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시대(英雄時代)
동정호는 건곤(乾坤)을 가른다는 큰 물이다.
일성(一省)만큼 거대한 동정호 안에는 수많은 섬이 있고, 그 물가에는 수륙(水陸)의 호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동정호로 흘러드는 물길은 수천 개, 동정호가 수로(水路)의 중심지로 화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남선북마(南船北馬).
자고로 북방 사람들은 말을 타고 달리고, 남방 사람들은 배를 교통수단으로 삼았다.
이 날 십이월(十二月) 이십팔일(二十八日), 기후가 따뜻한 동정호에 수 년 만에 눈(雪)이 내렸다.
눈은 풍어(豊漁)의 상징이라던가?
상선(商船)을 타고 백만 리를 돌며 고생을 다하다가 장년이 되어 자신의 배라도 한 척 마련한 어부의 입가에는 웃음이, 그리고 사시사철을 가리지 않고 호수를 떠도는 수천 척의 거선(巨船)들에서는 눈을 반기는 소리들이 들린다.
"제기랄, 눈이 오니 정말 좋군!"
"프핫핫… 나잇살이나 먹기는 했다만, 눈이 오면 신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오늘 해산하면 주루에 가지 말고 곧바로 마누라를 보러 가야겠는데?"
"클클… 놀 생각 마라. 대해황(大海皇)께서 오만 수로인(五萬水路人)들에게 밀명을 내리셨다는 것을 모르느냐?"
"오만 전 제자는 병기를 지니고 출선(出船)하며……."
"사해수로맹(四海水路盟)의 백팔 분타는 일급경계를 칠 것!"
"풋훗… 상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나, 수로맹이 생기고 백 년 만에 가장 큰 일이 벌어진 듯하다!"
"정법회의 협사들과의 알력이나 관선(官船)과의 충돌, 그리고 마화삼 휘하 수로고수들과의 격전에서도 동요하지 않으시던 대해황 탁노맹주(卓老盟主)가 동요하시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누군가 새를 타고 밀서를 전했다고 하는데,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하여간 현재 군산에서는 탁노맹주가 주도하는 백팔수로종사회(百八水路宗師會)가 열리고 있을 걸세!"
"그 자리에서 결정되는 일은 바로 사해수로맹의 운명(運命)일 걸세!"
"제기랄, 달라져 봤자가 아닌가? 동정호는 그냥 동정호이고, 내리는 눈은 또 그냥 눈일 뿐인데!"
"죽엽청(竹葉淸)이나 나눠 마시세!"
수부(水夫)들은 말이 많다. 그들은 늘 물과 싸우며 산다. 그래서 입심이 세고 거칠어진 것이다.
거선을 타고 돌아다니는 수부들, 이들은 하나의 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천 명이 타는 대선(大船)이 백 척 있어 멀리는 대식국(大食國)까지 가고, 백 명이 타는 범선 오천 척이 있어 천하의 수로상권(水路商權)을 장악하고 있는 천하의 대선단(大船團).
사해수로총맹(四海水路總盟).
이 방파는 백 년 전 창건되었다. 그리고 지금 삼대맹주(三代盟主)인 사해황(四海皇) 탁수룡(卓水龍)이 오만 수부(五萬水夫), 백만 수졸(百萬水卒)들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강호의 세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지키고 확장시켰던 수로의 노영웅.
그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고, 크게 원한 산 사람도 없는 강호의 거목(巨木)이었다.
거대한 탁자, 그 위에는 금첩(金諜) 하나가 금반 위에 놓여 있었다.
<자시(子時), 만리탄(萬里灘)에서 나를 영접하라!
나는 거기서 사해공의 후예인 제육해검대의 장로를 맞이하겠노라!
초대(初代) 전 마가 대총수(全魔家大總帥)>
간단명료한 글이 금첩에 적혀 있었다.
금첩이 들어 있던 봉투도 곁에 있는데, 봉투 위에는 매우 정교한 도장이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대총수의 인장이고, 마화지(魔花紙)에 비응전서(飛鷹傳書)! 글을 전한 사람이 대총수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거대한 호피의에 몸을 묻고 있는 은염의 노인, 그는 바로 수로의 노영웅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해황(四海皇) 탁수룡(卓水龍)이었다.
아아, 그가 바로 마화성의 제육해검대장(第六海劍隊長)이란 말인가?
탁수룡 주위에는 백팔 명의 노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탁수룡이 하명만 할 경우, 화약을 지고 분화구 속으로 뛰어들 정도로 탁수룡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황제의 명보다는 탁수룡의 명을 더 존중하는 수로의 노고수들은 탁수룡이 하명을 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백십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경을 겪고 세력을 쌓았다. 물론 천년마가(千年魔家)의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하나, 나의 휘하에는 천년마가에서 준 것보다 이십 배 더 거대한 조직이 있다. 그것을 고스란히 바친단 말인가? 마인(魔人)에게?"
탁수룡은 번뇌하고 있었다.
'대총수는 필경 대란(大亂)을 일으킬 것이다. 율법(律法)에 따른다면 그를 절대자로 신봉하며, 그의 명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탁수룡의 입술은 검게 탔다.
