곳을 찾아야 한다니 죽산보의 잔디밭을 추천해 주었다. 죽산보에는 정원이 잘 되어 있고 정원에 화장실이 있으며 경비원도 있다고 했다. 경비가 있어 야영을 못하게 할지 모르지만 경비에게 잘 말해 보라 했다.
죽산보에 도착하니 정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여기서도 그녀는 사진을 촬영해주고 영산포로 돌아갔다. 화장실 옆 초소에 경비가 있었다. 오늘 여기서 야영을 해도 되는가를 물으니 정원 한 쪽에서 하라고 했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라이더들도 지나가고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죽산보 다리와 정원을 걷는 이도 있다. 마을에서 산책 나온 아주머니들도 있어 적적하지 않았다. 밤에는 화려한 네온불이 켜져 환상적인 강변으로 바뀌었다.
일몰시 죽산보에서의 야영 준비
다음날 아침. 이른 아침에 여러 라이더들이 몰려왔다. 단체로 온 라이더들은 죽산보에 오르는 계단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을 지어먹고 텐트를 걷어 짐을 챙겨 놓은 후, 죽산보에 올라가 주변을 조망했다. 자연도 인공을 만나야 더 멋진 장면이 만들어진다. 강물만 굽이굽이 흘러간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강물을 내려다 볼 전망대가 있어야 영산강도 제대로 볼 수 있고 다리가 있어야 좌우안을 넘나들 수 있다.
죽산보에서 출발하여 산모롱이를 도는데 햇살이 찬란하여 덥기는 했지만 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다. 산 위에 나주영상테마파크가 보였다. 주몽드라마의 촬영 세트장이라는데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경관은 좋겠지만 테마파크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비켜 지나갔다.
2. 느러지 고개, 목포 갓바위, 영산강 하구둑, F1경기장, 삼포리에서 숙박
산이 강을 가로 막으면 길은 산 속으로 오르게 된다. 오르막을 만나면 힘겨운 용트림을 하며 서서히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힘겨운 오르막을 오르면 신나는 내리막도 있다.’ 고 생각하며 고통을 참아낸다.
느러지 고개에 힘겹게 오르니 전망대도 있고 정자도 있다. 주변에 꽃도 가꾸어 경관이 좋았다. 정자에 자전거를 기대놓고 물을 마셨다. 지나가는 라이더가 길을 물었지만 나도 초행길이라서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가다가 마을길 안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우람하게 보여 들어가니 보호수였다. 수령이 500년이 된 나무도 있는데 주룡마을회관 앞에 있다. 이런 오래된 정자나무를 보면 그 마을이 유서 깊게 여겨진다.
좀 더 가니 ‘못난이 동산(못난이 미술관)’이 나왔다.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몸매가 비정상적으로 뚱뚱한 못난이들을 동상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놓은 공원이다. TV의 어느 프로에서 보며 기발한 발상의 동산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뜻하지 않게 보게 되었다. 공원에는 5~6세 정도의 유치원생들이 많았다. 어린 아이들의 취향에 적합한 동물들, 즉 기린, 사슴 등의 동물상을 만들어 놓았다. 조금씩 동물을 변형하어 재미있게 만들어 놓았다.
못난이 동산
조그만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니 커피 무인 판매대가 있다.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아주머니가 있어 물어보니 셀프로 타서 마시면 되고, 커피 값은 자신의 뜻대로 내면 된다 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담장이나 대문이 없다.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고, 커피 값도 써 놓지 않아 자유롭게 마시도록 했다. 그런 주인이 고맙고 그런 마음씀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기분 좋게 한 잔 마시고 나왔다.
바닷가 영산강 둑 위로 달리는데 서양 여자가 나를 앞지르다 나를 보고 밝게 웃었다. 그 거구의 여자도 자전거 앞뒤에 큰 가방을 달았다. 혼자서 침구, 취사도구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나의 짐을 보고 반가웠나 보다. 그렇게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외국인이었다.
목포 시내로 들어와 영산강하구둑 인증센터를 찾아가려고 이정표와 영산강자전거길 안내의 청색 선을 따라가는데 내리막에서 선이 없어져 길을 잃었다. 길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온 라이더도 나처럼 길을 찾고 있었다. 자동차 네비를 이용하여 하구둑 위치를 찾았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나도 하구둑 인증센터로 가니 나를 따라 오라 하고, 그들이 나를 놓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달렸다.
도심지에서 조금 벗어나 인증센터를 찾아갔다. 몇 명의 라이더들도 인증센터 주변에 있었다. 함께 온 부자(父子) 라이더는 버스를 타고 광주로 돌아간다고 먼저 갔다. 나는 목포 시내로 들어와 갓바위를 보러 갔다. 입암산 산자락 끝으로 많은 인파가 가고 있어 데크길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바위가 버섯 같기도 한데 삿갓을 쓴 모습 같다고 붙인 이름이 갓바위다. 바다와 만나 해식작용과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기묘한 바위다. 바위의 생김새를 보고 비슷하게 이름을 붙여 놓으면 이름과 어울려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목포의 갓바위
갓바위를 지나 ‘달맞이 공원’에 가니 노래를 연주하는 밴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어, 나도 한쪽에 서서 공연을 잠시 보았다.
바닷가 길로 자전거를 끌고 가니 많은 사람들이 해변을 걷고 있다.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공연도 보았고, 사람 구경도 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영산강 하구둑을 달리다 중간에 내려 사진 촬영을 했다. 바다를 막아 물을 다스리고 길을 만들어 놓은 사람의 기술과 힘이 놀랍다. 그 위용을 보고 바다를 건너 삼호읍으로 들어갔다. 산을 넘으면 무엇이 있고, 바다를 건너면 무엇이 있을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페달을 밟았다. 흐려진 하늘로 햇빛이 가린 저녁, 숙소를 찾으러 영암 자동차 F1 캠핑장을 향하여 달렸다. 대불산업단지로 들어가니 공장들이 늘어서 있는데 차도 사람도 거의 없다. 거리가 왜 이렇게 한가할 까 생각해보니 일요일이라 그런 것 같다.
F1경기장 도착 직전, 캐라반이 많이 놓여진 캠핑장이 나왔다. 야영이 가능할까 알아보려고 들어갔으나 캠핑하는 사람도, 관리자도 없다. 캠핑장 안내 전화번호가 게시되어 있어 전화하니 금, 토요일만 열고 일요일엔 문을 열지 않는단다.
캐라반 캠핑장을 지나 F! 경기장으로 갔다. 가서 리조트로 보이는 부속 건물(지도에는 포뮬러원피드)들이 있는데 곳으로 10분 쯤 달려갔다. 이곳 역시 관리실은 닫혀 있고 불도 켜 있지 않았다. 다시 돌아 나와 야영할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적당한 곳이 없었다. 더구나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쌀쌀하여 비가 올 것처럼 스산했다.
동북쪽으로 영암금호방조제가 보였다. 가보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먼저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오다가 본 모텔로 가서 하루를 묵는 게 낫겠다 싶었다. 모텔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곳으로 가니 한 집은 관리인이 없다. 이용자는 휴대폰에 전화하라는 표지판만 있다. 옆집 실크로드 모텔로 가니 주인이 있어 방을 하나 얻었다.
엉덩이 뒤쪽이 가려워 샤워를 하며 보니, 허리 아래에서부터 허벅지로 두드러기가 많이 났다. 어제 죽산보에서 먹은 상수도 물이 잘못된 것인지, 상한 음식으로 생긴 식중독인지 모르겠다. 이런 건강 상태라면 라이딩을 멈추어야 할지 걱정이었다. 아내에게 전화로 상황을 말하니 알레르기 반응 같다고 했다. 그런 것 같다. 3년 전 국토종단 라이딩 때도 이런 증세가 있었다. 라이딩 옷이 나일론 합성섬유인데 통풍이 잘 안 되는데다 내 체질이 알레르기에 약한가 보다. 허벅지가 빨갛다.
빨갛게 타버린 허벅지. 햇빛에 의한 화상인듯. 라이딩하다 다친 다리의 상처
3. 독천리, 조성 지나 강진 입성
날이 밝았다. 두드러기 난 곳이 약간 가렵긴 하지만 위장도 괜찮다. 식중독은 아닌 것 같다. 컨디션도 라이딩에 지장이 없어 계획대로 강진을 향하여 출발했다. 독천리와 성전을 지나 강진으로 들어가니 강진 호수공원이 나왔다. 유치원생들이 공원의 잔디밭에서 놀고 있다.
갓을 쓴 선비 차림의 석상이 있어 가보니 다산 정약용 상(像)이었다. 옆에는 2015년에 세운 ‘마로니에 숲길 기념비’가 있다. 하얀 화강암에 검은 글씨가 선명했다.
영랑 생가를 찾아 강진 시내로 들어갔다. 초가집으로 된 영랑 생가에 많은 사람이 관람을 하러 왔다. 40~50년 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보통의 시골 초가집이다. 위로 올라가니 ‘시문학파 기념관’이 있다. 근래 만들었는지 슬라브의 새 건물이다.
다음으로는 맞은 편에 있는 세계모란공원으로 갔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안쪽 정원으로 모란꽃과 작약꽃이 활짝 피어 있다. 일부는 시들었지만 울타리 옆 그늘 쪽의 모란이 만개한 걸 보면 양지쪽은 화기(花期)가 조금 지났나 보다.
