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주유생의 과거
양정 일행은 온휴장에서 상쾌하게 목욕을 마치고 본격
적으로 녹림채를 향한 걸음을 옮겼다. 나름대로 이번에는
꽤난 심혈을 기울여 때를 벗겨 냈던 터라 세 명 다 거지로
서의 틀을 벗어나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갖
출 수 있게 되었다.
양정의 모습은 원래 어릴 적부터 귀하게 자라났던지라
귀티가 은은히 났고 주유생도 이젠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둘의 변화는 초운의 달라진
모습과는 비교할 수가 없엇다.
그저 막무가내요 추접스런 여자 거지로만 비춰졌던 초
운은 기실 그 외모가 오목조목 귀엽게 생겼고 눈썹은 초생
달 같아서 웃을 때에는 애교가 넘쳐 나는 듯했는데 볼수록
정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볼 때에는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
지 않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없는 그
런 얼굴이었다.
"헤헤, 너 얼굴 좀 괜찮게 생겼구나."
양정이 말끔한 얼굴의 초운을 바라보며 헤헤거렸다. 흑
심을 품고 헤헤거리는 웃음이 아니라 순수함이 깃든 것이
었고 더불어 아주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가 원래 미모가 있는 편이죠, 빵끗."
빵끗이라고 말할 때에는 오른손을 볼아데 대고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가 폈는데 그 모습이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주유생이 껄껄대며 말을 덧붙
였다.
"대장, 내 제자가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섯 여인 중
하나인 것 모르지? 낄낄낄."
"초운이 중원오미(中原五美) 중 한 명이라는 건가요?"
"그래, 맞아. 초운은 그중 네 번째로, 화중화(花中花)라고
불린단 말이야."
"야, 대단한걸."
양정도 중원오미가 있다는 것쯤은 들은 풍월로 알고 있
던 터였다. 중원오미는 차례대로 천상화(天上花)모용란, 천
봉화(天鳳花)조경영, 화중천(和中天)방약란, 화중화(化中花)
초운, 화중미(花中美)은가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모든 강호의 무사들과 중원의 뭇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양정으로서는 그쪽에는 도
통 관심이 없던 터라 세세하게 누가 중원오미인지는 모르
고 있었다.
"대장님도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초운도 답례 차원에서 그렇게 말하고서는 보일듯 말듯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헤헤헤, 그러냐. 고맙다."
하지만 양정이 초운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녹
림채로 가는 데 있어서 오히려 초운의 용모가 방해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괜한 시비를 불러일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정의 염려로 인해 초운은 어
쩔 수 없이 남장을 함과 동시에 눈에 띠는 곳인 얼굴과 양
손에는 흙을 묻혀 그 아름다움을 가리도록 했다.
원래 추접스럽게 지낸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남
장을 하고 손이나 얼굴을 고의적으로 더럽히는 것에 대해
초운이 거부감을 가질 리 없었다.
초운으로서는 그저 사부와 함께 무공을 익히느라 강호
를 활보해 본 경험이 없던 터에 이렇게 신나는 강호 유람
을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우연한 계기로 만난 양정은 호감이 가는 인상에다
가 무공도 뛰어났고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었기에 함께
다니는 것이 그렇게 신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채비를 같춘 그들은 방향을 잡고 본격적인 길
에 올랐다.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녹림채는 호북성의 복망
산에 위치하고 있던 터였기데 진행을 함에 있어서는 경신
술을 이용해 산길을 따라 이동했고 식사를 하거나 해가 저
물면 마을을 찾자 작은 객점에서라도 잠을 청하고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들은 낙양을 떠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점심때가 되어
객점에 들렀다. 사실 왕개촌에서 나올 때 가져온 돈이라고
는 보잘것없어서 하룻밤 숙식하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주
유생이 낄낄대면서 한 번 나갔다 오더니 여유로운 자금을
마련해 왔기에 금전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뒤에 알고 보
니 주유생은 개방의 지역 분타에게 찾아가 태상장로라는
직위를 남용하여 돈을 뜯어냈던 것이다.