수만 척의 배를 이용해 천하 도처에서 자신의 꿈과 야망을 펼치던 수로의 노영웅. 그는 첩지에 눈길을 고정시키며 전율하고 있었다.
"만리탄(萬里灘)… 죽음의 물길! 으음, 하여간 가 보자. 가서 그를 죽이거나, 그에게 죽거나! 운명의 물에 모든 것을 맡기자!"
이것으로 회의는 끝이다. 말이 회의이지, 모든 것은 탁수룡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탁수룡, 물의 제왕!
그는 천천히 일어나며 어린탈백도(魚鱗奪魄刀)를 허리에 차고, 금린추혼탈(金鱗追魂奪)을 등에 메고 있었다.
"가세, 수로의 영웅들!"
콰아아아- 앙- 콰- 앙-!
만리탄은 하늘을 삼켰다.
죽음의 물보라가 미친 듯이 수십 길 높이로 치솟아 오른다.
동정호에서 가장 거세다는 만리탄은 자시의 어둠 가운데, 검은 포말을 창궁으로 쏟아 내며 광란한다.
거대한 선박마저 삼키는 마의 물길을 뚫을 배는 오직 한 곳에만 있다.
보라!
"어어… 이… 어이… 차아!"
"이제 다 왔다!"
어둠을 뚫고 만리탄 일대로 몰려드는 천 척의 거선들이 있다.
청룡기(靑龍旗), 백호기(白虎旗), 주작기(朱雀旗), 현무기(玄武旗)를 배의 고물에 꽂아 바람에 장엄히 펄럭이게 하고… 뱃머리에는 철판을 달아 다른 배와 부딪친다 해도 깨어지지 않게 하고, 배의 모든 장소에서 갑노(匣盧)와 독전(毒箭), 화포를 발사할 수 있게 무장을 한 거대한 선박들.
일컬어 사해철선(四海鐵船)!
거대한 배야말로 사해황이 가업(家業)으로 물려받은 축선술의 정화였다.
머나먼 이역을 누비고 다니며 위명을 날린 사해수로맹의 주축선단이 밤에 만리탄에 뜨다니?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천 척의 배에는 일만 고수가 있다. 그리고 수부(水夫)들의 수까지 따지자면 이 밤에 정확히 십오만(十五萬)이 밤의 호수로 나온 셈이었다.
하나, 일반 수부들은 사정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고수들의 호령에 따라 노를 저을 뿐이었다.
풍운을 일으키며 모여드는 대선단, 만리탄은 배로 인해 산해 마냥 뒤덮이고 말았다.
쏴아아아… 쏴아아……!
물살을 가르며 천 척의 배는 꾸역꾸역 모여들고, 만리탄의 하늘에서는 폭설(暴雪)이 장엄했다.
호수와, 눈과, 십오만 사람의 억센 호흡 소리가 대장관일 때.
"보이지 않다니……?"
제일 거대한 황룡철선(黃龍鐵船)의 뱃머리에 서서 사위를 쏘아보던 탁수룡의 눈에서는 불이 번쩍번쩍 일었다.
그는 열 개의 깃발을 휘둘러 천 척의 배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남의 휘하에 들기에는 너무도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동귀어진할 각오를 하고 여기에 나왔다.
물을 쪼개고 만리탄을 뒤덮는 천 척의 거선, 벌판을 치달리는 천리마의 대행진이라도 이보다는 장엄치 못할 것이다.
악양(岳陽)에서 백이십 리 떨어진 수역(水域), 죽음의 검은 물은 노도광란을 거듭했다.
"첩지는… 장난이었단 말인가?"
사해황 탁수룡은 군침을 거듭 삼킨다.
바로 그 때였다.
"배(船)다! 아니, 구름이다. 하여간… 이상하다."
"어어, 저리도 작은 배를 몰고 만리탄으로 오다니……?"
"어느 미친 놈이 수장(水葬)되려 하느냐?"
사방에서 소란이 시작되었다.
수만 개의 눈빛이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저 먼 수평선 위, 돌연 하나의 흰 점이 나타나 가공할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쏴아아아… 쏴아아……!
백룡(白龍)을 괘적으로 남기며 선단을 향해 다가서는 흰 구름덩어리.
흰 구름이 점점 가까워지며 만리탄의 물길이 돌연, 백 길의 물보라를 튀기며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제기랄, 갑자기 물보라가 심해지다니……?"
"이런 기변은 처음인데?"
"배를 잘 조종해서 뒤집어지지 않게 하라!"
둥- 둥- 둥-!
북소리가 요란해졌고, 선박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물살에 떠밀려 서로 부딪치지 않게 하려면 노련한 조타술이 필요하다.
콰아아- 앙- 콰앙-!
해일(海溢)처럼 몰려드는 거대한 물의 벽, 그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게 된 하나의 흰 점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았다.
"설마… 전설로만 알려진 뇌정마라탄강풍(雷霆魔羅彈强風)이었단 말인가? 물을 뒤흔들어 이런 변화를 만든단 말인가?"