세계모란공원 입구
안으로 들어가니 정자가 있고 영랑의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의 시비가 보였다. 교과서에 실려 있어 국어시간에 배운 시이다. ‘… 나는 아즉 기둘니고 잇을 테요, 찬난한 슬픔의 봄을’. 역설법, 도치법을 써서 매우 인상 깊게 마무리한 이 끝 구절이 압권이다. 시험에 많이 출제되었던 부분이다.
벤치에 앉은 김영랑의 좌상 옆에 나도 앉아서 사진을 촬영했다. 포토 존이다. 그의 약력을 보니 1919년 3월 강진에서 독립만세를 거사하려다 경찰에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일제 치하에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독립지사였는데 아쉽게도 6•25 전쟁 중 9•28 수복 때 유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영롱한 언어를 구사하고 유려한 문장을 써 여성적인 시인으로 알았는데 독립의식을 가진 강인한 지사였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의 유명세 영향으로 이곳에 모란공원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영랑의 생가와 시문학파의 기념관이 있고, 그 옆에는 영랑 생가길이 있는데 길가의 양쪽에 기념품상이 줄지어 있다.
모란 공원 안에는 사계절 모란원이라는 하우스가 있는데 여러 종류의 꽃들이 그야말로 백화난만(百花爛漫)이다. 유럽에서 들여온 아열대성 꽃들이 많았다. 키가 큰 와싱턴 야자가 하우스의 중앙에 우뚝 서 있고, 천사의 나팔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여러 개가 폭넓게 피어 있다. 빨간 솔이 매달린 것처럼 핀 병솔나무꽃 등 희귀한 꽃들이 여러 가지 구조물에 보기 좋게 배치되어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와!” 하고 여러 번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 모란 공원에 적기(的期)에 왔구나 싶었다. 참 좋은 계절에 온 것이다.
모란공원의 영랑시비
공원을 내려오다가 강진군청에 들렀다. 민원 안내자가 있어, 강진에서 자기세계를 꾸준하게 추구하는 예술인을 취재하고 싶다니 윤00 가죽공예가를 소개해 주었다. 그 분을 만나 취재를 하고 싶다고 간곡히 사정하니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하여 뵙고 싶다고 전화를 했더니 갑작스런 사람의 전화라 상당히 망설이셨다. 지금 강진에 여행을 와 있으니 오늘 이 시간 이후, 또는 내일 오전 중에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밤 8시면 가능하다 하여 강진 의료원 옆 커피숍으로 만날 장소를 정했다.
시간이 5시간 정도 남아 있어 강진의료원에 갔다. 두드러기를 보여주고 2년 전에도 이런 증세가 있었다고 말하니 처방전을 주었다. 주사를 맞고 약을 구했다. 강진 관광지도를 보니 국가공원의 캠핑장이 나와 있다. ‘잘 됐다’ 하고 가 보았더니 강진에 들어올 때 본 호수공원이다.
캐라반이 두어 개가 주차된 캠핑장이 있고, 공원 끝까지 가보니 끝 부분이 야영장이었다. 야영객은 한 사람도 없지만 화장실과 수도, 주차장이 있는 중간, 공원 끝자락에 텐트를 치면 되겠다. ‘됐다. 가자 3시간 안에만 도착하면 저녁을 먹고 8시까지 커피숍에 나갈 수 있다. 그 사이에 탐진강 하류의 강진만을 달려보자.’ 즐거운 마음으로 강진만 생태공원으로 달렸다.
포구가 좁아지는 갯벌 끝으로 가면 생태공원이 나올 것으로 판단하고 갔는데 생태공원과는 다른 곳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어 남포마을의 강진만 생태공원 입구를 찾았다. 갈대가 보이는 곳에 자전거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앞서가는 부부가 있어 인사를 하고, 수원에서 왔다니 자신도 수원에서 살다가 2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며 반가워했다. 이 자전거길로 바다를 보고 2시간 달리면 가우도가 나오는데 거기를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가죽공예가와의 약속 때문에 1시간 정도만 달리다 돌아와야 했다. 또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야 텐트도 치고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
자전거길이 끝나고 일반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민박집이 있어 요금을 물어보니 5만원인데 오늘은 방을 치워놓지 않아 손님을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 더 이상 갈 시간이 없어 자전거를 돌려 호수공원으로 돌아왔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 먹었는데 10분 전 8시다. 약속 장소로 서둘러 갔더니 정확히 8 시인데 커피집이 문을 열지 않았다. 공예가에게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다. “오늘 손님이 오시어 내일 오전에 만나요.” 하는 문자가 1시간 전에 왔는데 신호음을 듣지 못했고 휴대폰을 보지 않아 미리 알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음식물과 물품을 구하려고 시내로 들어갔다. 먼저 추위를 대비하여 핫팩을 구하려고 마트 몇 군데를 가 보았지만 없었다. 번화가를 한 바퀴를 돌다가 많은 잡화점이 있는 곳에 가니 핫팩이 있었다. 몇 개 사고 마트에 들러 과일과 식품을 구했다.
호수공원으로 돌아오는데 공원 주차장 옆의 캠핑카에서 TV 모니터를 켜고 노래반주기에 맞추어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가가 구경을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술을 권했다. 잠시 후에는 사회자가 나에게 노래를 하나 부르라고 권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좋습니다.” 하고 명함을 한 장 주었더니 이름을 불러 나오라고 했다.
가사를 모두 외우는 노래, ‘해후’를 불렀다. “앵콜”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으나 손님이 거듭 노래하면 실례가 되겠기에 사양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옆 사람이 잔을 건네며 맥주를 따라 주었다. 그냥 받아먹기가 미안하여 시내에서 사온 과일 한 봉지와 소주 한 병을 내놓았다.
두어 명이 노래를 이어 부르더니 다시 내게 노래를 권했다. 나가서 또 하나 불렀다. 어느 부부가 구경을 하니 사회자는 그분에게도 노래를 권했다. 그러나 그 부부는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나와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면 분위기가 더 고조될 건데 끝내 나오지 않아 분위기가 식었다. 잔치에는 손님이 많아야 기분이 좋고, 음식을 대접하면 맛있게 먹어줘야 기분이 좋은 건데 구경 온 부부는 끝내 참여하지 않고 싱겁게 서 있었다.
오래 앉아 있으면 일행들에게 불편을 줄까 봐 몇 잔 마시고 일어났다. 인사하고 텐트로 돌아왔다. 3년 전 국토종주 때도 수안보 축제장에서 노래자랑에 나간 일이 있다. 그때 노래를 부르고 상품권을 받은 일이 있어 좋은 추억으로 간직했는데 오늘도 노래 부를 기회가 있었다. 혼자서 고적하게 다니는 나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텐트로 돌아와 과일을 먹으려고 칼을 찾으니 없다. 아차! 아까 과일을 주면서 그 봉투에 칼을 넣어 두었던가 보다. 이게 무슨 낭패인가. 사과를 씻어 껍질까지 먹었다.
캠핑카 주변에 칼이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쓰레기 버린 곳을 잘 살펴보면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다음날 새벽에 가보았다. 언제 치우고 정리했는지 캠핑카 주변에 있던 간이 의자와 식탁 등 모든 것이 모두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비닐 봉투는커녕 쓰레기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캠핑카는 문이 닫혀 있고, 적막한 걸로 보아 안에서 한 두 사람은 자는 것 같아 그냥 돌아왔다.
이번 여행이 끝날 무렵 짐을 정리하다 보니 가방 속에 과도가 들어 있다. 짐을 가방 몇 개에 담아 놓으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애를 태우는 일이 가끔 있다. 아니 내 기억력이 감퇴되어서 그런 것일까, 그 만큼 늙은 것일까?
5월에 한 여행을 12월에야 여행기를 썼다. 10월 말까지 전국 일주 여행을 하느라 여행기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인터넷으로 강진 호수공원을 검색했다. 어느 블로그에 있는 글을 보니 그때 캠핑카에서 노래를 부른 내용이 나와 있다. 사진과 동영상도 올라와 있어 열어 보았다. 해가 지기 전의 장면이라서 내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동영상에 나오는 그 10여 명은 어느 보험회사 직원들인데 단체로 야유회를 나온 거였다. 아내와 함께 그 글과 동영상을 보면서 웃었다.
4. 가죽공예가의 탐방
호수공원에서 텐트를 걷어 자전거에 싣고 윤00 가죽공예가의 작업실이 있는 남포마을회관으로 9시에 출발했다. 네비를 따라 갔는데 찾지 못하고 지나쳤다. 되돌아가다보니 남포1리 마을회관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여 공예가에게 전화하니 맞다고 했다.
10분쯤 기다리니 그분이 오셨다. 60세 전후로 보이는 아담한 여성이었다. 작업실에 들어가니 작업대와 작업에 필요한 많은 도구와 그릇, 염료와 붓, 등이 있었다.
가죽 공예를 하게 된 동기를 여쭈었더니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해남에서 출생하셨는데 그 지역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치는 분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기타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다. 노래를 한번만 들어도 연주할 정도로 음감이 발달된 분이었다. 솜씨도 좋아서 아버지 손이 가면 모든 게 아름답게 바뀌어졌고 쉬는 틈이 없었다.
어느 날 동창회에 나가려니 들고 갈 마땅한 가방이 없었다. 집 한쪽에 버려지듯 걸려 있는 모시옷의 실을 풀어 코바늘로 가방을 만들어 보았다. 이삼일을 꼬박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만들어 들고 갔다. 가방이 특별하니 친구들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내가 만든 거라니 참 예쁘다고 칭찬했다. 그 중에 미대를 다니는 친구의 말이 인상 깊었다.