개방의 조직은 무림방파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기에 가
는 곳마다 어디에든 그들이 없은 곳은 없었던지라 도움을
얻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양정은 간단히 음식을 시
켜 놓고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했다.
"아무래도 분명 녹림채의 총채주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다짜고짜 그 형편을 알아
보기는 힘드니 우선 우린 녹림채에 산적으로 입문하는 척
하며 내부 사정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양정의 말에 주유생과 초운이 박수를 치며 좋아라 했다.
"야~~, 그거 재미있겠는걸. 그래 이 기회에 산적노릇 한번
해보자구, 대장!! 낄낄낄."
"아이 좋아라. 그럼 산적 연습을 해 봐야겠는걸요, 대장
님. 빵끗."
양정은 소태를 씹은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원래 천
진난만하게 말하며 장난치는 것은 자신의 주특기인데 오
히려 자신은 진진한 듯하고 둘이 더 까불어 대니 기가 막
힐 노릇이었다.
"음, 그런데 이거 녹림채에 가서도 대장이라고 부르실
거예요. 호칭에 대해서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정리를 해 두어
야겠어요."
그 말에 주유생과 초운은 문득 이제까지 왕거지 대장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궁금하게 여겼
다. 양정의 말이 이어졌다.
"제 이름은 성이 양이고 이름은 정입니다. 그러니 할아
버지는 저를 정아라고 부르시고 초운 너는 남장을 했으니
녹림채의 일이 끝날 때까지는 형님이라고 불러라."
초운은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오빠가 아니라 형님이라
는 게 약간 불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녀는 나름대
로 좋아했지만 주유생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대장. 이래봬도 나는 대장의 부하인데 대장한테
그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
그 옛날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결의를 맺을 때도
관우가 제일 나이가 많았지만 유비에게 형님이라고 불렀
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할 거야."
양정을 노려보며 말하던 주유생이 고개를 돌려 초운에
게 말했다.
"낄낄낄, 그렇지 않냐, 제자야~~."
"그럼요. 그럼요. 백번 지다하신 말씀이지요, 호호호."
양정은 어이가 없었다. 뭐 이따위 할아버지가 다 있나라
는 생각뿐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남에게
더 높임 받기를 원하는데 어린 자신에게 끝까지 대장이라
고 하겠다니. 도통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모양새를 보니 아무래도 끝까지 우길 것이 분명했다. 하
지만 기실 주유생은 개방의 태상 장로의 신분이지만 세속
의 예법에 얽매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심사숙고하는 것을 극도로 멀리했기에
제아무리 양정이라고 해도 그를 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
던 것이다.
호칭에 대한 문제는 객정에서 나와 산길을 달려가는 중
에도 계속 이야기가 되었으나 주유생의 고집을 꺾
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양정도 고집이라면 어릴 적부터 버
릇없이 자란 것부터 시작해서 사부로부터 수많은 갈굼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성장한 전력도 있고 해서 그 누구에게
뒤지질 않았다.
둘은 중도에 가던 길을 멈추고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급
기야 주먹다짐이 오갈 지경까지 되었으나 초운의 중재로
가까스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결국 주유생도 한 발 양보하고 양정도 한 발 양보하여
주유생은 양정을 대장이라고 부른 대신에 양형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양정도 마음으론 내키지 않았지만 늙은 할
아버지를 주형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낄낄낄. 이봐, 양형. 그래도 사람이 없을 땐 말이야 그
땐 대장이라고 불러도 되지? 낄낄낄."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양정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한번 노려본 후에 쓍 하
니 바람처럼 달려가 버렸다.
"같이 가 대장~~."
"나도요, 대장 형님~~."
떠나온 지 칠 일째 소우현이라는 곳을 지나면서 점심 무
렵이 되자 일행은 다시 객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금루라는 현판이 보이는 곳은 외진 곳이어서인지 손
님은 몇 명 보이지 않았다. 객점에 들어가면서 양정은 주유
생을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늘
따라 아침부터 늘 까불대며 싱글대던 주유생이 얼굴 가득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더
불어 초운까지 묵묵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어디 몸이라도 아픈 걸까?'