탁수룡의 머리카락이 쭈뼛해졌다.
콰아아- 앙- 콰앙-!
무섭게 날뛰기 시작한 대호(大湖).
'아아, 한 사람의 내공으로 인해 물길이 달라진단 말인가? 으으, 그는… 정녕 천 년의 대총수인가?'
탁수룡의 등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 사이 천 척의 배는 각 선마다의 정연한 간격을 유지해 충돌을 피하며 하나의 해진(海陣)을 구축했다.
배의 동체로 벽을 만들고, 배의 움직임으로 역파(逆派)를 만들어, 돌연 나타난 물벽을 차단하며… 만에 하나 넘어지는 배가 생기면 즉시 줄을 내려 수부(水夫)들을 구하는 일사불란한 행동들!
백여 년에 걸쳐 모인 수공(水功)이 없다면 이러한 임기응변은 있을 수 없다.
"오오, 그는… 나를 시험하고 있을지 모른다!"
탁수룡은 깃발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천하에서 가장 고집스럽다고 자부하던 그도 이제는 필부처럼 온순해졌다.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수저(水底)에서 강기를 일으켜 물을 뒤흔들고 있었다.
"대, 대총수! 그는 수로 공부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아, 한데… 나는 그분을 선택하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했으니… 내가 어리석었다.!"
탁수룡은 이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만나야 할 사람이 물에서도 하늘(天)이라는 것을!
그의 무공은 절대적이며, 그의 수공 역시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남은 일은… 그를 주인으로 섬기는 일뿐이리라!"
그는 천천히 신형을 숙였다. 그가 무릎을 마루판에 댈 때였다.
"이제야 올바른 말을 하는군. 그 말 하기를 꽤 기다렸다, 수룡(水龍)!"
그의 등뒤에서 아주 경미한 파공성이 들렸다. 그리고 매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 너는 운이 좋다! 잠시만 더 뻣뻣이 서 있었더라면 아마도 대총수가 아니라, 내가 너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감히 마가(魔家)를 거역하려 하다니… 고얀 녀석!"
대체 누구의 목소리일까?
어둠 속, 백팔 명의 노인들이 짚단처럼 쓰러져 있고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오백 고수가 둥근 진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안색이 창백한 중년인이었다.
얼음 조각 같은 느낌을 주는 흑포인, 그는 벌써 백 번 넘게 탁수룡을 죽일 기회를 가진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 그대들은 제…제일위검대(第一衛劍隊)? 역…역시 강하군?"
사해황 탁수룡은 부들부들 떠는데, 제일위검대의 수석검사인 잔풍은 웃고 있었다.
"녀석, 제일위검대를 아는 놈이… 나를 몰라보는구나?"
아주 자상한 웃음! 잔풍답지 않게 인간미가 스민 웃음이었다.
"뉘… 뉘신지요?"
사해황 탁수룡이 조심스레 물을 때였다.
"훗훗… 냉동(冷凍)되기 전, 네 어미를 찾았었지. 마지막 부녀(父女)의 상봉으로!"
"제… 제 어머니를요?"
"훗훗… 그 때 너는 품에 춘추해서를 안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사해황 탁수룡은 그제서야 잔풍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오오, 그럼…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던 외조부(外祖父)시란 말인지요?"
잔풍, 그는 검비군(劍飛君)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는 과거 혈화삼의 시위대에 속해 있었고, 그의 외동딸은 사해장로(四海長老)의 전인 사해왕자(四海王子)와 결혼을 했었다.
그의 딸과 사해왕자 사이의 아들이 바로 사해황 탁수룡이었다.
제일대(第一代) 수로맹주 사해장로 사해공(四海公),
제이대 수로맹주 사해왕자,
제삼대 수로맹주 사해황!
사해수로맹의 계보는 이러했고, 탁수룡 개인의 계보는 전 마가에서도 뛰어난 계보인데… 놀랍게도 그의 피 속에는 잔풍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었다.
잔풍이 탁수룡을 알아본 이유는 수룡이라는 이름을 지은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조손 상봉! 무려 백 년 만에 벌어진 조손 상봉이었다.
"대총수는……?"
"이미 가셨다. 너의 관상이 좋다는 말을 남기셨다!"
"어, 어디로?"
"너도 곧 가 봐야 할 마화성(魔花城)으로!"
"아아, 성!"
"훗훗… 그분은 네가 제육해검대장인 동시에, 족보상 나의 외손자임을 아시고는 웃으시며 그냥 떠나셨다. 아마도 너는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이 물보라를 일으키시다가 새를 타고 날아오르신 것을!"
잔풍은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그의 앞에는 그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사해황 탁수룡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얼음 속에서 잔 이유를 알겠다. 아아, 그 이유는 장차 있을지 모를 선후배 사이의 알력을 혈통과 계보로 조종하라는 선대 혈화삼의 안배였던 것이다!"
"외조부, 저까지는 쉽게 굴복했을지 모르나… 제칠마왕검대(第七魔王劍隊)의 총사는 꽤나 거칠게 저항할 것입니다!"
