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죽립인들은 슬쩍 신형을 움직여 뇌일봉의 막강한 공격을 피했다. 그들의 몸놀림은 비호처럼 빠르고 민첩했으며, 뇌일봉의 무서운 공세를 보고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용맹스럽게 돌진해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호랑이를 향해 달려드는 세 마리의 굶주린 늑대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뇌일봉은 크게 호기가 치밀어 오르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감히 노부에게 맞서보겠다는 게냐?”
세 명의 죽립인은 각기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와 낭아곤(狼牙棍),흑피편(黑皮鞭) 등의 기형 병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수법이 하나같이 괴이하면서도 악랄하여 중원의 무공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다른 다섯 명의 죽립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어서 뇌일봉이 아닌 다른 고수였다면 상당한 곤궁에 처했을 것이다.
하나 뇌일봉은 이미 오랫동안 두 개의 손만으로 강호무림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답게 여유만만 한 동작으로 양쪽 소매를 번갈아 휘둘렀다.
파파팍!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세찬 경풍이 노도처럼 밀려나와 세 명의 죽립인들을 압박해갔다.
그가 펼치는 것은 노도번천수(怒濤飜天手)라는 무공이었는데 쌍당장(雙撞掌), 진악신권(震嶽神拳)과 함께 뇌일봉이 가장 자신하는 삼대절학 중 하나였다. 그 위력은 이름 그대로 노한 파도가 하늘을 뒤덮듯이 패도무쌍한 것이었다.
세 명의 죽립인들은 뇌일봉의 공세가 거세게 몰아닥치면 재빨리 흩어졌다가 공세를 피함과 동시에 이내 다시 모여들어 벌 떼처럼 공격하는 특이한 합격진(合擊陣)을 펼치고 있었는데, 삼재진(三才陣)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훨씬 진퇴(進退)가 빠르고 변화가 무궁하여 보는 사람의 눈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마 뇌일봉이 강호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괴이한 움직임에 크게 당황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아쉽게도 그들의 상대인 뇌일봉은 강호의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절정의 실력을 지닌 노련한 고수였다.
그는 몇 번의 헛손질을 한 후 이내 죽립인들이 특이한 절진(絶陣)을 펼치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대응 방법을 바꾸었다.
즉 빠르고 위력이 강한 노도번천수 대신 변화무쌍하면서도 날카로운 쌍당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쌍당장은 두 개의 손을 마치 두 개의 봉(棒)처럼 뻣뻣이 곤두세워 찌르기를 위주로 하는 특이한 장법(掌法)인데, 팔꿈치와 손목의 관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공격 방향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 방비하기가 힘이 들었다.
과연, 뇌일봉이 쌍당장을 펼치자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세 명의 죽립인들은 조금 전과 같은 민활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쩔쩔매기 시작했다. 뇌일봉의 장세가 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봉쇄하여 자신들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자꾸 발생했던 것이다.
마침 삼첨양인도를 든 죽립인과 흑피편의 죽립인이 서로 부딪혀 휘청거리는 순간, 뇌일봉의 장세가 그들의 옆구리를 향해 화살처럼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흑피편의 죽립인은 완벽히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에 장력을 정통으로 격중당하고 말았다.
쾅!
“크헉!”
흑피편의 죽립인은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구부리고 뒤로 나뒹굴었다. 모르긴 해도 그의 오른쪽 갈비뼈는 대부분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말은 긴 것 같았지만 그것은 뇌일봉이 광소를 터뜨리며 그들에게 달려든 지 불과 십여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원건은 뇌일봉이 채 숨 몇 번 내쉴 사이도 되지 않아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이던 세 명의 죽립인들 중 한명을 쓰러뜨리자 내심 그의 놀라운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대홍산(大洪山)의 호랑이라는 소문 그대로군. 그나저나 저자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느닷없이 우리를 암습한 것일까?’