하지만 어제만 해도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던 데다가 둘
다 공력이 심후하기에 잔병치레를 한다고는 볼 수 없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뭐 시간이 좀 지나면 언제 그랬
냐는 듯이 바뀌겠지.'
"여기 식사와 술 좀 내오게."
양정이 손짓으로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시킬 때 주유생
이 다가온 점소이에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죽엽처응로 술 한 독 가득 가져오게."
점소이는 이제껏 많은 술 주문을 받아봤지만 독채 시키
는 사람은 처음 본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반문했다.
"네? 한 병이 아니구요?"
"젊은 녀석이 귀가 먹었나? 귀를 뚫어 주랴."
점소이는 그 말에 놀라 얼른 자신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무사한지 확인하고 굽신거리며 물러갔다.
"정말 술 한 독을 다 드시려고 하는 겁니까?"
"양형, 오늘은 한 번 맘껏 취해 보자구."
주유생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으나 그 웃음에는 왠지 씁쓸
하니 슬픔이 묻어나는 듯했다. 점소이 두 녀석이 뒷켠에서
낑낑대며 술항아리를 들고 와서는 내려놓고 술항아리와
주유생을 번갈아 가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아무리 술이
세다고 해도 독하기 그지없는 죽엽청 한독을 다 마실 수
있을까 의아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때부터 주유생은 술을 마셔 대기 시작했는데 시간은 계
속 흘러 해가 저물고 다시 밤이 되어서까지 줄곧 아무런
말도 없이 술만 마셔 대는 것이다.
고금루의 주인장이며 점소이도 이런 술 손님은 처음 보
는지람 놀라움에 입을 쩍 벌렸고 식사를 하러 왔던 다른
손님들까지 이 희한한 광경에 모두 넋이 나가 쳐다보게 되
었다. 그러다가 주유생이 밤이 되어서까지 아무런 말없이
마셔 대기만 하자 주인장은 그저 머리를 저었고 이젠 그러
려니 하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어느덧 주유생의 옆에는 술독이 다섯 개나 텅 비어져 있었
다. 양정은 중간중간 그만 드시라고 이야기했지만 워낙
에 막무가내로 나오는지라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이동하기는 틀렸다고 여기고 객점
이층에 방을 두 개 얻어 객방으로 들어갔다. 초운을 위해서
였다.
객점 주인은 세 명 다 남자들인데 방을 두 개 얻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나이든 이가 술이 너무 취해 따로 방을
잡으려고 하는 것인 줄만 알고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다.
양정이 객방 한 곳으로 비틀거리는 주유생과 함께 들어가
려 할 때 맞은편 객방으로 들어가던 초운에게서 전음이 들
려 왔다.
-- 오늘 방심하지 마시고 사부님을 조심하세요.
양정은 흠칫 놀라 초운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문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간 버린 후였다.
'쳇, 방심하지 말라구? 뭘 조심하라는 것야. 이 두 사제
가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여튼 둘
다 정상은 아닌 것이 분명해.'
양정은 피식 웃고는 주유생과 함께 객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주유생은 아직도 술에 미련이 남았는지 한 손엔 술병
을 들고 계속 나발을 불어 댔다.
"아니, 오늘따라 왜 이리 술을 많이 드시는 거예요.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시고."
"대장, 대장은 알 필요 없어. 알아도 모른다고."
주유생이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대답하고 술병으로 나
발을 분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장,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
양정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곧이어 뒤따라가 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사람은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괜히 방해가 될지도
모르잖는가.
주유생은 이층 객방의 통로 끝에 나 있는 창문으로 몸을
빼낸 후 신법을 발휘해 오른손으로 벽을 살짝 잡고 지붕으
로 올라갔다. 그는 객점의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주저앉으
며 다시 술 나발을 불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어찌나 맑던지 당장
에라도 밝은 빛 덩어리들이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처럼 보
였다. 간간이 유성이 꼬리를 보이며 지나갔고 그 가운데 반
달이 대지를 밝혀주고 있었다.