"왜?"
"그는 백도계에 있습니다!"
"아아, 백도에?"
"잘은 모르나, 유명한 인물일 것입니다."
"훗훗… 유명해야만 하지. 아암, 대총수 휘하에는 약졸(弱卒)이 있을 수 없다. 하여간… 네녀석을 보아 기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조부! 하나, 장차에는 제가 상석(上席)에 있을 것입니다. 서열상 저는 장로이고, 외조부는 부장로이니까요."
"좋아, 좋아! 술이나 들자. 눈도 좋고, 호수도 좋으니까! 오늘은 술을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을 듯하다!"
아아, 대설천하(大雪天下).
눈은 천 년(千年)을 두고 내렸다. 그리고 무림사상 가장 잔혹하던 시절은 눈 가운데에서 마염(魔焰)을 뿜기 시작했다.
눈은 천하에 고루 내리고, 이 밤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 * *
<정법회 기밀서류 입수에 성공했음!>
<정법회의 기반은 구파일방이나 의풍성(義風城)만 격파되면 자연히 구파일방도 따라 멸살될 것이라는 것이 마혼첩들이 북천위사(北天衛士)들의 도움 아래 수집한 모든 정보 분석 결과입니다, 나으리!>
<정법회를 격파하는 데에는 십오만(十五萬)의 정예고수가 필요합니다.
현재 구대마가 휘하에는 오만의 결사대가 늘 대령하고 있으니, 마화삼께서 십만 고수만 선처하신다면 백 일(百日) 안에 의풍성에 마번(魔幡)을 꽂고 축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의풍성보다 무서운 조직은 마화성입니다!
계속 조사 중이나, 왠지 공포스럽습니다. 그들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막대한 조직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추적대를 보내 마화성의 위치를 알아 내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구름 속의 신룡(神龍)으로, 아무리 알려 해도 알 수 없습니다!
마화삼 나으리의 선처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화성을 격파하지 않고 의풍성을 건드린다는 것은 뒷문에 호랑이를 두고 앞문의 늑대와 싸우는 실패작이 될 줄 아옵니다!>
서탁 위에는 밀지가 수두룩하다.
천하 각지에서 날아든 전서구(傳書鳩)들.
밀지 하나가 작성되기 위해 마가의 정예첩자들은 수많은 밤을 세워야 했고, 거친 들을 수없이 헤매야만 했다.
하지만 글을 읽는 사람은 없었다.
달도 없는 칠야(漆夜)이다. 창문이 닫힌 너른 방 안, 언제부터인가 야릇한 호흡 소리가 뒤엉키고 있었다.
미끈미끈한 몸뚱이 하나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대는… 행운아예요. 정말로……!"
여인(女人), 이미 색욕에 취해 눈이 게슴츠레해진 여인이다.
무선(巫仙).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은 사내의 손에 기름 짜이듯 쥐어짜여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손은 무선의 도발적인 둔부를 매만지고 있다.
열 손가락에 모두 마환(魔環)!
남자의 손치고는 매우 치장이 잘된 손이었다.
"훗훗… 나의 손가락에는 열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지. 반지는 마도일가(魔道一家)를 지배하는 신표이다! 나는 십가(十家)를 완전 장악하고 있다. 구마존도 이제는 나의 종복들일 뿐이다!"
웃는 청년, 그는 매우 노련하게 여체를 매만지고 있었다.
마화삼(魔花衫) 마유정(魔有情).
그는 전에 비할 수 없이 거만하고 음침했다.
이미 만마에 달관된 절대마경(絶代魔經)에 든 자.
그는 무선의 몸을 교묘하게 유린해 나갔다.
살집 좋은 여체는 그의 손 아래 매만져질 때마다 경련을 일으킨다.
꿈틀… 꿈틀…….
무선의 몸은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그대는 억세게도 운이 좋아요. 그대는 운명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 같아요. 이미… 나를 손에 쥐었으니까!"
무선이 교태롭게 말했다.
"훗훗… 나는 정말 운이 좋다. 나는 나의 운명을 만들며 산다. 앞으로는 더욱 잔혹하고, 음탕하며, 더욱 강해질 것이다!"
"흐으… 응! 그대는 재수가 좋아요. 북황자 휘하 십만 정병(十萬精兵)을 이자 약속도 없이 손에 쥐었으니까!"
우우, 십만이라니……?
마화삼 휘하에 새로 십만 고수가 들어왔단 말인가?
"큿큿… 너의 주인 북황자(北皇子)도 만만한 자는 아니다. 나는 그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는 나의 동맹자(同盟子)이자 후견인(後見人)이니까!"
"흐으… 응! 그분이야말로 환우지존(還宇至尊)이시지요."
"크크… 언제고 그를 보게 되겠지! 그리고 그가 위에 있는지, 내가 위에 있는지 알게 되겠지!"
"하여간 지금 나는… 네 위에 있구나!"
"하아… 악……!"
무선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숯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 색녀 무선도 색에서는 마유정을 능가할 수 없었다.
"너, 너무해요. 그대는……!"