죽립인들의 정체에 대해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강성에서 명성을 날리던 야차도 맹파의 등장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으로 보아 그들이 서장의 고수들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왜 다짜고짜 진산월 일행을 암습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숨어 있던 다른 고수들까지 떼로 몰려나와 공격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진산월 일행은 이번 천룡사와의 결전에 나서는 무림맹의 주축도 아니었고, 무슨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립인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습격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원건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뇌일봉는 더욱 거세게 남은 두 명의 죽립인들을 몰아쳐 가고 있었다.
세 사람이 특이한 절진을 사용하고도 감당해내지 못했던 뇌일봉을 한 사람이 쓰러져 절진이 깨어진 상태에서 당해낼 리가 없었다.
두 명의 죽립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금시라도 뇌일봉의 장력에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쐐쐐쐐!
갑자기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대여섯 줄기의 혈광(血光)이 뇌일봉의 등판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 혈광이 어찌나 빠르게 날아들었던지 상원건의 눈에는 단지 여섯 개의 혈선(血線)이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뇌일봉은 이미 누군가 나무에 숨어 있음을 알고 있었는지 껄껄 웃으며 양손을 풍차처럼 마구 휘두르는 것이었다.
“하하하…쥐새끼가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 결국 꼬리를 드러내는구나!”
파파팍!
그의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들이 마치 담벼락에 부딪친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상원건이 자세히 보니 그 혈광들은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한 작은 혈륜이었다.
앙증맞도록 조그마한 혈륜의 테두리에는 날카로운 톱니바퀴 모양의 칼날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전체가 진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였다.
혈광을 모두 격퇴시킨 뇌일봉의 거구가 한 마리 붕새처럼 허공을 날아 혈광이 날아왔던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나무 위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오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음소(陰笑)가 흘러나왔다.
“크케케… 힘 하나는 제법 좋은 늙은이구나. 그 정도면 이 노신(老身)이 기꺼이 귀여워해 줄 만하지.”
그 인영은 작달막한 체구에 알록달록한 채의(彩衣)를 입고 있는 쭈글쭈글한 노파였는데, 용모가 어찌나 추악하던지 밤에 보았다면 누구라도 지옥의 나찰(羅刹)이 현신한 것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게다가 옆구리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의 가죽주머니 세 개를 차고 있었는데, 체구에 비해 지나치게 주머니가 커서 자칫하면 바닥에 끌릴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노파의 신형은 유부(幽府)의 귀신처럼 표홀하기 그지 없었다.
뇌일봉은 자신을 암습한 자가 금시라도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추악한 노파임을 알자 싸울 맛이 달아났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하나 노파는 오히려 그에게 바짝 다가들며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호호…노신이 좋다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꽁무니를 뺀단 말이냐? 중원의 남자들은 변덕이 죽 끓는 듯하다고 하더니 네가 꼭 그 짝이구나?”
노파의 주름진 손이 붉은색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러자 다섯 줄기의 붉은 혈광이 뒤로 물러서는 뇌일봉의 전신 오개대혈(五個大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악독한 솜씨였다.
뇌일봉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두 걸음 이동하며 혈광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웬걸?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갈 듯하던 혈광이 돌연 허공에서 기이하게 선회하며 더욱 빠르게 그에게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천하의 뇌일봉도 이때만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양쪽 소맷자락을 세차게 내저었다.
꽈릉!
노도번천수의 막강한 기운이 그의 전신으로 짓쳐오는 다섯개의 혈광을 휩쓸어갔다. 상원건은 의당 이번에도 뇌일봉이 다섯개의 혈광을 가볍게 격퇴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뇌일봉의 노도번천수는 패도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는 놀라운 무공이었다.
그런데 노도번천수에 격중돼 튕겨져 나갈 줄 알았던 혈광들이 괴이하게 꿈틀거리더니 노도번천수의 경력을 뚫고 다시 앞으로 전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기경(奇驚)할 광경에 상원건은 물론이고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뇌일봉조차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앗?”