주유생은 그런 반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
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
지고 얼룩진 가운데 한 여인의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라 왔
다. 그 여인의 모습은 얼뜻 보기엔 초운처럼 보였지만 초운
과 닮긴 했어도 다른 사람의 모습이었다. 초생달 같은 눈매
에 맑은 눈망울, 뒤로 머리를 따 올린 채 티없는 미소를 보
내는 여인은 주유생을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화빈."
술에 절어 있는 주유생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처럼 여
인의 이름이 불러졌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홀
로 남아 그대만을 그리워하며 그대가 있는 곳으로 어서 가
고 싶은데 당신은 허락하지 않는구려."
주유생의 눈에서는 다시 한 번 눈물이 흘러내렸고 과거
의 기억이 눈물 속에서 떠올라 왔다.
주유생의 나이 서른이 갓 넘었을 때 그는 개방에서 가장
뛰어난 기재로서 개방의 문제를 일거에 해소하고 개방을
일으켜 세울 자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 당시 개방은 남개방과 북개방으로 나뉘어져 혼란스
러운 가운데 있었는데 그때 주유생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니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다른 운명의 끈이 그를 붙잡고 있었던지 그는 한 여
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여인은 지금 제자로
있는 초운의 고모할머니 되는 초화빈이었다. 우연한 기회
에 초씨 세가의 어려움을 도와주게 된 주유생은 그걸 계기
로 초화빈을 알게 되었는데 둘은 첫눈에 이끌려 서로를 깊
이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방에서는 훤래 혼인에 대한 문제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었다. 혼인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누가 탓할 사람이
없었다.
주유생은 초화빈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방내의 일을 수
행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순순히 그
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으니, 그만 사랑하는 초화빈이 독
초실(毒草實)을 잘못 먹는 바람에 치명적인 중독을 당해 죽
어 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원래 초씨 세가는 부유하기가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깅 수많은 의원들을 동워하여 치료해 보려고 했
으나 어느 누구도 그녀를 치료해 주지 못했다. 주유생 또한
강호의 여러 동도들에게 부탁하여 힘을 써 보았지만 놀랍
게도 초화빈이 먹은 독초실은 천년마다 한 번 열매를 맺어
칠 일 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시들어 떨어지는 천독
영(天毒靈)이라는 것이었다. 이 독과실에 중독되면 해독이
불가능한데 오직 천선영(天仙靈)이라는 한 가지 과실로만
그 독을 풀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선영은 찾기도 힘들 뿐 아니라 이제껏 그걸 보
았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천독영과는 오백 년의 차이를 두
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이 전해지는 이 천선영은
신선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선과이므로 인간의 힘으
로는 얻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를 아무런 힘도 없이 떠나 보내게 된 주유생은
자신도 현생에 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동안 수고했던
개방의 일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졌고 모든 열정
은 싸늘하게 얼어붙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산천을 떠돌아다니며 폐인처럼 살아가게
되었다. 그후 개방은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끝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주유생 다음 대의 후기
지수 중 뛰어난 자질을 갖춘, 현재 개방의 방주로 있는 단
석천을 통해 개방을 일통하고 재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의로운 단석천은 주 사숙이 돌아오는 대로 자신은 방주
자리를 내놓겠다고 말했지만 그후로도 주유생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기에 계속해서 단석천이 방주 자리를 지키
게 된 것이다.
주유생은 십여 년을 야인으로 살면서도 끝내 사랑하는
여인을 잊지 못했는데 잊으려는 방편으로 실없이, 끊임없
이 웃는 버릇과 모든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던 것이다.
초화빈은 2월 중 반달이 뜨던 날에 주유생의 품에서 숨
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후에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주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하지
만 이제껏 모진 목숨을 간직하고 있음은 그녀의 마지막 유
언 때문이었다.
--주랑, 나는 이제 떠나야 하지만 당신과 함께 가고 싶
진 않아요. 왜냐면 내가 먼저 가서 우리가 살 보금자리를
꾸며 놔야 하니까요.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러
니 오래오래 살라야 해요. 저세상 시간은 아주 짧을지도 몰
라요. 지금 약속해요. 지금부터 100년 이전에는 절대로 내
가 있는 곳에 와서는 안돼요. 알겠죠.