"훗훗… 나는 이래봬도 한이 많은 놈이다!"
"한… 한이라니요?"
"나는 늘 한 녀석을 머릿속에 두고 있다. 지금 나의 소원은 놈이 살아나 내 손에 죽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왜… 왜요? 그가 누구이기에?"
"그는 사실 좋은 놈이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훗훗, 과거에는 그를 꽤 부러워했었지. 하나, 이제는 자신이 있다. 누구와 싸우든. 왜냐하면… 악마성(惡魔性)이란 나의 천성(天性)이기에!"
"으으… 음……!"
뒤섞이는 호흡 소리, 그리고 세모(歲暮)의 밤은 깊어만 갔다.
아아, 밤이여!
밤의 이름 아래 그대를 취하리라!
그대가 그 누구이든…….
같은 밤, 그는 황촉(黃燭) 하나를 밝혀 놓고 글을 쓰고 있었다.
불빛은 그의 얼굴을 환히 비쳐 주었다.
지독한 기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는 너무나도 너른 대전 안에 단 혼자 머물러 있었다.
<천하를 경륜(經綸)하는 데에는 인재가 필요한데, 불행히도 짐의 주위에는 재목이 드물도다!>
짐이라니……?
아아, 설마 그는 바로 천자(天子)란 말인가?
영락제, 그는 이 깊은 밤을 고뇌 가운데 밝히고 있단 말인가?
<북원(北元)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는 것이 가장 두렵다.
그들은 꼭 일어난다. 강호계의 대란(大亂)이 있을 경우, 그들의 준동은 앞당겨진다.
아아, 몽고(蒙古)의 이단자들!
늘 중원을 노리는 자들, 그들은 기필코 쳐내려 올 것이다.
어쩌면 이미 중원 깊숙이 세력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황제일기(皇帝日記).
그것은 범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천하에 대한 고뇌의 정에 가득 찬 것이었다.
<짐에게 단 하나의 절세고수(絶世高手)가 있다면, 북원의 괴수 철무탄(鐵武灘)의 수급(首級)을 잘라 오라 부탁하며, 손수 잔을 채워 주겠노라!>
필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유난히도 야망이 많은 영락제, 그는 본시 연왕(燕王)이었고 왕좌(王座)에는 만족을 할 수가 없기에 정변을 일으켜 제위(帝位)를 차지했다.
그는 만주에서 거대무비한 호태왕비(好太王碑)를 보고 그 웅휘로움에 매료되어 자신의 제호를 영락으로 했다던가?
그는 너무나도 큰 그릇이었다. 천하로도 그 그릇을 채울 수 없는 듯했다.
밤(夜)… 제왕도 밤만은 떨칠 수가 없는 것인가?
<강호계의 내란(內亂)이 두렵다!
세 가지 세력에 대한 것이 동창(東廠) 밀위(密衛)들에 의해 입수되었다.
마혼십가(魔魂十家),
정법회(正法會),
마화성(魔花城).
하나같이 짐의 제국을 뒤흔들 만한 대조직이다.
아아, 그들은 어이해야 하는가? 백성들이 죽을 줄 알면서도 황군(皇軍)을 일으켜 그들을 쳐야 하는가?>
번뇌하는 황제! 이것이야말로 영락제의 진면목인 듯했다.
안남(安南)과 만주, 그리고 요동까지 야망을 걸고 취하려 하는 절대제왕!
그는 야망의 대지에 사는 한 인물이었다.
마의 대지에 사는 마유정이 마를 야망의 모든 것으로 삼듯, 그는 자신의 세월을 모든 것으로 삼고 있었다.
짙은 묵향이 퍼져 나간다. 그리고 제왕일기는 끝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런 밤마다, 짐은 두 얼굴을 기억한다.
언제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두 얼굴을…….>
그의 가슴에도 인간이 있었단 말인가?
대륙의 통치자의 가슴에 두 사람이 담겨 있단 말인가?
<화영(華影), 너를 그린다. 혈족으로서…….
그리고… 무정(無情)! 한 명의 남자로…….>
황제의 필은 또 가늘게 떨렸다. 그는 멈칫하며 글을 계속 썼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짐은 그를 너무도 쉽게 떠나 보낸 듯하다!
아아, 그가 곁에 있다면 지금쯤 큰 위안이 될 것을…….
마무정, 일개 강호인이 짐의 가슴에 그리도 깊이 자리잡은 이유를 짐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를 보고 싶다.
화영, 무정(無情)! 짐은 그대들을 그리워한다!>
영락제는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먹물이 종이로 스며드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 쪽으로 갔다.
창은 조금 열려 있었다. 영락제는 그것이 거북스러운 듯 손을 내밀어 창을 활짝 연다.
창은 완전히 열렸고, 너무나도 거대한 하늘이 영락제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짐은 늘 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하늘을 닮으려 했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웃음이다.
"아아, 이 곳도 답답하다. 제왕이 아니고 일개 평민이었다면, 이 밤에 폭죽을 터뜨리며 쾌활히 지낼 텐데!"
그는 또다시 미소짓는다.