혈광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자기 멋대로 움직이며 경력과 경력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뇌일봉은 다급하게 왼손을 거두어 들이며 오른손의 손가락 다섯개를 번갈아가며 튕겨냈다.
파파팍!
다섯 줄기의 지공(指功)이 그의 몸 가까이 다가온 혈광들을 향해 폭사되었다. 뇌일봉이 지금 펼친 것은 벽력지공(霹靂指功)이라는 것으로, 번갯불처럼 빠를 뿐 아니라 금석(金石)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과연 다섯개의 혈광들은 단 하나도 벽력지공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격중되고 말았다.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파앗!
벽력지공에 격중된 혈광들이 그대로 터져나가며 시뻘건 핏물이 뇌일봉의 전신으로 쏟아져버린 것이다.
뇌일봉은 안색이 대변해 전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렸으나 핏물 중 몇 개가 몸에 묻고 말았다.
피시시식….
핏물에 닿은 옷자락이 매캐한 냄새와 함께 그대로 타들어갔다.
바닥을 구르다시피 해 이장여 밖으로 물러났던 뇌일봉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언제나 즐겨 입던 붉은 홍포는 여기저기가 구멍이 뚫어지고 검게 변색되어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흉측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뇌일봉의 시선이 자신의 더럽게 변한 옷자락에서 바닥으로 이동했다. 조금 전에 그가 서 있던 땅바닥에는 다섯 개의 혈광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혈광이 아니었다. 정체가 드러난 혈광은 다름 아닌 다섯 마리의 붉은 뱀이었다. 붉은 뱀들은 크기가 어른의 손바닥만 하고 굵기가 새끼손가락만 했는데, 하나같이 머리가 박살난 채 질펀한 피바다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추악한 노파가 붉은색 주머니에서 집어던진 것은 놀랍게도 혈륜이 아니라 다섯 마리의 붉은 뱀이었다.
추악한 노파가 처음에 평범한 혈륜을 사용했기 때문에 뇌일봉은 상대의 공격이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방심을 했다가 하마터면 커다란 낭패를 당할 뻔했다.
그 붉은 뱀은 비단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뿐 아니라,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장력의 틈새를 파고들 만큼 영특했고, 게다가 그 핏물은 옷을 녹여버릴 정도의 강력한 독성(毒性)을 지니고 있으니 실로 귀물(鬼物)이라 할 만했다. 단지 핏물만으로도 이와 같을진대, 그 붉은 뱀에게 물리기라도 했다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뇌일봉은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지만, 강호상에 이런 기이한 모양의 뱀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나 상원건은 그 뱀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안색이 경직된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홍선사(紅線蛇)…! 이제 보니 당신은 삼색귀파(三色鬼婆) 호용(呼容)이었구려.”
추악한 노파는 상원건이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자 의외인지 독사 같은 눈초리로 그를 힐끗 노려보았다.
“이곳에서 노신을 알아보는 놈이 있다니…네놈은 누구냐?”
상원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같은 무명소졸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겠소? 그나저나 당신은 신강의 오독동(五毒洞)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안 거요?”
“크헤헤…무명소졸이라는 놈이 아는 것도 많구나. 오독동은 물론 노신의 편안한 안식처이지만 이번에 모처럼 중원의 바람을 쐬러 나왔지. 너도 노신의 삼색사(三色蛇) 맛 좀 볼 테냐?”
그녀가 히죽히죽 웃으며 자신의 주머니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상원건은 황급히 뒤로 삼장이나 물러났다.
“나는 아직 그럴 담량이 없소.”
상원건은 감숙성에서 오랫동안 비룡객이라는 명호로 활약해 온 뛰어난 고수였다. 평소에 성격이 침착하고 아는 것이 많아서 좀처럼 남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상원건이 노파의 장난 같은 말 한마디에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나자 중인들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삼색귀파 호용은 비록 신강에서도 오지(奧地)인 오독동에서 주로 기거하여 중원에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강과 청해를 비롯한 서장 일대에서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칠 만큼 무시무시한 명성을 날리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비단 무공이 괴이무쌍할 뿐 아니라 기물(奇物)들을 자유로이 조종하여 더욱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고 있었다.