그렇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초화빈이 생각
하기에 주유생은 마음이 순수할 뿐 아니라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뒤이어 목숨을 끊을 것을 염려해 이렇게 유언
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당부했기 때문에 주유생은 눈물을 흘리며 약
속을 했고 그후로는 어서 빨리 100년이 지났으면 하는 바
람만 가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는 떠나고 자신의 천수
(天壽)는 길기만 하니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후로 그는 반달이 뜨는 날이면 그녀 생각에 몸부림쳤
다. 사라져 보이지 않는 반쪽은 이세상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그녀 같았고 자신은 염치없이 살안 있는 남은
반쪽의 달 같이 느껴졌기에 더욱 슬펐다. 그래서 이렇게 나
이가 든 이날까지 부디 시간이 속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
에 늘 재밌는 일만을 찾아다니게 된 것이고 왕개촌의 거지
대결을 통해 시름을 잊어버리기 위해 양정을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30년정도는 더 있어야 그녀와 약
속한 100년을 채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때까지는 약속
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에는 삶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술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작은 소리로 중럴거리기
시작했다.
휘엉청 밝은 달밤에
그대 모습 떠 오르네.
못난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소매깃 적시며
죄 없는 달을 탓하는구나.
한 서린 검초 휘날리니,
정이란 무엇이더냐.
만남 뒤에는 오직 이별이건만
교교한 달빛은 지금껏 변함이 없고
그대글 사모하는 내 마음도 저 달과 같건만
이리 우리 인연의 정을 끊어야 한단 말인가.
애닯구나. 원망스럽구나
한 하늘 아래 있어 우리 만나
이런 슬픈 이별을 하였던가.
그대를 향해 검조차 휘두르지 못함을 알면서
못난 생 연장함은 무엇인가.
님을 만나 품어 안음을 바라는 이내 속마음
이 못난 사내의 미련함이여.
처음 만날 때의 그 설레임으로
그대 뒷모습 바라보았을 때가
행복하였더라.
님의 애정 듬뿍 받고 행복을 느끼던 순간은
너무나 찰나적이었는데
우리 이별의 시간은
한없이 길기만 하구나.
오늘도 차가운 달을 벗삼아
이슬이 내려 이내 몸을 식힐 때까지
한 잔 술로 목을 축이는데
한스런 눈물은 소매깃을 적시는구나.
들릴 듯 말듯, 끊어질 듯 말듯 이어지는 목소리로 주유
생은 눈물과 함께 시를 읊었다. 이 시는 당대(唐代)의 전설
적인 칠대 시인 중 유일한 여류 시인인 파샤가 검객의 슬
픈 사연을 듣고 지었다는 '님을 그리며'이다.
사랑이, 혹은 이별의 아픔이 모든 이를 시인으로 만들어
버리듯 주유생은 떠난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이시를 읊
조리며 마음을 달래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시진가량(두
시간) 처연하게 앉아있던 주유생의 눈은 어느순간엔지 시
뻘겋게 변해 붉은 빛을 뿜어냈다. 그건 마치 난폭한 성정을
가진 늑대의 눈빛 같기도 했고 혹은 광인(狂人)의 눈빛같이
번들거리기도 했다. 마음의 슬픔이 기를 흐트러뜨리고 얽
히고 설킨 마음의 감정이 극에 치달아 심마에 빠진 것이다.
그는 번득이는 눈으로 신법을 전개해 다시 나왔던 곳을 통
해 객방으로 돌아갔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양정은 은근히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상에서
가볍게 운기행공을 하고 있다가 들어온 주유생을 바라보
며 반갑게 말했다.
"낄낄낄. 이봐, 오늘 멋지게 한번 겨루어 볼까?"
양정이 그 말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주
유생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눈이 새빨
갛게 충혈되어 있는 데다가 낄낄낄 하고 소리내어 웃긴 했
지만 얼굴은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게다가 늘 대장이
라든지 양형이라고 불렀던지라 이봐, 하고 부른 지금은 순
간적으로 아주 딴 사람이 된 듯 멀게만 느껴졌다.