"화영, 그리고 마무정! 자네들이 부럽네!"
그는 두 사람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화영(華影),
마무정(魔無情).
두 사람은 영락제의 가슴 깊이 남아 있는 두 인물이다.
영락제는 밤을 잊고 그들을 생각한다.
"그대들의 자유로움이 부럽다. 이 마음은 진심이다! 훗훗……!"
그는 웃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차다. 하지만 가끔 가다가는 숨을 크게 마시는 것도 좋다. 하여간… 새벽이면 신년이군.'
새벽이다. 여명(黎明)은 천천히 불붙으며 하루를 깨웠고, 이 새벽은 바로 지난 세모(歲暮)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원단(元旦)의 태양(太陽)이 뜨는 새벽이었다.
이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것인가?
세월(歲月)만은 강호계(江湖界)를 거역하지 않고 또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인가?
대설천하(大雪天下).
만산(萬山), 만로(萬路), 만강(萬江)은 모두 희다.
유난히도 긴 겨울 가운데, 한 해는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꿈(夢)도 깨어나고, 야망(野望)은 이제 바람을 타고 십팔만 리(十八萬里)로 뻗어 나가리라!
아아, 중원(中原)이여!
이제 또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인가?
저기 불의 수레가 치솟고 있고, 수레바퀴가 구르며 피마저 불사를 듯한 화염(火焰)이 흐르며…….
아아, 이제 또 하늘 아래 빛이 있으리라!
"나의 운명의 주사위는… 내가 태어나던 그 날, 던져졌지!"
그는 눈으로 태양을 보고 있다.
도소주(屠蘇酒)가 가득 든 잔을 든 미공자(美公子).
늘 일천 비위(臂衛)가 암중에서 호위를 하며, 벌써 칠만 고수(高手)가 그에게 속하지례를 올렸다.
마화삼에서 대총수가 된 인물, 마무정! 그에게 속하지례를 올렸다.
"그리고 유정이 구마존의 옹립 아래 어머니를 베고, 가신들을 주살하고, 절대마가를 불사르던 그 날… 나의 숙명은 불의 수레를 타게 되었다!"
그는 계속 걷는다.
마화성의 정원(庭園), 그는 얼마 전 무화과(無花果)를 정원 가득 심게 했다. 그 이유는 그도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세력이 있고, 잊어버린 세월이 있고, 기억하지 못할 아스라한 얼굴들이 많다. 그는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묻지 마라!
운명은 이유를 붙이지 못할 너의 그림자이니까.
"반역당하며, 나는 복수의 수레를 탔고……!"
그는 계속 걸었다.
이 날만은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인가?
이 순간따라 취기가 엷게나마 느껴지고 있었다.
"대총수가 되며, 야망(野望)의 날개를 펴게 되었다!"
두 눈은 광휘에 빛나고 있다.
아아, 그 어떤 힘으로도 죽이지 못할 젊은 웅혼(雄魂)이여!
그 힘은 태양마저도 숙연해할 정도로 가공스러웠다.
"이제… 나의 길이 시작되리라! 이제……!"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선다.
나뭇가지를 손에 쥐며 태양을 응시하는 마무정, 그는 타오르는 하늘가에서 잃어 버린 얼굴들을 본다.
스쳐가는 얼굴들, 기억하지 못할 야릇한 이름들…….
"나는 또… 찾아 내리라! 나의 세월을……!"
그는 숨을 아주 크게 들이마셨다.
"그것은… 역시 운명이리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중원(中原), 오천 년을 두고 환우(還宇)에 군림해 온 대륙(大陸)의 중심지이다.
비옥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 사람들은 꿈을 던지고 있다.
야망(野望)이라는 이름 아래 무사(武士)들은 검(劍)을 거머쥐고, 시꺼먼 흑립(黑笠)으로 얼굴을 가리며…….
삼산오악(三山五嶽)을 불사르며 떠오르는 저 뜨거운 태양을 향해 끝없는 도전의 여정을 시작한다.
수레바퀴가 돌듯, 그러한 일은 천 년(年)을 두고 계속되었다.
윤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처절한 야망의 혈로(血路)!
목숨보다도 값진 피 어린 도전의 행로(行路)!
그 어떤 위대한 힘도 막지 못했던 검의 길(劍路)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원(中原), 드넓고 풍요한 곳!
유난히도 눈이 많았던 이 겨울, 강호계(江湖界)에서는 몇 가지 알지 못할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거대한 사건은 강(江)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황하(黃河), 성숙해(星宿海)에서 시작해 동해(東海)로 빠져드는 구만 리(九萬里)의 수룡(水龍)이다.
힘이 세고 억센 녀석, 구백 리(里)마다 몸을 한 번 뒤틀고 그 때마다 물굽이가 생긴다.
한번 노(怒)하면 백여 리가 놈의 몸부림에 벌컥 뒤집혀지고 만다.
그 물 위, 언제부터인가 끝없이 떠돌기 시작한 천 척(千隻)의 범선(帆船)이 있었다.
기(旗)도 달지 않은 거선(巨船)들.