“야! 그 가방 기발하다. 대통령상 감이다. 너 공예를 전공해 봐라.”
그런데 8남매나 되어 재능을 살려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남포 마을의 청년에게 시집을 와 농사짓고 아이들 기르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학교 다닐 때 이런 일도 있었다. 그림을 그렸는데 선생님께서, “예술에는 100점이 없지만 이 교실에서 100점 넘게 주고 싶은 학생이 있다. 그 학생이 윤00이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학교 다닐 때 각종 미술 대회에 나가 여러 번 수상을 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니 시간에 여유가 생겨 내 재능을 살릴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가죽 공예 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20년 전 그 당시에는 가죽 공예 전문가가 별로 없었다. 가죽 공예를 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어느 집에 가보니 가죽 카페트가 깔려 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나도 이렇게 만들 고 싶고,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죽은 문지르면 빛이 나고 쓰면 쓸수록 부드러워지는 소재다. 겨울엔 덜 차갑고 여름에는 끕끕하지 않아서 좋다. 오래 쓰면 쓸수록 윤기가 난다. 그래서 가죽의 매력에 빠져 가죽 공예를 시작했다. 그 후 가죽 가방을 예쁘게 만들어 여러 사람에게 선물했다.
그렇게 가죽 공예의 공부를 하며 전시회도 여러 차례 했다. 여러 미술대회에서 수상을 하여 이제는 전문가로 인정받아 공예작품 심사도 다닌다. 또 초빙 강사로 나가 지도를 한다. 한양예술대전 문화상을 수상했고, 한국가죽공예협회 전남지부장 일도 했다. 또 한국예술대전의 심사위원도 했다.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은 내 가슴에, 내 피에 흐르는 예술적 갈망이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시선을 국내에서 세계로 돌려보려고 적금을 깨서 프랑스에 갔다. 루비이똥 본점에 가보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다른 사람들이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가보니 본점의 바닥에 설립자와 3~4대 이전의 설립자까지 이름을 새겨 놓았다.
딸이 미술을 전공했는데 어미가 하는 일을 존중하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하는 가죽 공예를 계승할 거로 기대하고 있다. 나를 보고 배운 건지 유전 영향인지 모르지만 그 딸도 중학교 3학년 때 소풍을 가게 되자 밤늦도록 가방을 만들어 자랑스럽게 가지고 갔다. 세계적인 메이커 루비이똥이 대를 이어가듯 나의 공예도 딸이 이어가면 좋겠다.
파리에 가면 아름다운 여자들만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때 한국적인 디자인과 색상으로, 즉 한복 모양으로 만들어 입고 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호평을 받았다. 세느강 가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좋겠다 싶어서 자신이 제작한 가죽 가방을 상품으로 내걸고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외국인들이 “원더풀” 하며 몰려왔다. 일행들과 작별할 때, 분위기를 내가 살려주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남포마을로 와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게 아쉬울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직에 있는 오빠가 와, 강진만 바닷가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부자구나. 이 멋진 갈대밭과 바다가 다 네 거로구나.”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보이는 건 모두가 내 거였다. 아침에 해만 맑게 떠도 기분이 좋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돼 기쁘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집 주변에 꽃을 심고 명찰을 달았다. 자신도 꽃을 심고 국화를 길러 여러 기관에 꽃을 보낸다.
윤 공예가의 표정이나 말씨가 풋풋한 10대 소녀 같다. 그렇게 발달된 감성이 있기 때문인지 가죽 공예를 하면서 시를 썼다. 작년에는 어느 문예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필자는 그에게 꿈과 소망을 물었다. 뜰이 넓은 2층집에 살고 싶다고 했다. 1층은 작품 전시장으로, 2층은 작업실과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쓰고 싶다. 글쓰기 좋은 바닷가에 집을 갖고 싶다는 헤세의 글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내 나이가, 피카소가 도자기를 접할 때의 나이가 된 것 같다.
늦은 나이에, 자신의 소질과 재능을 계발하여 가죽공예가로 변신한 윤00 씨가 존경스러웠다. 아직도 공부할 게 많은 학생처럼, 배우고 연구하며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걸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꿈 많은 소녀다.
자신의 세계에 꿈과 자부심을 가진 소녀와 인터뷰하느라 두 시간이 금세 지났다.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려 했는데 윤00 씨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친구도 한 명 불러서 같이 동행했다. 윤00 씨 차에 자전거를 싣고 장흥으로 갔다.
조용한 한정식 집으로 가서 떡갈비를 사주셨다. 그리고 산자락에 있는 전남 문화재, 고영완 고가(古家)에 안내해 주었다. 집 뒤에 커다란 참나무와 대나무가 어울려 깊은 산골 같았다. 그 마을의 배롱나무 군락지인 송백정도 돌아보았다. 200년이 넘은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못가에 심어져 아주 운치 있는 곳이었다.
장흥 토요 상설시장 앞으로 흐르는 개천을 건너 산책한 후 작별 인사를 했다. 뜻하지 않은 식사도 고마운데 자신이 디자인해서 제작한 가죽 제품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고맙다. 선물이란 기억을 위한 보물이다.
윤 공예가가 준 선물, 가죽 제품과 책을 부치려고 우체국을 찾아갔다. 하필 석가탄신일이라 공휴일이었다. 가게에 들러 봉투를 사고 우표를 사서 붙여 우체통에 넣으려고 했는데 제품의 장식이 걸려 우체통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무겁지만 가방에 넣고 순천만 방향으로 달렸다. 다음날 율포의 우체국에서 부쳤다.
6. 수문 해변과 율포해수욕장으로
수문해변 방향으로 안양면의 지방도로를 달리는데 특이하게도 종려나무 가로수가 이어져 있다. 이곳이 따뜻한 지역이라 무화과나무 등 아열대성 나무가 자라나 보다. 그런데 잎이 시든 게 많이 보였고 무성하지 못했다. 종려나무로 가로수를 심은 발상은 신선한데 이 지역에서 잘 자라기는 어려운 기후인 것 같다. 조금 심어 놓았겠지 했는데 무려 십리 이상이나 이어졌다.
수문리 해변에 도착, 정자가 있어 빵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쌀쌀하여 바다가 초라했다. 해변 끝까지 가보니 산자락 끝에서 길이 끝나 돌아나와 스파리조트 옆 지방도로로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갔다. 리조트는 높은 건물이었는데 노래방이 있는지 노래 소리가 들렸다. 24시간 찜질방도 있다. 저녁 시간이라면 이곳에서 하루 묵고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라이딩을 마치기에는 조금 일렀다.
가다가 길가에 백사정(명교해수욕장) 표지판이 있어 보니 ‘남도 이순신 길, 조선 수군 재건로’라 씌어 있다. 스토리 테마 길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되어 명량대첩 이전에 수군, 무기, 군량 등을 모집하며 지나간 역사적인 길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장군이기에 역사적 내용을 발굴해 놓은 것이리라.
바닷가로 조금 더 가니 율포해수욕장이 나왔다. 길을 출입하는 아치문에 “율포솔밭 낭만의 거리”라는 표지판이 크게 걸려 있다. 이름만 거창했다. 다만 솔밭 입구에 문정희의 시, ‘율포의 기억’이 게시되어 있어 자세히 보았다.
“…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 …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 먹이를 건지는 /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이 대목이 인상 깊었다. 그렇다. 먹이, 즉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모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면서 사는 게 서민의 현실이고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녀를 데리고 와 보여주었을 거라는 상상을 시로 쓴 것이다. 시인이 의미를 발견하여 전해주는 감동이다.
흐린 하늘은 결국 몇 방울씩 비를 떨구었다. 솔밭에 텐트 친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비 때문에 오늘의 야영은 포기했다. 민박집을 찾아갔다. 길가에도 민박집이 있었지만 조용한 집을 찾아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집이지만 지낼만해서 요금을 물으니, 3만원. 저렴하다. 값을 치르고 들어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짐을 풀어 정리하고 있는데 주인이 노크를 했다. 문을 여니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잔다. 따라 안채에 들어가니 가족들이 밥을 먹으려고 상 앞에 앉아 있다. 밥을 먹으면서 여행 과정을 이야기 하다 사문리 해변에 시비 공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못 보고 와서 아쉽다고 했더니 밥을 먹고 주인이 사문리를 가자고 했다.
주인의 차를 타고 사문리 해변에 갔다. ‘정남진 종려거리 조성기념탑’ 이 있고 주변에 종려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다. 또 1 m 남짓 크기의 바위에 시를 새겨 놓은 시비가 여러 개 해변에 세워져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런 시비가 해안가에 배치된 것을 보니 매우 기분이 좋다. 민박 주인을 잘 만난 행운이다.
종려나무 가로수 조성의 기념탑
7. 득량만과 벌교의 금계국 꽃길
아침밥을 짓고 있는데 주인이 아침 식사를 하자고 오셨다. 고마운데 이미 밥을 앉혀 놓아 사양했다. 3만원 주고 방을 쓰고 밥을 두 번이나 얻어먹으면 이건 숙박비가 공짜인 셈이다. 민박을 참 잘했다.
월포 해변으로도 자전거길이 있는 걸 모르고 지방도로로 올라가 득량만을 향하여 달렸다. 제1수문교 방조제 옆으로 난 자동차 길로 들어가니 노란 금계국이 곧은 길가에 쭉 활짝 피었다. 그 노랑꽃 위로 빨간 넝쿨장미가 이중으로 피어나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화려한 꽃길이었다. 사진을 여러 장 촬영했다. 지나가던 차들도 거의 멈춘 후, 사진을 촬영하고 갔다.