"그게 무슨......, 헉!"
양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유생은 몸을 날려 가슴께
로 장력을 뻗어 왔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양정은 피하는
데만도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듯이 양정은 다급히 왼쪽으로 떼구르 구러 그
것을 피해냈다.
--펑.
목표물을 잃은 장력이 세차게 벽을 강타하자 곧 큰 구멍이
생기며 벽이 뚫려버렸다.
'음, 이거 장난으로 하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저 한번 손을 뻗어 본 것이 아니었다. 만약에 방심하고
그냥 있었더라면 큰 중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양정이
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자 주유생의 공격이 이어졌다.
"받아랏."
주유생은 일격이 어긋난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쌍수를
교차하며 장을 뻗어왔다. 객방은 특실이 아니기에 그리 넓
지 못했고 피할 곳도 여의치 않았다. 밀려드는 경력이 보통
이 아니어서 양정은 어쩔 수 없이 맞받아쳐야 했다.
펑, 소리와 함께 손이 부딪치자 양정은 그 힘에 주르르
밀려 뒷걸음쳐 벽에 닿았다.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손에 저릿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작은 힘만 사용했는데 주유생
은 온힘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양정이 다급하게 말하는 그 순간에도 주유생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주유생의 수법은 개방 방주에게 전수되는
강룡십팔장으로 그 위력이 산을 덮을 만한 것이었다. 원래
주유생은 방주로 내정되었었기에 이미 온전히 강룡십팔장
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용이 승천하며 불을 뿜어
내듯 주유생의 장력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양정은 정신 차
릴 새도 없이 그 힘을 옆으로 흘리면서 다시 신법을 전개
해 우측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장력은 양정 대신 다시금 벽
을 허물어 버렸다.
--펑, 와르르
지진이라도 난 듯 갑자기 벽이 무너지고 객방이 흔들리
자 이곳 저곳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튀어나와 비명을 지르
며 일층으로 뛰쳐 내려갔는데 어찌나 다급했던지 옷도 제
대로 챙겨 입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양정의 방 옆에
는 한 쌍의 젊은 부부가 묵고 있었는데 갑자기 벽이 무너
져 내리자 침상에 있다가 놀라 이불로 몸을 가린채 허둥
대며 뛰쳐나갔다. 한마디로 사방이 난리가 아니었다. 초운
도 장력이 난무하는 소리에 놀라 나와 보고는 어쩔 줄 몰
라했는데 그녀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에는 안타까운 표정이 가득했다.
'사부님.'
그녀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양정은 이렇게 피하기만 하다가는 자못 큰 피해가 날 것
이라 염려하여 어쩔 수 없이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마교의 다섯 원로의 연수합격에서도 그들
을 제압할 정도로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던 양정인지라
마음만 먹으면 그를 제압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좋겠어. 말로 해서 될 일이 아
니군.'
양정은 기를 운용하며 천환지를 펼치려 다섯 손가락으
로 하얗고 둥그런 기를 모아서는 주유생을 향해 날렸다. 하
얀 반지 다섯 개가 날아가듯 빛 무리가 주유생의 요혈을
향해 날아갔다. 주유생은 콧방귀를 뀌고느 손을 어지럽게
움직여 천환지를 쳐냈다. 하지만 천환지는 당장 소멸되지
않고 튕겨 나왔다가 다시금 주유생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
다. 그건 원격으로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양정이 빈틈을 노
리며 손을 움직여 요격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주유생은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정면에서 덮쳐
오는 기의 덩어리를 장력으로 힘껏 쳐내고는 양정에게 쏘
아져 가며 장력을 날렸다. 양정은 손으로는 천환지를 운용
하면서 각법인 표홀각을 통해 몸을 붕 뛰우고 장력을 비껴
내면서 두 다리로 구름을 밟듯 올라서며 주유생의 머리를
쳐 나갔다. 주유생은 손을 헛쳤을 뿐 아니라 양정의 발이
머리에 닿기도 전에 벌써부터 경력이 매섭게 뿌려오자 용
이 호수로 머리를 감추듯 몸을 숙여 피해냈다. 하지만 그
때 양정이 천환지를 운용하자 흰 반지 같은 기의 환이 주
유생의 등쪽 요혈을 찍어 버렸다.