백 장(丈) 사이를 두고 끝없이 이어지는 범선의 행렬은 대체 무엇일까?
범선의 수는 모두 일천 척!
대체 어떠한 무리가 이 거대한 행진을 시작하고 있는 것인가?
"화야문(花爺門)이 이 강호에서 쌓은 모든 기반을 마화성으로 이동시키는데 단 한 번의 표행이라니… 사해황(四海皇)의 힘은 정말 위대합니다! 그 방대함은 개방 이상입니다."
여인(女人), 선(線)이 아주 고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끊어질 듯 가는 허리에 붉은 채대(彩帶)를 두르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 대여섯 정도, 완숙한 미모를 갖고 있는 여인이고 상당히 뛰어난 처세술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봉황 같은 눈빛을 수파(水波)에 던질 때였다.
"훗훗… 화야문의 낭자들은 하나같이 몸이 가볍고 화야문의 짐이래봤자 금은붙이에 장신구가 태반이니, 노부 휘하 일천 거선이 한 번 뜨는 것으로 화야문은 통째로 이동될 수 있는 것이외다!"
은염이 탐스러운 노인, 그는 미색이 출중한 젊은 여인과 칠팔십 세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났으나, 하대를 하지 않고 상호존중하고 있다.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배의 행렬, 이것이 바로 강호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세력이 한 장소로 집결하는 대사업이었다.
여인은 바로 화야(花爺)였다.
기녀왕(妓女王)으로 불렸던 여인, 화야(花爺) 소몽몽(蘇夢夢)!
그녀는 혈통에 따라 대총수를 주인으로 맞이했다.
그녀는 화야문의 모든 인원과 재산을 한 장소에 모았고, 어김없이 사해황의 휘하 백수란의 지휘 아래 선박들이 와서 그녀 휘하 모든 것을 배에 태운 것이다.
사해황(四海皇) 탁수룡(卓水龍), 잔풍의 외손자이자 제육해검대장.
무공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나, 상술(商術)의 천재이고 휘하에 수많은 수로영웅(水路英雄)들을 거느리고 있는 수계(水界)의 거인.
그는 소몽몽을 자신의 양딸로 삼고 싶은 눈치였다.
그리고 그는 소몽몽 휘하 기녀고수들이 출신과는 달리, 태도가 깨끗하고 처세가 정직하다는 사실에 상당히 흡족해 하고 있다.
'마(魔)는 마되, 생각했던 마는 아니다.'
사해황은 싱글벙글거리며 소몽몽을 본다.
소몽몽의 눈빛은 아주 맑았다. 그녀는 마가의 전통적인 마공을 지니고 있는 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마가의 전통적인 신공은 극마(剋魔)의 신공이다.
그것은 여타 구대마가의 기환사공, 요마술과는 완전히 다른 전통적인 마공이다.
더욱이 그러한 마공구결은 강호계에 나와 발전을 거듭한 결과, 현재에는 하나의 신공으로 변화했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다. 머지않아 새벽이 시작되리라.
사해황은 화야문의 전 인원과 전 재산을 천 척의 배에 싣고 마화성 쪽으로 대이주시키는 상태였다.
사해황이 싱글벙글거리며 소몽몽을 보고 있을 때, 소몽몽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또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 곳, 바람이 세게 불면 꺾어질 듯 연약한 꽃이 하나 피어 있었다.
유난히도 눈이 커다란 미인, 탐스러운 가슴 위에 두 손을 모두 얹고 끊어질 듯한 한숨을 흘리는 여인의 미색이야말로 천부적인 미색이었다.
"아아, 대총수! 나의 가슴을 베어버린 야속한 분."
미소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한데, 그분의 뇌리에는 어떤 여인의 그림자가 새겨져 있다. 나는… 그 그림자가 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중얼거리는 여인, 백수란(白水蘭).
그녀는 며칠 전에 비해 수척해졌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분에게 첫사랑의 여인이 있다는 것을. 그분은 무화과나무 아래 설 때마다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분 자신조차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는 눈치시다!"
백수란은 본래 맑고 화사한데, 며칠 동안은 이렇듯 고독하고 암울하게 흐르는 강에 탄식을 토해 내는 것이다.
사람은 빛과 더불어 그림자를 던졌다.
"야속한 분. 나를 안아 주지도 않으시다니……!"
백수란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때였다.
"으음……!"
백수란을 지켜보고 있던 소몽몽은 급기야 쓰디쓴 숨을 토해냈다.
그녀 역시 눈에 물막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란아, 그래도 너는 행복한 것이다. 네 마음대로 울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며칠 전 백수란을 만났고, 현재에는 백수란과 의자매 상태로 맺어져 있었다.
소몽몽은 핏물이 응혈된 듯 짙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너처럼 마음을 마음대로 밝히기에는 너무도 세상을 잘 안다.'
설마… 소몽몽까지?
아아, 그녀마저 마무정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단 말인가?
마가의 금약에 따른 주종지간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노예가 되기를 소몽몽 역시 가슴에 꿈으로 품고 있단 말인가?
소몽몽은 말수가 적은 여인이었다.