득량만 방조제 꽃길( 이 길은 연중 이때가 가장 화려한 시기였을 것임)
벌교로 가서 대교를 건너 우측 개천으로 내려갔다. 개천 둑에 자전거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내려가 보니 벌교생태공원이다. 그 개천을 따라 가면 순천만까지 연결될 것 같았다. 둑길을 따라 노란 금계국이 왼쪽에 활짝 피었고 오른쪽에는 녹색 잎 끝이 노란 금편백나무가 길을 따라 심어져 여기도 매우 아름다운 길이었다. 5월의 개천가에 노랗게 핀 꽃은 대부분이 금계국이었다. 언제 이렇게 이 꽃이 전국에 번졌을까.
왼쪽 금계국, 오른쪽 편백나무와 벌교의 벌
둑 위 정자에서 60세 전후의 남자가 색소폰을 들고 앉아있다. 색소폰 연주를 하러 온 것 같았다. 노래를 연주해주실 수 있느냐고 여쭈니 노래 반주기를 틀고, 반주에 맞추어 배호가 불러 히트했던 ‘마지막 잎새’를 연주했다. 이어 몇 곡을 연주했다. 갯벌에는 온통 갈대가 자라 펼쳐져 있다. 햇빛도 밝은데 넓은 벌이라 시야가 시원했다. 색소폰 소리까지 구성지게 울려 퍼지니 분위기가 좋다.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고 아내에게 휴대폰의 페이스 톡으로 그 장면을 보여주었다. 아내와 동시에 이 벌교의 명장면을 볼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아름다운 천변, 분위기 살리는 색소폰 연주, 하늘까지 맑았다. 마침 술도 있어 몇 잔을 마시니 세상이 온통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여기서 가지 못해도 좋다. 텐트도 있고 취사도구도 있으니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마치 이 시대에 살아있는 집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명함을 드리고 나를 소개하니 연주자도 나에게 명함을 주었다. 어느 민간 항공사의 기장이었다. 전에 메이저 항공사의 조종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지금은 헬기를 조종하는 기장으로 전직하여 근무하는데 오늘 쉬는 날이어서 연주하러 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색소폰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마이크를 가지고 다니면 좋겠다고 했더니, 이곳을 많은 사람이 지나갔지만 단 한 곡도 제대로 듣고 가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모두 스쳐 지나가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나를 위해 연주해 주시어 고맙다며 내가 쓴 책을 한 권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명함이 없어졌다. 그분이 내 명함을 보고 원망을 했을 것 같다. 그 기장님이 내 명함을 보고 전화를 한번 해 주었다면 책을 보내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분도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연락을 나눌 수 있었다면 이번 만남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도 있었으련만….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벌교 생태공원 옆 둑에서의 색소폰 연주자
벌교에 관광을 가면 태백산맥문학관을 가고, 꼬막을 먹고 돌아간다. 그런데 벌교에 가면 꼭 벌교의 뻘을 보러 가는게 좋겠다. 뻘이 넓게 바다로 펼쳐져 있는데, 까만 뻘이 햇빛을 받아 윤기가 반짝이는 걸 보면 그것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었다.
벌교읍 호동리 마을 정자에서 잠깐 쉬었다. 동막2교를 지나 자전거길을 네비로 찾아 논길로 내려갔다. 시골 마을을 지나고 순천시 인월동의 논길을 상당히 달렸다. 날이 어두워져 라이트를 켜고 비포장도로도 달렸다. 논길과 갈대밭 사이를 달리는데 고양이인지 살쾡이인지 라이트의 불빛을 받은 두 개의 눈이 노랗게 반사되었다. 내 쪽을 응시하다 서서히 갈대 숲속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가고 배는 고픈데 순천만은 나오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무조건 개울 쪽으로 30분쯤 달려 간신히 개천 둑을 찾았다. 둑 위로 올라가니 멀리 불빛이 보이는데 거기가 순천만 생태공원인 것 같았다. 비포장이지만 둑길이라서 수월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 불빛 쪽으로 달려가니 순천만 공원이 나왔다. 밤 9시가 넘었다.
야영할 곳을 찾아야 텐트를 치고 저녁 식사를 해결할 거라서 습지 생태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야영할만한 곳이 없다. 공원 앞 편의점에 가서 야영장을 물어보았지만 모른다고 했다. 가게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1 km 쯤 가면 오른쪽에 야영장이 있는데 지금 개장을 했는지 모르겠단다. 자전거로 500 m 쯤 가보니 불빛이 보이지 않고 캄캄해서 찾지 못하고 다시 생태공원으로 돌아왔다. 가게 뒤쪽에 민박집이 있지만 되도록 야영을 하고 싶었다.
순천만 자연생태관 건물에 불이 켜져 있어 현관에 가니 문이 잠겨 있다. 이곳에서 야영해도 되는가를 묻기 위해 문을 흔들며 사람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사무실이 2층이라서 들리지 않는지 인기척이 없다.
화장실 뒤쪽 잔디밭에 텐트를 쳤다. 화장실에 가다가 하얗게 시멘트 길처럼 보여 발을 내려딛으니 풍덩, 두발이 모두 빠졌다. 웅덩이였다. 화장실에서 몸과 그릇을 씻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11시가 되었다. 늦었지만 내일 광양에 도착할 것 같아서 만나기로 한 친구와 서각 예술가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피곤한 하루, 불편한 잠자리, 차갑고 외로운 밤이 깊어 갔다.
7. 순천문학관과 국가정원을 보고 광양으로
아침에 밥을 해먹고 텐트를 걷는데 청소하는 이가, 화장실 옆의 데크 위에 텐트를 쳐도 된다는 것이다. 공연히 한쪽 구석에 텐트를 치고 마음 졸이며 잤나 보다.
짐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순천문학관을 찾아 상류로 1 km 정도 올라갔다. 둑 왼쪽으로 초가집 9개 동이 있다. 순천문학관이라기보다는 소설가인 김승옥과 동화작가인 정채봉의 문학관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순천 출신의 작가로서 많이 알려진 두 작가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볼 수 있도록 정리, 게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평일의 이른 오전이라 한두 사람이 개관 준비를 하고 있을 뿐 관람객이나 해설사, 안내자도 없다. 혼자서 다목적관을 보고 김승옥관으로 들어갔다.
그의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 되는 무진은 우리나라에 없다. 무진이란 지명을 썼을 뿐 실제의 소설 속의 배경은 순천이라 한다. 그는 1960년대 소설 작품을 발표한 뒤 영화계로 자리를 옮겼다. '무진기행'을 각색한 영화 '안개', 김동인의 '감자',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을 각색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여 시나리오 작가로 더 명성을 얻었다.
정채봉은 '오세암'을 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화작가다. ‘오세암’은 설악산 오세암에 전해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동화로 재구성했는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 동화는 에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후, 국제에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또 그의 동화집이 독일과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는 샘터사의 기자, 편집부장, 기획실장, 이사 등을 역임했는데 그가 한국의 대표적인 동화작가로 활약하던 시절, 나는 ‘아동문학평론’지의 편집위원으로서 취재를 하기 위해 몇 사람과 함께 그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낮고 넓은 책상을 이용하였는데, 책장이나 방의 정돈이 너무 잘 되어 있어 놀랄 정도였다. 그의 문학관에는 그의 생애와 육필 원고 등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넓은 순천문학관을 혼자서 돌아보자니 쓸쓸했다. 초가집 흙담에 몇 그루 빨갛게 핀 장미꽃이 선명했다. 문학관을 나와 개천 옆의 자전거길로 순천만 국가정원을 향해 출발했다.
순천문학관 입구 안내판
둑길을 타고 가다 다리를 건너 다시 개천 둔치의 자전거길, 상류쪽으로 달렸다. 30분쯤 달려가니 순천국가정원이 나왔다. 정문에 가니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줄을 서서 입장했다. 자전거를 정문에서 100여 m 떨어진 담장 옆에 세워두고 들어갔다.
5월의 햇살도 상당히 따가웠다. 날씨가 청명했기 때문에 국가정원의 수많은 꽃들이 더욱 화려하게 보였다. 어느 TV 방송사에서 취재를 왔는지 국가정원의 해설사가 안내를 했고, 여성 모델을 주인공으로 동영상을 촬영했다. 나와 이동 경로가 같아서 여러 번 조우했다.
여러 나라 정원의 모습을 축소판으로 만들어서 전시한 형태였다. 정원의 중앙에는 호수와 같은 못을 만들고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높은 전망대도 만들었다. 공원이 매우 넓어서 한 바퀴 돌아보는데 두 시간은 걸린 것 같다. 점심은 공원의 가게에 들어가 빵으로 해결했다.
순천국가공원
국가정원에서 나와 광양읍으로 가는 길을 네비로 찾으니 방향이 잘 잡히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몰라 부동산 소개소에 가서 물어보았다. 그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워 자전거 네비에 의존했다. 그런데 위성과 연결이 안 되는지 네비가 작동하지 않았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여 반대 방향인 해룡면사무소 방향으로 달리는 바람에 길을 찾기도 어려웠고 많이 돌아가야 했다. 가까스로 광양읍사무소에 2시쯤 도착했다.