"우읍."
주유행은 등이 뜨끔해지면서 온몸이 빠르게 마비되며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그만 그 자리에 풀
썩 주저앉아 혼절하고 말았다.
"사부님!"
초운은 맥없이 쓰러진 주유생에게 달려와 몸을 흔들어
대며 울음을 터뜨렸다. 양정이 객방을 바라보니 한바탕 지
진이라도 난 듯 사방 벽이 허물어지고 집기들이 다 부서져
있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무슨 큰 일이 난 줄 알고 웅성거
리며 부서져 나간 창 쪽을 향해 손짓을 해 가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양정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주유생의 짐보따리를 뒤져
개방에서 가져온 은전을 모두 꺼내 아직 부서지지 않은 탁
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유생이 꽤 많은 은전을 가져왔다고
는 하지만 부서진 집기를 배상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
지만 양정은 이것이라도 두고 가기로 했다. 이곳 주인인
화종탁은 이층 객방에서 벌어진 사태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며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우선 이것이라도 받아 두시오."
양정의 말에 초운은 언뜻 생각난 것이 있어 울먹이다가
손에서 옥으로 만든 반지를 빼내 주인장에게 던졌다.
"이것은 여옥환(麗玉環)이라고 하는 것으로 상당한 값어
치가 있으니 충분히 수리하고 남을 거예요."
초운의 집은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여서 그녀는 비
상시를 위해 몸에 여러 패물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중 하
나를 빼서 준것이었다. 주인장으로서는 더 이상 사고 없이
떠나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데 귀한 패물까지 건제
주자 그저 연신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초운아, 단지 혈만 제압했을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
아라. 일단 여기서 나가자꾸나."
양정은 눈물 범벅이 된 초운에게 말하고는 축 늘어진 주
유생을 옆구리에 꿰찬 채 땅을 박차며 신형을 날렸고 그
뒤를 따라 초운도 몸을 날려 화살처럼 날아갔다. 주루 주위
의 구경꾼들은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주루가 허물어질 듯
파괴된 후에 사람이 날 듯이 남쪽 방향으로 사라지자 모두
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놀라워했다.
한참을 신형을 날리던 양정은 마을을 벗어나자 혹시나
너무 빨리 가면 초운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속도를 줄인
다음 뒤쪽의 인기척을 느껴 가며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아까 초운이 조심하라고 말한 것
은 오늘의 이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어떻게 초운은
그걸 미리 알 수 있었을까?'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이제까지의 행적만으로는 그 원
일을 알 수 없는지라 초운에게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
각하고 밤이슬을 피할 만한 숲 분지로 가서 주유생을 내려
놓았다.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죠?"
어느새 뒤따라온 초운이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양정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준 다음에 주유생을 눕히고 오른손에
기를 모아 그의 정수리의 백회혈에 대고는 신공을 운용했
다. 곧 양정의 손에는 하얀 광채가 일었는데 그건 마치
작은 안개 무리처럼 보였다.
양정은 기를 통해 주유생의 몸의 요혈을 살펴보았다. 특
별히 막힌 곳은 없었다. 단지 조금 탁한듯한 기운이 느껴
졌기에 만선신공으로 탁기를 몰아내 주었다. 이렇게 탁한
기운이 일어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파의 내력
운용에는 근분부터 탁한 기운이 있어서 원래 그러니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정파의 내가지법을 익힌 이들이 이런 탁한
기운을 갖게 되는 것은 주화입마를 당했을 때라든지 독에
당했을 때의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유생에게는 독에 당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기에 분명 주화입마의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일식경(30분) 정도가 지나 탁한 기운을 몰아낸
양정은 아무런 말없이 일어나 주변에서 나뭇가지들을 주
워 와 작은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그것들을 놓았다. 그리
고 양강의 기운을 손끝으로 모아 삼매진화를 일으킨 후
에 살짝 떨치자 불꽃은 나뭇가지로 옮겨 붙어 활활 타올
랐다.
