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우리나라는 한이 맺힌 나라입니다. 한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것이 없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귀신이야기도 알고 보면 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한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못 배워서 가진 것이 없어서 출세를 하지 못해서, 이러한 것이 한으로 남아서 자녀들에게 그 한을 풀어달라고 악착같이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또 자식이 그 한을 풀어 주지 못하면 그 손자에게까지 한을 이어주게 되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은 이 한이 쓸모없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한이라는 것이 등장합니까? 세상에 대한 욕구불만입니다. 자기가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한이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초가삼간도 천국인데 그러한 환경이나 내 처지가 불평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신령한 복에 대하여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복을 뒤집어 쓴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복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복만 해도 너무도 엄청나게 때문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 복을 세상에서 써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이 신령한 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4절에 보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 라고 합니다.
이 신령한 복을 바울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했는데 그것이 언제부터라고 합니까? 창세 전이라고 합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아들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 사건이 어쩌다가 된 우연한 일인 것처럼 너무나 쉽게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쉬운 것이 그리고 간단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서부터 예정되어 온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죄악에서 지옥에서 건져내시는 이 작업이 내가 태어날 때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저 창세 전부터 계획되어 왔던 것이며 준비되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어디로 보나 별 볼일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는데 내가 한이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 앞에 원망하며 불평할 수 있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습니까? 왜 신자들이 이 세상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것 때문에 기죽지 아니하며 사람들이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멸시해도 기죽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것 때문에 자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그러면서도 왜 예수를 전하며 살았습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찬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여서 예정해서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 되게 하신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감옥이 불평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억울한 것로 치자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아무런 죄도 없이 옥에 갇힌 바울이 억울하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곗돈 떼이고 사업이 안되어서 부도난 우리가 억울하겠습니까? 자식이 말 안 듣고 신세가 처량하다고 울고 있는 우리겠습니까? 이것은 도사 앞에서 요령을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부심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돈을 사랑하고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고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제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일급비밀 이 복음을 공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감격스러워서 찬송하고 야단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할 문제는 있습니다. 예정론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를 로버트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때 계획을 갖고 하시고 그리고 그의 일을 그의 의지를 갖고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식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십자가 사건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몽땅 하나님이 그의 계획 속에 갖고 계셨던 것인데 이제 현실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선택을 이야기해야 하고 또 예정론을 이야기해야 할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다가 신앙의 기초를 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신앙의 기초를 두는 것입니다. 즉 무슨 말이냐 하면 창세 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천국까지 붙들고 가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흔들리고 나는 좌절하고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며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믿었다가 말았다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내가 원해서 이러한 복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얼떨결에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때에 자기처럼 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을 구원해 나가시고 이렇게 옥에 두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에 감격하였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좌절케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한스럽게 만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사랑을 보십시오 그 은혜를 보세요 너무도 엄청나기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이 탁 트일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보십시오. 눈을 뜨십시오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하나님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하시면 여러분들은 아마 세상이 시시해 보일 것입니다. 한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