3시 약속이라 읍사무소에서 양말을 빨고, 뜰에서 기다리며 가방을 정리했다. 3시에 교직 친구인 이승우 선생을 만나 그 친구 집으로 갔다. 짐을 내리고 몸을 씻은 후, 친구의 차를 타고 광양 시내로 나가, 교직에서 퇴직하고 인생2막을 살아가는 분을 만났다. 다양한 문화활동을 하며 인생 2막을 보람차게 지낸다고 했다.
이순신대교의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에 올라가 조망을 하고 시내의 음식점에서 서각가 박육철 선생님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박 선생님은 매우 호탕하고 밝은 성격이어서 격의 없이 대해 주시었다. 서각 예술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자신의 이력과 일상사에 관한 말씀을 주로 하였다. 나의 기대나 의도와 달리 화제가 일상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2차는 친구 집 앞의 퓨전 생맥주 집에 갔다. 주제 없는 일상사들은 나에게 흥미 없는 주제였다. 11시 30분쯤 일어나 친구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들었다.
8. 섬진강교로 진입,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
아침 일찍 친구가 출근을 하기에 함께 집을 나왔다. 부인이 떡과 토마토를 싸 주었다. 귀찮을 텐데도 반갑게 대해줘 고마웠는데 황송하게도 간식까지 챙겨주었다. 무척 고마웠다.
광양 서천변을 달리다 광양읍 시가지로 들어가 광양경찰서와 광양시청을 지났다. 금호동 포스코기술연구원 옆을 지나 태인교를 건너서 시가지를 달리다 편의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강변길로 달리다가 태인대교를 건너 다시 우측 강변 자전거길로 달렸다. 이 길로 가면 정병욱 박사의 옛집을 들릴 수 있다. 이 집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를 숨겨두었던 정병욱 박사의 옛집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기념으로 시집을 발간하려고 공책에 써, 이양하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그러나, 그의 시 중 일부가 일본 경찰의 검열에 걸릴 것을 염려하여 선생님은 발간을 보류 시켰다. 그래서 윤동주는 필사본 세 권을 만들어 한 권을 이양하 선생님께, 그리고 한 권은 2년 후배인 정병욱에게, 한 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그 뒤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그 필사본 공책을 해방 후에 발간한 것이다.
정병욱은 징병으로 입대하면서 그 공책 시집을 잘 보관해 달라고 어머니께 맡겼다. 이 시집이 아주 중요한 거니 내가 군에서 살아오지 못하면 훗날 연희전문에 보내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주 소중한 것으로 여기어 명주 베로 싸서 항아리에 넣고 마루 밑에 묻어두었다. 다행히 정병욱은 해방이 되어 살아서 돌아왔고, 그 공책에 있는 시와 다른 시들을 합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했다.
그리하여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졌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이야기다. 동주는 우리나라의 암흑기에 시를 쓴 시인으로 평가받았고, 지고지순한 청순성의 시, 기교가 필요 없는 시, 부끄러움의 미학 등의 호평을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윤동주의 ‘서시’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중국 사람들도 흠모하는 시인이다.
그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어 이 망덕포구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무슨 실수이던가. 그 유명한 역사 현장은 안내 표지판이 많이 있어 가다보면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 자전거 길에는 그런 표지판이 없었다. 부산 방향의 섬진강휴게소까지 와서야 한참을 지나온 것을 깨달았다.
섬진강 자전거길을 달려보고 싶었다. 망덕포구에서 섬진강으로 올라가는 자전거길이 있어 부산으로 가는 중에 섬진강도 달려볼 수 있어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즐거운 생각으로 정병욱 박사의 옛집을 찾아야 한다는 걸 놓쳐버린 것이다.
더구나 필자가 근무했던 학교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명예퇴직자 공적조서를 4일 안에 제출해야 포상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증빙자료까지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3일 안에 귀가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애초에 이번 여행을 여유 있게 하려고 했는데 갑작그레 3일 안에 마쳐야 하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인 부산까지 가려면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가야 하는 상황이라서 윤동주 시집을 보관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서지 못했다.
그런데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또 하나의 실수를 하게 되었다. 섬진강휴게소를 지나 섬진강 상류로 가다가 경상도로 건너가는 다리가 보였다. 그래서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에게 머리 위의 다리를 가리키며, “저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습니까?” 물었다.
“예. 사람들이 자전거 타고 가던데요.” 라고 대답해 주셨다.
강변길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가 있어 올라갔다. 자동차 도로와 연결되었는데 출입구를 바리케이트로 막아 놓았다. 그렇지만 길 옆 하수구 쪽으로는 공간이 있어 자전거를 들고 넘어 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도로의 갓길로 섬진대교를 건너 계속 달렸다. 그런데 지나가는 차들이 가끔 경적을 울려댔다. ‘왜 놀라게 빵빵거리지? 이 사람들이 촌놈 겁주는 건가?’ 라고 생각하며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동터널이 나왔다. 자전거 앞뒤의 라이트를 켜고 잔뜩 긴장한 채 통과했다.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나들목도 몇 차례 통과했다. 약 1시간쯤 달렸는데 교통경찰 순찰차가 옆으로 와서 정지 신호를 했다. 자전거를 갓길에 정차하니 뒤에서 경찰 두 명이 다가와 주민등록증을 요구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고속도로 주행 위반이라는 것이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는 들어올 수 없는 남해고속국도였던 것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도 자전거가 통행하지 못하는데 고속도로를 자전거로 달렸던 것이다.
경찰에게 고속도로인지 모르고 왔다니, 모르고 왔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통과 시켜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는 그렇다. 그건 맞다. 그런데 나는 톨게이트로 들어온 게 아니고 바리케이트를 넘어 온 거다. 그 바리케이트에 “출입금지, 여긴 고속국도임” 이란 표지판이나 글귀가 있었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고속도로라는 표지판을 보지 못하여 일반도로로 착각한 것이다.
경찰은 다른 차량에서 신고가 들어와 출동한 거니 주민등록번호를 대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내 명함을 주며 전직 교육공무원이었는데 올 2월 퇴직하고 전국 라이딩 여행 중이라며 선처를 부탁했다.
경찰은 전화로 고속도로의 순찰차를 불렀다. 잠시 후에 고속도로 순찰차가 왔고 순찰대원이 다가왔다. 그 차에 내 자전거를 싣고, 나는 순찰차에 태우고 다음 톨게이트인 진교IC를 빠져나와 길가에 내려주었다.
기자가 알았으면 뉴스로 나올 만한 일이다. 우습고 아찔한 일이었지만 지인들에게 몇 차례 무용담처럼 그 이야기를 했다.
진교IC에서 나와 왼쪽 시골길로 가니 1차선의 오르막이라 힘이 들었다,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었다. 네비를 따라 시골길과 논길을 가다 지방도로를 만나 식당 앞 데크에 앉아 주인에게 길을 물으니 친절히 알려주었다. 네비에 나온 자전거길은 산길이라 험하니 사천 비행장 방향의 지방도로로 가서 진주시의 정촌과 문산으로 가라고 지름길을 알려주었다.
그 길로 정촌까지는 무난하게 왔는데 문산으로 가는 길은 지방도로를 놓쳐 네비를 보니 시골길로 안내를 해주었다. 달리다 보니 날이 어두워져 야영할만한 곳을 찾는데 삼웅마을 경로당이 나왔다. 그 앞에는 정자가 있어, 여기서 텐트치고 자면 되겠다 싶었다. 경로당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70대 후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4 명이 있었다. 앞 정자에 텐트치고 하룻밤을 자고 가도 되겠느냐고 여쭈니 그러라고 했다.
물을 얻어 가지고 나와 텐트를 치려고 보니 차량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정자 옆으로 수로가 있는데 바람이 차가울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도로에서 100 m 안쪽에 텐트를 칠만한 공간이 있고 가로등도 있었다.
텐트를 치고 밥을 짓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가까이 와서 쫒았다. 밥을 지어 먹는데 두 마리가 와서 한쪽에 앉아 있다. 고깃덩이를 두어 개 던져주니 하나씩 물고 달아났다. 그 자리에서 먹어도 되련만, 야생 원숭이에게 고구마를 주면 하나씩 들고 달아나듯이 그랬다. 안전한 곳에 가져가 혼자서 온전하게 먹기 위한 야생 동물의 본능적 행동인 것 같다.
잠을 자는데 새벽에 탱크라도 지나가는 듯이 매우 큰 소리가 나더니 훤한 불빛이 텐트 옆으로 지나갔다. 트렉터였는데 새벽 세시도 되지 않았는데 지나갔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깊은 잠을 못 이루고 6시에 일어나 조반을 지어먹는데 할머니 한 분이 냄비를 들고 오셨다.
“김치 좀 가져왔어요,” 하고 주셨다. 어제 김치를 넉넉하게 사왔는데 받아도 가져갈그릇이 없다. 낮엔 날씨가 더워 쉽게 김치 맛이 변질되기도 한다.
정중하게 사양했더니 잠시 후에 물 한 병을 가져오셨다. 그건 감사 인사를 드리고 받았다. 길 가는 나그네에게 뭔가 주고 싶은 그 마음을 그대로 받을 걸 그랬다. 김치가 많으면 찌개로 끓여 봉지에 담아갈 걸 공연히 사양했나 보다.
텐트가 이슬에 젖어 길 위에 널어놓았는데 자동차가 왔다. 치우려고 하는데 자동차가 텐트 위를 휙 지나갔다. 나중에 보니 텐트가 조금 손상되었다. 내가 치우려고 하는 걸 보고도 그냥 지나가다니 참 고약한 사람이다.