계절은 2월 초라 봄에 접어든 듯하지만 겨울의 막바지
추위도 있고 해서 밤에는 찬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추운 겨
울이라고 해서 찬기를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주유
생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어서 스스로 내공을 조절해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조금은 온기가 필요하다고 여겨
불을 피운 것이었다.
불이 잘 붙도록 나뭇가지를 조절한 후에 털썩 자리에 앉
은 양정은 의문스런 시선으로 초운을 바라보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물어 보는 것이었다.
"사부님은 괜찮아지신 건가요?"
초운은 당장에라도 예쁜 눈으로 이슬 같은 눈물을 흘릴
듯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이다. 주화입마 초기 단
계여서 탁한 기운이 가득했는데 방금 다 몰아냈으니 내일
아침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실 수 있을 것이다,
휴 우~~."
양정은 아까의 격전을 떠올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에 말을 이었다.
"아까 너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내게 전음을 보내 경고
했는데 어떻게 너의 사부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초운은 눈물을 훔치고 밤하늘에 떠 있는 반달을 바라보
며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은 제 고모할머니의 기일이에요."
"고모할머니?"
그로부터 초운은 주유생과 초화빈 사이의 사연을 이야
기해 주었다. 양정은 그 말을 다 듣고 나자 비로소 주유생
이 왜 그랬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가만히 그 사연을 음
미해 보니 가슴이 아려 오는 듯했다.
남녀간의 가슴 시린 사랑을 아직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어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미 인생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었던지라 어느 정
도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유생이 왜 처음 만
났을 때부터 유독 무슨 일이든 가볍게 여기고 낄낄대면서
재미난 일들만 찾으려 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그렇구나."
"제가 이런 사실을 안 지는 5년쯤 되었어요. 저는 7년 전
에 사부님께 거둬들여져 무공을 전수받았는데 그때 사부
님은 한 달에 두 번씩, 밤하늘에 반달이 뜨는 날이면 혼자
어리론가 가셔서 하침까지 오지 않으시곤 했죠. 처음에는
도데체 어디를 가시는지 알지 못했고 왜 그러시는지도 알
지 못했어요. 하지만 후에 저의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
고서야 사부님은 고모할머니가 떠난 날과 같이 반달이 뜨
는 날에 울적한 마음을 혼자 달래셨던 것임을 알게 되었어
요. 하지만 제게 무공을 전수하시면서 그런 아픔도 많이 잊
으셨는지 매달 두 번씩 가시던 걸음은 후에 사라지게 되었
죠. 그렇지만 해마다 할머니가 떠나신 기일에는 슬픔에 잠
겨 숲 속을 헤매시면서 보이는 대로 짐승을 죽이며 난폭
해지곤 하셨죠. 저는 사부님께서 그럴 적마다 엉뚱한 사람
에게 피해를 주게 되진 않을까 염려했는데 사부님은 그런
패해를 주지 않으려고 은연중에 마음에 다짐을 하신 것 같
았어요. 저는 오늘 아침부터 사부님의 안색이 다른 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날짜를 꼽아보니 오늘이 바로
기일임을 알고 속으로 무척 걱정했죠. 다행히 사부님은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고 그렇
게 무의식적으로 손을 쓰게 된 것 같아요."
양정은 그 말을 듣고 옆에 누워 있는 주유생을 내려다보
았다.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는 삶의 고된 흔적이 묻어 났
고 눈에는 아직 눈물 자국이 어려있었다.
'참, 이분도 불쌍한 노인네로군. 세월이 벌써 70년은 흘
렀는데도 아직까지 마음에 그때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니. 사랑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왕개촌에서 모재린이 가정
을 버리고 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낸 것도 이런 마음
이 있어서였겠구나.'
양정은 눈을 들어 교교하게 떠 있는 반달을 바라보았다.
매일 변함없이 뜨는 달이었다.
'달은 모두에게 똑같은 모양으로 비치지만 그것을 바라
보는 사람들은 각기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가지고 그것을 바
라보는지 모르겠구나. 또 어딘가에도 저 달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