그녀가 키우는 많은 기물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삼색사였다. 삼색사란 홍선사(紅線蛇)와 황
관사(黃冠蛇),청설사(靑舌蛇)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비단 맹독(猛毒)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무공의 고수라 해도 막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서장의 최고 고수들인 십육사(十六邪)에도 속해 있었으며, 그 서열은 구위였다.
상원건은 그녀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뇌일봉과 진산월에게 빠른 어조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호용은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에 괴이한 미소를 지은 채, 중인들이 놀라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행동은 마치 상원건의 설명으로 중인들이 자신의 위명을 알게 된 것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호용의 정체를 알게 되자 뇌일봉은 오히려 격탕되었던 가슴이 진정된 듯 부리부리한 호목에 신광을 번뜩이며 호용을 쏘아보았다.
“흥! 곧 무덤으로 들어갈 할망구가 가만히 집에서 관(棺) 속으로 들어갈 준비나 하고 있을 것이지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노부에게 덤벼들다니…. 그까짓 시시한 뱀 몇 마리를 믿고 중원에서도 행세할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이냐?”
호용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한 줄기 붉은 빛이 떠올랐다.
“시시한 뱀 몇 마리라고? 제법 힘 좀 쓸 것 같아서 귀여워해 주려고 했더니 아가리를 함부로 놀려서 밥맛이 떨어지는구나. 어디 노신의 귀염둥이 맛 좀 봐라!”
호용의 양손이 붉은 주머니와 노란 주머니를 동시에 움켜쥐었다.
이를 본 상원건이 바짝 긴장하여 소리쳤다.
“조심하십시오, 뇌선배. 그녀의 황관사는 홍선사보다 몇 배나 더 무섭습니다.”
“낄낄…남 걱정하지 말고 네놈 목숨부터 신경 써라!”
호용의 양손이 주머니 속을 빠져 나왔다. 그와 함께 뇌일봉의 앞가슴을 향해 세 개의 황선(黃線)이 그려졌고, 상원건에게도 다섯 개의 혈광이 쏘아졌다.
뇌일봉은 홍선사로 인해 한 차례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큰소리를 쳤으면서도 이미 양손에 가득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세 마리의 누런색 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벼락 같은 호통과 함께 오른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감히 뱀 몇 마리 따위로 노부를 상대하려 하다니!”
꽈릉!
주먹이 쥐어지며 앞으로 내밀어지는 간단한 동작이었는데도, 우레와 같은 굉음이 터지며 한 줄기 막강한 압력이 불기둥처럼 세 마리의 뱀을 향해 몰아쳐 갔다. 그가 뻗은 일권(一拳)의 위력은 그야말로 가공해서, 허공을 날아오던 세 마리의 뱀이 그 권세를 피하기 위해 마구 요동을 쳤으나 오히려 더욱 가운데로 몰리며 전진하는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뇌일봉이 펼친 것은 그가 가장 자신하는 진악신권으로, 비록 뇌일봉이 칠성(七成)의 공력만을 사용했지만 바위를 먼지처럼 으스러뜨리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 마리의 뱀은 홍선사처럼 가늘고 길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 부분에 오톨도톨한 닭 벼슬 같은 주름이 잡혀져 있었다.
얼핏 보면 마치 머리에 작은 관(冠)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뱀이 바로 황관사로, 그 독성은 홍선사를 몇 배 능가할 뿐 아니라 빠르고 영리해서 웬만한 장력(掌力)이나 검기 속은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영물(靈物)이었다.
하나 황관사가 아무리 영악하다 할지라도 뇌일봉이 펼친 진악신권의 권세에 갇히자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황관사는 그 권세를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갈수록 진악신권의 위력이 강해져 종내에는 허공을 채 반도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파앗!