9, 봉하마을에서 낙동강가로
문산 방향으로 달렸다. 가다가 옛 철로를 자전거길로 만든 길이 나왔다. 기분 좋게 달리는데 그 길의 방향이 부산으로 가는 길이 맞는지 몰라 지나가는 라이더에게 물어보았다. 맞다고 했다. 그 길을 따라 달려가는데 길가의 뽕나무 가지에 많은 오디가 달려 있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오디를 조금 따 먹었다. 길가의 그늘에서 빵을 먹는데 20세 전후의 아가씨 두 명도 옆에 오더니 치킨과 콜라를 먹었다. 오디가 맛있다고 말을 건네니 자기 집에서도 오디를 수확하여 택배 판매를 한다고 했다.
먼저 일어나 20분쯤 달렸는데, 여성 라이더가 앞질러 가기에 길을 물었다. 대답을 해주곤 잠시 길 안내 겸 동행을 해주겠다고 했다. 친구와 함께 라이딩을 하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사정이 생겨 혼자 왔는데 잘 됐다고 했다. 길을 잃을까 걱정스런 판에 길을 아는 동반자, 그것도 40대의 멋진 여성의 안내를 받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30 kg의 짐을 실은 나는 오르막이 나오면 속력이 떨어졌다. 그 여자를 따라가기 버거워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앞서 가던 그녀는 혼자서 먼저 가버렸다. 아쉽지만 할 수 없었다. 내가 늦으니 그 여자가 짜증이 날 수도 있다. 아니 내 나이가 60대니 40대 여자가 기다려 주겠나 싶었다. 처음엔 마스크와 헬멧으로 나이가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야기 나누면서 나이가 보였을 것이다. 내 나이가 많으니 동행에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반성 역을 지나 조금 달려가니 조그만 식당에서 국수를 팔았다. 국수를 한 그릇 주문하고 휴대폰과 충전지를 전원에 꽂았다. 휴대폰의 네비를 쓰면 충전지 소모가 많아 기회만 있으면 충전을 해야 한다. 60세 전후의 여자 세 분이 국수 가게를 하고 있는데 서로 손발이 잘 맞는지 길을 묻기도 미안할 만큼 아주 바쁘게 일을 하여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식당을 나와 조금 달려가니 경남식물원이 나왔다. 시간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데, 빨리 집에 돌아가서 공적조서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달렸다. 진북, 진동을 지나 마산시로 들어갔다. 김해로 가면 을숙도로 가는 낙동강 자전거길이 있기 때문에 김해로 가려고 마창대교 옆을 지나 마산항, 동마산을 거쳐 진영 방향으로 갔다. 가다 보니 동읍파출소가 나와 길을 묻기 위해 파출소로 들어갔다.
경찰관 3명이 있었는데 먼저 젊은 경찰관이 낙동강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가장 상관인 듯한 분이 그렇게 복잡한 길보다 찾기 쉬운 길로 가라며 봉하마을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봉하마을 가까운 곳에 야영장이 있다는 것이다. 야영장을 찾아야 잠자리가 해결되기 때문에 그 길로 결정했다. 그래서 달려오던 지방도로로 김해대로를 향해 가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의 표지판을 보고 본산입구에서 좌회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이라 봉하마을 표지판이 거듭 나왔다.
가다가 시골길로 들어가니 표지판이 사라졌다. 음식물을 사려고 편의점에 들어가 길을 물어보았다. 되돌아가야 낙동강 자전거길로 갈 수 있는데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네비를 보며 봉하마을을 찾아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8월, 어머니를 모시고 왔을 때와는 동네가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창이 많은 노 대통령의 집이 잘 보였는데 지금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건물이 생기고 주변을 공원화하여 잘 조성해 놓았다. 묘역 입구의 왼쪽에 노 대통령 생가를 초가집으로 복원해 놓았다. 길 오른쪽에는 화장실과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는 건물도 있다.
경찰 복장의 젊은이가 묘소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묘소에 가보니 녹슨 듯한 정사각형의 철판 위에 납작한 바위돌이 얹혀 있다. 바위돌 위에 “노무현 대통령” 이라 쓰여져 있다. 노 대통령의 유언,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는 뜻에 따라 묘소가 소박하고 특이하다. 권위주의를 싫어했던 그분은 그렇게 유서를 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죽어서도 왜구를 막겠다며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묻어 달라한 신라 문무왕이 생각나는 유언이다.
묘소 옆에는 공원을 잘 조성해 놓았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참배객인지 마을 주민인지 몇 사람이 산책을 하고 있다. 날이 어두워져 이 마을에서 자고 가고 싶은데, 여관이나 민박이 없다. 텐트 칠 곳도 없다. 여관을 물어보니 김해 시내로 나가야 한단다. 한 해에 거의 백만 명 내외의 참배객이 온다는데 왜 여관이나 숙박업소가 없을까?
아쉬움을 가지고 네비로 낙동강의 자전거길을 찾아 달렸다. 시골길로 접어드니 날이 저물어 라이트를 켜고 갔다. 앞에 남자가 가기에 가까이 가서 길을 물어보니 대답이 없다. 얼굴을 보니 동남아 사람이다. 말을 하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시골에도 외국인이 있다. 마을을 지나가도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어두운 밤인데다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시골이라 그럴 것이다.
네비를 보며 시골길을 달렸다. 길을 잘못 가면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하는 네비의 멘트가 나와 길을 되돌아가기도 했다. 약 1시간쯤 달려 낙동강을 찾았다. 둑 위로 가다 보니 강가 둔치에 불이 켜져 있다. 화장실이었다. ‘옳거니 됐다. 오늘밤은 여기서 야영을 하자.’ 생각하고 내려가 컨테이너 사이에 텐트를 쳤다.
10. 솔뫼 생태공원에서 삼랑진을 지나 부산 을숙도로
이른 아침인데 화장실 앞의 주차장으로 승용차가 왔다. 두 여성이 내렸다. 무슨 일로 이리 일찍 왔을까 했더니 잔디밭으로 가서 게이트볼을 했다.
짐을 챙겨 둑 위의 길로 달리는데 길 양쪽으로 금계국이 곳곳에 피어 아름답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이렇게 금계국이 많아진 걸까. 가는 곳마다 노란 금계국꽃이 활짝 피어 있다. 특히 하천변이나 길가에 많다.
낡은 표지판에 솔뫼생태공원이라 씌어 있다. 둑이 끝나는 곳에 지천(支川)의 수문이 있고 그 아래 다리인 모정교가 있어 개천을 넘었다. 자전거길 표시가 없어졌다. 앞으로 가다 일하는 할머니에게 길을 물어 산으로 오르는 길로 갔다. 조그만 정자가 있어 잠시 쉬었다가 고개를 넘어 내리막으로 달려갔다. 2 km쯤 가니 캠핑장이 나왔다. 한림오토캠핑장이다. 동읍파출소의 경찰관이 알려주었던 야영장이 여기였나 보다. 어제 텐트 친 곳에서 4 km 쯤 떨어진 곳이니 여기 와서 야영을 했더라면 사람들과 어울려 한결 수월한 잠자리를 이루었을 텐데….
그런데 어두운 밤에는 이 길을 찾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모정교 건넜을 때 자전거길 표시의 청색 선이 없어져 잠시 헤맸기 때문이다. 선이 그어져 있으면 자전거길인 줄 알고 가는데,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한 후 다시 선을 그려 놓지 않으면 길이 끊기는 것이다. 그렇게 청색 선을 따라서 가다가 선이 없어지면 당황하게 된다. 네비를 바로 켜면 되는데, 가다보면 청색 선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그냥 가다가 길을 놓치게 된다.
20분쯤 달려가니 강가에 조그만 가게가 있다. 부산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삼랑진교를 건너 바로 우측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다리를 건너니 우측으로 내려가는 좁은 길이 있어 내려가니 낙동강 둑을 달리는 자전거길이 나왔다. 그 길을 타고 2 km 쯤 달리니 지방도로와 만나는 지점에서 자전거길의 표시가 없어졌다. 마을로 들어가 네비를 켜니 좌측으로 방향 표시가 나왔다. 네비를 따라가다 보니 도로 삼랑진교가 나왔다. 다른 라이더들이 오기에 길을 물으니 내가 갔던 길을 알려주었다. 그 길로 갔더니 다시 이 길로 돌아오게 되었다니 어떤 라이더가 둑으로 가다가 둑에서 내려가야 한다고 자세히 알려주었다. 둑길로 가다보니 역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내가 내려가야 할 곳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통과했기에 길을 놓친 것이다.
드디어 낙동강하구둑으로 가는 온전한 길을 달리게 되었다. 3년 전에 달렸던 길이 맞았다. 서울과 부산으로 이어지는 국토종주 자전거길 표지가 수시로 나왔다. 양산, 구포, 삼락생태공원을 지나니 을숙도가 보였다.
을숙도에 도착하여 기념촬영을 하고 잠시 쉬었다.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하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서류 제출 연락이 와 지름길을 찾았고, 목표 지점인 부산으로 서둘러 달리느라 진해와 남해의 명소들을 탐방하지 못했다.
