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본격적인 위빠사나는 제4선 이후인가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위빠사나는 느낌과 생각의 '투사', '반영', '조작', '왜곡'의 힘 또는 작용부터 쉬고 보는 문제이다. 그리고 사선은 '조작', '왜곡'을 쉬는 것으로 심, 사, 고(苦), 락(樂), 우(憂), 희, 입식, 출식이 적정하고 정화되어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이 작용하고 있는 한 있는 그대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실지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여실지견의 위빠사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3선에 이어 제4선만의 내용으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결과인 사(捨 , upekh )가 언급되는 것도 위빠사나가 바로 제4선 이후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선은 불선법에서 선법으로 조건적이고 차제적인 연생, 연멸의 과정인데 사(捨)는 다름 아닌 제4선의 최종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는 위빠사나의 중심에 있는 사띠와 사(捨)가 경전에서 항상 같은 선상의 선정 경지로 나타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평정심[捨]이 갖추어질 때 고락의 투사나 조작 그리고 왜곡은 쉬고 여실지견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신행(身行)의 멸(滅)이 호흡과 관련하여 설명되는 것은 제4선과 그 이후의 사념처의 신념처의 내용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것도 또한 위빠사나가 바로 제4선 이후임을 보여준다.{{졸고,<초기불교에 있어 止, 觀의 문제>, <한국선학> 제1호 2000. pp.345-350.}}
사념처에서 첫 신념처가 사선의 마지막 단계인 제4선과 연결되어 있음은 제4선이야말로 위빠사나 수행의 바탕이 됨을 말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신행의 멸(滅)은 초선 상태에서도 아니고 제3선 상태에서도 아니고, 오로지 제4선 이후 상태에서이다.
다시 초선이나 초선 이전에도 사띠라는 말이 언급되고 그리고 위빠사나가 진행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전의 맥락은 이미 제4선이라는 선정 상태가 바탕이 된 것으로, 시설(施設)의 초점은 위빠사나가 중심이 되어 설해지고 있을 때이다.{{졸고,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Ⅰ), 止觀을 중심으로>, <한국선학> 제3호 2001, p.139 n. 43; <초기불교중심교리와 선정수행의 제문제 - 화두선 전통과의 교두보 확보를 위하여>, <불교학 연구회 제22차 학술발표회>, 2004. pp.19-24.}}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음의 정화 단계 상 제3선이나 제4선에서만 있을 수 있는 선법이 초선에서부터 이미 중복되어 나타난다. 또한 이는 법념처에서 오개(五蓋)는 물론 사선 자체가 관찰 대상화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수·심념처에서의 불선법을 관찰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완전히 제거되어 버렸다면 관찰의 대상으로 나타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제4선이나 이후라는 높은 선정 상태에서 가능한 심소(心所) 예를 들면, 법념처의 사각지(捨覺支)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捨), 그리고 심념처의 16가지 중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나 '해탈한 마음에 대한 위빠사나'(vimutta cittan ti paj n ti)의 언급은 불가능하다.
위빠사나 상태는 제4선 이후의 선정 상태에서 초선 이전은 물론 탐진치를 벗어난 상태를 포함하여 해탈심(解脫心)에 이르기까지 가장 넓은 범위가 그 행법의 포착대상이다. 만약 몇몇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초선 이전이나 초선의 상태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 상태라면 그 이후에 가능한 심소는 아예 관찰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초선 이후라야만이 나타나는 선법(善法)을 초선 이전이나 초선의 상태로는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경증과 교리적 논증은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제시하고픈 경전적 근거 하나만을 들어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선과 위빠사나의 사념처 정형구가 보여주는 차제구조이다. 먼저 제사선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낙(樂)도 없어지고 고(苦)도 없어지고(pah na), 이전에 있었던 '기쁨과 근심도 제거된다(somanassa -domanass na atthagam ).' 그리하여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捨, 완전한 평정심)에 의한 염(念, sati)과 청정(淸淨)의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Sukhassa ca pah n dukkhassa ca pah n pubbe va somanassa -domanass na atthagam adukkha asukha upekh -sati -p risuddhi catutthajjh na upasampajja viharati." 한역은 다음과 같다. "離苦樂行先滅憂喜 不苦不樂捨念淸淨 入第四禪."}}
다음으로 사념처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오롯한 정진력( t p )'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sampaj no)' 그리고 '염(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satim )에서이다. 느낌에서 느낌을 … 마음에서 마음을… 법에서 법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염[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idha bhikkhave, bhikkhu k ye k y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Vedan su vedan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Citte citt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Dhammesu dhamm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여기서 초점은 바로 제4선의 '기쁨과 근심도 제거된다(somanassa-domanass na atthagam).'와 사념처의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이다.
양쪽 모두 '근심(domanassa){{여기서는 일단 domanassa를 한역 우(憂)에 따라 '근심'으로 옮긴다. 이 용어에 대한 우리말 번역에 있어 필자는 이전에 여러 번 지적한바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해 이 말을 영역의 영향인지 '혐오'라고 옮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고해야 한다. 이유는 교리 상에 있어 이 말은 수온(受蘊)의 한 종류로 분류되지 행온(行蘊)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이 제거되거나 제거되고 난 후(vineyya{{빠알리어에서 vineyya는 동명사(gerund)로서 문법학자들에 따라 절대분사(absolutive)나 불변화 과거분사(indeclinable past participles)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주로 설명하는 행위의 완료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바로 앞의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k ye k y nupass viharati).'의 주동사인 viharati 라는 행위에 앞선 행위의 완료를 나타낸다. 드물게는 주동사와 행위와의 동시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위빠사나의 사념처는 제4선과 맞물려 수행되고 있음을 역력하게 보여준다.}})의 지경'임을 보여주는데, 이는 사념처가 제4선에 바탕하고 있음을 그대로 잘 보여준다.
단계법인 사선에서 왜 근심이 제4선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가는 앞의 사(捨)의 경우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이 같은 사념처의 정형구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는 위빠사나 수행에 앞서 abhijjh 에서 domanassa까지 쉬고 난 후임을 말한다.
즉 초선의 오개 가운데 첫 항목인 탐욕(abhijjh 또는 k macchada)에서부터 제4선의 마지막인 근심까지를 말한다. 즉 앞에서 말한 바처럼 위빠사나는 초선 이전에서 제4선 이후의 해탈심(解脫心)에 이르기까지가 그 관찰대상임을 잘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제4선 이후에 혜학의 위빠사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졸고, <초기불교에 있어 止, 觀의 문제>, <한국선학> 제 1 호 2000. pp.327-330, 337-338}}
<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조준호 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