황관사가 권세의 막강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가며 시뻘건 핏물이 사방으로 튀겼고, 느끼한 피비린내가 사위를 진동시켰다.
장력을 날려 홍선사를 물리치고 있던 상원건이 이 광경을 보고 안색이 대변해 소리쳤다.
“뇌대협, 숨을 멈추십시오. 그 냄새를 맡으면 안 됩니다.”
뇌일봉은 단 일권에 세 마리의 황관사를 피떡으로 만들고는 득의해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급히 숨을 멈추었다. 하나 이미 한 줄기의 비린내가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비린내를 맡자 뇌일봉은 머리가 어찔해지며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겨우 한 줌의 냄새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대체 저 할망구의 뱀은 얼마나 지독한 독성(毒性)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뇌일봉은 재빨리 공력을 운기(運氣)하여 독기를 몰아내는 한편 호용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들이마신 양이 워낙 경미하여 공력을 일주천(一週天)하는 것만으로 독기를 몰아낼 수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홍선사보다 황관사의 독기가 세배나 강하고, 황관사보다 청설사의 독기가 세 배나 강하다는데…. 저 할망구가 청설사를 쓰는 날에는 뜻밖의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구나.’
정말 두려운 것은 호용이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는 뱀들을 마구잡이로 뿌릴 경우였다.
뇌일봉은 그렇다 치고, 무공이 약한 몇몇 사람들은 참변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뇌일봉은 호용이 청설사를 풀어놓기도 전에 단 일격에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을 확실한 자신도 없었다. 그녀와 정면 격돌한다면 패할리가 없겠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그녀의 신법으로 보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뇌일봉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망설이고 있자 호용은 특유의 징그러운 미소를 날리며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호호호…이제 슬슬 노신이 두려운 생각이 드느냐?”
뇌일봉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왜 이곳에 숨어서 노부를 암습했는지 그 이유나 밝혀라.”
“이유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이유. 너희들이 하필이면 노신이 있는 이곳으로 온 것이 잘못이지. 너희들의 재수 없음을 탓하는 게 좋을 거다.”
하나 뇌일봉은 그녀를 비롯한 맹파와 죽립인들이 자신들을 암습한 것이 결코 그녀의 말처럼 우연히 벌어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더 추궁해 봤자 바른 대답을 듣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뇌일봉은 재빨리 장내의 상황을 살피며 생각을 굴렸다.
맹파와 임영옥은 여전히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고, 응계성과 낙일방 등도 죽립인들을 잘 막고 있었다.
문제는 뇌일봉에게 혼쭐이 났다 호용의 도움으로 무사히 살아난 두 명의 죽립인들이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나머지 일행을 노리고 있었는데, 평상시라면 그다지 걱정할 일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진산월은 오른손을 다쳐 아직 남과 싸울 수 없는 상태였고, 상소홍은 무공이 워낙 달려 혼자의 힘으로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동중산은 진산월을 지키고 있고, 상원건 또한 상소홍을 돌보랴 자신을 공격하는 홍선사를 막아내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뇌일봉은 결국 호용은 자신이 쓰러뜨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럴 때는 검(劍)을 익히지 않은 게 후회가 되는군.’
뇌일봉은 맨손으로 오랫동안 강호에서 행세해 왔고 남과 싸우는 일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하나 호용이 가지고 있는 뱀들은 맨손으로 상대하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뱀을 상대하는 데는 검이나 도(刀) 같은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손에 익지도 않은 검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뇌일봉은 오른손으로는 진악신권을, 왼손으로는 벽력지공의 기운을 끌어올리고 자신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호용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녀와 자신의 거리는 삼장. 그 거리가 이장 이내로 좁혀지면 뇌일봉은 주저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최대한 빨리 그녀를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최악의 경우,한손을 희생해서라도 가급적 빨리 그녀를 쓰러뜨리는 것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호용도 뇌일봉의 기세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조금 전과는 달리 신중한 모습이었다. 가볍게 늘어뜨린 그녀의 양손은 허리춤에 달린 세 개의 주머니를 연방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 중 어느 쪽 주머니를 사용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섭게 노려본 채 조금씩 서로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손에는 어떠한 병기도 쥐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다른 어떤 살벌한 격전보다도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뇌일봉이었다.