잠시 쉬었다가 지하철 하단역으로 갔다. 하단에서 1호선 끝 역인 노포역에서 내려 광주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달려온 코스를 지도를 펴고 살펴보는데 버스가 많은 터널을 여러 번 지나느라 어두워서 잠시잠시 멈추어야 했다. 산줄기가 많아 터널이 많은가 보다. 그렇게 산이 가로막아 옛날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왕래가 이루어지지 않아 교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광주에서 내리니 오후 6시경. 자동차 네비를 이용 자동차 도로의 가장자리로 30분 쯤 달리다가 영산강 자전거길을 만나 극락천수공원 주차장으로 갔다. 극락교를 지나니 드디어 내 차가 있는 주차장이 나왔다. 9일 동안 차가 이상 없이 잘 있었을까 걱정했으나 아무 일 없이 차는 그대로 있었다. 유리창에 먼지가 좀 앉았을 뿐 말없이 나를 기다려 준 차가 반갑고 고마웠다. 차에 자전거와 짐을 싣고 나서 간식을 먹었다. 정리하는 것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날이 어두워졌다.
자동차를 타고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와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운전 중, 졸음이 쏟아졌다. 살짝살짝 졸아,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자꾸 졸려 할 수 없이 휴게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휴게소에서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간만 20분쯤 소모하고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갔다. 잠시 후 또 졸음이 밀려와 다시 휴게소로 들어가 잠을 청해 보았지만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4시간 남짓이면 수원에 도착할 것을 7시간이 지나서 수원에 도착했다. 집에 오니 새벽 두시가 넘었다.
아내가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 내가 운전 중 잘 조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도 짐까지 챙겨 가지고 나올 사람이라며 다른 건 걱정하지 않는데 졸음운전에 대해서는 걱정을 한다.
11일 간의 여행.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온 것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이다. 동해안에는 자전거길이 잘 되어 있지만 남해안은 워낙 굴곡이 심한 지형이라 자동차 길도 굽이굽이요, 산맥이 많아 터널도 많다. 대부분 지방도로를 달렸다. 자전거로 고속도로를 들어갈 만큼 아찔한 실수도 했다. 사고 없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고마운 일인가. 나의 여행에 대해 염려하고 격려해준 여러 사람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광주, 목포, 순천, 마산, 김해를 달려 도착한 부산 을숙도, 낙동강 하구둑에서
B. 탐방기
1. 20년을 그리워하다 만난 이정석 선생님
이정석 평론가를 만난 것은 1994년 여름, 일본 오사카에서 한, 중, 일 3국의 아동문학대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오사카로 난생 처음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이 평론가와 동행하며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말씨나 행동, 성격이 온유했고 매너가 깔끔했다. 동년배이기도 하고 같은 아동문학평론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어 머잖은 날 다시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몇 년 후, 필자가 아동문학 평론의 집필을 그만두어 2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동문학 모임이나 행사에서 조우 한 적은 몇 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여행 이후 둘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필자가 평론을 쓰면서 이정석의 동시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한 글은 있었다.
그리하여 이번 남해안으로 라이딩을 가면서 나주에 살고 있는 그를 첫 번째로 찾아가게 되었다. 나주의 산골마을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며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하였고 중등학교로 전직하여 영산포 여중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퇴직한 후에도 계속 아동문학 평론과 동시를 쓰고 있다.
네비를 보고 찾아가고 있는데, 도착 2 km 직전에 차를 타고 마중 나왔다. 집 아래에 주차하고 그를 따라 집에 들어가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다. 정년퇴직한 이 선생님은 이제 흰머리가 많아지고 주름 골도 깊어졌다.
잠시 후에 집을 나와 산 위에 있는 문성암에 갔다. 지공 스님이 아주 반갑고 친절하게 맞아 주셨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것 같았다. 스님은 내실로 들어오라 하더니 다도의 예법으로 차를 끓여주셨다. 불도의 내용을 중심으로 교훈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데 수행자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통찰력이 나보다 10년은 선배인 것 같았다.
스님이란 말은 승(僧)에 존칭의 ‘님’을 붙이면서 ‘o’이 탈락한 존칭이라는데 선생님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불도를 익히고 수행하여 중생들에게 구도자 역할을 하는 분이기에 스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문성암을 나와 운흥사 입구의 돌장승을 보러 갔다. 장승은 커다란 기둥 같은 나무에 무서운 얼굴로 만들어지는 게 일반적인데 이 장승은 돌에 새긴 얼굴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다. 1719년에 만든 것으로 씌어 있는데, 그 표정이 먼 곳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손주를 맞는 것 같다고 표현한 글이 있다. 8자 수염의 할아버지와 앞니 빠진 할머니의 얼굴이 무섭기보다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 표현에 잘 어울린다.
이 선생님은 영산포로 나가서 저녁을 먹자하여 따라갔다. 돛대가 달린 배 한 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다. 영산포 나루터의 옛 모습을 조금은 재현해 놓은 것 같다. 포구 안쪽에 1915년에 만든 등대 하나가 있다. 내륙에 있는 유일한 등대라는데 그 당시에는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한다. 지금은 영산포가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어 역사 유적으로 남아있다. 등대를 만든 당시에는 소금과 해산물, 나주평야에서 나온 쌀 등이 포구 밖에 쌓여 성황을 이루었다는데 지금은 홍어 요리 식당 몇 곳이 영업을 하고 있다.
둑 위에서 상류 방향으로 잠시 걸어가니 그때 있던 동양척식회사의 문서고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제 때 지은 건물이라 일제 수탈의 과거사가 떠올라 상처 딱지를 만지는 것 같았다.
홍어 요리의 1번지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님이 예약한 음식이 나왔다. 메뉴가 홍어 정식인 것 같은데 삭힌 홍어와 삼겹살이 여러 가지 반찬과 나와 영산포의 홍어 맛을 볼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이 선생님의 집으로 돌아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벽의 삼 면에 장을 배치해 수많은 다기를 정리해 놓았다. 다기 박물관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사모님이 끓여주시는 차를 거듭거듭 마셨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다기를 모았느냐고 물으니, 차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하나둘 모으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단다.
이정석 평론가가 마련해 준 영산강 포구에서의 석식
2. 김왕현 조형연구소장님을 찾아서
그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교사로 임용이 되어 학교에 근무하는 초기인 총각 때부터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퇴근시간 이후에도 미술실에 남아 늦도록 나무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 모습을 본 선배 여교사가 “김 선생, 퇴근도 안 하고 조각만 하고 있으면 언제 결혼해.” 라고 충고해 준 일도 있었다. 그런데 20년 뒤에 같은 고등학교에서 그 선배 교사와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 선배가 결혼을 못해 노처녀로 있었고 그는 결혼을 하여 자녀도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조각을 하면서도 대학원을 다녀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도 여러 곳에서 작품 의뢰를 받고 조형물을 제작했다. 또 조각 작품 개인 전시회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재직하며 작품 활동을 하자니 제약도 많고 시간도 부족하여 용감하게 사직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시간 강사를 할 때는 의료보험도 없어져 치료비가 걱정이 되어 장래에 대해 불안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2년 뒤에 동신대학의 교수로 임용이 되어 안정을 찾았고, 차츰 규모가 큰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대학 교수가 되니 조각과 조형물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더 많은 작품, 더 큰 규모의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광주 5․18 국립묘역 3․1 마당에 부조조형물을 제작했고, 전남 목포시 청사 앞의 김대중 광장의 전 대통령의 동상 등 역사적인 인물의 동상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어서 5・18 때 발포 명령을 거부한 당시의 전남경찰청장이었던 안병하 치안감의 동상도 제작했다. 그 외에도 왕인 박사, 왕건과 장화왕후, 전남을 빛낸 12인(서재필, 윤선도, 정약용, 장보고, 왕인, 정철, 이순신, 초의선사 외 4인)의 흉상, 목포 현충탑, 월드컵 기념 조형물, 4대강 준공기념 조형물, 아덴만여명작전 전적비, 청산도 슬로우시티 조형물, 목포시청 조형물 등 역사적인 조각 작품과 조형물들을 많이 제작했다.
비금도에서 여러 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은 사랑은 물론 마을 어른들까지 귀한 집 자손으로 대우를 해주었다. 초・중학교 때에 미술에 소질이 있어 여러 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그래서 소질과 특기를 살리고자 미대에 진학, 조각을 전공하게 되었다. 고교 교사로 임용되어 가정에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조각에 대한 열정은 그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조각 작품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작품을 만들었다. 나무 조각이 익숙해진 후에는 돌로 조각을 만들었다. 돌 조각에도 자신감이 붙은 후에는 청동(브론즈)으로 조각을 만들었다. 조각 작품 개인전도 어려 차례 개최했다, 그러자, 업체나 기관에서 조형물 제작을 의뢰해 왔다. 고등학교 재직하면서 안양문예회관 건물 앞 조형물, 안익태 동상 등 중요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동신대 교수가 된 후에는 일본,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작품전시회를 개최하며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렇게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 경제적인 여유도 생겨 지금의 조형연구소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연구소에 조형물 제작에 필요한 장비와 시설도 갖추게 되었다. 또 딸과 아들이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교사에서 교수로 전직하고, 조각가로서 역사적인 조형물을 만들며 자기실현을 이룬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타고난 재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꾸준히 자기계발에 힙쓰고, 조각 한 길에 전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전문가, 권위자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초지일관으로 30여 년을 살아온 집념의 거둔 결실일 것이다. 그가 만들어 놓은 작품이나 개척한 경지는 예사롭지 않다.