타는 듯한 홍장(紅裝), 능금마냥 싱싱한 육체를 휘감고 있는 붉은 옷자락이 이 순간 무겁게 느껴졌다.
"내일부터는 흑의(黑衣)를 입어야지! 아주 짙고, 투박한……!"
그녀는 눈길을 스르르 내리깔았다.
'붉은 옷을 입고 왔다갔다하다가 대총수의 욕정(欲情)을 자극하거나 한다면 수란이가 실망할지 모른다. 그리고 대총수가 나를 일개 우물(尤物)로만 보고 품는다는 것도 나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사랑만 품고 살자.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소몽몽 역시 사랑의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백수란 같은 열병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마음을 감추는 재간을 조금은 지니고 있었으니까.
"이제부터는 흑의를 입으리라!"
그녀가 흐르는 강에 향기로운 입김을 토하고 중얼거릴 때, 사해황 탁수룡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다.
"훗훗… 좋은 시절이지. 아암!"
'두 소저 모두 마가의 율법에 따라 대총수의 첩(妾)이다. 하지만 대총수의 인품으로 보아 두 소저를 첩실로만 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해황이 빙글빙글 웃는 이유는 그래도 두 여인보다는 꽤 오래 세상을 살아 봤기 때문이다.
'세월이 가면… 자연히 해결되는 일이 있지.'
그는 백수란과 소몽몽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 여인은 비슷한 정서를 품고 고뇌하고 있었다. 백수란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는 상태이고, 소몽몽은 그 마음을 안으로 삭이는 상태였다. 두 여인 모두 옥화삼(玉花衫)이라는 존재를 강하게 느끼고 있고, 마무정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마무정의 진짜 여인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 강(江)에 가없는 한숨을 부어 대는 것이다.
흐르는 강과, 알지 못할 수부의 노랫소리,
배는 만 리(萬里)를 가고, 강(江)은 영세(永世)를 흐르고, 그리고 사해황의 묘한 웃음소리가 뒤섞인다.
"훗훗… 세월이 가면 다 해결될 것을… 훗훗, 두 소저는 사랑을 앓음이 아니라 바로 젊음을 앓고 있는 것이기에… 저리도 고운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겠지!"
사해황은 소몽몽과 백수란, 그리고 잔풍을 통해 마화성에 대해 강한 충성심을 갖게 되었다.
'그분은… 마인이 아니다. 그분은 영웅(英雄)이다.'
사해황은 용솟음치는 기백을 느꼈다.
쏴아아… 쏴아아……!
강물은 점점 격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사해황은 깊이를 모를 강물을 굽어보며 미소짓다가 문득 눈길을 가없는 하늘가에 던졌다.
"이제… 시작이다, 영웅(英雄)의 세월은! 훗훗, 피 어린 천년무림을 지배할 영웅의 시대는…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강은 도도하게 굽이쳐 가고, 천 척의 거선은 물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무림(武林)이라는 강(江)!
그 강은 이제 큰 굽이를 향해 힘차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인가?
이제 아무도 그 끝을 이야기할 수 없다.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지를,
누가 풀잎 위 이슬마냥 스러질지를……!
그는 타오르는 새벽 가운데 있다.
"잠룡(潛龍)의 시대로 오랜 세월을 보낼 수는 없다!"
신비로운 눈망울 안에 공활한 하늘을 드리운 채, 그의 눈은 천도봉 아래에 펼쳐진 만리운해(萬里雲海)를 굽어보고 있었다.
일월(一月) 일 일(一日), 진시(辰時).
빛이 약간 바랜 회삼자락은 산하에서 불어 오는 한풍에 가볍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새벽을 닮은 눈빛을 하늘에 던지고 있었다.
"빨리 깨어나야만 한다! 나의 꿈은……!"
아아, 물이 되어 똑똑 떨어져 내릴 듯 푸르른 취벽의 하늘!
공활한 하늘가에는 외로운 구름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구름도 이르지 못할 황산(黃山)의 제일봉(第一峰).
그의 위에 있는 것은 단 하나 하늘뿐이었다.
산(山)… 산은 그를 떠받치고 있고, 그는 하나의 산이 되어 있었다.
"신년하례식을 마친 직후, 개봉부(開封府)로 가자. 제칠마왕검대(第七魔王劍隊)를 찾아서!"
그는 느릿느릿 신형을 틀었다.
"제칠마왕검대는 과거의 순찰당(巡察堂)이었다니, 그들을 얻는다면 내가 대업(大業)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으리라!"
저벅- 저벅-!
그는 천년설(千年雪)을 딛고 걸었다.
"한시빨리 대총수로서의 일을 마치자. 그 다음에는 내가 잃어 버린 천백 일을 찾아 보자! 훗훗, 그 다음 하늘을 보면 최소한 공허함은 없으리라!"
그는 걸어갔고, 깨어질 듯 푸르던 하늘은 차츰차츰 어두워져 갔다. 그의 모습이 산허리에 걸린 거대한 흑무(黑霧) 안으로 사라져갈 무렵에는 펑펑 눈발이 쏟아져 내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