뇌일봉은 그녀와의 거리가 두장으로 좁혀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력을 다해 그녀에게로 돌진해 가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던 것이다.
꽈르릉!
전력을 다한 만큼 그의 공격은 무서운 것이었다. 벽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호용의 전신은 뇌일봉의 가공할 권세에 휩싸여 태풍 속의 나뭇잎처럼 위태로운 신세가 되었다. 호용은 설마 뇌일봉의 공세가 이토록 빠르고 강력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며 신형을 허공으로 띄워올렸다.
하나 그녀의 몸은 마음 먹은 대로 민첩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단 뇌일봉의 권세에 휩쓸리게 되자 상상도 못했던 압력이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악신권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호용은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빨간 주머니와 노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던 양손을 빠르게 빼내들었다. 일곱 마리의 홍선사와 다섯 마리의 황관사가 허공을 자욱이 수놓으며 뇌일봉을 향해 날아갔다.
그 와중에 호용의 손이 재빠르게 다시 파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뇌일봉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이얍!”
뇌일봉은 우렁찬 호통과 함께 숨겨두었던 왼손의 손가락으로 다섯대의 벽력지공을 내갈겼다.
파팟!
홍선사들은 진악신권의 막강한 권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채 일장도 날아오기 전에 그대로 몸이 터져버렸다. 그와 비슷한 순간에 다섯 마리의 황관사도 벽력지공에 머리를 격중당해 사방으로 진한 피비린내와 핏물을 튀기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실로 놀라운 위세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뇌일봉은 황관사의 독기가 담긴 냄새에 대비해 이미 숨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호용을 향해 날아가며 진악신권의 두 번째 권세를 질풍같이 내뻗었다.
콰르르릉!
주위가 마구 뒤흔들리며 도저히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굉량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호용은 머리를 산발한 채 마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권세를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녀의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은 점차로 강해지고 있었다.
“아악!”
마침내 그녀는 구슬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삼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쿵!
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진 그녀는 이내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입과 코로 핏물이 뿜어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고 풀어헤쳐진 머리는 여기저기가 뽑혀져 그야말로 꿈에 볼까 무서운 흉칙스러운 몰골로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입가를 비틀며 괴이하게 웃어대고 있었다.
“크헤헤…네 놈도 이제 끝장이다….”
울컥!
다시 그녀는 입으로 한 사발의 검은 피를 토해냈다. 하나 그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 듯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비수처럼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뇌일봉은 막 그녀를 향해 다시 진악신권을 휘두르려다 이 광경을 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진악신권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그녀가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할망구. 이번에는….”
뇌일봉의 음성이 갑자기 끊기며 그의 몸이 벼락 맞은 고목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아앗! 뇌대협!”
중인들 틈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그 경악성은 이내 참담한 신음으로 변해 버렸다.
“으음….”
바닥에 쓰러진 뇌일봉의 허리춤을 뚫고 하나의 물체가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물체는 너무 가늘어서 마치 하나의 청색 실을 보는 것 같았다. 하나 꾸불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그 물체는 실이 아니라 뱀이었다.
그 뱀은 특이하게도 눈도 달려 있지 않았고, 코도 없었다. 단지 푸른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입만 뚫려 있을 뿐이었다.
온몸이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짙은 청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는 그 뱀은 뇌일봉의 허리부근 옷자락 사이로 빠져 나오더니 빠른 속도로 호용을 향해 다가갔다.
호용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면서도 입을 벌리고 웃었다.
“호호호…어서 오너라, 나의 귀염둥이야.”
그녀는 그 청색 뱀을 손으로 잡아서 입술을 맞추더니 다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파란색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중인들은 그 뱀이 삼색사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청설사임을 알고는 표정이 침통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