김 선생님은 점심으로 나주 곰탕을 먹자고 나주 시내의 유명한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식당은 손님이 가득 차, 밖에서 대기하는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른 식당으로 가서 나주 곰탕으로 점심을 먹고 커피 전문점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밤에 술 한 잔 하자는 말씀을 하셨기에 술 한 병 사 가지고 밤에 선생님 댁으로 갔는데 늦은 시간이라 2층 방을 쓰도록 해 주시어 일기를 쓰고 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 사모님께서 귀한 반찬을 만드시어 조반을 지어 주셨다. 식후에는 과일과 차로 후식까지 과분한 대접을 해주시었다. 김 선생님 댁을 그 동안에 세 차례나 방문하여 매번 하루씩 자고 왔다. 선생님과 사모님의 변함없는 온정이 고맙기 그지없다.
조각가 김왕현 선생님(전 동신대학교 교수, 현 김왕현조형연구소장)
3. 섬마을 학생들의 밥을 짓던 선생님
2012년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 중 대상을 받은 조연주 선생님을 찾아뵙고자 미리 연락하고 목포교육청 인근의 식당에서 만났다.
전남의 조그만 섬 마을 조도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야간에 학생들에게 저녁밥을 해준 일이 알려져 훈장을 받으신 선생님이다. 당시의 조도고등학교는 중고를 합하여 전교생이 50명 내외였으니 규모가 작은 학교였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자녀의 저녁밥을 일찍 해주기 어려웠다. 학생들이 야간에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는데 저녁밥을 제대로 먹기가 어렵기 때문에 시작한 봉사였다.
조 선생님을 목포교육청 인근의 식당에서 만났다. 지금은 조도고등학교에서 전남교육청 장학사로 전직하여 전남교육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교사는 교육공무원으로서 임기가 있고, 도서 지역은 순환근무제이기 때문에 전근을 하게 된다.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하면 대부분이 교감, 교장으로 승진한다. 교사로서 승진을 하는 데에 영예로운 과정이 전문직으로 전직하는 길이다. 교사로서 학생을 지도하다가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여 학교를 경영해 보는 것이 일반적인 교사의 소망이다.
그래서 전문직에 진출하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며, 전문직이 된 이후에는 격무에 시달리기도 한다. 정말 힘든 과정이며 고생이 많은 직책이다. 그 과정을 겪기 때문에 관리자로 승진하는데 유리한 점도 있다.
조연주 선생님은 교육자로서의 삶에서 잠시 전문성 함양을 위한 전문직에 있는 것이다. 헌신적인 교사로 재직하다가 잠시 교육청에 근무하는 사실을 필자가 모르고 찾아간 것이다. 사전에 조도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지 못한 불찰이었다.
지금은 섬 마을에서 목포의 집으로 돌아왔고, 교사가 아닌 장학사로 직무가 바뀌어 취재할 방향과 다른 위치에 있어 조금 아쉬운 만남이었다. 그리하여 조 장학사님으로부터 과분한 식사 대접에 고맙기도 했지만 송구스럽기도 했다.
4. 고 회화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는 범해의 작업 현장의 탐방기
(원광대 김범수 문화재보존수복학과 주임교수 )
원광대학교의 주임교수이며 고미술 복원 전문가인 김범수 교수를 만나러 장성으로 출발했다. 김 교수는 중, 고교 동창이라서 같은 반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 호를 범해로 부르는 한국화가이고 교수이며 미술 복원의 개척자요 전문가다.
범해는 조선 시대부터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성의 황룡면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익산에서 다녔고, 지금도 익산의 원광대학원에서 강의하기 때문에 익산이 생활 근거지이지만 이 고향 마을에 화실 겸 작업실을 짓고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갈 산실을 만든 것이다. 자신의 화실이며 생활공간이고, 부모님의 산소와 가야금 병창으로 전남 무형문화재인 동생의 가야금 전수실도 있다.
부슬비가 내리는 5월 19일 아침, 김 교수의 작업실에 찾아갔다. 고등학교 다닐 때 보고 60대가 되어 만났으니 무려 45년 만이다. 순수하던 얼굴이 단단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한국화가로서,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로서, 고미술 복원 연마와 작품 제작으로 살아온 30여 년 동안에 다부진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다.
세월 따라 산천이 변하듯이 문화재도 변할 수밖에 없다. 생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 종(種)의 보호와 복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듯이 문화재 역시 보존이나 복원을 위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투입된다. 고(古) 회화작품의 복원이나 보존을 위하여 김범수 교수는 전남 장성의 작업실에서 역사적인 옛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 교수는 조선 전기에 이자실이 그린 관음32응신도를 2017년에 모사 복원하였다. 이 응신도는 도갑사에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탈취되어 현재 일본 정토종 본사인 교토의 지은원 수장고에 봉안되어 있어 김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모사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 응신도는 조선 전기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함께 양대 회화문화재로 손꼽히는 작품인데 안타깝게도 일본에 있어 모사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기산 풍속도 87점,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8곡 병풍을 현상 모사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교토 고산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원효대사의 진영을 김 교수는 2011년에 모사 복원해 놓았다. 그리고 부처의 그림인 괘불을 2012년에 복원해 놓았다. 그 외에도 프랑스 기메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산풍속도 87점, 또 중앙아시아 벽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악귀상, 공양보살상, 공양장지상, 등을 현상 묘사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소장하지 못한 문화재나 영구 보존이 필요하여 공개하지 못하는 작품을 모사로나마 공개하기 위하여 오래된 회화 작품을 모사해 놓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범해가 독보적이었다.
그는 원광대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고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다가 그림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사표를 내고 일본 교토 시립예술대학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박사과정 중 고 문화 복원학을 전공하여 국내에서는 최초로 회화문화재 복원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범해는 현재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에서 회화문화재보존수복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며 고향에 작업실을 마련하여 회화문화재 복원을 위한 연구와 작업,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있어 유서 깊은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범해의 선조들이 조선 전기에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살아와 자신도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45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 범해 김범수(원광대 교수)
그는 필자와 중고교의 동창으로서 중학교 때는 같은 반에서 공부한 적도 있어 중고교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학창시절에 매우 규범적이었고 진지하여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친구들과 폭넓게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미술에 관심이 깊었고 재능이 있어 미술 공부에 특별히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였고 미술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등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어려운 준비를 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가,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인 원광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박사학위까지 일본에서 취득한 학구파다.
필자가 방문하자 범해는 부모님을 모신 납골탑 앞으로 갔다.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후, 가야금 전수실로 가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창을 불러주었다. 전남 무형문화재 59호로 지정 받은 김은숙은 그의 친 동생으로서 가야금 병창으로 활동하는 국악인이었고, 바로 이 전수실이 김은숙 병창의 연습실이요 후진 양성의 전수실이었다.
범해 역시 강낙성 국악인으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사사 받은 적이 있었다.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그려보고자 지도를 부탁하여 강 선생님으로부터 2년 반이나 배운 것이다. 범해가 가야금 병창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자 강 선생님은 자신의 기능 전수자가 되길 희원하였으나 범해는 화가의 길을 바꿀 수 없어 가야금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
잠시 후, 자신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연유와 미술을 전공하여 회화문화재 복원 전문가로 활동하게 된 경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범해의 작업실 겸 화실
그가 미술교육을 전공하던 대학교 4학년 때와 고교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두 번이나 국전에 입선을 했다.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 유학 준비를 하느라 서류만 120여 가지를 갖추었다. 교토시립예술대학원에 입학하여 일본으로 가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원광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며 석사과정을 마친 교토시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달된 일본의 고 문화재 복원학을 전공, 회화문화재 복원 기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매주 월요일에 비행기로 일본을 왕래하며 수강하였고, 다음날인 화요일에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수, 목요일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강행군을 3년 이상 하느라 말로 다 못할 고생을 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는 고 회화문화제 복원의 개척자요, 첫 주자가 된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약 3층 높이의 넓은 공간이었는데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 수월관음도를 모사 복원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크기가 가로 6 미터, 폭이 1.5 미터는 되는 것 같았는데 채색이 매우 화려했다.
작업실 가장자리에는 넓고 낮은 책상, 여러 가지 화구와 다기(茶器), 여러 전통 악기가 있었다. 가야금, 해금, 비파, 유구리, 중국 고쟁이, 일본 고또(거문고와 비스함), 얼구 등이었다. 그는 가야금 병창에 일가견이 있었고, 소장하고 있는 악기들의 대부분을 연주할 수 있다 했다. 그가 한국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며 고 회화 복원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특별히 발달된 감성과 집중력 덕택일 것이다.
그리고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가야금을 켜며 즐거이 창을 하는 것은 바로 타고난 예술적 감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동생이 국악을 전공하고 가야금을 연주하는 국악인의 생활을 하는 것도 어쩌면 타고난 예술적 감성의 혈통 때문인 것 같다.
범해는 한국화가이면서 고 회화 복원기술의 전문가로서 옛 전통 색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광물을 소재로 천연염료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치면서 터득한 기술 덕택이다. 그는 사단법인 매헌전통예술보존회 일을 보며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본업 외에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로도 무척 분망할 것이다. 그런데 고 회화 작품의 복원 의뢰가 날로 늘어나 일 속에서 묻혀 사는 것 같다. 하나의 작품을 복원하는 데에 2년이 걸리기도 한다니 그야 말로 할 일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 하나 뿐인 몸으로 감당하기 벅찰 것 같다.
다행히 그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사회생활을 떨치고 시골의 작업실에서 그림에 몰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생활이나 삶이 결코 범상치 않다. 자신이 그렇게 한 길로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신념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한 분야에 성공하려면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은 힘이다’라는 ….”
이 말은 그의 지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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